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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딩, 나의 인생에 후회가 있다

후지이 가오루 지음 | 글담
엔딩, 나의 인생에 후회가 있다

후지이 가오루 지음/윤선미 옮김

글담/2003년 2월/224쪽/8,800원



조지 거슈인 - 아메리카 음악을 만들어 낸 천재 음악가, 자만심에 빠져 자멸하다

1898년 뉴욕에서 출생/1919년 <스와니>로 일약 인기 작곡가가 됨/1924년 <랩소디 인 블루> 작곡/1928년 <파리의 아메리카인> 작곡/1931년 뮤지컬 <그대를 위해 부르리>로 퓰리처 상 수상/1934년 오페라 <포기와 베스> 작곡/1937년 7월 11일 사망

아메리카 음악을 만들어 낸 불량소년

조지 거슈인은 <랩소디 인 블루>나 뮤지컬 영화 <파리의 아메리카인> 같은 재즈 리듬이 들어간 새로운 음악을 창조한 작곡가이다. 그는 유태계 러시아 이민가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한때 불량소년이었지만 12살 때 피아노를 배우고 나서부터 갑자기 음악의 천재가 되었다. 1924년, 거슈인은 명곡 <랩소디 인 블루>를 탄생시킴으로써 미국 전역에 이름을 알렸다. 재즈의 리듬과 블루스의 선율을 클래식 음악의 짜임새에 적용시키는 것은 ‘정통파’ 작곡가들이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다. 그러나 거슈인은 그것을 훌륭히 소화함으로써 클래식 음악 세계에 혁명을 가져왔다. 그리고 흑인음악과 클래식 음악을 섞은 소위 ‘아메리카 음악’이라고 하는 새로운 장르를 만들어냈다.

돈도 명예도 얻었다, 그런데 왜 불행하지?

1931년 뮤지컬 <그대를 위해 부르리> 이후 그의 음악은 실패의 연속이었다. 1934년에 완성한 오페라 <포기와 베스>는 그 주제가 흑인 문제였다는 것 때문에 당시 혹평을 받았다. 그때까지의 인생에서 좌절이라는 것을 몰랐던 거슈인은 심한 충격에 빠져 완전히 좌절하고 말았다. 게다가 그의 주위에는 재기에 도움이 될 만한 친구조차 없었다. 그것은 그의 오만하고 자기 중심적인 성격 때문이기도 했다. 그는 친한 친구에게조차도 “나는 천재이고 너는 범인이다.”라는 식의 대화밖에 할 줄 몰랐다.

여성에 대한 태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기본적으로 여성을 인생의 반려자가 아니라 욕망의 대상으로밖에 보지 않았다. 그런 그가 생애 마지막으로 사랑한 여성은 이미 남의 부인이 된 사람이었다. 거슈인이 사랑한 여배우 폴레트 고다르는 채플린의 세 번째 부인으로 화려한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여성이었다. 이렇게 해서 그는 연애에 있어서도 좌절을 맛보게 되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거슈인은 더욱더 심한 두통에 시달렸다. 그에게 찾아온 뇌종양이라고 하는 엄청난 질병 때문이었다. 근육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게 되자 연주 생활도 엉망진창이 되었다. 1937년 7월 9일 밤, 거슈인은 집에서 혼수상태에 빠져 병원으로 옮겨졌다. 곧바로 이어진 수술은 실패했고 금세기 최대의 천재 작곡가는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

* message to you : 젊었을 때부터 천재라는 명성을 얻어 자만심에 빠져 주위를 업신여겼던 거슈인. 그의 말년은 새로운 음악에 대한 평가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비참하게 끝났다. 그야말로 “자만은 예술의 막다른 길‘이라는 말을 되뇌이게 한다.



오스카 와일드 - 동성애자로 쓸쓸히 죽어간 행복한 왕자

1854년 더블린에서 출생/1891년 『도리어 그레이의 초상』집필/1893년 희곡 <살로메> 집필/1895년 동성애 사건으로 재판/1900년 11월 30알 파리에서 병사

『행복한 왕자』를 지은 행복한 작가

누구나 한 번쯤은 『행복한 왕자』라는 동화를 읽은 적이 있을 것이다. 행복한 왕자 조각상이 제비에게 시켜서 가난한 자들에게 자신의 눈이나 옷의 보석, 황금을 벗겨서 주게 한다. 이윽고 제비는 왕자의 발 밑에서 죽고 조각상도 초라한 모습으로 해체되지만 둘은 함께 신의 곁으로 간다는 내용이다. 이 작품의 바로 오스카 와일드다. 19세기말 영국은 빅토리아 왕조의 예술이 꽃을 피운 시대이다. 그 중에서 와일드는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등 세기말을 대표하는 퇴폐적인 작품을 차례로 발표하였다.

