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를 매혹시킨 반항아 말론 브랜도
페트리샤 보스워스 지음 | 푸른숲
거칠고 오만한 반항아어린 시절 버드(Bud, 새싹)란 애칭으로 불린 말론 브랜도는 1924년 4월 3일 미국 중서부 네브래스카주 동부 미주리 강변에 있는 도시 오마하에서 태어났다. 브랜도의 어머니 도로시 펜베이커는 아일랜드 핏줄을 이어 받은 금발 미인이었는데, 인습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여성이었다. 아버지 말론 브랜도는 웨스턴 라임스톤 사의 상품을 파는 외판원이었다. 그는 프랑스 알자스 지방 출신의 아버지 유진 브랜도에게서 격렬한 기질과 군인풍의 규율을 이어받았다. 브랜도는 두 사람 사이에서 외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브랜도는 결혼하기 직전 자신의 이름을 브랜도(Brandeaux)에서 브랜도(Brando)로 바꾸었다. 브랜도는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두 명의 누나 조슬린, 프랜시스와 함께 오마하의 편안한 목조가옥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도디는 괴짜나 방랑꾼들, 또 폰다 가족이나 여배우 도로시 맥과이어의 부모 같은 지역 극단의 친구들을 집에 들이기 시작했다. 집안의 분위기는 느슨하고 자유분방했다. 그녀는 집안 일을 지겨워했고 별 희망도 없이 무대 생활을 동경했다. 브랜도가 태어나기 직전에 도디는 막 결성된 오마하 지역 극단의 멤버가 됐다. 또 오디션 자리에 앉아 젊은 헨리 폰다에게 첫 직장을 안겨주기도 했다. 1930년, 아버지는 일리노이주에 있는 칼슘 카보니트 사의 총지배인이 됐다. 더 나은 직업을 얻자 가족은 에번스턴으로 이사했다. 어머니 도디는 이사하는 데 동의하기는 했지만, 성공의 정상에서 극단을 떠나야 했기 때문에 몹시 화를 냈다. 도디는 술이 점점 늘었다.
브랜도는 위선적인 아버지의 모습에 강한 혐오감을 내보였다. 비록 자식들을 '성경 말씀'에 따라 키우고 있었지만, 그는 무지막지한 바람둥이였고, 가족을 억지로 오마하에서 일리노이로 데려옴으로써 도디의 무대 경력을 박탈해버리고 아내의 인생을 파괴해버렸으며, 그러고도 아내의 크나큰 절망에는 눈곱만큼도 동정심을 보이지 않았다. 청소년기 내내 브랜도를 몰아댄 것은 아버지를 향한 격렬한 분노와 복수의 환상이었다. 그때로부터 수십 년이 지난 1980년대에야 브랜도는 정신치료사의 도움을 받아 그의 가족이 당시 심리학적 폭력의 인큐베이터에 놓여 있었다는 걸 깨달았고, 그 폭력이 닫힌 문 안쪽에서 일어난 사적인 가족 문제였기 때문에 사회가 나서서 중지하거나 통제할 방법이 없었다는 것을 알게 됐다. 당시 브랜도는 꽤 살이 찐 편이었는데, 아버지는 몸매를 다듬어 균형을 잡으라고 충고를 했다. 하지만 브랜도는 아버지의 충고는 아랑곳하지 않고 드럼 치기를 계속했고, 마침내 '술통 브랜도와 그의 술통들(Keg Brando and His Kegliners)'이라는 밴드를 만들었다. 그러나 성적이 점점 더 나빠지는 것이 문제였다. 학교에서 그는 스포츠와 연극, 특히 팬터마임에서만 두각을 나타냈다. 나머지 과목에서는 전부 낙제점을 받았고, 결국 1년 유급을 당했다. 1941년 5월 브랜도는 끝도 없는 말썽으로 마침내 리버티빌 고등학교에서 쫓겨났다. 아버지는 미친 듯이 화가 나 펄쩍펄쩍 뛸 지경이었다. 심사 숙고한 끝에 그는 브랜도를 미네소타 주 페어볼트에 있는 섀턱 육군사관학교로 내쫓듯 보내버렸다.
