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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존의 꿈

배일도 지음 | 위즈덤아카데미
결혼 초기의 어느 날이었다. 직장에서 나는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다. "밥 먹었어?" 다른 말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데 그 한마디는 분명히 했다. 아니, 다른 말을 할 시간이 없었던 듯하다. 아내가 대뜸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아니, 남자가 사회에서 그렇게 할 일이 없어요? 다시는 집으로 전화하지 말아요." 단호한, 너무도 단호한 아내의 말에 나는 충격을 받았다. 아내의 추상같은 명령을 받고 그 이후로 나는 그런 전화를 다시는 하지 않았다. 복직을 한 후 평소보다 일찍 귀가한 어느 날이었다. 아내는 나를 크게 반기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 "노동운동 한다는 사람이 왜 이렇게 일찍 왔어요? 일찍 올 생각말고 일 열심히 해요." 그 이후로 나의 귀가 시간은 자정을 넘기기 일쑤였다. 그렇기에 우리 집에서는 초인종을 누르는 법이 없다. 각자 열쇠를 사용한다. 우리는 생일도 특별한 날로 여기지 않는다. 그 날을 기억하려고 애쓰지 않으니 흘려 버리기 일쑤고, 기억한다 해도 굳이 생일 상을 차리려고 하지도 않고, 그래도 서로 서운한 감정을 갖지 않는다. 아내가 그런 걸 중요하게 여기지 않고, 함께 살다 보니 나 역시 그렇게 되었다. 세월이 흘러 요즘은 아내가 전화를 걸어오면 내가 무뚝뚝하게 묻는다. "왜 전화했어?"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아내는 가끔 그게 좀 섭섭한 모양이다. 아, 세월이 그만큼 흘러 버렸구나.생전에 어머니는 이 아들의 경제적인 무능을 며느리 탓으로 돌리며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저년 때문에 내 아들이 돈을 벌려고 하지 않는 거야." 아내는 어머니에게 이런 말을 하곤 했다. "어머니, 우리 그 사람 세상에서 당당하고 떳떳하게 살게 해주어요. 돈만 많다고 잘사는 게 아니잖아요. 뉴스 보세요. 재벌이고 뭐고 돈 때문에 온갖 문제 일으키고, 그 때문에 욕도 실컷 먹잖아요. 그런 삶은 부러워할 거 하나도 없어요. 그 사람이 그렇게 된 후에 한탄하지 말고, 소신 지키면서 살 수 있게 가족이 뒷받침해 주어야 해요." 모두 내 탓으로 벌어진 일인데, 어머니는 아내를 한때 몹시 미워했다. 그런데 극과 극과 통한다고 했던가? 아니면 고운 정 미운 정이 흠뻑 든 탓일까? 돌아가시기 전에 어머니는 '내가 사람으로 인정하는 사람은 맏며느리다'라는 의미 심장한 말을 했다. 미움을 받고 살았어도 자신이 인정을 받은 탓일까? 아니면 진정 사람의 마음이란 것이 그런 것일까? 아내는 요즘 '시어머니가 보고 싶다'는 말을 한다.



