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or는 doctor
스에나가 타미오 지음 | 예경
제1부 색은 말한다
빨강에너지를 극도로 고조시키는 빨강은 아름답다. 그러나 그 아름다움, 격렬함은 죽음 직전까지 끌고 가는 마력을 가지고 있다. 안데르센의 『빨간 구두』는 그런 공포가 가득한 빨강의 이미지를 남기는 동화였다. 분명히 빨강은 고대부터 세계 각지의 축제나 주술의 의식 속에서 마술적인 힘을 가진 색으로 쓰여져 왔다. 신사(神社)의 새집이나, 나무로 된 울타리나 문제 강렬한 주홍색이 칠해져 있는 것도 그런 이유다. 그리스도교에서 붉은 포도주는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의 피를 의미하며, 또 불교에서는 고승이 될수록 승복이 빨갛다. 또 영어의 레드(red)는 '악마'의 의미를 포함한다. 빨강은 인간의 심층심리에서 선악을 초월한 강렬한 힘의 원천으로 하나의 상징성을 가진 색이다. 그러므로 『빨간 구두』 또한 많은 사람의 무의식 속에서 '빨강=앙양(昻揚)'이란 상으로 연결되는 것이다.
그것뿐만 아니라 이 이야기는 우리들의 일상생활 속에서 반복되어 표출된다. 빨간 구두, 빨간 손 등. 나는 아틀리에에서 어린이들이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에너지를 발산하는 부분을 빨간 색으로 칠하는 것을 자주 목격해왔다. 그 중에는 전신을 빨간 색으로 감싸버린 아이도 있었다. 일곱 살의 남자아이 M군은 어린이 아틀리에에 온 이후 태풍처럼 아틀리에를 휘젓고 다녔는데, 어느 날 종이에 빨간 색 크레파스 하나를 다 쓸 정도로 그림을 그렸다. 그 후 M군은 전보다 더 집중해서 창작에 임하게 되었다. 그는 솟아나는 감정의 격렬함을 빨간 색 속에 방출하는 환희를 듬뿍 맛보았음이 틀림없다. 이러한 그의 표현 충동은 학교에서의 짧은 공작 시간과 주어진 과제 속에 닫혀져 정체되어 있었던 것이다.
만약 여자가 빨간 드레스를 입고 있다면, 몸 전체에서 힘찬 정열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카르멘처럼 말이다. 최근 내가 본 <카르멘>은 스페인의 안토니오 가데스 무용단의 무대였다. 가데스가 연기하는 '돈 호세'와 크리스티나 오요스가 춤추는 '카르멘'은 대립되는 에너지를 가지고 있었다. 돈 호세의 정적 에너지와 카르멘의 동적 에너지가 만나 무대의 에너지를 상승시키고 있었다. 돈 호세의 의상은 하얀색과 검정뿐인 모노크롬이었고 카르멘의 의상은 빨간 색이었다. 카르멘의 생과 성의 에너지는 호세의 마음에 불을 붙인다. 남성에 종속되지 않는 카르멘의 자유로움이 남성을 어두운 베일 속에서 끄집어내어 그 권위를 태워버린다.
가시 색채 중에서 가장 긴 파장인 빨강은 생의 앙양(昻揚)과 더불어 빛을 발하는 색이다. 광기처럼 타들어가 큰 강물처럼 흘러 생성해 가는 생(生)의 색이다.
파랑파랑은 다른 어느 색보다도 다양한 인간의 마음을 나타낼 수 있는 폭이 넓다. 밝고 환한 하늘색에서 짙고 가라앉는 느낌의 남색에 이르기까지 파랑의 변화는 풍부하다. 그리고 그 변화는 인간 감정 변화의 복잡한 과정과 연관이 있다.
벗어날 듯한 하늘색, 스카이블루라고 한다면 희망이나 적극성과 연결된다. 또 엷은 파랑이면 베이비블루라는 말처럼 유아복을 떠오르게 하며 부드럽고 따뜻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초록이 약간 섞인 듯한 진한 파랑은 마린블루라고 불리며 깊은 바다 색이기도 하고 정화나 진정의 의미를 갖는다. 일반적으로 군청색이라고 불리는 파랑 속에는 옅은 초록에서 남색에 이르기까지 미묘한 단계가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군청색이라면 남색에 가까운 파랑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으며, 옛날부터 작업복이나 제복에 사용해 온 색을 예로 들 수 있다. 군청색 그 자체의 파랑이 집중력을 높여주기 때문이다.
