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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카소와 함께 한 시간들

조르주 타바로 지음 | 큰나무
피카소와 함께 한 시간들

조르주 타바로 지음/강주헌 옮김

큰나무/2003년12월/223쪽/9,500원



만남

1973년 1월, 마지막 눈길

1973년 1월 17일, 내가 파블로 피카소를 마지막으로 본 날이다. 그리고 몇 달 후 그는 숨을 거두었다. 가을이 저물어 갈 무렵부터 피카소를 만나지 않았지만, 그가 지독한 기관지염으로 고생하며 힘겹게 겨울을 보내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1월 14일, 피카소의 비서 미구엘이 내게 전화를 걸어 피카소가 나를 보고 싶어한다는 말을 전했다. 그 다음날 나는 노트르담 드 비, 즉 피카소가 1961년부터 자클린과 살면서 작업을 하던 무쟁의 집에 도착했다. 나는 피카소의 침실이 있는 2층으로 곧장 올라가려고 했으나, 놀랍게도 피카소는 조각 작업실에 내려와 있었다. 영원히 살 것처럼 보였던 위대한 예술가가 석 달 만에 완전히 변해 있었다. 격자무늬 담요로 어깨까지 감싸고 있는 피카소는 몰라볼 정도로 수척해진 모습이었다. 피카소 곁에서 우리는 죽음에 대해서 입도 뻥긋하지 않았다. 그의 친구 브라크가 세상을 떠나고, 마티스마저 숨을 거두었을 때에도 우리는 죽음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그 침묵은 에스파냐식이었으며, 지중해적 방식이었다. 그 때문에 유언도 없었다.

그날 피카소는 내게 그의 마지막 자화상도 보여주었다. 나는 숨이 막히는 듯했다. 자신의 눈에 보이는 대로, 한줌의 편견도 없이 그려낸 초상화였던 것이다. 문자 그대로 인간의 윤곽이 사라지고 단순한 형상을 초월한 초상화였다. 이 자화상을 그리려고 그는 그 또렷한 눈, 그러나 겁에 질린 듯한 커다란 눈을 끝까지 간직하고 있었던 것일까? 그리고 몇 주 후, 피카소는 거의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벌써 30년 전의 일이다. 이제 와서 나는 그의 죽음을 둘러싼 정황들을 돌이켜본다. 프랑스에서는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슬픔이나 기념식은 없었다. 그러나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에서는 모든 갤러리가 하루 동안 문을 닫았다. 발로리스에서는 모든 도공이 작업실의 문을 닫고 한 시간 동안의 묵념을 가졌다.

