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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의 두 얼굴

김태훈 지음 | 창해
이순신의 두 얼굴

김태훈 지음

창해/2004년 7월/700쪽/28,000원



1. 7년 전쟁은 막을 수 있었다

이순신이 전라좌수사가 된 것은 1591년인데 다음 해에 ‘7년 전쟁’이 발발했다. ‘7년 전쟁’은 조금만 주의를 기울였어도, 아니 집권층이 애써 무시만 하지 않았어도 충분히 예견할 수 있는 전쟁이었다. 집권층은 그 많은 전쟁의 징후를 보고도 애써 무시했다. 1591년은 조선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는 사건이 일어난 해이기도 하다. 1590년 일본의 동태를 탐지하기 위해 파견된 조선통신사 황윤길과 김성일 등의 일행이 1591년에 비로소 조선으로 돌아왔는데, 황윤길은 전쟁이 있을 것이라 주장한 반면 김성일은 없을 것이라고 보고했다. 황윤길은 서인인 반면 김성일은 동인이었다. 당시 격렬했던 당쟁으로 비추어 동인이 집권하고 있던 조정에서 김성일의 의견이 힘을 얻었을 것은 자연스럽게 추정할 수 있다.

하지만 통신사가 파견되기 이전에 전쟁을 막기 위한 움직임이 있었다. 거리로 볼 때 일본보다 한반도가 더 가까운 쓰시마. 조선과 일본의 사이라는 지정학적 위치를 이용해 조선산 인삼과 약품 등 양국 교역을 중개하고 있었기 때문에 쓰시마 도주는 전쟁을 바라지 않았다. 쓰시마 도주는 전쟁을 막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그는 1587년 도요토미의 명으로 다치바나 야스히로를 조선에 파견하여 일본의 변화를 설명하면서 조선통신사 파견을 요청했다. 전쟁 발발 5년 전이니 조선이 통신사를 잘 활용했으면 전쟁 대비에 충분한 시간이었지만, 조선은 일본으로 가는 물길이 어두워 사신을 파견할 수 없다는 상식 밖의 이유를 들어 통신사 파견을 거절했다. 우리는 『징비록』에 실린 다치바나의 탄식을 통해 양국이 화평하기를 바라던 쓰시마 도주의 고민을 알 수 있다.

다치바나는 객관으로 돌아와서 탄식하며 통역관에게 말하기를, “너희 나라는 망하겠다. 기강이 이미 허물어졌으니 어찌 망하지 않기를 기대하겠는가.”라고 하였다. … 다치바나가 돌아가서 보고하자 도요토미는 크게 노하여 다치바나를 죽이고 또 그 일가를 멸족시켰다.

중국 정복의 꿈을 가진 도요토미가 조선의 한 차례 거절에 그만둘리 만무했다. 이번의 요구는 조선 국왕을 일본에 입조(入朝)시키라고 했다. 쓰시마 도주가 죽자 그의 뒤를 이은 사위 소 요시토모는 도요토미의 요구와 함께 1589년에 야나가와 초신, 승려 겐소 등을 데리고 부산포에 도착했다. 제2차 일본 사신 파견이었다. 그들은 통신사 파견을 요청했고 ‘조선 국왕의 일본 입조’는 입 밖에도 꺼낼 수 없었다. 그 말을 꺼냈다가는 조선의 노여움만 살 것이 자명했기 때문이다. 결국 통신사 파견은 또 이뤄지지 않았다.

잠시 쓰시마로 돌아갔던 그들은 다시 부산포로 건너왔다. 그들의 요구를 접한 조선은 일본 해적의 앞잡이가 되어 노략질한 조선인을 잡아 보내면 응하겠다고 했다. 통신사 파견의 명분도 찾고 그들의 성의도 시험하자는 의도였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조선은 1590년에 통신사 일행을 일본에 파견했다. 그러나 쓰시마 도주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김성일이 전쟁은 없을 것이라고 보고했고 조정은 그 말을 그대로 따랐다.

