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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00미터의 희망과 고독

엄홍길 지음 | 이레
에베레스트 등반길에는 나를 포함해서 모두 8명의 대원이 참가했는데, 우리는 모두 히말라야에 처음으로 발을 디뎌보는 것이었다. 에베레스트 등반에서 처음인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국내에는 2000미터가 넘는 산이 없으므로 해발 5400미터까지 올라온 것도 첫 경험이었고, 베이스캠프에서 먹고 자면서 오랜 시간 함께 등반을 해보는 것 역시 처음이었다. 물론 원정을 떠나오기 전에 장기간 합숙훈련을 하며 등반 기술을 익히고 손발을 맞췄지만 정작 에베레스트를 대했을 때, 그 위용 앞에서는 모두가 주눅이 들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정대는 에베레스트에서 가장 어렵다는 남서벽 루트로 정상에 오를 계획을 갖고 일정을 진행시켰다.



루트 개척이 시작되면서 나는 원정에 참가한 것을 몇 번이나 후회했다. 처음 겪는 에베레스트의 겨울 날씨는 견딜 수 없을 정도로 혹독했다. 지옥이 따로 없었다. 등정은 고사하고 하산하는 것조차 두려웠다. 7800미터 지점까지 진출했다가 결국 되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에베레스트는 우리의 하산길조차도 호락호락 내버려두지 않았다. 산중에서는 어둠이 빨리 왔다. 텐트 바깥에선 몸집이 큰 짐승들의 울음소리 같은 게 연신 텐트를 후려쳤다. 텐트 안에서 우리는 꼼짝도 하지 않고 누워 있었다. 관절 마디마디가 욱신거렸다. 그렇게 얼마나 흘렀을까. 꿈속에서인지, 잠들기 전에 켜놓았던 가스등 불빛이 심하게 흔들렸다. 동시에 툭, 툭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텐트가 반쯤 찌그러졌다. 텐트를 고정시킨 핀이 눈 폭풍을 견디지 못하고 뽑히면서 텐트가 빠른 속도로 밀려 내려가기 시작한 것이었다. 급히 텐트 문을 열고 후배와 함께 몸을 구르다시피 해서 텐트를 빠져나왔다. 불과 몇 초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우리는 맨몸으로 어둠 속에 주저앉아 있었다. 비상식량이며 아이젠, 배낭은 물론이고 등산화조차도 텐트와 함께 날아가버린 것이었다. 막막했다. 아무런 장비도 없이 영하 20도가 넘는 눈 폭풍 속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다는 말인가. 마냥 주저앉아 있을 수는 없었다. 우선 정신을 가다듬었다. 30분쯤 눈구덩이를 기어 내려갔을까. 정말 다행히도 우리는 눈 폭풍 속에서 데포 텐트를 발견할 수 있었다. 우리는 마지막 남은 힘을 다해 그 장비들을 헤집고 몸을 눕혔다.



