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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우면 가벼워지는 인생

양석일 지음 | 오늘의책
시대의 불안, 마음의 불안



따라다니는 환상을 떨쳐버리자인생을 살면서 모든 일이 자기 뜻대로 이뤄진다면 더 이상 행복할 순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인생은 종종 냉엄한 현실과 싫든 좋든 마주하지 않으면 안 된다. 개중에는 절망적인 결과가 기다릴수도 있다. 전에 미술인쇄 회사를 경영하면서 자금난에 시달려 이곳저곳 돌아다닐 때 등 뒤로 파탄의 발소리가 들려와도 '내일이면 어떻게 되겠지.', '사업은 반드시 궤도에 오를 거야.'라며 멋대로 생각한 적이 있다. 혼자만이 '실현할 수 있다.'고 생각해버리는 바람, 그것이 환상이다.



덴마크의 사상가 키르케고르의 책 『죽음에 이르는 병』중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전쟁터에서 돌아오던 길에 한 남자가 길가에서 날개를 쉬고 있는 작은 새를 발견한다. 그 남자가 붙잡으려 하자 작은 새는 얼른 날아가지만 결코 멀리 도망가지는 않는다. 손을 내밀면 조금 날아가더니 또다시 남자의 코끝까지 되돌아온다. 붙잡으려하면 도망가버리는 일을 반복하면서 걷는 중에 마침내 작은 새는 휙 하고 하늘 저 멀리 날아가버리고 만다. 남자는 그제야 현실로 되돌아와 주위를 둘러본다. 그곳은 황량한 대지 한가운데로, 이제는 자신이 걸어온 길조차 알 수 없게 된다. 키르케고르는 이것을 '가능성의 절망'이라고 한다. 어떤 것을 실현할 수 있다고 쉽게 생각하고 쫓아가지만, 정신차려보면 절망적인 상황에 빠져 있는 것이다.



