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애나의 꿈
크리스토퍼 앤더슨 지음 | 아라크네
다이애나의 꿈
크리스토퍼 앤더슨 지음/유경찬 옮김
아라크네/2004년 1월/421쪽/12,000원
1장 서른여섯 송이의 백합
1997년 8월 31일, 오전 12시 21분. 검은색 벤츠 승용차가 파리의 거리를 질주하다 로열 가에서 잠시 멈추었다. 오토바이와 자동차로 뒤를 따르던 파파라치들이 들이닥쳤다. 영국 왕세자비 다이애나와 이집트 태생의 애인 도디 파에드를 태운 벤츠는 신호등을 무시한 채 왼편 콩코드 광장 쪽으로 달려갔다. 차는 터널 입구의 움푹 파인 곳을 들이받는가 싶더니 공중으로 솟구친 뒤 곧바로 바닥에 곤두박질쳤다. 차 안에 있던 네 사람 가운데 파에드의 보디가드였던 트레버 리스-존스만이 안전벨트를 메고 있었다. 벨트를 매지 않은 파에드와 운전사 앙리 폴은 현장에서 즉사했고 다이애나는 뒷자석에 쓰러져 있었다. 마침 근처에는 프레더릭 메일리에츠라는 응급치료 전문 내과의가 있었다. 그가 급히 다이애나를 치료하고 있을 때 열서너 명의 파파라치들이 카메라 플래시를 터뜨렸다. 병원으로 옮겨진 다이애나는 수술대 위에서 사망했다.
열다섯 살의 윌리엄과 열세 살의 해리, 그리고 찰스 왕세자는 밸모럴에서 휴가를 보내고 있었다. 새벽에 비보를 전해들은 찰스 왕세자는 비통에 잠겼다. 찰스는 아침에 윌리엄과 해리에게 지난 밤 파리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해주었다. 세 남자는 엘리자베스 여왕과 필립 공이 기다리고 있던 접견실로 향했다. 여왕은 인간적인 모습보다는 품위를 갖추는 데 더 신경을 쓰고 있었다. 여왕은 다이애나의 죽음이 왕실 가족들의 일정을 바꾸어야 할 이유가 못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날 아침도 여느 때와 다름없이 두 손자를 포함한 모든 사람들과 함께 교회에 갔다. 여왕은 손자들을 외부 정보로부터 차단하기 위해 밸모럴에 신문을 넣지 못하게 했고 성내에 있는 라디오나 텔레비전 전원도 모두 끄도록 지시했다. 또 전화 교환원들에게는 외부에서 손자들에게 걸려오는 전화를 일절 연결하지 말라고 명령했다. 여왕은 다이애나의 죽음에 대해 딱딱하고 간단한 성명서를 발표했다. “여왕과 왕세자는 이 충격적인 뉴스에 참담함을 금하지 못하고 있다.”
다이애나의 장례식을 두고 여왕과 찰스는 긴장관계에 있었다. 장례식 절차에 관해 블레어 수상은 찰스에게 이렇게 말해 주었다. “만약 왕실이 다이애나의 장례식을 개인장으로 간단하게 처리한다면 여왕 폐하에게는 치명적인 흠이 될 것입니다. 영국 국민들은 그런 장례식을 인정하려 들지 않을 테니까요.” 여왕은 다이애나에게 특별 대우를 하지 않겠다는 입장이었다. 윌리엄은 장례 행렬의 진행 과정이나 날씨에 상관없이 자신과 해리가 다이애나의 관 뒤를 따르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윌리엄의 태도는 찰스더러 여왕에게 과감하게 맞서라는 무언의 압력이었다. 블레어 수상의 강력한 지원을 등에 업은 찰스는 여왕을 설득하여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에서 텔레비전이 중계하는 가운데 국장이나 왕실 가족장은 아니더라도 특별한 장례의식을 갖자는 동의를 받아냈다. 찰스는 또 여왕이 직접 국민들에게 애도의 뜻을 표하고 버킹엄 궁의 기를 반기로 내려달라고 요구했다.
