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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외수가 전해주는 마음의 열쇠, 뼈

이외수 지음 | 동방미디어
나의 소설(小說)가난한 자의 꿈나는 소설가라는 나의 직업에 대해서 만족하고 있다. 하등의 불만이 없다. 그것은 내가 목마름과 외로움, 배고픔과 추위, 절망과 고통이 뒤엉켜 있는 가시밭길을 헤치고 서른 살에 비로소 얻어낸 직업이다.

그것은 내가 평생을 일구어야 할 땅, 평생을 걸어가야 할 길, 바로 내 목숨을 묻어야 할 그 자리다. 앞으로도 목마름과 외로움, 배고픔과 추위, 절망과 고통은 계속 이어질 것이다. 지금까지 내가 겪었던 것보다 더욱 가혹한 아픔들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서 나는 산다.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서 나는 쓴다. 농사꾼이 땅을 일구어 곡식을 가꾸듯이 나는 원고지를 일구어 언어의 씨앗을 뿌리고 거기에 내 정신의 물을 주는 것이다.



소설가는 대지를 경작하는 농사꾼과 서로 닮은 점이 많다. 소설가는 영혼의 낱말들로 원고지라는 이름의 전답에다 깨우침의 씨를 뿌리는 농사꾼이라고 할 수 있다. 때로는 거름 대신에 살과 뼈를 고랑마다 깎아 넣고 때로는 농약 대신 피와 눈물을 씨앗마다 적셔 주어야 한다. 소설은 문학이며 문학은 예술이라는 사실을 결코 망각해서는 안 된다.

예술은 손끝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하는 것이다. 예술은 이해함으로써 접근되어질 수 있는 영역이 아니라 감동 받음으로써 합일되어질 수 있는 영역이다. 예술은 곧 아름다움이며 아름다움은 곧 행복이다.



요즘 사람들은 자기 능력으로 직접 확인하지 않은 사실은 사실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나는 더러 비현실적인 소설을 쓴다는 소리를 듣곤 한다. 그러나 내가 쓰는 소설은 나에게 있어서 어디까지나 현실적인 것들이었다.

그런데 이야기만으로 소설이 되는 것은 아니다. 언어와의 치열한 투쟁 끝에 얻어 낸 자기만의 실로서 자기만의 무늬를 놓아 비단을 짜고 그것을 정교하게 바느질해서 인간에게 입혀 놓았을 때, 반드시 그 인간이 어떤 의미로든 아름다움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고 나는 믿고 있다. 그냥 재미있는 이야기나 기구한 운명 따위야 영화나 텔레비전에서 얼마든지 찾아볼 수가 있다.



밤마다 원고지와 씨름했다. 그리고 언제나 혼자였다. 때로는 창문 가득 하얀 성에의 수풀이 무성하게 자라 오르고 모든 생명과 시간이 다른 차원으로 전환되기라도 한 것처럼 사방이 깊은 적막 속에 가라앉아 있었다. 더러는 바람이 몽유병을 앓으면서 슬레이트 지붕 위를 초조하게 서성거리는 소리, 멀리 떨어진 곳에서 들리는 밤기차의 기적 소리, 옆집 텔레비전이 방송을 마감하는 애국가 소리, 방법대원들의 호루라기 소리, 질주하는 자동차들의 엔진 소리, 그런 소리들이 적막을 깨뜨리기는 했지만 그 뒤에는 언제나 더욱 깊은 정적이 갈비뼈를 저린 외로움 속에 젖어들도록 만들곤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불현듯이 사람들에 대한 그리움에 잠기곤 했다.



당신은 이해할 수 있는가? 저 문명의 거리에서 시달리며 내가 보낸 나날…. 소설이고 나발이고 다 걷어치우고 막걸리 국물로 얼룩진 작업복을 걸친 채 비틀거리면서 살아온 나날…. 내가 경영한 자학이며 빌어먹을 울분들을….



나에게 있어서 언어는 자연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바람이 불면 흔들린다. 햇빛을 받으면 반짝거리고, 탁하고 습한 곳에서는 썩기도 한다. 그것은 감정을 가지고 있으며 무척 다루기 힘든 대상이다. 때로는 흐느끼고 때로는 분노한다.

