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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드 차이나

권삼윤 지음 | 북로드
가(家)의 역사가 중시되는 곳에선 효(孝) 또한 숭상된다. 그리고 효하면 먼저 공자가 떠오른다. 예를 통해 가의 질서와 함께 조상에 대한 제사의 의미를 확립했기 때문이다. 공자의 고향 취푸를 찾았던 날은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다. 다행히 다음 날은 맑았다. 호텔에서 공묘(孔廟)까지는 그리 멀지 않아 걷기로 했다. 공표 앞은 이른 아침인데도 이미 몇 대의 관광버스가 사람들을 풀어 놓아 북적댔다. 공묘는 장엄하기 그지없다. 이렇다 할 높은 벼슬에 오른 적도 없는 공자의 사당을 이처럼 꾸며놓은 까닭은 무엇일까? 중국에는 전지전능한 신이나 내세에서의 구원 대신 평범한 인간이 노력해서 신에 버금가는 성인이 되고, 그런 성인이 주도한 '인간의 역사'만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자기연마, 자기절제를 강조한 공자와 같은 선지가가 없었다면 중국은 지금보다 더 많은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다. 자기연마나 자기절제는 어떠한 어려움도 견뎌내고, 물질에 대한 욕망을 다스릴 수 있는 내면의 힘을 기르는 작업이므로 쓸데없는 일에 힘을 탕진하지 않도록 한다. '세계 4대 고대문명'의 하나이지만 메소포타미아, 고대 이집트, 인더스 문명은 지상에서 모습을 감춘 지 2,000년이 넘었다. 그러나 중국에서 일어난 황하문명은 지금까지 살아 있다. 나는 그 이유가 '내 안의 힘'으로 자기 세계를 구축한 결과라고 생각한다.



취푸 관람을 마친 나는 타이안(泰山)으로 가는 마이크로버스에 몸을 실었다. 1시간 반을 달려 닿은 타이안은 어수선했다. 태산 입구로 가는 버스는 시내를 관통해 한참을 달렸다. 태산은 입구에서부터 돌계단이다. 그 길을 따라 한참을 걸으면 매표소가 나온다. 청나라 때의 요내란 이름의 문인은 "태산 45리 산길은 모두 돌로 쌓아 계단을 만들었는데, 그 계단수가 7,000여 개(정확하게는 7,412개)나 된다."고 했다. 이게 있어 태산은 망가지지 않고 지금까지 잘 보존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산에는 돌계단이 없어서인지 이곳저곳에 길이 생겨나 산이 쉬 망가지는데 자연보호라는 점에서는 중국은 우리보다 한 수 위라는 생각이 들었다. 돌계단은 맨땅보다 오르기 더 힘들다. 그런데 태산에선 그게 끝없이 이어진다. 한참을 걷다보니 케이블카 타는 곳에 이르렀다. 태산에선 극히 소수의 사람만이 케이블카를 이용할 뿐이다.