환상의 깊숙한 곳에 있는 것은 불안이다. 사회에서는 매일같이 여러 가지 사건과 재해가 일어나고 있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그러한 사건과 재해가 자기에게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실은 그 밑바닥에 '어쩌면 내게도 재난이 닥쳐올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있긴 하지만 애써 그것과 마주하려하지 않는다. 회사에서는 구조조정이 진행되고 있어 '마침내 내게도'라는 불안이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지만 스스로 괜찮다고 믿고 싶어한다. 그 같은 환상을 품어서 불안을 없애려고 하는 것이다. 스스로 환상을 갖는 것은 위험하다. 물론 자신을 믿는 것은 중요하다. 하지만 자신을 믿는 것과 환상을 갖는 것은 정반대의 결과를 초래한다. 나는 이러한 환상을 없애버리고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되돌아보는 데까지 무척이나 긴 시간이 걸렸다.프리터에게는 미래가 없다일본에서는 현재 15∼35세 사이의 '프리터(free + arbeiter)라 부르는 파트타임 노동자가 200만∼400만 명에 이른다고 한다. 이 가운데 '조직에 속박되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프리터 생활을 계속하면서 일하고 싶을 때 일하고 싫어지면 그만두고, 돈이 조금 모이면 해외여행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프리터 중에 약 70퍼센트가 안정된 직장을 찾고 있다고 한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이 따로 있을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지 발견할 때까지 나는 프리터를 계속 한다." 일부 프리터는 이렇게 말한다. 그건 좋다. 그러나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발견할 수 있는 사람이 그들 중 얼마나 되겠는가. 그들은 되도록 책임 있는 일을 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기업에서 프리터는 매우 유용한 존재다. 정규직 사원보다 임금이 싸게 들고 보장도 필요없다. 뿐만 아니라 그 사람이 필요없어지면 언제나 해고할 수 있다. 그런 그들을 기업이 몇 살까지 고용해줄 것인가. 지금까지 일본에 전통적으로 존재하던 종신고용제는 사라지고, 때가 되면 이뤄지던 승진과 정기승급도 없어지고 있다. 대기업조차도 정기승급은 35세까지, 그 다음에는 실력급으로 바꾸는 시스템 변화의 시기가 도래하고 있다. 이렇게 되면 '25세에 계장이 되고, 30세에 결혼하고, 35세에 집을 산다.'는 등의 인생설계는 그릴 수가 없다. 프리터 생활을 하면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 살겠다고 생각하는 젊은이들은 상당한 각오를 해야만 한다.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실패만을 두려워마라인간은 대다수가 안정을 바라는 동물이다. 나도 두세 번 죽음으로 흘려보낼 뻔한 인생을 살았지만 일부러 그런 인생을 택하지는 않았다. 수많은 실패를 경험해온 나지만 그래도 역시 젊을 때에는 이것저것 도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남아 있는 시간이 많기 때문에 한두 번 실패했다고 기죽을 필요는 없다. 어떤 일에 도전하다가 실패해도 재기할 기회가 얼마든지 있는데도 지금의 젊은이들은 아무래도 실패를 두려워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나는 그 원인 중 하나가 오랜 고도성장의 흔적 속에서 자라났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요즘 젊은이들이 실패를 두려워하는 것은 그러한 풍요로움 속에서 부모로부터 실패에 대한 대처방법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버지 세대들은 자신이나 가족의 생활을 위해 오로지 일만 했고, 라이벌과도 치열한 싸움을 전개해왔다. 그것이 수입 안정으로 이어져 풍족한 생활 속에서 행복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처럼 바쁜 아버지와 접할 기회조차 별로 없었던 자식들은 아버지처럼 억척스럽게 살고 싶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땀 흘리며 일하지 않아도 먹고살 수는 있기 때문에 야심을 품고 꿈을 좇는 고생 따위는 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러나 풍요로운 시대에 부모들이 모아놓은 재산이 무한정 있는 것은 아니며, 언젠가 바닥을 드러낼 것이다. 자신이 해야 할 일도 모르고, 그 때문에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뭔가를 행하기도 전에 실패할까봐 두려워하는 젊은이들은 부모가 모아둔 재산이 바닥을 드러내면 어떻게 할 것인가. 물론 젊은이들이 모두 그렇다고 단정하는 것은 아니다. 앞으로는 자신의 삶의 방식을 분명하게 찾아내어 왕성한 에너지로 전진하는 유형과, 언제까지나 자기 인생에 대해 방관하고 시간만 낭비하는 유형으로 양극화될 것이다.인생에는 많은 사람들과 스쳐 지나가는 '십자로'같은 것이 있다. 개중에는 그저 스쳐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멈춰 서서 이야기를 나누거나 친해지기도 한다. 무의식 속에 의식이 작용하여 서로의 공통점을 찾게 된다. 인생에서 그런 만남이 얼마나 되는지는 매우 중요하다. 인생의 십자로에서 어떤 사람들과 스쳐 지나가고 만나는가. 개중에는 인간의 삶을 결정짓는 경우도 있다. 중학교를 졸업한 나는 오사카에서 가장 경쟁률이 높은 고등학교 시험에 응시했다가 실패하고 다카즈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입학식 날 강당에서 학생들은 우치나다촌 미군기지 반대투쟁 집회를 열었다. 그로부터 3일 후 나는 선배들에게 이끌려 우치나다촌에 갔다. 우치나다촌 투쟁은 이시가와 현 우치나다촌 군사기지를 일시적으로 사용하고 있던 미군이 영구적으로 기지화하겠다는 요청을 일본 정부가 허용하려 하자 이에 맞서 벌인 반대 운동이었다. 이 운동에 참가한 것을 계기로 나는 좌익 운동에 눈을 뜨게 되었다. 그후 어머니가 밀매하는 막걸리를 노리고 우리 집을 찾아온 활동가들과 토론하며 지내는 일상이 계속되었다.



고등학교에 입학한 후 시를 쓰기 시작한 내 인생을 결정지은 것은 김시종과의 만남이었다. 조선에서 태어나 오사카에 살고 있는 재일동포 시인이자 평론가인 김시종은 일본 패전과 함께 민주주의에 눈을 뜬 좌익 시인이었다. 첫 만남은 고등학교 3학년인 열아홉 살 때 친구가 맹장 수술로 병원에 입원해 병문안을 갔는데, 같은 병실 침대에 있는 사람이었다. 재일동포 중에 시인은 나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있던 나는 곧 그와 토론을 벌이게 되었다. 당시 토론 주제는 책에서 빌린 것으로, 관념적인 내용이 많았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나는 김시종이 주재하고 있는 시 동인 모임 '진달래'에 참가했다. 일고여덟 명의 동인들과 만나면서 나의 토론이 얼마나 유치한 수준이었으며, 그동안 '우물 안 개구리'로 살았음을 통감했다. 만일 그때 김시종이나 다른 동인들을 만나지 않았다면 나는 시나 문학에 눈뜨지 못했을 것이다.