내 딸도 어린 시절에 아버지로 인해 가슴앓이를 한 적이 있었다. 감옥살이를 할 때였다. 어느 날인가 딸이 등교를 거부했다. 이유인즉슨 아이들이 놀린다는 것인데, 놀리는 말이 '지숙이, 아버지는, 감옥 갔대요, 감옥 갔대요'였다. 감옥에 있는 나는 편지로, 아내는 또 아내대로 어린 가슴에 상처가 남지 않기를 바라며 애를 썼다. 그런 우리 부부에게 결정적인 도움을 준 선생님이 있었다. 정식 교사는 아니고 교생 실습을 나온 대학생이었는데, 지숙이가 놀림을 받고 등교 거부도 그 때문이라는 것을 안 교생 선생님은 같은 반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얘들아! 유관순 누나나 김구 선생님 알지? 지숙이 아빠는 나쁜 짓을 저지르고 감옥에 간 것이 아니야. 힘들고 어렵게 사는 많은 사람들을 위해 일을 하다가 그렇게 되신 훌륭한 분이야." 그 말이 아이들의 태도를 바꾸게 했고, 그래서 딸이 놀림을 받지 않고 학교를 잘 다닐 수 있게 해주었으니, 말의 힘이 새삼 놀랍고, 무엇보다 그런 말을 해준 교생 선생님에게 고맙다. 나의 어머니와 나의 아내와 나의 딸, 나로 인해 맺어진 그 여인 3대의 삶이 오늘 내 가슴을 파고든다.흔히들 내일의 행복을 위해 오늘의 고통을 참아 내며 살자고 말한다. 그것이 희망을 버리지 말자는 뜻으로 쓰인다면, 코앞의 이익에 눈이 멀어 내일의 큰 이익을 버리지 말라는 뜻으로 쓰인다면, 자신만의 삶이 아니라 공존의 삶을 위해 살자는 뜻으로 쓰인다면 나는 쌍수를 들고 그런 행복관을 환영한다. 어떤 사람이 이렇게 말한다. "지금 나는 불행해. 먹고살기 위해 지금 하고 있는 이 일도 괴로울 뿐이고, 살기 위해 지금 만나는 사람들과의 교제도 즐겁지가 않아. 그렇지만 내일의 행복을 위해 이 모든 것을 참고 견뎌야 해. 그래야 행복한 삶을 기대할 수 있는 거야." 내가 생각하는 바로는 그 사람의 내일은 죽을 때까지 내일이 될 것이다. 그러니까 죽을 때까지 불행한 삶을 살게 된다는 뜻이 되겠다. 그런 태도를 취하는 사람들은 삶의 방식을, 행복을 바라보는 관점을 바꾸어야 할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서 눈을 뜨고 할 일은, 내일의 행복을 꿈꿀 것이 아니라, 오늘의 행복을 위해 그 하루에 무엇을 할 것인지를 생각하는 것이다. 오늘의 삶을 고통스러워하면서 내일의 행복을 바라는 그릇된 행복관을 버려야 한다. 내일은 또 하나의 오늘인 것이다. 행복은 오늘 저축해 두고 내일 찾아 쓰는 게 아니다. 그것은 기득권자들이, 그들에게 봉사하는 엉터리 철학자들이 오늘은 참으라며, 당장 오늘 행복을 구하지는 말라며 심어 놓은 거짓된 신화일 뿐이다.친구여, 나 오늘 그대와 함께 우리의 인생을 말해보고 싶네. 그대도 사노라면 그런 날이 있겠지. 그렇다고 무슨 거창한 인생론을 말하자는 건 아니라네. 친구여, 그대는 오래 전 에 노조 활동이 힘들다며 현장으로 돌아갔지. 그렇지만 노동자도 인간답게 살자, 굴욕적 인 삶을 끝장내자며, 그 토대가 될 노동조합 결성을 위해 우리가 가슴과 가슴으로 만났던 시절, 87년 그 뜨거웠던 여름을 잊을 수는 없을 걸세. 우리 모두 사랑하는 가족들과 함께 살 수 있는 밥이 걸린 직장, 그 밥줄이 끊어질 해고를 각오하고 마침내 노조의 깃발을 올 렸을 때 그 자부심, 자존심, 자주성, 진정 아름답지 않았었나, 그 아름다운 정신들이 지 금껏 나를 견디게 해주고 이끌어 준 가장 큰 힘이었지. 그런데 시대가 바뀌었네. 이제는 어느 한 사람이 앞서서 이끌던 시대가 아니야. 세계화·정보화의 흐름은 모든 것을 바꾸어 놓고 있어. 하나의 중심으로 모이던 삶의 형태가 다중심·탈중심의 구조로 바뀌고 있다는 말이네. 그 변화의 물결은 노동조합도 예외로 두지 않아. 나는 지금 신진보 이념에 따르 는 새로운 노동운동이 어떻게 조직 속에서 효과적으로 펼쳐질 수 있는지를 고민하고 있 고, 나름대로 방안도 만들어 놓았네. 우리 노동조합에서는 그 일 까지가 내 몫인 것 같 네. 그 다음은 우리의 젊은 후배들이 뒤를 이을 것이야.



