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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를 매혹시킨 반항아 말론 브랜도

페트리샤 보스워스 지음 | 푸른숲
브랜도는 멀홀랜드 드라이브의 집을 사서는 요새로 만들어버렸다. 브랜도는 그 집에 머물면서 <애꾸눈 잭(The-Eyed Jacks)>시나리오의 여러 판본을 놓고 작업을 했다. 결국 매우 개인적인 시나리오가 나왔다. 가장 좋게 보자면 이 시나리오는 브랜도가 좋아하는 두 가지 주제, 즉 인간 본성의 모호함, 충성과 복수의 무시무시한 대가에 대한 특별한 명상이었다. 이 영화에는 브랜도가 아버지와의 애증 관계에서 영감을 얻은 것처럼 보이는 자전적 언급들이 도처에 흩어져 있다. 이 시나리오의 저변에 깔린 의미 가운데 아주 음산하면서도 매혹적인 것은 리오의 분노에 대한 생각이다. <애꾸눈 잭>의 제작이 반쯤 진행되었을 때 애너 카시피가 집을 나갔다. 브랜도의 엽색 행각에 질렸던 것이다. 그들은 이혼을 했으며 크리스천은 카시피가 맡아 기르기로 했다. 브랜도는 3만 킬로미터 이상의 필름을 소비하여 <애꾸눈 잭>을 완성했다. 그러나 그는 패러마운트에 이 영화를 떠넘겼다. 그는 자신과 할리우드 모두에게서 쓰디쓴 실망감을 맛보게 되었다. 1961년 마침내 영화가 개봉되었을 때 대부분의 비평가들은 흑평을 퍼부었다. 이 영화에는 당시 브랜도의 가장 정확한 초상이 담겨 있었다. 곧 망가지고 뚱뚱해지기 직전의 잊을 수 없는 얼굴을 가진 남자, 스크린의 다른 누구에게도 사랑이나 욕망을 투사할 수 없거나 그럴 생각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남자. 이런 경향은 이후 브랜도의 작품에서 '마조히즘이 섞인 사디즘'으로 나타나게 된다.



브랜도는 <바운티 호의 반란(Mutiny on the Bounty)>에 출연하기로 했다. 촬영은 1960년 10월 타히티 섬에서 시작되었다. 이곳은 브랜도가 십대 시절에 에덴동산으로 꿈꾸던 곳이었다. 브랜도는 시간이 날 때마다 섬을 탐험했다. 가장 높은 산에 올라가, 멀리에서 약 6000제곱킬로미터 넓이의 환초를 보았다. 이것 외에 타히티에서의 경험은 완전한 악몽이었으며, "브랜도는 자기 방종의 절정을 보여주었다." 브랜도의 몸무게는 77킬로그램에서 95킬로그램으로 불어났다. 파산에 직면한 MGM은 지나치게 까다롭게 굴었던 브랜도에게 모든 책임을 돌렸다. 할리우드는 말론 브랜도를 좋아한 적도 달가워한 적도 없었다. 그는 괴짜였고, 너무 제멋대로였다. 다만 그가 흥행에서 엄청난 성공을 거두고 아카데미 상을 탔기 때문에 모두 입을 다물고 있었을 뿐이다. 1961년 8월 췌장암으로 죽어가던 클리퍼드 오데츠를 찾아갔을 때 브랜도가 갑자기 중얼거렸다. "나는 이제 머리가 벗겨지는, 중년의 실패한 인간이 되었습니다. 나는 모든 걸 해봤지요. 계집질, 술 퍼마시기, 일. 하지만 아무것도 의미가 없었습니다. 왜 우리는 타히티 사람들처럼 될 수 없는 거지요?"



