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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지다 다나카

구로다 다쓰히코 지음 | 디자인하우스
9월 16일, 레이저 이온화 질량 분석계의 권위자인 미국 존스 홉킨스 대학의 로버트 코터 교수가 초대되었는데 그는 강연에서 분자량이 높은 물질을 결코 검출하지 못할 것이라고 강연했다. 그 강연을 듣고 있던 다나카는 교수가 단상에서 내려오자 질량수가 10만 정도까지 나타난 데이터를 내보였다. 놀란 코터 교수는 다나카의 데이터 사본을 받아 미국으로 가져갔고, 생체 고분자 연구에 몰두하던 메릴랜드 대학의 캐서린 펜슬로 교수에게 그 데이터를 보여 주었다. 새로운 발견을 깨달은 두 사람은 미국이나 유럽의 연구자들에게 다나카의 성과를 소개하기에 이르렀고, 결국 다나카의 이름이 전 세계로 널리 퍼져 나가게 되었던 것이다.



1987년의 그 학회에 참가했던 사람 중에는 다나카의 놀라운 연구 성과를 알아차린 또 한 사람의 연구자가 있었다. 오사카 대학의 고 마쓰오 다케키요 교수이다. 그는 다나카에게 하루 빨리 영문 학회지에 투고할 것을 권유했다. 왜냐하면 최초의 벽을 넘어선 다나카 팀은 제품화에 난항을 겪고 있었으나, 연구 발표 직후 실용화에서 먼저 돌파구를 찾은 독일 팀이 사람들의 주목을 받기에 이르렀기 때문이었다. 다나카는 곧 영어 논문을 투고했고, 한편 경쟁 관계에 있던 독일 뮌스터 대학의 미하엘 카라스 교수와 프란츠 힐렌캄프 교수도 공동 명의로 논문을 투고했다. 힐렌캄프보다 한 달 정도 늦은 다나타의 논문이 통과된 것은 힐렌 캄프 교수의 논문 안에 1987년 다나카가 학회에서 발표했던 내용이 기재되어 있었고, 특허도 1985년에 인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독일 팀은 자신들의 연구가 다나카의 발견에 기초하고 있다는 점을 공정하게 기록하였던 것이다. 독일 팀은 연구자 윤리를 준수한 것이었고, 이것이 역전 수상의 결정적 단서가 되었다.



강연 등에서 자신의 과거 실패담을 말할 때 하도 여러 차례 이야기해서, 이제는 그만의 독특한 개인기라 할 수 있을 정도가 된 말투가 있다. 예를 들어, 입사 당시 맡았던 연구 내용이 순조롭게 진척되지 않아 수상의 계기가 된 연구 방향으로 전환하게 되었을 때의 에피소드가 그것이다. “먼저 표면 분석을 하려고 했는데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다행히’도 말이지요. 그것이 만일 성공했더라면 오늘과 같은 날은 오지 않았을 겁니다.” 보통 사람이 하기 힘든 것이 바로 이 ‘다행히도’라는 사고방식이다. 연구에 늘 따르게 마련인 ‘실패’를 어떻게 받아들일까 하는 것이 그에게는 매우 중요한 일이었는데, 이는 연구자뿐만 아니라 누구에게나 적용해 볼 수 있는 중요한 사안이기도 하다. 다나카는 예전부터 강연에서 이렇게 말해 왔다.



“저는 수없는 실패를 겪었고, 그럴 때마다 의기소침해져서 이제 더 이상 쳐다보기도 싫은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왜 실패하게 됐는지 밝히지 않으면 안 됩니다. 끝까지 구명하지 않으면 같은 실패를 반복하고 맙니다. 실패는 다음 일의 실마리라는 말을 항상 스스로에게 되뇌어 왔습니다.”다나카는 10월 15일 교토에서 열린 일본 생산학회 대회 주최의 세미나에서 자사 제품의 소개를 맡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노벨상 수상 결정 후 최초의 강연이었는데, 이 설명회는 애초에 학회 참가자만을 대상으로 기획된 것이었다. 이어 개최된 일반 시민도 참가하는 특별 강연회는 앉을 자리가 없을 만큼 성황을 이루었다. 다나카는 수상 직후에 비해 어느 정도 긴장이 누그러진 상태인 듯 보였으나, 노벨상 수상자로서는 이례적인 직함이 화제였던 것을 반농담 삼아, “주임인 다나카입니다.”라고 먼저 자신을 소개했다.