이 사관학교는 아버지의 모교였고, 학창 시절 그는 우등생이었다. 하지만 브랜도에게까지 똑같은 상황이 벌어진 건 아니었다. 브랜도는 자신이 선생들 가운데 오직 한 사람 듀크 와그너에게서만 격려를 받았다고 말했다. 그는 브랜도에게 셰익스피어와 언어의 영광을 알게 해주었고, 브랜도가 모방하는 데 천재적 재능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보았다. 브랜도는 소년들의 열광적인 지지와 찬사를 받으며 이들 위에 군림하는 어릿광대이자 반항아였다. 1943년 5월 브랜도는 기동 실습 중 장교에게 말대꾸했다는 이유로 섀턱 사관학교의 연금관찰 대상이 됐다. 말대꾸가 일종의 반항 행위로 간주되어 교정 밖으로 나갈 수 없다는 처분을 받은 것이다. 하지만 두 시간도 지나지 않아 그는 지루함을 못 견디고 페어볼트 중심가로 뛰쳐나갔다. 그가 학교를 빠져나갔다는 사실이 들통났고, 그의 운명을 결정하기 위한 교직원 전체회의가 열렸다. 결과는 퇴학이었다. 브랜도는 그 결정이 충격이었다고 회상했다. 연기를 지도해주던 와그너 선생은 모든 일이 잘될 것이며 언젠가는 틀림없이 세상 사람들이 브랜도의 이름을 듣게 될 것이라고 격려해주었다. 브랜도는 와그너 선생이 해준 그 말을 죽을 때까지 결코 잊을 수 없을 것이라고 이야기하곤 했다. 그는 결국 고등학교 졸업장을 받지 못했다. 그는 항상 자신의 가방 끈이 짧은 것을 창피스럽게 여겼다. 당시 누나 프랜시스는 화가가 되려고 뉴욕에 가 있었고, 조슬린은 브로드웨이 연극 무대에 얼굴을 내밀 정도가 돼 있었다. 브랜도는 연극에 도전해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버지는 아들의 말에 코웃음을 쳤다. 브랜도는 더욱더 남들보다 탁월하게 '뭔가'를 해냄으로써 자기 자신을 증명할 수 있기를 원하게 됐다.
뉴욕을 매혹시킨 연기의 천재1943년 봄이 다 갈 무렵 브랜도는 빛이 바랜 인도산 면옷을 차려 입고 붉은 중절모로 치장을 하고서 뉴욕에 도착했다. 히틀러 치하의 독일을 피해 건너온 망명자, 화가, 음악가, 시인 등등 수많은 사람들이 명성과 부를 꿈꾸며 뉴욕으로 꾸역꾸역 밀려들고 있었다. 브랜도는 휴가를 즐기려고 나온 현역 군인들과 계속 부딪혔다. 그는 섀턱 사관학교 시절 축구 시합을 하다 무릎이 부서진 적이 있는 데다 눈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병역 면제자였다. 하지만 이런 결함이 그를 괴롭히거나 장애가 되지는 않았다. 그는 전쟁터에 나가는 데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다만 아버지를 실망시켰을 뿐이다. 브랜도는 돈이 떨어지면 곧바로 베스트 백화점에서 엘리베이터 작동 일을 하거나, 즉석요리를 만드는 요리사 일을 하기도 했고, 공장 야간 경비원 노릇도 했다. 일이 끝나 집에 돌아오면 브랜도는 지하철 주위에서 관찰했던 사람들, 이를테면 껌을 씹으며 스타킹 매무시를 바로잡는 여비서라든가 카네기 홀 밖에서 푼돈을 구걸하는, 다리가 하나뿐인 걸인의 표정과 동작을 그대로 흉내냄으로써 누나들을 한껏 즐겁게 해주었다. 아버지는 브랜도에게 수업료를 보내주겠다고는 했지만, 브랜도가 공부를 더 해서 뭔가 될 것으로 기대하지도 않는다고 덧붙였다. 그런 말을 듣고 브랜도는 아버지가 틀렸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려고 더 열심히 노력했다.
