피나 바우쉬
요헨 슈미트 지음 | 을유문화사
새로운 춤의 억척어멈 : 어느 기념비적인 인물에 대한 개인적인 접근(* 억척어멈은 독일의 현대 극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Bertolt Brecht, 1898~1956)의 희곡『억척어멈과 그녀의 자식들』의 주인공이다)
내가 그녀에 관해 책을 쓸 것이라는 사실에 피나 바우쉬(Pina Bausch, 1940~)는 그다지 마음이 끌리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작품이 아닌 사생활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야단법석을 싫어한다. 하지만 그녀는 단 한 순간도 나로 하여금 그런 느낌을 받게 만들지 않았다. 리히트부르크는 예전에는 영화관이었다. 시에서 이미 여러 해 전부터 그것을 탄츠테아터 부퍼탈(Tanztheater Wuppertal)의 연습공간으로 임대해준 것이다. 안무가 피나 바우쉬의 지난 20년 동안의 모든 작품이 여기에서 탄생했다. 리히트부르크는 부퍼탈-바르멘 중심지에 있는 오페라극장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통행량이 많은 거리에 자리잡고 있다. 텔레비전 방송일을 하던 1970년대에 나는 언제나 리히트부르크에 앉아 연습하는 광경을 지켜보곤 했다. 우리 둘 다 기억하는 마지막 방문은 당시로서는 간행된 지 얼마 안 된「F. A. Z.」에 쓸 르포르타주 때문이었다.
10여 년 전 처음 만난 이래로 피나 바우쉬는 외관상으로 거의 변하지 않았다. 언제나 그렇듯이 그녀는 온통 검은색 복장을 하고 있었다. 길고 짙은 머릿결은 말꼬리처럼 묶여 있었는데, 나는 처음으로 거기에서 새치를 본 듯도 하다. 이 여성안무가는 화장을 하지 않는다. 성모 마리아를 닮은 갸름한 얼굴은 핏기가 없고 정신적으로 고상한 느낌을 주며, 짙은 눈은 맞은편의 것을 진지하게 탐구하듯이 바라본다. 그녀는 천천히 그리고 차분하게 말한다. 그녀의 방식이 그러하듯이 이따금씩 망설이듯, 하지만 소심하게 뒤로 물러나는 법은 없이. 토요일이던 이날 아침 10시에 피나 바우쉬는 초연되기까지는 아직 두 달 조금 넘게 남은 자신의 새로운 작품을 연습하기 시작했다. 그녀가 평생 동안 자기 앙상블의 공연을 놓친 적은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였다. 무엇 때문에 매번 공연 때마다 쪼그리고 앉아 있는지는 그녀 자신도 정확히 알지 못한다. "아마도 나는 나 자신이 부적이라고 생각하나 봐요. 작품, 앙상블, 나, 이것들은 모두 다 연관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내가 거기 있을 수밖에요. 다른 사람들은 무대 위에 있지요. 왠지는 몰라도 나는 그것이 내가 공연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아요."
피나 바우쉬의 무용작품들이 관객들에게 야기하는 당혹감에는 필자가 보건대 두 가지 이유가 있다. 그 하나는 작품들의 주제 선정에 있다. 그것들은 사랑과 두려움, 그리움과 외로움, 좌절과 공포,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그리고 특히 남성적인 표상들로 만들어지고 조직된 세계 속에서 남성들에 의한 여성들의 착취), 어린 시절과 죽음, 기억과 망각 등이다. 최근에는 환경오염과 파괴에 대한 염려가 덧붙여졌다. 또 다른 이유는 누구나 느낄 수 있는 가혹함에 있다. 작품이 다루는 갈등들은 변조되거나 조화롭게 만들어지지 않고 곧이곧대로 전달된다. 그녀는 판에 박힌 삶과 정신적인 나태를 중단하고, 몰인정하게 굴기를 때려치우고, 서로 믿고 존중하고 배려하고 동반자가 되기 시작하라고 쉬지 않고 요구한다.