쓰시마 도주는 도요토미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명과의 조공 무역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조선과 일본의 충돌을 막기 위해 명에 대한 조공 무역을 중재해달라고 조선에 계속 청원했다. 그의 판단에 일리가 있었음은 나중에 증명되었다. ‘7년 전쟁’ 때 명과의 강화 협상에서 도요토미가 요구한 일곱 가지 조건에 명과의 조공 무역도 포함되어 있었다. 쓰시마 도주는 조선통신사가 일본만 건너가면 모든 문제가 풀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김성일이 전쟁불가론을 주장하는 바람에 완전히 도로아미타불이 되어버렸다. 이제 남은 것은 마지막 수단밖에 없었다. 일본의 전쟁 준비를 알려주어 조선이 대응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가 동원한 모든 전쟁 방지 노력은 허사로 끝났다. 그리고 그에게 남은 일은 살아남기 위해 일본에 적극적으로 붙는 것이었다. ‘7년 전쟁’이 발발하면서 결국 그는 도요토미의 전위대로 돌아섰다.



2. 수군에게 희망이 있었다

1592년 4월 13일 해질 녘에 일본 함대가 부산 앞바다에 출현했고 다음 날인 4월 14일 아침에 대대적인 부산상륙작전이 벌어졌다. 전라좌수영이 설치된 여수에 있던 이순신이 그 사실을 전해들은 것은 4월 15일이었다. 이순신은 1592년 5월 4일 비로소 출동했다. 조선은 이순신이 출동하기 이틀 전인 5월 2일 서울이 함락되는 비운에 처했다. 이순신이 출동할 때 선조는 이미 서울을 떠나 북으로 비참한 피란 행차를 하고 있었다.

이순신의 제2차 출동 기간은 1592년 5월 29일부터 6월 10일까지이다. 제1차 출동 때에는 예기치 않은 선조의 피란 소식을 접하는 바람에 갑자기 귀환하게 되어 기간이 짧았으나 이 제2차 출동은 작심을 하고 떠난 것이다. 이순신이 선조에게 올린 보고서 가운데 “격파한 왜선이 72척이며 왜의 머리가 88급입니다.”라는 기록에서 찾을 수 있다. 72척의 적함을 격파했다면 어마어마한 전공이 아닐 수 없다. 이순신의 공격으로 일본 수군은 서서히 무너지고 있었다.

제2차 출동은 전투에 임하는 이순신의 자세가 180도 전환했음을 의미한다. 1차에서 이순신은 적의 실체에 대해 정확히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또 그동안의 전투를 통해 아군의 막강한 화력과 우수성을 증명해보였다. 육전에서는 연전연패하고 있었지만 적어도 해전에서는 백전백승할 자신감이 생겼다.

제2차 출동에서 이순신의 전라좌수영 함대와 원균의 경상우수영 함대 그리고 이억기의 전라우수영 함대는 당항포 해전에서 조선 연합 함대를 구성했다. 전라좌수영 23척, 경상우수영 3척, 전라우수영 25척의 대규모 선단이었다. 이억기 함대는 이순신이 사천해전과 당포해전을 성공적으로 마칠 때 합류했다. 이순신의 부하들은 이억기 함대를 보고 너무도 좋아서 뛰어올랐을 만큼 기쁨에 휩싸였다. 이순신의 보고서이다.

항상 외롭고 약한 군세를 염려한 여러 전선의 장수와 군사들이 계속된 전투로 피곤하게 될 무렵에 응원군을 맞이하게 되자 좋아서 뛰지 않는 자가 없었습니다.

제2차 출동의 첫 해전인 사천해전에서는 거북선이 최초로 그 웅장한 모습을 역사의 전면에 드러내었다. 거북선을 만들라고 지시한 이는 이순신이었고 그 지시를 받고 거북선을 제작한 이는 나대용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거북선의 첫 출동일에 조선군 세 명이 부상을 입었다. 가볍게 넘어갈 수 없는 것이 그 부상자 명단에는 이순신과 나대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순신의 보고서에 따르면 그의 부상은 중상이 아니었지만, 그의 말만 믿고 넘어가기에는 석연치 않다. 이순신은 그 수술을 하면서 웃고 이야기까지 했으나, 사천해전에서 입은 이 부상의 후유증으로 나중에 많은 고생을 했다.

