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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의학의 역사

제임스 르 파누 지음 | 아침이슬
서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전개된 의학의 역사는 인간이 성취한 인상적인 진보의 시기 가운데서도 두드러진다. 당시는 거의 모든 병에 약이 존재하지 않았다. 개심술(open-heart surgery), 장기이식, 시험관 아기도 물론 볼 수 없었던 시대였다. 오늘날 이런 것들과 더불어 사람들은 질병과 때 이른 죽음에서 해방되었고, 노화로 인한 만성적 장애로부터 상당히 멀리 벗어날 수 있었다. 지난 50년은 독특하고도 놀라운 지적 개화開化의 시기였다. 이 시기의 치료혁명의 범위는, '열두 번의 결정적 계기들'로 살펴본 현대의학사에서 심도 있게 다루었다. 감염성 질환의 감소(술폰아미드, 페니실린, 유아면역접종), 외과수술의 확대(수술용 현미경, 장기이식, 고관절 치환수술), 암, 정신병, 심장질환, 불임 치료 등에서 이룬 중요한 진보, 진단기술의 개선(내시경, CT촬영)을 포함하여 몇몇 주제를 이해하기 쉽게 전달하기 위해서다.



제1부. 열두 번의 결정적 계기들



현대의학의 역사는 1830년대의 어느 무렵에 시작된다. 그 무렵 소수의 용기 있는 내과의들이 사혈瀉血, 하제요법, 복잡한 식이요법 등 사실상 그들이 해 온 모든 것이 소용없는 것임을 인정했다. 이 같은 현대의학의 역사가 시작되고 있을 즈음, 의사들은 잘못된 것을 진단하는 일에 매우 능숙해져 있었다. 그들은 병력을 살피고, 진찰을 하고, 피와 소변에 대해 몇 가지 간단한 검사를 했다. 하지만 '치료절차'는 이미 내던진 뒤였고, 특효약을 놓아두었던 선반 위는 사실상 거의 비어 있는 상태였다. 인간 질병의 패턴은 그전의 2천 년간 거의 변하지 않았다. 급성이든 만성이든 감염성 질환의 문제가 의료행위의 대부분을 지배하고 있었다. 이 책의 목적은 그 다음에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기술하는 것이다. 일종의 사건 연대기로서, 현대의학에서 볼 수 있는 '열두 번의 결정적 계기들'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 보자.



1941: 페니실린

페니실린의 발견은 현대 치료혁명의 열두 가지 결정적 계기 가운데 첫 번째로 등장하며, 또한 가장 중요하다. 페니실린과 그 뒤를 따라 생겨난 다른 항생물질들로 패혈증, 수막염, 폐렴 같은 치명적인 급성감염증 뿐만 아니라 관절, 뼈 등에 생기는 만성감염증을 치료할 수 있었다. 대중의 상상력 속에서 항생물질은 거의 무한한 은혜를 베풀어주는 과학의 가능성을 상징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을 완전히 인간적 노고의 대가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곧 보겠지만, 페니실린의 발견은 과학적 추론의 산물이 아니었고, 그보다는 오히려 우연의 산물이었기 때문이다(페니실린의 발견은 흔히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일어나기 힘든 일이었다). 게다가 항생물질의 핵심에는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가 있었다.

1941년 2월 12일, 43세의 경관 앨버트 알렉산더는 페니실린으로 치료받은 최초의 환자가 되었다. 2개월 전 알렉산더 씨는 장미나무에 얼굴을 긁혔다. 무척 사소한 상처였지만, 긁힌 자국은 패혈증을 일으켰다. 그의 얼굴은 곧 고름이 흘러나오는 농양으로 뒤덮였다. 결국 감염 때문에 수술로 왼쪽 눈을 제거해야만 했다. 이제 똑같은 식으로 오른쪽 눈도 들어내야 할 위기에 처해 있었다. 그에게 페니실린을 투여하기로 결정한 의사 찰스 플레처Charles Fletcher는 그 뒤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페니실린 치료는 3시간 단위로 반복되었다. 나는 알렉산더 씨의 소변을 모두 받아, 아침마다 자전거를 타고 병리학 실험실에 가져다 주었다. 소변으로 함께 배설된 페니실린을 추출해낸 뒤 이를 환자에게 다시 사용하기 위해서였다. … 그는 매우 좋아졌다. 그의 얼굴과 머리, 오른쪽 눈에 났던 농양도 뚜렷하게 사라졌다." 하지만 2월 17일 여섯째 날, 페니실린이 바닥났다. 불가피하게 그의 상태가 악화되었으며, 한 달 뒤 그는 사망했다.



