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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외수가 전해주는 마음의 열쇠, 뼈

이외수 지음 | 동방미디어
사랑보다 아름다운 말이 어디 있으랴



사랑을 위한 사랑은 의미가 없다. 진실한 사랑, 생명까지도 기꺼이 희생할 수 있는 그런 사랑만이 우리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과 함께 선물을 나누어 가지고 싶다. 당신의 가슴이 언제나 열려 있기를….

서로 사랑을 배우는 사람들이여. 그대들은 작별하지 말라. 아니다. 사랑을 위해서라면 더러는 작별도 해볼 것. 그러나 너무 오랫동안 기다리게 하지는 말 것.

사랑보다 아름다운 말이 어디 있으랴. 사랑이란 결코 껍질의 모양이나 빛깔에서 억지로 추측되어지는 추상적 감정이 아니라, 알맹이 속에서 씨앗이 썩어 싹이 트듯이, 어떤 아픔과 함께 모르는 사이에 저절로 자라나는 구상적 감정이다. 사랑을 하려면 우선 점차 메말라 가는 가슴을 적시기 위해서 연애편지를 쓰는 습관부터 익혀야 할 것이다.

살아있는 사람들이여. 사랑이라는 낱말이 아직도 국어사전에 남아 있음을 찬양하라.아직도 미처 사랑하지 않은 사람들이여. 절망하지 말라. 사랑은 모르는 사이에 느닷없이 다가오는 것이다.

에로스(Eros)는 포로스(Poros)와 페니아(Penia)의 아들이다. 에로스의 아버지 포로스는 충족, 부유, 풍만의 신으로, 모든 것들이 넉넉하고 풍요롭다. 에로스의 어머니 페니아는 빈곤, 결핍, 가난의 신으로, 모든 것들이 모자라고 부족하다.에로스는 부귀한 아버지와 빈곤한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항상 부족과 결핍을 느끼는 동시에 언제나 풍족과 부유를 동경하고 갈구한다. 이것이 바로 에로스의 본질이다. 에로스는 자기의 빈곤과 부족과 결핍을 자각하고 부유와 충족과 풍만의 세계를 희구한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은 완전을 지향하는 부단한 욕구라고 할 수 있다.

사랑이라는 것은 어떤 것인가



당신이 비록 돈 없고 빽 없고 못생긴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아직 사랑을 할 수는 있을 것이다. 사랑의 힘으로 풀리지 않는 자물쇠란 이 세상에는 단 한 가지도 없다. 당신은 그 누구보다도 더 은혜롭다.

언젠가는 다시 돌아가리라. 다시 돌아가서 사랑하리라. 내가 증오했던 모든 낮과 밤, 내가 침을 뱉었던 모든 마음과 살들을….

어느 비 오는 날, 기타 소리를 듣다가 불현듯이 그 여자를 사랑하고 싶어서 몸살이 날 것 같은 심정으로 우산도 없이 그 여자의 집 대문 앞을 서성거린 적이 있었다. 그러나 장맛비가 모두 끝나자 내 마음은 기타소리를 들어도 아무런 감정을 느낄 수가 없었다. 무엇인가를 놓쳐 버린 것 같아서 몹시 서운하고 안타까운 심정이었다. 사랑이라는 것은 어떤 것인가. 나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고통은 곧 육체에 대한 정신의 승리이다



모름지기 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들은 태어나는 것들대로 저마다의 의미가 있고 죽어 가는 것들은 죽어 가는 것들대로의 의미가 있는 법이다. 생명이 있는 모든 것들이 어떻게 태어나서 어떻게 살다가 어떻게 죽어가는지 생각하면 여러 가지 이유에서 자꾸만 눈시울이 젖는다.

벌레들은 불에 타 죽는 줄도 모르고 불 속으로 날아든다. 물고기는 위험한 줄도 모르고 낚시의 미늘에 달려 있는 먹이를 삼킨다. 그러나 우리는 불행의 그물이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관능적인 향락의 성에서 한 치도 떠나지 못한다. 인간의 어리석음에는 한이 없는 것이다.