그날 공도 철환에 맞아 왼편 어깨를 뚫고 등까지 박혀서 피가 발꿈치까지 흘러내렸지만 공은 그대로 활을 놓지 않고 종일 독려하다가 싸움이 끝난 뒤에 칼끝으로 살을 쪼개고 철환을 파내었는데 깊이가 두어 치나 되었다. 온 군중이 비로소 알고 놀라지 않는 이가 없었지만 공은 웃고 이야기해가며 태연했다.



3. 그러나 이순신이 있었다

이순신의 활약으로 일본 수군의 피해는 더 이상 방치하기 곤란한 지경에 이르고 있었다. 조선 수군의 공격으로 일본 수군의 활동 반경은 일본~부산 그리고 경상도 연해안에 머물고 있었다. 일본의 기본 구상인 수륙병진책을 실현하려면 바다를 반드시 확보해야 했다. 이에 일본은 수군을 재편성했다. 전라도 바다 공격에는 총 115척의 함선이 배정되었고, 공격 함대는 원활한 공격을 위해 다시 3개 부대로 나누었다.

조선 수군의 궤멸을 지시받은 와키사카 야스하루, 구키 요시타카, 가토 요시아키는 6월 7일 서울에서 1만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남하했다. 초대형 함선 7척을 포함한 73척으로 함대의 규모가 가장 컸던 와키사카는 공을 독차지하려는 욕심에 단독 출전을 결정했다. 적장 이순신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정보를 접한 상태였다. 하지만 이순신의 함대를 궤멸시킨다면 그의 입지는 제1군의 고니시나 제2군의 가토와 같은 반열로 오르는 것도 기대할 수 있었다.

와키사카가 가장 중요하게 여긴 것은 군사의 사기였다. 적의 함대와 부딪치면 백병전으로 승리를 가르는 일본 수군의 전술상 군사의 사기는 무엇보다 중요했다. 조선 함선이 크고 육중하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조선 함선이 여러 문의 대포를 쏜다는 것도 새삼스러울 것이 없는 정보였다. 하지만 와키사카에게는 속도가 있었다. 조선 수군이 포를 한 번 쏘고 주춤하는 사이에 쏜살같이 돌진하여 백병전을 구사하면 조선이 자랑하는 포는 무용지물이 될 운명이었다.

그러나 와키사카의 기본 구상은 당장 견내량에서부터 어긋나기 시작했다. 1592년 7월 8일 고요한 새벽을 틈타 견내량에서 여수로 진격할 구상에 바쁜 그 앞에 느닷없이 이순신의 함대가 나타났다. 지휘 함선에서 부하들과 작전 구상을 벌이던 와키사카는 그 급보에 벌떡 일어섰다. 와키사카의 반응은 재빨랐다. 즉시 전 함대에 공격 태세를 갖출 것을 명령했다.

