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으로 산다는 것
전경일 지음 | 다산북스
1장 : 마흔, 나는 누구인가?
이 나이에 벌써 감원이라니?40대. 인생이란 게 참으로 만만치 않음을 알게 되는 나이가 아닌가 싶다. 스무고개 넘듯 아무리 애써 넘어도 다른 고개만 나오는, 그러다가 인생이 사십 고개 마루에서 멈추고 말 거라는 두려움이 어느 순간에 퍼뜩 드는 그런 나이. 정말 마흔은 고개를 넘나드는 나이다. 미끄러졌다가 다시 일어나 보지만, 세상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아무래도 마흔에 이른 나이라면 누구나 직장에서 한번쯤 좌절을 겪어보았을 것이다. 승진에서 누락되거나, 누군가 밀고 올라오는 바람에 닭 쫓던 개 신세가 되었다고 불평도 했을 터이고, 자기가 믿고 따르던 상사가 갑자기 밀려나면서 한순간 패장의 졸개로 전락해 버린 적도 있을 것이다. 더러는 사랑하는 아내에게도 속내를 털어놓지 않는 자신만의 외로움에 뜬금없는 눈물을 훔쳐보기도 했을 것이다. 이러다 대한민국 사십대는 꼼짝없이 갈 곳 잃어버린 떠돌이 신세가 될 것 같다. 1980년대에 일본에서 시작되고, 90년대 이후 한국에서 재현되고 있는 고용 불안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라 한다. 서구식 구조조정이 기업 혁신의 단골 메뉴가 된 지 이미 오래다. 그게 정답은 아닌 데도 말이다. 요즘 우리 또래 직장인들의 술좌석에서 빠지지 않는 단골 주제는 '갑자기 그만두어야 할 때가 오면 무얼 해야 하나'이다. 가만히 보면 이런 주제로 대화를 꺼내는 친구나, 옆에서 근심스런 표정으로 듣고 있는 친구나 별 뾰족한 대안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대한민국 사십대 전사들은 소리 없는 전쟁터에서 하루 종일, 1년 365일 전투를 치른다. 너나할 것 없이 이렇게 힘겹게 싸워야만 먹고 살 수 있는 세상이 때로는 정말 야속하기도 하다.
나이 듦의 초조함오래 전 바다낚시를 간 적이 있다. 배를 타고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사방에 안개가 자욱했다. 바람이 불면 밀려가고, 바람이 멎으면 다시 밀려오기를 수십 차례, 얼마나 오랫동안 먼 거리를 헤쳐 왔는지 모른다. 안개 지역을 벗어나자 안도의 한숨을 고르고 있는 중 선장이 하는 말이 들려왔다. "우리는 100미터도 채 움직이지 않았어요." 나는 깜짝 놀랐다. 몇 킬로미터 쯤은 족히 온 것 같은데 겨우 100미터라니... 나의 눈은 나를 속이고도 남았다.
우리는 살면서 이처럼 내 생각과 다른 현실을 많이 접하게 된다. 어느 정도는 세상사를 겪어 봤기에 안다고 하는 나이 아닌가? 그러다 보니 자가당착에 빠질 수도 있다. 따지고 보면 장님이 코끼리를 더듬듯 세상에 대해 우리가 아는 것은 극히 일부분인데 말이다. 여기엔 판단을 흐리게 하는 요소가 하나 더 있다. 나이 듦에서 오는 초조함이다. 40대에는 초조함과의 본격적인 싸움이 시작된다. 살다보면 누구나 인생이란 게 변화의 연속이란 걸 새삼 깨닫게 되는 순간이 있다. 동문회에 나가면 특히 그렇다. 언뜻 보기에 우리 나이에는 온갖 변화구가 날아오는 것 같지만, 내막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인생의 승부수가 별로 의미 없는 시기로 접어들고 있음도 깨닫게 된다. 갑작스런 퇴직과 갑작스런 죽음들이 특히 그 같은 사실을 깨닫게 해주는데, 이쯤 되면 누구나 하던 경기를 빨리 마무리 지어야 하는 상황에 이르렀다는 것을 알게 된다.
