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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존의 꿈

배일도 지음 | 위즈덤아카데미
1. 사람아, 아! 가면 쓴 사람아



거짓 꿈을 파는 지도자에게 속지 않는 법




지휘관이 병사들에게 외친다. "나를 따르거라!" 병사들은 지휘관을 믿고 그가 가리킨 방향으로 진격한다. 온갖 역경을 이겨내고 마침내 목적지로 여긴 곳에 다다른다. 그런데 한참 동안 주위를 살피던 지휘관이 말한다. "어, 여기가 아니네."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병사들이 땅바닥에 주저앉아 멍하니 지휘관을 쳐다본다. 그런 비극을 연출한 지휘관의 판단착오는 용서받기 어렵다. 실수라 해도 용서받을 수 없는 실수인 것이다. 그런데 실수와는 아주 다른 차원에서 지도자가 따르는 사람들을 속이는 경우가 많고, 그것이 더욱 큰 문제가 되는 게 우리의 현실이다.

"이 길로 가면 인간 해방, 노동자 해방의 세상이 펼쳐질 것이니 옆도 뒤도 돌아보지 말고 갑시다! 자본가는 우리의 적이니 목숨 걸고 싸웁시다! 내가 지금 가리키고 있는 이 길을 의심하지 마시오. 다른 길이 없는가 하고 옆과 뒤를 돌아보는 자들 역시 우리의 해방을 방해하는 노동자의 적이니 물리칩시다. 피눈물 나는 고통도 조금만 참읍시다. 곧 해방의 땅에서 환희의 노래를 부를 날이 올 것이오."

인간 해방의 땅에서 환희의 노래를 부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은가. 그것은 우리의 꿈,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꿈이다. 우리는 그 길로 가야 한다. 그러나 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자신의 노선이 잘못일 수도 있음을 조금도 인정하지 않고 '민주의 탈', '해방의 탈'을 쓴 채 노동자들을 흥분시키는 지도자들이 실상 우리의 꿈을 갉아먹고 있는 것이라면, 이 얼마나 황당하고 참담한 일인가. 그러한 거짓 꿈을 파는 지도자에게 속지 않는 방법은 없을까? 있다. 사람의 본성을 똑바로 알기만 하면 된다. '이 세상 사람은 누구나 자기 이익을 찾는 존재이다. 지도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도 당연히 예외가 아니다.' 이러한 사람의 본성을 알면, 지도자가 어떤 명분을 내세우고 어떤 꿈을 제시하건 일단 그것이 지도자의 자기 이익에 충실한 것임을 알아차릴 수 있다. 지도자의 자기 이익 추구 자체가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하지만 그것은 사람의 본성이다. 지도자의 자기 이익과 그를 따르는 사람의 자기 이익이 조화를 이룬다면 무슨 문제가 있겠는가. 문제는 그 두 이익이 부딪치는 경우인데, 지도자라는 사람들은 보통 자기 이익은 감추고 '민주'니 '해방'이니 하는 그럴듯해 보이는 거창한 명분을 내세운다. 그러니 그를 따르는 사람은 거창한 명분 앞에서 움츠러들어 감히 자기 이익을 떳떳하게 내세우지 못한다. 지도자는 자기 이익을 감추고, 그를 따르는 사람은 자기 이익을 내세우지 못하는 허위의 땅에 무슨 희망이 있겠는가. 가면 쓴 희망, 거짓 꿈만 춤출 뿐이다.

오, 권력자!



