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 클린턴의 마이 라이프 1
윌리엄 제퍼슨 클린턴 지음 | 물푸레
빌 클린턴의 마이 라이프 1
윌리엄 제퍼슨 클린턴 지음/정영목․ 이순희 옮김
물푸레/2004년 6월/651쪽/16,500원
케네디 대통령과의 짧은 만남
고등학교 생활은 아주 즐거웠다. 2학년을 마친 여름에 나는 일주일간 캠프 로빈슨에서 열리는 미국 재향군인회 주 소년단 행사에 참석했다. 캠프 로빈슨은 오래된 군대 주둔지로, 열여섯 살 난 소년 1,000명이 숙박할 수 있는 원시적인 나무 막사가 있었다. 우리는 도시와 카운티 별로 조직되어, 두 정당으로 똑같이 나뉘었다. 우리는 카운티 이하, 카운티, 주 지방자치체의 후보자와 유권자 역할을 맡았다. 우리는 강령도 만들고 쟁점에 대한 투표도 했다. 또 주지사를 비롯한 여러 중요한 인물의 연설을 들었고, 하루는 주 의사당을 직접 방문하기도 했다. 일주일이 거의 끝날 무렵 양 당은 미국의 수도 근처에 있는 칼리지 파크의 메릴랜드 대학에서 7월 말에 열릴 미국소년단 행사를 위해 두 후보를 지명했다. 선거 결과 가장 많은 표를 얻은 두 사람이 아칸소의 상원의원으로 가기로 했다. 래리 톤턴과 나는 하루 더 선거운동을 한 뒤에 다른 당의 대표들을 물리쳤다. 덕분에 칼리지 파크로 갈 수 있었다. 나는 다른 대표들을 만나고 싶었고, 중요한 쟁점들에 대해 투표를 하고 싶었고, 각료와 다른 정부 공무원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고, 백악관을 방문하고 싶었다. 그곳에 가면 대통령도 만날 수 있기를 바랐다. 1963년 7월 24일, 우리는 백악관 로즈 가든에서 대통령을 만났다. 케네디 대통령은 특히 우리가 시민권을 지지한 것을 칭찬했으며 미국소년단 티셔츠를 증정받고 나서 층계를 내려와 악수를 하기 시작했다. 내가 9학년 학급 토론에서 지지했던 대통령, 백악관에 들어가고 나서 2년 반 뒤에 더 강하게 지지하게 된 대통령을 만나는 것은 나에게는 특별한 순간이었다.
케네디와의 짧은 만남, 그리고 그것이 내 인생에 준 영향에 대해서는 여러 번 이야기를 했다. 어머니는 내가 워싱턴 여행을 마치고 집에 돌아왔을 때 정치를 하겠다는 결심을 굳혔다는 것을 알았다고 말했다. 1992년 내가 민주당 대통령 후보가 된 뒤에는 사람들이 이 악수 장면을 촬영한 필름을 두고 나의 대통령에 대한 꿈이 이때부터 시작되었다고 이야기하곤 했다. 사실 나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에이브러햄 링컨이 젊은 시절에 쓴 글처럼 생각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공부를 하고 준비를 하겠다. 그러면 내게 기회가 올지도 모른다.”
나는 고등학교 정치에서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어, 2학년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나는 학생회장 선거에 출마하고 싶었지만, 우리 고등학교를 감독하던 관할 단체에서는 핫스프링스의 학생들은 지나치게 많은 활동에 참여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결정을 내렸다. 나는 사람들, 정치, 정책에 끌렸으며, 그것은 집안에 돈이 없어도, 연줄이 없어도, 인종이나 다른 문제에 대해 남부의 주류의 입장에 서지 않아도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것은 가능성이 적은 일이었다. 그러나 이런 일에 도전할 수 있다는 것이야말로 미국의 존재 이유가 아니겠는가.