파리에 있는 피카소 미술관의 제1전시실에 들어가면, 화면 전체에 파도처럼 힘 있는 파란색이 칠해진, 양감이 풍부한 작품이 첫눈에 들어온다. 1901년 피카소가 스무 살에 그린 <자화상>이다. 이 파란 자화상은 '청색시대'의 막을 연 작품이다. 피카소는 왜 파랑부터 시작했을까? 피카소가 파랑을 추구한 이유는 무엇보다 자신의 내면에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푸는 열쇠는 이 <자화상>이 그려지기 일 년 전, 19세의 피카소가 자신의 인생에서 최초로 겪은 큰 슬픔이라고 할 수 있다. 바르셀로나에서 같은 뜻을 품고 파리로 온 화가 카를로스 카사헤마스가 자살을 한 것이다. 피할 수 없는 인간의 죽음과 젊은 나이에 인생과 맞선 피카소가 다시 파리로 돌아온 때에는 고독의 의미를 깊게 생각하고 있었다. 인간의 마음이 보다 깊이 내면으로 향할 때 나타나는 색, 그것이 파랑이다. 그리하여 피카소는 고독한 사람들의 고뇌를 날카롭게 느끼고 그 모습을 파랑으로 캔버스에 정착시켰다.
빨강이 에너지를 발산하는 색이라면 상대적으로 파랑은 구심적이고 억제적인 색이다. 많은 아동화를 심리적인 면에서 연구한 최초의 연구자, 알슈라와 하트위크 두 사람은 파랑의 의미를 '외부의 규제를 받아들이려는 순응성'이라고 보고 있다. 또 융 학파의 치료전문가 크리스티안 루츠는 파랑을 '냉정·자족'의 상징으로 봤다. 내가 한 조사에서는 형제가 태어나면서 고독을 알기 시작한 어린이나 초등학교나 중학교의 입학 시기 등 새로운 집단에 적응하지 않으면 안 되는 때에 어린이들이 평소 이상으로 파랑을 좋아하는 것이 눈에 띈다. 그리고 이러한 파랑도 상황에 대한 자발적인 순응일 때는 투명하게 나타나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더욱 어둡게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보라'색채연구'라는 것에 공죄(功罪)가 있다면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보라색의 '전설'에 관해 사람들이 보이는 '병적인 색'이라는 반응이다. 그 계기는 색채심리학이나 아동화의 연구였다. 한편으로 심리학적인 근거가 있다 하더라도 이런 도식이 정착해 있다면 보라를 사용한 자기 표현 또한 제한될 수밖에 없다. 색채분석 이전에 왜 인간은 보라에 이끌리는지를 생각할 필요가 있다.
인간의 몸은 끊임없이 물결친다. 그 파장에 동조하는 것처럼 우리들의 색채감각은 몸의 활동이 줄어들면 보라색으로 반응한다. 왜일까? 우리가 '색채'라고 말하는 것은 태양이 가진 빛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의 눈에 보이는 빨강에서 보라는 700∼400나노미터의 파장을 가진 빛이다. 그 파장을 넘어서면 적외선 또는 자외선이 되어 인간의 눈에는 보이지 않게 된다. 어느 특정의 색을 '아름답다'든가 '좋다'고 느끼는 것은 우리들의 몸과 마음이 그 순간 그 색의 파장을 필요로 하며 동조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당연히 우리들의 몸과 마음이 항상 변해가는 것처럼 아름답다라고 느끼는 색도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해간다.
가장 짧은 파장의 보라는 우리들의 몸과 마음을 치유하는 효과를 가지고 있다. 예를 들면 보라색의 400나노미터의 파장은 세포 안의 광회복효소(光回復酵素)를 자극해서 DNA와 RNA의 손상을 수복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므로 사람은 몸과 마음의 활동이 저하될 때나 아플 때 보라색을 아름답게 느끼며, 그 색을 선택하는 게 아닐까. 보라를 통해서 보급된 에너지는 몸의 구석구석 세포에 전해진다. 활동력의 파장이 다시금 상승하기 위한 독으로서다.
하양과 검정공백의 마음, 이를테면 무위의 상태를 상징하는 하얀색. 반대로 모든 정념을 응축한 것과 같은 유위(有爲)의 마음을 감춘 검정. 명암이 있더라도 이 둘은 궁극의 색이다. 미술작품으로 하얀색과 검정이라고 한다면 피카소의 <게르니카>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1937년 당시 피카소는 파리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고국 스페인에서 게르니카 시민이 무차별 폭격을 당한 것을 안 피카소는 울분 속에서 겨우 1개월 만에 대작 <게르니카>를 모노크롬으로 그렸다고 한다.
그 이전에도 많은 화가들이 전쟁 반대 메시지를 담은 그림을 그려왔다. 그러나 <게르니카>는 단순히 전쟁을 반대하는 그림이 아니다. <게르니카>에는 전쟁에 대한 비판도 공격도 직접 그려져 있지 않다. 오직 한탄과 절규만이 있다. 왜 모노크롬이냐는 질문에 피카소는 이렇게 대답했다. "색채는 구제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피카소는 이 그림에서만은 구제를 거절하려고 했던 것이다.