전 세계 25억 인구는 텔레비전을 통해 런던 시가지를 잇는 다이애나의 긴 장례 행렬과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경건하게 진행된 장례식을 지켜보았다. 왕실 가족이 웨스트민스터 성당에 들어서자 두 아이들은 하얀 튤립과 장미가 놓여 있는 관 위에 서른여섯 송이의 흰 백합을 더 올렸다. 백합은 다이애나가 살다 간 36년의 인생을 의미했다. 2장 영국을 지배하소서!
1982년 1월, 왕실 소유의 전원주택 샌드링엄 하우스의 계단 꼭대기에서 다이애나는 이렇게 말했다. “이 계단에서 굴러 떨어져버릴 거야! 찰스, 정말 그렇게밖에 할 수 없나요?” 허기증과 입덧 그리고 찰스와 카밀라와의 관계에 화가 난 임신 3개월의 다이애나는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다. 계단에서 넘어진 다이애나는 복부에 심한 타박상을 입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태아에게는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여왕은 전통에 따라 미래의 왕이 될 아기가 왕실 담 안에서 태어나기를 바랐지만 다이애나는 하루 입원비가 218달러인 ‘세인트 메리스 병원’의 입원실에서 새 생명의 출생을 기다렸다. 6월 21일, 다이애나는 갖은 산고 끝에 3.2킬로그램의 몸무게에 파란 눈을 가진 사내아이를 품에 안을 수 있었다. 아들을 보자 찰스는 다이애나에게 “굉장한 일이야, 정말 잘했어, 여보. 당신이 자랑스러워!” 하고 속삭였다. 교회의 종이 울려퍼지고 축포가 터지는 가운데 왕실 가족 전체는 미래의 영국을 대표할 왕의 탄생을 진심으로 축하했다. 병원 밖에 모여 있던 사람들은 “좋은 친구가 생겼다!”, “영국을 지배하소서!”라고 외쳐댔다. 다이애나도 그때의 기분을 ‘하늘에 떠다니는 연 같았다’고 회상했다. 찰스도 자랑스러운 아버지 역할을 하겠다는 듯 의젓한 자세로 윌리엄의 방을 하루에도 몇 번씩 드나들었다. 아들에게 열중이었던 것만큼 아내에게 조금 소홀해지긴 했지만 출산 후 열흘이 지난 7월 1일, 다이애나가 21번째 생일을 맞았을 때는 다이애나에게 직접 꽃을 선물한 다음 포옹하는 여유도 보여주었다.
다이애나는 곧 산후 우울증에 빠지기 시작했다. 왕성한 식욕을 되찾은 다이애나의 몸집이 칼륨과 마그네슘 결핍증으로 불어나기 시작할 즈음, 산후 호르몬의 불균형 또한 카밀라에 대한 적개심을 고조시키고 있었다. 아이에게 젖을 먹인 후 다이애나는 욕실 문 앞을 지나다 우연히 찰스의 통화를 엿들었다. 찰스는 전화기에 대고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나는 당신만 사랑할 거야!” 남편의 배신에 대한 다이애나의 분노는 윌리엄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하는 지나친 공포감으로 발전했다.
윌리엄이 세례를 받은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어느 날이었다. 다이애나는 스카치 몇 잔을 마신 후 안정제 반 병을 삼켰다. 다행히 경호원이 다이애나를 발견해 다이애나는 병원에서 위 세척을 받은 뒤 깨어날 수 있었다. “다시는 이런 짓을 하지 않을 거야. 윌리엄에 대해 계속 생각했어….” 이런 다짐에도 다이애나의 자살 소동과 자해는 그치질 않았다. 정신과 의사들이 처방전을 내놓았으나 이렇다 할 변화가 없자 그녀는 발륨(유명한 신경안정제의 상표명)을 사용했다. 다음해 1월 찰스는 다이애나에게 일상에서 떠나 휴식을 취하라고 타일렀으나 다이애나는 일주일 뒤 바로 돌아왔다. 윌리엄과 떨어져서는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다.