2002년 노벨 화학상은 3명에게 공동 수여되었는데, 전체 대상은 ‘생체 고분자의 동정(同定) 및 구조 해석을 위한 방법 개발’이다. 다나카가 개발한 것은 현재 커다란 주목을 받고 있는 기초 연구 분야이다. 그 방면에서는 ‘기초 중의 기초 기술’이라 여겨지고 있으며, 그러한 작업이 평가받은 것은 참으로 기쁜 일이라는 목소리가 곳곳에서 들려오고 있다.



다나카는 수상 소식을 처음 접했을 때, ‘어째서 내가?’하는 생각을 했었다. 수상 대상이 된 연구는 5명의 팀원이 함께 한 것이었으므로 혼자 받아도 괜찮은 걸까 하는 느낌이 들었다. 예를 들어 코발트를 사용하는 아이디어는 다른 연구자가 특허를 받았는데, 그것이 없었더라면…. 그 밖에도 측정 회로를 개발한 사람, 계측기를 개발한 사람 등등 5명이 모이지 않았더라면 이온 측정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다나카는 “나는 이렇게 해석하고 있습니다. 모두 같이 연구해서 이런 발명을 했다. 그리고 그 성과에 대해 누군가 한 명을 선발해야 하는데, 가장 마지막까지 눈에 들어온 사람이 나였다. 그래서 내가 수상 대상이 된 것이라고 말입니다.”



다나카는 일본이나 한국에서 “분석 기술을 지닌 젊은 연구자들이 모두 기뻐하고 있다.”는 반향을 접한 뒤, 자신의 수상이 묵묵히 일하는 세상의 기술자들에게 의욕과 용기를 주었다면, 그것은 참으로 멋진 일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고 한다.



일본의 학계에서는 지금까지 기술자나 기업 연구를 한 단계 낮추어 보는 풍조가 있어 왔다. 더구나 바이오 분야에서는 대학이나 기업이 큰 차이가 없는데도 대학의 교수는 자신들이 한 수 위라고 여기는 경향이 있었는데, 이번 다나카의 수상은 그러한 생각을 불식시키는 데도 공헌했다고 할 수 있다. 바꿔 말하면 노벨상 심사 기준이 그러한 분위기를 부정하고 있음을 보여 준 것이다. 더군다나 다나카의 수상은 노벨상 역사 중 ‘이례 중의 이례’로 평가 받고 있다. 다나카처럼 박사나 석사 학위를 소지하지 않은 수상자는 처음이며, 화학상에 있어서는 세계에서도 유례 없는 일이라는 점이다. 다나카는 실로, 학력은 실력의 잣대가 될 수 없음을 보여 준 것이다.



다나카가 몇몇 우연들을 성공으로 이끌어 낸 힘은 바로 그 실력이었다. 연구자들이 하는 일이란 무수한 시행착오를 거듭하며 그것을 조사하고, 결과적으로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일들을 엄청나게 벌이며, 어디인지도 모르는 결승점을 향해 매진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나카에게 있어 1985년의 대발견은 결코 결승점이 아니었으며 어쩌면 애당초 결승점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 연구자의 길일지도 모른다. 연구자에게 있어 성공에 이르느냐 아니냐는 먼 길을 돌아가느냐 지름길을 가느냐의 차이일 뿐, 어차피 날마다 꾸준한 노력을 끝없이 해야 하는 일이라는 사실만큼은 영구불변의 진리일 것이다.