그 사건은 후대의 뇌리 속에서 중대한 전환점으로 남게 되었다. 이 순간부터 인간은 아무런 '목적도 없는' 박테리아의 악의에 굴복하는 일(장미나무에 긁힌 상처 때문에 죽는 것보다 더 '목적 없는' 죽음은 없을 것이다)에서 벗어나, 과학의 힘을 통해 그것을 파괴시키는 능력을 얻게 되었던 것이다. 이 이야기의 시초는 그로부터 10여 년 전 알렉산더 플레밍Alexander Fleming이 런던 세인트 메리 병원의 실험실에서 우연히 관찰한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플레밍은 미생물학자였다. 1928년, 여름휴가에서 돌아온 플레밍은 곰팡이(나중에 페니실리움 노타툼으로 알려지게 된다)가 포도상구균의 성장을 막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이 곰팡이(그는 이를 페니실린이라고 불렀다)의 추출액이 모든 미생물의 성장을 억제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밝혔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다른 과학자들은 플레밍과 같은 결과를 얻을 수 없었다. 플레밍의 조수로 일한 적이 있는 로널드 헤어Ronald Hare가 이 문제를 면밀히 조사한 것은 1964년이 되어서였다. 포도상구균이 섭씨 35도 정도에서 가장 잘 자라는 반면, 페니실린은 그와는 다른 온도(섭씨 20도)에서 성장하는 것을 알아냈다. 그러면 대체 어떤 일이 일어났던 것인가? 페니실리움 곰팡이는 흔히 생겨나는 균주菌株가 아니라 아래층의 실험실에서 공기를 타고 올라온 희귀한 균주였다. 아래층의 실험실에서는 균류 전문가인 라투슈가 작업을 하고 있었고, 분명 일부의 포자가 플레밍이 포도상구균을 배양하고 있던 페트리 접시에 흘러들어갔을 것이다. 우연한 일이었지만, 결과적으로 이 희귀한 균주가 다량의 페니실린을 만들어내게 된 것이다. 헤어는 1928년 7월 말 런던의 기상학 자료를 살펴본 뒤, 플레밍이 휴가 중이던 9일 동안 예외적으로 날씨가 서늘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이런 서늘한 날씨가 페니실리움 곰팡이의 성장에 이롭게 작용했고, 그 뒤 기온이 올라가면서 포도상구균의 성장이 촉진되었던 것임이 분명했다.



플레밍은 스스로 생각하고 있던 것보다 훨씬 큰 행운을 손에 쥐었지만, 그는 공식적으로 페니실린의 임상적 연구를 포기했다. 그 화학물질을 감염성 질환의 치료제로 쓰기에는 너무 독성이 강할 것이라는 당시의 지배적인 견해 탓이었다. 이것은 '의학에서 선입견이 어떻게 상상력의 숨통을 막고 진보를 방해하는지 보여주는 좋은 사례'라고 하겠다. 그리하여 옥스퍼드의 하워드 플로리Howard Florey와 에른스트 체인Ernst Chain이 페니실린의 신기에 가까운 특성을 재발견하기까지는, 10년이나 더 지나야 했다. 이제는 플레밍이 실패한 지점에서 어떻게 플로리와 체인이 성공할 수 있는지 명확하게 밝혀져야 할 것이다. 플레밍 같은 미생물학자의 능력은 박테리아 실험을 관찰하고 해석하는 데 달려 있다. 체인 같은 생화학자의 능력은 좀더 심층적인 수준, 즉 미생물학자의 관찰사실의 기초가 되는 생화학적 기전을 밝혀내는 데 있다. 그는 페니실린을 추출하고 정제할 수 있는 능력(매우 대단한 능력이라고 할 수는 없었지만)이 있었고, 이를 쥐에 투여했을 때 그것이 분명히 '무독성'이라는 것을 밝혀냈다. 이 사실은 매우 중요했다.



1940년 8월 24일「랜싯」지에 이 실험결과가 발표된 후 플로리는 제약회사가 페니실린을 대량으로 생산하는 데 관심을 가지리라 예상했다. 쥐보다 3천 배나 큰 사람은 엄청난 양의 페니실린을 필요로 할 것이었다. 하지만 그때는 어려운 시기였다. 루프트바페(독일 공군)의 런던 공격을 시작으로, 독일군의 영국 침공이 이어진 것이다. 먼저 영국 공습을 감행한 바야흐로 영국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 모르는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 바로 이때에 플로리는 그의 실험실의 보잘것없는 자원을 이용하기로 마음먹었다. 1941년 초에 이르러 사람에게 최초로 실험할 수 있을 만큼의 충분한 페니실린이 만들어졌다. 1941년 2월 12일 찰스 프레처가 앨버트 알렉산더의 정맥에 페니실린을 최초로 주사했고, 4명의 환자를 더 치료했다. 연구가 진척되기 위해서는 훨씬 더 많은 양의 페니실린이 필요했다. 6월에 플로리는 미국으로 갔다. 거기서 그는 마침내 페니실린의 대량생산에 뛰어들 4개의 커다란 제약회사를 찾을 수 있었다. 1945년 전쟁이 끝난 뒤 플로리와 체인은 플레밍과 함께 노벨상을 공동수상했다. 그들의 공로는 페니실린의 개발에 국한되지 않았다. 그들은 어떤 원칙을 만들어냈고, 이 원칙에 따라 이후의 모든 항생물질이 발견될 것이었다.