힐러리와의 만남과 사랑
나는 과중한 학업의 부담을 안은 진정한 법학도로서 예일 법대에서의 두 번째 학기를 맞았다. 법대 생활과 정치계의 상황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지만, 나의 개인적인 생활은 엉망진창이었다. 고향으로 돌아가 예전 남자친구와 결혼하겠다는 여자친구와 헤어지고, 한동안은 여자친구를 만들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던 어느 날, 에머슨 교수의 ‘정치와 민권’ 강의실 뒤쪽에 앉아 있는데, 전에 보지 못했던 여학생이 눈에 띄었다. 숱이 많은 갈색 머리에 안경을 쓰고 화장은 하지 않은 차림이었다. 그녀는 내가 일찍이 남자든 여자든 어느 누구에게서도 찾아보지 못했던, 강인하고 침착한 분위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그 후 며칠 동안 학교 여기저기에서 그 여학생을 몇 번 보았지만 그녀에게 선뜻 다가갈 수가 없었다. 어느 날 밤, 그녀는 긴 도서관 통로를 걸어와서는 내 눈을 쳐다보며 말했다. “당신은 계속 날 쳐다보고, 나도 계속 당신을 돌아보고 있으니, 서로 이름쯤은 알아야겠네요. 저는 힐러리 로댐인데요. 당신은요?” 나는 깜짝 놀라서 잠시 동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다음 며칠 동안 우리는 함께 시간을 보냈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태양 아래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몇 주 뒤 나의 어머니가 찾아오셨는데, 힐러리는 이상하게도 어머니의 마음은 사로잡지 못했다. 어머니의 가슴을 끓게 만든 것은 내가 그녀에게 깊이 빠져 있다는 사실이었다. 스타일은 달랐지만, 두 사람 모두 똑똑하고, 끈기 있고, 명랑하고, 정열적인 여성들이었다. 힐러리는 일리노이 주 파크 리지에서 자랐다. 웰즐리 대학교에서 공부하던 4년 동안, 그녀는 민권과 전쟁에 대한 견해 때문에 공화당 지지자에서 민주당 지지자로 변신했다. 그녀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법률 서비스와 아동 문제에 관심이 많았다. 힐러리는 나와 마찬가지로 이상주의적이면서 동시에 실용주의적인 정치관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그녀와 함께 있고 싶었다. 하지만 시간은 우리를 밀어내고 있었다. 힐러리는 여름 방학 때 캘리포니아 주 오클랜드에 있는 ‘트레프트, 워커, 번스타인’ 법률회사에서 일자리를 구했고, 나는 맥거번 상원의원을 위해서 남부 여러 지역을 관리하는 역할을 맡아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나는 일생일대의 정치적인 경험을 하고 싶었다. 스물다섯의 청년으로서는 좀처럼 잡을 수 없는 기회였다. 그런데 이제는 그것을 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플로리다로 가게 되면 힐러리와 나는 서로를 잊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나는 용기를 내어 힐러리에게 물었다. 여름 동안 힐러리를 따라 캘리포니아에 가서 지내면 안 되겠느냐고. 이렇게 해서 우리는 한 달 동안 함께 지내게 되었다. 캘리포니아로 가는 길에 우리는 파크 리지에 들러 그녀의 부모님을 만났다. 힐러리의 어머니인 도로시는 상냥하고 매력적인 부인이었고, 처음 만날 때부터 나와 마음이 잘 맞았다. 하지만 힐러리의 아버지와는 그렇지가 못했다. 휴 로댐은 무뚝뚝하고 말투가 강경한 공화당 지지자였고, 나를 미심쩍게 여기고 있었다. 나는 그가 마음을 돌릴 때까지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노력하기로 결심했다. 힐러리는 그곳에서 힐러리 어머니의 이복동생 에이델린 소유의 작은 집에서 묵을 예정이었다. 이틀 뒤에 나는 워싱턴으로 가서 맥거번 선거운동 책임자인 개리 하트를 만났다. 나는 그들에게 플로리다로 갈 수 없다고 말했다. 그들 생각에는 내가 어리석어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어떤 기회를 잡느냐에 따라 사람의 인생이 결정되기도 하지만, 어떤 기회를 포기하느냐 하는 것도 그 사람의 인생을 결정한다. 나는 선거운동을 하지 못하게 된 것 때문에 마음이 편치 않았다. 나는 2주 정도 코네티컷에 가서 그곳의 조직을 세우는 일을 하겠다고 제안했다. 여름이 끝났을 때도 힐러리와 나의 대화는 끝날 줄을 몰랐으므로, 우리는 뉴헤이번으로 돌아가면 함께 살기로 했다.
