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을 바꾼 칭찬 한마디
김홍신 외 31인 지음 | 21세기북스
내 삶을 바꾼 칭찬 한마디
김홍신 외 31인 지음
21세기북스/2004년 7월/270쪽/10,000원
1. 내 안의 진주를 일깨워준 칭찬 한마디
좋은 열매는 천천히 피는 꽃에서 맺히는 거란다 - 소설가 이순원
사람들은 지금 내가 소설을 쓰고 있으니까 어린 시절부터 내 안에 문학적 소양 같은 것이 반짝반짝했을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대학에 입학하기 전까지 단 한 번도 백일장 같은 곳에 나가 상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나는 언제나 그런 상으로부터 멀찌감치 떨어져 있던 아주 평범한 소년이었다. 한 학년이 50명 정도밖에 되지 않는 시골 초등학교의 작은 교내에서도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고 어쩌다 큰 대회에 나가서도 번번이 떨어지기만 하는 나를 믿어주던 한 선생님이 계셨다.
지금은 강릉 어느 초등학교 교장선생님으로, 정년을 앞두고 계시는 분이다. 35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 친구들은 언제나 그 선생님 얘기를 할 만큼 다른 친구들에게도 인상이 각별했던 분이다. 우리가 그분을 처음 만난 건 초등학교 5학년 때였다.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오지 마을에 그때 나이로 스물다섯 살쯤 된 새신랑 선생님이 전근을 오셨다. 지금도 우리 시골 동창들은 그 선생님을 ‘희망등 선생님’이라고 부른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마을에 들어오셔서 저녁마다 등잔이나 남포를 켜놓고 우리의 처진 학습을 지도해주셨기 때문이다. 그때만 해도 중학교를 시험 봐서 들어가던 시절이라 선생님께서는 우리의 밤 공부를 위해 일부러 시골에 들어오신 것이었다. 그때 선생님이 우리에게 준 것은 공부에 대한 자신감만이 아니라 앞으로 어디 나가서도 기죽지 않고 자신의 뜻을 펼칠 자신감이었다.
초등학교 5학년 2학기 때의 일이다. 교내 백일장에서는 물론이고 군 대회에 나가서도 나는 아무 상도 받지 못하고 빈손으로 돌아왔다. 어린 마음으로 나는 참으로 큰 낙담을 했었다. 그런 나를 학교 운동장 가에 있는 커다란 나무 아래 앉혀놓고 선생님께선 이런 말씀을 하셨다.
“같은 매화나무에도 먼저 피는 꽃이 있고, 나중에 피는 꽃이 있지? 그러면 그 나무에서 핀 꽃 중 어떤 꽃에서 열매가 맺을까?” 나는 얼른 대답하지 못했다. 그러자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매화나무는 나무들 가운데에서도 가장 이른 봄에 꽃을 피우는 나무란다. 그런 매화나무 중에서도 다른 가지보다 더 일찍 피는 꽃이 사람들의 눈길을 끌지. 그렇지만 이제까지 살면서 선생님이 보기에 그 나무 중에서 제일 먼저 핀 꽃들은 열매를 맺지 못하더라. 제대로 된 열매를 맺는 꽃들은 늘 더 많은 준비를 하고 뒤에 피는 거란다. 이번 군 대회에 나가서 아무 상도 받지 못하고 오니까 속이 상하지? 나는 네가 그렇게 어른들 눈에 보기 좋게 일찍 피는 꽃이 아니라 이 다음에 큰 열매를 맺기 위해 천천히 피는 꽃이라고 생각한다. 너는 지금보다 어른이 되었을 때 더 재주를 크게 보일 거야.”