페니실린의 발견에 뒤이은 초창기에 화학적으로 약을 합성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일었다. 하지만 플로리가 노벨상 수상 연설에서 말했듯이, 필요한 것은 많은 미생물들 가운데서 다른 박테리아들을 파괴할 수 있는 소수의 미생물들을 골라낸 뒤 강력한 항생성분을 확인하는 일이 전부였다. 따라서 항생물질이 흔히 현대의학의 승리라고 받아들여진다고 해도, 과학자들 스스로 최초의 원칙을 통해 항생물질을 발명하거나 창조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보다 항생물질은 '자연의 선물'이었다. 보통 널리 받아들여지는 견해와는 다르게, 페니실린과 그 뒤를 잇는 여러 항생물질의 이야기는 질병의 정복에 관한 과학과 합리주의의 승리를 보여주지 않는다. 플레밍에게 페니실리움 곰팡이가 지닌 항균적 특성의 발견을 가져다준 비정상적인 기온은 정말로 엄청난 우연이었다. 그리고 항생물질의 대량생산을 가져온 중요한 결정(독일의 침공이 임박했을 때 대학 실험실을 페니실린 공장으로 바꾸고자 했던 플로리의 결심)은 이성에 대한 의지의 승리였다. 한편으로, 왜 가장 단순한 형태의 몇몇 미생물에게 이런 복잡한 화합물을 만들 수 있는 능력이 주어졌고, 도대체 왜 이런 것이 존재해야 하는가 하는 의문은 풀리지 않았다.



1952: 코펜하겐의 폴리오 유행과 집중치료의 탄생

사람들이 결국 중환자실(집중치료실)에 갈 수밖에 없는 이유는 많다. 어떤 경우 환자는 열 가지 이상의 장비에 몸을 맡겨야 하는 수도 있다. 심장박동측정기, 현관 내의 가스농도를 측정하는 기계, 혈압측정기, 인공심박 조율기, 투석기 등이 그것이다. 이 기계들은 하나하나가 놀라울 뿐이다. 그리하여 이 모든 기계적 마술의 중심에는 단 한 종류의 장비가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기란 쉽지 않다. 그 장비는 폐 속으로 산소를 불어넣는 인공호흡기다. 오로지 산소만이 심장을 뛰게 하며, '시간을 벌어' 조직이 치유되고 손상된 복잡한 인체기능이 회복되도록 할 수 있다. 인간의 생리작용에서 차지하는 산소의 절대적인 역할은 최대 2백 년 전부터 알려져 있었지만, 산소가 중증환자의 생존에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는 1952년 코펜하겐에서 유행한 폴리오(회색질척수염, 척수성소아마비라고도 한다)로 인해 갑작스럽게 깨닫게 되었다.



1952년 가을 코펜하겐의 블레그담스 병원 19호 병동으로 우연히 들어가게 된 사람이면 누구나 신기한 광경에 맞닥뜨려야 했을 것이다. 두 줄로 정렬된 70개의 침상 각각에는 폴리오로 인해 움직이지 못하는 아이들이 목에 낸 절개부를 통해 빈 플라스틱 튜브를 기관氣管에 꽂은 채 누워 있었다. 이 튜브는 다른 긴 튜브에 이어져 있고 그 끝에는 고무부대가 달려 있었다. 각 침대의 곁에는 젊은 의학도가 앉아 있었다. 그들은 몇 초 간격으로 고무부대를 쥐어짰다가 폈다. 튜브를 통해 아이의 폐에 산소를 집어넣기 위해서였다. 폴리오가 퍼져 있을 무렵 1천5백 명의 의과 대학생들은 16만 5천 시간 동안 고무부대를 쥐어짜며 "최선을 다했다." 이런 결과로 폴리오의 희생자들 가운데 사망률이 90%에서 25%로 떨어졌다. 이런 치료법은 그 규모 이외에는 놀랄 만한 일이 하나도 없었다. '고무부대를 눌러' 튜브를 통해 산소를 주입하는 기술은 오랜 세월 동안 수술실에서 흔히 행해지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보조호흡assisted ventilation이 중증환자의 치료에서 중심적인 부분이 되기 위해서는, 1952년 코펜하겐에 재앙적인 폴리오가 발생하고, 이로써 커다란 사고의 변화가 일어나야 했다.



