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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대중문화 속의 전쟁

톰 헐러트 · 마르크 테르케시디스 지음 | 이룸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는 필리핀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 베트남 전쟁과 그 결과 : 전쟁관광객, 로큰롤 투사들, 그리고 대중문화로서 전쟁의 탄생




영화 <지옥의 묵시록>은 아마도 서방세계에 가장 오래도록 각인되어 있는 베트남전쟁의 모습일 것이다. 1969년에 가서야 겨우 종전되고, 평균연령 19세의 미군 병사들이 지상전에 참전했던 그 전쟁의 모습으로 말이다. 1979년,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의 이 대작은 젊은이들의 환각적인 전쟁 체험을 처음으로 보여줌으로써 전 세계에 의미심장한 인상을 안겨줬다. 이 작품은 전투에 임하면서도 머릿속에는 서핑, 마약, 로큰롤 그리고 모험 이외에는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은 지극히 개인주의적인 군인들의 전쟁담을 보여주었다. 이 영화는 전쟁의 잔혹함이나 베트남 혹은 베트남 사람들을 주제로 다루지 않는다. 이것들은 모두 근대의 서구인들이 자연과 낯선 사람들 그리고 특히 사물 그 자체와 만나는 가운데 진행되는 영혼의 드라마를 위한 무대에 불과하다.



군인에서 관광객으로

전쟁과 여행의 연관성은 아주 오래 전부터 분명하게 드러났다. 제2차 대전 당시 참전 군인들은 조국을 떠나 낯선 사람들을 접할 기회를 갑작스레 얻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독일어로 쓰인 것 중 가장 인기 있는 그리스 여행관련 책자 -1953년에 초판 발행된 에르하르트 케스트너의『감란산과 포도밭』- 가 쓰여졌고, 그 덕에 정복과 여행의 연관성이 나타났다. 케스트너가 그리스를 묘사했던 것처럼, 코폴라는 베트남을 역사와는 하등 상관이 없는 완전한 야만국가로 깎아 내렸다. 그에게 베트남은 '이탈하는 사람들'이 자아체험을 하는 껍데기밖에 되지 않았던 것이다. 베트남에서의 지상전이 정점에 다다랐을 때 그곳에는 약 50만 명의 미군들이 있었다. 귀환을 보장하고 '일시적 이탈'을 요구하는 오늘날과는 달리 당시 베트남에서의 체류는 일차적으로는 죽음 그리고 신체적, 정신적 후유증이라는 눈에 보이는 위험요소들을 동반하는 것이었다. 많은 참전용사들은 전쟁이 아주 끔찍하게 여겨졌기 때문이 아니라, 귀환 후에 겪게 될 단조로운 일상을 더 이상 견뎌내지 못했기 때문에 귀환을 무척이나 힘겨워했다.



이들은 전쟁에서 극도로 흥분되는 반反일상적인 일상을 체험했다. 베트남에서 군인들은 '지옥의 관광객들'처럼 자신들이 저지른 행위들을 종종 사진 촬영했고 사진첩에 끼워 넣고 다녔다. 마이클 헐Michael Herr 기자가 보도했듯이 그 속에서는 항상 동일한 모티브가 발견되었다. 즉, '라이터 사진'(라이터로 베트남 민간인 마을을 방화), 잘려나간 머리 사진, 죽은 어린 베트콩 소년소녀의 사진, 그리고 귀 두 개 혹은 자른 귀로 만든 목걸이를 카메라에 들이댄 미군 사진들을 떠올려보면 알 수 다. '최고의 기념품'을 수집하는 이런 행위는 유엔이 1950년대 한국전쟁에 참전한 이후로 다반사가 되어버린지 이미 오래다. 오늘날을 기준으로 보았을 때 이것은 의심할 바 없이 섬뜩한 기억의 조각들이다.