이것 좀 봐, 뱀인간이야 : 수업시대 - 에센과 뉴욕피나 바우쉬의 경력은 언제부터 시작된 것일까? 1977년 초여름에 프랑스 낭시에서 열린 연극페스티벌 때 탄츠테이터 부퍼탈이 초청공연을 한 것과 더불어? 1973년 가을, 피나 바우쉬가 걱정으로 몸을 떨며 머뭇거리면서도 매우 확신에 차서 부퍼탈 무대의 발레단장직을 맡았을 때? 1969년 여름, 이제 겨우 두 번째 무용극인〈시간의 바람 속에서Im Wind der Zeit〉로 스물아홉 살의 이 여성안무가가 쾰른 안무경연대회의 일등상을 거머쥐었을 때? 1960년 초엽, 우수상으로 무장한 이 스무 살짜리 에센 폴크방 학교 졸업생이 독일학술교류처(DAAD)의 장학금으로 좀더 깊이 있게 공부하기 위해 뉴욕(그녀는 거기서 2년 반 동안 머물게 된다)으로 갔을 때? 아니면 고향 졸링겐에서 발레선생이 한 발을 목덜미 뒤에 얹고 몸을 멋지게 똬리를 튼 어린 그녀의 모습을 보고 "아니, 이거 뱀인간이네"라고 평해 주었던 바로 그 순간에 어쩌면 이미?
여관집 주인의 어린 딸을 무척이나 자랑스럽게 만들어 주었던 그 칭찬은 짐작컨대 앞으로 올 모든 것을 위한 자극이 되었을 것이다. 연습, 학업, 먼 곳으로의 유학, 자신의 환상을 시험해보기, 춤을 통한 의사소통을 위한 새로운 언어의 탐구, 새로운 동작과 형식과 구조들의 고안, 예술적 경계의 초월과 예술적 장벽의 파괴, 그리고 마침내 새로운 무용예술의 정의가 그것들이다. 그것은 전통주의자들을 기겁하게 만들고 괴롭혔지만 결국에는 세계를 정복했으며, 로마와 파리, 빈과 마드리드, 뉴욕과 로스엔젤레스, 도쿄와 봄베이, 몬테비데오, 리우데자네이루에서, 그리고 마침내는 심지어 부퍼탈에서조차(부퍼탈의 관객들은 피나 바우쉬의 작품들이 보여 주었던 새로운 것에 대해서 오랫동안 유보적인 태도로 일관하였다) 환호받았다.
피나 바우쉬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무용수의 직업을 선택했다. 그것이 직업적인 성공으로 이어질지는 그때로서는 아직 가늠하기 어려웠다. 열다섯 살이 되던 해인 1955년에 그녀는 에센-베르덴에 있는 폴크방 예술대학의 무용학과에서 학업을 시작했는데, 이 과는 당시〈초록탁자〉의 유명한 안무가인 쿠르트 요스가 이끌어가고 있었다. 피나 바우쉬는 요스의 상급세미나의 지도학생이 되었다. 그녀는 요스와 그의 공동연구자인 지구르트 레더에 의해 개발된 "현대적인" 무용스타일인 "요스-레더 기법"에 맞춰 양성되고, 학업을 마칠 때에는 학위시험을 통해 자신도 이 스타일로 무용학생을 양성할 수 있는 자격을 부여받았다. 하지만 미국 무용에서는 주요 안무가들이 모두 자기 고유의 교육스타일을 발전시키고 이를 절대화했던 반면에 독일 무용가들에게는 기술과 스타일이 그다지 큰 의미를 지닌 적이 없었다. 폴크방 무용학교에서는 특정한 기술이 사사되기보다는 -이미 1920년대에,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 뒤에 드디어 본격적으로- 학생들의 개성, 상상력, 창조성이 개발되었다.
