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 이야기
러셀 셔먼 지음 | 이레
1. 게임(The Game)피아노 연주는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것이다. 넋을 잃은 사랑의 달콤한 향기뿐만 아니라 하찮은 벌레, 독사, 수증기, 심지어 은하계도 모두 피아니스트의 손안에 있다. 피아노 연주란 "건반과 관객의 영혼을 동시에 누름으로써 소리를 만들어내는 방법"이라는 앰브로즈 비어스(Ambrose Bierce)의 정의는 지금도 진리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피아노는 평범한 애정 표현 방식에는 절대로 응하지 않는 상자요, 기계며, 무심한 골리앗이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다양한 음색과 음감이 합쳐져서, 연주자와 음악의 유연성을 나타내는 하나의 소리의 프리즘을 이루어야 한다. 피아노 소리의 스펙트럼은 모든 음악적 및 비음악적 소리를 걸러내는 프리즘 구실을 한다. 다른 악기들이 내는 온갖 소리는 물론이거니와 심지어 양이 낑낑거리는 소리, 노새 울음소리, 샴페인 코르크 마개가 펑 터지는 소리, 짝사랑의 한숨 소리 등 모든 소리가 가장 단순하면서도 변화무쌍한 이 카멜레온의 손안에 있다. 피아노를 아는 것은 우주를 아는 것이다. 피아노를 마스터하려면 우주를 마스터해야 한다.
소리를 포착하는 것은 물고기를 잡는 것과 마찬가지로, 신체적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음악의 흐름과 저항을 감지하는 손의 민감성의 문제이다. 손은 유연해야 한다. 그리고 손은 서로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는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엄지손가락이 다른 손가락들과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면서 두 개의 갈퀴를 형성하고, 이것이 유연한 갈고리가 되어 소리의 스펙트럼을 샅샅이 탐험한다. 엄지손가락이 호른이 되고 비올라가 된다. 그것은 마치 휘어진 공간 속에서 수많은 물체가 멀리서 또는 가까이에서 빙글빙글 도는 것과 같고, 단단히 고정되어 있는 환상과 현실의 고정된 중심축이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것과 같다.
다섯 손가락은 똑같이 독립적이며 능률적이다. 다섯 손가락은 저마다 그 기능과 효능이 전혀 다르다. 쇼팽에 따르면, 손가락은 저마다 그 비중과 재능이 독특하며, 저마다의 특성에 따라 평가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궁극적인 음의 질감은 서로 다른 비중과 음색을 적절하게 배합하여, 변화무쌍한 다차원적 이미지를 보여주는 옅거나 짙은 소리들의 화판을 만들어냄으로써 이루어진다. 손가락 끝은 살아 있는 생명체이다. 매끄러운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피아노 건반은 생명이 없는 고체이다. 이 무심하고 냉담한 건반에 손가락 끝의 호흡과 기도와 생명력이 어떻게든 전달되어야 한다. 피아니스트는 매끄러운 건반을 더듬으며 신경이 없는 이 검은 상자를 호려야 한다.
엄지손가락이 이끄는 손바닥과 네 손가락으로 이루어진 손가락 편대는 서로 밀고 당기며 춤추는 스페인 댄서 한 쌍과 같다. 한쪽에서 일어나는 일은 다른 쪽에 즉각적인 촉매 효과를 일으킨다. 두 파트너의 밀고 당기기는 주기적으로 지속되며, 그 열정은 만들어내고자 하는 소리의 특성에 달려 있다. 엄지손가락을 다른 네 손가락과 같은 것으로 여기는 것은 고래를 물고기로 여기는 것과 같다. 둘째손가락에서 새끼손가락까지 네 손가락은 밀집 대형을 이루고 4대 1로 엄지손가락과 맞선다. 하지만 이 전투는 무승부로 끝난다.
둘째손가락은 계보와 목소리가 서로 근본적으로 다른, 손의 두 부분 사이의 연락을 맡고 있다. 양쪽과 협력하여 그 이질성을 조화시켜야 하기 때문에 양성(兩性)적인 성질을 가지고 있으므로 엄지손가락을 달래는 한편 다른 손가락들을 통제할 수 있다. 둘째손가락은 가장 많은 주의를 요하는 손가락이다. 또 둘째손가락은 엄지손가락 및 새끼손가락과 함께 건반을 탐험하면서 결정된 위치를 찾아내는 수색대의 대장 역할을 한다. 둘째손가락의 매우 중요한 역할은 멜로디의 흐름을 감시하는 어려운 임무를 맡은, 자칫 연약해지기 쉬운 새끼손가락을 이끌고 지원해주는 본부이자 나침반이 되는 것이다.
