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사의 슈퍼 히로인들
이나미 리츠코 지음 | 작가정신
서시의 등장오왕 부차는 원래 여색을 밝히는 쾌락적인 인물이었다. 그래서 뛰어난 미녀를 바치면 부차를 흐물흐물하게 녹일 수 있다는 제안에 구천은 월나라 국내를 샅샅이 뒤져 저라산(苧羅山)에 사는 가난한 나무꾼의 두 딸을 찾아냈다. 하나는 서시, 또 하나는 정단(鄭旦)이라고 한다. 이들은 호화로운 옷을 차려입는 법이나 예의범절 따위를 일단 배운 다음, 회계 시내의 화류계로 옮겨 가무음곡에서부터 요염하게 교태 부리는 법까지를 철저히 배운다. 이렇게 3년, 저라산에서 자란 두 시골 처녀는 어디 한 군데도 흠잡을 데 없는 세련된 절세 미녀로 변신했다. 때가 무르익자 범려는 서시와 정단을 데리고 오나라로 가 부차에게 선을 보였다. 물론 부차는 크게 기뻐하며 오자서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이 선물을 받았다. 에로스에 탐닉하던 부차는 특히 서시의 미모에 빠져들어 점점 판단력을 잃게 되었다. 가장 경계해야 할 대상은 인접한 월나라라는 오자서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월나라를 충실한 속국처럼 생각했다. 한편 월나라로부터 계속 뇌물을 받고 있던 태재 백비는 자의식이 지나친 부차를 교묘히 조종하여 눈엣가시 같은 오자서를 모략해 자결하게 했다. 복수할 기회를 노리는 월나라에게 가장 버거운 존재였던 오자서가 비참하게 죽자, 정세는 월나라 쪽에 유리하게 기울어졌다. 월나라 군대는 무려 3년 동안이나 각지에서 오나라 군대를 격파하면서 서서히 포위망을 좁혀갔다. 오나라는 마침내 멸망했다.서시와 범려의 러브 스토리부차가 자살하고 오나라가 멸망한 뒤 서시는 어떻게 되었을까. 서시의 그 후에 대해서는 온갖 설이 분분하지만, 크게 두 가지 설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월나라에 구출되었지만 결국 "미녀는 나라의 재앙"이라 하여 구천이나 범려에게 살해되었다는 설이고, 또 하나는 범려와 함께 국외로 탈출했다는 설이다. 이렇게 범려가 관련되면 이야기가 갑자기 재미있어진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났을 때, 범려와 서시가 아무리 서로 사랑하여 헤어질 수 없는 사이가 되었다 해도, 범려는 월왕 구천의 참모이고 서시는 오왕 부차에게 바쳐질 몸이다. 요컨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다. 그래서 서시는 연인 범려의 '공모자'로 오나라에 들어가 부차를 농락하여 오나라의 내부 붕괴를 가속화하는 자신의 역할을 멋지게 해낸다. 눈에 띄는 행동을 하면 의심받게 되니까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그저 나긋나긋하게 존재할 뿐이다. 고혹적인 미녀를 연기하면서 부차의 마음이 자기한테 기울어지기를 조용히 기다린다. 때가 무르익어 월나라는 마침내 오나라를 멸하고, 부차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오나라에 보복하기 위해 월왕 구천을 뒷받침했던 범려는 이제 무대에서 물러날 때가 되었고, 더 이상 월나라에 머무는 것은 오히려 위험하다고 판단하고, 역시 자신의 역할을 멋지게 해낸 서시와 함께 모든 것을 버리고 새로운 삶을 찾아 바다 저편으로 떠난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월왕 구천과 오왕 부차를 포함하여 그녀를 도구로 여긴 자들에게 통렬한 앙갚음을 했다. 오나라가 멸망한 뒤, 월나라도 오래가지 못한다고 저주하며 죽어간 오자서. 이와는 대조적으로 월왕 구천의 뒤통수를 치고 상쾌하게 변신한 범려. 그리고 신화의 주인공과도 비슷한 이런 사내들 틈에서 치열하게 살았던 미녀 서시. 이들이야말로 환영처럼 홀연히 나타났다 홀연히 사라진 남쪽 나라 오나라와 월나라를 주제로 한 이 일대 로망의 주인공들이다.수당 제국의 여인천하 - 독고황후와 측천무후