갑자기 가파른 계단이 나타났다. 하늘에 오르는 사다리란 뜻으로 천제(天梯)라 부르는 곳이었다. 대신 길의 폭은 넓었다. 고개를 드니 붉은색 벽에 검은 기와를 이고 있는 남천문(南天門)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정상은 멀지 않은 듯 했다. 태산의 입구에 들어설 때만 해도 하늘이 맑았는데 남천문에 이르니 짙은 안개가 앞을 가린다. 또 날씨는 왜 그리도 추운지, 문제는 강풍이었다. 날씨로 인해 정상인 옥황정(玉皇頂)에 오르지는 못했지만 이것 하나만은 깨우쳤다. "유대인들에게 시나이 산이 있다면 중국인들에게는 태산이 있다."는 것을.參 인간의 덕은 하늘의 계략을 앞선다 - 청뚜시안시 린동현 시양촌. 가뭄이 한창 심했던 1974년 여름, 옥수수 밭에 물을 대기 위해 우물을 파던 한 농부의 곡괭이 끝에 무언가 이상한 것이 걸렸다. 당겨보니 조그만 도용이었다. 도용이란 흙을 구워서 사람 형상으로 만든 인형 같은 것으로, 이를 본 농부가 행정당국에 달려가 이 사실을 알렸다. 그게 계기가 되어 지금의 병마용 갱이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중국문화재 당국이 발굴 사실을 발표하자 세계의 언론들도 앞을 다투어 '이집트의 투탕카멘 왕묘의 발굴에 버금가는 고고학적 대사건'이라며 대서특필했다. 병사와 말, 전차, 무기 등이 한두 개도 아니고 무려 7,000여 체나 발굴되었고, 길이 230미터, 너비 62미터나 되는 넓은 공간 안에 전투대형을 갖춘 듯 줄을 맞춰 서 있는 병사들. 더욱 놀라운 사실은 그 많은 병사들의 표정과 복장, 머리 모양이 모두 제각각이라는 사실이었다.

이 병마용 갱을 만든 사람은 진시황이다. 중국 대륙이 여러 개의 나라로 나뉜 채 서로 치고 박고 하던 260년 간에 걸친 전국시대를 마감하고 중국 역사상 처음으로 천하를 통일하여 중국인들에게 처음으로 '하나의 중국'이라는 의식을 심어준 진시황. 그는 전국을 통일한 후 36개 군으로 나누어 통치하는 군현제, 대대적인 법률 정비, 도량형·월력·문자 등의 통일을 이루는 업적을 남겼다. 반면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수없이 많은 백성들을 노력에 동원함으로써 그동안 이룩한 업적만큼의 원성도 샀다. 시황제는 수백 명의 유생을 구덩이에 생매장했고, 욕심이 많았던 만큼 호사도 좋아해 70만 명의 인력을 동원하여 도도히 흐르는 웨이수이 남쪽에 동서 500보(700미터), 남북 50장(120미터) 규모로 1만 명을 한꺼번에 수용할 수 있는 대규모 황궁인 아방궁을 세웠다. 황제는 이 아방궁에서 자신의 소재를 비밀에 붙인 채 수많은 후궁과 미녀들에 둘러싸여 지냈다. 밤마다 새로운 상대를 찾았지만 그 수가 워낙 많아 죽을 때까지 그 모두를 상대하지 못했다고 전하는 아방궁은 향락과 욕망, 사치의 상징적 장소라 해도 무방했다.



예로부터 중국에는 "민심을 얻으면, 천하를 얻고, 민심을 잃으면, 천하도 잃는다."는 말이 있다. 진시황이 재위 37년, 50세가 되던 기원전 210년에 세상을 떠나자, 통일을 이룬 직후부터 서서히 나타났던 제국의 패망 조짐이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다. 천하를 두루 평안하게 하기 위해서는 통일이 필요하다며 많은 사람을 희생시켰지만 막상 통일이 달성되자 내세웠던 대의를 헌신짝처럼 내던진 결과였다. 이때 대의란 '민심과 함께'란 뜻이다. 난을 일으킨 진승·오광 등은 백성들에게 이렇게 호소했다. "온 천하 백성들은 포악한 진나라의 정치에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고 있다. 진나라가 망하는 것은 진나라가 자초한 일이지, 천하가 멸망시킨 것은 아니다."