그때는 그 말의 의미를 정확하게는 몰랐지만 선생님의 말씀대로 닥치는 대로 집과 학교에 있는 책을 읽었다. 나는 지금도 어린 시절의 독서가 내 작가생활의 가장 큰 자양분이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나에게만 그랬던 것이 아니라 저마다 방법은 달랐지만 우리 친구들 모두 ‘희망등 선생님’에 대한 그런 사연을 하나씩은 가지고 있다. 선생님은 우리들 하나하나에게 그런 칭찬으로 용기를 주셨다.나는 스물한 살때부터 본격적으로 작가수업을 했는데, 신춘문예만 해도 열 번 넘게 떨어지면서 회의와 불안감이 들 때도 많았다. 그때 다시 힘을 내라는 좋은 얘기들과 격려도 많았지만 이런저런 회의로 불안해져 있는 나를 다시 책상에 불러앉혀 더 치열한 습작생활을 하게 했던 것은 ‘너는 제대로 열매를 맺을 큰 꽃’이 될 거라는 어린 시절 은사님으로부터 들은 칭찬 한마디였다. 내가 이제 그만 그 자리에 주저앉고 싶을 때마다 그 칭찬이 또 한 번의 희망과 오기를 가지게 했다.
멀리 떨어져 살아 자주 찾아뵙지는 못해도 우리들 마음 안에 그 선생님은 지금도 환하게 ‘희망등’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지난 번 뵈었을 때 선생님은 훌륭한 제자들을 두고 있는 삶이야말로 얼마나 아름다우냐고 하셨지만 정말 훌륭한 선생님을 마음속에 두고 있는 삶이야말로 얼마나 아름다운가?
미역국보다 더 따뜻한 말 - 네덜란드 아인트호벤 소속 축구선수 박지성
지난 월드컵 경기가 있고 나서 사람들은 나와 히딩크 감독님을 부자지간처럼 끈끈한 정이 넘치는 사이쯤으로 안다. 2002년 한일월드컵 본선 조별 예선전 마지막 경기였던 포르투갈과의 경기에서 골을 넣은 내가 멋진 세레모니 대신 감독님 품에 달려가 안긴 행동이 그런 생각을 불러일으켰을 것이다. 하지만 감독님은 팀 플레이가 우선인 축구에서 선수 한 명에게 정을 쏟아 팀 분위기를 망치는 일 따위는 하지 않으시는 분이다. 감독님은 다정다감한 쪽보다는 엄격하고 정확하며 때로는 칼날보다 더 예리할 만큼 냉철하다. 나뿐만 아니라 다른 선수에게도 편애를 느낄 법한 행동을 하는 것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결국 광고에서처럼 미역국을 끓여 소속 선수에게 식사를 대접하는 감독님의 모습은 상상도 못할 일이다. 다만 감독님의 마음은 미역국 한 그릇보다 더 깊고 따뜻하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나는 어려서부터 축구를 했는데, 집안 형편이 넉넉하지 않아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당장 프로에 입단할 생각만 했다. 그런데 대기업 프로축구단 테스트에서 번번이 고배를 마셨다. 프로 입단을 희망하는 수십, 수백 명의 학생들 중에서 계산 빠른 프로 축구단의 감독이나 스태프의 눈에 들려면 뭔가 남들과는 달라도 분명히 달라야 했다. 키가 크거나 체격 조건이 좋거나 그것도 아니면 공격이건 수비건 특별히 잘하는 장기라도 있어야 하는데, 난 그런 조건 중에 하나도 맞아떨어지는 것이 없었다. 게다가 외모도 평범하고 성격도 내성적이라 좌중을 휘어잡는 스타성마저 없었으니 그들이 탐내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대학팀도 사정은 다르지 않아 다 퇴짜를 맡다가 명지대학교 김희태 감독님 눈에 들어 어렵사리 대학에 진학했다.
그때까지 내 인생은 늘 그랬다. 남들 눈에 띄지 않으니 ‘깡다구’ 하나로 버티는 것이었고, 남이 보든 안 보든 열심히 하는 것을 미덕인 줄 알고 살았다. 덕분에 허정무 감독님이 사령탑으로 계시던 올림픽 대표팀에 합류했고, 얼마 안 있어 일본 교토팀 선수로 스카우트되었다. 그리고 지난해 월드컵 평가전에 우리나라 대표팀에 합류했다. 나는 경험 쌓는 거고 본선 때 한 경기 뛰면 좋겠다는 소박한 마음으로 평가전에 임했다.