버킹엄 궁은 나날이 높아만 가는 다이애나의 인기를 이용해 찰스와 함께 6주에 걸친 호주와 뉴질랜드 방문 계획을 세웠다. 1983년 3월 22일 찰스와 다이애나, 윌리엄과 보모 반스 일행이 앨리스 스프링스 공항에 도착하자 기자들이 떼를 지어 기다리고 있었다. 현장에 있던 기자 한 명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찰스와 다이애나도 아이와 함께 있는 것이 즐거운 듯 살짝 웃었지요. 나무랄 데 없이 완벽한 가족처럼 보였습니다.” 호주 여행은 다이애나의 안정에 큰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이 여행은 부부관계에 또 다른 불행의 씨앗을 뿌리기도 했다. 호주와 뉴질랜드에서도 수많은 사람들이 다이애나를 보기 위해 몰려들었다. 그들은 분명 ‘찰스와 다이애나’가 아닌, ‘다이애나’만을 보고 싶어했다. 찰스는 아내에게 질투를 느끼기 시작했고 그 후 몇 년 동안 이 질투심은 걷잡을 수 없이 깊이를 더해 갔다. 1984년 찰스는 아내와 아들은 대동하지 않은 채 브루나이와 동아프리카, 뉴기니아와 프랑스, 모나코, 이탈리아 등지를 혼자 돌아다녔다. 대식증과 만성 우울증에 시달렸던 다이애나는 이 시기를 ‘암흑과도 같아서 아무것도 기억할 수 없으며 그저 고통뿐이었다’고 회상했다.
찰스와 카밀라의 관계는 변함이 없었다. 그런데도 찰스와 다이애나 부부는 ‘출산 계획’에 따라 두 번째 아이를 갖기 위해 노력 중이었다. 다이애나의 두 번째 임신도 찰스의 바람기를 잠재우지 못했다. 한밤중에 걸려오는 전화, 정신없이 읽고 재빨리 벽난로 속에 던져버리는 편지 그리고 언제나 다이애나와 한 약속을 어긴 채 어디론가 사라져버리는 찰스를 다이애나는 도저히 견뎌낼 수 없었다. 다이애나에게는 윌리엄의 재롱만이 유일한 위안이었다. 두 번째 출산을 앞두고 두 사람은 다정해졌다. 찰스가 두 번째 아이는 딸이라고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984년 9월 15일, 둘째 아이가 태어났다. 딸을 바라던 찰스는 갓 태어난 아이가 울기 시작하자 고개를 흔들면서 이렇게 말했다. “맙소사, 또 아들이군. 게다가 빨간 머리잖아?” 후에 다이애나는 당시의 심정을 이렇게 표현했다. “그 순간 내 가슴이 꽉 막히는 것 같았어요.”
3장 켄싱턴 궁의 개구쟁이들
찰스는 아내와 새로 태어난 아이를 켄싱턴 궁에 내려준 뒤 곧장 윈저 성으로 폴로 경기를 하러 가버렸다. 찰스가 새로 태어난 왕자에 대한 실망감을 숨기지 않을수록 해리에 대한 다이애나의 애정은 더욱 깊어만 갔다. 윌리엄에게는 3주간 먹였던 모유를 해리에게는 11주 동안이나 먹일 정도였다.
찰스는 버킹엄 궁내에서 교육시킬 수 있는 여교사를 한 명 채용할 생각이었으나 유치원 보모 때의 경험을 살린 다이애나는 균형 감각이 잡힌 성인으로서 행복해지는 것은 물론, 훌륭한 군주가 되기 위해서는 친구들과 어울려 유치원을 다니는 것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런던에 있는 미너스 유아원으로 결정하기까지 다이애나는 여러 가지를 꼼꼼히 조사했으며 친구들에게 자문을 구하기도 하고 열 곳이 넘는 유아원을 직접 방문하는 열의까지 보였다.
