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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 샐러리맨의 그리스, 터키 문화기행

이만우 지음 | 성천문화재단
셀축에서 7킬로미터쯤 떨어진 부르부르산 속에 있는 '성모 마리아의 집' 앞에는 한글로 씌어진 게시판도 있었다. 우리 나라의 성지순례자들이 많은 탓에 배려한 때문인 듯싶다. 1878년 독일 수녀 에메리히가 꿈속에서 받은 계시를 기록함으로써 알려진 곳이다. 자기 고장을 한 번도 떠난 적이 없던 수녀의 기록이 1891년 발굴단에 의해 입증되자 세계는 떠들썩했다. 1961년 로마교황 23세가 성모 마리아의 집 위치에 관한 분쟁을 종식시키고 이곳을 성지로 공식 선포하여 오늘에 이른다.이스탄불의 아타튀르크 공항을 이룩한 여객기는 에게 해 연안을 따라 한 시간 남짓 날아가서 그리스 북부의 관문인 테살로니키에 도착했다. 테살로니키는 아테네 다음가는 그리스 제2의 도시로서 일명 북 그리스의 수도라고 불리기도 하는 인구 150만 명의 항구 도시이다. 고대 마케도니아 시대의 수도인데다가 비잔틴 시대에는 콘스탄티노플 다음 가는 제2도시이기도 해서 당시의 예술품과 유적이 많이 남아 있다. 테살로니키의 상징물인 화이트 타워 공원의 탑은 15세기에 베네치아인들이 세운 방벽의 일부로 높이가 약 30미터 정도 되는 원통형이며 18세기에는 터키의 감옥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공원 한 가운데에는 알렉산더 대왕의 기마상이 있다. 앞발을 치켜든 말 위에 걸터앉아 오른손에 칼을 빼어든 모습은 정복자의 늠름한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주기에 조금도 모자람이 없었다.디온은 올림포스 산기슭에 있는 고대 그리스 올림포스 신앙의 성지라고 할 수 있는 곳이다. 지금의 유적은 대부분 로마 시대의 것이지만 개중에는 고대 마케도니아 시대의 무덤과 아스클레피오스, 데메케르, 디오니소스, 이시스 신 등의 신전 터로 보이는 유적도 있어 현재 발굴이 진행 중이다. 알렉산더 대왕의 동방원정군은 정복지에서 차출된 병사로 구성되어 있었으므로 이들의 사기를 북돋기 위해 신성한 종교적 권위가 절실히 요구되었다. 그래서 디온에 원정군을 집합시켜 전쟁의 승리를 올림포스 신들께 비는 종교적 축전을 벌였다고 했다. 기후를 관장하는 제우스 신이 사는 곳이어서 그런지 올림포스 산기슭은 그리스의 다른 지역에서 볼 수 없을 만큼 푸르른 나무숲이 들어서 있어서 매우 쾌적한 곳이었다.아테네는 고대 그리스의 영광을 한눈에 보여주는 도시이다. 그러나 아크로폴리스, 아고라 등 각종 신전을 비롯한 역사 유적들을 보기 위해 고대문명과 신화에 대한 막연한 꿈과 기대를 품고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현재의 아테네 모습에 실망하기 쉽다. 아테네의 황금 시기는 B.C. 5세기경이었다. B.C. 477년에 결성된 델로스 동맹의 맹주가 되고, 그 후 B.C. 431년 스파르타와 최후의 결전에서 패배할 때까지 세계 문화 사상 최고의 황금기를 구가했다.



