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사석원의 황홀한 쿠바
사석원 지음 | 청림출판
2004년 2월 9일, 나는 왜 쿠바로 가는가나는 왜 하필이면 쿠바라는 먼 나라로 여행을 떠나려는 것일까, 그것도 혼자서. 그러니까 1년쯤 되었나 보다. 어느 주말 저녁, 한가로이 집에서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이라는 다큐멘터리 영화를 보고 있었다. 쿠바를 배경으로 하여 쿠바 음악인들의 연주를 담은, 독일 감독 빔 벤더스가 만든 영화였다. 자, 영화가 시작되면 한 낡은 승용차 한 대가 방파제를 따라 달려온다. 그때 카리브해의 하얀 파도가 방파제를 훌쩍 뛰어넘어 속절없이 자동차를 덮친다. 그런데도 차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렇게 바닷물을 뒤집어 쓴 채 길을 따라 유유히 계속 달려간다. 아직도 굴러다니는 게 신기할 정도인 낡은 세단과 사람이 도저히 살 것 같지 않은 남루한 건물은, 너무나 낭만적으로 보이는 기다란 방파제와 극적인 대조를 이루면서 엄청나게 강한 인상을 던져 주었다. 그 장면으로 끝이었다. 그 장면을 본 순간부터 난 그만 쿠바의 포로가 되고 만 것이다. 당장이라도 쿠바로 달려가서 그곳의 바람과 햇볕을 쐬며, 럼주 칵테일을 손에 든 채 애절한 리듬의 재즈를 들으면서, 그 땅에서 자라나는 나무와 꽃들을 바라보고 새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쿠바인들의 삶에 껴안긴 채 그들의 숨소리, 사랑의 노래, 아픔의 눈물을 온몸으로 느끼고 헤아려 보고 싶었다. 그로부터 1년, 드디어 그토록 꿈꿔왔던 쿠바를 향해 떠난다.
새벽 3시, 잠들지 않는 멕시코저녁 5시 30분, 멕시코시티의 베니토 후아레스 공항에 도착했다. 쿠바로 가는 비행기를 타기 위해선 적어도 멕시코에서 하룻밤은 자야 한다. 밤에는 쿠바까지 연결되는 비행기 편이 없기 때문이다. 어차피 자야 하는 것이니 이왕이면 관광도 할 겸, 멕시코에서 아예 이틀 정도 묵기로 미리 계획을 세운 참이었다. 공항에서 '유'를 만났다. 내 고등학교 후배의 동생인 그는 나와는 초면이었는데, 첫 인상이 선해 보였다. 멕시코에서 식당을 경영하고 있으며 이곳에 온 지 거의 4년 가까이 된다고 했다. 스페인어를 별 불편없이 구사한다니 같이 쿠바에 가면 큰 도움을 받을 수 있으리라. 택시를 타고 우선 한국인들이 많이 사는 곳으로 가기로 했다.
충남 홍성이 고향이라는 한국인 민박집에 짐을 풀었다. 푸짐한 한국식 저녁을 먹고, 안전을 염려하는 주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우린 처음 들렀던 소나 로사의 암부르고 거리로 나갔다. 암부르고 거리엔 몇 개의 큰 서점이 있었는데, 어떤 곳은 카페테리아도 겸하고 있어서 아주 고급스러우면서도 세련된 분위기를 풍겼다. 특이한 것은, 서점의 중요한 자리엔 으레 프리다 칼로(1907∼1954, 멕시코의 여류 화가)에 관한 책이 놓여 있다는 점이다. 책뿐만 아니라 엽서며 장신구며 프리다 칼로에 관한 것들이 너무 많아서, 마치 멕시코에서 지금 프리다 칼로의 탄생기념 행사라도 벌어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 정도였다. 암부르고 거리 곳곳에 있는 품위 있는 멕시코 레스토랑들은 고급 옷을 입은 손님들로 북적거렸다. 하지만 그런 화려한 이면에는, 원주민 전통 복장을 한 인디오들이 어두운 골목에 주저앉은 채 구걸을 하는 모습도 적잖이 눈에 띄었다. 멕시코 인구 중 십분의 일인 천만 명 정도를 인디오라고 추정하는데, 그들 대부분은 극빈자로 살아간다고 한다.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인디오들의 그런 슬픈 질곡의 역사는 따지고 보면 제국주의 국가들의 수탈의 역사가 아닌가. 거대한 이 도시는 인디오에겐 정복자들이 만들어 놓은 지옥일지도 모른다.