1946년 여름, 피카소와의 첫 만남

피카소와 첫 만남은 햇살이 화창한 날에 이루어졌다. 노화가에게는 새로운 인물과의 장난스런 만남이었을지 모르지만, 내게는 가슴 두근거리는 커다란 사건이었다. 그리고 1946년 8월, 서른을 갓 넘긴 나와 피카소의 첫 만남은 그렇게 이루어졌다. 그날은 유난히도 햇살이 따가웠다. 그는 내게 수영복을 입고 오라고 권했다. 다음날 아침, 나는 약속 시간보다 훨씬 전에 해변으로 나갔다. 화창한 날씨였다. 바다는 거울처럼 잔잔했다. 카바렐로에는 이미 파라솔이 잔뜩 펼쳐져 있었다. 피카소와 프랑수아즈는 정오에 이르러서야 모습을 보였다. 피카소는 셔츠를 입지 않은 채 검정 수영팬티 차림으로 나타났다. 그것이 몸에 걸친 전부였다. 그는 긴 의자에 앉아 「우국지사」를 펼쳤다. 나를 위해 산 것이 틀림없었다. 그 지역 신문의 성격을 대강이라도 살펴보려고 말이다. 그는 나를 유심히 살피면서 나에 대해 판단하고 있는 듯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그는 대담을 마무리짓고 내게 함께 수영을 하자고 권했다. 프랑수아즈가 뭍으로 나간 후에도 우리는 한참동안 바다에서 보냈다. 어느덧 헤어질 시간이 되어, 작별의 인사말을 건네자 피카소는 다정한 목소리로 “우리는 매일 정오 경에 이곳에서 수영을 하네. 시간이 허락하면 언제라도 또 오게.”라고 대답해 주었다. 그날은 내게 있어 너무나 특별한 날이 되었다. 만남 자체가 두려웠던 사람에게서 형제애와 온유함을 느꼈다.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인간애도 느낄 수 있었다. 그가 아무 때라도 다시 찾아오라고 권했지만 감히 그를 다시 찾을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삶은 생각대로 흘러가지 않는 법일까? 며칠 후, 당시 앙티브 미술관 관장이던 도르 드 라 수셰르(그리스문화 전문가로 앙티브 미술관 관장이었다. 이 미술관은 나중에 앙티브 그리말디 성의 피카소 미술관이 되었다)가 피카소에게 대화의 시간을 요청했고, 피카소는 골프쥐앙 만의 해변에서 정오에 만나자고 대답했다. 사실 수셰르는 아담한 현대 미술관을 만들 생각으로 지역 화가들의 작품을 수집하고 있었다. 따라서 수셰르는 피카소에게도 ‘작품’을 기증해 달라고 요구했다. 피카소는 그런 요구를 달갑지 않게 생각했다. “당신들 모두가 똑같군요. 미술관 관장들, 당신들의 역할이 대체 뭡니까? 화가들이 먹고 살 수 있게끔 도와주는 것이 아닙니까? 아니면 화가들에게 구걸하는 겁니까? 왜 화가들이 당신들을 도와 줘야 합니까? 그림을 그냥 준다면 화가들은 뭘로 먹고 삽니까? 그림값은 당연히 지불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피카소는 “게다가 나는 여기에서 작업할 공간조차 없소!”라고 소리쳤다. 수셰르는 작업실이 없다는 피카소의 푸념에 거의 본능적으로 반응하며, 그날 오후에 바로 피카소를 그리말디 성으로 초대했다. 그곳으로 거처를 옮긴 덕분에 몇 주로 예정되었던 피카소의 바캉스가 넉 달로 연장되었다. 덕분에 나는 피카소를 여러 차례 다시 만날 수 있었고, 더 깊이 알 수 있었다.

자네는 대단한 기자야. 나에 대해 한 줄도 쓰지 않으니까!

피카소는 때때로 방문객들에게 나를 ‘대단한 기자’라고 소개했다. 그리고는 곧바로 “나에 대해 한 줄도 쓰지 않으니까!“라고 덧붙여 주지 않았더라면 아무 의미 없는 칭찬에 불과했을 것이다. 요컨대 나는 피카소에 대한 글을 쓰고 있었고, 피카소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피카소의 사생활에 대해서는 한 줄도 쓰지 않았다. 내 눈으로 목격하고 내 귀로 들었더라도 그의 개인적인 만남과 대화에 대해서는 한 줄도 쓰지 않았다. 때문이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금세기 최고의 화가와 끈끈한 우정을 맺어 가는 예외적인 행운을 누릴 수 있었다. 어느덧 모든 언론이 주목하는 화가의 친구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나는 피카소의 사생활을 속속들이 아는 침묵하는 증인이었다. 언젠가 자클린이 나의 존재에 대해 묻자, 피카소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타바로 앞에서는 감출 것이 없어. 절대 기사로 쓰지 않을 테니까!“ 사실이었다. 피카소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내 앞에서 감추는 것이 없었다. 이런 신뢰는 그 어떤 애정의 표시보다 내게 깊은 감동을 주었다. 이런 그에게 나는 분별력과 침묵으로 화답했다.