나는 되도록 언어 그 자체를 생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그것은 추상이 아니라 구상이다. 나는 소설이 단순히 스토리 때문에 읽히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언어의 동작들이 가지고 있는 아름다움 때문에 읽히는 것이라고 믿었다. 언어의 동작이라니? 미친놈이로군. 이런 식의 반응을 보이는 분들에게는 더 이상 말을 할 방법이 없다. 그분들은 이미 그분들의 의식 속에서 관념이라는 덮개로 언어를 뒤덮어서 질식시킨 사람들이기 때문이다.연은 결코 무생물이 아니다. 얼레로 의사를 전달해 주기만 하면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생물체였다. 나는 자유자재로 연을 부릴 수가 있었다. 연은 나의 유일한 친구이자 심복이었다. 솔개처럼 빠른 속도로 비행하게 만들 수도 있었으며, 황새처럼 느린 속도로 비행하게 만들 수도 있었다. 하늘 전체를 분주하게 나돌아다니게 만들 수도 있었으며, 한 자리에서 졸음에 겨운 모습으로 고개를 끄덕거리게 만들 수도 있었다. 하느님에게 보내는 장문의 편지를 쓰게 만들 수도 있었으며, 내 이름 석 자로 하늘을 가득 채우게 만들 수도 있었다.



날마다 가물거리는 시간 속에서 내 정신의 뼈가 녹아내리고 있었다. 내 영혼의 심지도 타 들어 가고 있었다.이 시대의 지성은 어디 있는가. 대학마다 철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도서관마다 불이 꺼져 있었다. 대학은 죽어 있었다. 거대한 지식의 영안실로 변해 있었다. 비애로운 침묵만이 무겁게 드리워져 있었다. 개인과 개인끼리는 서로 온정이 통하는 법이지만 나라와 나라 사이에는 서로 온정이 통하지 않는 법이다. 아무리 하찮은 물건들을 주고받아도 종국에는 반드시 손익계산이 따르기 마련이다. 대개 강대국들이 약소국들에게 베풀어 주는 아니꼬운 온정 속에는 항시 보이지 않는 낚시바늘이 은밀히 감추어져 있다. 입질 한 번 잘못해서 그 바늘에 걸리게 되면 좀처럼 빠져 나오기가 힘들다.



인간들은 때때로 눈을 빼면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는 동물이듯이 가시적인 것에 대해서만 마음을 쓰는 수가 있다.



나는 마치 더듬이가 잘려 버린 곤충처럼 방향감각을 잃어버리고 미로 상자 속을 이리저리 헤매고 있었다. 한 걸음 앞으로 내디딜 때마다 목적지가 어긋나고 있었다. 사람과 사람 사이가 조금씩 멀어지고 있었다. 이렇게 사는 것이 아니라고 언제나 입버릇처럼 되뇌이면서도 시간에 쫓기고 일에 쫓기는 인간사.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일이 낙타가 바늘구멍을 빠져 나가는 일보다 힘들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돈만 있으면 수천 마리의 낙타도 쉽게 빠져 나갈 수 있는 크기의 구멍을 가진 바늘을 만들 수도 있다.배금주의자에 대한 하느님의 편애도 돈만 있으면 방비할 수 있다. 하느님도 돈으로 매수하면 되는 것이다. 하느님을 돈으로 매수할 수 없다면 예수님을 돈으로 매수하고, 예수님을 돈으로 매수할 수 없다면 천사라도 돈으로 매수하면 되는 것이다.

인간들은 대체로 생명이 없는 것들의 헌신적 봉사에 대해서는 조금도 고마움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 부려먹을 대로 부려먹은 후에 기능이 마비되면 그저 내다 버리는 게 고작이다.



현대인들은 누구나 원자병에 걸릴 수 있는 자유를 부여받았고, 누구나 기형아를 낳을 수 있는 가능성도 부여받았다. 그토록 인간이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과학의 진보에 의해서.

이제는 인간의 진보를 위해서 물질문명이 존재하는 시대가 아니라 물질문명의 진보를 위해서 인간이 존재하는 시대처럼 되어버리고 말았다. 낭만도 사라져 버리고 사랑도 사라져 버렸다. 희망도 사라져 버리고 구원도 사라져 버렸다. 대부분의 인간들이 기계화되고 있다. 그리고 가슴을 굳게 닫아 버린 채 서로서로 더욱 멀어지고 있다. 진보여, 더욱 진보하라. 노스트라다무스가 예언했다는 지구 최후의 그날까지.



돈이 없으면 사랑조차 제대로 할 수 없는 세상이 되었다. 이제 세상은 팔다리가 없는 사람보다 돈이 없는 사람이 더 불구자가 되어 있었다. 돈이 없으면 팔다리뿐만이 아니라 입조차도 마음대로 놀릴 수가 없을 정도였다. 돈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었다. 돈의 돈에 의한 돈을 위한 생활 속에서 사람들은 저마다 발버둥을 치고 있었다.



연애 같은 건 아예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우선 나 자신이 어떤 모습으로 파괴되고 말 것인지 불안하고, 또한 도저히 사랑받을 자신도 없는 것이다. 사랑할 자신도 없는 것이다.