관광을 연상하게 되는 것은 간접적으로 다음과 같은 사실에서 더욱 힘을 얻게 된다. 참전한 젊은 미군들은 영화와 특히 TV를 통해 사회화되고, 스스로에게 의미를 부여하며, 인지구조적 영향을 지속적으로 받은 첫 번째 세대였다. '존 웨인 따라잡기' 현상이 자주 관찰되었고 -'듀크Duke(존 웨인의 닉네임)'는 아직 미성숙한 남성의 전형이었다- 베트남은 일종의 미국 서부 개척 시대라는 무대로 변했다. "따라오십시오, 카우보이와 인디언 놀이의 세계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한 미군 장교가 마이클 헐 기자에게 한 말이다. 전쟁 체험을 관광으로, 전쟁 인식을 영화로 본다면, 이런 식의 해석이 나올 수 있을 것이다. 즉, 미군들은 자신들과 자신들이 저지른 잔학한 행위 사이에 거리를 만들려고 했다. 그런데 그것은 당시에 새롭게 등장한 '정상적인 상태normality'인 소위 소비사회를 해외의 준 식민지 현장에 뿌리내리는 것이었다. 젊은 미군 병사들은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환각적인 환경 위에 카니발풍의 죽음의 연출로서 그리고 창녀로서의 베트남을 소비했던 것이다.



전쟁, 대중문화이자 대중의 문화

이스라엘의 군사학자인 마틴 반 크레벨드는 그의 저서 중 많은 주목을 받고 있는『전쟁의 미래』에서, 전쟁이란 모방하는 것이 가장 큰 역할을 하는 인간의 활동이고, 특히 약자와 강자간의 전쟁에서는 '주고받는' 형식의 학습과정이 진행된다고 지적했다. 즉, 전쟁을 치르는 동안 양자는 자신들의 전략방식과 사용도구 그리고 도덕성을 상대편 상황에 동화시키고 얼마 후에 결국 양자는 더 이상 구분할 수 없을 만큼 비슷해진다는 것이다. 양자 중 더 강한 쪽에서의 모방 과정에 관해서는 코폴라의 영화가 크레벨드의 원론적인 설명보다 훨씬 더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분명 미군들은 그들의 적을 흉내낸다. 그들은 물론, 적의 어떤 실질적인 본질에 다가갔던 것은 아니다. 결국 미군 병사들은 자신이 만들어낸 그들만의 적에 대한 상像을 모방했던 것이다. 그러나 크레벨드가 전쟁이 장기화될수록 점점 피아彼我간의 경계가 모호해진다고 했던 반면, 미군에게 있어 허상의 모방행위는 지속적으로 문제점이 되었다. 밀라이 학살사건 이후 살인하면서 느끼는 쾌감이나 야만적 행동은 그 끝을 맞았다. 현지 언론이 문명 그 자체로서 양심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현지 언론은 미국에게 이 전쟁을 수행하는 동안 인간성과 도덕성을 보이라고 요구했다.



미군과 북베트남군은 두 극단으로 표현되었다. 한 편에서는 환각과 로큰롤 가사 속에서 자신들의 경험이 표출되는 군대가, 그리고 다른 한편에는 전쟁을 마땅히 치러야 할 희생과 노고로 간주하는, 그런 군대가 맞버티고 있다. 전쟁이라는 예외적 상태가 쌍방의 적에게 이렇듯 다른 의미를 지니게 했던 것이다. 즉, 약간은 흥미로운 일상의 타파가 바로 그 일상을 회복하기 위한 전쟁과 대립되어 있었다. 베트남인들은 그냥 자기들을 혼자 내버려두길 바랐고 조용히 살기를 원했던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전쟁은 우리가 '대중문화로서의 전쟁'이라고 부르는 두 개의 현장으로 나뉜다. 미군 측에서 전쟁은 반 문화로 인식된다. 즉 실제 체험과 전형적인 경험이 완전히 분리될 수 없는 현장인 것이다. 현장 리포트, 책, 영화들에 묘사된 미군병사들의 경험과 전쟁의 전형들을 보면 반 문화로서의 전쟁이 더욱 명백히 드러난다. 사진기자 그리피스의 베트남 사진집 <베트남 주식회사>에는 이미 모험을 찾아 떠나는 로큰롤 부대라는 인상이 드러나 있게 된다. 이와는 반대로, 월남 해방전선과 북베트남군, 베트남 내전과 대규모 전쟁이 아닌 게릴라전, 그리고 이에 맞서 미국의 "찾아서 파괴하기" 전술로 인해 간접적으로 이 전쟁에 연루된 현지 베트남인들에게 전쟁은 대중의 문화로 인식되었다. 마오쩌둥의 '게릴라전 이론'에 근거해 호치민은 프랑스와 일본의 전쟁에서 이미 이것이 "장기적인 항전"이라는 슬로건을 내걸었다.