나와 김시종은 우연히 만났다. 그렇지만 내가 전부터 시를 썼고, 그런 사실이 친구들에게 전해졌기 때문에 김시종과 연결되었던 것이다. 거기에는 무의식 속의 의사가 작용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요즘 젊은이들처럼 방에 틀어박혀 지내기만 하면 이 같은 인생의 만남이 찾아올 기회는 거의 없어진다.사람은 노동을 피할 수 없다사람은 언젠가는 노동과 진지하게 마주쳐야 한다. 일하는 것은 인생 그 자체다. 사람은 다양한 직업을 통해 살아갈 수 있는 양식을 얻어가며 생애를 보낸다. 발전 도상의 가난한 나라에서는 열 살도 안 되는 소년, 소녀들이 일을 한다. 밑바닥에서 사는 사람들은 노동에 대한 개념을 생각하는 일이 없다. 그들에게 일하는 것은 생명을 이어나가는 행위다. 살기 위해 일하는 것은 선진국에 사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노동은 살기 위해 피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노동의 내용은 전혀 다르다. 살아가는 시대나 국가의 상황이 다르기 때문에 노동의 의미나 개념을 한마디로 정의하기는 힘들다.



대학을 졸업한 후 기업에 취직하여 60세에 정년을 맞게 되면, 그 사람은 샐러리맨으로서 37여 년 동안 일한 셈이 된다. 그야말로 한평생을 바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 시점에서 자기합리화를 하지 않으면 그동안의 시간이 무의미하게 느껴지고 만다. 이는 샐러리맨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어떤 사람이 초고층 빌딩 건설에 종사한 후, 여러 가지 사정으로 불우한 나날을 보내게 되었더라도 그는 그 빌딩을 보며 "이 빌딩은 내 손으로 만든 것이다."라고 자부심을 품는 것과 같다.



내가 노동의 의미를 알게 된 것은 40세가 지나서였다. 그전까지는 타락한 나날을 보냈다. 무엇을 해도 적당주의였고, 제대로 된 생활을 한 적이 한번도 없었다. 택시운전사로 일하면서도 언젠가는 다른 장사를 해 돈을 벌겠다는 막연한 생각을 했다. 이 일을 하면서 이대로 끝내고 싶지는 않았다. 내게는 다른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사람에 따라서는 다른 일에 도전하여 성공하는 사람도 있지만, 내 경우에는 성격도 태만한 데다 재일동포라는 한계 때문에 원하는 곳에 취직하지 못했던 것도 사실이다. 일시적이긴 하지만 택시운전사를 1년쯤 그만두고 오뎅과 소바를 파는 포장마차를 끈 적도 있었다. 그 일도 결국 열흘을 못 버텼다. 포장마차를 끄는 소형 사륜차 엔진이 잦은 고장을 일으켜 교환해야 할 지경에 처했으나 고액의 수리비를 감당할 형편이 못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시 택시운전사로 돌아갔다. 택시운전사로 10년쯤 일하면서 노동의 매운 맛을 알게 되었다. 신체를 통해 나 자신이 갖고 있던 막연한 환상 같은 의식을 근본부터 다시 생각하던 시기였다. 내게는 둘도 없이 귀중한 시간이었다.운명에 쐐기를 박는다



인생은 사는 의미를 찾는 여행인생은 반복되는 일상이 쌓인 것이다. 그 속에 있는 즐거움, 슬픔, 기쁨, 절망, 낙담 등 모든 것에 의미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 당시에는 그렇게 느끼지 않더라도 몇 년 지나면 자신에게 중요한 시간이었음을 알게 된다. 얼마 전 친구 부친의 장례식에 참석했다. 제단에서는 고인의 어린 시절 친구가 조문을 읽고 있었다. 친구의 죽음에 즈음하여 70여 년 전 소년 시절까지 회상하는 그분의 머릿속에는 고인이 어떻게 기억되어 있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친구라 해도 긴 인생에서 싸우고 화해하거나, 서로 으르렁대거나, 이해관계 때문에 일시적으로 의절하는 등 여러 가지 일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두 사람은 마지막까지 친구로서 생애를 함께 살아온 것이다. 이것은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시간이 지나면 서로의 앙금이 어느 정도 가라앉게 되어 있다. 또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그 당시 왜 그렇게 괴로워했을까.", "그토록 위험한 일을 잘도 헤쳐왔구나."하며 자신을 되돌아볼 수가 있다. 이처럼 과거의 자신과 지금의 자신을 비추어보면서 인생을 알게 된다.



인생이란 사는 의미를 찾는 여행이며, 그 여행은 죽을 때까지 계속된다. 인간은 자신의 인생이 무엇인지 때때로 돌아보고, 평가하며 반성한다. 지금 있는 곳에서 앞의 일은 알 수 없다. 그래서 끊임없이 인생의 의미를 찾게 되는 것이다. 인간은 청년기가 되면 곧잘 '인생이 대체 뭘까?'라는 고민을 하게 되지만 그 정체는 도무지 알 길이 없다. 중년기가 되어서도 마찬가지다. 40년을 살았다면 그 범위 안에서만 인생을 돌아볼 수가 있다.