마흔은 세상을 통해 알게 된 자기 목소리를 서서히 듣게 되는 시기이다. 나이 들면 금방이라도 게임이 끝날 것 같아 갑작스런 두려움이 일기도 한다. 득점은커녕 인생의 전반전을 놓고 보면 지금 몇 골이나 먹고 있는지 알 수 없다. 사십대의 초조함은 이런 데서 온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강박관념이 머리 속을 복잡하게 만든다. '나는 어디까지 왔나? 어디로 흘러가고 있나?' 많은 일을 했다고 여겼는데 정작 손에 남은 거라곤 없다. 무엇이라고 딱 내세울 것도 없다. 그냥 바쁘게, 흐리멍텅하게 시간을 보내며 살아온 것이다. 마치 안개 속에서 겨우 100미터를 움직이고도 적어도 수 킬로를 움직였다고 믿었던 바다에서처럼 말이다. 마흔이 되니까 내 주위의 안개가 무엇이었는지 조금은 알 것 같다. 어느 시기보다 자신에 대해 가장 큰 책임을 져야 하는 나이. 자신도 몰랐던 착시에서 벗어나 이제는 나를 제대로 보아야 하는 나이. 그러다 보니 당연히 내가 가졌던 진실한 꿈의 거처를 찾아 더 늦기 전에 그 꿈을 실행에 옮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때보다도 절실하게 말이다.
마흔 증후군요즘 들어 깨달은 몇 가지가 있다. 우선 첫째로, 더 이상 나를 젊게 봐주는 사람이 없다. 둘째, 얼굴이고 몸이고, 말투고 모든 게 둥글둥글해진다. 좋게 말하면 인생의 세파에 어느 정도 단련된 것이리라. 셋째, 가끔 기억이 가물가물해진다. 넷째, 그냥 걱정이 앞선다. 이래서 나이가 들면 보수적이 된다는 말이 맞는 듯싶다. 다섯째, 가끔은 확실하게 뜨거워지고 싶다는 욕망이 속에서 인다. 그럴때 나는 용을 쓰기도 한다. 여섯째, 삶에 부대껴 한동안 경시했던 가치들, 이를테면 우정, 의리, 사랑 같은 감정이 중요하게 다가온다.
돌이켜보면 사십대는 세상의 변화 중심축에서 살아온 세대이다. IMF 시기에는 세상의 모든 언어가 '변화'에 집중되었고 직장 내 가장 큰 화두였다. 세상에 적응하고자 부단히도 스스로 바뀌어 왔는데, 정작 세상은 어떻게 변한 건지 알 수가 없다. 그렇게도 변해 왔는데 도대체 어디까지 변하라는 건지 알 수 없다. 그런데도 마흔엔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변해야 사오정을 면할 수 있다고 하니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나는 사십대다. 이젠 세상이란 곳을 좀더 믿을 만한 곳으로, 사랑할 만한 곳으로, 아이를 낳아 제대로 키울 만한 곳으로 만드는 데 조그마한 도움이라도 되고 싶다. 내가 건강하게 살려고 애쓰는 한 세상도 나를 곱게 봐줄 것이다. 정말이지 차가운 세상을 꼭 끌어안고 조금이나마 온기를 전해주고자 부단히 애써야 할 나이다. 마흔이라….
마흔, 아직도 크고 있는 나무칠순을 넘기신 어머니가 조용히 내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얘야, 작은 일에 신경 쓰지 마라. 그냥 살면 된다. 모든 일은 다 지나가는 법이니까." 학교의 문턱을 밟아 본 적이 없는 어머니는 인생을 통찰하는 지혜를 지니고 계셨던 것이다. 나이는 거저먹는 게 아닌가 보다. 당신들의 세대는 험난한 일제 시대를 거쳐 6·25와 헐벗은 1960년대 고개와 70년대 새마을 운동, 80년대 대학생이 된 아들의 데모, 90년대의 갑작스런 변화의 밀물과 2000년대의 우울함으로 점철되어 있다. "언제나 어려웠다. 누굴 탓할 것 없이 너만 바로 해라." 어머니는 어디서 그런 지혜를 얻게 되신 것일까? 어머니와 비교해 보면 배웠다는 나는 아직도 인생미숙아다. 왜 나는 어머니 세대와 달리 살며 터득한 내공이 없는 걸까? 나의 사십대는 그냥 그렇고 그런 시간뿐인가? 사십대의 고충은 경제적인 문제를 떠나서 바로 이런 데에 생각이 미치면 가슴 한 구석이 꽉 막힌 배수구 마냥 답답해진다는 데 있다. 하지만 지금부터라도 내 인생의 나머지 절반을 제대로 살아낸다면 나는 스스로 개척할 삶과 거기서 우러난 정신의 폭을 확장시킬 수 있을 것이다.
"세상엔 계속 커 가는 나무가 있다. 그게 바로 너다." 언제나 어머니 목소리는 내 주위에서 울린다. 그런 얘기를 나도 내 자식들에게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무 하나가 온전히 자라면 그 그늘 아래 여러 사람이 쉴 수 있다고 하지 않디?"