밤11시가 넘은 시간, 딱정벌레같이 생긴 고물 택시를 타고 돌아오다가 숙소 근처에 포장마차가 성업중인 곳이 있어 잠깐 구경을 갔다. '또띠야', 즉 옥수수 반죽을 기름에 튀겨 만든 빈대떡 비슷하게 생긴 것에 각종 고기들과 야채를 싼 다음, 살사라는 멕시코 소스를 듬뿍 쳐서 먹는 '타코'라 불리는 요리를, 사람들이 모두 선 채로 열심히 먹고 있었다. 열심히 타코를 먹는 사람들 뒤에서 허름한 차림의 중년 부부가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른다. 구걸을 위해서 부르는 거라니, 참으로 곤궁한 도시의 세레나데가 아닌가. 건기인 2월의 멕시코 날씨는 참 좋다. 약간 선선한 것이 꼭 한국의 가을 날씨 같다. 다만 밤에는 기온이 뚝 떨어져 추운 편이다. 멕시코 하면 떠오르는 것들이 무엇일까? 영화배우 안토니오 반데라스, 월드컵을 두 번이나 개최한 축구 강국, 타바스코 등 각종 소스의 천국, 프레스코 벽화로 유명한 화가 디에고 리베라와 시케이로스, 비극의 여류 화가 프리다 칼로, 아카풀코와 '뱀의 둥지'란 뜻을 지닌 칸쿤의 환상적인 바다, 선인장으로 만든 독주 데킬라, 마야 문명과 아스텍 제국, 스페인의 침공과 식민지 그리고 농민 혁명, 영화 〈달콤쌉싸름한 초컬릿〉, 가톨릭 교회와 회벽… 대충 따져봐도 그런 것들이 떠오른다. 아, 한 가지 덧붙인다면 엄청나게 매운 멕시칸 고추.
여기는 하바나입니다현지 시간으로 오후 1시 55분, 쿠바의 호세 마르티 국제 공항에 도착했다. 약 150년 전에 태어나 쿠바 독립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사람이 바로 호세 마르티라고 한다. 비행장엔 달랑 비행기가 두 대뿐이다. 공항 주변에 건물은 별로 보이질 않고 푸른 들녘만 한가롭게 널려 있다. 여기가 진짜 쿠바구나. 잠자고 있던 설렘이 다시금 파도처럼 몰려 왔다. "올라(안녕하세요), 쿠바!"
쿠바의 입국 심사는 소문대로 매우 까다로와 보였다. 관리들이 카키색 군복을 입은 채 표정 없이 있어서 정말 사회주의 국가에 왔다는 것이 실감났다. 공항은 작았지만 지은 지 얼마 안 된 듯 깨끗했고 퍽 한산했다. 공항 구석 한켠에 호텔을 예약하는 창구에서는, 책상 하나에 푸짐한 아줌마 둘이 앉아 창구일을 보고 있었다. "올라!" 우리가 다가가자 그 넉넉한 몸매를 흔들면서 애교스럽기도 하고 호들갑스럽기도 한 어투로 반갑게 맞이한다. 억센 억양의 스페인어로 하바나의 호텔들을 설명하는데, 우리들이야 알아듣건 말건 쉴 새 없이 떠드는 그녀들의 모습에서 남국의 정열이 느껴지고, 그 흥겨운 리듬의 말투에 쌓였던 피로며 긴장마저 사라진다. 바닷가 방파제 옆에 있는 리비에라 호텔에서 3일, 시내 한복판에 있는 잉그라테라 호텔에서 2일. 모두 하바나의 대표적인 특급 호텔들이란다. 닷새의 호텔료로 모두 560달러를 지불했으니 하루 숙박료가 백 달러도 넘는 셈이었다. 리비에라는 경관이 좋은 곳에 있고, 잉그라테라는 아주 오래된 유서 깊은 호텔일 뿐만 아니라 청소하는 아줌마들이 아침마다 인사로 꼭 껴안아 준다는 말에 다른 호텔은 거들떠도 안보고 그곳으로 정해 버렸다.