독고황후의 결벽증통일 국가를 이룩한 수나라 문제(文帝)는 관리등용시험인 '과거'를 창설하여 관료 기구를 정비하고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는 등 정치력이 뛰어난 인물이었다. 게다가 절대 권력을 손에 넣은 황제답지 않게 실질강건하여 향락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의 생활은 아주 검소하고 단정했다. 문제가 이처럼 근실했던 것은 강력한 파트너인 독고황후(553∼620년)를 두려워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는 명문 출신의 아내를 어려워해, 아내 앞에서는 고개를 들지도 못했다. 수왕조가 성립한 뒤, 공식적인 자리에서도 문제 뒤에는 반드시 독고황후가 있었다. 독고황후는 남다른 정치 감각을 살려 문제를 원격조종했다. 하지만 문제는 독고황후의 이런 24시간 감시체제의 틈새를 교묘히 빠져나가, 한 아름다운 궁녀에게 마음을 빼앗긴 적이 있었다. 문제와 궁녀의 관계를 금새 알아차린 독고황후는 격분하여, 문제가 조정에서 정무를 보고 있는 틈에 다짜고짜 그 궁녀를 죽여버린다. 남편 문제와 늘 대등한 관계로 지내는 것을 좌우명으로 삼은 독고황후는 남편을 꽁꽁 옭아맸을 뿐만 아니라, 여자관계가 단정하지 못한 사람은 아들에서부터 친족과 중신에 이르기까지 모두 증오하고 배척했다.
맏아들 양용(楊勇)이 황태자 자리에서 쫓겨난 것도 본처를 학대하고 첩의 아양에 놀아나는 등 여자관계가 엉망이어서 어머니 독고황후에게 밉보였기 때문이다. 맏아들 양용에게 넌더리가 난 독고황후는 언뜻 착실해 보이는 둘째아들 양광(楊廣)을 편들게 된다. 바로 이 양광이 나중에 중국 역사상 보기 드물게 사치스러운 방탕 천자로 이름을 떨친 수나라 제2대 황제 양제(煬帝)다. 문제와 독고황후가 함께 양광의 저택을 찾아왔을 때는 미녀를 모두 별실에 숨겨놓고 늙은 여자와 추녀들만 눈에 띄게 하여 독고황후를 기쁘게 했는가 하면, 현이 끊어진 먼지투성이의 악기를 일부러 눈에 잘 띄는 곳에 늘어놓아 향락과는 거리가 먼 강직한 사람을 가장해 근실한 문제를 감탄시키기도 했다.수왕조의 붕괴양광이 황태자가 된 후 안심한 독고황후는 2년 뒤에 쉰 살을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독고황후의 죽음은 무려 36년 동안 아내의 감독을 받으며 위축되어 있던 문제를 단번에 해방시켰다. 이제까지의 근실함은 어디로 가버리고, 문제는 노골적으로 후궁에 틀어박혔다. 그가 가장 사랑한 것은 진나라 선제(宣帝)의 딸인 진부인이었다. 어느 날 문제는 진부인과 함께 수도 장안의 서쪽에 있는 인수궁이라는 별궁에 머물고 있다가 중병에 걸렸다. 그러자 양광이 틈을 보아 진부인을 강간하려고 했다. 진부인은 간신히 뿌리치고 문제의 병실로 와 자초지종을 말하고 문제는 격분했다. 문제는 당장 폐태자인 양용을 불러들여 복위시키려 했지만, 이미 양광은 연락을 접하고 부하들을 아버지의 병실로 보내 아버지를 죽였다. 이렇게 양광은 태연히 수왕조 제2대 황제 자리에 앉았지만 그의 문란한 생활과 파멸적인 낭비에 불만을 품은 백성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그리고 수왕조의 제2대 황제가 된 지 14년째 되던 해에 쿠데타를 일으킨 근위대 병사에게 목졸려 죽는다.