봉황도 알에서 깨어나지 않으면 하늘을 날 수 없고, 옹달샘도 산을 떠나지 않으면 대하에 이르지 못한다. 하늘이 큰 인물을 만들고 싶을 때에는 대개 어릴 때부터 큰 아픔을 먼저 알도록 만든다. 때로는 하늘의 공사로 인해 사랑하는 자식을 버려야만 하는 아픔을 겪는 경우도 있다.고통은 하늘이 그대를 더욱 선량한 재목으로 키우기 위해 선택한 스승이다.

4세기에 수많은 고행주의자들이 유혹을 물리치고자 은자와도 같은 고통스러운 생활을 하였다. '육신적인 욕망'을 다스리기 위해서 그들이 했던 고행 중에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극단적인 것도 있었다. 성 아셉시마스는 온몸을 수많은 사슬로 묶어서 손과 발로 엉금엉금 기어다녔다. 수도승 베사리온은 그의 육체가 편안하게 잠을 자는 것마저도 용납하지 못했다. 40년 동안 그는 누워서 잠을 자지 않았던 것이다. 마카리우스 2세는 6개월 동안 늪 속에 발가벗고 앉아 있었다. 결국 6개월 후에 그의 몸은 모기에게 너무 많이 물려서 마치 나병 환자와 같은 모습이 되었다. 성 마론은 속이 빈 나무줄기 속에서 11년 동안 생활했다. 다른 고행자들도 동굴이나 야수의 굴, 물이 말라 버린 우물, 심지어 무덤 속에서 살기도 했다. 그들은 불결함, 악취, 벌레들 그리고 구더기로 인해 고통받는 것조차도 정신적으로 유익하다고 믿었던 것이다. 이러한 고통은 곧 육체에 대한 정신의 승리를 상징하고 있었다.

베토벤이 오케스트라의 프리티시모(아주 강하게)도 들을 수 없을 정도로 귀가 멀었을 때, 그는 최고의 오라토리오를 작곡했다. 존 밀턴은 앞을 완전히 볼 수 없게 되었을 때 『실낙원』이라는 위대한 걸작을 쓸 수가 있었다. 윌터 스콧은 말에 채여 집에서 며칠 동안 드러누워 있을 때 <마지막 시인의 노래>를 지었다. 자기 자신의 고뇌에 찬 마음에서 흘러나오는 피와 색깔을 혼합해서 그림을 그리는 화가는 가장 훌륭한 그림을 그릴 수 있다. 어느 시대에서나 가장 위대한 사람들은 가장 큰 고통을 겪은 사람들이었다.

내가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건 억울하다



최근에 이르러 나의 모가지는 항상 시간이라는 노끈에 묶여 있다. 한 줄도 건져 놓은 문장이 없이 모가지만 답답하다. 먹고산다는 일은 먹고 죽는다는 일과 똑같은 성질의 노동이다.

나는 흔히 내 또래의 젊은이들이 그 나이가 되면 홍역처럼 앓아 보는 삶의 회의 같은 것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 어떤 것에서도 즐거움을 느낄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어떤 것에서도 존재 가치를 찾아볼 수가 없었다. 차라리 살아간다는 것이 짜증스러워서 견딜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나는 차라리 모든 것을 포기하고 어디론가 여행이라도 훌쩍 떠나 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나는 너무도 많은 것들에게 묶여 있었다. 어머니에 대한 보은에도 묶여 있었고, 학점에도 묶여 있었고, 가정교사 하는 돌대가리 초등학생에게도 묶여 있었다. 그리고 좀 더 생각을 넓혀 보면 그 이외에도 너무나 많은 것들에게 나는 묶여 있었다.