수상 후 다나카는 지난날을 돌아보며 이제까지 걸어온 길을 회상하는 일이 많아졌다. 다나카가 처음 입사할 당시, 시마즈 제작소는 기업 규모로 치면 중간쯤밖에 되지 않았다. 당시는 경기도 좋을 때여서 이른바 대기업에 취직한 학생들이 많았다. 소니의 입사 시험에서 떨어진 일에 대해 묻자, 다나카는 이렇게 대답했다. “만약 소니에 입사했더라면 지극히 뻔한 전기 개발자가 되어 아주 상식적인 일을 했을 것이고, 이번 수상 대상이 된 것과 같은 엄청난 발견을 했을 거라는 생각은 안 듭니다. 결과론이기는 하지만, 소니의 시험에 떨어져 참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다나카의 노벨상 수상에 대해, 회사는 그에 상응한 대우를 해 주어야겠다고 여겨 주임인 그를 임원으로 승진시키려는 의사를 본인에게 타진한 바 있으나, 다나카는 이를 사양했다. 어디까지나 현장에서 연구 개발을 계속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회사는 다나카에게 1,000만 엔의 특별 보상금과 연구자의 최고 지위인 ‘펠로’라는 직책을 안겼다. 이는 미국 기업들이 채용하고 있는 제도로, 급여는 임원과 동일하며 자유롭게 연구에 몰두할 수 있는 직책이다. 대우는 2계급 특진하여 부장급이지만, 업무는 지금까지 해 오던 대로 작업복을 입고 일하는 엔지니어인 것이다.



개인 사물함 앞에서 평소와 다름없이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이로써 평소 때의 제 자신으로 돌아오게 됐습니다. 양복을 입고 있으면 제가 아닌 것 같은 생각이 들거든요.” 하면서 “휴~” 하고 안도하며 일터로 향하는 다나카. 그와 같은 해에 입사한 70명의 동기 중 과반수는 관리직으로 승진해 있다.



노벨상 수상 이후 일본에서도 다나카에게 여러 상이 수상되었다. 문화훈장, 교토시 시민 영예상, 교토 특별 영예상, 현민(縣民) 영예상, 기타닛폰 신문 문화상, 바이오 인더스트리 협회 특별 명예상, 일본 이노베이터 특별상 등이며, 문화공로자로도 선발되었다. 도호쿠 대학으로부터는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받았으며, 교토 대학과 도호쿠 대학으로부터 객원 교수 초빙을 받았다.



시마즈 제작소는 ‘다나카 노벨상 기념 연구소’를 창설했다. 또한 다나카와 공동으로 연구해 온 팀 동료 4명에 대해서는 사장 특별상이 수여되었으며, 1인당 25만 엔의 상금도 지급되었다. 다나카로서는 국내 최고 영예인 문화훈장까지 받게 되어 그 기쁨이 더할 텐데, 과거 문화훈장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흥미로운 에피소드가 적지 않다.



애당초 상을 거절했다가 심경의 변화를 일으켜 결국 받아들이기로 한 ‘기인 작가’ 나가이 가후, 늘 신고 다니던 고무신 대신 구두로 갈아 신고 3등 열차를 타고 올라와 수상식에 참석한 ‘청빈한 수학자’ 오카 기요시, 노벨상과의 이중 수상을 거절한 ‘노벨 문학상의 작가’ 오에 겐자부로 등 천재 중에는 괴짜가 많은 것도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이렇듯 국민적 상을 받는 사람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때로 보통 사람들과는 동떨어진 면이 있는 듯하다. 하지만 다나카의 경우는 아내인 유코의 이야기에서도 알 수 있듯이, 굳이 보통 사람들과 다른 점을 꼽자면, ‘평소 옷차림에 거의 신경을 쓰지 않는 것’ 정도이다.