수왕조는 아버지와 아들이 쾌락주의로 기울어지는 것을 막고 있던 독고황후가 세상을 떠난 순간부터 구심력을 잃어버렸다. 무서운 독고황후의 위협이 사라지자마자, 아버지와 아들은 대립하여 싸웠다. 결국 아버지를 죽인 양제는 쾌락을 추구하면서 일사천리로 나락을 향해 굴러 떨어졌던 것이다. 독고황후는 스스로 권좌에 오르지는 않았지만, 궤도를 벗어나는 것을 절대 용납하지 않는 금욕적인 결벽증으로 걸핏하면 어두운 쾌락 충동에 사로잡힌 남편과 아들을 단속했다. 좋든 나쁘든 독고황후는 400년에 걸친 남북 분열에 마침표를 찍고 중국 전국을 통일한 수왕조의 구심력을 구현한 존재였다.당왕조의 성립과 측천무후의 등장중국 역사에서 유일무이한 여제(女帝)가 된 측천무후(則天武后)는 원래 태종의 후궁이었다. 북조의 미의식에 걸맞은 풍만한 미소녀로 성장한 측천무후는 정관 12년에 그 평판을 전해들은 태종의 부름을 받고 열다섯 살에 태종의 후궁이 되었다. 하지만 태종에게 특별한 존재가 되지 못한 채 후궁에 틀어박혀 있던 측천무후의 운명은 정관 23년 태종의 죽음을 전후하여 태종의 아들이자 당왕조 제3대 황제가 된 고종(高宗)과 우연히 마주친 것을 계기로 크게 달라진다. 고종이 첫눈에 측천무후에게 홀딱 반해서, 태종이 죽은 뒤 측천무후를 제 후궁에 맞아들인 것이다. 나이도 측천무후보다 네 살 아래인 데다 성격도 나약한 고종은 야심가인 측천무후에게는 이상적인 파트너로서 그는 뭐든지 측천무후가 하라는 대로 했다.
고종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은 측천무후는 맹렬히 황후 자리를 노리기 시작한다. 황후가 되기 위해서는 우선 현재 황후인 왕황후를 밀어내야 한다. 측천무후는 이때 목적을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음험한 술책을 부렸다. 자기가 자신의 딸을 이불에 뒤집어씌워 질식시키고는 자식이 없던 왕황후에게 덮어씌운 것이다. 왕황후가 살인범이라고 믿은 고종은 왕황후를 쫓아내고 측천무후를 황후로 삼을 결심을 굳힌다. 하지만 세습 귀족과 군벌을 중심으로 하는 왕황후파들이 맹렬히 반대했다. 반면에 신분이나 계층에 관계없이 과거에 급제한 진사 출신을 중심으로 하는 신흥 관료층은 모두 측천무후를 지지했다. 결국 격렬한 권력투쟁 끝에 측천무후가 승리하여 황후 자리를 손에 넣는다. 측천무후가 당당히 황후가 된 것은 사실 역사의 변화를 보여주는 획기적인 사건이기도 했다. 그것은 측천무후를 후원한 신흥 관료층이 남북조 시대 이래의 세습 귀족이나 군벌로 이루어진 구세력을 밀어내고 정치 기구나 사회의 중추를 차지하는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알리는 사건이었다.서태후의 등장함풍(咸豊) 2년, 서태후는 열여덟의 나이에 함풍제(咸豊帝)의 후궁으로 뽑혀 궁궐에 들어갔다. 아름다운 여자들이 어떻게든 황제의 눈에 띄려고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후궁가운데 서태후는 유달리 눈에 띄는 존재였다. 키가 175센티미터나 되는 당당한 체격에 의연한 미모. 만주족은 전족을 하는 풍습이 없으니까, 물론 천족(전족을 하지 않은 자연스러운 발)이다. 서태후는 이렇게 보는 사람을 압도하는 자태와 미모를 갖추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큰 장점은 아주 총명하고 교양도 높았다는 것이다. 이리하여 함풍제의 총애를 받게 된 서태후는 후궁에 들어간 지 4년 뒤인 함풍 6년에 아들을 낳았다. 이 아들이 나중에 제10대 황제가 된 재순(載淳)이다. 재순은 함풍제의 맏아들이었기 때문에, 생모인 서태후의 지위도 비약적으로 높아졌다.