그는 영화를 찍은 뒤에는 늘 프랑스령 폴리네시아의 타히티 근처에 있는 환초로 사라졌다. 그는 1967년에 27만 달러를 주고 환초 테티아로아를 샀다. 이 섬은 그의 모든 문제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완벽한 도피처였다. 그에게는 웅장한 계획이 있었다. 그는 싱크 탱크를 만들고 싶었다. 예술가, 과학자, 문인들이 모여서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기 위한 의견과 구상을 교환할 수 있는 마당을 만들고 싶었다. 그는 환경 프로젝트들을 위해 테티아로아에 수백만 달러를 쏟아부을 예정이었다. 브랜도는 결국 호텔과 활주로를 짓고, 이 환초를 관광 명소로 선전하려 했다. 그러나 그러한 노력은 그의 전기 작가 가운데 한 사람의 말에 따르면, 그의 "부주의, 비현실적인 기대, 문화 충돌에 대한 무감각" 때문에 실패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1968년은 미국의 정치적 불안과 소요의 분수령이 되는 해였다. 이 시기에 브랜도는 할리우드에서 가장 중요한 활동가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는 인종 폭력 사태에 완전히 몰두하여, 연기를 그만두고 시민권 운동에 헌신할 생각까지 했다. 브랜도는 <태워라!(Bum!)>에 출연하기로 했다. 카리브해의 한 국가에서 농민 혁명이 일어나고 붕괴하는 이야기였다. 브랜도는 봉기를 지원하기 위해 영국에서 파견된 18세기 선동가 역을 맡기로 했다. 브랜도는 이 영화에서 혁명가들의 심리를 분석하고 싶었다. 이 경우 '블랙 펜더스'보다 나은 대상이 어디 있을까? 이들은 오클랜드에 근거를 둔 전투적 정당으로, 법률 서적과 총으로 무장을 하고 게토를 순찰했으며, 경찰의 야만적 행동에 맞서 싸우면서 그들의 헌법적 권리를 보장받으려 했다. 브랜도는 이 모임에 대해 이렇게 쓰고 있다. "나는 여러 가지 주제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오클랜드에서 흑인으로 하루하루를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된 점이다."



1968년 4월 4일, 39살의 인권 운동 지도자 마틴 루터 킹 주니어가 멤피스에서 암살당했다. 킹의 암살에 격분한 흑인들은 신시내티, 시카고, 볼티모어 등 여러 도시에서 폭동을 일으켰으며, 워싱턴의 일부는 완전히 파괴되어 연기만 피어오르고 있었다. 블랙 팬더스는 격분하여 총을 들겠다고 외쳤다. 브랜도는 블랙 팬더스에 대한 지지를 철회했다. 일드리지 클리버가 진정한 혁명가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라면 부모라도 죽일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 포함된 선언문을 발표한 뒤의 일이었다. 그해 여름 로버트 케네디가 암살당하고 나서부터 브랜도는 정치적 행동주의와 거리를 두었다. 그는 자신의 복잡한 사생활 때문에 정신이 없었다. 브랜도는 처음에는 <태워라!>를 만드는 일에 열광했다. 그러나 폰테코르보 감독과 미완성 시나리오를 놓고 사납게 부딪치게 되었다. 또 그는 엄청난 수의 원주민 출연진에게 부당한 대우를 한다며 싸우기도 했다. 제작은 몇 달 동안 중단되고 여러 명의 변호사들이 싸움을 벌였다. 1969년에 개봉된 영화는 감독 편집본에서 적어도 20분은 잘려나간 것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영화는 이해가 잘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브랜도는 자신이 <태워라!>에서 최고의 연기를 보여주었다고 주장한다.브랜도는 부모에게서 벗어나지 못했다. 어머니가 가르쳐준 노래들이 계속 귀에 맴돌았다. 아버지는 1965년에 죽었음에도 브랜도는 계속 아버지에 대한 강박감을 떨치지 못했다. 브랜도는 아버지가 죽은 뒤에도 오랫동안 그를 미워했다. 팻 콕스는 말한다. "말론의 아버지에 대한 증오는 그의 엄청난 재능의 연료가 되었다. 그것은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워터프런트(On the Waterfront)>, <파리에서 마지막 탱고>에서 폭발했다. 그의 최고의 영화들은 분노에 대한 것이다. 분노의 방출만이 아니라 분노의 통제와 과시에 대한 것이다."



