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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사석원의 황홀한 쿠바

사석원 지음 | 청림출판
쿠바를 떠나기 전에 꼭 가보고 싶은 곳이 있었다. 하바나에서 시작해 곧장 남쪽으로 향하면 섬 반대쪽에 있는 트리니나드란 작고 아름다운 도시. 이곳 역시 유네스코 지정 인류 문화유산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장소는 하바나와 트리니나드 중간쯤에 위치한 산타클라라였다. 혁명군이 무찔러야 될 최대의 적은 바티스타의 철옹성이었던 곳이다. 체 게바라가 지휘하는 400명의 게릴라 대원들은 3000명의 정부군이 수비하던 산타 클라라로 진격했고, 그것은 결국 하바나 해방의 도화선이 된다. 나중에 체 게바라가 볼리비아에서 죽임을 당한 뒤, 30년이 지난 후에야 송환된 게바라의 시신이 묻혀 있는 곳도 바로 산타클라라다. 그러니 산타클라라는 혁명의 도시, 순교자의 도시가 아닌가. 다음날 오후 우리는 드디어 산타클라라에 도착했다. 그동안 주욱 평지만을 달려 왔는데 이곳엔 산이 많았고 그 산들에 방목해 놓은 말들도 많았다. 카페에선 악사의 반주와 더불어 〈승리할 때까지, 대장이여〉라는 체 게바라에 관한 노래가 심심찮게 들려온다. 그가 습격해서 전복시킨 정부군의 장갑 열차가 아직까지 보존되어 있었다. 1958년 12월 30일에 있었던 승리의 격전지를 떠나 버스로 5분쯤 갔을까. 커다란 콘크리트 광장에 불끈 솟아 있는 체 게바라의 동상과 거대한 사각의 기념탑이 서있다. 동상 밑이 바로 체 게바라의 묘지다.



1959년 1월 하바나에 혁명군이 입성한 후 체는 혁명 정부에서 '전국농업개혁위원장', '중앙은행총재', '산업상' 등의 직책을 수행한다. 피델에 이은 2인자로서, 인간의 욕망이 물질로부터 자유롭고, 노동이 유희가 되는 경제를 실현하는 국가를 만들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그래서 체는 이때 북한을 비롯한 여러 나라를 방문하기도 하지만 그의 근본주의적 경제 정책은 대내외적인 비판과 어려움에 봉착하게 되고, 결국 1965년 4월 그의 오랜 혁명 동료였던 피델 카스트로에게 "피델, 나는 지금 많은 것들을 회고하고 있습니다"로 시작되는 작별 편지만을 남긴 채 모든 직위를 버리고 콩고로 게릴라전을 수행하기 위해 홀연히 떠난다. '나는 쿠바 혁명에서 나의 임무를 완수했다고 생각합니다'로 이어지는 편지는, '어느 하늘 아래서 나의 최후를 맞이할 때라도 나는 끝까지 이 민중과 특히 당신을 생각할 것입니다'로 끝을 맺는다. 체는 콩고에서 9개월 간 게릴라 전을 벌이지만 성공하지 못한 채, 1966년 11월 볼리비아로 잠입한다. 하지만 볼리비아에서 게릴라 전은 고전의 연속이었다. 1967년 10월 8일 체는 계곡에서 정부군에 사로잡혀 CIA에 의해 사형당했다. 일기와 함께 잘린 체의 두 손이 쿠바로 보내지자 전 세계는 경악했고, 나이 서른 아홉에 두 눈을 부릅뜬 채 그는 생애를 마감했다.쿠바에서의 마지막 만찬이제 내일이면 삼월이 되고 나는 쿠바를 떠난다. 내 인생에 있어서 하바나에서의 스무 날은 마치 새로 맞은 봄날 같았다. 암울하고 버겁던 일상을 겨울로 비유한다면, 쿠바 여행은 그런 겨울에서 벗어나 문득 삶의, 세상살이의 아름다움을 맛보여 주었다. 어느 순간 다시 쓸쓸해지고 찬바람이 불어오면 나는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의 〈찬찬〉을 들을 것이다. 그리고 커다란 하바나 시가를 몇 모금 피우고 카리브해의 아름다운 별들을 떠올릴 것이다. 우리 모두를 낭만주의자로 만든 하바나. 그 하바나에 대한 열정은 식을 줄 모른 채 가슴속에서 아름다운 강물처럼 흐를 것이다. 쿠바는 약이고 또 독이다. 독은 독인데 황홀한 독이다. 알아서들 하시라, 가 보든지 말든지. 어쨌든 말레콘엔 여전히 파도가 치고 있을 것이다. 태어나서 한 번도 보지 못했을 환상적인 파도가 줄지어, 줄지어 몰아치고 있을 것이다. 그래, 쿠바는 그런 곳이다.새벽 3시, 잠들지 않는 멕시코저녁 5시 30분, 멕시코시티의 베니토 후아레스 공항에 도착했다. 쿠바로 가는 비행기를 타기 위해선 적어도 멕시코에서 하룻밤은 자야 한다. 밤에는 쿠바까지 연결되는 비행기 편이 없기 때문이다. 어차피 자야 하는 것이니 이왕이면 관광도 할 겸, 멕시코에서 아예 이틀 정도 묵기로 미리 계획을 세운 참이었다. 공항에서 '유'를 만났다. 내 고등학교 후배의 동생인 그는 나와는 초면이었는데, 첫 인상이 선해 보였다. 멕시코에서 식당을 경영하고 있으며 이곳에 온 지 거의 4년 가까이 된다고 했다. 스페인어를 별 불편없이 구사한다니 같이 쿠바에 가면 큰 도움을 받을 수 있으리라. 택시를 타고 우선 한국인들이 많이 사는 곳으로 가기로 했다.