진나라의 패망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비단 이 문제가 진만의 문제일까? 아니다. 시대에 상관없이, 백성을 위한다는 대의가 자신의 안락을 위한 수단으로 바뀌는 순간, 멸망의 길을 걷게 된다는 것을 통일왕국 진나라의 역사가 증명해 준 것이다.중국 서남부 분지의 한가운데 있는 쓰촨은 북으로는 황토 고원을 등지고 서쪽으로 칭장 고원에 의지하며, 남쪽으로 원꾸이 고원과 마주하고 동으로는 산과 구릉지대와 맞닿아 있다. 쓰촨은 겉으로 보기엔 도저히 잘 살 것 같지가 않은데도 '천부지국(天府之國)'이라 불리는 등 풍요의 땅이 되었다. 물론 그렇게 된 데에는 그만한 까닭이 있다. 지금으로부터 2,200년 전인 전국시대, 촉(당시 쓰촨 일대의 이름)의 태수 이빙, 이이랑 부자가 물살이 빠른 민강의 물줄기를 바꿔 토사가 흘러드는 것을 막고 수량을 조절하기 위해 관개 수로와 둑을 쌓고 그 물을 끌어들여 농토를 만드는 대치수 사업인 '도언강' 공사를 벌였기 때문이다. 그 현장은 최근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 리스트에 올라 찾는 사람이 크게 늘었다.



민강의 수리사업을 벌인 이빙 부자 이후 이곳 촉의 땅이 중국 역사의 전면에 다시 등장한 것은 『삼국지연의』에도 잘 나타나 있듯이 제갈량(161∼223)의 진언에 따라 유비가 청뚜를 촉한의 왕도로 삼으면서부터였다. 그런데 유비에 대해서는 의아한 점이 있다. 8척 거구의 표범 같은 머리, 번뜩이는 눈, 호랑이 같은 수염에다 우레와 같은 목소리의 장비, 9척의 키에 수염이 2자나 되는 데다 얼굴이 봉황의 눈에, 누에가 누운 듯한 짙은 눈썹을 가진 관우, 그에 비해 양팔을 뻗으면 무릎까지 내려오는 예사롭지 않은 체형의 유비가 의형제 중 맏형이 되고, 제갈량 등 수많은 사람이 유비를 따른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그것은 중국인들이 예로부터 비체제적 성격이 강한 의협을 선호했기 때문이다. 즉, 중국인들은 기계적인 제도가 아니라 인간적인 덕으로 사회가 운용되는 걸 선호해왔다. 덕이란 계산을 초월하는 가치이자 세계이다. 계산의 세계에선 1+1은 2가 되지만 덕의 세계에선 10도 되고 100도 될 수 있다. 유비의 덕은 그가 개울에서 노인을 두 번이나 업어 건네 준 일화로도 확인된다. 노인의 태도는 어떻게 보면 억지였지만, 유비는 그가 원하는 대로 싫은 내색 한번 하지 않고 두 번이나 개울을 건넜다.



유비는 사람들에게 이렇듯 덕을 베풀었다. 나무가 크면 큰 그늘이 생겨 많은 사람들이 그 아래서 쉴 수 있다. 그릇이 크면 많은 것을 담을 수 있다. 사람은 덕이 있는 자에게 모여들게 되어 있다. 유비는 개인적으로 변변치 못한 인물인데도 불구하고, 이 가공할 만한 자산을 가졌기에 멤버들끼리 강한 결속력을 지니게 되었고, 스스로 알아서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찾아 하는 자발성을 끌어낼 수 있던 것이다.상하이는 중국의 경제 수도다. 한 명의 상하이 사람이 다섯 명의 중국인을 먹여 살린다고 하니 결코 허튼 소리는 아니다. 중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787달러에 불과하지만 상하이는 무려 3,702달러나 된다. 상하이 발전에 일대 전기를 마련해 준 인물은 덩샤오핑이다.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는 저 유명한 흑묘백묘론을 주창하는 등 실용주의 노선을 걸었던 덩샤오핑은 인민들의 생활 수준을 끌어올리는 것을 정책의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돈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돈 그 자체는 도덕적 판단의 대상이 될 수도 없다. 따지고 보면 중국인들만큼 실용적이고, 그래서 돈을 좋아하는 민족은 달리 없다. 오죽하면 '상인종(商人種)'이란 말까지 듣겠는가. 1949년, 중국 대륙은 공산당의 수중으로 넘어갔다. 그 결과 시장경제는 무시되고 경제구조는 평균배분 방식으로 전환되었다. 돈을 삶의 최고가치로 삼았던 중국인들은 졸지에 돈 벌 기회를 잃고 말았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가 가져다준 것은 궁핍뿐이라는 참기 어려운 고통이었다. 마오쩌둥은 이 같은 모순을 감추고자 홍위병을 동원하여 문화대혁명을 일으켰다.