나는 맥거번 선거운동에 경쟁적인 본능을 쏟아부었다. 1972년 그해 초에 나는 은행잔고를 긁어모아 캠퍼스 근처에 선거운동 사무실을 열었다. 나는 3주만에 800명의 자원활동가와 약간의 후원금을 끌어 모았다. 나는 예비선거에서 민주당 조직과 강력한 민주당 당수 아더 바비어리와 맞서 싸워야 했다. 나는 바비어리를 설득해서 맥거번을 지지하게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며칠 후에, 바비어리가 사람들에게 뉴헤이번 출신 청년들이 더 이상 베트남에서 죽어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맥거번을 지지할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나는 맥거번이 전쟁 때 쌓은 공적과 케네디 행정부에서 수행했던 활동들을 집중적으로 선전했다. 그날 저녁, 그들은 모두 마음을 바꿨다.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맥거번 상원의원은 1차 투표 때 우리 지역구의 여섯 표 중에 다섯 표를 얻었다. 11월의 투표에서 뉴헤이번은 코네티컷 주에서 유일하게 맥거번을 지지했다. 코네티컷에서 올린 성과 덕분에 나는 맥거번 선거운동의 핵심 인물이 되었다. 맥거번은 뒤늦게 전당대회에 입성했지만 여론조사에서 닉슨 대통령에게 크게 뒤쳐져 있었다. 맥거번은 텍사스에서 67 대 33퍼센트로 패배했다.
1973년 봄 학기에, 치렐스타인 교수가 졸업 후에는 무엇을 할거냐고 물었다. 나는 오라는 데가 없으니 아칸소로 돌아가서 개업을 해야겠다고 대답했다. 그는 페이트빌의 아칸소 법대 교수진에 갑자기 예기치 않은 결원이 생겼으니 그 자리에 지원하면 자신이 추천해주겠다고 말했다. 나는 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대단히 성실한 학생은 아니었지만, 나로서는 만족스러운 법대 시절이었다. 훌륭하고 헌신적인 교수님들과 동료 학생들이 있었고, 나는 이들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다. 그리고 뉴헤이번에서 살았던 덕분에 미국 도시의 현실과 다양한 소수민족의 현실을 인식하게 된 것도 빠뜨릴 수 없는 성과였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성과는 바로 이곳에서 힐러리를 만났다는 것이었다. 선거운동을 돕는 동안, 나는 정치에 대한 열정을 공유하고 선거운동 기술을 배울 수 있는 좋은 친구들을 많이 얻을 수 있었다. 또 한 가지 성과는, 진보주의자로서 선거에서 이기려면, 사람들에게 진로를 바꿔야 하겠다는 확신을 심어주는 메시지와 프로그램이 필요하고, 이것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과 훈련이 필요하다는 것을 재확인한 것이었다.