권력자들이 존경을 받지 못하는 주된 이유 가운데 하나는 그들이 사람들 앞에 나설 때, 특히 권력을 얻고자 나설 때 가면을 쓰기 때문이다. 그 가면에는 '나는 당신들을 위해 존재한다'고 적혀 있지만, 사람들은 그 말을 믿지 않고, 가면 속에 숨어 있는 얼굴에서 '당신들은 나를 위해 존재한다'는 말을 찾아낸다. 그러니 누가 그들을 존경할 수 있겠는가. 드물기는 하지만 사람들은 존경하는 권력자들을 만나기도 한다. 그 권력자들은 두 부류로 나뉘는데, 존경하는 이유가 달라 구분되는 것이다. 한 부류는 존경받지 못하는 권력자들처럼 '나는 당신들을 위해 존재한다'고 적혀 있는 가면을 쓰고 있기는 하다. 그런데 아무도 그 가면을 벗겨서 숨어 있는 얼굴을 본 적이 없다. 왜냐하면 그 권력자는 한 번도 그 가면을 벗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다른 한 부류는 가면을 쓰고 있지 않다. 그런데 가면 쓰지 않은 그 권력자의 얼굴에는 '나는 당신들을 위해 존재한다'거나 '당신들은 나를 위해 존재한다'는 글 따위는 적혀 있지 않다. 그 권력자는 자신이 사람들을 위해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사람들이 자신을 위해 존재하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자신은 자신을 위해 존재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런데 그 권력자는 '나는 나를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 얼굴에 그 글을 적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너무도 당연한 것이기에 굳이 적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 권력자는 '나는 나를 위해 존재한다'는 것이 '나는 나만을 위해 존재한다'는 것과는 천양지차임을 말하고 싶기도 했지만, 굳이 말로 할 것이 아니라 권력의 행사를 통해 보여 주면 된다고 판단했다.

2. 우리는 공존해야 사는 동물이다



아직도 전쟁을 꿈꾸는가




세상 사람들은 모두 평화를 원한다고 말하는데, 왜 사람이 만드는 세상에서는 끊임없이 전쟁이 벌어지는 것일까? 지금까지의 역사는 대립의 시각이 주도해 왔다. 평화적인 방법으로 문제를 풀려는 사람들이 공존의 시각을 말하기는 했지만 주도권을 쥐지 못했던 것이다. 서로의 생각에서 다른 것이 있으면 그것을 그대로 인정하고, 그 바탕 위에서 삶의 발전 논리를 함께 마련하자는 것이 바로 공존의 관점이다. 그런데 역사를 핏빛으로 물들이며 주도해 온 것은 상대의 생각을 인정하지 않고 오로지 자기 생각만 옳고, 그러니 투쟁을 통해서라도 기필코 승리를 해야 직성이 풀리는 대립의 관점이었다. 왜 그랬을까? 자기 이념이라는 것은 냉철하게 말하면 자기 이익에 도움이 되는 논리인 것이다. 그러니까 자기 이익을 위해 전쟁을 불사한 것이다. 미국의 이라크 침공은 다시 한번 그런 전쟁의 실상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부시 정권으로 대표되는 미국의 보수 강경파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전쟁을 선택했다. 석유의 확보, 중동에서의 주도권 강화, 미국에 이익이 되는 세계 판도 형성 등 그들의 이익을 위해 전쟁을 벌인 것이다. 그러면서도 가면을 쓴 채 독재자 후세인을 제거하여 이라크 국민의 민주적 삶에 도움을 주려고 전쟁을 선택했다는 등, 악의 축을 제거하려 한 것이라는 등 떠벌린다. 후세인이 독재자라 해도, 미국이 그를 제거하기 위해 전쟁을 벌일 권리가 도대체 어디에 있단 말인가? 가령 미국 내의 인종 차별이 독재자의 통치와 마찬가지로 심각한 인권 침해가 되니 그 문제를 해결해 주겠다며 다른 나라가 미국을 침공해도 좋다는 말인가?

대립의 관점은 알게 모르게 우리의 삶 속에 깊이, 광범위하게 뿌리박혀 있다. 매일 뉴스로 확인되는 우리의 정치 현실도 꼭 그렇다. 어쩌다 말로는 '여야가 힘을 합쳐 국민을 위해 봉사하자' 운운하지만 여당과 야당은 공존의 관점을 갖지 못한 채 대립의 관점으로 권력 투쟁에 몰두한다. 국민들이 아무리 그런 전쟁을 역겨워해도 아랑곳하지 않고, 상대를 죽여야 내가 산다는 식으로 서로 눈을 부라리며 정치가들의, 정치가들에 의한, 정치가들을 위한 권력 투쟁 정치에 몰두하고 있는 것이다. 경제의 기둥이라 할 수 있는 노사 관계에서도 대립의 관점이 공존의 관점을 억누르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서로의 관계를 어떻게 정립해야 하는지를 몰랐던 과거 산업 사회에서 어쩔 수 없이 전쟁을 치러야 했다는 점은 인정된다. 또한 지배와 착취와 억압의 속성을 드러내는 자본가가 있었으니, 노동자가 그 야만성에 저항하는 것은 자기 생존을 위해 당연하고 정당한 일일 수 있었다. 그러나 정보화·세계화 사회에서는 그런 산업 사회의 관점이 생존 논리로 더는 통용될 수 없다.