요스가 죽기 직전인 1970년대 말에 부퍼탈에서 바우쉬의 초연이 열렸던 것을 계기로 텔레비전 리포터가 요스와 바우쉬에게 이렇게 질문한 적이 있었다. 요스는 대체 바우쉬에게 무엇을 가르쳤으며 바우쉬는 요스에게서 무엇을 배웠는가? 카메라가 돌아가는 와중에 그들이 오래 생각한 끝에 의견의 일치를 보았던 바는, 이 여제자가 자신의 스승으로부터 "모종의 정직성"을 넘겨 받았다는 점이었다. 정말로 옳은 평가인 동시에 20세기 독일의 두 저명한 무용가의 겸허함을 멋들어지게 증명하는 언급이다.
학교는 젊은 무용가 피나 바우쉬를 위해 특별히 폴크방 특별공로상을 제정했으며, 그 이후로 아주 월등한 학생에게만 이 상이 수여되었다. 독일학술교류처는 그녀에게 장학금을 주어 1960년 당시 (현대) 무용예술의 메카로 명망을 날리던 뉴욕으로 보냈다. 그것은 일종의 투자였고, 그 예술적 가치는 나중에 아무리 높이 평가해도 모자랄 정도가 되었다. 피나 바우쉬는 "특별학생"으로 뉴욕의 줄리어드 음악학교에 입학했다. 뉴욕에서 30개월을 머문 뒤 피나 바우쉬는 자신의 직업상의 출발점, 즉 당시 막 예술전문대학으로 격상된 폴크방 학교로 돌아왔다. 폴크방 탄츠스튜디오는 이 신생 전문대학에 연계되어 있었으며 쿠르트 요스의 감독 아래 있는 현대발레단이었다. 이어지는 5년 동안 폴크방 발레는 피나 바우쉬에게 세계로 향하는 창문이었다. 에센-베르덴의 옛 대수도원에 위치한 대학의 연습실들, 땀이 흐르는 연습, 언제나 똑같은 스텝. 이것이 1960년대 초반에 피나 바우쉬와 그녀의 동료들의 일상이었다. 이는 아이디어가 들끓는 뉴욕에서 돌아온 사람에게는 특히나 상당히 실망스러울 수밖에 없는 일이었고, 그 실망감은 다른 분출구를 찾도록 만들었다.
피나 바우쉬의 작품이 평판을 얻은 것은, 그녀가〈시간의 바람 속에서〉로 당시에는 적어도 유럽에서는 신진안무가들에게 가장 중요한 포럼이었던 쾰른 안무경연대회에 출전했을 때이다. 실질적으로 전혀 알려지지 않은 피나 바우쉬가 일등상을 차지한 것에 무용계 전체가 크게 놀랐다. 바우쉬는 에센의 전문대학에서 무용을 가르치고, 그녀의 보살핌 아래 맡겨진 앙상블의 남녀 무용수들을 위해 일년에 한번씩 거의 대중들에 공개하지 않고 새로운 작품을 안무했다.
마침내 1970년에는〈자정 이후Nacbnull〉라는 제목의 작품이 만들어진다. 돌이켜보면 이것은 피나 바우쉬가 전통적인 모던댄스에 등을 돌리기 시작하는 작품이자, 무용에서 고전적인 모더니즘이 극복되는 작품으로 드러난다. 작은 앙상블의 다섯 여성무용수들이 -그들 가운데 하나가 솔로처럼 네 명으로 구성된 그룹에 마주선다- 해골처럼 보이는 의상을 입고 있다. 〈자정 이후〉는 마치 끔찍한 전쟁이나 핵 재앙에서 살아남은 자들이 무척이나 다급하고 예술적인 에너지가 돌출하는, 섬뜩한 죽은 자들의 무도로 의식을 거행하는 것처럼 보이는 작품이었다.
