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토 할머니의 아주 특별한 주먹밥 이야기
오하라다 야스히사 지음 | 예지
사토 할머니의 아주 특별한 주먹밥 이야기
오하라다 야스히사 지음/구혜영 옮김
예지/2004년 6월/160쪽/9,800원
만남
숲 이스키아는 이와키 산의 츠가루후지라 불리는 산기슭에 있습니다. 깊은 숲 속 아담하고 행복해 보이는 일곱 난쟁이의 집처럼 숲 이스키아는 우리를 반갑고 포근하게 맞이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여기를 찾아옵니다. 고민이나 괴로움에 심신이 지칠 대로 지친 사람들이 마지막 구원을 바라며 할머니를 만나러 오거나, 경영의 지혜를 얻기 위해 대기업 사장이 찾아오기도 합니다. 할머니가 살아가는 방법과 사고방식을 배워 현장의 일에 도움을 얻기 위해 기업 연수가 이루어지기도 하고 문화센터 강좌도 열리고 있습니다.
할머니는 어떤 사람이 찾아오건 똑같은 방식으로 환대해 줍니다. 그리고 손수 만든 주먹밥으로 함께 식사를 합니다. 할머니가 손님을 맞이하는 일은 이것이 전부입니다. 청정한 나무들의 숨결과 지저귀는 새들 속에 둘러싸인 환경 속으로 들어가 자연의 은혜로움을 느낄 수 있는 재료로 만들어진 음식이 눈앞에 놓여있다고 상상해 보세요. 누구라도 얼굴에 환한 미소가 가득해지겠지요. 하얀 쌀밥에서 모락모락 나는 김이 마음속으로 스며들어 지친 심신을 달래주고, 된장국의 은은한 냄새는 새로운 곳에서의 긴장된 마음을 풀어줍니다. 그러고 나서는 그냥 자연스런 흐름에 맡기면 됩니다. 함께 온 동료나 몇 번 자리를 함께 했던 사람과 이야기하는 것도 좋고, 그냥 먹는 일에 몰두하는 것도 좋습니다. 할머니는 이러한 자연스런 흐름을 방해하는 일이 없도록 마음을 쓰면서 조용히 앉아 있습니다.
식사를 마치면 할머니는 설거지를 합니다. 함께 설거지를 도와주는 사람도 있고 눕는 사람도 있습니다. 화장실에 가는 사람, 산책을 가는 사람, 모두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합니다. 고민이 있어 찾아온 사람은 할머니에게 무슨 이야기라도 듣고 싶어합니다. 그렇지만 할머니는 “무슨 일이 있지요?”라고 먼저 말을 꺼내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하지만 언제든지 이야기를 듣겠다는 할머니의 태도가 전해져오기 때문에 어떤 사람이라도 편안히 이야기를 꺼내게 됩니다. 할머니는 이렇게 말합니다. “고민이 있는 사람들 대부분은 실제로 어떻게 하면 좋을지 스스로 어떻게 하고 싶은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래라 저래라 하는 지시가 아니라 그냥 옆에 앉아 공감해주는 일이 필요할 뿐인 겁니다.”
할머니는 열일곱 살 때 괴로운 체험을 했습니다. 만남이라고 하면 왠지 마음이 설레는데 그렇지 않은 만남이 이럴 때입니다. 마주치고 싶지 않지만 병은 소리도 내지 않고 슬그머니 다가와 갑자기 고통을 줍니다. 가장 먼저 닥쳐온 ‘고통’은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한 일이었습니다. 오랫동안 살았던 집을 떠나야 하는 현실 앞에서 장녀인 할머니는 불안으로 가득 찼습니다. 열일곱 소녀에게는 참기 어려운 정도의 스트레스 탓인지 급기야 객혈을 하고 말았습니다. “폐침윤이었지요, 웃기만 해도 혈관이 끊어지기 때문에 웃을 수도 없었습니다.” 게다를 신고 걸으면 그 진동으로 혈관이 끊어져버릴지도 모르고, 기침도 제대로 할 수 없는 중병이었습니다. 그때였습니다. 할머니는 ‘기도를 실천하자.’를 행동으로 옮겼습니다.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학교에 나갔습니다. 학교에 가는 도중 피를 토한 적도 있을 만큼 그것은 무모한 행위였습니다. 결국 얼마 후 온 방이 피범벅이 될 정도로 심한 객혈을 했습니다. 이때부터 할머니에게 음식은 매우 중요한 것이 되었습니다. 약이나 주사가 아니라 먹는 일로 건강을 되찾으려 했던 겁니다. 병이라는 것이 결코 환영할 만한 상대는 아니지만 할머니는 이런 만남을 멋지게 살려냈습니다. 17년간 큰 병을 앓지 않았다면 지금의 할머니도 없었을 것입니다.