결국 브랜도는 자신의 삶을 계속 살아가려면 아버지의 모든 경멸과 혹평과 잔인한 심리적 학대를 용서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1970년 초 브랜도는 실업자나 다름없었다. 그는 엄청나게 살이 쪘으며, 늘 우울해했다. 그가 출연한 10편의 영화는 흥행에 크게 실패했으며, 그 자신은 문제를 일으키고 비협조적이라는 평판을 얻고 있었다. 마리오 푸조는 브랜도에게 미국 범죄 가문을 소재로 한 소설『대부』의 교정쇄를 보냈다. 이 책은 엄청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패러마운트는 이 책을 영화로 만들기로 했고, 푸조가 시나리오를 맡았다. 이 영화를 감독하고 푸조와 함께 시나리오를 쓰기로 계약한 31살의 민활한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역시 나이 들어가는 마피아 두목 역을 브랜도에게 맡기기로 결정했다. 이 인물은 영화에서 가장 비중 있는 역할은 아니지만 이야기 전체를 지배했기 때문에, 특별한 존재감을 지닌 연기자가 맡아야 했다. 이제 러디와 코폴라는 배른도가 대부를 맡아야 한다고 패러마운트 임원들을 설득해야 했다. 그러나 브랜도가 5만 달러의 출연료를 받아들여야 하고, "무례한 행동"을 할 경우에 벌금으로 내기 위한 보증금을 걸어야 하며, 스크린 테스트를 받아야 한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브랜도는 돈 콜레오네라는 인물에 빠져들었으며, 오랜만에 정말 열심히 일에 달려들었다. 브랜도는 언제 연기를 공개적으로 경멸했나 싶게 헌신적으로 자신의 배역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는 촬영을 시작하기 전에 뉴저지에서 아주 부유하고, 아주 강력하고, 아무 은밀한 한 갱단의 왕조의 격식을 갖춘 '패밀리' 만찬에 참석했다. 필 로즈의 말에 따르면 "그 자리에는 약 40명이 모였다. 말론은 그들과 함께 자리에 앉았다." 그는 훌륭한 파스타와 좋은 포도주를 마시며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알 파치노, 로버트 듀발, 제임스 칸 등 다른 배우들은 그에게 경외심을 품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말론이 이 인물들을 창조해낸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브랜도는 완전히 그 인물 속에서 살았다. 브랜도는 늘 뭔가를 생각해냈다. 브랜도는 <대부(The Godfather)>를 찍으면서 정말로 즐거워했다. 마지막 순간까지 코폴라는 자신이 실패작을 만들었다고 확신했다. 그러나 얼마 후 패러마운트는 <대부>가 영화사상 그 어떤 영화보다 많은 돈을 벌어들였다고 발표하게 된다. 