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나지 않은 길
M. 스콧 펙 지음 | 소나무
제1장 훈련게으름의 주된 형태는 두려움입니다. 아담과 이브로 하여금 하나님의 율법 뒤에 숨은 뜻을 묻지 못하게 한 것은 모두 게으름 때문만은 아닙니다. 두려움, 즉 하나님을 대면할 일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묻는 것은 많은 일을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두려움의 상당 부분은 현상을 변화시키는 데 따르는 두려움, 즉 현재의 위치에서 더 앞으로 나아가면 무언가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입니다. 우선 자신에게 게으름이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인정하는 것이 게으름을 줄여나가는 첫걸음입니다. 우리 각자의 내부에는 두 가지 자아, 즉 건강한 자아와 병든 자아가 있습니다. 즉 삶에의 욕구와 죽음에의 욕구가 있습니다. 우리 각자의 내부에는 신의 경지를 추구하는 본능이 있으며, 또한 게으름이라는 원죄가 있습니다. 이 원죄는 언제나 존재하는 엔트로피의 힘으로서 우리를 수렁 속으로 퇴행시킵니다.
악의 문제는 모든 신학적 문제 가운데 가장 커다란 문제일 것입니다. 그러나 심리학이라는 과학은 마치 악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몇 가지 극히 예외적인 경우에만 악을 인정해 왔습니다. 그러나 나는 악은 존재한다고 결론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어둠은 빛이 그 모습을 비추어 드러내므로 싫어합니다. 악인은 선이 자신의 악을 드러내므로 미워합니다. 그들은 이런 자기 의식에 따른 고통을 회피하기 위해 빛과 선과 사랑을 파괴합니다. 악은 게으름이 극한에 도달한 상태입니다. 사랑의 반대는 게으름이라고 했듯이, 일상적인 게으름은 수동적인 상태로서 사랑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악은 사랑을 반대하는 것입니다. 엔트로피와 사랑은 서로 갈등하는 힘이므로, 선이 악을 싫어하듯이 악이 선을 미워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악은 사회적 권력의 형태로 인간의 진보에 맞불을 질러 그것을 방해합니다. 그러나 무의식적으로 악은 그 특성상 다른 사람들에게 경고하는 횃불로 기능하기도 합니다. 우리들은 대부분 악의 맹렬함에 대해 본능적으로 느끼는 두려움에 의해 은총을 받으며, 악의 존재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자신을 정화시키는 계기가 됩니다. 예를 들어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매단 것은 악이었는데, 오히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멀리서도 그분을 볼 수 있도록 했습니다. 세상의 악에 대한 싸움에 우리가 개인적으로 참여하는 것은 우리가 성장하는 길 가운데 하나입니다.
우리는 이제 정신적 발전이란 의식의 성장이라고 정의할 수 있는 지점에 도달했으나, 의식이 갖지 못한 모든 지식을 갖고 있는 무의식에 대해서나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소유하는가에 대해서는 아직도 모호합니다. 다시 우리는 "그것은 하나님이다."라는 가설만을 세울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하나님을 당신 내부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상호 대면은,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우리의 의식과 무의식 사이의 상호 대면임을 시사해 줍니다. 하나님은 우리 내부에 있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의 일부입니다. 하나님은 늘 우리와 함께 있었으며 앞으로도 언제나 그럴 것입니다. 우리 모두에게 내재하는 성신 또는 성령이라는 기독교 개념과 본질적으로 유사합니다. 융도 자신을 '무한한 신성의 파편'이라 묘사한 바 있습니다.
무의식은 하나님이므로 우리는 정신적 성장의 목적을 의식적 자아에 의한 신성의 획득이라고 정의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것은 각자가 완전한 신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그 목적이, 의식이 무의식에 통합되어 모든 것이 무의식이 되는 데 있음을 의미할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지금 문제의 핵심에 도달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의식을 보존하면서 하나님이 되는 것입니다. 무의식의 하나님이라는 뿌리로부터 자양분을 받고 성장하는 의식 자체가 하나님이 될 수 있다면, 하나님은 새로운 형태의 삶을 취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개인의 존재 의미입니다. 우리는 의식적인 대체로서 새로운 형태의 삶을 가진 하나님이 되기 위해 태어났습니다.