공항택시가 도착했는데 그러고 보니 한국제 마티즈이다. 공항을 떠난지 얼마 안 돼서 오래된, 그러면서도 어딘지 스페인풍으로 지어진 건물들과 군살없이 쭉쭉 뻗은 학생들의 모습이 꽤나 이국적으로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곳 쿠바의 인종 분포는, 인구의 절반 가량이 백인과 아프리카 흑인들 사이의 혼혈이고 그 다음이 스페인계 백인, 그리고 약 10퍼센트쯤이 흑인들, 나머지는 아주 극소수의 아시아인들로 구성되어 있다. 지금이 쿠바에선 기온이 가장 낮은 거라지만, 아열대 기후답게 땡볕이 내리쬐는 한국의 여름날처럼 무덥다. 우리가 탄 택시가 혁명가 체 게바라의 얼굴을 부조로 형상화한 건물 앞을 지나갔다. 드디어 '체'를 만났다는 반가움에 약간의 전율까지 느껴진다. 그렇다, 여기는 혁명의 나라다. 체 게바라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지 오래되었지만 그가 그토록 사랑한 인민을 위한 개혁은 아직 요원하게만 보인다. 그러기에 혁명은 아직도 진행중인 것이다, 이 쿠바에선.
아름다움이란 건 때론 알 수가 없다리비에라 호텔에 도착하자 유의 얼굴엔 실망하는 빛이 역력하다. 호텔은 페인트 칠이 벗겨져서 마른 버짐이라도 핀 아이의 얼굴 같다. 1957년에 세워진 리비에라 호텔은 354개의 객실을 갖춘 20층짜리 대형 호텔이지만 1959년의 혁명, 미국과의 단교와 동구권 공산주의 국가들의 몰락으로 인한 경제적 고통 등 순탄치 않은 과거를 그대로 보여주는 듯했다. 하지만 그런 실망도 잠시, 호텔 바로 옆에 말레콘이라 불리는 방파제가 늘어져 있는 걸 보니 바로 나가지 않을 수 없었다. 100년 전에 만들어졌다는 이십 리나 되는 이 콘크리트 방파제엔 오후의 뜨거운 햇빛 때문인지 사람들이 거의 보이진 않지만 파란 하늘과 바다, 1950년대의 낡고 퇴색된 올드 카들이 그 옆을 버젓이 지나가며 몽환적인 세계를 연출하고 있었다.
그런 말레콘을 따라 조금 걷다가, 오토바이에 노란색 뚜껑을 씌워서 만든 코코 택시를 잡아타고 5분 거리에 있다는 하바나 구시가지로 갔다. 불과 5분에 불과했지만, 말레콘을 따라 이어진 옛 건물을 보는 동안 쿠바의 아픈 역사와 삶의 흔적이 느껴졌다. 대개가 5층 이상으로 비교적 높은 건물이 많았는데 건물의 도색이 심하게 벗겨져 있고, 기울어져 가는 거대한 건물을 보잘것 없는 몇 개의 나무 기둥으로 가까스로 버티게 한 것과 녹슨 문과 계단의 먼지 등 그 음울함이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아름다움이란 것은 때론 알 수가 없다. '폐허미'라고나 할까, 저 쇠락한 폐허 같은 건물들은 스산한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비극을 초월하려는 또 다른 미까지 숨어있었다. 삶의 슬픔들이 진하게 덧입혀진 건물들에는 마치 불탄 대지 위에 파란 싹이 새롭게 돋아나는 것처럼 희망을 포기하지 않은 사람들이 창문과 발코니마다 서서 손짓하고 있다. 유네스코는 1982년 이곳 구시가지 전체를 인류 문화 유산으로 지정했다. 하바나가 갖고 있는 과거의 흔적들과 삶의 형상들을 아름답다고 인정한 것이고 소중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리비에라, 화려한 밤은 가고매일 어김없이 경쾌한 음악으로 넘쳐나는 하바나의 밤은 황홀하다. 그중 몇 개의 쇼는 전세계의 찬사를 받을 만큼 매력적이라고 하는데 그런 화려한 공연들이 골수 사회주의 국가인 쿠바에서 벌어진다는 게 참으로 흥미롭다. 우린 리비에라에서의 마지막 밤을, 하바나의 대표적인 나이트 클럽인 '카사 드라 무시카'에서 보내기로 결정했다. 공연은 밤 11시 30분에 시작하는데, 하바나에선 자정녘이 되어야 공연을 시작하는 곳이 많다고 한다. 15달러라는, 적지 않은 입장료를 내고 들어온 200평쯤 되는 실내가 손님들로 꽉 찼는데 대부분 외국인 관광객들이다. 결국 새벽 1시나 되어서 공연이 시작했고, 네 명의 여성들과 두 명의 남성들로 이루어진 중창단이 막을 연다. 과연 쿠바 음악의 진수를 보여 주는 공연답게 경쾌하면서도 단순히 가볍지만도 않은 품위 있는 쇼가 진행되고 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지 매춘부들이 남자들만의 자리를 찾아 웃음을 흘리고 있는 게 눈에 띄었다. 결국은 그녀들을 피해 아직도 뜨거운 열기가 발산되고 있는 공연장을 빠져 나가지 않을 수 없었다.