친구여, 흔히들 인생을 마라톤에 비유하지. 누구에게라도 그렇겠지만 나는 일과 인생을 떼어놓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네. 그러니 만감이 교차하네. 우리 노동조합에서 내 몫은 이제 후반부 단계에 이른 듯 싶네, 반환점을 지난 마라톤 선수가 나머지 목적지를 향해 달릴 때의 그 심정이라고 할까? 나에게는 아직 마저 달려야 할 길이 남아 있네. 그런 처 지에서 자네와 인생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이네. 지금껏 내가 달려온 길은 우리 모두가 공존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는 여정이었네. 남은 길을 최선을 다해 달리려는 것도 공존 의 꿈이 있기 때문이네. 그리고 새로운 출발선에서 1미터부터 다시 시작될 그 마라톤도 공존의 꿈을 이루기 위한 길이 될 것이네. 그렇게 달리고 달리다가 어느 순간에 마지막 작별을 고하는 것이 우리의 인생이 아니겠는가. 친구여, 오늘은 이만 줄이겠네. 다음에 만나서는 자네의 인생 이야기를 듣고 싶네. 그때까지 잘 지내시게.1. 사람아, 아! 가면 쓴 사람아

거짓 꿈을 파는 지도자에게 속지 않는 법2. 우리는 공존해야 사는 동물이다



아직도 전쟁을 꿈꾸는가동양의 상생과 서양의 윈-윈권력자들이 존경을 받지 못하는 주된 이유 가운데 하나는 그들이 사람들 앞에 나설 때, 특히 권력을 얻고자 나설 때 가면을 쓰기 때문이다. 그 가면에는 '나는 당신들을 위해 존재한다'고 적혀 있지만, 사람들은 그 말을 믿지 않고, 가면 속에 숨어 있는 얼굴에서 '당신들은 나를 위해 존재한다'는 말을 찾아낸다. 그러니 누가 그들을 존경할 수 있겠는가. 드물기는 하지만 사람들은 존경하는 권력자들을 만나기도 한다. 그 권력자들은 두 부류로 나뉘는데, 존경하는 이유가 달라 구분되는 것이다. 한 부류는 존경받지 못하는 권력자들처럼 '나는 당신들을 위해 존재한다'고 적혀 있는 가면을 쓰고 있기는 하다. 그런데 아무도 그 가면을 벗겨서 숨어 있는 얼굴을 본 적이 없다. 왜냐하면 그 권력자는 한 번도 그 가면을 벗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다른 한 부류는 가면을 쓰고 있지 않다. 그런데 가면 쓰지 않은 그 권력자의 얼굴에는 '나는 당신들을 위해 존재한다'거나 '당신들은 나를 위해 존재한다'는 글 따위는 적혀 있지 않다. 그 권력자는 자신이 사람들을 위해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사람들이 자신을 위해 존재하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자신은 자신을 위해 존재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런데 그 권력자는 '나는 나를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 얼굴에 그 글을 적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너무도 당연한 것이기에 굳이 적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 권력자는 '나는 나를 위해 존재한다'는 것이 '나는 나만을 위해 존재한다'는 것과는 천양지차임을 말하고 싶기도 했지만, 굳이 말로 할 것이 아니라 권력의 행사를 통해 보여 주면 된다고 판단했다.나라를 살리는 묘약, 사회보장제도를 위하여!3. 낯선 세상에서 새로운 길을 찾는다