셋째 손가락은 가장 긴 손가락으로서 힘이 있으며 실제로 힘을 공급하기도 하지만, 이 손가락은 스스로를 손의 중심축으로 착각한다. 그러나 쇼팽의 손을 그린 그림을 잘 살펴보면 손의 중심이 셋째 손가락보다는 둘째손가락 가까이에 있다. 무엇보다도 나쁜 것은 셋째 손가락은 리듬적 지시에 정확하게 응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굼벵이처럼 느려 터져서 시간이 좀 지나면 숨을 헐떡인다.
넷째 손가락은 셋째 손가락에 대한 의존에서 벗어나기를 거부하며, 그로 말미암아 두 손가락 모두 혼란에 빠진다. 넷째 손가락을 기계화하려 하지말고 그 특별한 재능을 살려야 한다. 외다리 플라밍고라고 생각했던 것이 실은 낙원의 새라고 판명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새끼손가락은 대담하다기보다는 늘 여리고 싱싱한 듯하다. 새끼손가락이 만들어내는 소리는 맑다기보다는 날카롭다. 새끼손가락의 연약함은 짧은 길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새끼손가락이 짧고 연약하다는 두려움에 있는지도 모른다. 새끼손가락의 동작과 바깥쪽으로의 움직임을 늦추어야 한다. 여유를 가져라. 엄지손가락과 둘째손가락을 새끼손가락의 길잡이이자 기둥으로 삼아라. 목표를 삼각 측량하여 자원을 보강하라.
손은 평온하고 가벼워야 한다. 손은 척추에 의해 지탱된다. 척추의 안정된 힘이 어깨와 팔꿈치를 통해 전달되어, 가만히 있는 손을 가볍고 편안하게 지탱해준다. 완전한 자세는 바로 이런 것이다. 척추는 길고 살짝 구부러져 있으며 허리의 잘록한 부분에서 두개골 밑까지 탑처럼 뻗어 있다. 다리는 평온하면서도 자유롭다. 신체 각 부분의 조화는 다리에서 시작되어 다리에서 마무리된다. 땅을 딛고 있는 발은 안정과 그 반대인 상승의 감각을 강화시켜준다. 이런 여러 요소에 덧붙여 피아니스트의 발은 천국에 오르는 계단, 즉 페달을 밟아야 한다. 페달은 길고 짧은 음, 크고 작은 음을 조화시켜 다양한 음색을 만들어낼 수 있다. 댐퍼 페달을 밟을 때는 섬세하고 유연해야 한다. 댐퍼 페달은 짧은 순간에서 일정 시간에 이르기까지, 그 지속 시간과 차원에 있어서 다양한 음악적 이미지에 반응할 수 있다. 이렇게 민감하고 미묘한 페달의 기능을 최대한 살리려면 벌새의 날개처럼, 구애자의 가슴처럼 발이 민감해야 한다. 페달의 스펙트럼은 미개척 대륙, 사라진 아틀란티스 대륙, 또는 환상과 절망의 잠재적 타히티 이야기에서 그린 육감적이고 심리적인 유희의 영역에서 찾아볼 수 있는 그런 다양한 빛깔이 들어 있다. 다시 말해서 페달은 망자의 세계를, 마법의 세계를, 빛의 세계를 불러낸다.
우리는 최고 수준의 연주 기술을 높이 평가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솜씨가 뛰어난 수많은 전문가들이 몇 안 되는 성공의 사다리를 오르려고 치열한 쟁탈전을 벌인다. 이런 풍토에서 재능을 발전시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며 용기뿐만 아니라 도덕관념까지도 잃기 쉽다. 하지만 기술이 없으면 예술도 없다. 그러나 기술은 서비스 산업의 일부일 뿐이다. 기술 자체가 목적이 되면 음악은 음계, 화음, 아르페지오, 트릴, 옥타브, 도약 등 피아노 창고의 여러 가지 도구로 전락한다. 기술이 그 본래의 역할대로 음악적 표현을 위해 사용되는 한 기술적 능력에 대한 합법적인 집착을 버리려는 피아니스트는 없다. 기술은 단순히 명세서가 아니기 때문이다. 기술은 음악적인 구성의 형식과 범위를 표현하는 매우 민감하고 유연하며 충실한 수단이다. 보편적으로 기술의 세계는 양으로 표시할 수 있는 특징들을 가지고 있으며, 이것은 여러 피아니스트들의 재능을 구분하는 통계적 기준이 된다. 소비자 사회는 오직 최고만을 원한다. 그리고 최고를 결정하는 가장 간단하고 확실한 방법은 보다 높은 수준의 스피드와 힘을 찬양하면서 음표의 수를 기록하는 것이다. 시적인 가치는 너무 애매해서 그런 양적 평가를 적용할 수 없다. 그러므로 피아니스트의 연주를 들을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피아니스트의 기교를 평가하고 싶어 하지만 기교를 통찰력으로, 묘기를 예술로 혼돈한다면 우리는 매우 게으른 것이다. 이 게으름에서 비롯되는 유감스러운 결과 중의 하나는 인상적인 연주를 하는 재능이 뛰어난 예술가들이 기교가 완벽하거나 일관되지 않다고 여겨져서 연주가로 인정받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음악의 본질과 보편적 의미에 관해 명심해야 할 금언은, 모든 예술 표현에 있어서 그렇듯 중요한 것은 깊이와 비전과 상상력이다. 피아노는 아름다움의 전달자로 탄생한 것이 아니다. 피아노는 세상과 그 안의 다양한 보물을 보여주는 비범하고 다재다능한 수단이다. 피아니스트는 그 동작이 동적이건 정적이건 모든 육체적 및 정신적 수단을 동원해야 한다. 피아니스트의 동작은 절제되어 있지만 결코 덜 동적이지도, 덜 정적이지도 않다. 의도된 소리가 도표와 계획표를 제시하면 몸은 그에 반응한다. 모든 것이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모든 것이 하늘로 날아오를 수 있다. 소리가 날아오른다. 영혼이, 신념에 차고 평온한 영혼이 몸을 변환시킨다.