피카소는 사랑하는 스페인이 파괴될 때 자신 속에 있는 야심이나 구제하려는 욕망을 지워버렸다. 결국 그는 색채를 버리고 캔버스로 향했다. <게르니카>는 피카소 개인의 작품만은 아니다. 그 그림은 인류의 파괴성을 인간 스스로가 있는 그대로 지켜보는 '눈'이다.
제2부 색을 느낀다
몸에 맞는 색 이야기불면증에는 '보라, 등나무꽃 색', 식욕부진에는 '초록, 주황', 우울증에는 '주황, 노랑', 기침에는 '파랑, 녹색'이 맞는다. 이것은 병을 '색으로 분석'한 데이터가 아니다. 실제 치료약의 캡슐 색채데이터이다. 지금 색채심리는 의료분야에서도 주목하고 있다. 예를 들면 병원의 약국에서 받은 진정제가 검은 색이었다면 고통은 나을 것 같지가 않다. 역시 파랑이나 초록 등 자연을 연상시키는 색이 심리적으로 도움을 줄 것이다.
캡슐 색에 대한 데이터는 색채심리 테스트에서 알려진 룩사 박사의 연구를 바탕으로 한다. 그의 테스트법의 특징은 단순히 말한다면 좋아하는 색에 대한 반응이 아니라 싫어하는 색에 대한 반응에 따라 진단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강박증 환자가 보편적으로 싫어하는 색은 파랑, 초록, 빨강, 노랑 순이다. 반대로 말한다면 파랑이나 초록에 비해 빨강과 노랑의 두 가지 색은 상대적으로 수용하기 쉬운 색인 것이다. 그래서 강박증 환자가 복용하는 캡슐에는 빨강과 노랑이 적합하다고 진단한다. 어떤 병을 가진 환자가 심리적으로 싫어하는 색채를 캡슐로 사용하는 것은 치료효과를 떨어뜨린다. 이러한 방법으로 '혈압강하제는 밝은 갈색', '비타민제는 빨강, 초록', '항비타민제는 노랑, 파랑', '항균 및 소독제는 터키블루, 파랑' 등의 구성을 제안하고 있다.
인간의 피부색은 몸 상태뿐만 아니라 감정의 변화에 따라서도 변한다. 글자 그대로 '빨갛게 되어 화를 내고', '공포에 파랗게 질린'다. 이것은 마음의 움직임에 따라 실제로 혈류에 변화가 생기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얼굴색을 읽는다'라는 말을 기억한다. 피부색뿐만 아니다. 머리카락의 색, 눈동자의 색, 더욱이 다양한 내장의 색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생체가 지닌 색채는 매우 풍부하다.
이러한 몸의 색깔이 실은 건강을 추구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해보자. '광선치료'라는 말을 들어보았을 것이다. 이것은 탄소에 전류를 통해서 태양광선에 가까운 가시광선을 발생시키는 기기로 환부에 광선을 비춘다. 왜 광선을 쐬면 회복이 빨라지는 것일까? 내장의 색은 광선(자연계에서는 태양관선) 중에서 그 장기에만 필요로 하는 광선에너지를 흡수하는 데에 효과를 발휘한다. 예를 들면 간장의 짙은 분홍색은 짙은 분홍색의 파장을 반사해 그 이외 다른 파장의 광선을 흡수하는 성질이 있다. 즉 하나하나의 색이 스스로 필터 역할을 하는 것이다.
물론 피부색도 인체를 위한 광선에너지를 조절해주고 있다. 지구의 남쪽으로 갈수록 인류의 피부색이 황색에서 검은색으로 짙어지는 것도 그 이유이다. 검은 피부는 태양의 열사에너지를 피부층에서 흡수해 내장을 지키고 있다. 병 때문에 피부색이 변하는 것도 바깥에서 오는 광선의 흡수파장을 조절해 자연히 치유효과를 높인다. 예를 들어 타박상이나 내출혈에 따라 피부가 어두운 보라색으로 변할 때 짧은 파장의 보라색뿐만 아니라 색광파장 전체를 적극적으로 흡수하려는 현상이 나타난다. 그 결과 환부의 자연 치유력을 촉진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인간은 몸의 색깔로 일종의 끊임없는 광합성을 한다고 할 수 있다.