의식은 존재의 전체 가운데 실행하는 영역입니다. 결정을 내리고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도록 하는 것은 의식입니다. 완전히 무의식적 존재가 된다면 우리는 정말로 갓 태어난 아기와 같을 것입니다. 하나님과 하나이기는 하지만, 세상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존재를 느끼도록 할 수 있는 어떤 행동도 취할 수 없습니다. 힌두교나 불교 신학의 신비적인 어떤 부분에는 퇴행적인 성격이 있습니다. 거기서는 자아 영역이 없는 유아의 상태가 니르바나(열반)에 비유되며, 열반에 들어가는 목적은 모태로 되돌아가려는 것과 유사합니다. 그러나 기독교 신학의 목적은 이러한 퇴행성과 정반대입니다. 그것은 자아가 없는 무의식의 아기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라는 자아가 될 수 있는 성숙된 의식적 자신으로 발전시키는 것입니다.
우리는 두 발로 이리저리 걸어다니며 세상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독립적 선택을 할 수 있는 성인입니다. 우리가 갖는 이 성숙된 자유 의지를 하나님의 그것과 동일시할 수 있다면, 하나님은 의식적인 자신을 통해 새롭고 잠재력 있는 형태의 삶을 취할 것입니다. 말하자면 우리는 하나님의 대리인이자 그분의 손발이 될 것이며, 따라서 그의 일부가 됩니다. 우리의 의식적 결정을 통해 그분의 의지에 따라 세상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면, 우리의 삶 자체가 하나님의 은총의 대리인이 될 것입니다. 그때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은총의 한 형태가 되어 사람들 속에서 그분을 위해 일하며, 이전에 없었던 사랑을 창조하고 이웃사람들을 우리 정도의 의식 수준으로 끌어올리며, 인류 진화의 수준을 끌어올립니다.
그러면 다음과 같은 의문이 생깁니다. 왜 우리 가운데 극소수만이 은총의 부름에 귀를 기울이는 걸까요? 왜냐하면 은총에는 고통스러운 책임과 의무가 뒤따릅니다. 어떤 희생도 감수해야 합니다. 그것은 정신적으로 어린아이 상태에서 어른으로 나아가라는 부름이며, 인류의 부모가 되라는 부름입니다. 그러므로 "부름받은 자는 많으나 선택받은 자는 적다."는 말은, 은총에의 부름에 순응하는 데 따르는 어려움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쉽게 설명됩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다시 역설에 직면해 있습니다. 그 동안 나는 마치 영적인 성장이 질서 정연하고 예측할 수 있는 과정인 것처럼 이야기해 왔습니다. 본질적으로 나는 은총을 획득하는 것이라고 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것은 전부가 아님을 나는 압니다. 우리가 은총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은총이 우리에게 오는 것입니다. 의식적으로 탐욕스럽게 영적인 삶을 원하는 사람들은 그 길에서 여러 가지 장애에 부딪칩니다. 반면 은총의 상태를 성취하여 "하늘로부터의 새로운 삶"이 주어진 사람들은 이 경험을 자신이 스스로 획득했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이들은 분명 자신은 자기보다 더 현명하며 능숙한 손에 의해 창조되었다고 느낍니다. 그 신비함에 놀랍니다.
이와 같은 역설을 어떻게 풀어야 할까요? 아마도 우리가 말할 수 있는 최상의 것은 우리 스스로 은총이 기적적으로 올 때 자신을 열어놓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을 비옥한 땅, 은총을 환영하는 장소로 만들 수 있습니다. 신학을 모르고 신에 대해 생각조차 해보지 않았다고 해도 은총을 받기에 적합한 장소로 준비할 수 있습니다. 부처는 해탈의 추구를 멈추었을 때 해탈을 얻었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가 16년간이나 준비했으며 적어도 6년간이나 해탈을 추구했으므로 해탈이 그에게 왔다는 사실을 누가 부인할 수 있겠습니까?모든 사랑에 대해서도 이런 태도를 취해야 합니다. 아무런 노력도 없이 사랑받기를 추구한다면 우리는 의존적이 되고 붙잡으려고 하며, 따라서 진정한 사랑을 하지 못하게 됩니다. 자기 자신에게 먼저 사랑을 베풂으로써 우리는 사랑을 받고 또한 사랑할 수 있습니다.