프랑수아즈와 함께

피카소, 도기(陶器)를 만나다

나는 1948년 여름에 수잔과 조르주 라미에 부부의 전시실 겸 작업실이던 마두라 도요지(陶窯址)에서 피카소를 다시 만났다. 피카소가 도기를 처음 접한 것은 1946년이었다. 그는 유난히 산책을 좋아해 발로리스 공산당 지부의 동지들을 찾아다녔고, 도요지를 방문하고 싶어했다. 도공들은 구경삼아 도요지를 기웃대는 예술가들을 달갑지 않게 생각했다. 그들이 어찌 생각을 하든 도요지를 둘러본 피카소는 라미에 부부의 도요지에서 <작은 황소들(유명한 <토리토스>)>과 <반인반양(半人半羊)>을 빚었다. 그리고 조르주의 조언을 받아 가며 산화물로 황소상에 그림을 그려 넣고는 그 결과를 살펴보려 다시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작업실을 떠나갔다. 그 후 피카소는 한 번 두 번 거의 매일 도요지를 찾았다. 물고기를 장식하고, 다양한 색으로 무늬를 넣은 하얀 접시와 수프 그릇이 그때 만들어졌다. 꽃병과 부조는 그 후의 작품들이다. 피카소와 함께 작업한 사람들의 회고에 따르면 피카소는 도공들이나 일꾼들에게도 궁금한 것을 직접 물어 보았다고 한다. 그리고 그들의 대답을 귀담아 들으면서 한편으로는 그들이 언급하는 작품에서 눈길을 떼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도기에 대한 모든 것 - 녹로의 비밀, 흙의 반죽, 산화물, 잿물, 법랑의 오묘한 변화 등을 - 알고 싶어했다. 피카소에게는 탁월한 능력이 있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감을 없애는 동시에 서로의 공감대를 만들어 내는 능력이다. 달리 말하면 도공들은 피카소가 보여 준 뜨거운 열의에 굴복한 것이었다. 게다가 저명한 화가가 자신들에게 조언을 구하고 그 조언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에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중에 피카소가 도기의 균형감을 높이고, 그때까지 불가능한 것으로 알려진 혼합을 시도하며 새로운 색을 찾아내기 시작하자, 도공들은 피카소의 의도를 이해하면서 협조를 아끼지 않았다. 그들이 협조했다는 것은 피카소의 능력을 그만큼 인정했다는 뜻이다.

냉전과 비둘기

프랑수아즈와 함께 한 시기는 냉전의 시기였다. 또한 피카소가 공산당에 가입했을 뿐 아니라 평화운동과 핵무기금지 투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시기이기도 했다. 1949년 피카소는 평화운동을 위한 제1차 세계대회와 버팔로 집회에 참석했다. 2차대회는 1950년 런던에서 개최될 예정이었다. 그런데 영국정부가 피카소를 제외하고 운동본부 회원들 모두에게 입국비자를 거부하는 바람에 피카소가 운동본부의 이름으로 셰필드에서 연설을 해야 했다. 같은 해, 세계평화 평의회가 핵무기금지를 요구하는 ‘스톡홀름 선언’을 발표하며 서명운동에 돌입하자 피카소는 대표단에 참여해서 대중에게 서명을 독려했고, 마티스를 찾아가 그 선언에 첫 서명자가 되도록 설득해 끌어들이기도 했다. 평화운동을 위해 연속해서 데생한 4마리의 비둘기가 판화와 데생, 그리고 사진으로 수백만 장씩 인쇄되었고, 도기와 목각, 유리와 금속으로 제작되어 평화투쟁의 보편적 상징물로 전 세계를 날아다녔다.