곧이어 조선의 전 함대가 견내량에 모습을 드러냈다. 어차피 작전은 속도전이었다. 와키사카는 전 함대에 공격 명령을 내렸다. 그의 전 함대가 일제히 바다를 가르며 나아갔다. 그러자 무서운 기세로 진격해 들어오던 조선의 선봉함이 주춤하더니 갑자기 선체를 뒤로 돌렸다. 견내량 바다 입구로 돌진하자 그곳에 버티고 있던 조선 함대 본대도 후퇴하기 시작했다. 와키사카는 승리를 확신했다. 이제 조선 함대의 섬멸은 속도에 달렸다. 한 척도 놓쳐서는 안 된다. 한산도 앞바다로 도망가던 조선 수군은 오죽이나 급했던지 대열이 서서히 흩어지고 있었다. 이제 조선 수군과의 접전에 대비해야 하는 국면이었다. 그는 전군에 백병전을 준비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그런데 조선 함대에서 급작스런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도망가던 조선 함대가 서서히 멈춰 섰다. 그러고는 빠른 속도로 선회하기 시작했다. 조선의 함대가 마치 초승달처럼 넓은 바다를 가로막는 것이었다. 학익진이었다. 그러나 와키사카는 학익진은 구사하는 쪽의 전력이 셀 경우에 사용하는 것을 알고 있었고, 더 밀어 붙어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조선 함대의 전투 배치는 이미 끝난 상태였다. 선회를 끝낸 조선 함대에서 강력한 포환이 날아들었다. 와키사카는 버텨야 한다고 판단했다. 와키사카의 일본 함대는 조선의 학 날개 속으로 완전히 들어갔다. 자진하여 그 안으로 뛰어들어간 것이다. 포 사격이 격렬하지만 다시 장전하는 데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 그의 판단이었다. 그러나 일차 포 사격이 끝난 후 조선의 함대가 다시 선회하기 시작했다. 한쪽 포를 쏜 뒤 반대쪽 포를 가동한 것이다. 잠깐 사이 다시 포가 날아왔다.

와키사카의 머리 속에 후퇴라는 절망적인 단어가 스쳤다. 하지만 빠른 속도로 나아가고 있는 일본 함선은 가속도가 붙어 선회하기엔 너무 시간이 걸렸다. 그대로 밀고 들어가는 수밖에 없다. 이윽고 조총 사정거리에 들어오자 일본 함선의 조총과 조선의 화살이 교차되었다. 격전이었다. 하지만 조금만 더 있으면 그의 정예 수군이 적함에 용감하게 기어올라가 적을 모조리 섬멸할 것이라는 믿음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 순간 거북선 두 척이 일본의 선봉 함대의 빠른 속도를 맞받아 칠 기세로 전진해 들어왔다. 거북선은 이미 포사격으로 만신창이가 된 일본 함선을 그대로 받아버렸다. 거북선의 충돌로 일본 함선은 갈가리 찢겨졌고 백병전을 준비하던 부하들이 바다에 수장되었다. 거북선의 저지에 선봉선이 다시 그 뒤의 함선과 충돌했고, 일본 함선끼리 차례로 들이받으면서 생기는 피해도 만만치 않았다. 아비규환이었다. 남은 것은 함선을 뒤로 선회하여 도망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강한 밀집대형 안에서 게다가 선회 폭이 큰 일본 함선으로선 이것도 여의치 않았다. 그 와중에 우리에 갇힌 토끼를 사냥하듯 조선군은 맹렬히 일본 함선을 격파하고 있었다. 퇴로를 두고 최후의 격돌이 벌어졌다. 요행히 조선 수군의 우익 사이를 빠져나간 함선 몇 척의 모습이 보였다. 한산도로 접근한 함선들에 있던 400여 명의 부하들이 조선 수군의 추격을 뿌리치고 함선을 버려둔 채 허겁지겁 근처 숲으로 도망가고 있었다.

패배였다. 이 패전으로 와키사카는 결정적으로 도요토미의 신뢰를 잃었다. 와키사카는 자신의 영광만이 아니라 도요토미의 야망도 일순간에 날려버린 한산해전을 지금도 전하는 그의 『와키사카기』에 이렇게 기록했다.

나의 가신 와타나베를 비롯하여 많은 이가 전사했다. 대장인 나는 노가 많은 배를 탄 덕분에 겨우 도망칠 수 있었다. 도망치는 도중에 조선군의 공격으로 갑옷에 화살을 맞아 위험했으나 구사일생으로 도망치는 데 성공했다.