추구하지 않고서도 축복을 받는 능력은 그저 물건과 같은 선물이 아니라, 우리의 의식적 의지의 영역 너머로부터 우리에게 주어진 은총이라는 선물을 인식하고 이용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이 능력을 갖고 있으면 우리는 자신의 영적 성장의 여행이, 눈에 보이지 않는 손과 상상할 수 없는 하나님의 지혜에 의해, 우리의 의식적 의지가 해내는 것보다 훨씬 더 정확하게 안내된다는 사실을 발견할 것입니다. 이렇게 안내되면 여행은 훨씬 더 빨라집니다.
그러나 모든 걸음걸이가 안전하고 가치 있음이 보장되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한 마디로 그것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영적 성장의 여행은 용기와 주체성과 사고 및 행동의 독립성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예언자의 말과 은총의 도움을 얻을 수는 있지만 여행은 여전히 혼자 가야 합니다. 어떤 스승도 당신을 데리고 가지 못합니다. 확고한 공식도 없기 때문에 우리는 좌절하기가 쉽습니다. 하지만 일단 은총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기만 한다면, 자신을 의미 없고 중요하지 않게 생각하는 우리의 이해 방식은 없어질 것입니다.
우리 자신과 우리의 의식적인 의지를 넘어서 우리의 영적 성장과 발전을 돕는 강력한 힘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자기가 무의미하다는 생각을 뒤집어 놓을 수 있습니다. 이 힘의 존재는 일단 우리가 깨닫기만 한다면, 우리는 인간의 영적 성장이 우리 자신보다도 더 위대한 어떤 것에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을 확고하게 가르쳐 줍니다. 이 어떤 것을 우리는 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 은총이 존재하는 것은 신이 실재한다는 사실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신의 의지가 개인의 정신적 성장에 기여한다는 사실에 대한 최상의 증거이기도 합니다.
처음에는 동화처럼 보였던 것이 사실이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보호 아래 삶을 살고 있으며, 그분의 관심과 보살핌의 주변이 아니라 중심에 사는 것입니다. 우주는 현재 우리가 아는 모습이 사실일 수 있지만, 동시에 단지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가는 하나의 도약대에 불과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우주의 미아가 아닙니다. 은총의 실재성은 인류가 우주의 중심에 있음을 가르쳐 줍니다. 지금의 시간과 공간은 우리가 우주에서 여행하기 위해 존재합니다.
나는 내 환자들이 고통으로 낙담하거나 그것의 의미에 대해 회의할 때 때때로 그들에게 인류는 진화라는 도약을 하고 있다고 말해 줍니다. 또 나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이 도약에서 성공할지 여부는 당신의 개인적 책임입니다." 또한 그것은 내 책임이기도 합니다. 우주는, 즉 도약대는 우리의 길을 예비하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한사람 한사람이 스스로 도약해야 합니다. 은총을 받은 우리는 방황하질 않습니다. 은총을 통해 우리는 자신이 따뜻하게 맞아지고 있음을 압니다. 더 이상 무엇이 필요합니까?이로운 결과를 낳은 기이한 사건들과 관련하여 여기서 우리가 말하고 있는 것은 초능력이라는 현상입니다. 웹스터 사전에서는 초능력이라는 단어를 '추구하지 않으면서도 귀중하거나 좋은 것을 찾는 재능'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은총도 어떤 면에서는 '추구하지 않고 얻은 귀중하거나 좋은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누구나 이것을 얻을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용할 수 있으나 어떤 사람은 그렇지 못할 뿐입니다. 풍뎅이를 안으로 들어오게 하고 붙잡아서 환자에게 줌으로써 융은 분명히 은총을 이용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은총을 제대로 이용하지 못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재능이 우리에게 주어졌을 때 그것의 가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바꿔 말하면 초능력적인 사건은 우리 모두에게 일어나지만, 흔히 우리는 그것이 초능력적인 것임을 알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은총이란 대략 어떤 특성들을 공통으로 가지고 있을까요? 첫째, 그것은 인간의 삶과 영적 발전을 조장하며, 지탱하고, 보호하며 고양시킵니다. 둘째, 그것의 작용 방식은 과학적 사고로 해석되는 자연 법칙의 원리에 입각해서 보면 매우 모호합니다. 셋째, 그 사건들은 자주 발생하며 일상적이고, 본질적으로 인간 사회에서 보편적입니다. 넷째, 잠재적으로는 의식의 안쪽에 의해 영향을 받지만, 그것들의 기원은 의식적인 의지 밖에 있으며 의사 결정을 초월합니다. 우리는 이 은총의 힘, 즉 기적에 의해 성장합니다. 모든 생명의 성장 과정 자체가 기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진화라고 이름 붙여 왔습니다.