아침이 되니 눈앞이 훤했다. 눈 덮인 에베레스트의 봉우리들이 아침 햇살 속에서 찬란하게 빛을 발하며 기지개를 켜고 있었다. 지난 밤사이에 일어났던 끔찍했던 일들은 그 풍경 속 어디에서도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꿈이었던가? 기적이 따로 없었다. 잠시 후 멀리, 캠프 2였던 자리가 눈에 들어왔고 그곳으로부터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반쯤 눈 속에 처박힌 텐트가 보였다. 텐트는 크레바스에 빠지기 직전이었다. 크레바스는 깊이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입을 벌리고 있었다. 텐트 안에서 제때 빠져나오지 못했다면, 눈 폭풍에 조금만 더 밀렸다면 어찌 되었을까를 생각하니 아찔했다. 비상식량을 꺼내 허기를 달랜 후 배낭을 메고 베이스캠프를 향해 발걸음을 옮기자 비로소 살아 있다는 게 실감났다. 비록 등정에는 실패했지만, 살아 있는 한 반드시 에베레스트 정상을 밟을 것이라며 스스로에게 몇 번이고 다짐했다.에베레스트 등정 성공 이후 나는 아무것도 두렵지 않았다. 어느 산이든 못 올라갈 산은 없다고 생각했다. 만일 9000미터가 넘는 산이 지구상에 존재한다면 그 산도 단번에 올라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토록 오르고자 했던 세계 최고봉을 올랐으니, 그보다 낮은 산들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오를 수 있다고 생각했다. 단지 걸림돌이 있다면, 산을 오르기 전 원정에 필요한 물자를 조달하고 경비를 해결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진정한 걸림돌은 외부에 있는 게 아니라 내 마음속에 있었다. 나는 스스로에게 외쳤다. '청춘의 황금 같은 시간들을 아무런 고민도 없이 안락함에 젖어서 흘려보낼 것인가. 나는 산악인이다. 내가 꿈꾸던 생활은 이게 아니다. 혈기왕성한 나이에 이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다. 가자, 흰 산을 향해서.' 그리고 얼마 후, 나는 대한산악연맹에서 추진하는 히말라야 8000미터급 원정팀에 합류했다.1993년 초오유-시샤팡마에서 나는 히말라야의 8000미터로 돌아왔다. 내 몸속으로 끝없이 흘러들던 실패와 좌절의 시간은 이 봉우리들을 오르면서 떨어져나가기 시작했다. 1988년 에베레스트 등정 이후 실로 5년만에 히말라야 8000미터 너머에 있는 정상의 문을 열기 시작한 것이다. 초오유-시샤팡마를 넘어선 뒤로, 1995년 봄 마칼루(Makalu)부터 1996년 가을 마나슬루(Manaslu)까지 나는 8000미터 봉우리 5개를 연속으로 등정했다. 그러나 1993년 가을 시사퍙마에서 아끼던 젊은 후배 한 명을 설산에 묻고 돌아와야 했다. 그는 지금 내 가슴속에서 나와 함께 살고 있다.48시간의 사투… 병태야, 병태야검은 귀신 마칼루불가능한 꿈을 향하여4. 안나푸르나를 향한 긴 여정환희… 아, 지현옥5. 14번째 하늘로 가는 길서울 올림픽이 열리던 1988년 가을,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는 한마디로 '시장 바닥'을 방불케 했다. 세계 각국에서 몰려든 원정대가 에베레스트 정상에 오르기 위해 베이스캠프에서부터 보이지 않는 경쟁을 벌이고 있었다. 그들 틈에 한국을 대표하는 젊은 산악인들이 모여있었다. 에베레스트 등반 경쟁은 사실 베이스캠프가 아니라 카트만두에서부터 시작됐다. 같은 시기에 10여 개가 넘는 원정대가 에베레스트를 오르기 위해 움직였다. 각 원정대가 데리고 갈 셰르파들까지 합친다면 적어도 수백 명이 좁은 베이스캠프 지역에서 북적거릴 것이었다. 그렇다면 자리 다툼이 일어날 게 뻔했다. 나는 선발대로 온 대원들과 카트만두를 떠나 베이스캠프로 향했다. 선발대는 캐러밴(caravan)을 하고 있는 외국 원정대들을 앞질러가며 베이스캠프 지역으로 밤낮을 가리지 않고 발걸음을 계속했다. 그리고 며칠만에 베이스캠프에서 가장 좋은 지역에 한국 팀 원정대의 깃발을 꽂았다.