나라 안팎에 어려운 문제가 산더미처럼 쌓이자, 함풍제는 될 대로 되라는 자포자기에 빠져 유능한 서태후에게 정무를 맡기게 되었다. 원래 정치적 관심이 많고 권력욕도 왕성한 서태후는 이를 기화로 차츰 중앙 정치 무대에 진출하게 된다. 그러던 차에 함풍 10년에 영국·프랑스 연합군이 북경으로 쳐들어왔다. 연합군의 북경 침공을 앞두고 겁이 난 함풍제는 이복 동생인 공친왕(恭親王) 혁흔(奕 )을 북경 수비 책임자에 임명하고 뒷일을 맡긴 뒤, 황후와 서태후와 아들 재순 및 신임하는 중신 몇몇을 데리고 북경 북서쪽에 있는 열하(熱河)의 별궁으로 황급히 피신했다.
함풍제가 열하로 피신한 다음 달, 북경에 남은 혁흔은 이제 더 이상 방법이 없다고 판단하고 패전 처리에 착수하여, 영국·프랑스와 북경조약을 맺었다. 이 조약은 홍콩 섬 건너편에 있는 구룡도(九龍島)를 영국에 할양하고, 영국과 프랑스에 각각 8백만냥의 배상금 지불을 약속하는 등 중국에 가혹한 조건으로 가득 차 있었다. 수도 북경이 함락을 면한 것이 유일한 구원이었다. 이리하여 연합군이 북경에서 철수했는데도 함풍제는 열하를 떠나려 하지 않았다. 미적미적 미루고 향락에 탐닉하는 나날을 보내다가, 이듬해인 함풍 11년에 몸이 쇠약해져서 어이없이 죽어버린다. 드디어 서태후가 본격적으로 나설 차례가 되었다.동·서태후의 권력 탈취함풍제는 임종할 때 열하에 동행한 재원·단화·숙순을 비롯한 8명의 중신들에게 당시 여섯 살이었던 재순을 잘 보필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어쨌든 함풍제가 죽자마자 어린 재순이 즉위했고 그가 동치제(同治帝)다. 동치제가 즉위하자마자 궁정 내부의 권력 투쟁이 치열해졌다. 함풍제의 유명을 받은 8명의 중신이 황후와 서태후를 업신여기고 실권을 장악하려 한 것이 발단이었다. 여기가 승부처라고 판단한 서태후는 황후와 힘을 합쳐 북경수비를 맡은 혁흔과 몰래 접촉해 단숨에 쿠데타를 일으킨다. 북경에 8명의 중신보다 먼저 도착한 서태후 등은 혁흔을 불러, 당장 8명의 중신을 체포해 사형을 처했다. 황후와 서태후의 정적을 소탕한 이 '신유정변(辛酉政變)'이 일어난 것은 함풍제가 죽은 지 석 달도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물론 신유정변이 일어난 뒤 서태후가 단독으로 실권을 장악한 것은 아니었다. 겉으로는 어린 동치제를 동태후(함풍제의 정식 황후)와 서태후가 함께 보좌하는 이른바 '수렴청정' 체제를 갖추었다. 하지만 동태후는 원래 담박한 성격이어서 서태후와 대항할 뜻이 전혀 없었다. 이리하여 수렴청정의 주도권을 쥔 서태후는 쿠데타 공모자인 혁흔과 힘을 합쳐, 낡은 정치체제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작업에 착수하게 된다. 젊은 서태후와 혁흔이 실시한 정책 가운데 가장 효과적이었던 것은 만주족을 우선하는 종래의 관습을 고쳐서, 유능한 한족 관리를 중요한 자리에 앉혀 수완을 충분히 발휘하게 한 것이다. 이런 한족 관료들의 활약 덕분에 수렴청정이 실시된 11년 동안은 '동치중흥(同治中興)'이라고 불릴 만큼 평온한 상태가 계속되었다.엄니를 드러낸 서태후광서 34년 11월 15일, 서태후는 일흔네 살을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광서제가 죽은 바로 다음 날이었다. 서태후의 지명을 받은 부의(溥儀)가 청왕조의 마지막 황제인 선통제(宣統帝)다. 부의가 즉위한 지 3년 뒤인 1911년에 신해혁명(辛亥革命)이 일어나 중화민국이 수립되고 청왕조는 멸망했다. 이와 더불어 4천년에 걸친 중국의 왕조 시대도 드디어 막을 내린다.