파르테논 신전도 이 시기(B.C. 447∼432)에 건설되었다. 스파르타에 이은 알렉산더의 마케도니아 제국의 치세를 거쳐 아테네는 마침내 B.C. 146년 로마의 식민지로 전락하였다. 로마의 지배 하에서도 교육, 문화의 중심지로 명맥을 유지하였으나, A.D. 1453년 콘스탄티노플이 오스만 투르크에 의해 함락된 이후부터 아테네는 평범한 작은 촌락으로 변모해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아테네는 새롭게 변모하고 있었고 그 배후에는 긴 역사와 찬란한 문화가 큰 버팀이 되고 있다. 아테네의 국립고고학박물관에는 그 버팀의 면면을 확인할 수 있는 찬란한 유적들이 있다.코린토스는 아테네에서 서쪽으로 약 80킬로미터 떨어진 곳으로, 거기에는 고대 그리스 시대에 아테네와 바다의 제해권을 다툴 만큼 강성한 도시국가가 존재했다. "모든 배가 코린토스로 가는 것은 아니다."라는 속담이 있는데, 모든 사람이 똑같이 운이 좋은 것이 아니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즉, 당시 사람들이 풍요와 환락의 도시인 코린토스를 매우 동경하였기 때문에 그런 말이 나온 것이다. B.C. 4세기경 상가 지역이었던 아고라의 광장에는 연단 비슷한 것이 서 있다. 로마 시대 총독이 연설이나 재판을 했던 곳으로, 이곳에서 사도 바울이 유대인들의 고소로 당시 갈리오 총독의 재판을 받기도 했던 곳이다. 총독은 바울에게 "너희들의 명칭, 언어, 습관에 관한 것이면 나는 상관하지 않겠다. 나는 재판하지 않을 것이니 너희들 마음대로 하라."는 판결을 내렸고, 그 결과 사도 바울이 전도활동을 할 수 있게 되어 이 지역의 전도에 성공함으로써 성경의 코린도 전서와 후서가 나오게 되었다고 한다.

고대 코린도스가 사치와 환락의 도시였던 만큼 이곳에는 많은 창녀들이 살았는데 그 중에서도 신전의 여사제가 당시 최고의 몸값을 받는 창녀였다고 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남자를 골라 관계를 맺지만 그러면서도 엄청난 몸값을 받았다고 했다. 창녀에 관련하여 재미있는 말이 많았지만 오래 오래 기억에 남는 말은 "등잔불을 끄면 모든 여자는 닮았다."라는 말이다.아테네 이스탄불 기내제2부 터키 문화탐방보스포루스 해협은 북쪽으로는 러시아 남부로 이어지는 흑해와, 남쪽으로는 터키의 내해인 마르마라 해를 거쳐 지중해와 합류하고 있다. 이스탄불 시민의 약 70퍼센트가 거주하는 그 동쪽의 주거지역과 이스탄불 신시가 지역인 서쪽을 잇는 지정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해협이다. 보스포루스 해협은 터키를 중심으로 흑해 넘어 러시아와 발칸반도의 그리스, 불가리아 그리고 아랍의 시리아, 이라크 등 여러 나라와 인접하여 이해관계가 상충되는 민감한 지역으로서 정치, 종교적으로 대립과 갈등이 끊이지 않았던 피로 얼룩진 무대이건만 지금 내 눈에는 바닷물이 그저 푸르고 평화롭게 비칠 뿐이니 그것은 나 자신이 그저 한 나그네이기 때문이었을까.



이스탄불 관광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톱 카프 궁전으로 갔다. 톱 카프 궁전은 70만 제곱미터나 되는 광대한 궁전 겸 요새로 15세기부터 약 400년 동안 오스만 투르크가 사용하던 곳이다. 현존하는 세계의 궁전 중 가장 크고 오래 되었을 뿐 아니라 궁전의 소장보물을 팔면 터키 6,500만 국민이 45년간 먹고 살 재산이 된다고 한다. 나는 톱 카프 궁전을 나와 길 건너에 있는 또 하나의 경이인 아야소피아 박물관에서 기독교와 이슬람의 묘한 동거를 확인할 수 있었다.