이제 인간은 인간만으로 결혼할 수가 없게 되었다. 마침내 인간을 대신하여 그 인간의 조건들끼리 결혼하는 시대가 오고야 말았다. 인간은 그저 조건이라는 것들이 서로 결혼할 때, 부속품으로 따라만 가면 되는 것이다. 빌어먹을.



나는 말한다. '세상이 더럽다.' 하지만 아무리 그런 말을 하더라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 나는 몇십 년 동안이나 세상이 더럽다고 말했지만, 이 세상은 손톱만치도 달라지지 않았다.봄이 오고 있었다. 며칠 동안 들판 가득 봄 햇빛이 꿀물처럼 녹아서 반들거리고 있었다. 얼음이 녹고 있었다. 얼어붙은 강이 풀리고 있었다. 들판 가득 아지랑이가 아른거리고 있었다. 모든 풍경들이 아지랑이 속에 녹아서 젖은 거울 속의 풍경들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어디선가 잘 익은 두엄 냄새가 풍겼다. 멀리서 송아지 울음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아직 양지바른 당산 비탈에도 꽃은 피어 있지 않았다. 밤이면 황사바람이 불었다. 푸득푸득 문풍지도 울었다. 때로는 며칠씩 날씨가 매워졌다가 다시 풀리기도 했다. 몇 번은 소망의 꽃망울을 재촉하듯이 새도록 속삭이는 음성으로 비도 내렸다.



봄이 끝나가고 있었다. 날씨가 더워지고 있었다. 화단에는 눈부신 꽃들이 만개해 있었다. 이따금 나비들이 날개를 팔랑거리며 담벼락을 넘나들고 있었다. 집 뒤 구름산의 나무들이 짙은 초록빛으로 변해 가고 있었다. 그 여름에 나는 술을 배웠고, 그 여름에 나는 포기를 배웠고, 그 여름에 나는 방황을 배웠다.



여름이다. 비가 내리고 있다. 어제는 비가 내리지 않았는데 오늘은 비가 내리고 있다. 어제와 오늘의 차이가 확실할 때에만 시간이라는 것이 정말로 가고 있기는 가고 있는 모양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 이외의 시간은 모두가 멎어 있는 듯한 느낌뿐이다. 그러나 처음처럼 그렇게 갑갑하지는 않다. 오히려 나는 무한히 자유롭다.



가을이 왔다. 사랑만 하다가 죽은 자의 아름다운 피처럼 사루비아 꽃이 우리 집 화단에서 피고 있다. 아침저녁으로는 서늘한 바람이 불어왔고 살갗이 아주 깨끗하게 소독되는 듯한 기분으로 나는 가을의 풍경을 바라볼 수 있다. 문득 그림을 그리고 싶은 충동이 전율처럼 나의 혈관을 파고든다.



뼈에 금이 가는 듯한 고독. 뭐 그런 것뿐임. 정말 여자가 필요함. 진심으로 사랑할 것임. 오늘 마지막 가을비 싸늘하게 내렸음. 갑자기 살갗을 휩싸는 겨울 예감. 혼자 보내는 겨울이 가장 쓰라림.

겨울이다. 유리창 가득 번성하는 성에. 비로소 나는 버림받은 개가 되었다. 이 겨울에 내가 한 일은 방황 그것 한 가지뿐이었다. 새벽에도 방황하고 한낮에도 방황하고 밤중에도 방황했다. 마치 방황과 자매결연이라도 맺은 것처럼 방황만 했던 것이다. 이제 곧 날이 새고 나는 다시 방황할 것이다. 그리고 내 방황의 끝 어딘가에서 언제든지 나는 한 줌의 미련도 없이 자살하고 말겠다…….

마지막 겨울비. 시리고 아픈 겨울비에 가슴을 적시면서 나는 생각했다. 이 비만 견디고 나면 곧 봄이 온다고. 봄이 오면 모든 것들을 다 버리자고.무소유의 나라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나도 그런 나라에서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시사철 햇볕이 따뜻하고 눈부시며 꽃과 과일들이 풍성한 나라. 법도 없고 규칙도 없는 나라. 신도 없고 악마도 없는 나라. 아름다운 나라.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오직 사랑뿐. 넘치는 춤과 노래의 나라. 영원한 나라. 그러나 싫증이 안 나는 나라. 절대로 지랄 같은 것들은 있을 수 없는 나라.지구에는 그런 나라가 그 어디에도 없으리라. 문득 공상에서 돌아오니까 현실은 여전히 감옥 같을 뿐 아무리 출구를 찾아보아도 사방은 견고한 절망의 벽으로만 둘러싸여 있다.