아칸소의 언덕으로 표를 찾아나선 젊은 후보
6월에 힐러리는 비행기편으로 리틀록에 도착했다. 리틀록에서 아칸소 주 변호사시험 준비 강좌를 함께 들었는데, 강좌 덕분에 우리 둘은 변호사시험에 당당히 합격했다. 시험이 끝난 뒤, 힐러리는 매사추세츠로 돌아가 아동보호재단 활동을 시작했다. 나는 페이트빌로 가서 법학 교수로서의 새로운 생활을 시작했다. 아칸소 법대에 흑인 학생들이 처음으로 입학한 것은 25년 전이었지만, 상당수의 흑인 학생들이 남부 전역의 주립 법대에 입학하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 초였다. 1973년에서 1976년 사이에 내 강좌를 들은 흑인 학생들은 스무 명 남짓 되었다. 나는 내 강좌를 듣지 않는 흑인 학생들도 만나게 되었다. 그들이 대표하는 의뢰인들과 그들의 판결을 받게 되는 당사자들은 그들이 판사석이나 변호석에 오르기 위해서 얼마나 험난한 산을 넘어야 했는지 상상도 못했다. 연방대법원이 2003년에 소수자 할당의 원칙을 지지했을 때, 나는 내가 가르쳤던 흑인 학생들을, 그들의 엄청난 노력을, 그리고 그들이 넘어야 했던 모든 역경들을 생각했다. 그들이 내게 제공해준 모든 증거들 덕분에 나는 대법원의 판결을 지지하는 사람이 되었던 것이다.
아칸소로 돌아오자, 정치적인 공론들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우리 지역에서는 선거전에 나설 만한 사람들이 모두 출마를 꺼리고 있다는 사실이 분명해지자, 나는 하원의원 선거에 직접 출마하는 문제를 신중히 생각하기 시작했다. 페이트빌에는 학생들과 자유주의적인 민주당 지지자들이 있으니 첫 출마 지역으로 삼아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다른 후보들을 위해서 일할 때도 나는 항상 소매점식 정치를 좋아했다. 이제 내 표를 위해서 뛰어다니다 보니, 작은 타운들을 찾아다니고, 길을 가다가 만난 시골가게와 식당, 주유소에 들르는 일이 정말로 마음에 들었다. 예비선거 활동 전 과정은 나에게 큰 힘을 주었다. 나는 계속해서 이어지는 낯선 상황들 속에 뛰어들었고 사람들에 대해서 많은 것을 배웠다. 그해 초 힐러리가 페이트빌을 방문했을 때, 데이비스 학장은 힐러리에게 법대 교수 채용 면접을 보라고 권했다. 그러니까 이제 아칸소에 와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변호사로 개업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며칠 후 힐러리가 전화를 걸어 아칸소로 오고 있다고 말했다.
이틀 후, 어머니가 전화를 걸어와서 제프가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사망했다고 말했다. 어머니와 로저는 큰 슬픔에 잠겼다. 어머니는 이제 세 번째 남편을 잃고, 로저는 두 번째 아버지를 잃은 셈이었다. 나는 제프가 앓기 전까지 당뇨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었다. 나는 대통령이 되었을 때, 줄기세포 연구와 당뇨 자가 치료 프로그램을 적극 지원하게 되었다. 미국당뇨협회는 이 두 가지 프로그램을 인슐린의 개발 이후 당뇨 치료에 있어서 가장 획기적인 진전이라고 밝혔다. 장례식이 끝나고 며칠 뒤에, 어머니는 나를 재촉했다. 어머니가 잘 쓰던 “어서 일어나서 계속해야지” 방식으로 선거운동을 다시 시작하라고 말했다.