그런데 히딩크 감독님은 평가전에서 나에게 예상 외로 많은 기회를 주었다. 하지만 평가전이 있을 때마다 꾸준히 나를 시합에 내보낼 뿐 다른 언질은 전혀 없었다. 그런데 미국 골드컵 때라고 기억된다. 나는 왼쪽 다리에 부상을 입어 시합에 나가지 못해 텅 빈 탈의실에 혼자 남아 있었다. 잘할 수 있는 기회를 조금이라도 더 많이 보여야 할 그 중요한 때에 하필이면 부상을 당했나 싶어 애꿎은 다리만 바라보며 맥이 빠져 앉아 있었다. 그런데 어디선가 히딩크 감독님이 통역관을 대동하여 나타나서 영어로 뭐라고 말씀하셨다. 무슨 말인지 몰라 통역관을 바라보니, “박지성 씨는 정신력이 훌륭하대요. 그런 정신력이면 반드시 훌륭한 선수가 될 수 있을 거라고 말씀하셨어요.”라고 말했다. 얼떨떨하고 가슴이 두근거렸다. 늘 멀리 있는 분 같기만 했는데, 그런 감독님이 내 곁에 다가와 내 정신력이 훌륭하다는 말을 했다는 것만으로도 힘이 솟았다.
더욱이 그 말은 내 심중을 꿰뚫고 있었다. 내세울 것 하나 없는 나일지라도 오래 전부터 내가 믿어왔던 것은 죽는 한이 있어도 버티겠다는 정신력이었다. 평발이라는 신체조건도 정신력 하나로 버텼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눈에 띄지 않는 정신력 따위를 높게 평가하지는 않았다. 당장 눈에 보이는 현란한 개인기와 테크닉만 바라보았다. 그런데 히딩크 감독님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여드름 투성이 어린 선수의 마음을 읽고 있기라도 한 듯 ‘정신력이 훌륭하다.’는 칭찬을 해주셨던 것이다. 그 칭찬을 듣는 순간 머리가 쭈뼛 설 만큼 내 자신이 대단해 보였다.
월드컵 내내 감독님이 던진 칭찬 한마디를 생각하며 경기에 임했다. 침착하고 조용한 성격이라 남의 눈에 띄지 않는 것이 달갑지 않을 때도 있었지만 히딩크 감독님이라면 어디선가 또 나를 지켜보며 조용한 눈빛으로 격려하고 있을 거란 생각에 자신감이 생겨났다.
만약 내가 히딩크 감독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지금의 나도 없었을 것이다. ‘지금의 나’라는 것이 유명세를 얻었다거나 돈을 많이 벌게 되었다는 의미는 아니다. 예전보다 더 내 자신을 사랑하는 ‘나’가 되어 있다는 것이다. 감독님이 던진 채 1분도 안 되는 그 말 한마디는 앞으로 내가 살아갈 나머지 인생을 바꾸어 놓았다.
2. 험한 세상 다리가 되어
이담에 쟤가 한자리 할 애다 - 두란노 아버지학교운동본부장 김성묵
당시 내가 사는 인천은 야구로 매우 유명한 도시였다. 고등학교 야구가 인기 있던 시절, 인천의 고등학교 야구부는 전국대회 우승을 거의 휩쓸었고, 국가대표 선수들은 대부분 인천 출신이었다. 동네가 온통 야구로 들떠 있어 어린 나는 야구가 세상에서 제일 좋고 멋진 일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학교가 끝나면 야구 연습에 몰두했다. 그런데 공부가 문제였다. 책가방은 늘 전날 가지고 갔던 것을 그대로 다시 둘러메고 학교로 갔고, 숙제를 제대로 해간 적도 별로 없었으니 성적은 당연히 바닥이었다. 하지만 위로 세 형은 공부를 아주 잘해서 동네 사람들은 우리 집을 ‘공부 잘하는 집’, ‘수재들의 집’이라고 불렀다. 이런 명예로운(?) 집안에 부끄럽게도 꼴찌에 가까운 동생이 있으니 흥분한 것은 형들이었다.