1985년 9월, 윌리엄이 미너스 유아원에 입학했다. 윌리엄은 선생님과 친구들을 놀라게 만들었다. 자신의 신분을 잘 알고 있었던지 제멋대로 구는 경우도 많았다. 줄을 무시하고 맨 앞에 서기도 했으며 운동장에서는 다른 아이들을 못살게 굴어 유명해지기도 했다. 집에서도 유모 반스와 부모, 관리인 할 것 없이 누구의 말도 듣지 않았다. 1986년 7월 다이애나의 친구 사라 퍼거슨과 앤드류 왕자의 결혼식과 그해 말 왕실 가족들의 크리스마스 모임 때 윌리엄과 해리의 진면목이 다시 한 번 드러났다. 두 아이들은 이리저리 뛰어다니면서 제 마음대로 되지 않으면 울고불고 야단을 떨었다. 며느리의 육아 방법에 대해 지금껏 입을 다물고 있던 여왕이 말했다. “찰스, 조치를 해야겠다. 애들에게는 교육이 필요해. 새로운 유모가 필요한 것 같구나.”
찰스의 친구이자 윌리엄의 대부(代父)인 루스 월리스가 반스의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다. 윌리엄은 여전히 제멋대로 행동했다. 위더비 유치원에서 원생들을 위한 생일잔치를 열었을 때 윌리엄은 샌드위치와 아이스크림을 마룻바닥에 흩트리면서 “난 아이스크림이랑 샌드위치가 싫단 말이야!” 하고 소리를 질렀다. 교사들이 어지럽힌 것을 치우라고 말하면 윌리엄은 이렇게 소리쳤다. “내가 왕이 되면 기사들을 보내 너희들을 다 죽여버릴 거야!” 그래도 아무 반응 없이 “다 주워.”라고 지시하면 윌리엄은 이렇게 쏘아붙였다. “당신들은 내가 누구인지 알기나 해?” 그 이후부터 교사들과 유치원 친구들 사이에서 윌리엄은 ‘파괴분자’라는 별명으로 통했다. 그러나 윌리엄을 짜증스럽게 만들었던 속사정을 사람들은 잘 모르고 있었다. 왕실 관리인 웬디 베리가 말했다. “윌리엄도 부모의 결혼 생활에 이상이 생겼다는 것 정도는 충분히 감지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던 거예요. 같이 놀아만 준다고 모를 리 없었습니다.”
1987년 초, 찰스는 자신의 연인이자 남의 부인인 카밀라 파커 볼스를 더 가까이에서 보기 위해 하이그로브로 옮겨갔다. 찰스가 하이그로브로 떠난 뒤에도 다이애나와 아이들은 주중에는 런던에 머물다가 주말에만 시골 마을 하이그로브에 합류했다. 다이애나는 자기 방에서 자주 울었고 ‘엄마 왜 울어?’가 아이들의 단골 질문 메뉴가 되어버렸다.
위더비 유치원은 윌리엄의 사회성을 서서히 일깨워주었다. 루스 월리스 또한 윌리엄에게 신사도를 한 가지씩 심어주었다. 말썽꾸러기였던 미래의 왕이 조금씩 변해갔다. 1987년 9월 미너스 유아원에 입학한 해리는 내성적인 성격에 수줍음을 타 다른 아이들이 노는 곳에 가지도 못하고 따로 놀았다. 주목받는 것을 싫어했기 때문에 화장실에 가겠다고 손을 드는 것도 부끄러워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자 자신감을 가지게 되면서 제법 말썽도 피우기 시작했다. 윌리엄의 태도에는 큰 진전이 있었지만 두 아이의 장난꾸러기 같은 행동은 여전했다. 경호원의 보호 없이 마음대로 뛰어놀 수 있었던 하이그로브에서 윌리엄과 해리는 물총 놀이, 베개 던지기, 늑대 놀이를 즐겼다. 하이그로브의 관리인 한 사람은 ”윌리엄은 언제나 상처투성이였습니다. 울타리에 걸려 넘어져 무릎과 팔꿈치가 깨지기도 했고 다른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자전거나 스케이트 보드를 타다가 넘어지기 일쑤였지요.“라고 말했다.