아야소피아는 기독교를 공인한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A.D. 4세기 경 세웠는데, 1세기 뒤에 지진과 폭동 등으로 소멸되었다. 그 뒤 유스티아누스 황제가 A.D. 532년에 석조로 복원한 것이 지금의 아야소피아이다. 이 건물은 높이가 56미터에 이르며 내부는 기둥 하나 없이 공간을 넓게 쓸 수 있도록 만들어져 이후 유럽의 각종 건축양식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지진의 진동을 흡수할 수 있는 특수한 구조여서 지금까지 건재하고 있는 가장 오래된 기독교 성당 건물이기도 하다.



돔과 벽면을 장식한 다양한 종류의 대리석과 모자이크 벽화의 섬세함 등이 찬란했던 비잔틴 문화를 상징하는 유적임을 증언하고 있다. 세계 8대 불가사의로 꼽히는 아야소피아는 오스만 투르크에 의해 함락되면서 이슬람 사원으로 개조되어 약 500년간 모스크로 사용되는 진기한 기록을 갖는다. 이슬람 사원으로 개조되면서 성서의 장면들이 그려진 벽화들이 회로 덧칠되었지만 아직도 모자이크 벽화들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것은 이슬람과 기독교가 유일신교이자 사촌쯤 되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하게 한다.해발 3000미터의 파르나소스 산기슭에 이르렀을 때는 비가 그쳤으나 안개가 자욱이 끼어 시계가 흐렸다. 파란 하늘에 녹색의 덩어리처럼 우뚝 솟은 이 산의 정상은 타락한 인간들을 벌주기 위해 제우스 신이 대홍수를 일으켰을 때, 아버지 프로메테우스의 충고에 따라 비상식량과 물자를 싣고 표류하던 데우칼리온과 퓌라의 배가 닿은 곳이다. 델피의 유적은 깎아지른 듯한 벼랑으로 이루어진 바로 이 산의 중턱에 자리 잡고 있다. 그대 그리스인들은 델피(델포이)가 하늘과 땅, 지하세계가 하나의 축을 이루며 만나는 우주의 배꼽에 해당되는 장소라고 믿고, 신탁을 내리는 신전 내 금단구역에 우주의 배꼽을 조각하여 안치하였다. 그 이후로 B.C. 14세기 미케네 시대부터 신탁을 받는 성소가 되었다.

아폴론은 신탁소를 세우기 위하여 여러 곳을 물색하던 중 파르나소스 산 중턱에 있는 이곳을 발견했다. 아폴론은 당시 샘에 살며 사람을 해치던 퓌톤이라는 큰 뱀을 제거하고 신전을 세웠는데, 그 후 그리스뿐만 아니라 이집트, 리디아와 소아시아의 여러 나라에서도 신탁을 받기 위해 찾아오는 종교의 중심지가 되었다. 신전은 폐허가 된 채 주춧돌과 몇 개의 계단, 기둥만 남아있었지만, 그 터로 보아 신전의 규모가 상당히 웅장했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었다.



델피는 선사시대부터 종교의례의 중심지였다. 즉, 아폴론이 퓌톤이라는 큰 뱀을 화살로 쏘아 죽이고 이곳을 차지했다는 것은, 대지의 모신인 가이아를 받드는 뱀을 숭상하는 원시 토템신앙의 중심지로부터, 예언을 주관하는 아폴론을 받드는 올림포스 신앙의 성지로 바뀌어 신탁이 행해지는 성지가 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따라서 델피는 도시국가가 아니며, 오로지 신탁과 그에 관련된 종교의례만이 행해졌던 곳이다.신화여행의 마지막 스케줄에 크레타 섬을 넣은 이유는 에게 해 문명의 원조인 미노아 문명의 발상지였기 때문이다. 그곳에서는 신화 속의 이야기가 역사적 사실로 입증되는 유적 발굴이 현재 진행 중이기 때문에 그 현장을 답사한다는 것이 첫째 이유이고, 둘째로는 그리스의 대문호 카잔차키스의 생가와 무덤이 있기 때문이었다.