시간은 새벽 2시 반. 우린 남아 있는 정열을 발산하러 말레콘으로 향했다. 욕망과 순수가 만나는 경계 같은 곳, 말레콘은 벌써 내게 그리운 공간으로 자리매김되었다. 그곳엔 전에 만난 적 있는 말레콘의 가수 데이빗과 그의 친구들이 리비에라 호텔 근처에 있는 마켓 옆의 작은 공간에서 노랠 부르다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우릴 반긴다. 데이빗이 내게 선물한 첫 곡은 〈대장 체 게바라〉라는, '체'에 관한 추모곡이었다. 기타의 슬픈 음률은 바람에 더욱 슬프게 흔들린다. 회피하고 싶지만 피할 수 없는 죽음 앞에서, 몸부림치지 않고 의연하게 순교자적 길을 걸어간 풍운아. 그리하여 우리 시대의 가장 완전한 인간이라는 평을 받았던 영원한 동지 게바라를, 데이빗은 엄숙하고도 격앙된 음색으로 찬미하고 있었다. "이제 우리가 작별할 시간이 온 게지. 영원한 승리의 그날까지! 뜨거운 혁명의 열기로 얼싸안으며."
올드 하바나의 미로 속을 헤매다올드 하바나는 커다란 박물관이다. 당혹스러우리만치 낡은 건물들이 폐허처럼 쓰러질 듯 말 듯 겨우 서 있는 그 곳은 말끔함이라고는 찾아 볼 수가 없다. 그런데도 하바나에선 특유의 환상적인 매력이 분출한다. 애절함이 포함된 강렬한 리듬이 거리마다 유유히 흘러 다닌다. 하바나는 혁명의 도시답게 이념의 자부심이 대단하다. 거리 곳곳에 쓰인 '승리할 때까지'라는 체 게바라의 글귀는 섬뜩하기까지 하다. 하바나에선 지도를 구하기가 쉽지 않다. 적지 않은 돈을 주고 겨우 구한 지도도 별 도움이 되지 못한다. 그저 잉그라테라 호텔을 중심으로 이 골목 저 골목을 직접 다녀볼 수밖에. 옛 식민지 양식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올드 하바나에는 많은 박물관, 기념관, 화랑, 교회, 성채 그리고 갖가지 역사적 기념물들이 거리마다 골목마다 널려 있다. 그렇지만 만약 어느 한 곳에서 아주 많은 시간을 보내지 않는다면야 하루만에도 다 볼 수 있을 정도로, 올드 하바나는 그리 넓지 않다.
잉그라테라 호텔을 나와 왼쪽으로 길을 건너면 양옆에 차도가 있고, 가운데에는 폭이 약 20미터쯤 되는 대리석 도로가 놓였다. 도로의 입구 양옆으로 검은 사자상이 서 있는 이 길이 바로, 하바나 사람들이 말레콘과 더불어 세계에 자랑한다는 호세 마르티 길이다. 평소엔 '프라도'라고 불리는 이 길은 하바나의 북쪽 방향 그러니까 바닷가 쪽으로 약 1킬로미터 가량 뻗어 있고 길 양 옆엔 돌로 만든 벤치들이 도열하듯 늘어섰다. 170년 전에 만들었다는 프라도엔 그 당시 길가에 심었던 나무들이 하늘을 덮을 지경으로 자라나 있어 꽤나 고즈넉하다. 애기 보는 노인, 시가 피는 노인, 담소하는 노인, 뜨개질 하는 노인 등 벤치마다 주로 노인들이 앉아있다. 그리고 띄엄띄엄 경찰들이 경계 근무를 서고 있다. 프라도 입구 쪽에 사람들이 모여 드는데 팔고 사는 물건이 없는 것으로 보아 시장이 선 것도 아닌데, 수첩을 들고 몇몇씩 뭔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궁금하여 유가 물어보니 집을 서로 교환하기 위해 왔다고 한다. 집의 소유권은 국가에 있고 개인은 서로의 필요에 따라 살고 있는 집을 맞바꿀 수 있다는 것이다. 그제야 쿠바가 사회주의 국가라는 것이 실감나는 순간이었다.