충남 홍성이 고향이라는 한국인 민박집에 짐을 풀었다. 푸짐한 한국식 저녁을 먹고, 안전을 염려하는 주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우린 처음 들렀던 소나 로사의 암부르고 거리로 나갔다. 암부르고 거리엔 몇 개의 큰 서점이 있었는데, 어떤 곳은 카페테리아도 겸하고 있어서 아주 고급스러우면서도 세련된 분위기를 풍겼다. 특이한 것은, 서점의 중요한 자리엔 으레 프리다 칼로(1907∼1954, 멕시코의 여류 화가)에 관한 책이 놓여 있다는 점이다. 책뿐만 아니라 엽서며 장신구며 프리다 칼로에 관한 것들이 너무 많아서, 마치 멕시코에서 지금 프리다 칼로의 탄생기념 행사라도 벌어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 정도였다. 암부르고 거리 곳곳에 있는 품위 있는 멕시코 레스토랑들은 고급 옷을 입은 손님들로 북적거렸다. 하지만 그런 화려한 이면에는, 원주민 전통 복장을 한 인디오들이 어두운 골목에 주저앉은 채 구걸을 하는 모습도 적잖이 눈에 띄었다. 멕시코 인구 중 십분의 일인 천만 명 정도를 인디오라고 추정하는데, 그들 대부분은 극빈자로 살아간다고 한다.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인디오들의 그런 슬픈 질곡의 역사는 따지고 보면 제국주의 국가들의 수탈의 역사가 아닌가. 거대한 이 도시는 인디오에겐 정복자들이 만들어 놓은 지옥일지도 모른다.