여행을 떠나 본들 무슨 낙이 있으랴. 결국은 제자리로 돌아오게 되는 것을….나는 한 마디로 말해서 이 세상이 지겹도록 싫었다. 날마다 그저 그런 생활의 연속뿐이었다. 어디 무인도에라도 가서 살아 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공부는 해서 무엇을 하나, 밥은 먹어서 무엇을 하나, 살아 있어서는 또 무엇을 하나 하는 따위의 잡생각들이 불쑥불쑥 가슴을 사로잡기 일쑤였다.

도대체 무슨 의미로 아직까지 이 세상에 살아남아 있느냐. 아무런 의미도 없는 과거, 아무런 의미도 없는 현재, 아무런 의미도 없는 미래…. 차라리 불면증으로 시달리는 편이 나에게는 한결 이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런 의미도 없는 하루가 아무런 의미도 없이 흘러가고, 아무런 의미도 없는 밤이 다가와서 아무런 의미도 없는 나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는 졸음을 몰고 온다. 나는 가슴이 답답해지기 시작했다. 아무런 의미도 없이 태어나서 아무런 의미도 없이 죽어 가기에는 아무래도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구로의 유배



오늘날 인간은 지구에게 어떤 존재일까. 악성피부병을 유발시키는 백해무익의 세균 같은 존재들은 아닐까. 옛날에는 신선들이 살던 선경이었을는지 모르지만 지금은 아니다.

세찬 바람이 불어오고 있다. 모든 건물들이 뿌연 흙먼지 속에 폐선처럼 정박해 있었다. 이따금 휴지들이 태풍에 날개를 접질린 갈매기처럼 위태롭게 하늘을 비상하고 있었다.사방에서 바람이 펄럭거리고 있었다. 이 도시에서 펄럭거리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았다. 하늘도 펄럭거리고 땅도 펄럭거리고 사람도 펄럭거리는 것 같았다. 도시 전체가 누런 흙먼지 속에 침몰하고 있었다. 언제나 어금니에 흙먼지가 서걱거렸다.

최근 들어 기상이변이 자주 일어나고 있다. 과학자들은 오존층이 파괴되어 가고 있다는 사실을 경고하고 있다. 오존층은 자생 능력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이대로 계속 방치하면 오염도가 그 한계를 넘어서서 자생 능력조차 상실해 버리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태양에서 발산되어지는 유해파들이 그대로 오존층을 통과하여 지구의 모든 생명체들에 치명적인 해를 입히게 된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전쟁 무기들을 실험하고 얼마나 많은 유해 물질들을 대기 중에 살포했으면 저 하늘의 일부에까지 구멍이 다 뚫어져 버리는 것일까.

선진국들은 환경을 파괴하는 악행들을 수없이 자행함으로써 경제적인 이득과 군사적인 성과를 획득했다. 그러나 후진국들은 도대체 무슨 죄가 있다고 그들이 파괴한 환경 속에서 공포와 질병에 시달려야 하는 것일까. 그리고 무슨 책임이 있다고 그들이 파괴한 환경을 복원하는 경비를 충당해 주어야 한다는 것일까. 그들은 언제나 인류의 행복을 위해서라는 대의명분으로 자연의 파괴행위를 자행해 왔지만 이제 인간은 자연에 의해서 죽어 가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 의해서 죽어 가고 있다.사랑보다는 조건이 우선하는 시대가 도래해 있었다. 이혼율이 높아 가고 있었다. 정조관념도 희박해져 가고 있었다.

나는 고립되어 있었다. 아무런 구원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아무런 희망의 건덕지도 보이지 않았다. 오직 거대한 절망만이 나를 지배하고 있었다. 오직 처절한 슬픔만이 나를 지배하고 있었다. 나는 유배당해 있었다.