하지만 덩샤오핑은 마오쩌둥과 달랐다. 이념 투쟁으로 피폐할 대로 피폐해진 중국인들의 삶에 새로운 기운을 북돋으려 했다. 그리하여 그 스스로 "부자 되세요!"라고 외쳤고, 그것을 실현할 수 있는 제도와 사회적 인프라를 구축하기 위해 노력했다. '신중국의 총설계사' 덩샤오핑의 이런 노력에 힘입어 중국인들은 비로소 '상인종 DNA'를 되찾게 되었다.



중국인들은 돈 버는 것을 파차이(發財)라 한다. 그래서 '꽁시 파차이', 즉 '돈 많이 벌라'는 말은 정초에 나누는 최고의 덕담이기도 하다. 중국인들의 상술 중 으뜸으로 치는 것은 '박리다매', 즉 이문을 적게 남기면서 많이 파는 것이다. 장사는 이문을 남기는 것이 목적이다. 자본주의 체제의 첨병이라 할 수 있는 기업도 자신의 존재 이유를 이윤의 창출에 둔다. 그렇다면 중국인들은 왜 이런 상식을 무시하고 적은 이문에 만족하는 걸까.



큰 이문을 얻고자 가격을 올리면 한동안은 재미를 보겠지만 그런 상태는 오래 가지 못한다. 이윤 폭이 커지면 새로운 경쟁자가 시장에 진입할 것이고 그들이 덤핑 공세를 펴기라도 하면 그때까지 누리던 우월한 지위는 단번에 흔들릴 수도 있다. '한탕'이나 '대박'을 노린다면 몰라도 평생, 나아가 자손 대대로 그 일을 가업으로 물려줄 생각이라면 그럴 수가 없는 것이다. 박리다매라고 하면 경쟁 때문에 손해를 봐가며 물건을 파는 것으로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중국인들은 그런 짓은 절대 하지 않는다. 밑지는 장사란 곧 본전을 까먹는 것이므로 그럴 바에야 아예 문을 닫고 만다. 이 점에서 그들은 "어쨌거나 공장은 돌려야 할 것 아니냐."며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밑지는 장사라도 하려고 하는 우리의 정서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흥정이 없는 거래가 어디 있으랴만, 중국인들의 흥정은 좀 특이하다. 사는 자와 파는 자가 벌이는 흥정이 지구력 게임이라는 것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 여기서도 승패를 가르는 것은 스피드가 아니라 인내력이다. 그들의 인내력은 전쟁과 천재지변, 포악한 정치를 견디며 장구한 세월에 걸쳐 담금질된 것이라 따를 민족이 없다. 그러니 그들과 거래할 때에는 덤비지 말아야 한다. 조급하게 덤빌수록 그들은 한 발짝 더 뒤로 물러선다. 이처럼 인간의 내면적인 힘을 동원할 줄 알았기에 중국인들은 장사를 단지 물건을 사고파는 행위로만 이해하지 않는다. 사람과 사람의 만남으로 보는 것이다. 장사의 요체는 사람이며 중국 상술의 한 특징인 '가족경영 방식'과 '관계(꽌씨) 중시 태도'는 이와 결코 무관하지 않다.장사는 혼자 할 수 없다. 큰 장사일수록 더욱 그러하다. 사람을 끌어들여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사람이란 동업자일 수도 있고, 투자자일 수도 있으며, 원료나 자재를 공급해 주는 중간생산자일 수도 있다. 때로는 자신의 물건을 사주는 소비자가 되기도 한다. 규모가 커지면 불확실성도 그만큼 커지므로 믿고 맡길 수 있고, 거래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중국인들은 가족경영 방식을 택했다. 그래야만 거래 비용과 위험을 줄일 수 있고, 책임경영이 가능하다고 믿어서다.