2. 가르침(The Transfer)피아노를 가르칠 학생을 고를 때에는(그럴 특권이 주어진다면) 기교와 표현력, 그리고 일반적인 지적 수준을 보고 판단해야 한다. 대개의 기준은 이런 것이지만 한 가지로 좁혀 말할 수 있는 것이 바로 부모다. 어머니나 아버지, 또는 두 사람의 사랑과 뒷받침 없이는 여러 가지 재능이 살아나지 못하고 시들어버린다. 총명한 학생 뒤에는 총명한 부모가 있다. 헌신적인 부모가 있다. 이들의 헌신은 막연한 기대나 야단스런 야심 같은 것과는 다르다. 일종의 미학적이고 영적인 이상에 대한 헌신이다. 이런 부모는 굳건하게 뿌리내린 강렬한 신념을 가지고 있다. 그 자녀들의 부단한 노력과 소리를 통해 천국이 실현되고, 황홀해지며, 널리 알려질 것이다. 끊임없는 노력과 고매한 행동은 헌신적인 사람들에게 천국의 문을 열어줄 것이다. 모두들 더 좋은 학교와 교육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나무랄 때 없는 생각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좋은 교사가 아니라 더 좋은 거울이다. 그리고 아이들을 가르치는 사람들 중에서 교사의 비중은 세 번째밖에 되지 않다. 부모와 사회가 첫 번째와 두 번째를 차지한다. 음악적으로 조숙한 아이들에게 있어서 이들의 진로를 정하고, 미래를 설계하고, 운명을 결정하는 사람은 부모이다. 그리고 부모의 인도에 따라 이 세계에 들어선 아이는 외로운 훈련을 통해 신성한 소리의 거룩한 잔을 움켜잡을 수 있다. 그런 다음 신화를 영속시키며 꿈을 계속 이어가게 하는 것은 교사에게 달려 있다. 피아노를 가르치는 선생은 학생 개개인의 유일한 책임자로서 연습과 일과와 집중 학습에 적합한 틀을 짜야 한다. '나와 너', '주제와 사실'이 '인식과 묘사'라는 새로운 차원에 도달할 때까지 학생을 이끌고 매혹시켜야 한다. 또한 학생들을 가르치려면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야 한다. 그들의 인지력과, 식별하고 종합하고 선택하는 능력, 지성과 상상력, 이해력을 알아야 한다.
나는 복이 많다. 제자들이 다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연 이들 중 몇 명이 이들의 가장 소중한 꿈인 연주가로서의 성공적인 경력을 쌓을 수 있겠는가. 냉정하게 생각해서 보다 쉽고 편한 길을 택하도록 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오래 전 일이다. 어느 날 나의 선생님은 아파트 창 밖으로 거리를 청소하고 있는 쓰레기차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그 옆에 있던 선생님의 친구가 아마 쓰레기차 운전사가 선생님처럼 훌륭한 음악가보다 돈을 더 많이 벌 것이라며 사회적인 보상의 부당함을 지적했다. 선생님은 이렇게 대꾸했다.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난 그래도 피아노를 치겠네."
피아노 연주는 가장 어려운 분야라고 할 수 있다. 선수로서 활동할 수 있는 시간이 짧은 체조나 피겨 스케이팅과는 달리 오랫동안 많은 노력을 요한다. 참으로 힘든 일이며, 외롭고 지루하며 절망스럽다. 그럼에도 그 보상은 하루살이처럼 덧없다. 그러나 학생들은 습관과 희망의 가냘픈 실을 타고 계속해서 연주를 한다. 이들의 영혼은 산발적이고 서툰 방식으로 성장하고 발전한다. 그러면서 이들은 일반적인 유행이나 동료들의 침몰과는 다른, 진정한 주체성의 가능성을 탐지한다. 이들은 인류의 운명을 호전시키기 위한 고매한 사상과 이상주의적 계획을 품고 있는 예비 예술가이다. 이들이 피아노를 공부하게 하자. 우리 사회는 이들이 필요하다.