서태후는 남성 원리가 지배하는 전통 중국에서 죽을 때까지 장장 48년 동안 여자의 몸으로 최고 권력자의 자리를 차지했다. 사치스럽고 향락적인 서태후는 밤이 이슥하도록 연회나 연극 구경을 즐길 때도 많았다. 하지만 아무리 밤늦게 잠자리에 들어도 이튿날 아침에는 반드시 새벽 5시에 일어나 정무를 보았다. 기상 시간을 철저히 지키는 이런 생활 태도는 평생 변치 않았다고 한다. 사치 삼매경에 빠져 있으면서도 기본적으로는 정신이 냉철하게 깨어있었던 것이다.
서태후는 분명 날카로운 정치 감각을 지닌 총명한 여성이었다. 다만 이상하게 권력욕이 강해서, 시대착오적인 궁정 내부의 권력 투쟁에서 이기는 데에만 그 총명함을 남용했다. 그 결과, 궁정 밖에 있는 중국 대륙은 서양 열강에 난도질당하여 수습할 수 없는 대혼란에 빠져버렸다. 결국 서태후는 권력과 사치에 대한 욕망을 폭발시켜 이미 낡아서 제구실을 못 하게 된 청왕조, 나아가서는 왕조라는 제도 자체를 안쪽에서 폭파시킨 셈이다. 스스로 음성(陰性)의 화신이 되어, 남성 원리에 뒤덮인 왕조 시대에 쌓이고 쌓인 엔트로피를 송두리째 폭발시킨 서태후. 그녀는 스스로 의식하지 못한 채, 파괴의 여신 역할을 맡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금병매』의 이야기 세계는 그 전에 나온 장편소설 『수호전』의 일부를 개작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수호전』에는 양산박(梁山泊)에 모여든 108명의 호걸 가운데 호랑이 퇴치로 이름을 날린 무송(武松)이 형수 반금련(潘金蓮)과 그 애인 서문경(西門慶)을 죽이는 전말이 23회부터 26회까지 묘사되어 있다. 이 부분이 그대로 금병매의 세계에 이식된 것이다.
무송의 형 무대(武大)는 호걸인 동생과는 대조적으로 체격도 빈약하고 마음도 소심하여, 부지런히 만두를 팔아서 생계를 꾸린다. 어느 대갓집에서 안방마님의 몸종으로 일한 아내 반금련은 그런 무대한테는 아까울 만큼 빼어난 미인이다. 어쨌든 본의 아닌 결혼을 한 반금련은 남편 무대가 싫어서 견딜 수가 없다. 음탕한 그녀는 처음에는 늠름한 호걸인 시동생 무송에게 반하여 온갖 수단으로 유혹하지만, 형을 사랑하는 무송은 상대도 하지 않는다. 이때 실망한 반금련 앞에 등장하는 것이 서문경이다. 산동성 청하현에서 약방을 경영하는 서문경은 젊은 시절부터 방탕하고 배짱이 있고 장사에도 재능이 있었기 때문에, 반금련을 만났을 무렵에는 동네 건달들을 휘하에 거느린 소두목이 되어 있었다. 게다가 서문경은 추남인 무대와는 하늘과 땅 차이로 허여멀쑥한 미남이다. 그런 서문경이 우연히 반금련의 요염한 모습을 보고 첫눈에 반해버렸으니, 그 다음에 어떻게 되었을지는 불보듯 뻔하다. 탐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