1988년이 되고 처음 두 달 동안, 찰스와 다이애나의 사이가 다시 좋아지는 듯했다. 아이들의 행동도 더없이 밝아졌다. 이 무렵 함께 떠났던 해외여행으로 부부 사이는 더욱 좋아지는 듯했지만 또 다른 해외여행이 끝내 영원한 불화를 불러오고 말았다. 1988년 3월, 찰스와 다이애나, 그리고 임신한 사라 퍼거슨(일명 페기)를 비롯한 여러 명의 친구들이 다 함께 스위스의 스키 휴양지 클로스토스에 갔다. 이틀 뒤 다이애나와 페기가 별장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을 때 눈사태가 발생했다. 찰스의 목숨은 간신히 구했으나, 같이 있었던 친구 한 명과 말 관리 책임자였던 휴즈 린드세이 소령이 희생됐다. 비극과 위기가 덮쳤던 순간 이들 부부는 서로가 위안이 될 수 없음을 확인하고 있었다. 이 소식을 접한 다이애나는 켄싱턴 궁으로 돌아가 두 아이들과 린드세이 소령의 미망인, 그리고 페기와 함께했던 반면, 찰스는 하이그로브로 가서 연인 카밀라의 품을 찾았다.
아이들은 아빠와 엄마 사이의 균열이 어느 정도인지 정확하게 알지 못하는 상태였다. 다이애나와 찰스는 한 지붕 아래 있을 수 없을 만큼 나빠졌다. 1989년 이후부터 다이애나가 하이그로브에 도착하면 찰스는 곧장 떠나버렸다. 윌리엄은 엄마 못지않게 해리와 다른 아이들을 잘 돌보았고 부모의 감정 변화에도 민감했다. 아이들과 함께 하이그로브에서 긴장된 주말을 보내던 다이애나와 찰스가 쿠웨이트와 아랍에미리트의 공식 방문에 나설 때였다. 중동에 도착한 다이애나는 옷 가방을 열다가 맨 마지막에 넣은 듯한 하얀 봉투 하나를 발견했다. 다이애나 혼자 읽어내려 간 편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사랑하는 엄마와 아빠에게!
여행하는 동안 좋은 시간 보내세요. 하지만 빨리 돌아오셔야 해요. 우리는 엄마, 아빠가 보고 싶으니까요. 윌리엄이 썼어요.“
침대에 걸터앉은 다이애나는 이 편지를 무릎 위에 내려놓고 하염없이 눈물을 삼키고 있었다.
4장 왕비가 될 수 없는 왕세자비
1990년 9월, 윌리엄은 런던에서 약 30마일 떨어진 버크셔의 특수사립학교 러드그로브에 입학했다. 윌리엄이 러드그로브로 떠나자 해리 혼자 엄마와 아빠의 싸움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1990년 말에서 1991년 초까지 남편과 격렬하게 싸우는 동안에도 그녀의 마음 한구석에는 페르시아 만에서 벌어지고 있던 전쟁에 대한 걱정이 끊이지 않았다. 전투에 참가 중인 휴잇 대위의 안부가 궁금했던 것이다. 휴잇 대위가 무사히 돌아오자 다이애나는 다른 귀환 용사들의 부인들처럼 열렬히 환영했다.
1991년 봄, 언론은 찰스가 아이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거의 없다고 떠들어댔다. 지난 크리스마스 때 위더비 유치원에서 있었던 해리의 독주 연주, 윌리엄이 왕자로서 맞이하는 첫 행사 때도 찰스는 아이들 곁에 없었다. 부활절 기간 동안 다이애나는 윌리엄과 해리를 데리고 오스트리아로 스키를 타러 갔으나 찰스는 샌드링엄에서 카밀라와 함께 지냈다. 1991년 6월 3일, 마침내 찰스가 무심한 아버지라는 비난의 화살을 피할 수 없게 만드는 사고가 일어났다. 러드그로브 학교 골프장에서 한 아이가 휘두르던 골프채에 정통으로 이마를 맞은 윌리엄이 풀밭에 쓰러졌던 것이다. 다이애나와 찰스는 이 소식을 듣자마자 병원으로 달려갔다. 윌리엄은 수술이 필요한 상태였는데 찰스는 모든 것이 잘 될 거라 생각하고 오페라 <토스타>를 보러 갔다. 찰스의 이런 행동은 국민들을 분노하게 만들었다. 언론은 윌리엄의 곁을 지키지 않은 찰스를 맹렬하게 비난하고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