꽌씨는 '이해관계를 초월하여 믿을 수 있는 관계'란 뜻이므로 가족의 범위를 확장시킨 것이라 할 수 있다. 중국인들은 인터넷을 '인특망(因特網)'이라 표기한다. 최근 중국에도 인터넷 바람이 불어 시내 곳곳에 '왕빠(網 )'라 부르는 PC방이 들어서 있고 웬만한 호텔에선 '상왕(上網 : 인터넷 접속)'이 가능하다. 왕빠에 빠진 아이들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는 부모들도 많다.



현대문명의 총아인 인터넷을 도구로 굳이 동원하지 않더라도 네트워크는 어디에나 존재한다. 일상적으로 접하는 사회 그 자체가 하나의 복잡한 네트워크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것을 제대로 볼 수 있는 눈이 있으냐, 없느냐 하는 것인데, 일찍이 꽌씨라는 인간관계의 네트워크를 구축한 중국인들은 이 점에서 발군의 실력을 발휘해 왔다.



시스템 내 상호 간의 경로를 단축시키는 '링크'나 시장의 현대적 형태라 할 수 있는 '허브' 개념 등은 인간관계에 두루 사용되었다. 사실이 이러하다면 꽌씨를 '인터넷'이라 불러도 되지 않겠는가. 꽌씨는 지역과 학교, 클럽, 결혼, 거래 등을 통해 가까워진 사람들끼리 짠 '인간 그물'이기 때문이다.

최근 우리 나라에서도 화제가 된 『상경』의 주인공 호설암은 인간관계가 금전보다 훨씬 중요하다며, "상인이 갖추어야 할 가장 중요한 능력은 사람을 제대로 쓸 줄 아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꽌씨 중시의 경영을 몸소 실천한 그는 "인간관계의 출납부가 필요하다."는 말도 했다. 손자가 『손자』에서 "남을 알고 나를 알면 어떠한 싸움에서도 지지 않는다."고 한 것만 기억한다면 사람과 사람이 만나 만들어내는 이 풍진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 '사람을 제대로 볼 줄 아는' 눈을 가져 나쁠 것은 없으리라.변화하는 중국의 모습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이 최근 10년 사이에 일어난 젊은 여성들의 변화이다. 중국을 처음 찾았던 1990년대 초만 해도 중국 여성들은 하나같이 화려함이나 세련미와는 거리가 있었다. 한마디로 수수한 인상을 풍겼던 것이다. 하지만 생각이 바뀌면 행동과 겉모습은 따라 변하게 된다. 그게 세상의 이치이다. 이제 중국에는 한 나라의 메이크업 수준을 집약적으로 보여 준다는 대형 백화점 매장의 여점원이나 자동차 전시장의 '모터 걸'뿐만 아니라 거리를 오가는 일반 여성들의 외모와 차림에도 커다란 변화가 일고 있다. 진한 아이섀도, 위로 치켜세운 선명한 눈썹, 붉게 바른 립스틱, 턱과 얼굴의 옆선을 강조한 볼 터치, 볼록한 가슴, 탄력 있는 히프, 그것도 모자라 핸드폰과 선글라스까지 가세한다. 화장만큼 몸매 가꾸기도 빠지지 않는다. 몸매 가꾸기 열풍은 무서운 속도로 여성들 사이를 파고들고 있다. 몸매 가꾸기 열풍이 비단 다이어트에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쌍꺼풀, 코 높이기, 유방 확대 등 의료 시술도 유행처럼 행해지고 있다. 이런 노력 덕분인지는 몰라도 중국 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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