모든 캠프 구축을 마친 한국팀이 정상 공격을 앞두고 한자리에 모였다. 한국팀 대원 가운데 나는 1차 공격조에 편성되어 맨 먼저 마지막 캠프를 출발했다. 나는 히말라야 등반에서 처음으로 산소마스크를 쓰고, 등반에 나섰던 모든 원정대 가운데 가장 먼저 에베레스트 정상으로 가는 길을 뚫기 시작했다. 그러나 정상이 가까워질수록 나는 점점 더 걸음을 옮겨놓을 수 없었다. 믿었던 산소마스크가 고장이 났는지 숨을 쉴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정상의 마지막 관문인 '힐러리 스텝(5∼6미터 높이의 수직벽으로 에베레스트를 최초로 오른 영국 힐러리 경의 이름에서 따왔다)'에 이르렀을 때 나는 결국 그 자리에서 주저앉고 말았다. 가슴속이 답답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눈앞이 노랗게 바뀌면서 잠시 정신이 혼미해졌다. 나는 즉시 산소마스크를 벗어던지고 정신이 돌아올 때까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얼마의 시간이 흐른 뒤, 호흡곤란이 사라지자 나는 다시 일어나 정상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나는 마침내 세계 제1위 봉인 에베레스트 정상에 올라섰다. 점점이 떠 있는 구름 아래로, 멀리 티베트 고원이 끝없이 펼쳐져 있고 히말라야의 영봉들이 내 발 아래 들어와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나는 꿈에 그리던 에베레스트 정상에 올라선 것을 실감했다. 티베트 고원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살아 있다는 게 무한한 기쁨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1989년부터 1993년까지 나는 히말라야 8000미터급 봉우리에 6번 도전했다가 6번 모두 정상을 밟지 못했다. 단 한 번도 8000미터를 넘어서지 못하고 무릎을 꿇어야 했다. 첫 번째 도전한 8000미터급 봉우리는 안나푸르나(Annapurna)였다. 네팔 현지 사정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고 8000미터 등반 경험이 있었던 터라, 나는 서울에서 온 원정대원들을 이끌고 가이드를 겸해 안나푸르나로 이동했다. 그러나 정작 베이스캠프를 구축하고 등반에 나섰을 때, 나는 그러한 기대를 접을 수밖에 없었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었지만 안나푸르나의 겨울 날씨는 지독했다. 게다가 수시로 일어나는 눈사태와 강풍은 등반 기간 내내 원정대를 괴롭혔다. 등정에 실패한 가장 큰 이유는 무엇보다도 정보 부족이었다. 캐러밴을 시작하고 마지막 마을인 레테에서 원정대는 베이스캠프까지 짐을 나를 포터를 구하지 못해 일주일 가량이나 발이 묶여 있었다. 그 사이 등반하기에 좋았던 날씨는 지나가버리고, 루트 개척 초반부터 날씨와 싸우는 이중고를 치러야 했다. 날씨의 변화를 감당해내지 못한 것은 안나푸르나에서뿐만이 아니었다. 이어진 1990년 여름의 낭가파르바트(Nanga Parbat) 루팔벽과 세 번째 다시 찾았던 에베레스트 남서벽에서도 나는 8000미터를 넘어서지 못하고 발길을 돌려야 했다. 대자연의 위력 앞에서 내 욕망을 지탱하는 힘들은 아무런 빛을 발휘할 수 없었다. 1991년 가을 시샤팡마(Shisha Pangma)와 그해 겨울 초오유(Cho Oyu)에서도 나는 정상에 발을 들여놓지 못하고 돌아서야 했다. 1992년 여름 낭가파르바트를 향해 떠날 때 내 머릿속에는 온통 올라야 한다는 생각으로 꽉 차 있었다. 산다는 게 모험이라면, 내게 있어서 도전과 모험은 오직 8000미터를 오르는 것이었다. 