이스라엘의 요단강 가까이에 큰 호수가 두 개 있다. 하나는 사해(死海)요, 다른 하나는 히브리어로 '살아 있는 바다(生海)'라고 불리는 호수이다. '죽은 바다'에는 다른 곳에서 물이 들어오기는 하지만 아무 데도 흘러 나가지는 않는다. '산 바다'에는 물이 들어오기도 하고 나가기도 한다.

자선을 베풀지 않는 자는 '죽은 바다'와 같다. 돈이 들어오기만 하고 나가지를 않는다. 자선을 베푸는 자는 '산 바다'와 같다. 물이 들어오기도 하고 또한 나가기도 한다. 우리는 살아 있는 바다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욕망에 아름다움을 더하면 소망이 되고 소망에 아름다움을 빼면 욕망이 된다. 사람이 살아가는 목적은 자신이 우주와 합일된 아름다움을 획득하고 그것을 관조함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때때로 어리석은 인간들은 현실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소망과 욕망을 서로 혼동하면서 살아가고 있다.편지를 쓰고 싶다소망과 욕망 사이고통은 곧 육체에 대한 정신의 승리이다가난한 자에게 있어서 꿈이란 얼마나 머나먼 나라의 신기루였던가. 나는 차츰 절박한 상황으로 밀어 붙여지고 있었다. 나의 눈앞에 막다른 골목이 가로막고 있었다. 생존경쟁이라는 이름의 벽이었다.

가난하다는 것은 비록 죄가 되지는 않는다고 하더라도 죄스러움을 자주 느끼도록 만든다.



어느 무신론자 하나가 목사님에게 당신은 하느님을 보았느냐고 따져 물은 적이 있었다. 그때 그 목사님은 하느님을 보여 주겠노라고 하면서 어둡고 찌든 빈민가로 그 사람을 데리고 갔다.

'보시오, 저들이 다 하느님의 모습이오.'

목사님은 가난한 사람들의 모습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얼마나 명쾌한 가르침인가! 천사 또한 그와 마찬가지다. 우리가 마음의 눈이 트이면 그 어디에서든 하느님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듯이 천사들의 모습 또한 그 어디에서고 발견할 수가 있을 것이다.



그대의 마음가짐에 따라 스스로가 천사를 그대 가슴 안에 간직할 수도 있고 그대 자신 또한 천사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무리 하찮아 보이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하찮게 보지 말라. 그가 바로 하느님의 명령을 받들고 사람의 세상에 내려온 사자, 곧 천사인 줄 누가 알랴. 우리의 일상 속에서 몇백 번이고 천사를 만났으면서도 우리가 마음의 눈이 멀고 귀가 멀어 그를 알아보지 못했는지 누가 알랴.요즘은 세상사 모든 일이 다 심상치가 않거니, 저 높은 곳에서 필시 하느님이 내려다보시고 계시다가 그대가 마음으로 뿌린 씨앗은 그대 마음의 양식이 되게 하시리라.



굶주림이란 인간을 짐승과 연결하는 가장 설득력이 있는 유혹이다. 밥을 먹어야 살 수 있다는 것은, 내가 하느님을 미워하게 된 이유 중의 하나로 들어간다. 무릇 음식이란 먹어도 살고 안 먹어도 살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먹으면 즐겁고 안 먹으면 그래도 그만인 세상, 얼마나 좋을까? 인생이란 정말 더럽고 치사한 것들만의 연속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나는 갑자기 풍덩 물 속으로 뛰어들어 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모든 것이 타인에 의해서 만들어지고 있으면서도, 그 타의라는 것 또한 타의에 의한 것이어서 거슬러 올라가면 인간의 발생부터가 더럽고 치사한 것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창자란 길들이기 마련이라고 했다. 많이 먹는다고 반드시 몸이 건강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십장생에 들어가는 거북이나 두루미도 아주 조금 밖에는 먹지 않는다. 창자를 비워 본 적이 없는 사람은 마음을 비우기도 그만큼이나 어렵다.

굶어 죽는 것도 좋다. 창자가 깨끗한 상태로 죽는다는 건 얼마나 인간적인가?도무지 잠이 오지 않았다. 옆집에서 들리던 라디오 소리도 오래 전부터 끊어져 버리고, 한밤중, 사방은 쥐 죽은 듯이 고요한데, 이따금 벽 속을 내달아 가는 한 무리의 바람소리, 커튼을 걷어 내고 도시를 내다보면 도시는 폐선처럼 문을 닫고 정박해 있고, 거기 뜬눈으로 밤을 새운 도시의 불빛이 몇 개, 바람이 불면 젖은 눈시울로 깜박거리곤 했다.

나는 깊은 겨울밤 도시의 풍경을 오래도록 바라보면서 누구에게든 편지를 쓰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호주머니 속에는 당신의 남루한 방으로 돌아갈 시내버스 요금 밖에 없고, 그리하여 다실의 흐린 조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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