최근 할머니에게는 ‘이별의 슬픔’과 만나는 일이 있었습니다. 2002년 6월 3일의 일입니다. 외아들이 쉰다섯의 나이로 갑자기 죽었습니다. 아들을 가졌을 때 오랜 병 때문에 아이를 낳을 만한 체력이 아니어서 아기와 엄마 모두에게 위험하니 출산을 포기하라는 말을 의사에게서 들었습니다. 할머니 자신의 목숨을 걸고 낳은 자식이었습니다. “제 아들은 너무 일을 많이 해서 과로로 죽었어요. 지금은 신의 곁에서 편안히 쉬고 있겠지요. 만약 내가 먼저 죽었다면 워낙 나를 끔찍이 생각해 주는 아들이었기 때문에 얼마나 슬퍼했을까 생각합니다. 그런 슬픔을 아들에게 주지 않아 다행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내가 먼저 그 아이를 보내줘서 잘됐다고요.”
우연하게도 아들이 죽고 나서 얼마 동안은 남편이나 아이 등 소중한 이를 잃은 사람들의 방문이 이어졌습니다. 할머니는 밤새 슬픔과 괴로움과 잃어버린 분에 대한 추억에 대한 이야기를 가만히 들어줍니다. 굳이 아들 일이 화제에 나오지 않는 한 먼저 이야기를 꺼내지 않지만, 다음날 직원으로부터 할머니 이야기를 듣고는 축 처져 있던 사람이 갑자기 일을 돕겠다고 부엌에 나오기도 합니다. 할머니에게는 사람과 만나는 일, 여러 가지 일과 만나는 일이 물이 흐르는 것처럼 자연스럽습니다. 만남을 통해 어떤 흐름이 만들어져 가야 할 장소를 안내받습니다. 이러한 심정으로 끝없는 고난과 기쁨을 정면에서 마주할 수 있었습니다.
마음
할머니는 무엇을 먹을까 집착하지 않습니다. 재료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 어떻게 조리할까, 음식으로 행복을 느끼려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에 신경을 씁니다. 쌀과 야채의 생명, 고기와 생선의 생명을 최대한 살리려면 어떡하면 좋을지, 이 음식을 모두가 즐겁게 먹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면 좋을지를 최우선으로 생각합니다. “나는 음식을 가리지 않아요. ‘저것도 안 돼, 이것도 안 돼.’라고 말하면 주위 사람이 거북해집니다. 본인도 부자유스러워질 거예요. 나는 고기랑 생선을 먹지 않는다고 말해버리면 정말로 먹을 수 없게 되는 거예요.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도 말이죠.” 한번은 할머니가 컵라면을 맛있게 드셨습니다. 컵라면은 재료의 생명이 살아 있는 음식이 아닙니다. 그러나 때와 장소에 따라서는 사람을 기쁘게도 하고 행복하게 해주는 일도 있습니다.