무대 위의 여성해방운동? : 새로운 춤언어1976년 여름, 부퍼탈에서의 세 번째 공연 시즌 끝자락에 처음으로 피나 바우쉬는 이제까지 이루어낸 것을 되돌아볼 정도로 힘이 생겼다고 느꼈다. 공연의 출발점은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유일한 발레 리브레토인〈소시민의 칠거지악〉인데, 이 작품은 두 자매에 관한 이야기로 이들은 둘 다 이름이 안나(Anna)이고, "루이지애나에 작은 집 한 채"를 마련할 돈을 벌기 위해 함께 미국을 유랑한다. 그러면서 그들 가운데 하나인 "안나Ⅱ"는 춤을 추고 다른 하나인 "안나Ⅰ"은 노래를 한다. "안나Ⅱ"는 창녀가 되어 몸을 팔지만, 냉철한 머리를 지닌 "안나Ⅰ"은 여동생이 순진함에서 깨어나 정신을 차리게 만들며, 그녀로 하여금 인간적인 미덕을 하나씩 하나씩 없애게 만든다. "안나Ⅱ"에게는 추락의 낙차('비극적 낙차'라고도 번역할 수 있다. 드라마 주인공의 원래 사회적 위상과 비극적 몰락 이후의 처지 사이에 느껴지는 추락의 폭을 가리키는 연극 용어)라고는 없으며, 처음부터 아예 밑바닥 인생이다. 남자들은 근엄한 짙은색 양복으로 자신들의 고귀함을 과시하며, 그들이 지배하는 세상 속에서 안나에게는 그
저 자신의 유일한 소유물, 즉 그녀의 성(性)을 내다 팔 기회만이 남겨져 있을 따름이다.
〈칠거지악〉에 이어서 〈푸른 수염. 벨라 바르토크의 오페라 '푸른 수염 공작의 성'의 녹음테이프를 듣다가〉가 나온다. 피나 바우쉬의〈푸른 수염〉에서는 모든 것이 반복된다. 음악 이외에도 장면 진행, 동작, 제스처, 무리짓기, 포즈, 문장, 단어, 톤, 음향들이 다 그러하다. 언제나 똑같은, 부드럽게 대해줄 것을 요구하는 여자의 손짓이 있고, 언제나 똑같은, 바닥 위로 밀기, 벽을 향해 달려가기, 벽을 타고 오르기가 있다. 연달아서 세 번을 푸른 수염은 신부를 바꿔가며 2인 대무(對舞)를 추며, 이것은 그가 여성들을 침대시트로 묶고 운반해 결국에는 한 의자 위에 포개 쌓아놓는 것으로 끝난다. 그러한 수단들로 상연된 이 작품은 끔찍하도록 희극적인 비극이다. 즉, 서로 결합하려는 여성들과 남성들의 시도, 진정한 결합의 불가능성, 공허해진 사귐의 관례들이 그러한 요소를 드러낸다. 난폭성으로 급전하는 부드러움, 강제, 폭력, 억압을 동반하는 사랑, 거친 성행위, 수줍은 탐색, 지나친 거리없음이나 친근함과 마찬가지로 고독함에 대한 두려움 또한 여기에 속한다.
1977년은 지금까지 피나 바우쉬의 안무작업에서 가장 창조적인 시기가 된다. 새로운 작품들이 발전해 나오는 출발점은 의심할 나위 없이〈푸른 수염〉이다. 작품은 이미지와 아이디어들로 넘쳐난다. 그리고 그 모두는 낯설고, 관객들의 익숙한 관극체험에 어긋난다. 대부분 넷, 다섯, 또는 여섯 개의 장면진행이 서로 겹친다. 무대의 모든 구석과 끝자락에서 여러 몸놀림들이 병행해서 이루어진다. 피나 바우쉬는 넘치는 환상으로 자신의 열에 들뜬 악몽을 그려내고 움직임으로 옮겨놓는다. 그녀의 작품은 재미있고 오락성이 있으며 자극적이고 감각적이며, 이따금씩은 그 뒤에 공포가 도사리고 있는, 그야말로 무시무시한 아름다움이 있다.