하지만 다섯 번 실패하고 여섯 번째로 8000미터를 오르기 위해 떠난 낭가파르바트에서, 나는 또다시 실패의 사슬을 끊어내지 못하고 돌아와야 했다.낭가파르바트는 '비극의 산'이다. 파키스탄과 인도, 중국 국경이 머리를 맞댄 히말라야 산맥의 서쪽 끝 편잡 히말라야 지역에 홀로 우뚝 솟아 있는 이 산은 1895년 인간의 첫 도전을 받은 이후 1953년 독일의 전설적인 클라이머 헤르만 불(Hermann Buhl)에게 정상을 내주기까지 58년간 무려 31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나 역시 이 산에서 예외는 아니었다. 2년 전인 1990년 자신만만하게 이 산의 등반에 나섰다가 정상을 400여 미터 앞둔 7700미터 지점에서 기상 악화로 등정을 포기한 경험이 있었다. 1992년 낭가파르바트 원정에 참가하면서 나는 1990년의 기억을 잊지 않았다. 정상으로 향하는 루트는 베이스캠프에서 훤히 보였다. 나는 후배 2명을 이끌고 캠프 2를 설치한 다음 하루만에 캠프 4지점까지 치고 올라가 텐트 2동을 설치했다. 캠프 4는 정상 공격의 마지막 거점이었다. 눈보라가 텐트를 덮칠 듯이 몰아쳤다. 눈보라는 좀처럼 그칠 것 같지 않았다. '그래, 하루만 더 버텨보자.' 나는 베이스캠프와의 유일한 연락 수단인 무전기를 꺼버렸다. 베이스캠프의 원정대장은 철수 명령을 내릴 게 뻔했다. 정상을 향해 가는 날 나는 무전기를 켤 생각이었다. 어렴풋이 정신을 차려 팔목에 찬 시계를 들여다보니 새벽이었다. 눈보라는 멈춰 있었다. 다행이었다. "가자!" 배낭을 어깨에 매고 옆 텐트를 향해 소리쳤다. 잠시 후 텐트 문이 열리더니 후배 한 명이 얼굴을 내밀었다. "도저히 못 가겠습니다. 둘 다 컨디션이 엉망입니다." 목소리가 가늘었다. 캠프 2에서 캠프 4까지 단숨에 밀어붙인 게 아무래도 무리가 아니었나 싶었다. "그럼 기다려라." 짧게 한마디를 던지고 텐트 문을 닫았다. 나는 망설이지 않았다. 이제부터 혼자였지만 두렵지 않았다. '가자!' 나는 자신을 향해 소리쳤다.



무릎을 적시던 눈은 어느새 가슴 위까지 차 올랐다. 그런 눈 속에서 허우적댄 게 벌써 8시간째였다. 베이스캠프에서 보아두었던 등반 루트는 머릿속에서 지워진지 오래였다. 발가락을 꼼지락거려보았다. 감각이 없었다. 불현듯이, 이대로 가다가는 눈 속에 파묻혀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조건 후퇴해야 한다.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었다. 나는 미친 듯이 아래로 미끄러졌다. 몸이 눈 속에 처박힐 때마다 팔꿈치로 기다가 다시 일어섰다. 얼굴은 눈물과 콧물로 뒤범벅이 되고 온몸이 흥건히 젖었다. 마지막 캠프였다. 일단 캠프 2까지 후퇴한다면 한숨을 돌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캠프 2에는 2차 공격조가 기다리고 있었다. 무전기를 꺼내들고 베이스캠프에 상황이 급박하다는 것을 알렸다. 캠프 2에 대기하고 있는 2차 공격조를 구조대로 올려보낸다는 교신이 들려왔다. 캠프 2에서 캠프 4까지는 제아무리 빨리 올라와도 하루 이상이 걸렸다. 캠프 4에 주저앉아서 마냥 그들을 기다릴 수는 없었다. 나는 망설이지 않았다. "벨트를 채워라!" 다행히 후배 한 명은 내가 정상 공격을 하는 동안 걸을 수 있을 정도로 몸 상태가 괜찮아졌다고 했다. 나는 그 후배와 번갈아 가며 환자를 끌기 시작했다. 혼자 몸으로도 내려가기 힘든 길을 하반신이 마비된 환자와 함께 내려간다는 것은 모험이었다. 우리들은 기진맥진해 있었다. 다시 날이 밝았다. 나는 푸르스름하게 부풀어오른 발을 억지로 등산화에 구겨넣었다. 등산화 속으로 들어간, 감각이 무뎌진 두 발이 나를 베이스캠프까지 데려다줄 것이었다. '가자, 가서 다시는 오지 말자.' 몸이 불편한 후배를 구조대와 함께 남겨놓고 혼자 내려오면서 나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나는 간단하게 배낭을 꾸렸다. 