브랜도는 기뻤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돈 클레오네 역을 맡을 때 따라왔던 모욕적인 조건들을 잊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대부Ⅱ>를 만들 때는 아주 많은 돈을 요구했고, 결국 패러마운트는 브랜도를 빼기 위해 시나리오를 다시 쓰게 했다. 이후 <슈퍼맨(Superman)>과 <미주리 브레이크(The Missouri Breaks)> 등을 계약할 때는 대부분 막강한 연예계 변호사 노먼 개리가 관여하였는데, 이런 영화들이 큰 수익을 올린 덕분에 브랜도는 마침내 큰 부자가 되었다.브랜도는 1973년에 아카데미 상을 거부한 뒤, 3년 동안 영화를 멀리하며 에너지의 대부분을 자신이 창립에 관여한 '미국원주민운동(AIM)'에 쏟아 부었다. 브랜도는 평생 이렇게 급진적인 참여를 한 적이 없었고, 그런 만큼 환멸도 가장 컸다. 그는 미국원주민운동의 여러 지도자들에게 법률적인 문제가 생겼을 때 보석금을 내주었다. 그는 심지어 체포를 피하도록 도와주기도 했다. 브랜도는 25년 동안 가능한 한 단기간에 최소한의 노력을 들여 많은 돈을 벌어들였다. 덕분에 그는 계속 미국원주민운동과 여러 가지 테티아로아 프로젝트(찬물에서 자라는 메인 주의 바닷가재를 그의 석호에서 기르기 위한 과학적 연구를 포함하여)를 후원할 수 있었다. 그러나 허리케인이 그의 호텔을 포함하여 그가 섬에 지어놓은 모든 것을 파괴해버리고 말았다. 피해액은 500만 달러로 추정되었다. 그는 멀홀랜드 드라이브의 집에 처박혔다. 그는 몇 주일씩 침대(그 밑에는 장전한 권총과 12구경 산탄총을 보관해두고 있다) 위에 늘어져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는 가족에게 충실하려 했다. 그러나 늘 한눈을 팔 일이 생겼다. 그는 자식들 이야기를 할 때는, 그의 전 매형 딕 러빙의 표현을 빌리면, '족장처럼' 이야기했다. 그는 현재 여러 부인과 여자친구에게서 9명의 자식을 두었는데, 그들 가운데 몇 명은 비서나 조수로 그와 함께 있다. 그의 자식들(그 가운데 일부는 양자이다)은 모두 그의 명성, 괴팍함, 엄청난 자기 도취 때문에 이런저런 식으로 영향을 받았다. 브랜도는 자식 가운데 맏아들 크리스천을 제일 사랑했다. 그는 마약 문제가 심각했기 때문에 다루기가 몹시 어려웠다. 필 로즈에 따르면, "말론은 나이가 들어갈수록 통제하고 지배하려 한다는 점에서 자기 아버지를 닮아간다." 그러나 브랜도도 1990년 5월 16일 밤에 일어난 일은 통제할 수 없었다. 32살의 크리스천 브랜도는 멀홀랜드 드라이브의 아버지 집에서 배다른 누이 셰옌의 애인 대그 드롤릿(타히티의 유명한 집안의 아들이었다)을 총으로 쏘았다. 로스엔젤레스 역사상 가장 널리 알려진 형사 사건 가운데 하나가 된 이 재판에서 브랜도는 자신이 부모로서 결함이 있다고 상당히 길게 증언했다. 1991년 3월 1일 크리스천 브랜도는 10년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1995년 셰옌 브랜도는 타히티의 푸나우이아에 있는 브랜도의 땅에서 목을 매 자살했다.