남의 상처를 들여다보는 용기 살다보니 지금껏 살며 겪어온, 잊지 못할 상처, 슬픔이나 좌절, 절망이 많았던 것 같다. 실직했을 때에는 정말 화를 참을 수 없어 세상에 대해 욕을 퍼붓기도 했다. 그러나 나이가 든다는 건 한편으론 상처를 덮어두기도 하는 것이라는 걸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더 이상 젊지 않음을 안다는 사실이 어떨 때는 힘이 되기도 한다. 모든 일에는 잃음이 있으면 얻음도 있는 법이라고 한다. 상처는 아물기 마련이다. 그러나 쉽게 치유되지 않는 상처도 있을 것이다. 그럴 때는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는 없다. 상처는 가만히 놔둘 때 오히려 스스로 치유되어 새 살로 바뀌기도 한다. 세상을 살며 누구나 상처를 받기도 하고, 본의 아니게 남에게 상처를 주기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나이가 들면 자신의 상처만 들여다보고 있어서는 곤란하다. 마흔이란 나이는 자신의 상처를 들여다보기 전에 먼저 다른 사람의 상처를 들여다보는 용기가 필요한 나이이다.
뜻밖의 손님친구 부인으로부터 뜻밖의 전화가 걸려왔다. 남편이 운명을 달리 했다는 것이다. 그 친구 나이가 마흔 세 살이었다. 자신의 아내와 아이 둘을 남기고 말없이 떠나갔다. 나는 한동안 멍하니 창 밖을 내다보다가 사무실을 나와 한강 둔치에서 한나절을 보냈다. 그나 나나 사십대였다. 마흔에는 초대하지도 않은 손님이 갑자기 찾아올 수 있다. 우리 주위의 누군가가 갑자기 쓰러지면, 내게도 곧 닥쳐올 일처럼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그렇다고 해서 뜻밖에 찾아오는 손님을 맞이할 때마다 당황할 수는 없다. 의연함을 갖춰야 한다. 우린 그럴 나이다. 어차피 손님은 찾아오게끔 되어 있다. 그러니 미리 준비해도 나쁠 건 없다. 사십대는 이처럼 피치 못하게도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서게 되는 나이다. 그러다 보니 세상으로부터도, 자신의 몸이나 마음으로부터도, 갑작스럽게 닥쳐오는 손님에 대해 잘 대처해야만 한다. 친구의 죽음을 보며 나는 살아 있는 사람의 경건함과 살아 있음의 의무를 알게 되었다. 죽음 그 자체로는 아무런 의미도 없으나 살아 있는 사람에게는 지나온 삶을 돌아보게 해주는 계기가 된다.
친구의 죽음을 겪고 악착같은 삶을 살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자꾸 든다. 친구도 죽기 전, 돌연 그런 사실을 깨달았는지 그가 남긴 일기엔 이렇게 적혀 있다. "인생이 한없이 허망하고 짧다. 이제 마흔 셋인데…"
2장 : 마흔, 자기 인생 제대로 점검하기마흔 즈음에삶과 젊음이란 영원하지 않음을 잘 알고 있다. 바로 마흔의 출발선은 이 사실을 재인식하는 데에서 시작된다. 삶은 라켓볼과 같아서 자기가 치는 대로 되돌아온다. 그런 까닭에 지금 이 순간부터 우리는 인생의 나머지 시간을 가장 열정적으로 살 수 있어야만 한다. 그러한 열정의 대가로 아름다운 노년을 되돌려 받을 수 있다. 오늘, 혼자 있는 시간에 자신이 묻어둔 꿈을 꺼내보자. 그러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거의 어김없이 자신이 원하지 않은 인생을 살아왔음을 알게 될 것이다. 어쩌면 그 때 이후로 나는 과거로부터 출발하지 못한 채 과거에 발이 묶여 있는지도 모른다. 이미 내 시간의 열차는 마흔의 역을 떠나가는데 말이다. 이제 나는 자신에 대해 가장 잘 알아야 한다. 의심할 나위 없이 나는 나를 만들어 내는 공장이다. 더불어 그 공장의 감독관이기도 하다. 내 나이 마흔, 이제 나는 내가 진정으로 원했던 것을 찾아봐야 한다. 더는 다시 오지 않을 젊음의 마지막 나날을 보내며 이 지구라는 행성에서 이렇게 살아온 것에 대해 감사해야 한다.