나이가 들면 인간의 육체적인 능력은 필연적으로 퇴보하게 됩니다. 그러나 한 개인의 정신은 살아가면서 극적으로 진화할 수 있습니다. 영적인 능력은 죽을 때까지 증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적 성장 과정은 수고스럽고 힘든 것임을 거듭 강조해 왔습니다. 이 진화의 '흐름'은 열역학 제2법칙인 엔트로피의 힘과 반대 방향입니다. 인간의 영적인 진화는 이 저항을 극복해 왔습니다. 우리 모두가 그럴 수 있는 것은 아니며 또한 쉬운 일도 아니지만, 우리에게는 이미 수렁 속에 안주하기보다 거기에서 빠져나오려는 더욱 어려운 길을 선택하도록 하는 힘이 있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 개인이 진화해 나아가듯 우리 사회와 인류 전반에도 진화가 적용될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진화했을 때 우리는 세계를 등에 지고 갈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인류도 진화합니다.
그러나 개인과 인류 전체를 떠밀어, 우리 자신의 관성이라는 자연적 저항을 이겨내면서 성장하도록 하는 이 힘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요? 우리는 이미 이것에 대해 이름을 붙였습니다. 그것은 사랑입니다. 사랑, 즉 자아의 확장은 진화입니다. 진보하고 있는 진화입니다. 모든 생명 안에 있는 진화의 힘은 모든 인류에게 사랑으로 드러납니다. 인류에게는 엔트로피라는 자연 법칙에 도전하는 기적적인 힘이 존재합니다.
그러나 사랑에 관한 장에서 지적된 질문이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사랑은 어디서 오는가? 이제서야 이 질문은 더욱 근본적인 질문으로 확대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질문은 우리에게 '은총'이라는 것의 근원에 대해 생각하게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곧 당혹감을 느끼게 됩니다. 사랑은 의식적인 것이지만 은총은 그렇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의식 밖에 존재하면서 인간의 영적인 성장을 돕는 이 강력한 힘"은 어디서 옵니까?
우리는 은총과 진화라는 기적을 설명하기 위해 우리가 성장하기를 바라는 신, 즉 우리를 사랑하는 신을 가정할 수 있습니다. 너무 단순하게 들릴지는 모르지만 마음 속 깊이 질문을 해 온 사람은 누구든 이보다 더 나은 가설을 세울 수 없습니다. 진지하게 생각해 보면, 사랑의 신이라는 이 단순한 견해가 쉬운 철학이 아님을 아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능력, 즉 성장하고 진화하도록 하는 충동이 어떤 경로를 통해 신에 의해 '불어넣어졌다'고 가정한다면, 우리는 다시 그 목적이 무엇이냐고 묻게 됩니다. 왜 신은 우리가 성장하기를 원하는 걸까요? 우리는 어디를 향해 성장하고 있습니까? 진화의 도달점은 있습니까, 아니면 없습니까? 그리고 있다면 어디인가요? 진정으로 그것에 대해 생각하는 사람은 결국 아주 간단하고도 외경스러운 생각, 즉 신은 우리가 자신과 같이 되기를 원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신은 진화의 목표점입니다. 신은 진화시키는 힘의 원천인 동시에 우리의 운명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은 알파이며 오메가, 즉 시작과 끝이라고 할 때의 의미입니다.
오랜 세월 동안 우리는 순전히 외경스러움 때문에 이 관념을 회피해 왔습니다. 이 관념은 다른 어느 생각보다도 우리에게 무거운 짐을 짊어지게 합니다. 이것은 인류 역사 가운데 가장 단순하면서도 가장 많은 것을 요구하는 관념인 것입니다. 그러니 인간이 신이 될 가능성을 믿는 것을 외면하는 것은 그리 놀랄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 관념을 믿는다면 우리는 자기 개선과 영적 성장을 위해 수고롭고 지루한 일을 죽을 때까지 계속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무가 우리 자신의 의무로 편입되는 것입니다. 한편, 하나님은 우리가 성장하여 자신과 같이 되도록 능동적으로 우리를 돕고 있다는 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