호치민은 "국민은 투사들이 헤엄치는 바다"라는 것이었다. 사성장군이자 부시 정권의 국무부 장관이었던 콜린 파월은 자신의 회고록에 "여기에 대한 미국의 답변은 최전선에서 대 게릴라 계획을 통해 바다 전체를 사람이 살 수 없도록 만드는 것"이라고 적었다. 물론 미국은 베트남의 일상을 완전히 파괴한 것에 대해 자국의 일상 또한 지속적으로 파괴되는 것으로써 보상받았다. 베트남전쟁의 후유증으로 대중문화라는 가면을 쓴 전쟁이 서구사회의 깊숙한 곳까지 파고들었다. 베트남전쟁은 종전과 동시에 끝없는, 끝날 수 없는 전쟁의 시작이기도 했다.



전쟁의 세계화

미국으로서는 히피족들의 시위와 반체제 문화로서의 전쟁이었고, 베트남으로서는 '대중문화로서의 전쟁'이었던 가운데, 1960년대는 해방을 추구하는 한 장면으로 기록되어 있다. 대중의 문화로서의 전쟁은 베트남전쟁에서 연원한다. 1975년 베트남전쟁이 최종적으로 끝나고 난 뒤, 이러한 형태의 전쟁은 통일과 평화와는 정반대의 결과를 낳았다. 대부분의 현장들 -특히, 미국이 닉슨 독트린의 틀 내에서 어떤 특정 정당을 지지하는 곳- 에서는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대규모의 민간인들이 모집되고 이것은 국가의 파멸로 이어졌다. 이것은 앙골라, 소말리아 그리고 아프가니스탄에서 일어났다. 이런저런 방법으로 서구의 권력이 끼어 들어간 예들은 분명히 더 있다.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베트남전쟁 당시 적군모방 전술의 새로운 단계를 시작하는 종을 울렸다. 부시가 2001년 9월 20일 하원 연설을 통해 천명한 '테러와의 전쟁'은 바로 호치민의 '장기항전'에서 나온 것이다. 서구는 이제 보이지는 않지만 점점 전 세계의 적을 상대로 한계도 없고 국제법도 적용되지 않은 끝없는 장기전에 돌입해 있는 상태이다. 이렇게 일반화된 전쟁은 대중문화적 전쟁이다. 이제 영토의 획득이나 이데올로기의 우월성 획득이 아닌, 거창하게 정의된 삶의 방식 즉, '국가정체성', 우리의 '삶의 방식Way of Life', 혹은 '문명'을 방어하는 것이 목표가 되었다.