단적인 하나의 예를 보자. 노동자가 파업 투쟁을 비롯한 대립적 관점을 견지하면, 그래서 기업을 운영하기가 어렵다고 판단되면 자본가는 과감하게 공장을 해외로 옮겨 버리는 자구책을 취한다. 자본가는 이 세상 어디라도 자기가 살길이 보이면 그리로 간다. 그러니 지금은 비록 몰락한 신세지만 성장을 주도하던 시절에 어느 재벌은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고 하지 않았던가. 살기 위해서 그보다 더한 일도 한다. 그것이 자본이다. 우리는 변화한 사회의 생존 논리를 냉철하게 찾아야 한다. 굳이 정보화·세계화 사회의 논리를 내세우지 않는다 하더라도, 대립의 관점에서 전쟁을 통해 문제를 풀려 하면 결국 양쪽 모두 패망한다는 것은 역사가 주는 교훈이다. 칼은 칼로 망하는 것이다. 인간 사회의 현실이 그러함에도 아직도 전쟁을 통해 문제를 풀려 하는, 전쟁을 꿈꾸는 자들은 도대체 누구인가?

동양의 상생과 서양의 윈-윈



요즘 윈-윈(win-win)하자는 소리를 여기저기서 자주 들을 수 있다. 함께 승리하자는 뜻인데, 한쪽이 승리하면 다른 한쪽이 패배하는 대립 구조로는 갈등과 비생산적인 극한 투쟁만 부추길 뿐, 더는 성공과 발전을 기대할 수 없음을 깨닫고 고안해 낸 성공 방식이다. 기본적으로 보면 그런 자세를 취하는 뜻은 옳고 또 그래야 우리는 살 수 있다. 그런데 그 윈-윈의 성공 전략이란 것을 한번 따져 볼 필요가 있다. 윈-윈이란 무엇인가? 나와 너, 그 둘이 있을 때 나도 승리하고 너도 승리한다는 뜻이 아닌가. 사람들은 실제로 그 뜻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일까? 승리는 승부를 전제로 한다. 그러니까 '나와 너'의 공존을 내세우지만 그것은 여전히 '승부'라는 대립 구조를 유지하는 상태에서, 다시 말해 '나'와 '너'가 대립한다는 전제 조건 아래에서 택하는 성공 전략으로 볼 수 있다. 앞으로도 계속 대립해서 승부를 겨루기는 하되, 서로 승리하는 길을 찾자는 뜻이 된다.

이와는 달리 우리의 사상, 동양의 철학은 쪼개서 분리하고 대립하는 관계가 아니라 서로 어울리는 관계 속에서 삶의 원리와 생존 방법을 찾아 왔다. 오행설에 기초한 상극과 상생의 관점을 봐도 그 차이를 알 수 있다. 하나가 다른 하나를 이기면서 존재하는 상극의 방식이 있다. 금(金)은 목(木)을 이기고, 목(木)은 토(土)를 이기고, 토(土)는 수(水)를 이기고, 수(水)는 화(火)를 이기고, 화(火)는 금(金)을 이기면서 존재하는 것이다. 이와는 달리 하나가 다른 하나를 낳으면서 존재하는 상생의 방식이 있다. 금(金)은 수(水)를 낳고 수(水)는 목(木)을 낳고 목(木)은 화(火)를 낳고 화(火)는 토(土)를 낳고 토(土)는 금(金)을 낳으면서 존재하는 것이다. 상극의 관계를 극복하고 상생의 관계를 맺자는 지혜, 거기에서는 대립 구조를 찾아볼 수 없다. '나'가 '너'를 낳고 '너'가 '나'를 낳는 공존 구조인 것이다. '나'와 '너'가 서로를 낳아 살리는 것과 '나'와 '너'가 함께 승리하자는 것은 그 기본 철학이 다르다.