브랜도는 '사회 연구를 위한 뉴스쿨(New School for Social Research)'의 드라마 워크숍에 등록했다. 브랜도는 연기 교습의 대가 스텔라 애들러가 가르치는 과목은 아주 좋아했다. 애들러는 미국 유대인 극단에서 활약했던 오만하고 화려한 배우 출신이었고, 위대한 유대인 배우 제이콥 애들러의 딸이었다. 몇 주가 지나지 않아 애들러는 브랜도를 '비범한' 사람이라고 불렀다. 아마도 그녀가 내준 첫 번째 동물 흉내내기 숙제를 아무런 어려움 없이 해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애들러는 학생들에게 닭장 위에서 폭탄이 막 터지려는 순간이라고 이야기해주고는 암탉 흉내를 내보라고 지시했다. 다른 학생들은 모두 꼬꼬댁 소리를 내고 팔을 날개처럼 퍼덕거리며 미친 듯이 방안을 뛰어다녔지만, 브랜도만은 방구석에 조용히 앉아 알을 품는 시늉을 했다. "바로 저거야. 그런 상황에서 닭은 저렇게 한단 말이야!" 두 사람이 만났을 때 브랜도는 19살이었다. 40년 넘게 브랜도의 절친한 친구이자 분장사인 필립 로즈는 이렇게 말한다. "스텔라는 말론에게 아버지를 향한 분노에 초점을 맞추는 방법을 가르쳐주었고, 그가 창조적으로 그 분노에 물꼬를 트도록 도와주었다." 그 해 12월이 되자 브랜도는 드라마틱 워크숍에서 연극 무대에 오르기 시작했다. 첫 번째 출연작은 조지 버나드 쇼의 <성녀 잔(Saint Joan)>이었다.
그 즈음 알코올중독자치료협회(AA)에 가입한 아버지는 어머니에게도 같이 가입하기를 권했지만, 도디는 술병을 놓을 수가 없었다. 애들이랑 같이 살아야겠다는 말을 남기고 남편을 떠나 1944년 4월 뉴욕에 도착한 도디는 웨스트엔드 가의 아파트를 임대했다. 조슬린이 갓 태어난 아이와 남편을 데리고 아파트로 이사를 왔다. 조슬린의 남편 돈 핸머는 배우였는데, 군 입대 후 휴가 중이었다. 브랜도는 존밴 드루텐의 브로드웨이 연극 <엄마 생각(I Remember Mama)>에 출연하기로 계약하고 넬스 역을 맡았다. <엄마 생각>은 대성공이었고, 브랜도는 흥행이 이어지는 동안 이 작품에 계속 출연했다. 도디는 아들에게 시카고로 돌아가 AA 모임에 가입하고 아버지와도 화해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그는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돌아가는 것을 원치 않았다. 어머니가 떠나자마자 브랜도는 말을 더듬기 시작했다. 식욕을 잃어버렸고 느닷없이 공포감에 휩싸이기도 했지만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그는 자서전에서 당시에 '일종의 신경쇠약'에 걸려 있었다고 쓰면서, 결국 그 상태를 극복하긴 했지만 "그 후로 결코 완전한 상태를 회복했다고 느끼지는 못했다. 스텔라 애들러의 가족은 어머니가 떠난 뒤 나를 사실상 양자로 받아들였는데, 그러지 않았더라면 나는 정신을 차릴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라고 고백했다. 애들러는 브랜도가 자신의 재능이나 연극을 '아무러면 어때' 하는 식으로 대하는 것을 바꿔보려고 갖은 노력을 다했다. 그녀는 브랜도에게 오직 예술가만이 지정한 혁명가이며 예술가만이 세계를 바꿀 수 있다고 설득하고 또 설득했다.