방학하는 날, 성적표를 보던 형들이 한심한 듯 나를 바라보았다.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을 만큼 창피했던 나는 고개도 못 들고 있는데, 나지막하게 귓전을 때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얘들아, 그만 해라. 이담에 쟤가 한자리 할 애다.” 아버지이셨다. 빙긋이 웃으며 “성묵이는 심지가 굳은 아이야.”라는 말씀도 해주셨다. 쥐구멍을 찾던 나는 그 말 한마디에 큰 힘을 얻었다. 그렇다고 그날부터 갑자기 공부 열심히 하는 학생이 되었다는 극적인 반전은 없었다. 나는 여전히 야구경기장을 쫓아다녔고, 성적은 바닥을 벗어나지 못했다. 하지만 자상하시고, 나에 대한 믿음을 보여주시는 아버지 덕에 성적은 나빠도 열등감은 없었다.
그러다가 6학년이 되었고, 내 생각이 바뀌기 시작했다. 공부해서 좋은 대학에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아버지를 졸라 어려운 살림에 과외를 받았고, 촛불을 켜놓고 새벽 2~3시까지 공부를 계속하여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 전교 3등을 하고, 형들이 졸업한, 인천에서 제일 좋다는 중학교에 당당히 합격했다.
집이 넉넉하지 못해 나는 중학교 2학년 때부터 아이들을 가르치는 아르바이트를 해서 고 3때까지 용돈을 벌었다. 그리고 내가 존경하는 아버지의 설계사 일을 물려받기 위해 서울대 공대를 목표로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입학시험을 4개월 여 남겨두고 폐결핵과 신경쇠약으로 병원에 입원을 하게 되었다. 너무나 큰 아픔을 겪었던 그때도 아버지는 내 곁에 계셨다. 그러던 중에 입학시험이 다가왔다. 내가 바라던 공대를 못 갈 바에는 공부하고 싶었던 역사철학을 공부하자는 생각으로 사학과를 지원했을 때도, 해군에 지원해 근무할 때도 아버지의 믿음은 변함이 없었다.
6개월의 군복무를 마치고 휴가를 얻어 집으로 돌아와보니 아버지는 고혈압으로 쓰러져, 그 후유증으로 반신불수에 언어능력을 상실한 상태였다. 나는 간신히 눈물을 참으며 아버지를 바라보았고, 그때 아버지가 갑자기 왼손으로 뭔가를 가리켰다. 그곳에는 대학 노트가 몇 장 놓여 있었는데, 그 종이에는 아버지가 왼손으로 쓴 내 이름 석 자가 가득했다. 그것은 내 편지에 대한 답장이었고, 나에 대한 사랑이었고, 나에 대한 믿음이었고, 나에 대한 기대였다. 내가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이담에 쟤가 한자리 할 애다. 쟤는 심지가 굳은 아이야.”라는 말씀으로 오늘날의 나를 만드신 아버지를 나는 참 많이 사랑한다.
영미의 칭찬일기 - 인천 검단중학교 교사 김상복
나는 중학교 도덕교사다. ‘칭찬일기’는 내가 수업시간에 아이들에게 내주는 숙제다. 매일 부모님께 한 가지씩 칭찬을 해드리고 그 상황과 부모님의 반응을 적어오는 아주 간단한 일이다. 몇 년 전 아이들에게 설문조사를 해보니 화목하지 않은 가정에서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아이들이 많았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부모님에게 가장 듣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물어보니, 아이들은 하나같이 ‘참 잘했다.’는 칭찬이나 ‘너를 믿는다.’는 신뢰의 표현이라고 했다. 그 말을 들으며 한동안 아내와 내가 참여했던 부부관계 회복 프로그램에서 하루에 한 번씩 부부가 서로를 칭찬하라는 숙제를 하면서 전보다 훨씬 더 서로를 잘 이해하고 서로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던 것을 기억해냈다. 가족이 가까워지고 서로를 소중하게 생각하면 제아무리 밖에서 힘든 일을 겪어도 살아갈 힘이 생긴다. 난 그때 일을 떠올려 아이들에게도 칭찬을 숙제로 내주기로 했다.