동성애에 빠진 인기 작가

인기 작가가 된 오스카 와일드는 기발한 언동으로 유명했다. 그는 의도적으로 빅토리아 왕조의 도덕에서 일탈하고, 자연으로부터 벗어난 인공적인 삶, 퇴폐적인 길을 걸어가고자 했다. 1891년 와일드의 인생을 뒤죽박죽으로 만든 사건이 일어났다. 바로 버지라는 애칭으로 불렸던 알프레드 더글라스 경과의 만남이었다. 36세의 와일드는 이 미청년과 동성애 관계에 빠지게 되었다. 빅토리아 왕조 시대는 적어도 공적으로는 성도덕이 지극히 엄격했다. 동성애라는 것은 파렴치한 범죄로 취급받았다. 두 사람의 사회규범에 어긋난 행동은 세상에 알려졌고 와일드는 사교계로부터 공공연하게 따돌림을 받게 되었다. 그래도 와일드는 생활을 바꾸려고 하지 않았다. 와일드는 자신이 쓴 걸작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의 주인공처럼 나락의 밑바닥으로 완전히 가라앉아 버렸던 것이다. 결국 버지의 아버지가 그들의 ‘동성애를 고발’하기에 이르렀다. 사람들은 와일드의 패배를 크게 기뻐했다고 한다.

방랑과 방탕의 끝, 싸구려 숙소에서 쓸쓸히 죽다

얼마 전까지 인기 작가였던 와일드는 출옥한 후에는 무일푼에다가 부끄러운 추문의 주인공일 뿐이었다. 그는 영국 어디에서도 받아들여지지 못해 할 수 없이 프랑스로 이주했다. 그리고 과거와 결별하기 위해 그는 죽을 때까지 ‘세바스티안 멜모스’라는 가명을 사용했다. 그가 부자였을 때 친구들에게 후한 인심을 썼던 것이 그나마 다행한 일이었다. 일시적이나마 최소한 살아가는 데 필요한 돈을 친구들이 조금씩 도와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와일드는 그 돈을 생활하는 데 쓴 것이 아니라 술과 쾌락에 허비함으로써 문제가 되었다. 와일드는 가정의 안정을 찾기를 원했지만 그것은 다시 손에 넣을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아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와일드는 살아갈 희망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그리고 마침내 와일드는 두통에 시달리게 되었다. 젊었을 때 걸렸던 매독이 이제 뇌에 침범하여 신경을 건드리기 시작했다. 결국 종양이 귀에서 뇌로 진전되어 자주 현기증을 일으키는 등 여러 가지 합병증이 생겼다. 1900년 11월 30일 와일드는 싸구려 숙소에서 쓸쓸하게 숨을 거두었다.

* message to you : 세기말의 시대에 금기의 관계에 깊이 빠져든 것이 오스카 와일드의 최대 불행이었다. 자유를 추구하며 일반 사람들의 이중적 의식을 경시한 그였지만 사람들 역시 너무 앞서간 이단자를 용서하지 않았다.



마릴린 먼로 - 진정한 배우가 되고 싶었던 섹스 심벌

1926년 로스엔젤레스에서 출생/1942년 첫 결혼/1952년 나체 포스터가 화제가 됨/1954년 조 디마지오와 결혼/1956년 아서 밀러와 결혼/1962년 8월 4일 사망

진정한 배우가 되고 싶었던 섹스 심벌

“화려한 모습으로 진지하게, 드라마틱한 역할을 해내고 싶었습니다.” ‘아메리카의 섹스 심벌’로 알려져 있을 때 마릴린 먼로는 「뉴욕 타임즈」와의 인터뷰에서 이와 같이 말했다. 그녀는 단순히 섹시함이 특기인 여배우는 아니었던 것이다.

마릴린 먼로의 본명은 노마진이었다. 그녀는 친척집과 고아원을 전전하며 불행하고 외롭게 성장했다. 그녀의 어머니는 7살 때 정신병원에 들어갔다. 그녀는 16살 때 처음으로 결혼했지만 4년 뒤 이혼한 후 배우가 되기로 결심하고 ‘마릴린 먼로’라는 예명을 지었다. 1951년 일개 삼류배우에 불과했던 그녀는 그해 가장 매력적인 ‘핀업 걸(pinup-girl:벽에 꽂아놓는 미인 사진)’로 선정되어 은막의 섹스 심벌로 대성공을 거두었다.

그녀는 사생활에서 스캔들이 끊이지 않았다. 이러한 모습들이 모두 마릴린 먼로의 지명도를 높인 것이지만 그와 동시에 ‘육감적인 여배우’라는 틀에서 벗어날 수 없게 만들었다. 또한 진정한 배우가 되고 싶었던 마릴린 먼로는 스타가 된 후에도 연기를 전문적으로 공부하는 등 열심히 노력했다. 하지만 이런 이상과 현실과의 거리는 ‘세계의 애인’을 계속 고민에 빠뜨렸다.