4. 누구를 위한 휴전협정인가

조명연합군이 여석령과 벽제관 사이의 협곡에서 대패를 한 뒤 파주로 퇴각한 이여송은 그 후유증으로 군대를 다시 개성으로 철군하려 했다. 이여송이 개성까지 철군하면 그 파장은 클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서울 수복의 포기와 함께 전선의 소강상태를 의미했다. 이여송은 평양성 수복이라는 전공을 세운 상태에서 더 이상의 위험 부담을 지고 싶지 않았다. 이여송의 개성 철군 움직임에 조선은 격렬하게 반대했다. 한 번의 패배로 철군하여 전선이 소강상태로 접어드는 것은 결코 용인할 수 없는 사태였다. 하지만 조선의 철군 반대에 대한 명의 대응은 오만 그 자체였다. 원군이 아니라 점령군 같은 태도였다. 그 과정에서 명의 일개 장수가 조선의 순변사 이빈을 발로 차버리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명이 7년 전쟁에 참전한 명분은 일본의 침략으로 위기에 처한 조선을 구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실질적인 참전 목적은 자국의 안보 때문이었다. 한편 명의 참전으로 인해 여러 가지 문제점이 나타났다. 무엇보다 조선 땅에서 벌어진 전쟁에서 조선군이 작전권을 상실한 것이다. 제1차 평양성 전투가 패배로 끝나 조승훈의 명군이 자국으로 도주한 상태에서, 심유경이 벌인 휴전 협상에서도 조선은 의견 개진은커녕 통보만 받는 처지로 전락했다.

벽제관 전투에서 이여송이 패배하자 조선의 작전권 상실은 더 분명해졌다. 그는 서울에 주둔한 일본군과의 강화 협상에 열중했는데, 그 과정에서 유성룡에게 어처구니 없는 사건이 일어났다. 유성룡의 반대 공작으로 강화 사절단이 일본군의 진영에 가지 못했다는 보고를 들은 이여송이 격분하여 곤장 40대를 치려고 유성룡을 끌고 오라고 지시한 것이다. 유성룡이 명의 군사 세 명에게 영문도 모른 채 끌려오던 중 그 보고가 허위로 드러나 다시 유성룡을 풀어준 이 사건은 점령군의 오만과 무례함이 극에 달한 사례였다. 당시 유성룡의 지위는 체찰사, 즉 전시총사령관의 위치였다.



5. 조선 최초의 해군참모총장 이순신

한산도에 전진 기지를 설치하고 적과 대치하던 1593년 10월 9일, 이순신은 조정에서 3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한다는 교서를 받았다. 정식명칭은 전라좌수사 겸 3도수군통제사였다. 3도는 경상, 전라, 충청도를 말한다. 이순신은 보고서에서 3도 수군통제사로 임명된 감격을 감추지 않았다.

뜻밖에도 이번에 3도수군통제사를 겸하라는 명령을 변변치 않은 신에게 내리시니 놀랍고 황송하여 깊은 골에 떨어지는 듯합니다. 신과 같은 용렬한 사람으로는 도저히 감당치 못할 것이 분명하므로 신의 애타고 민망함이 이 때문에 더합니다.

조정이 이순신을 3도수군통제사로 삼은 이유는 무엇일까? 일단 이순신의 공이 훌륭했다는 것을 들어야 한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일까? 3도수군통제사는 새로 만든 자리로, 이순신을 위해 만든 자리다. 아무리 공이 커도 새로 직함을 만들어 앉히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이것을 이순신과 원균의 불화에서 단서를 찾는다면 지나친 상상일까?

그동안 이순신과 원균의 불화에 대해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알만큼 증폭된 상태였다. 같은 수사로서 선의의 경쟁을 벌이면 더 바랄 것이 없을 텐데 실제로는 반대로 흐르고 있었다. 일사불란한 지휘가 생명인 군대에서 그들의 불화는 심각한 전력의 약화를 의미했다. 조정은 그것을 어떤 식으로든 해결해야 했다. 조정은 한 명을 더 높은 지위에 임명하면 힘의 균형이 깨져 불편한 관계도 정리될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이순신의 3도수군통제로 임명 후에도 이순신과 원균의 불화는 더욱 심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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