낯선 세상반대! 반대! 반대! 세계화· 정보화 시대의 살길인가4. 생명, 변하면 살고 머무르면 죽는다

원숭이와 인간지휘관이 병사들에게 외친다. "나를 따르거라!" 병사들은 지휘관을 믿고 그가 가리킨 방향으로 진격한다. 온갖 역경을 이겨내고 마침내 목적지로 여긴 곳에 다다른다. 그런데 한참 동안 주위를 살피던 지휘관이 말한다. "어, 여기가 아니네."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병사들이 땅바닥에 주저앉아 멍하니 지휘관을 쳐다본다. 그런 비극을 연출한 지휘관의 판단착오는 용서받기 어렵다. 실수라 해도 용서받을 수 없는 실수인 것이다. 그런데 실수와는 아주 다른 차원에서 지도자가 따르는 사람들을 속이는 경우가 많고, 그것이 더욱 큰 문제가 되는 게 우리의 현실이다.



"이 길로 가면 인간 해방, 노동자 해방의 세상이 펼쳐질 것이니 옆도 뒤도 돌아보지 말고 갑시다! 자본가는 우리의 적이니 목숨 걸고 싸웁시다! 내가 지금 가리키고 있는 이 길을 의심하지 마시오. 다른 길이 없는가 하고 옆과 뒤를 돌아보는 자들 역시 우리의 해방을 방해하는 노동자의 적이니 물리칩시다. 피눈물 나는 고통도 조금만 참읍시다. 곧 해방의 땅에서 환희의 노래를 부를 날이 올 것이오."

인간 해방의 땅에서 환희의 노래를 부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은가. 그것은 우리의 꿈,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꿈이다. 우리는 그 길로 가야 한다. 그러나 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자신의 노선이 잘못일 수도 있음을 조금도 인정하지 않고 '민주의 탈', '해방의 탈'을 쓴 채 노동자들을 흥분시키는 지도자들이 실상 우리의 꿈을 갉아먹고 있는 것이라면, 이 얼마나 황당하고 참담한 일인가. 그러한 거짓 꿈을 파는 지도자에게 속지 않는 방법은 없을까? 있다. 사람의 본성을 똑바로 알기만 하면 된다. '이 세상 사람은 누구나 자기 이익을 찾는 존재이다. 지도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도 당연히 예외가 아니다.' 이러한 사람의 본성을 알면, 지도자가 어떤 명분을 내세우고 어떤 꿈을 제시하건 일단 그것이 지도자의 자기 이익에 충실한 것임을 알아차릴 수 있다. 지도자의 자기 이익 추구 자체가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하지만 그것은 사람의 본성이다. 지도자의 자기 이익과 그를 따르는 사람의 자기 이익이 조화를 이룬다면 무슨 문제가 있겠는가. 문제는 그 두 이익이 부딪치는 경우인데, 지도자라는 사람들은 보통 자기 이익은 감추고 '민주'니 '해방'이니 하는 그럴듯해 보이는 거창한 명분을 내세운다. 그러니 그를 따르는 사람은 거창한 명분 앞에서 움츠러들어 감히 자기 이익을 떳떳하게 내세우지 못한다. 지도자는 자기 이익을 감추고, 그를 따르는 사람은 자기 이익을 내세우지 못하는 허위의 땅에 무슨 희망이 있겠는가. 가면 쓴 희망, 거짓 꿈만 춤출 뿐이다.세상은 사람에게 낯설다. 낯설 수밖에 없다. 이 세상에 태어날 때 여기가 어딘지 알고 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태어나기 전에 와본 적이 있는 사람 역시 아무도 없다. 전생이 있다는 말도 하지만, 그렇다 해도 그 전생은 현생과 다르니 낯설기는 마찬가지다. 낯선 세상에 살면서 자기가 경험한 것에 차츰차츰 익숙해지는 것, 그것이 인생이 아닐까? 익숙해지는 것을 두고 감히 나쁜 일이라고 할 수는 없다. 익숙해진 어떤 사람에게 사랑을 느끼면, 사랑을 찾아 굳이 낯선 사람을 찾지 않아도 된다. 익숙해진 길에서 꿈과 희망을 키워갈 수 있다면, 꿈과 희망을 찾아 굳이 새로운 길을 찾지 않아도 좋다. 그렇게만 된다면 누가 인생살이의 힘겨움을 토로하며 눈물을 흘리겠는가? 그러나 우리는 익숙해진 것과 이별하지 않고 살 수는 없다. 이별하고 낯선 세상으로 다시 나가야 할 때가 있다. 나가서 새로운 길을 찾아야 할 때가 있는 것이다. 그때 익숙해진 것에만 매달리고 한 걸음도 나아가려 하지 않으면, 익숙해진 것이 먼저 작별을 고한다. 그러면 익숙해진 것도 새로운 길도 다 사라지고, 그 빈자리는 죽음과 같은 고요만이 차지할 뿐이다. 새로운 길에서 익숙해질 것을 찾고, 익숙해지면 다시 새로운 길을 찾아 떠나고, 그 새로운 길에서 다시 익숙해질 것을 찾고, 떠나고, 찾고, 떠나고, 그렇게 끝없이 이어지는 운동성, 그것이 이 낯선 세상에서의 생존법이 아니겠는가.어머니와 아내와 딸7. 오늘 누가 행복한가?