폴리오바이러스는 오염된 음식 또는 물을 통해 체내에 들어오며 창자벽을 통해 흡수된다. 폴리오바이러스는 여기서 퍼져나가 근육의 운동을 관장하는 척수의 신경을 마비시킨다. 폴리오는 대부분의 경우 여름에 발병했기 때문에 '여름의 역병'이라고 불렸다. 운이 따르면 마비는 더이상 진행되지 않고, 아이에게는 그나마 약하고 축 처진, 소용없는 사지라도 남게 된다. 1931년 하버드 대학교의 내과의사 필립 드링커Phillip Drinker가 하나의 해결책을 들고 나왔다. 그것은 철폐(iron lung, 철제 호흡 보조장치)로, 이것을 이용하면 폴리오 환자의 생명을 연장하여 환자의 신경이 회복되고 호흡기 근육의 힘이 되살아나게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바이러스는 척수를 타고 올라가 호흡기 근육뿐만 아니라 뭔가를 삼킬 때 관여하는 근육에까지 끔찍한 영향을 미쳤다.



1951년 9월 코펜하겐 대학교는 제2회 국제 폴리오학회를 개최했다. 마취의사 비오른 입센Bjorn Ibsen의 의견에 따르면, 아이들은 두뇌에 미치는 폴리오바이러스의 영향으로 죽는 것이 아니었다. 부적절한 호흡방식과 두뇌에 불충분한 산소를 공급함으로써 야기되는 말기적 증상(혈압상승, 열, 축축한 피부) 때문에 죽는 것이었다. 그의 해법은 극단적이었다. 철폐호흡기를 없애고, 올바른 호흡방법으로 모든 폴리오 환자들에게 기관절개술을 시술하는 것이었다. 기관을 절개한 뒤 손으로 직접 산소를 공급해야 했다. 이것만이 폐에 충분한 산소를 공급하는 확실한 방법이었다. 코펜하겐과 덴마크 동부의 모든 폴리오 환자가 입원해 있는 병원의 내과 과장인 라센은 입센의 이론에 대해 납득하지 못했지만, 속는 셈치고 그에게 기회를 주었다. 그리하여 의학의 역사상 가장 극적이고, 결과적으로 말할 수 없이 중요한 순간이 찾아왔다. 입센은 12세의 소녀 비키를 골랐다. 그의 이론이 옳다면, 비키를 철폐호흡기로 되돌려놓았을 때, 불충분한 호흡이 혈중이산화탄소의 양을 증가시켜 다시 온도와 혈압이 올라갈 것이었다. 그런데 입센의 이론대로 정확히 그런 일이 일어났다. 그 뒤 입센이 호흡부대를 쥐어짜자 그녀의 상태는 다시 호전되었다. 그 결과로 입센보다 라센 자신이 이제 정력적으로 이 새로운 치료도구를 활용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앞에 등장했던 의과 대학생들을 대거 참여시켰다.



인간의 손으로 움직일 수 있는 장치를 고안하는 것은 초보적인 기술에 속했다. 어쨌든 이 결과는 중대한 영향을 낳았다. 오늘날 우리는 그의 해법이 두 가지 차원에서 옳다는 것을 알고 있다. 첫 번째는 폴리오에 걸린 아이들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직접적 원인은 적절한 호흡장치로 막을 수 있다는 것이다. 두 번째로, 적절한 호흡장치는 충분히 오랫동안 유지된다면 '시간을 벌어주어' 호흡기 근육이 힘을 회복할 수 있게 한다. 그렇지만 1952년 당시에는 이 두 가지 가설이 모두 명백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조언을 구하기 위해 입센이 호출되었던 것이다. 마취의는 수술실에서 매일같이 의도적으로 쿠라레(신경근육의 이음부를 막는 독)로 환자의 호흡기 근육을 마비시킨 다음 인위적으로 호흡을 유지시킴으로써 그와 동일한 상황을 만들어냈던 것이다. 1946년 마취의 T. 세실 그레이가 쿠라레를 투약한 1천 명 이상의 환자에 대한 관찰사실을 보고했다. 세실 그레이는 근육이 쿠라레에 의해 완전히 마비되는 경우 마취의가 상황을 통제하고 환자에게는 인공호흡을 하게 함으로써 수술이 가능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런 역사적인 조망에서 입센은 부적절한 호흡이 낳는 모든 결과를 알고 있었다. 따라서 이 해법의 본질은 단순히 한 분야(마취약)의 전문적 지식을 다른 분야로 옮겨놓는 것에 불과했다.



무엇보다 큰 수술을 받고 나서 회복상태에 있는 환자들에게는 수술실을 나온 후 일정 기간 계속되는 보조호흡이 생리적 기능의 회복에 필요한 시간을 벌기 위해 더없이 중요했다. 그러나 많은 외과의들은 이에 관한 제안에 냉혹하게 반대했다. 수술 후의 인공호흡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무엇인가가 잘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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