동상 부위가 썩어 들어가는 듯했다. 나는 그 발에 등산화 대신 샌들을 고정시켰다. '가자, 혼자 힘으로 가서 다시는 오지 말자.' 베이스캠프를 나서며 나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그날 밤, 나는 마침내 지프가 기다리는 마을에 도착했다. 2박 3일 거리를 하루만에 주파한 것이었다. 서울의 병원에서 나는 동상에 걸린 오른쪽 엄지발가락 한마디와 두 번째 발가락 일부를 잘라냈다. 다행히 다른 발가락들은 잘라내지 않고도 치료가 가능했다. 걸을 수 있었다. 그것으로 위안을 삼았다. 그해 여름이 가고 있었다.3. 불가능한 꿈을 향하여낭가파르바트에서 오른쪽 발가락 두 개를 잃은 뒤 상처가 아물 즈음 나는 남미 최고봉인 아콩카과를 거쳐 쿠에르노와 칸텡그리 봉 등정에 성공하고 다시 히말라야로 향했다. 나의 목표는 1991년에 실패한 초오유-시샤팡마 연속 등정에 맞추어져 있었다. 거봉 산악회에서 주도한 이 원정에서 나는 등반대장의 자격으로 산악회 직계 후배인 박병태와 막내인 민경태를 정상 공격조에 편성했다. 초오유 등정의 감격을 뒤로하고 우리가 시샤팡마 베이스캠프에 진입한 때는 등반 시즌이 시작되고 20여 일 이상 지난 뒤였다. 우리들은 초오유에서 완벽하게 고소 적응을 한 상태였고 더구나 등정에 성공했던 터라 몸이 어느 때보다 가벼웠다. 셰르파들이 돌아가고 우리는 플라토가 시작되는 지점에 자리한 캠프 2에서 마지막 점검을 했다. 캠프 3, 4를 생략하고 우리는 곧장 정상 공격에 나서기로 마음먹었다.

캠프 2를 출발하고 5시간쯤 지났을까, 어느덧 사방이 밝아지기 시작했고 우리는 일단 걸음을 멈추었다. 눈 속에서 오래 헤매다 보면 체력은 급격히 떨어지게 마련이고, 촛대봉을 올라서기도 전에 우리는 주저앉을 수밖에 없다. 그런 상황을 맞는다면 정상 공격은 점점 더 힘들어진다. 지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우리는 얼마 못 가 온몸이 눈 속에 파묻혔다. 더 이상 꼼짝할 수 없었다. 겨우 팔을 들어 달빛에 시계를 비춰보았다. 새벽 1시가 훌쩍 넘어 있었다. 캠프 2를 출발한 지 꼬박 24시간이 흐른 것이었다. 우리는 일단 등반을 중단하기로 했다. 이제부터는 각자 설동을 파고 추위를 피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날이 밝을 무렵 걸음을 떼어놓으려는 순간 등뒤에서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홍길이 형…." "아무래도 안 될 것 같습니다…. 저는 내려갈게요." "혼자서 내려갈 수 있겠냐?" 병태가 걱정 말라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힘없이 웃는 듯했다. "힘을 내고… 조심해서 내려가거라." "꼭 성공하고 돌아오세요."



병태와 헤어지기 전에 악수를 건넸던가. 아마 그랬을 것이다. 나는 돌아섰다. 막내도 돌아섰다. 우리는 서로 아무 말 없이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해질 무렵 마침내 시샤팡마의 정산인 주봉에 올라 막내와 함께 간신히 카메라를 꺼내 들었다. 이 순간을 위해서 올라왔던가. 눈앞이 흐려졌다.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도대체 내 마음속에 있는 그 무엇이 나를 이곳까지 끌고 왔을까. 나는 자신에게 되물었다. 아무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이제 내가 할 일은 무사히 내려가는 것뿐이었다. 나는 무조건 캠프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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