고생 끝에 별빛 영롱한 성공이 : 얻은 것, 잃은 것1977년 5월에 탄츠테아터 부퍼탈은 처음으로 외국으로 초청공연길에 나선다. 탄츠테아터 부퍼탈과 피나 바우쉬의 무용극들이 시대를 통틀어 가장 수요가 많은 독일의 문화수출품으로 발전하게 되리라는 사실을 당시는 그 누구도 예감하지 못했다. 실제로, 낭시에서 개최된 연극 페스티벌에서의 공연들은 초청공연 활동의 첫걸음이 된다. 적어도 독일에서는 유례가 없으며, 어떤 의미에서는 1920년대에 안나 파블로바의 세계 순회공연들을 연상시키는 초청공연 활동 말이다. 낭시에서의 공연은 빈 축제주간에 일시 방문하는 일정으로 이어진다(두 경우 모두〈칠거지악〉으로 참가했다). 가을에는 베를린, 벨그라드, 브뤼셀에서의 공연이 뒤따랐다. 그리고 1979년의 첫 달을 피나 바우쉬와 그녀의 무용수들은 인도와 동남아시아에서 보냈다. 인도여행은 이 낯설고 이국적인 나라에 대한 사라지지 않는 친근성을 바우쉬에게 남겼다. 여자무용수들이 부분적으로 나체로 등장하는〈봄의 제전〉과 〈칠거지악〉은 이미 델리에서의 공연이 관중들의 소요를 유발하였고, 뒤이은 캘커타 공연은 정치적인 선동가들이 힌두교도들을 부추겨 일어난 소동 속에 끝장나버렸다. 15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바우쉬는〈카네이션〉이라는 작품을 상연한 새로운 순회공연에서 1979년의 실수를 만회하는 데 성공한다.
자신의 첫 아시아여행 약 일년 전인 1978년 4월에 피나 바우쉬는 예술적으로 제법 위험한 모험을 감행했다. 처음으로 부퍼탈 밖에서 작품을 초연한 것뿐만이 아니었다. 그녀는 지극히 이질적인 연기자 그룹과 함께 작업하기도 했다. 독일 셰익스피어 학회(서독)는 보훔에서 개최된 자신들의 연례학회를 위해 피나 바우쉬에게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드라마〈맥베스 Macbeth〉의 연출을 위촉하였다. 물론 그녀는 이 작품을 관례적인 연극 수단들로 평범하고 단정하게 되풀이할 작정이 아니었다. 셰익스피어학회의 회원들 앞에서 펼쳐진 보훔 극장에서의 공연은 확실한 연극계 스캔들이 되었다. 셰익스피어학회의 위엄 있는 신사들은 짐작하건대 대부분 아직 단 한번도 무용극을 본 적이 없었을 것이다. 그런 그들을 그토록 노엽게 만든 것은 자유롭게, 하지만 자의적이지는 않게 셰익스피어의 모티프와 상황들을 다루는 방식이었다. 레이디 맥베스가 무심결에 내뱉는 "나 좀 구해줘."는 자신을 데려가 달라는 요구인데, 앙상블의 여성 네 명 모두가 계속해서 남자들에게 이렇게 외친다. 이는 여성들이 무기력한 척하는 것이 어떻게 남성들을 마음대로 휘둘러댈 수 있는지를 제시하여준다. 바우쉬는 셰익스피어의 도움으로 자기 자신의 주제와 자신의 앙상블의 개인의 표상들을 이미지의 세계로 객관화해내는 데 성공한다.
멋들어진 혁신 두 가지가 이전의 것들과 함께 모여서 안무가 바우쉬의 예술적인 우주를 더욱 완결시킨다. 이러한 혁신 가운데 하나는 무대미술적인 것이고, 다른 하나는 안무적인 성격의 것이다. 탄트테아터의 부퍼탈의 황금기라 할 만한 다음 몇 해 동안에는 바우쉬의 초연들에 확고한 리듬이 생겨나기 시작한다. 일년에 두 번, 초여름(대부분 6월)과 12월, 크리스마스 직전이나 직후에, 피나 바우쉬는 새로운 작품을 내놓는데, 그러한 영향이 여전히 그렇게 심각하고 부정적이라 할지라도 외적인 영향에는 거의 흔들리지 않는다.
그녀의 작품들은 인생의 동반자이자 천재적인 무대미술가, 롤프 보르칙에 빚진 바가 무척이나 많다. 1979년 5월에 초연을 한〈아리아〉는 이미 이 무대미술가를 위한 일종의 살아 있는 동안의 진혼곡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