할머니처럼 음식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요리하는 방법으로 그 사람이 살아가는 방식까지 알게 됩니다. 칼로 시금치를 썰 때도 전체를 같은 방향으로 두면 줄기 부분과 잎사귀만이 나오지만, 시금치 반 단씩을 서로 반대 방향으로 두고 썰면 잎사귀와 줄기가 잘 섞여 보기 좋게 잘립니다. 사소한 일이지만 모양새가 사람에게 주는 인상은 전혀 다릅니다. 이것이 재료를 살리며 생명을 소중히 여기며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밥을 담는 것 하나만 봐도 할머니의 배려는 남다릅니다. 숲 이스키아에서는 할머니가 밥 담당입니다. 직원의 말에 의하면 밥을 담는 일도 꽤나 어려운 모양입니다. 여기에는 할머니의 생명과 먹는 사람에 대한 깊은 마음 씀씀이가 담겨 있습니다. “밥은 표면에서 베어내듯이 풉니다. 그리고 밥공기를 어느 방향으로 잡아도 먹기 편하게 담습니다. 밥이 숨을 쉴 수 있도록 하려면 그냥 퍼담는 것으론 안 됩니다.” 할머니의 이런 마음 씀씀이를 듣는 것만으로 고마운 마음이 온몸에 충만해집니다. “근본은 생활 속에 있다.”고 할머니는 말합니다. 당장 오늘부터 실천할 수 있습니다. 음식을 만드는 일은 살아가는 방식 그 자체입니다.
생명
한때 괴롭고 슬프고 질투 나고 화를 내는 마이너스 사고를 멈추고, 늘 밝고 건강한 플러스 사고를 하자는 구호가 전 일본을 휩쓸었던 적이 있습니다. 이 플러스 사고 붐을 타고 ‘얼굴은 웃고 마음으론 울고’하는 식으로 겉으로만 밝은 척 행동하며 개중에는 남에게 플러스 사고를 강요하는 귀찮은 사람까지 등장했던 일이 기억에 새롭습니다. 겉보기 플러스 사고란 마이너스라고 생각되는 감정을 쓰레기통에 버리고 뚜껑을 덮어 없었던 일로 하자는 발상입니다. 이러한 감정은 매일 생겨나기 때문에 불안이나 짜증이 점점 쓰레기통에 쌓여갑니다. 그 속에서 썩어가는 것도 생깁니다.
좋은 사람, 나쁜 사람은 얼마만큼 마음의 청소가 되어 있는가의 차이에서 오는 것입니다. 마음의 청소는 어떻게 하는 걸까? 이는 자신의 마음에 나타난 감정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할머니는 자기 자신의 감정도 정면에서 받아들이지만 사람의 마음을 청소하는 데 달인이기도 합니다. 상대가 하는 말을 듣고 있는 태도가 상대방의 마음을 청소시키는 최고의 방법이니까요. 사람들로부터 상담을 자주 받는 사람에게는 할머니처럼 마음의 쓰레기를 처리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할머니에게는 어떤 일도 모두가 플러스로 작용합니다. 하여 모든 일이 플러스라는 것이 할머니가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할머니는 가톨릭 신자입니다. 일요일마다 성당에 가서 기도 드리는 일은 신자로서 당연한 일입니다. 하지만 할머니에게는 주말에도 손님이 찾아옵니다. 대부분 고민을 끌어안고 할머니에게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찾아오는 사람들입니다. 과연 신께서는 이러한 사람들을 두고 성당에 나가는 일을 기뻐하실까 하고 자문한 할머니는 자신을 믿고 찾아오는 사람을 우선시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 후 할머니는 ‘기도’란 무엇일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성당에서 손을 모으는 일은 ‘정적인 기도’이며 이를 행동으로 옮기는 일은 ‘동적인 기도’라고 할머니는 생각했습니다. 쫄쫄 굶어 배가 고픈 사람이 찾아왔다고 칩시다. 할머니는 주저하지 않고 주먹밥을 만들어 내줍니다. “이 사람을 도와주세요.”하고 두 손 모아 기도해 봤자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지에 대한 생각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장소가 성지라고 할머니는 단언합니다. 생활 그 자체가 기도이며, 지금 있는 곳이 성지인 것입니다.