불안과 고독이 그녀를 죽이다

마릴린 먼로는 은막에서의 화려한 생활과 자신을 둘러싼 수많은 소문 속에서 정신적인 고통을 겪었다. 그녀가 처음으로 정신과 의사를 찾은 것은 1954년이라고 한다. 그 당시 마릴린 먼로를 진찰한 프로이트의 딸 안나는 이렇게 진단했다. “현실에 대한 불안, 극심한 정신불안, 극도의 자살 공포가 있다.” 그녀가 죽던 해에는 여배우로서의 생활을 계속 해나가는 것조차 어렵게 되었다. 어머니 쪽의 가족 중에 정신병력의 피가 흐르고 있는 것도 그녀의 노이로제에 영향을 주었다. 외조부는 부전마비성 치매로, 외조모는 정신병원에서 사망했다. 그리고 어머니도 정신병원에 입원한 채였다. 마릴린 먼로는 언제 자신도 그런 운명으로 떨어질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죽기 직전 마릴린 먼로의 사회성은 거의 붕괴되어 있었다. 그녀는 낡은 목욕 가운만 걸치고 방안을 돌아다니며 계속 술과 약물을 마셔댔다. 그런데 그녀가 집착한 것은 단 한 가지, 사람들에게 전화를 거는 것이었다. 죽기 며칠 전에도 마릴린 먼로는 평상시보다 더욱 많은 사람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누군가 자신이 깊은 수렁에 빠진 것을 알아차리고 도와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이다. 1962년 8월 4일 그녀는 자신의 방 침대 위에서 홀로 죽어 있었다.

* message to you : 마릴린 먼로는 진정한 여배우로 인정받지 못한 것을 괴로워했다. ‘사람들이 뭐라고 해도 나는 나의 길을 간다’라고 생각하고 마음을 비울 수 있는 강인함이 있었다면 그녀의 인생은 훨씬 달라지지 않았을까?



카렌 카펜터 - 마르고 싶다는 욕망이 부른 죽음의 노래

1950년 3월 2일 출생/1969년 오빠 리차드와 카펜터즈 결성/1974년 다이어트 시작/1983년 2월 4일 사망

마르고 싶다는 욕망이 부른 죽음의 노래

<슈퍼스타>, <예스터데이 원스 모어>, <비오는 날과 월요일은> 등등 연달아 히트곡을 발표하던 카펜터즈의 보컬, 카렌 카펜터의 갑작스런 죽음은 음악계와 그녀의 열성팬 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카렌의 사인(死因)이 소위 ‘거식증(拒食症)’이었기 때문이다. 카렌은 날이 갈수록 말라갔지만 설마 그것이 정신적 장애에 의한 것이라고는 주위 사람들도 생각하지 못했다. 카렌이 ‘거식증’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은 물론 그 병명 자체가 당시에는 아직 사람들에게 인식되어 있지 않았다. 하지만 카렌의 애처로운 죽음을 계기로 처음으로 ‘거식증’의 존재와 그 심각성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노래가 히트할수록 더욱 커지는 강박관념

거식증이 생기는 여성은 대부분 의지력과 결의가 필요 이상으로 강하다고 한다. 이것은 분명 일을 진행할 때 한편으로는 장점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자신의 체형을 유지하는’ 일에 너무나 지나치게 집중하면 일종의 강박관념이 되어 자신을 황폐화시킬지도 모른다. 카렌은 자신의 생활에 성실하며 완고했다. 그 성실함은 그녀의 음악에 잘 나타나 있다. 그러나 리차드와 카렌은 자신들이 이유 없이 ‘착한 아이’로 취급받는 것을 참을 수 없어 했다. 언젠가 카펜터즈가 콘서트의 수익금을 암 연구센터에 기부한 적이 있었는데 닉슨 대통령이 이 사실을 알고 백악관에 초대해 그 모습이 보도되었다. “그들이야말로 미국 젊은이의 참된 모습이다.” 하지만 이것으로 인해 카펜터즈에 대한 ‘딱딱한 이미지’가 사람들에게 더욱 강하게 기억된 것은 얄궂은 일이었다.