위대한 걸작

피카소는 작품이 완성되기 전에는 누구에게도 보여 주지 않았다. 어느 날 나는 피카소에게 “작업중인 작품을 누구에게도 보여 주지 않는 이유라도 있습니까?”라고 물었다. 피카소는 이렇게 대답했다. “내가 미처 끝내지 않은 작품을 보고 자네가 너무 아름답다고 칭찬했다고 해 보세. 그럼, 나는 그림을 망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더 이상 붓질을 하지 못할 거야. 그리고 결국 그림을 망치게 되겠지. 거꾸로 자네가 그림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예컨대 균형감이나 색의 조화가 이상하다고 말하면서 내 작업실을 나가면 어떻게 되겠나? 나는 그 그림을 내동댕이치고 말 거야. 그래서 내가 작업중인 그림은 누구에게도 보여 주지 않는 걸세. 그래야 내 의도대로 끝까지 작업할 수 있으니까. 실패하든 성공하든 간에 내가 원하는 것을 끝까지 밀고 나가려면 어쩔 수가 없어. 예술가에게 실패는 탐구와 관찰의 순간에 있고, 미래의 판단에 있는 걸세. 판단은 다른 사람들의 몫이어야 해. 따라서 예술가는 눈으로 본 모든 것을 다른 사람이 볼 수 있게 해주어야 하는 것이라네. 이런 점에서 예술가는 과학자와 다를 바가 없어. 결국 실패는 관찰의 실패라고 할 수 있는 거지.” 피카소의 이런 지적을 생각하면서, 나는 자코메티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서 퐁피두센터가 그의 걸작들과 1930년대의 실패작들을 나란히 전시한 것을 즐겁게 관람할 수 있었다. 위대한 창조의 과정을 고스란히 지켜보는 기분이었기 때문이다. 위대한 걸작은 그냥 태어나는 것이 아님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마티스와의 우정

유감스럽게도 피카소와 마티스,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해 언급한 전기작가는 거의 없다. 그러나 피카소와의 관계가 더해질 때에야 비로소 우리가 마티스라는 위대한 화가에 대해 갖고 있는 이미지를 완성시킬 수 있을 것이다. 언젠가 피카소는 마티스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마티스의 작품에서는 무신론적 냄새가 물씬 풍기네. 마티스는 하나님을 믿지 않았어. 물론 지금도 믿지 않아! 그에게는 그저 대리석 덩어리일 뿐이야. 언젠가 마티스가 내게 방스 성당의 작업에 대해 말해 준 적이 있네. 이렇게 말하더군. ‘그런 요구를 거절할 이유가 있나? 내 마음에 들면 난 누구의 요구라도 들어줄 거야. 어떤 곳이라도 멋지게 장식해 줄 거라고. 하지만 지금까지 내게 매음굴을 장식해 달라고 하는 사람은 없었네’라고 말하더군.” 한마디로, 마티스와 피카소의 관계는 우정과 존경, 그리고 깊은 경쟁의식으로 점철된 관계였다. 그들은 서로 상대의 그림을 소장하고 있었다. 마티스가 1908년에 그린 마티스 부인의 초상화, <마르그리트의 초상(Le portrait de Marguerite)>은 언제나 피카소의 집에 걸려 있었다. 어떤 그림도 집에 걸지 않는 것으로 유명했던 피카소가 말이다.



피카소와 청년들, 그리고 축제

피카소와 청년들

1950년 피카소는 정치활동에도 적극적이었다. 따라서 평화운동의 후원 하에 니스에서 개최된 국제청년모임을 주재하는 역할을 떠맡은 것도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청년모임을 8월 3일부터 20까지 17일 동안 니스에서 열렸다. 피카소는 석판화에 데생한 작품을 이미 4월말에 인쇄업자에게 보낸 것을 시작으로 청년운동의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 석판화는 소년과 소녀, 두 인물이 주인공으로, 아름다운 얼굴을 달빛을 가득 머금고 있었다. 둘의 손에는 비둘기가 있었고, 특히 소년의 얼굴은 1949년에 데생한 오라두르의 어린아이 얼굴을 떠올리게 했다.