숲 이스키아는 틀림없이 사람들이 바라는 일이기 때문에 생길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오면 기쁨을 느끼고 할머니 자신도 만족할 수 있는 장소가 되었던 것이죠. 할머니가 모든 사람이 모일 수 있는 시설을 숲 속에 만들고 싶어했지만, 자금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아무리 생각해봐도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할머니는 기다렸습니다. 꿈을 좇듯 땅을 보러 다녔습니다. 이런 곳에 이스키아를 만들면 좋겠구나 하는 이미지를 키워갔습니다. 그런 생각이 하늘에 통했을까요. 할머니가 하려는 일에 공감하고 자금을 대주고 싶다는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그러더니 더 많은 지지자가 나타났습니다. 숲 이스키아에서 사용할 여러 비품과 숲 이스키아의 상징인 종(鐘)이 마치 이쪽으로 걸어오듯이 차례차례 다가왔습니다. 자신도, 주위사람도, 아직 만난 적은 없지만 앞으로 인연이 닿을 사람도, 이 시대가 모두 이스키아를 만드는 일을 바라고 있다는 사실을 할머니는 일련의 흐름 속에서 느낄 수 있었습니다. 만약 새로운 건물을 지으려고 했을 때 모든 사람의 의견이 수렴되지 않았다면 할머니는 그 시점에서 멈추었겠지요. 잘되지 않는 일이 있다면 그대로 전진할 게 아니라 잠시 멈춰서 상황을 보는 것이 더 현명합니다.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물이 흐르는 일은 자연의 섭리에 따라서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에 무난하게 나갑니다. 지금, 자신은 물을 어느 쪽으로 흐르게 하려는지, 자연의 흐름에 거스르는 일을 하고 있지는 않은지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성장
할머니한테는 여러 부모들이 각양각색의 아이들을 데리고 찾아옵니다. 사람들의 아이에 대한 고민은 육아 문제부터 등교 거부, 폭력 등 다양합니다. 아이를 키우는 일은 매우 큰일입니다. 육아 노이로제에 걸려버린 사람도 적지 않습니다. 어째서 아이를 키우는 일이 그렇게나 큰 스트레스가 되어버린 걸까요. “아이를 중심으로 키우고 있지 않기 때문이에요. 모두 부모의 뜻대로 키우기 때문이지요. 자신의 꿈을 아이에게 떠넘기려고 합니다.” 가령 아이가 뱃속에 있을 때나 출산 때에 공포를 주게 되면 밤이 되어 그 공포를 떠올리게 되어 아이가 울게 됩니다. 이러한 원인도 잊은 채 밤에 아이가 보채서 큰일이라며 푸념을 하곤 합니다. 우선 원인을 알고 아이에게 공포를 가능한 제거해줄 수 있는 배려가 필요합니다. 아이의 배를 토닥거려주며 “엄마가 우리 아기 잘 때까지 함께 있어줄게요. 엄마랑 이야기할까요?”라고 말하면 상황은 변합니다. 그러면 아이는 안심해서 스르르 잠이 들게 됩니다. 부모가 가만히 지켜봐 주는 가운데 아이들은 자신의 가능성을 스스로 발견합니다. 부모가 볼 때 영 아니라고 생각해도 아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도록 해주는 편이 아이를 성장하게 만듭니다.
부모와 자식이 닮는다는 것은 육체적으로 나타나는 유전자라는 요소도 있지만 성격이나 행동 패턴, 감정을 드러내는 방법에 대해서도 부모로부터 학습하는 면이 꽤 있습니다. 어린아이가 제 엄마와 똑같은 어조로 화를 내기도 하는데 이는 아이가 부모의 행동을 보고 화를 내는 방식을 학습해서 그런 것입니다. 아이는 부모의 거울이라고 말하는데 그만큼 아이 문제의 대부분은 부모에게 원인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부모는 아이를 무시하고 지배하려는 태도에서 벗어나 아이에게서 배우려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할머니의 주먹밥 강연회는 초등학교에서도 종종 열립니다. 아이들은 주먹밥 만드는 일을 진심으로 즐깁니다. “음식을 먹는 사람을 생각하면서 만들어봐요.” 이렇게 말하면 친구들이나 선생님과 부모님을 생각하는 마음을 담아 빙그레 웃으면서 만들겠지요. 하지만 어른들은 할머니의 마음의 소리를 들은 체도 않는 때도 많습니다. 쌀 한 톨 한 톨이 고통스럽지 않도록 주먹밥을 뭉치는, 무어라 표현할 수 없는 생명을 생각하는 감성은 아이들 쪽이 훨씬 예리합니다. 초등학교에서 주먹밥을 만드는 강연회를 하면 대부분의 아이들은 집에 돌아가 엄마에게 자기가 배운 내용을 열심히 재잘댑니다. 할머니는 부모에게 직접 말하고 싶은 내용을 아이들을 통해 효율적으로 전달합니다. 아이들이라는 중재자를 두면 마음이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 두루뭉술한 존재에 대해서도 어른들은 받아들일 자세를 취합니다. 동시에 아이들에게는 자신이 배운 것을 부모가 받아들였다는 사실이 최고의 기쁨입니다. 이러한 아이들은 어른이 되어도 주먹밥 뭉치는 방법을 잊지 않겠지요.