밤11시가 넘은 시간, 딱정벌레같이 생긴 고물 택시를 타고 돌아오다가 숙소 근처에 포장마차가 성업중인 곳이 있어 잠깐 구경을 갔다. '또띠야', 즉 옥수수 반죽을 기름에 튀겨 만든 빈대떡 비슷하게 생긴 것에 각종 고기들과 야채를 싼 다음, 살사라는 멕시코 소스를 듬뿍 쳐서 먹는 '타코'라 불리는 요리를, 사람들이 모두 선 채로 열심히 먹고 있었다. 열심히 타코를 먹는 사람들 뒤에서 허름한 차림의 중년 부부가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른다. 구걸을 위해서 부르는 거라니, 참으로 곤궁한 도시의 세레나데가 아닌가. 건기인 2월의 멕시코 날씨는 참 좋다. 약간 선선한 것이 꼭 한국의 가을 날씨 같다. 다만 밤에는 기온이 뚝 떨어져 추운 편이다. 멕시코 하면 떠오르는 것들이 무엇일까? 영화배우 안토니오 반데라스, 월드컵을 두 번이나 개최한 축구 강국, 타바스코 등 각종 소스의 천국, 프레스코 벽화로 유명한 화가 디에고 리베라와 시케이로스, 비극의 여류 화가 프리다 칼로, 아카풀코와 '뱀의 둥지'란 뜻을 지닌 칸쿤의 환상적인 바다, 선인장으로 만든 독주 데킬라, 마야 문명과 아스텍 제국, 스페인의 침공과 식민지 그리고 농민 혁명, 영화 〈달콤쌉싸름한 초컬릿〉, 가톨릭 교회와 회벽… 대충 따져봐도 그런 것들이 떠오른다. 아, 한 가지 덧붙인다면 엄청나게 매운 멕시칸 고추.여기는 하바나입니다현지 시간으로 오후 1시 55분, 쿠바의 호세 마르티 국제 공항에 도착했다. 약 150년 전에 태어나 쿠바 독립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사람이 바로 호세 마르티라고 한다. 비행장엔 달랑 비행기가 두 대뿐이다. 공항 주변에 건물은 별로 보이질 않고 푸른 들녘만 한가롭게 널려 있다. 여기가 진짜 쿠바구나. 잠자고 있던 설렘이 다시금 파도처럼 몰려 왔다. "올라(안녕하세요), 쿠바!"



쿠바의 입국 심사는 소문대로 매우 까다로와 보였다. 관리들이 카키색 군복을 입은 채 표정 없이 있어서 정말 사회주의 국가에 왔다는 것이 실감났다. 공항은 작았지만 지은 지 얼마 안 된 듯 깨끗했고 퍽 한산했다. 공항 구석 한켠에 호텔을 예약하는 창구에서는, 책상 하나에 푸짐한 아줌마 둘이 앉아 창구일을 보고 있었다. "올라!" 우리가 다가가자 그 넉넉한 몸매를 흔들면서 애교스럽기도 하고 호들갑스럽기도 한 어투로 반갑게 맞이한다. 억센 억양의 스페인어로 하바나의 호텔들을 설명하는데, 우리들이야 알아듣건 말건 쉴 새 없이 떠드는 그녀들의 모습에서 남국의 정열이 느껴지고, 그 흥겨운 리듬의 말투에 쌓였던 피로며 긴장마저 사라진다. 바닷가 방파제 옆에 있는 리비에라 호텔에서 3일, 시내 한복판에 있는 잉그라테라 호텔에서 2일. 모두 하바나의 대표적인 특급 호텔들이란다. 닷새의 호텔료로 모두 560달러를 지불했으니 하루 숙박료가 백 달러도 넘는 셈이었다. 리비에라는 경관이 좋은 곳에 있고, 잉그라테라는 아주 오래된 유서 깊은 호텔일 뿐만 아니라 청소하는 아줌마들이 아침마다 인사로 꼭 껴안아 준다는 말에 다른 호텔은 거들떠도 안보고 그곳으로 정해 버렸다.