라인하르트 장군은 '필름 시티'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 독일 연방군과 그 불가능한 미션 : 스타 군인들, 액션, 그리고 문명사회의 미래




40년 전에 미 정부는 홍수와의 싸움을 앞으로 있을 전쟁의 구실로 이용하는 것에 대해 심사숙고한 적이 있었다. 1961년 케네디 대통령이 상황을 정탐하기 위해 월트 W. 로스토우와 맥스웰 D. 테일러 장군을 베트남으로 보냈을 당시, 이들은 5,000명의 전투병력을 파병하는 것에 찬성했다. 물론 그 병력은 홍수재난 구조대 명목으로 가장된 것이었다. 1990년대에 미군은 병력투입을 합법화하기 위해 실제로 재난 구조 활동을 벌이기도 했다. 오더부르흐에서 모든 겉치레적인 말을 뒤로하고 마치 구조단체로 둔갑한 듯 보였던 연방군처럼 말이다. 그것은 완벽한 연출이었다.



오더부르흐 칠텐도르프 저지대, 1997년 여름

1997년 7월 초 강물이 불기 시작했다. 이름도 이상한 '크솔규카Xolska'라는 악천후는 우크라이나를 중심으로 집중호우를 동반하여 오더 강을 범람시켰다. 폴란드, 체코, 슬로바키아 일부를 지나 오스트리아 저지대에 이르기까지 엄청난 홍수가 오더 강과 나이세 강을 따라 형성된 독일 국경을 향해서 넘쳐 들어왔다. 각 나라 정부에서는 군대를 재난 지역에 배치했다. 오더 강변에서 사람들은 에서 표현했듯이 "자연이 잡은 멱살"에 잡혀 있었다. 7월 18일 금요일, 강물이 위협적으로 불어나기 시작하자, 특히 칠텐도르프 저지대의 작은 마을인 아우리트 주변지역과 오더 강과 나이세 강이 만나는 바로 그 지점인 라쯔도르프에 재난경보가 내려졌다. 며칠이 지나고, 그 다음 주 수요일에 예견되었듯이 라쯔도르프에서 처음으로 댐이 터지기 시작했다. 그곳에서는 이런 소문이 나돌았다. 즉, 위기 지휘본부가 프랑크푸르트와 오더부르흐를 구하기 위해 댐을 폭파시켰다는 것이다. 그러는 동안에 연방 국경수비대는 해당 마을에 대한 감시를 시작했다. 오더 나이세 국경선에서 '범법자'들을 찾아낼 때 사용하는 열 탐지기구는 이제 도둑을 잡는 데 사용되었다. 에른스트 텔만 주거지역에서 2,3킬로미터 떨어진 포겔장에서는 영웅적인 방어전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방어전은 칠텐도르프 저지대가 아니라 프랑크푸르트 북쪽에 위치한 오더부르흐에서 이루어졌다.



만프레드 슈톨페 장관은 "브란덴부르크 천 년 역사에서 최악의 홍수"라는 말을 했다. 언론은 지치지 않고 오더부르흐 역사의 보물상자 속을 파고들었다. 1997년은 제엘로브와 퀴스트린 사이 당시까지 습지였던 저지대 배수 작업이 착수되던 해였다. 그로부터 몇 년 후 프리드리히 대제는 감동적으로 이렇게 선언했다. "내가 지방을 하나 얻었다." 오더부르흐의 '식민위원회'는 1756년부터 10만 8,000모르겐(1모르겐 : 약 2에이커) 규모의 토지를 자유 정착민들에게 분배했다. 그들은 주변국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연방군은 오더부르흐에서, 좋게 말해서 국가적 임무를 완수했다. 즉, 새로운 독일 -과거와 미래를 이어주는 독일- 은 그 상황에서 방어될 가치가 있었다. 이러한 새로운 독일은 시민 사회적 프로이센의 전통을 이어받았으며, 항상 다多문화적이었으며, 이제 새로운 연방주의 편에서 협력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폭발성이 있는 독일이 아닌 그와는 완전히 다른 동쪽지역에서 발생한 홍수를 '강한 군대'가 방어해주어야 하는, 그런 독일이 되어버린 것이다.