그러나 아이들이 적어낸 칭찬일기를 보면서 처음에는 내가 무엇을 잘못 생각한 것은 아닐까 하는 우려가 들었다. 예상보다 많은 부모님들이 아이들 칭찬에 인색했고, 당신들이 칭찬받는 것에 익숙하지 않아 아이들 마음에 상처가 될 만한 반응을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칭찬의 힘은 서서히 나타났다.
영미(가명)도 그 가운데 한 명이다. 맞벌이를 하는 부모님과 동생이 둘 있는 평범한 가정이었는데, 영미는 칭찬일기를 쓰기 시작하면서 오히려 부모님의 반응에 실망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매일 도시락을 싸주시니 좋다며 건강하시라는 딸아이의 칭찬에 엄마는 “니 엄마가 겨우 도시락 싸주는 사람으로 보이니?”라고 하는 등 매일 이어지는 영미의 칭찬은 늘 “쓸데없는 소릴 하지 말아라.”라는 식이거나 “공부나 해.”라는 대답으로 되돌아왔다. 아니면 부모님은 용돈이 필요해 아양 떠는 정도로만 인식했다.그런 부모님이 너무 밉다고 털어놓는 영미의 칭찬일기를 두 달째까지도 계속됐다. 그런데 영미의 칭찬일기를 계속 넘기면서 부모님이 변하는 것이 보였다. 부모님은 영미의 칭찬에 웃음을 보이기도 했고, 가끔은 아이의 칭찬하는 모습을 칭찬하기도 했다.
“칭찬일기를 쓰면서부터 엄마한테 혼나도 대들지 않게 됐어요. 부모님이 얼마나 고생하는지도 알게 됐고, 내가 부족한 부분도 보이거든요. 내년에 제 후배들도 칭찬일기를 했으면 좋겠어요.” 두 달 동안의 칭찬일기 숙제가 끝나고 나서 영미가 한 말이다.
올해 검단중학교로 전근을 와서 이제는 영미의 모습을 보지 못한다. 그렇지만 이 학교에서도 칭찬일기 수행평가를 실시하면서 처음에는 부모님에게 실망하고 마음 아파하다가도 결국에는 가족 모두의 얼굴에 웃음이 활짝 피어나는 아이들을 많이 본다. 집안에 힘든 일이 있는데도 아이들에게 웃음을 보이려는 엄마에게 한 학생이 말했다. “엄마, 힘들 땐 울어도 괜찮아요. 엄마는 지금 충분히 우리를 위해 노력하고 계시잖아요.” 엄마는 눈에 눈물이 고이면서도 웃으셨다.
이보다 더 나은 칭찬이 어디 있을까? 이보다 더 큰 위로를 어디에서 받을 수 있을까? 집안의 그 힘든 일을 혼자서 지고 가야 하는 줄 알았는데, 철부지요 어린애 같던 딸이 어느새 친구가 되어 엄마를 이해해주고 무거운 짐을 나눠지고 있는 것이다. 세상의 어떤 어려움도 이 가정의 행복을 허물지 못할 것이다.
3. 유년의 낡은 사진을 환히 밝혀준 등불처럼
바슬리 선생님의 칭찬 같지 않은 칭찬 - 신경정신과 전문의 김창기
때는 1970년대 중반이었고, 나는 외무관으로 오스트레일리아 대사관에서 근무하게 된 아버지를 따라 캔버라에서 중학시절을 보내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자신감이 없던 나는 백인들 사이에서 더욱 기가 죽어지냈다. 축구와 음악만이 유일한 피난처였다. 나는 미친 듯이 공을 찼고 잠들 때까지 음악을 들었다.
나는 폴 사이먼을 아주 많이 좋아했는데, 폴 사이먼의 초기 노래 중 ‘소 롱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So Long Frank Lloyd Wright)라는 노래를 곱씹어 들으며, 도대체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라는 사람이 누구일까 궁금해했다. 알고 보니 그는 매우 유명한 미국의 건축가였다. 당시 그에 대해 무지했던 나로서는 그의 인생과 업적을 하나둘 얻어갈수록 건축에 관심이 커져서 나중에 커서 건축가가 되겠다는 결심을 하기에까지 이르렀다. 그래서 학교에서 선택과목으로 건축의 기초가 될 제도를 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