지렁이의 가르침



지렁이는 그 얼마나 도자적(道子的)인 생물인가. 지렁이는 절대로 하찮은 미물이 아니다. 지렁이야말로 위대한 대지의 경작자라고 할 수 있다. 지렁이는 끊임없이 흙을 삼켜서 토해 내는 생물이다. 지렁이의 장 속을 통과한 흙은 특유의 기관인 석회선에 의해 토양을 기름지게 만들어주며, 질산을 현저하게 증가시키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식물의 생육을 촉진시키는 일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지렁이는 어떤 생물보다도 겸손하고 온순한 성품을 가지고 있다.

다른 생물들은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 각종 공격무기나 보호장치를 가지고 있지만, 지렁이는 아무런 공격무기나 보호장치도 가지고 있지 않은 생물이다. 독침도 없고, 이빨도 없고, 발톱도 없다. 상대편을 속이는 위장술도 없으며, 재빨리 도망가는 능력조차 없다. 공중을 나는 새들도 지렁이를 먹을 수 있다. 물 속을 헤엄치는 물고기들도 지렁이를 먹을 수 있다. 땅바닥을 기어다니는 개미들도 지렁이를 먹을 수 있다. 하지만 지렁이는 어떤 동물도 공격하는 법이 없었다. 먹다가 어느 정도만 남겨 놓으면 다시 복원될 수 있도록 자신을 진화시켜 두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렁이는 가장 지혜롭고 덕성스러운 대자연 속의 스승이라고 할 수 있다.

나의 소설(小說)



나는 소설가라는 나의 직업에 대해서 만족하고 있다. 하등의 불만이 없다. 그것은 내가 목마름과 외로움, 배고픔과 추위, 절망과 고통이 뒤엉켜 있는 가시밭길을 헤치고 서른 살에 비로소 얻어낸 직업이다.그것은 내가 평생을 일구어야 할 땅, 평생을 걸어가야 할 길, 바로 내 목숨을 묻어야 할 그 자리다. 앞으로도 목마름과 외로움, 배고픔과 추위, 절망과 고통은 계속 이어질 것이다. 지금까지 내가 겪었던 것보다 더욱 가혹한 아픔들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서 나는 산다.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서 나는 쓴다. 농사꾼이 땅을 일구어 곡식을 가꾸듯이 나는 원고지를 일구어 언어의 씨앗을 뿌리고 거기에 내 정신의 물을 주는 것이다.

소설가는 대지를 경작하는 농사꾼과 서로 닮은 점이 많다. 소설가는 영혼의 낱말들로 원고지라는 이름의 전답에다 깨우침의 씨를 뿌리는 농사꾼이라고 할 수 있다. 때로는 거름 대신에 살과 뼈를 고랑마다 깎아 넣고 때로는 농약 대신 피와 눈물을 씨앗마다 적셔 주어야 한다. 소설은 문학이며 문학은 예술이라는 사실을 결코 망각해서는 안 된다. 예술은 손끝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하는 것이다. 예술은 이해함으로써 접근되어질 수 있는 영역이 아니라 감동 받음으로써 합일되어질 수 있는 영역이다. 예술은 곧 아름다움이며 아름다움은 곧 행복이다.

요즘 사람들은 자기 능력으로 직접 확인하지 않은 사실은 사실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나는 더러 비현실적인 소설을 쓴다는 소리를 듣곤 한다. 그러나 내가 쓰는 소설은 나에게 있어서 어디까지나 현실적인 것들이었다.그런데 이야기만으로 소설이 되는 것은 아니다. 언어와의 치열한 투쟁 끝에 얻어 낸 자기만의 실로서 자기만의 무늬를 놓아 비단을 짜고 그것을 정교하게 바느질해서 인간에게 입혀 놓았을 때, 반드시 그 인간이 어떤 의미로든 아름다움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고 나는 믿고 있다. 그냥 재미있는 이야기나 기구한 운명 따위야 영화나 텔레비전에서 얼마든지 찾아볼 수가 있다.