스포츠웨어에는 왜 빨강과 파랑이 많은가?코카콜라의 빨강과 하얀색 로고, 맥도날드의 노란색 'M' 등 도심에 한 걸음 발을 들여 놓으면 상점의 간판이나 기업의 광고탑 등 형형색색의 마크나 문자들이 눈에 들어온다. 그 중에서도 최근에 특히 눈에 띄기 시작한 것이 기업의 심벌마크다. 기업 자체의 통일된 이미지를 어필하는 이러한 방법은 'CI(Corporate Identity) 계획'이라고 불린다. 이 심벌마크에 사용되는 색채에 대한 자료가 있다. 다음은 <동양 인기 뉴스>가 일본 기업 46사를 대상으로 CI색에 대해 조사한 내용이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놀랄 만한 결과가 나왔습니다. 빨강이라고 대답한 회사는 46사 중 16사로 약 35퍼센트, 파랑은 14사로 약간 적기는 하지만 30퍼센트. 빨강과 파랑 두 가 지 색깔을 병용한 것이 의외로 많은 약 15퍼센트. 이것을 합치면 조사한 회사의 약 80퍼 센트가 빨강과 파랑을 코퍼레이트 컬러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 됩니다.
일본 기업의 CI뿐만 아니라 펩시나 버드와이저 맥주도 그렇다. 광고 장면뿐만이 아니다. 프로 복싱에서는 코너 그 자체가 홍코너, 청코너라 불린다. 색채 연구가인 알슈라 등은 빨강의 의미는 '강한 자기 주장', 파랑의 의미는 '외부의 규범'이라고 말한다. 스포츠 그 자체의 게임성, 즉 '규칙 속의 자기주장'이라는 면에서 '빨강·파랑'이 자주 눈에 띄는 것은 당연할지도 모르나 스포츠웨어나 유니폼에는 실로 이 배색이 많다. 이렇게 보면 '빨강·파랑'은 '자기주장'의 강렬함이나 '대항심리'와 결부되어 나타나는 때가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인간이 대항하는 것은 스포츠나 비즈니스만은 물론 아니다.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에서도 유사한 장면이 발생한다. 국가의 시각적인 심벌마크, 내셔널 아이덴테티라 하면 우선 국기가 떠오른다. '빨강·파랑'을 메인 컬러로 사용하고 있는 나라로는 미국의 성조기, 영국의 유니언 잭, 프랑스의 삼색기가 있으며, 네덜란드의 국기, 아일랜드의 십자 마크 또한 그러하다. 한국, 북한도 '빨강·파랑'의 배색을 사용한다. 타이, 미얀마, 필리핀도 마찬가지이며, 쿠바, 칠레, 도미니카 공화국 등도 마찬가지다. 국경이 있는 한 숙명적이라고도 할 수 있을 만큼 국가와 국가는 대항하면서도 공존하지 않으면 안 된다. '빨강·파랑'의 국기 디자인은 '자기주장'과 '협조성'의 양면을 반영한다.
세계 속 녹색정치의 물결'녹색파'라는 말은 주로 자연보호운동을 나타내는 경우가 많다. 지금까지 정치적인 색채를 띄지 않았던 시민운동 '녹색파'가 요즘 들어 정치 무대에 끌어올려지고 있다. 물론 그것이 '붉은 깃발'이나 '검은 깃발' 등으로 상징되는 정치 이데올로기적인 것은 아니다. 지금 지구상에서 일어나는 자멸을 향한 폭주가 멈추기를 바라는 사람들의 위기감이 '녹색파'의 지지층을 늘려가고 있다.
1983년 서독의 연방선거에서 200만 명이 '녹색당'에 투표하여 27명의 신의회 정당이 탄생, 세계를 놀라게 한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일본의 즈시 시의 '녹색파'의 주민운동에 관여하는 사람들도 사회적인 입장이나 직업상의 이해관계, 인생의 가치관 등에는 각각 차이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자연과 어린이들을 지키는 모임' 등을 중심으로 '녹색'이라는 공통의 단어 아래 환경을 지키려 하고 있다. 결국 자신의 생활 거점을 각자 개인, 가족, 일이라는 틀을 넘어, 국가가 아닌 생명권 쪽으로 확대한 것이다. 내가 녹색운동에 기존의 정치운동과 다른 질적인 차이를 느끼는 것은 다름 아닌 이러한 개방된 스타일이다.
자연 생태계 그 자체에 국경은 없다. 실제로 소련의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사고 발생 수일 후에는 일본인의 모유나 야채들에서 고농도의 방사능이 검출되었다. '녹색파'의 대두는 지금 우리의 정치가 그 틀을 넓혀야 할 시기에 와 있다는 것을 상징한다. 녹색은 인간의 색채 중에서도 중용의 색깔이다. 안정과 재생의, 생의 호메오타시스가 '녹색파'의 색이다. 정치의 장에 마르크스나 간디 또는 히틀러와 같은 사상적 리더의 이름을 대신해서 '녹색'이 출현한 것은 우리가 또다른 새로운 위기 속에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녹색 정치의 조류는 우파도 좌파도 아니며, 한 종류로서 인간 재생의 꿈틀거림을 확고히 정치에 더해가고 있는 것이다.
제3부 색을 살린다
컬러 워크숍에서 자기를 발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