이스키아
숲 이스키아에서는 열 명 정도밖에 숙박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곳으로 오고 싶어하는 사람은 끊이질 않습니다. 좀 더 시설을 확장하면 좋지 않겠느냐는 말도 나온다고 합니다. 또는 여러 곳에 이스키아를 만들면 좋지 않을까 하는 제안도 있습니다. 하지만 할머니는 그럴 생각이 조금도 없습니다. 자신의 눈이 닿는 범위가 이스키아입니다. 한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일이 이스키아의 정신입니다. 할머니는 한 사람 한 사람을 정중하게 대접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마음의 스킨십을 통해 사람들이 이스키아를 느낄 수 있도록 합니다. 할머니의 인간성이 직접 전해지는 거리에 신경을 씁니다. 원형의 식탁에서 할머니가 만들어준 주먹밥을 함께 먹는 정도의 거리 말입니다. 이러한 일은 개인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숲 이스키아가 조직이었다면 할머니는 자연스럽지 못했을 겁니다.
할머니와 주위 사람들 사이에는 “이스키아를 하고 있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밥을 지어 대접하는 일, 마음으로부터 남을 대접하는 일을 “이스키아를 한다.”라고 말합니다. 밥을 먹는 사람도 기쁘고, 밥을 지어주는 사람도 행복을 느끼는 관계. 이것이 ‘이스키아’에서 만들어지는 사람과 사람의 관계입니다. 오랜만에 집으로 돌아온 자식들을 위해 어머니가 할 수 있는 일은 정성껏 식사를 준비하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으로 만든 요리가 맛없을 리가 없습니다. 여기에 숲 이스키아의 출발점이 있습니다. 이스키아에서는 어머니가 아이를 생각하는 마음을 ‘음식’을 통해 전합니다. 할머니는 자기 자식을 생각하는 어머니가 되어 인연이 닿은 모든 사람을 대합니다.
내가 할머니를 찾아갔을 때는 눈 내리는 아침이었습니다. 무거운 짐을 손에 들고 옷에 묻은 눈발을 털면서 현관을 열자 할머니가 구수한 사투리로 반가이 맞아주었습니다. 꽁꽁 언 몸과 고픈 배를 움켜쥐고 서슴없이 거실로 갔습니다. 식탁 위에는 2인분의 밥상이 차려져 있었습니다. 뜨끈뜨끈한 밥, 된장국. 뱃속에서 꼬르륵하고 소리가 났습니다. 나물에 찌개, 배추 절임. 할머니와 마주앉아 먹는 아침밥입니다. 마치 고향에 온 듯한 생각에 빠져들었습니다. 밖에는 눈이 내리고 있었습니다. 내 고향은 거의 눈이 내리지 않는 곳인데도 왠지 이곳에 내리는 눈은 고향처럼 그리움으로 다가왔습니다. 밥과 된장국을 한 그릇씩 더 먹고는 배가 빵빵해져서 “엄마, 한숨 좀 잘게요.”하고 이층에 올라가고 싶은 느낌. 숲 이스키아에 또 다른 말을 붙인다면 나는 ‘모성’이라고 하고 싶습니다. “이스키아를 하고 계십니까?” 이것은 사람과 관계하는 법, 생명에 대한 존엄과 자비로운 마음에 대한 질문입니다. 한순간이라도 엄마의 마음으로 상대를 받아들일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주위의 사람을 행복하게 해줄 수 있으며 자신도 행복해질 것입니다. 여러분, 이스키아를 해보지 않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