상생의 생존 원리는 상대방의 패배나 그 어떤 희생을 전제로 하지 않는다. 노동자가 자본가를 살리고, 자본가가 노동자를 살리는 방식을 취한다. 노동자와 자본가의 관계에서만 그런 게 아니다. 노동자와 노동자, 자본가와 자본가의 관계 또한 상생의 생존 원리로 맺어져야 한다. 상생을 해야 살 수 있는 공동 운명체에서 내 몫만 지나치게 챙기려 하면 그것이 오히려 자기 이익을 갉아먹는 결과를 초래하기 쉽다. 설사 일시적으로 자기 몫을 좀더 챙겼다 해도 그것이 공동체를 붕괴시키는 쪽으로 가면 장기적으로 봐서 결국은 자기 몫을 잃게 된다. 상생을 위해서는 자본가들도 노동자 못지않게 변해야 한다. 가장 먼저 취해야 할 태도는 역시 대립주의를 버려야 한다는 점이다. 일부 사람들은 이렇게 묻는다. 상생, 그거 말은 좋지만 공염불이 아닌가? 그렇게 해서 노동자의, 혹은 자본가의 이익을 어떻게 보장할 수 있단 말인가? 그렇게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대립주의의 문제점을 인정하면서도, 그 낡은 사고 방식에서 벗어나기가 두려워 한 걸음도 더 나아가지 못하는 이들이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며 진실로 공존을 바란다면 변화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서양의 논리를 뛰어넘는 우리의 사상이 이미 대안으로 마련되어 있는데 왜 주저하는가?

나라를 살리는 묘약, 사회보장제도를 위하여!



대통령이 시급히 국민투표에 부쳐야 할 것은 '재신임'이 아니라 '사회보장제도'이다. 복지 시늉만 내는 형식적인 것이 아니라 국민의 기본적인 생활을 말 그대로 보장하는 실질적인 사회보장제도를 말한다. 중요한 만큼 시급한 시행이 필요한데, 국민투표라는 방법을 통하지 않고는 그 제도의 뜻을 제대로 살리는 안을 만들고 효과적으로 추진해 시행하기가 어렵다. 우리나라의 현재 실정이 그렇다는 것이다. 대통령이 사회보장제도에 대한 확고한 철학이 있고 실행 의지가 있다면, 그렇지 않다 해도 국민들이 대통령에게 강력하게 요구하면, 상층부에 있는 이해 당사자들의 눈치를 보지말고 실질적인 안을 만들어 국민들에게 직접 묻는 방식이 가장 효과적일 수 있는 것이다. 그러한 혁명적인 사고가 없으면 사회보장제도는 늘 남의 나라 이야기로만 남을 것이다. 사람들은 모두 자기 이익을 추구하기에, 현실적으로 시장의 원리에 따라 그 이익들을 조정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사회를 시장 원리에만 맡겨 두면 환경 파괴, 안전과 생명의 위협 등의 문제점이 발생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한 문제점은 시장 자체에서 해결할 수 없고, 국가 공동체가 나서야 한다. 이때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이 바로 사회보장제도의 시행인 것이다. 시장 원리와 사회보장제도의 행복한 결합, 나는 그것을 '민주적 시장주의'라 부르고, 그것이 우리 공동체를 살리는 길이라고 믿고 있다. 동물도 자기 새끼가 생존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고 새끼와 이별을 고한다. 인간이 사회보장제도를 마련하지 못한다면 그 사회는 동물보다 못한 시스템을 갖고 있다고 할 수밖에 없다. 사회보장제도, 그것이 인간 사회의 모든 문제를 푸는 만병통치약이 될 수는 없다. 그러나 나라를 살리는 데, 인간을 살리는 데 썩 잘 듣는 묘약은 될 수 있다.