밤마다 원고지와 씨름했다. 그리고 언제나 혼자였다. 때로는 창문 가득 하얀 성에의 수풀이 무성하게 자라 오르고 모든 생명과 시간이 다른 차원으로 전환되기라도 한 것처럼 사방이 깊은 적막 속에 가라앉아 있었다. 더러는 바람이 몽유병을 앓으면서 슬레이트 지붕 위를 초조하게 서성거리는 소리, 멀리 떨어진 곳에서 들리는 밤기차의 기적 소리, 옆집 텔레비전이 방송을 마감하는 애국가 소리, 방법대원들의 호루라기 소리, 질주하는 자동차들의 엔진 소리, 그런 소리들이 적막을 깨뜨리기는 했지만 그 뒤에는 언제나 더욱 깊은 정적이 갈비뼈를 저린 외로움 속에 젖어들도록 만들곤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불현듯이 사람들에 대한 그리움에 잠기곤 했다.

당신은 이해할 수 있는가? 저 문명의 거리에서 시달리며 내가 보낸 나날…. 소설이고 나발이고 다 걷어치우고 막걸리 국물로 얼룩진 작업복을 걸친 채 비틀거리면서 살아온 나날…. 내가 경영한 자학이며 빌어먹을 울분들을….

나에게 있어서 언어는 자연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바람이 불면 흔들린다. 햇빛을 받으면 반짝거리고, 탁하고 습한 곳에서는 썩기도 한다. 그것은 감정을 가지고 있으며 무척 다루기 힘든 대상이다. 때로는 흐느끼고 때로는 분노한다. 나는 되도록 언어 그 자체를 생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그것은 추상이 아니라 구상이다. 나는 소설이 단순히 스토리 때문에 읽히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언어의 동작들이 가지고 있는 아름다움 때문에 읽히는 것이라고 믿었다. 언어의 동작이라니? 미친놈이로군. 이런 식의 반응을 보이는 분들에게는 더 이상 말을 할 방법이 없다. 그분들은 이미 그분들의 의식 속에서 관념이라는 덮개로 언어를 뒤덮어서 질식시킨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가난한 자의 꿈



가난한 자에게 있어서 꿈이란 얼마나 머나먼 나라의 신기루였던가. 나는 차츰 절박한 상황으로 밀어 붙여지고 있었다. 나의 눈앞에 막다른 골목이 가로막고 있었다. 생존경쟁이라는 이름의 벽이었다.

가난하다는 것은 비록 죄가 되지는 않는다고 하더라도 죄스러움을 자주 느끼도록 만든다.



어느 무신론자 하나가 목사님에게 당신은 하느님을 보았느냐고 따져 물은 적이 있었다. 그때 그 목사님은 하느님을 보여 주겠노라고 하면서 어둡고 찌든 빈민가로 그 사람을 데리고 갔다.'보시오, 저들이 다 하느님의 모습이오.'목사님은 가난한 사람들의 모습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얼마나 명쾌한 가르침인가! 천사 또한 그와 마찬가지다. 우리가 마음의 눈이 트이면 그 어디에서든 하느님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듯이 천사들의 모습 또한 그 어디에서고 발견할 수가 있을 것이다.

그대의 마음가짐에 따라 스스로가 천사를 그대 가슴 안에 간직할 수도 있고 그대 자신 또한 천사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무리 하찮아 보이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하찮게 보지 말라. 그가 바로 하느님의 명령을 받들고 사람의 세상에 내려온 사자, 곧 천사인 줄 누가 알랴. 우리의 일상 속에서 몇백 번이고 천사를 만났으면서도 우리가 마음의 눈이 멀고 귀가 멀어 그를 알아보지 못했는지 누가 알랴.요즘은 세상사 모든 일이 다 심상치가 않거니, 저 높은 곳에서 필시 하느님이 내려다보시고 계시다가 그대가 마음으로 뿌린 씨앗은 그대 마음의 양식이 되게 하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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