카펜터즈가 부른 노래는 세계적으로 알려졌다. 1974년에 열린 일본 공연은 비틀즈 공연 이후 최대의 열광적인 무대였다. 이렇게 해서 카펜터즈는 1970년대를 대표하는 음악 중 하나가 되었다. 그러는 와중에 카렌의 거식증은 자신의 노래가 히트한 무대 뒤에서 더욱 심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거식증 환자가 되어 세상을 떠나다

그녀의 다이어트는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과격해져 갔다. 다이어트에 대한 강박관념이 심해지자 이젠 차려진 음식만 봐도 구역질을 해댔고 조금만 음식을 먹으면 그대로 토해버렸다. 카렌이 무대에 서면 관객들은 함성 대신 숨을 죽일 정도였다. 그녀가 해골과 같은 손을 들어 흔들면 갈비뼈가 확연히 보였다. 주위 사람들은 카렌의 결혼을 서둘렀다. 결혼생활과 아이에게 관심이 옮겨지면 체형만을 신경쓰는 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얼마 후 결혼은 파탄이 나고 카렌은 이전보다 더 심각한 거식증 환자가 되었다. 1983년 2월 결국 그녀는 ‘거식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 message to you : 용모에 대한 카렌의 자격지심은 무분별한 다이어트를 하게 했고 결국은 그녀를 죽음으로까지 몰고 갔다. 누구보다 아름다운 목소리를 지녔지만 자신의 장점은 무시한 채 겉모습에만 매달렸던 카렌. 거식증 환자가 되어 무서울 정도로 마른 몸매를 갖게 되었을 때 그녀는 행복했을까?



알폰소 카포네 - 매독으로 무너진 마피아 보스

1899년 이탈리아 나폴리에서 출생/1927년 ‘성 발렌타인 데이 대학살’ 일으킴/1932년 탈세 혐의로 체포됨/1947년 1월 25일 사망

금주법과 갱(gang)들의 시대

1920년대는 금주법과 함께 막이 올랐다. 이런 시대에 암흑가에서 막강한 실력으로 군림한 남자, 알폰소 카포네가 있었다. 그의 라이벌이나 상업상의 경쟁자, 배신자들은 모두 알 카포네에 의해 차례로 제거되었다. 사법당국, 연방수사국, 금주당국도 모두 카포네에게 매수되어 있었다. 그러나 1932년 알 카포네는 살인죄도 금주법 위반도 아닌 탈세 혐의로 체포되었다. 겁 없는 알 카포네의 생명을 빼앗은 것은 살인청부업자도 법률제도도 아니었다. 그를 죽도록 따라다닌 것은 매독이라는 지독한 병이었다.

피투성이가 된 경력

이탈리아 나폴리에서 태어난 카포네는 미국으로 이주, 뉴욕 빈민가 어두운 뒷골목에서 성장했다. 어린 시절부터 유명한 갱단인 ‘파이브 포인트 갱단’의 일원이었고 21살 때 시카고로 이주해 본격적인 갱스터가 되었다. 1920년 미국에는 금주법이 제정되었다. 금주법이란 술의 ‘제조, 판매, 수송’은 금하지만 ‘음주’ 자체는 금하지 않는 이상한 법률이었다. 금주법이 제정된다는 이야기를 듣고 알 카포네 일당들은 오히려 기뻐했다. 시카고는 압도적으로 금주법을 반대하는 지방이어서 술을 필요로 하는 시장은 충분했다. 여기에 비합법화된 술을 암거래로 팔아먹으면 확실하게 돈을 벌 수 있었다. 이때 이탈리아 마피아 알 카포네에게 반기를 든 최대의 라이벌은 아일랜드계의 오베니언과 그 일당들이었다. 암흑가의 단독 제왕이 된 카포네는 잔혹한 방법을 동원하여 오베니언 일족을 근절시켰다. 그 유명한 ‘성 발렌타인 데이의 대학살’이 클라이맥스였다. 알 카포네가 연간 1억 달러 이상을 벌여들였다고 하는 소문도 나돌았다.

암흑가의 제왕도 이기지 못한 병

알 카포네는 살인죄가 아닌 탈세 혐의로 11년의 금고형을 받았을 때도 아직 인기가 있었다. 그러나 매독은 그를 한꺼번에 파멸로 몰아넣었다. 이윽고 암흑가의 제왕은 모범수로 출소했다. 알 카포네는 마이애미 비치 근처에서 은둔 생활을 했다. 병은 날이 갈수록 조금씩 더 진행되어 망상이 심해졌다. 의식은 자꾸 몽롱해지고 말씨도 불분명해졌다. 어찌된 일인지 그의 막대한 재산도 바닥이 나고 가족들은 살기 위해 할 수 없이 일하러 나가야 했다.1947년 1월 25알 알 카포네는 48세로 사망했다. 알 카포네라는 갱스터를 만들어냈던 금주법은 1933년, 그가 체포된 다음 해에 폐지되었다. 그의 전성기는 금주법과 함께 시작되어 금주법과 함께 끝이 났다고 할 수 있다.

* message to you : 매독은 현대로 말하자면 에이즈에 해당된다. 음란한 성생활은 개인의 지위와 명예뿐만 아니라 소중한 생명까지 빼앗아가고, 사랑하는 가족들에게도 커다란 고통을 안겨준다. 누구든지 정돈되지 못한 문란한 생활은 곧 파멸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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