선거 당일, 선거운동본부에 모여 개표 상황을 지켜보는 동안 우리는 잔뜩 긴장하고 있었지만, 전국적으로 볼 때는 민주당에게 있어 행운의 날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함머슈미트의 엄청난 대중성과 그가 마지막 순간에 차고 올랐던 민첩성을 뛰어넘을 수 없었다. 선거운동이 시작되었을 때, 그의 지지율은 85퍼센트였다. 나는 그의 지지율을 69퍼센트로 끌어내렸고, 나의 지지율을 0퍼센트에서 66퍼센트로 끌어올렸다. 사람들은 모두 내가 좋은 성과를 올렸으니 장래가 유망하다는 말들을 했다. 그건 듣기 좋으라고 한 말일 뿐, 나는 이기고 싶었다. 1974년에 나는 수천 명의 사람들을 만나면서, 중산층 유권자들은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정부의 행동주의를 지지한다는 것, 그리고 중산층 유권자들이 가난한 사람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정부의 행동주의를 지지하는 경우는, 정부가 그들의 세금을 적절히 이용해서 그러한 노력을 할 때, 그리고 기회를 증대시키려는 노력이 의무의 강요를 동반할 때뿐이라는 것을 직접 목격했다. 그러나 그때 내가 이겨서 워싱턴으로 갔더라면, 나는 절대로 대통령에 당선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 이어질 18년 간의 소중한 아칸소 시절을 놓치고 말았을 것이다.
1975년 10월 11일, 우리는 캘리포니아 드라이브 930번지의 새로 산 집 커다란 거실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두 달 후에 우리는 드디어 멕시코의 아카풀코로 신혼여행을 떠났다. 나는 아카풀코에서 어니스트 베커의 『죽음의 거절(The Denial Death)』이라는 책을 읽었다. 그는 임마누엘 칸트가 던진 인생의 시험문제, 즉 “어떻게 해야 자신에게 주어진 창조과정에서 적절한 장소를 차지할 수 있는가?, 어떻게 해야 인간이 되기 위한 당위로서의 인간의 모습을 배울 수 있는가?”라는 문제에 부딪혔던 것 같다. 베커의 책 덕분에 나는 인생은 노력해볼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12월에 나는 또 한가지 중대한 정치적 결정을 했다. 나는 주 정부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었다. 그 계기를 제공한 것은 짐 가이 터커 법무장관이었다. 짐 가이는 윌버 밀스의 사퇴로 결원이 생긴 의회에 진출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게 되면 법무장관 자리가 비게 될 터인데, 나는 그것에 관심이 끌렸다. 나는 법무장관 선거에 나서기로 결심했다. 학교를 다시 휴직하고 일을 시작했다. 나는 리틀록에서 출마를 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리틀록은 아칸소의 행정 중심지이고, 유권자도 가장 많고 후원금도 가장 많이 모을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되는 지역이었다. 총득표율 55퍼센트에, 75개 카운티 중에서 69개 카운티에서 승리했다. 카터 선거운동본부는 아칸소 지부장을 맡아 달라고 요청했고, 나는 승낙했다. 힐러리도 카터 선거운동에 합류했다. 당시 카터의 주요 공약은 미국 국민처럼 정직한 정부를 만들겠다는 것이었는데, 포드의 주된 공격은 일개 남부 주지사가 대통령을 할 만한 능력이 있겠느냐는 의문을 제기하는 방식이었다. 결국 카터는 여론조사에서 약 2퍼센트 앞섰고, 선거인단 투표에서는 297 대 240으로 포드를 앞섰다. 32세 나이로 최연소 주지사에 당선
1976년의 마지막 두 달 동안, 나는 리틀록을 오가면서 새로운 업무를 시작할 준비를 했다. 높은 이상과 능력을 가진 수많은 사람들이 지원 서류를 냈다. 나는 젊은 여성 법률가들과 흑인 법률가들도 채용했다. 결국 새로 구성된 우리 법무부 직원의 구성 비율은 여성이 25퍼센트, 흑인이 20퍼센트로 당시로서는 기록적인 일이었다. 12월에 힐러리와 나는 리틀록 힐크레스트 지역 5419L 스트리트에 집을 구했다. 중심가에서 가까우면서도 쾌적하고 오래된 주거지역이었다. 힐러리는 로즈 법률회사에 자리를 잡았다. 이때부터 내가 대통령에 당선되어 힐러리가 변호사직을 그만둘 때까지, 힐러리의 소득은 나의 소득보다 훨씬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