공항택시가 도착했는데 그러고 보니 한국제 마티즈이다. 공항을 떠난지 얼마 안 돼서 오래된, 그러면서도 어딘지 스페인풍으로 지어진 건물들과 군살없이 쭉쭉 뻗은 학생들의 모습이 꽤나 이국적으로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곳 쿠바의 인종 분포는, 인구의 절반 가량이 백인과 아프리카 흑인들 사이의 혼혈이고 그 다음이 스페인계 백인, 그리고 약 10퍼센트쯤이 흑인들, 나머지는 아주 극소수의 아시아인들로 구성되어 있다. 지금이 쿠바에선 기온이 가장 낮은 거라지만, 아열대 기후답게 땡볕이 내리쬐는 한국의 여름날처럼 무덥다. 우리가 탄 택시가 혁명가 체 게바라의 얼굴을 부조로 형상화한 건물 앞을 지나갔다. 드디어 '체'를 만났다는 반가움에 약간의 전율까지 느껴진다. 그렇다, 여기는 혁명의 나라다. 체 게바라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지 오래되었지만 그가 그토록 사랑한 인민을 위한 개혁은 아직 요원하게만 보인다. 그러기에 혁명은 아직도 진행중인 것이다, 이 쿠바에선.아름다움이란 건 때론 알 수가 없다리비에라 호텔에 도착하자 유의 얼굴엔 실망하는 빛이 역력하다. 호텔은 페인트 칠이 벗겨져서 마른 버짐이라도 핀 아이의 얼굴 같다. 1957년에 세워진 리비에라 호텔은 354개의 객실을 갖춘 20층짜리 대형 호텔이지만 1959년의 혁명, 미국과의 단교와 동구권 공산주의 국가들의 몰락으로 인한 경제적 고통 등 순탄치 않은 과거를 그대로 보여주는 듯했다. 하지만 그런 실망도 잠시, 호텔 바로 옆에 말레콘이라 불리는 방파제가 늘어져 있는 걸 보니 바로 나가지 않을 수 없었다. 100년 전에 만들어졌다는 이십 리나 되는 이 콘크리트 방파제엔 오후의 뜨거운 햇빛 때문인지 사람들이 거의 보이진 않지만 파란 하늘과 바다, 1950년대의 낡고 퇴색된 올드 카들이 그 옆을 버젓이 지나가며 몽환적인 세계를 연출하고 있었다.



그런 말레콘을 따라 조금 걷다가, 오토바이에 노란색 뚜껑을 씌워서 만든 코코 택시를 잡아타고 5분 거리에 있다는 하바나 구시가지로 갔다. 불과 5분에 불과했지만, 말레콘을 따라 이어진 옛 건물을 보는 동안 쿠바의 아픈 역사와 삶의 흔적이 느껴졌다. 대개가 5층 이상으로 비교적 높은 건물이 많았는데 건물의 도색이 심하게 벗겨져 있고, 기울어져 가는 거대한 건물을 보잘것 없는 몇 개의 나무 기둥으로 가까스로 버티게 한 것과 녹슨 문과 계단의 먼지 등 그 음울함이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아름다움이란 것은 때론 알 수가 없다. '폐허미'라고나 할까, 저 쇠락한 폐허 같은 건물들은 스산한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비극을 초월하려는 또 다른 미까지 숨어있었다. 삶의 슬픔들이 진하게 덧입혀진 건물들에는 마치 불탄 대지 위에 파란 싹이 새롭게 돋아나는 것처럼 희망을 포기하지 않은 사람들이 창문과 발코니마다 서서 손짓하고 있다. 유네스코는 1982년 이곳 구시가지 전체를 인류 문화 유산으로 지정했다. 하바나가 갖고 있는 과거의 흔적들과 삶의 형상들을 아름답다고 인정한 것이고 소중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리비에라, 화려한 밤은 가고매일 어김없이 경쾌한 음악으로 넘쳐나는 하바나의 밤은 황홀하다. 그중 몇 개의 쇼는 전세계의 찬사를 받을 만큼 매력적이라고 하는데 그런 화려한 공연들이 골수 사회주의 국가인 쿠바에서 벌어진다는 게 참으로 흥미롭다. 우린 리비에라에서의 마지막 밤을, 하바나의 대표적인 나이트 클럽인 '카사 드라 무시카'에서 보내기로 결정했다. 공연은 밤 11시 30분에 시작하는데, 하바나에선 자정녘이 되어야 공연을 시작하는 곳이 많다고 한다. 15달러라는, 적지 않은 입장료를 내고 들어온 200평쯤 되는 실내가 손님들로 꽉 찼는데 대부분 외국인 관광객들이다. 결국 새벽 1시나 되어서 공연이 시작했고, 네 명의 여성들과 두 명의 남성들로 이루어진 중창단이 막을 연다. 과연 쿠바 음악의 진수를 보여 주는 공연답게 경쾌하면서도 단순히 가볍지만도 않은 품위 있는 쇼가 진행되고 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지 매춘부들이 남자들만의 자리를 찾아 웃음을 흘리고 있는 게 눈에 띄었다. 결국은 그녀들을 피해 아직도 뜨거운 열기가 발산되고 있는 공연장을 빠져 나가지 않을 수 없었다.