행복은 오늘 저축해 두고 내일 찾아 쓰는 게 아니다머무르지 않는 생명변화를 두려워하는 사람들5. 우리의 성공이 나의 성공이다

행복한 노동자가 되는 길통일을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나6. 우리 부부의 공존



남자가 그렇게 할 일이 없소?친구에게 보내는 편지「인생」세상 사람들은 모두 평화를 원한다고 말하는데, 왜 사람이 만드는 세상에서는 끊임없이 전쟁이 벌어지는 것일까? 지금까지의 역사는 대립의 시각이 주도해 왔다. 평화적인 방법으로 문제를 풀려는 사람들이 공존의 시각을 말하기는 했지만 주도권을 쥐지 못했던 것이다. 서로의 생각에서 다른 것이 있으면 그것을 그대로 인정하고, 그 바탕 위에서 삶의 발전 논리를 함께 마련하자는 것이 바로 공존의 관점이다. 그런데 역사를 핏빛으로 물들이며 주도해 온 것은 상대의 생각을 인정하지 않고 오로지 자기 생각만 옳고, 그러니 투쟁을 통해서라도 기필코 승리를 해야 직성이 풀리는 대립의 관점이었다. 왜 그랬을까? 자기 이념이라는 것은 냉철하게 말하면 자기 이익에 도움이 되는 논리인 것이다. 그러니까 자기 이익을 위해 전쟁을 불사한 것이다. 미국의 이라크 침공은 다시 한번 그런 전쟁의 실상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부시 정권으로 대표되는 미국의 보수 강경파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전쟁을 선택했다. 석유의 확보, 중동에서의 주도권 강화, 미국에 이익이 되는 세계 판도 형성 등 그들의 이익을 위해 전쟁을 벌인 것이다. 그러면서도 가면을 쓴 채 독재자 후세인을 제거하여 이라크 국민의 민주적 삶에 도움을 주려고 전쟁을 선택했다는 등, 악의 축을 제거하려 한 것이라는 등 떠벌린다. 후세인이 독재자라 해도, 미국이 그를 제거하기 위해 전쟁을 벌일 권리가 도대체 어디에 있단 말인가? 가령 미국 내의 인종 차별이 독재자의 통치와 마찬가지로 심각한 인권 침해가 되니 그 문제를 해결해 주겠다며 다른 나라가 미국을 침공해도 좋다는 말인가?



대립의 관점은 알게 모르게 우리의 삶 속에 깊이, 광범위하게 뿌리박혀 있다. 매일 뉴스로 확인되는 우리의 정치 현실도 꼭 그렇다. 어쩌다 말로는 '여야가 힘을 합쳐 국민을 위해 봉사하자' 운운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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