새로운 시대의 스타 탄생브랜도는 1947년 9월 "아버지께"로 시작하는 편지를 썼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Streetcar Named Desire)> 리허설을 시작합니다." 그는 이 연극의 비극적이고 시적이며 장대한 분위기에 관해서는 자세히 쓰지 않았다. 이 작품은 테네시 윌리엄스의 신작이었는데, 그는 이전 작품 <유리 동물원(A Glass Menagerie)>으로 뉴욕연극비평가협회상을 받았다. 브랜도는 또 그 편지에서 주인공 스탠리 코왈스키 역을 따냈다는 사실도 알리지 않았다. 연출가인 카잔은 그의 불안정한 침묵에 주목하고는 그가 아마도 몹시 불안한 영혼일거라고 결론지었다. 연출가로서 카잔의 천재적 재능 가운데 하나는 극중 인물과 배우의 정서적 핵심을 항상 일치시켰다는 점이다. 카잔은 브랜도 안에서 스탠리의 특성, 그러니까 성적 매력, 내면에 웅크리고 있는 자기 함몰, 어린애 같은 성격을 보았다. 브랜도는 야수처럼 거칠면서 동시에 어린아이였다. 또 이상하고 낯선 기질과 기괴한 유머 감각을 지니고 있었다. 카잔은 이걸 끄집어내고 싶어했다. 브랜도의 집중력을 높이기 위해 카잔은 그에게 인물의 성격과 느낌을 전달할 수 있는 소도구를 이용해 연기하는 방법을 가르쳐주었다. 그 소도구란 이를테면, 스탠리가 게걸스럽게 들이키는 찬 맥주나 여성의 젖꼭지 대신 빨아들이는 시가 같은 어떤 상징물이었다. 아주 천천히 자신감을 얻어가면서 브랜도는 스탠리에게 필요하다고 느끼는 거들먹거리는 폼, 그러니까 어떤 반항적인 분위기를 개발하기 시작했다. 의상 디자이너 루신다는 도시의 길바닥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도랑을 파는 인부들처럼 옷을 해 입혀야겠다고 결정했다. 결국 브랜도의 그 의상은 미국 남성성의 새로운 상징, 그 시대 최대의 패션 심벌의 하나가 됐다. 루신다는 티셔츠 두 벌을 빨간색으로 물들인 뒤 옷이 오그라들 때까지 빨고 또 빨았다. 그러고 나서 티셔츠 오른쪽 어깨 부위를 찢어놓았다. 또 청바지 밑을 잘라내 발목으로 내려갈수록 폭이 좁아지게 했다. 그렇게 해서 제2의 피부처럼 브랜도의 몸에 꽉 끼는 바지가 탄생했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는 드디어 1947년 12월 3일 브로드웨이 배리모어 극장 무대에 올랐다. 뉴욕과 할리우드에서 온 저명인사들이 극장을 꽉 메우고 스탠리 역을 맡은 브랜도가 제시카 탠디의 쇠락한 남부 미인 블랑슈 뒤부아를 한발 한발 함정에 빠뜨린 뒤 그녀의 색정증, 그녀의 알코올 중독, 그녀의 애수에 찬 꿈들과 마주보도록 압박해가는 과정을 지켜보았다. 극장을 메운 관객은 그들이 새로운 문화적 시대의 여명을, 성적 터부의 붕괴를 목격하고 있음을 느꼈다. 욕망의 충돌이자 야수성과 감수성의 충돌이라는 이 작품의 핵심 갈등은 모든 사람들 내부에 있는 영원한 모순을 극화한 것이었다. 막이 내려오자 모든 관객이 자리에서 일어나 30분 동안이나 쉬지 않고 박수갈채를 보냈다. 브랜도의 연기는 지금까지의 연기 기술에 혁명을 가져왔다. <전차>와 함께 그는 무언가 불편하고 위험한 것을 전달했다. 할리우드의 출연 제의가 쏟아져 들어왔다.