마흔에 미련을 갖게 되는 것셀파인 텐징 노르게이가 에베레스트 정상에 오른 것은 그의 나이 마흔이 되던 해였다. 그는 더 이상 짐꾼으로서가 아니라 죽음과 사투를 벌이며 성공한 한 인간으로서 산 정상에 우뚝 섰다. 마찬가지로 페르디난도 마젤란도 케이프 혼으로 향하는 도중에 마흔의 생일을 맞이했다. 그러고 나서 그는 큰 바다를 발견하고 '태평양'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레오 톨스토이가 『전쟁과 평화』를 완성한 것은 장장 6년간의 집필기간을 거친 사십대였다. 이 모두 마흔에 이룬 인간승리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가? 나는 마흔이란 나이를 쇠락을 향해 달려가는 낡은 마차 정도로 생각하고 있지는 않았는가? 그런 까닭에 과거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으려고 애쓴 것은 아닌가? 마흔을 아직 절반이나 남아 있는 터닝 포인트(turning point)로 보지 않고 그 자체로 온전한 나이라고 생각한 것은 아닌지 스스로에게 묻고 싶다. 그럼 앞으로 남은 절반의 삶을 어떻게 살 것인가, 어떤 가치를 추구할 것인가, 어떤 목표를 향해 나갈 것인가 이런 생각만으로도 머리가 복잡하다. 하지만 그나마 다행스러운 게 있다. 그것은 아직은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기회가 많다는 점이다. 아직 절반이나 남아 있기에 늦은 건 아니다. 그래서 나는 하프맨이다.
억울하게 나이 들지 않으려면누구나 사십대에 들어서면 분수령에 선다. 마흔은 청년과 장년을 가르는 나이다. 동시에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인생의 대변혁기를 겪어야 하는 시기다. 책임감도 크다. 그래서 마흔 고개를 넘어서는 것이 두렵다. 더 이상 머물 수가 없다. 진퇴를 결정해야 한다. 당장 찾아오는 진퇴는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찾아올 물러남과 나아감을 위해 단단히 마음을 먹어야 한다.
그러면 나이를 든다는 걸 우리는 어떤 정서와 감정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첫째로 자신을 마감하는 시간을 일찍 가져봄은 어떨까 싶다. 그러면 무엇이 부족한지, 앞으로의 사회생활을 무엇으로 채워야 하는지를 알게 되지 않을까. 둘째로는, 조금 영악해져야 한다. 우리는 세대 변화에서 구시대 질서와 신시대 질서를 잇는 가교 역할을 하는 세대다. 부모님을 모시고 사는 것이 우리의 몫이었다고 하더라도 미래의 우리는 뒷세대와 한 지붕에서 같이 살지 못할 것이다. 의존할 배후가 없다고나 할까. 셋째로는, 자기에 충실하라. 다 늙은 듯한 행세는 금물이다. 이제 누구도 나이가 많다는 이유만으로 존경하지는 않는다. 마흔의 가장은 버거운 삶의 무게에 가장 많이 지쳐있을 나이다. 그런데도 마음 어딘가에 아직도 열정이 남아 있다. 여전히 허리를 곧추 세울 수 있는 나이다.
내 나이와의 경쟁방식 얼마 전에 대학 동창을 만났다. 직장생활도 건실하고 정력적인 그 친구는 사십대 초반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야간 스키에 푹 빠져 있었다. 친구에게 스키에 몰두하는 이유를 물었다. "이런 노력도 안 한다면 내 자신이 남아나지 않을 것 같더군! 다 닳아 없어져 버릴까봐." 친구의 말로 미루어 보건대, 숨 막히는 경쟁 사회를 견뎌내기 위해선 자기 생활의 환기통을 찾아내 열어주는 게 중요하다는 것이다. 스키는 매우 활동적인 운동이다. 젊은 사람도 감당하기에 쉽지 않은 체력을 필요로 한다. 나는 그에게 스키를 즐기면서도 나이 들어서 할 수 있는 다른 운동을 익히면 어떻겠냐고 말했다. 자신만만한 친구는 내게 이렇게 대답해 주었다. "난, 아직은 아냐!" 나는 친구의 자신만만함이 반가웠다. 그의 말처럼, 우리는 아직 노년의 스포츠를 찾아야만 되는 나이는 아닐 것이다.
모든 것은 몸이 말한다. 내가 나이가 들고 있다는 것을 가장 구체적이며 실증적으로 느끼게 해준 것도 몸이었다. 수 브로더란 친구는『나이보다 젊어 보이는 8가지 방법』이란 책에서 '우리 몸은 아픔, 통증 그리고 우리가 직감이라고 부르는 막연한 느낌을 통해 끊임없이 우리에게 말한다. 우리는 몸이 우리에게 하는 말에 항상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얘기하고 있다. 늙어가면서도 정신을 늘 푸르게 하고 싶다면,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은 몸이 정신을 반듯하게 지탱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사십대는 여전히 마음이 몸을 움직일 수 있는 나이다. 이 시간을 헛되이 보낸다면 더 이상 몸은 마음의 명령을 따르지 않을 것이다.
앞으로 30년을 더 롱런하기 위해서는 우리 또래의 직장인들은 대개 이중 압박을 받기 십상이다. 회사에서는 30대의 활동성을 요구하고 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