가게에서는 늘 줄을 서야 한다잉그라테라에서 떠나는 날이다. 기대했던 청소부 아주머니들이 해준다는 아침 인사 포옹은 다 거짓말이었다. 호텔 1층에 있는 상점에서 기념품으로 체 게바라가 그려진 티셔츠를 2장 샀는데 그 중 한 개가 너무 길어 엉덩이를 덮는 정도라서 교환을 요구했더니, 점원은 뜻밖에도 출납금 기계에 이미 내역이 찍혔기 때문에 곤란하다는 것 아닌가. 매니저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는데 그럴러면 최소한 하루는 기다려야 했고 오늘 나는 이 호텔에서 나가야 했다. 나는 거의 폭발 직전이었고 아가씨는 울어버릴 태세다.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시스템이다. 하여튼 쿠바에선 모든 것이 손님 위주가 아니고 주인 위주다. 물건을 사려는 사람은 많고 가게는 별로 없다. 특급 호텔의 상점이 이 정도니 다른 곳은 말할 필요도 없지 않은가. 올드 하바나엔 중국인들 사는 거리 근처에 백화점 비슷한 곳이 한 군데 있긴 하지만 한국 같은 곳이 아니고 단지 좀 더 큰 건물 안에 여러 가게들이 밀집해 있다는 것이다. 그나마 어떤 품목은 도난 때문에 만져 보지도 못한 채 조금 떨어진 곳에서만 구경할 수 있다. 그곳은 건물 안으로 밀려드는 사람들로 초만원이었다.
쿠바에선 비누 같은 생활 필수품들도 달러로만 살 수 있는데 일반 사람들이 무슨 달러가 있겠는가? 고작 10달러 내외의 월급으로 최소한의 필수품도 구하기가 어렵다. 필수적인 몇몇 식료품은 배급을 받는다고 한다. 달마다 1인당 쌀 2.5킬로그램, 설탕 1.5킬로그램, 생선 1킬로그램, 28그램의 커피 그리고 달걀은 얼마 전까진 14개였다가 지금은 8개로 줄었다고 한다. 달러를 가지고 있다 해도 문제는 끝나지 않는 것이 생필품 가게마다 길게 늘어서 있는 줄들은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다. 45년 간 지속된 미국의 쿠바 봉쇄령에 세계적 기업들의 대리점은 하바나에선 전혀 찾아볼 수가 없다. 외국인들이 쿠바에 투자를 한다든지 점포를 개선하고 싶어도 조건이 까다롭고 통제가 심하다나. 어쨌든 백화점을 구경하는 일 자체가 짜증난다. 백화점 가게 문 앞에서 줄을 서서 기다리다가 몇 명씩 끊어 입장할 수 있는 상황이니, 무슨 서비스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문제는 점포만 부족한게 아니라 물건도 턱없이 부족하다. 하지만 쿠바인의 입장에서 보면, 소련이 붕괴될 당시 전 국민이 굶어죽기 직전까지 갔었기 때문에 빈 땅만 있으면 채소를 가꾸고 오늘날 식량을 자급자족할 수 있게 되었으니 풍요롭다고 느낄 것이다. 하지만 나같은 보통 사람은 상대적 관점을 가질 수 밖에 없어 초라해 보인다. 과거에는 쿠바의 사탕수수를 비싼 값에 소련으로 수출하고 또한 소련의 원유를 국제 값보다 훨씬 싸게 들여와 그만큼 쿠바 경제도 넉넉했지만, 지금 상황으로 보면 그 때는 꿈만 같았던 시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