말할 것도 없이, 오더부르흐로 연방군이 투입된 사건은 행위자들이 집단적으로 움직인 대중매체성 행위였다. 오더 강 방어전의 담론적-중개적 무대는 이미 1980년대, 특히 1989년에 만들어졌다. 이것은 동독에서 국경을 넘어 서독으로 들어왔던 난민의 물결이 있을 때마다 멈추지 않고 정계와 대중매체 분야에서 사용되었다. '오더 전선'에서의 홍수방어전으로 인한 외부의 위험으로부터 격리시키기 위한 일환으로 오더 나이세 국경은 매우 도덕적이고 합법적으로 군사화되었다. 이미 1992년 국방부에서 내놓은 '연방군의 재정립'안은 독일 영토 내에서의 병력투입 및 이민 물결의 압박에 대한 병력투입에 찬성하고 있었다.



스타 군인

연방군이 오더부르흐에서 영웅적인 행적을 남긴 지 거의 정확히 2년이 지난 1999년 7월 20일, 사민당의 게르하르트 슈뢰더 총리는 유서 깊은 장소인 베를린의 벤들러블록Bendlerblock에서 연설을 했다. 그곳은 제국이 건축한 마지막 고전주의 양식 건물로서 제국 해군청 및 사령부로 사용되기 위해 만들어진 곳이었다. 연방정부가 베를린으로 이전하자 이제 국방부는 벤들러블록에 제2의 둥지를 틀었다. 슈뢰더는 연방군이 이제 시민사회의 일부로서, '제복이 입혀진 부분'으로 가는 마지막 단계에 와 있다고 보았다. 그는 당당하게 이러한 꿈이 실현되었다고 선언했다. 그것은 승리자가 자신감에 차서 한 연설이었다. 1999년 7월 9일 유고슬라비아 연방공화국 정부는 NATO가 두 달 반 동안 공습을 감행한 이래 마침내 세르비아군이 코소보에서 철수한다는 것을 규정하는 조약에 서명하게 되었다. 그리고 3일 후에 코소보 국제평화유지군이 KFOR이 일차로 코소보에 도착했다. 그들 중에는 연방군 소속 군인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물론 이들이 세르비아군과 가졌던 생생했던 접촉은 오히려 괴롭게도 나치군의 전통을 생각나게 하는 것이었다.



발칸에서의 새로운 아우슈비츠를 막아야 한다는 의미에서 이 작전행동의 암호는 '아우슈비츠'였다. 1999년 4월 민족학살이라는 강한 주장을 견지하기 힘들어지자 루돌프 샤르핑 국방부 장관은 사진으로 증거를 제시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연방하원에 특히 원거리에서 찍은 사진을 제출했다. 누구도 거의 식별할 수가 없는 사진이었지만, 이것은 잘 계산된 과감한 행동이었다. 하필 당시 제2차 대전 동안 나치군의 범행을 증명하는 전시회가 독일 전역을 돌고 있었다. 대중 사이에서는 한 장의 사진이 상징적인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바로 1941년 4월 세르비아의 판체보에서 행해진 빨치산 처형식을 담은 사진이었다. '대독일'의 한 장교가 총탄 세례를 받고도 아직 살아 있는 희생자에게 자신의 총을 겨누고 있었다. 마지막 한 발을 발사하기 위해. 독일 시민사회가 1999년 초 오한을 느끼며 이 사진을 바라보고 있는 동안, 시민사회의 제복이 입혀진 연방군 소속 조종사들은 이러한 범행을 막기 위해, 유고슬라비아 인민군의 군공항과 다른 목표물이 있는 판체보에 미사일을 투하했다. 공격목표가 동일했던 반면, 군대의 주인공들은 대중문화의 영웅으로 부상했다. 1999년 말 <쥐트도이체 짜이퉁> 지의 주간 라이프스타일 별책부록은 전장에 투입된 군인들의 모습을 담은 엽서를 찍어냈다. 독일 연방군이 젊은 이상주의자들을 보냈던 장소 -소말리아,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마르세도니아, 알바니아, 코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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