그해 6월, 「프랑스의 편지(Les Lettres francaises)」는 ‘「프랑스의 편지」와 피카소가 특별한 여름을 알린다’라는 제목으로 전면에 걸쳐 시위소식을 알렸다. 이 시위소식은 유럽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여름이 되자 에스파냐, 벨기에, 영국 등에서 결성된 청년모임이 코트다쥐르로 모여들었다. 8월 13일, 피카소는 세 어린이를 데리고 연단에 올랐다. 바다가 훤히 보이는 거리에 마련된 연단이었다. 수많은 나라에서 몰려온 수천 명의 청년들 앞에서 피카소는 엄숙한 목소리로 “졸리 퀴리 의장의 이름으로 평화와 핵무기 절대금지를 위한 청년모임의 개막을 선언합니다!”라고 소리쳤다.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은 이미 포스터의 데생으로 표현했기 때문이었다. 아쉽게도 그 포스터는 남아 있지 않다. 게시되는 대로 우익이 분노하며 뜯어내거나 찢어 버렸고, 한편으로는 집에 두고 영원히 간직하려는 애틋한 마음이 떼어 냈기 때문이었다. 다양한 언어가 뒤섞인 청년들의 모임이었지만 그들의 가슴은 하나였다. 피카소는 젊은이들 곁을 떠나지 않았다. 그들과 밤을 함께 보냈다. 젊은이들은 피카소를 에워쌌고, 그들이 내미는 포스터, 머플러, 프로그램에 쉴새없이 사인해 주었다. 비둘기 그림과 함께!

타고 난 노동자 피카소와 발로리스

피카소가 쉽게 일하는 능력을 타고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피카소는 그런 능력보다 시간과 일이라는 개념을 더욱 소중하게 생각했다. 내가 미리 선별함에도 불구하고 일거리가 쌓이며, 피카소는 “타바로, 내게는 일할 시간이 필요하네. 내게 일은 호흡하는 공기와도 같아. 내게는 호흡기관이 하나 더 있는 셈이야.”라고 말했다. 때로는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야. 자네도 알다시피 요즘에 내 일을 할 짬도 낼 수가 없네. 이제야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있겠어. 시간이 없기 때문이야. 너무 바쁘거든. 자동차를 몰다가 멈추고는 다시 출발하는 거야. 끔찍하지 않나. 일하는 사람만이 시간을 가질 수 있어!”라고 말했다. 그러나 피카소는 한시도 발로리스 사람들을 잊지 않았다. 1952년에는 그들을 위해 커다란 선물을 준비했다. 유네스코가 파리본부를 장식할 생각으로 주문한 약 100제곱미터 크기의 우의적인 그림, <이카루스의 추락(La Chute d' Icare)>을 발로리스 사람들에게 첫선을 보인 것이다. 이 시기에 피카소는 발로리스 도공들의 연례 전시회에 빠짐없이 참가했을 뿐 아니라, 전시회를 알리는 포스터까지 도맡았다. 사실 피카소는 전시회의 주인공이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피카소는 발로리스의 젊은이들과도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예술가와 젊은이는 똑같이 열정을 먹고사는 집단이라 생각한 때문이었다.

신문사 로비에서의 사인

민중을 위한 신문에 피카소가 도움을 주었다. 파격적인 도움이었다. 물론 이전에도 피카소는 「뤼마니테」를 비롯해 공산당 청년국의 잡지인 「라방 가르드(Avant-Garde)」, 공산당 지식인들이 발행하는 「신비평」, 진보주의자들의 문학잡지인 「유럽(Europe)」 등을 위해 데생을 그려 준 적이 있었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우리에게 준 삽화는 민중의 흥겨운 축제를 재밌게 묘사한 데생이었다. 피카소가 작은 눈짓처럼 감춰 놓은 비둘기를 제외한다면 정치적 의미는 없었다. 카니발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기 위해 그린 데생이었다. 피카소는 내게 데생만 준 것이 아니었다. 채색 데생을 분할한 석 장의 여과지도 함께 주어 나를 놀라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는 태연하게 “이렇게 하면 금전적으로 시간적으로 절약이 되겠지?”라고 말했다. 피카소는 데생을 신문에만 사용하도록 제한하지는 않았다. 이 그림을 윤전기로 신문용지에 1,000매를 더 인쇄해도 좋다고 허락하며, “자네가 원한다면 그날 내가 신문사에서 신문을 사는 사람들에게 사인을 해주겠네.”라고 말했다. 또 피카소는 “책상과 의자만 준비해 주게. 하나씩이면 충분할 거야.” 피카소는 그날의 행사를 무척이나 흡족해 했다. 사람들과 흉금 없이 나누었던 대화에도 만족하는 듯했다. 하지만 그 이후로 우리는 그런 행사를 다시 갖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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