'미노아'라는 말은 에번스 경이 신화에 등장하는 크레타 섬의 '미노스 왕'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미노아 문명은 B.C. 2600년부터 B.C. 1100년까지 약 1.500년이 넘는 기간에 유지된 문명으로 B.C. 18세기부터 B.C. 16세기에 걸쳐 가장 번성했다고 한다. 신화에 나오는 미노스 왕은 한 번 들어가면 두 번 다시 찾아 나올 수 없는 미궁을 만들어 미노타우로스라는 괴물을 가두어 두었다고 하는데. 그것이 바로 그 크노소스 미궁이 아닌가 싶었다. 궁전 유적지는 다른 왕궁에 비해 매우 밝고 개방적인 느낌을 주었는데 아마도 성벽이 전혀 없고 지중해의 유난히 따사로운 햇빛 때문인 것 같았다. 크노소스 궁전의 상징은 그리스어로 '라비스'라고 불리는 쌍날 도끼와 황소의 뿔인데 궁전의 지하에 '라비린토스(쌍날 도끼의 집)'라 불리는 미로가 있기 때문이었다.우리에게 잘 알려진 『그리스인 조르바』의 작가 카잔차키스의 생가는 이라클리온에서 남쪽으로 10킬로미터 떨어진 시골에 있다. 마을 입구에서 좁을 골목길을 걸어서 들어가니 맞은 편에 양옥 한 채가 있고 벽에 카잔차키스의 얼굴이 부조된 안내판이 있었다. 그곳이 생가였지만 안내인도 없고 문은 잠겨있을 뿐이어서 대문호의 생가치고는 황량하기 그지없었다. 에게 해와 아리클리온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 옛 성채 터에 자리 잡고 있는 카잔차키스의 무덤은 묘역이 공원으로 꾸며져 생가와는 달리 주변이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대리석 묘비에는 그리스어로 다음과 같은 말이 새겨져 있었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

나는 자유롭다공항에서 비행기를 기다리는 시간은 일견 무료했지만 나름대로 여행을 정리할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 인간은 스스로 인간으로서의 한계를 인식하고 초인적인 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오만을 떨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이 그리스 신화의 밑바닥에 기본적으로 깔려 있다는 말에 수긍한다. 아무리 지혜로운 인간이라도 신 앞에서는 겸손해야 하거늘 자칫 제 분수를 잊고 신에 버금가는 권능이나 행복을 바라며 잔꾀를 부리면 신이 그대로 두지 않는다는 내용의 여러 설화들이 시사하는 바를 깊이 음미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 신화라는 관문을 통해 우리의 전통신화를 바로 알고, 그럼으로써 우리의 뿌리와 전통사상을 제대로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스 신화에 대한 나의 관심을 우리의 전통신화에 대한 사랑으로 연결시킬 수만 있다면 이번 그리스 신화 여행은 매우 큰 의미를 지니게 되리라고 믿는다.에페스 유적(잘 정비된 에게 해 연안의 최대 유적지)트로이의 유적(신화가 역사적 사실임을 말해주는 현장)다르다넬스 해협(못다 핀 꽃다운 청춘이 잠든 슬픈 바다)'칸카르데쉬' 터키'높은 곳에 있는 도시'라는 뜻의 아크로폴리스는 역사유적의 보물이 가득 찬 곳이다. 고대인들은 신을 숭배하고 가까이 다가가기 위하여 높은 곳, 즉 아크로폴리스에 신전을 짓고 제사를 올렸다. 따라서 고대 제정일치의 신정시대에는 신전이 있는 곳이 바로 정치, 군사의 중심지가 되어 외적을 방어하는 요새가 되기도 했다. 현재의 아크로폴리스는 B.C. 5세기경 아테네의 위대한 정치가 페리클리스에 의해 재건된 것인데, 페르시아전쟁 승리 후의 이 시기가 아테네의 전성기이며 그리스 사람들은 창조성과 자유정신을 최고도로 발휘하여 인류 역사상 최고의 걸작품들을 남겨 놓았다.