시간은 새벽 2시 반. 우린 남아 있는 정열을 발산하러 말레콘으로 향했다. 욕망과 순수가 만나는 경계 같은 곳, 말레콘은 벌써 내게 그리운 공간으로 자리매김되었다. 그곳엔 전에 만난 적 있는 말레콘의 가수 데이빗과 그의 친구들이 리비에라 호텔 근처에 있는 마켓 옆의 작은 공간에서 노랠 부르다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우릴 반긴다. 데이빗이 내게 선물한 첫 곡은 〈대장 체 게바라〉라는, '체'에 관한 추모곡이었다. 기타의 슬픈 음률은 바람에 더욱 슬프게 흔들린다. 회피하고 싶지만 피할 수 없는 죽음 앞에서, 몸부림치지 않고 의연하게 순교자적 길을 걸어간 풍운아. 그리하여 우리 시대의 가장 완전한 인간이라는 평을 받았던 영원한 동지 게바라를, 데이빗은 엄숙하고도 격앙된 음색으로 찬미하고 있었다. "이제 우리가 작별할 시간이 온 게지. 영원한 승리의 그날까지! 뜨거운 혁명의 열기로 얼싸안으며."올드 하바나의 미로 속을 헤매다구 소련제 라다 승용차가 도착한 시간은 아침 10시 30분. 하바나 근교를 다니려면 아무래도 차가 필요했다. 그때 생각난 사람이 바로 아드리아나. 얼마 전 올드 하바나의 카페에서 우연히 만났던 백인 소녀다. 우리가 먼저 찾아간 곳은 한적한 어촌 코이마르. 집에서 30분쯤 걸려 도착한 코이마르엔 『노인과 바다』의 저자 헤밍웨이의 흉상이 바다를 바라보며 서 있었다. 이곳이야말로 바로 소설 『노인과 바다』의 배경이 되었던 곳이다! 날씨는 흐린 채 간간이 비도 내렸다. 성채라 하기엔 좀 뭣한, 돌로 된 작은 망루가 얕은 비를 맞으며 고풍스러운 모습으로 바닷가에 서 있었다. 아담한 바닷가의 어촌, 너무 초라해서 별로 볼 것이 없을 거라는 말을 미리 듣긴 했지만, 나는 왠지 쓸쓸한 이 풍경이 맘에 든다. 노인들은 한가롭게 바닷가에서 맥주를 마시고, 코이마르의 작은 말레콘에선 아이들이 강아지와 노닐고 있다. 말레콘 옆에는 소설에서 소년이 노인에게 맥주를 대접하던 주점, '카페 라 테레사'가 있다. 노를 든 채 라 테레사 앞은 지나는 한 소년을 보고 있자니, 마치 내가 소설 속에라도 들어온 것 같은 느낌이다.



카페에 들어가 소설에서처럼 쿠바 맥주를 주문했다. 테라스의 테이블에서 맞는 바람은 차갑게 느껴진다. 코이마르엔 배가 한 척도 보이질 않는다. 가끔 파도치는 소리를 제외하곤 지나칠 정도로 조용하다. 어촌의 흔적만 있을 뿐이다. 이곳에서 145킬로미터쯤 더 가면 미국 본토가 나올 것이다. 플로리다 주의 마이애미가 바로 거기에 있다. 그곳을 향해 많은 쿠바인들이 나무 상자나 스티로폼으로 만든 조악한 뗏목을 타고 해류에 의지해 목숨을 건 항해를 한 것이, 그 유명한 보트 피플이다. 보트 피플의 절반 가량은 바다에서 목숨을 잃었다고 하니 그 슬픈 역사의 출발지가 바로 이곳 코이마르인 것이다. 다음 행선지는 마리나 헤밍웨이. 코이마르에서 하바나 말레콘을 거쳐 가는데 30∼40분쯤 걸린다고 한다. 유원지 겸 선착장이다. 바람이 거세고 가끔이지만 비도 내려 마리나 헤밍웨이에 있는 배들은 출항을 못한 채 정박 중이었다. 모두 하나같이 멋진 요트들이다. 쿠바 국기를 달고 있는 화려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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