일반적으로 인생에 대해 논할 때, 야심을 가진 인간이나 야심을 갖는 방법 등에 비중을 두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평범하게 산다는 것은 야심을 갖고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어렵다. 평범하게 살려는 사람이 시대의 변화에 따라 바뀌는 경우도 적지 않다. 아무리 평범하게 살려고 해도 시대가 그것을 좌우해버린다. 그와 같은 사회의 변화를 자세히 바라보지 않는다면 좀처럼 평범하게 살기도 힘들다.'한 마리 늑대'의 마음으로 이 순간을 산다책머리에



내게 인생은 언제나 시작이다나는 다른 사람보다 다소 고생했는지 모른다. 아버지는 야쿠자조차도 두려워하는 인물이었고 가족들에게도 폭력을 휘둘러 우리 가족은 오랫동안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었다. 우리가 제대로 잠을 잘 수 있게 된 것은, 내가 고등학생이었을 때 아버지가 첩을 얻어 집 바로 건너편에 살 때부터였다. 나는 18세 무렵부터 시를 쓰기 시작했다. '진달래'라는 동우회에 참가했었는데 그곳을 주도하던 시인 김시종이 그가 소속된 조총련을 비판하다 대립하는 바람에 정치와 문학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얼마 안 돼 「진달래」는 폐간되었고, 1년 뒤 간행한 동인지 「카리온」도 3호만에 좌절했다. 그후 나는 시와 문학의 세계를 떠나 생활의 세계로 돌아왔다.



나는 25세에 결혼했다. 결혼하고 1년 후 인쇄회사를 설립했으며, 그로부터 1년 뒤 연 면적 160평의 공장 겸 주택을 지어 종업원들과 함께 생활했다. 그곳은 독일제 자동평판기 다섯 대와 사진실을 갖추고 있었고, 나의 야망은 불타올랐다. 그러나 모든 것이 빚더미였다. 지금 회상해보면 경영이 뭔지도 모른 채 그저 무모하게 돌진한 셈이었다. 3년 후인 29세 때 지금 금액으로 환산하여 약 10억 엔의 빚을 안고 도산했다. 나는 매일 밤 오사카의 환락가 미나미의 카바레와 클럽에서 주색잡기에 빠져 퇴폐의 극치를 보였다. 도산한 지 2년 후 나는 도망치듯 센다이로 갔다. 한번 몸에 배인 퇴폐적인 삶은 센다이에서도 바뀌지 않았다. 또다시 술과 여자, 빚에 몰려 1년반 뒤에는 센다이마저 떠나야만 했다. 도호쿠 지방을 1개월 정도 방랑하다가 도쿄로 갔다. 가진 돈이라고는 5,000엔 정도가 고작이었다. 그 돈으로는 3∼4일밖에 먹고 잘 수 없어 곧 기아상태에 빠졌다. 하루종일 신주쿠 외곽을 돌면서 물만 마셨으며, 밤에는 지하도에서 잠을 잤다. 4일째 되는 날 아침, 신주쿠 중앙공원 벤치에 멍하니 앉아 있을 때 바람에 날린 스포츠 신문지가 내 발을 감았다. '택시운전사 모집' 광고가 눈에 들어왔고 곧장 택시회사에 전화를 걸었다.



인간의 의식 변혁은 간단히 일어나는 것이 아닌 모양이다. 내 경우, 변혁이란 다시 태어나는 것밖에는 없었다. 나는 택시운전사가 된 후에도 반드시 깃발을 세울 날이 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의식에서 벗어나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들이는 데 10년의 세월이 필요했다. 그리고 10년째 되던 어느 날 새벽 1시 반경, 신주쿠에서 승객 세 명을 태우고 환상 7호선 신요다역 앞 적신호에서 정차했을 때, 10톤짜리 대형화물차가 추돌해 승객 한 명이 사망하고 두 명은 반신불수의 중상을 입는 사고를 당했다. 나는 등뼈를 심하게 다쳐 반년간 입원했고,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구했다. 그러나 퇴원 후 일이 없었던 나는 또다시 택시를 타야 했다. 2개월 후 한밤중에 록본기 교차로에서 2중 충돌 사고를 당해 다시 이틀간 입원한 후 택시운전사 일을 그만뒀다.



그 무렵 나는 신주쿠 서쪽 출구에 있는 술집에서 문예평론가인 친구 오카니시 노보루로부터 치쿠마 서점의 편집장 카이바라 나루미쓰를 소개받아 처녀작 『광조곡』(문고판으로 만들면서 『택시 광조곡』으로 개명)을 출판했다. 나는 45세부터 인생을 고쳐 산 것이다. 나는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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