브랜도는 1996년에 개봉된 리메이크 영화 <닥터 모로의 DNA(The Island of Dr. Moreau)>에도 출연했다. 원작은 H. G. 웰스의 고전인데, 인간과 동물을 결합하여 그들을 자식이라고 부르며, 전기 충격으로 그들을 통제하는 미치광이 과학자 이야기이다. 이 영화는 일관성 없는 잡동사니 같지만 브랜도가 모든 사람과 모든 것을 덮는다. 이미 오래 전부터 브랜도의 명성은 애초에 그를 유명하게 만들었던 특질로부터는 멀어져 있었다. 오늘날과는 엄청나게 달랐던 1950년대 문화에서 그가 우리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거대해 보인다. 어쩌면 비평가 몰리 해스켈이 브랜도에 대한 뛰어난 에세이에서 한 말이 그 점을 가장 잘 표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의 전설의 힘은 무엇인가? 그 전설은 어떻게 여전히 살아 있는가? 그것은 한마디로 표현할 수 있다. 브랜도이기 때문에. 브랜도는 그가 가장 좋아하는 역, 즉 진지하고 사회 참여적인 반(反)스타의 역을 할 때도, 여전히 영화가 배출한 최고 스타 가운데 하나이다."1949년 말 브랜도는 첫 영화 <남자들(The Men)>출연 계약을 했다. 제작은 스탠리 크레이머, 감독은 프레드 치네만, 각본은 칼 포먼이었다. 치밀한 조사에 바탕을 둔 이 영화는 전쟁이 끝날 무렵 독일군 저격병의 총에 맞아 척추가 부서진 켄 윌로 섹이라는 병사의 이야기에서 영감을 얻었다. 윌로섹은 허리 아래가 마비되었음에도 남자답게 살기 위해 투쟁한다. 이 병사의 마비 상태는 블랙리스트와 순응적 태도가 판을 치던 억압적인 1950년대에 미국에 만연한 무력감의 상징으로 볼 수도 있다. 브랜도는 캘리포니아에 도착하여 가족으로부터 잇달아 나쁜 소식을 접한 뒤였다. 누나 조슬린은 남편인 돈과 헤어지기로 했다. 아버지는 큰 투자를 한 소 사육 사업에서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브랜도는 영화를 찍기 전에 할리우드에 대한 무례한 논평으로 기자들에게 충격을 주기 시작했다. 그는 할리우드가 공포와 돈에 대한 사랑이 지배하는 변경 도시라고 말했다. 홍보 담당자들은 곧 브랜도가 당분간 언론과 접촉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결정을 내렸다.



브랜도는 인물 연구에 몰두하고 싶었다. 그는 밴나이스의 버밍햄 참전용사 병원의 절단 수술자 병동에 들어가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켄과 비슷한 배경을 가진, 몸이 마비된 참전용사로 입원하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브랜도가 병원에서 3주를 보내자 참전용사들은 그를 허물없이 대했으며, 이들 가운데 일부는 <남자들>에 출연하기도 했다. 치네만의 혹독하면서도 전문적인 연출 솜씨에 따라 <남자들>을 찍으면서 브랜도는 영화 연기 방법을 완전히 익혔을 뿐 아니라,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면서 여자와 결혼을 해야 하는 남자의 가슴 아픈 초상을 멋지게 그려낼 수 있었다. 이 영화의 가장 중요한 점은 브랜도의 결혼 영화 데뷔작이라는 것이다. <남자들>로 할리우드에서 스타가 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평단은 최고의 찬사를 보냈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불과 두 주 만에 개봉한 것이 이 영화로서는 불행이었다. 아무도 하반신 불수 환자들에 대한 영화를 보러 가고 싶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몇 달 뒤 브랜도는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의 영화판을 찍기 시작했다. 무대 위에서 그만한 연기를 찾아볼 수 없었듯이, 스크린에서도 그만한 연기는 찾아볼 수 없었다. 브랜도는 <남자들>에 출연해 번 돈으로 부모에게 리버티빌 근처 먼들린이라는 작은 도시에 있는 큼지막한 농장을 사주었다. 어머니 도디는 이곳을 좋아했다. 도디는 아들이 동물을 깊이 사랑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새끼 너구리를 선물로 주었다. 브랜도와 오랜 친구 윌리 콕스는 어린 시절 친구의 이름을 따 러셀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러셀은 브랜도가 어디를 가나 따라다녔다.거칠고 오만한 반항아1943년 봄이 다 갈 무렵 브랜도는 빛이 바랜 인도산 면옷을 차려 입고 붉은 중절모로 치장을 하고서 뉴욕에 도착했다. 히틀러 치하의 독일을 피해 건너온 망명자, 화가, 음악가, 시인 등등 수많은 사람들이 명성과 부를 꿈꾸며 뉴욕으로 꾸역꾸역 밀려들고 있었다. 브랜도는 휴가를 즐기려고 나온 현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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