3. 낯선 세상에서 새로운 길을 찾는다



낯선 세상




세상은 사람에게 낯설다. 낯설 수밖에 없다. 이 세상에 태어날 때 여기가 어딘지 알고 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태어나기 전에 와본 적이 있는 사람 역시 아무도 없다. 전생이 있다는 말도 하지만, 그렇다 해도 그 전생은 현생과 다르니 낯설기는 마찬가지다. 낯선 세상에 살면서 자기가 경험한 것에 차츰차츰 익숙해지는 것, 그것이 인생이 아닐까? 익숙해지는 것을 두고 감히 나쁜 일이라고 할 수는 없다. 익숙해진 어떤 사람에게 사랑을 느끼면, 사랑을 찾아 굳이 낯선 사람을 찾지 않아도 된다. 익숙해진 길에서 꿈과 희망을 키워갈 수 있다면, 꿈과 희망을 찾아 굳이 새로운 길을 찾지 않아도 좋다. 그렇게만 된다면 누가 인생살이의 힘겨움을 토로하며 눈물을 흘리겠는가? 그러나 우리는 익숙해진 것과 이별하지 않고 살 수는 없다. 이별하고 낯선 세상으로 다시 나가야 할 때가 있다. 나가서 새로운 길을 찾아야 할 때가 있는 것이다. 그때 익숙해진 것에만 매달리고 한 걸음도 나아가려 하지 않으면, 익숙해진 것이 먼저 작별을 고한다. 그러면 익숙해진 것도 새로운 길도 다 사라지고, 그 빈자리는 죽음과 같은 고요만이 차지할 뿐이다. 새로운 길에서 익숙해질 것을 찾고, 익숙해지면 다시 새로운 길을 찾아 떠나고, 그 새로운 길에서 다시 익숙해질 것을 찾고, 떠나고, 찾고, 떠나고, 그렇게 끝없이 이어지는 운동성, 그것이 이 낯선 세상에서의 생존법이 아니겠는가.

반대! 반대! 반대! 세계화· 정보화 시대의 살길인가



"반대! 결사 반대!" 반대를 외치는 목소리가 곳곳에서 터져 나오는 것이 작금의 현실이다. 농민들은 외국 농산물 수입 개방을 반대한다. 노동자는 외국 자본을 유치할 경제특구 건설을 반대한다. 교육자는 외국 교육 시스템을 수입할 교육 개방을 반대한다. 모두 나름대로의 정당한 이유가 있고, 또 개방으로 인해 생기는 문제점을 지적하는 것에는 옳은 면이 있기도 하다. 그러나, 그러나 묻지 않을 수 없다. 언제까지 반대할 것인가? 개방이 되어도 생존할 수 있는 자생력이 생길 때까지? 흔히들 그렇게 말하는데, 만약 개방하지 않고는 실질적인 자생력도 생기지 않는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개방을 막는 것이 진정 자생력을 키우는 방법이 된다고 믿고 있는 것인가? 혹시 자생력보다는 보호막이 더 필요한 것이 아닌가? 이러한 의문은 개방으로 인해 당장 고통받고 있는 이들에게 가혹할 수 있다. 그러나 다시 냉정하게 묻지 않을 수 없다. 과연 그 고통이 개방으로 인해 생기는 것인가. 아니면 국가의 정책 실패로 생기는 것인가? 농산물 수입 개방 문제가 불거져 나오기 전에는 과연 농민이 잘살았던가? 잘살다가 어느 날 수입이 개방되니 갑자기 못살게 된 것인가? 아니다. 그 이전에도 농촌은 신음했다. 젊은 일꾼들은 대부분 도시로 떠났다. 수입 개방 때문이 아니라 정부의 농업 정책이 실패한 탓이다. 그런 시각에 대해 농민은 이렇게 주장할 것이다. 물론 정부의 정책 실패로 농민이 어렵게 되었다. 그런데 수입 개방이 그 어려움을 더욱 가중시킨다. 그러니 농산물 수입 개방은 어떻게 해서든 막아야 한다. 틀린 말만은 아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리 간단치가 않다. 살기 힘든 농촌을 떠나 도시에 살고 있는 농민의 자식들은 세계화의 흐름 속에서 수출과 수입을 자유롭게 해야 살 수 있는 생존 구조 속에 놓여 있다. 자동차를 수출해야 먹고사는 자동차 회사의 어느 노동자들은 농민의 자식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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