그리스 로마의 유적은 유럽 각지에 헤아릴 수 없이 많지만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만큼 깊은 감명을 주는 곳은 흔치 않다. 해발 150미터, 시가지 평지에서 70미터 높이의 전망이 확 트인 바위산 위에 세워진 여러 건축물들 가운데에서도 특히 파르테논 신전은 고대 그리스인의 자유정신과 창조성이 응축되어 표현된 불후의 명작이다. '순결한 처녀의 것'이란 뜻의 파르테논 신전은 B.C. 447년에 착공하여 B.C. 432년에 완성되었다. 파르테논 신전은 도합 46개의 기둥이 지붕을 떠받치고 있는 건물이다. 기둥의 높이가 약 10미터, 아랫부분의 지름이 약 2미터나 되는 거대하고 수많은 기둥 때문에 매우 웅장해 보인다. 파르테논 신전은 인간의 착시현상을 보정하기 위해 기둥을 배흘림 처리하거나 기둥을 안쪽으로 약간 기울어지게 세움으로써 17.5킬로미터 상공에서 한 점으로 모이게 하는 등 매우 과학적인 기법이 많이 응용되었다. 가로, 세로의 기둥이 각각 8개와 17개씩인 것도 고대 그리스인들이 'n : 2n+1'의 비율일 때 황금분할을 얻을 수 있다는 수리사상을 표현한 것으로서, 신전 건축 전반에 걸쳐 적용되었던 원칙이 잘 나타나 있다.서울에서 앙카라까지 약 9,100킬로미터의 거리를 무려 15시간에 걸쳐 날았다. 맨 처음 찾은 곳은 세계 7대 박물관으로 꼽히는 아나톨리아 문명박물관이었다. 박물관에는 고대 히타이트 제국의 여러 지역에서 발굴된 출토품과 문서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히타이트 인들은 역사상 처음으로 철기를 발명하여 사용한 민족으로 핫투샤스를 수도로 하여 대제국을 건설하였고 B.C. 1700년경에는 시리아까지 진출하기도 했으나 외침과 내분으로 잠시 쇠퇴했다가 B.C. 1500년경 다시 일어나 이집트와 세력을 다툴 만큼 강력한 제국을 건설했다. 히타이트 시대 이후 프리기아, 우랄토우, 이오니아, 비잔티 등 여러 시대를 거치면서 아나톨리아에는 많은 문명이 자취를 남겼다.이슬람 문화권에서는 청결을 매우 중요시하여 '하맘'이라는 목욕탕이 일찍부터 발전했다. 터키에서는 수백 년 동안 이어져 내려온 하맘을 발견하기란 어렵지 않은 일이다. 탈의실에서 가운을 벗고 수영복을 착용한 다음 큰 타월로 온 몸을 감고 욕실로 들어갔다. 욕실 한가운데에는 욕조 대신 넓은 팔각형의 대리석 탁자가 놓여있다. 이슬람 세계에서는 고여 있는 물은 죽은 물이라 생각해서 욕조에 물을 담아 몸을 씻지 않는다. 따라서 욕조란 없다. 욕실 안은 증기가 가득 차서 얼른 사람을 분간하기 어려웠다. 하맘에는 '케세지'라는 때밀이와 마사지사가 따로 있는데, 한국에서처럼 여성만 있는 것이 아니고 남성 고객에게는 남성, 여성 고객에게는 여성이 때를 밀고 마사지를 해주는 점이 다르다고 했다.뮈라는 기독교에서 성인으로 추앙받는 성 니콜라우스의 성지이다. 그는 서기 270년경 이 지역의 파타라라는 곳에서 태어나 서기 300년경 뮈라의 주교가 되었는데, 그때부터 많은 선행과 기적을 행하여 성인으로 추앙받게 되었다. 성 니콜라우스는 오늘날 러시아와 그리스에서는 국가의 수호신으로 추앙되는 한편 그가 행한 기적이나 선행과 연계시켜 항해, 상업, 학문, 그리고 어린이의 수호신으로도 추앙된다. 특이한 것은 그를 산타클로스의 원조로 보는 것이었다. 가난한 집의 딸에게 지참금에 해당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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