브랜도는 여전히 연기자가 자신이 정말로 원하는 것인지 확신하지 못했다. 이듬해에 성공과 명성은 브랜도에게 수많은 문제들을 안겨주기 시작했다. 발작적인 불안 증세가 심해졌다. 한 번은 분노가 치밀 때 누군가를 죽이거나 해칠 것 같아 무섭다고 고백했다. 카잔은 브랜도에게 자기가 정신분석을 받는 벨라 미텔먼을 만나보라고 권했는데, 그의 전공은 심신질환이었다. 그 뒤로 브랜도는 뉴욕에 살던 11년 동안 일주일에 5일씩 독실한 자세로 미텔먼을 방문했다. 브랜도의 연기는 진폭이 아주 컸다. 어떤 때는 관객을 감전시키는 것 같았고, 어떤 때는 극이 끝날 때까지 걸어다니기만 하는 것 같았다. 브랜도는 자기 자신을 돌볼 줄 모르는 것 같았다. 브랜도는 변함없이 누이들과 가깝게 지냈다. 1948년까지 조슬린은 헨리 폰다가 주연하는 브로드웨이 히트작 <미스터 로버츠>에서 유일한 여성으로서 최고의 성공을 구가하고 있었다. 브랜도는 그런 사실에 더할 수 없이 기뻐했다.
할리우드 입성1949년 말 브랜도는 첫 영화 <남자들(The Men)>출연 계약을 했다. 제작은 스탠리 크레이머, 감독은 프레드 치네만, 각본은 칼 포먼이었다. 치밀한 조사에 바탕을 둔 이 영화는 전쟁이 끝날 무렵 독일군 저격병의 총에 맞아 척추가 부서진 켄 윌로 섹이라는 병사의 이야기에서 영감을 얻었다. 윌로섹은 허리 아래가 마비되었음에도 남자답게 살기 위해 투쟁한다. 이 병사의 마비 상태는 블랙리스트와 순응적 태도가 판을 치던 억압적인 1950년대에 미국에 만연한 무력감의 상징으로 볼 수도 있다. 브랜도는 캘리포니아에 도착하여 가족으로부터 잇달아 나쁜 소식을 접한 뒤였다. 누나 조슬린은 남편인 돈과 헤어지기로 했다. 아버지는 큰 투자를 한 소 사육 사업에서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브랜도는 영화를 찍기 전에 할리우드에 대한 무례한 논평으로 기자들에게 충격을 주기 시작했다. 그는 할리우드가 공포와 돈에 대한 사랑이 지배하는 변경 도시라고 말했다. 홍보 담당자들은 곧 브랜도가 당분간 언론과 접촉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결정을 내렸다.
브랜도는 인물 연구에 몰두하고 싶었다. 그는 밴나이스의 버밍햄 참전용사 병원의 절단 수술자 병동에 들어가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켄과 비슷한 배경을 가진, 몸이 마비된 참전용사로 입원하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브랜도가 병원에서 3주를 보내자 참전용사들은 그를 허물없이 대했으며, 이들 가운데 일부는 <남자들>에 출연하기도 했다. 치네만의 혹독하면서도 전문적인 연출 솜씨에 따라 <남자들>을 찍으면서 브랜도는 영화 연기 방법을 완전히 익혔을 뿐 아니라,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면서 여자와 결혼을 해야 하는 남자의 가슴 아픈 초상을 멋지게 그려낼 수 있었다. 이 영화의 가장 중요한 점은 브랜도의 결혼 영화 데뷔작이라는 것이다. <남자들>로 할리우드에서 스타가 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평단은 최고의 찬사를 보냈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불과 두 주 만에 개봉한 것이 이 영화로서는 불행이었다. 아무도 하반신 불수 환자들에 대한 영화를 보러 가고 싶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몇 달 뒤 브랜도는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의 영화판을 찍기 시작했다. 무대 위에서 그만한 연기를 찾아볼 수 없었듯이, 스크린에서도 그만한 연기는 찾아볼 수 없었다. 브랜도는 <남자들>에 출연해 번 돈으로 부모에게 리버티빌 근처 먼들린이라는 작은 도시에 있는 큼지막한 농장을 사주었다. 어머니 도디는 이곳을 좋아했다. 도디는 아들이 동물을 깊이 사랑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새끼 너구리를 선물로 주었다. 브랜도와 오랜 친구 윌리 콕스는 어린 시절 친구의 이름을 따 러셀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러셀은 브랜도가 어디를 가나 따라다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