학생들이 음악을 계속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물을 때 나는 망설이지 않는다. 자의식에 대한 본능을, 달고 쓴 양심의 주위를 배회하는 본능을, 신중하게 한 발 두 발 내디디며 독립적이지는 않지만 자유로운 자아 또는 무아를 인식하는 본능을 어떻게 거부할 수 있겠는가. 우리에게는 항상 든든한 길잡이가 있다. 그것은 바로 이성과 윤리에 의해 만들어지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악보이다. 학생을 가르치는 것은 악보이다. 선생은 학생을 악보로 인도할 뿐이다.
나는 적극적으로 가르친다. 뒷전에서 뒷짐을 지고 삶과 음악에 대한 철학을 늘어놓지 않고, 그런 이야기는 전화로 많이 하고, 가르칠 때에는 끊임없이 칭찬과 질책의 탄성을 지르며 열정적으로 가르친다. 음표를 놓치는 것은 용서하지만 무심코 잘못 읽는 것은 용서하지 않는다. 프레이즈를 잘못 이해하는 것은 괜찮지만 아무렇게나 처리하는 것은 용납하지 않는다. 소리가 귀에 거슬리는 것은 괜찮지만 밋밋한 것은 안 된다. 연주자는 열정과 스타일을 가지고 뭔가 말해야 한다.
15년 동안 나를 가르친 선생님, 에드워드 스토어만은 나에게 음악이 무엇인지 가르쳐주셨다. 물론 그분은 피아노를 치는 법도 가르쳐주셨지만, 피아노는 음악을 만드는 도구였을 뿐이다. 나는 더 좋은 음악을 만들기 위해 피아노를 열심히 배웠다. 선생님은 나를 그렇게 훈련시켰고, 화성과 대위법과 작곡법뿐만 아니라 체스도 가르쳐주셨고, 책임감과 분별력을 갖춘 사람이 되는 법도 가르쳐주셨다. 나는 열 한 살때 선생님에게서 처음 배우기 시작했는데 그분께서 철없는 개구쟁이의 머릿속에 심어주려 한 것은 피아노뿐만이 아니었다. 선생님이 가르치려 한 것은 음악이었다. 그리고 나는 선생님에게서 최선을 다해 열심히, 예의와 인내심과 용기, 겉모습의 무의미함을 배웠다. 그리고 나는 사람의 마음이 돈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된 것에 감사했다.
가르침의 어려움에 관한 가장 설득력 있는 말은 화성에 관한 교과서를 쓴 아널드 쇤베르크의 저서 머리말에 들어 있다. 그는 대부분의 선생들이 학생에게 자신이 이미 알고 있는 것을 가르치며, 학생이 모르는 것을 가르치는 선생은 거의 없다는 명백한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흔히 우리는 자신이 가장 좋아하고 잘 아는 곡을 학생들에게 가르치지 않는가? 자신의 손에 익숙한 훈련을 반영하는 기술 훈련법을 쓰지 않는가? 성취에 대해 자신의 생각과 계획을 바탕으로 하고 있을 뿐, 학생 개개인이 필요로 하는 것과 장점, 약점, 이상을 충족시키지 못할지도 모르는, 순전히 습관적인 음악적 스타일과 몸의 자세와 기교, 철학과 레퍼토리와 운지법 등에 관한 똑같은 공식을 권하고 반복하고 있지는 않은가?
모든 선생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작곡가와 곡을 추천하는 경향이 있다. 듣는 것과 연주하는 것을 구별시키기 위해 바흐를 공부하게 하는 교사도 있고, 터치와 컨트롤의 기초를 다지기 위해 쇼팽부터 시작하게 하는 교사도 있다. 내 경우에 모범적인 길잡이이자 정신을 일깨워주는 음악가는 하이든이다. 무엇보다도 하이든은 모든 것의 뿌리요, 전제요, 조건인 작곡법을 가르쳐준다. 음들이 어떻게 결합되고, 분리되고, 재결합되고, 변형되는지 가르쳐준다. 하이든은 또 다른 측면에서 교육적 본보기를 보여준다. 그가 남긴 글에 따르면 그는 에스테르하지 장원에서 왕자의 악사로 일하며 비교적 고립된 생활을 할 수 있는 행운을 누렸다. 음악가로서 원숙해지는 중요한 시기에 그는 유행과 상업의 중심지인 빈에서 멀리 떨어져, 그만의 사상과 개성과 비전을 발전시킬 수 있음을 고맙게 여겼다. 예술적 개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