다만 다나카의 작업복에 대한 집착은 남다른 데가 있다. 작업복을 입는 자신에게서 가치를 발견하고 그것을 고수하려는 그의 의지는 어쩌면 남들에게 그리 쉽게 이해될 만한 성질의 것이 아닌지도 모른다, 그에게 있어 작업복은 바로 현장에 계속 남아 일하고 싶은 바람의 상징인 셈이다. 승진을 바라지도 않았던 다나카에 대해, 이제 아무도 그를 ‘괴짜’라고만 여기지 않는다.사람의 유전 정보를 탐구하는 게놈 해석이 거의 종료된 지금, 포스트 게놈 계획으로 주목받고 있는 연구가 바로 단백질을 총망라하여 조사하는 작업이다. 21세기 생명과학의 열쇠를 쥔 그 해석에 단백질의 질량이나 구조를 알아내는 분석계는 없어선 안 될 존재이다.



단백질은 인간의 몸 속에서 만들어진다. 그것을 만들기 위한 정보는 생명의 설계도인 유전자에 입력되어 있다. 인간의 유전자 정보는 이중 나선으로 된 DNA에 들어 있는데, 그 정보는 4종류의 물질로 이루어져 있다. 이러한 4종류의 유전 정보 중 3개가 한 조를 이루며, 여기서 아미노산이 만들어진다. 그러한 아미노산이 수백 수천 개가 이어져 단백질이 생겨난다. 유전자는 그 설계도이며 그 설계도에 따라서 단백질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다나카의 연구를 통해 만들어진 분석계가 오늘날과 같이 발달하게 된 것은 질량뿐 아니라 어떤 단백질이 어떻게 이어져 있는가 하는 구조까지 밝혀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거의 해석이 끝난 인간의 유전자 정보와 질량 분석계를 이용해서 얻은 결과를 잘 조합시켜 단백질의 아미노산 배열, 즉 구조를 결정해 가는 것이다. 다나카 팀이 개발에 나섰던 질량 분석계 기술은 “생명의 사전을 역으로 찾아볼 수 있게 한 기술”이라고도 일컬어진다. 게놈은 해독되었어도 아직 그 역할을 밝혀 내지 못한 유전자는 얼마든지 많다. 이를 단백질 쪽에서 파고들어 그 역할을 구명해 내려는 것인데, 이는 생명과학 전체에 혁명을 가져왔다고 말할 수 있을 만한 것이다. 다나카는 자신의 업적에 대해 이처럼 인간의 건강에 도움이 되고 있는 것이 무엇보다 큰 공헌이라 여기고 있다.



다나카 인생에는 연구라는 작업이 줄곧 함께 해 왔다. 그래서 현재 다나카가 가장 곤란을 겪고 있는 점은 연구에 집중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인생에서 최대 위기를 맞이하고 있다고 말할 정도이다. 질량 분석계의 세계는 경쟁이 워낙 치열해 한 달이라도 연구에서 멀어지면 불안하다.



수상을 통해 인적 네트워크는 넓어졌지만, 사실 자신의 연구 능력은 수상 전과 달라진 것이 없다. 주위의 기대와 자신의 능력 사이에 놓인 간극을 어떻게 메워 갈 것인가. 이 또한 연구를 재개했을 때 그에게 주어진 과제인 셈이다. 하지만 그는 개발하는 제품과 사용자와의 거리도 더욱 좁혀 나가겠다는 의욕으로 가득 차 있다. 생명과학에 종사하는 대학이나 기업, 공적 연구 기관의 연구자들과 서로 협력해서 새로운 분석계 개발에 도전한다는 계획이다.



“저는 엔지니어에 대해 동경과 긍지를 지니고 있습니다. 무언가 새로운 것을 생각해 내고 그것을 실제로 활용하여 금방 쓸 수 있는 것을 만들어 낸다는 것은 정말 매력적인 일입니다. 앞으로도 계속 그런 일을 해 나가고 싶습니다. 학자가 아닌 엔지니어로 살아가는 것이 제게는 가장 잘 맞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앞으로도 계속해 나가고 싶습니다.”



다나카는 보다 쉽게 질병을 진단할 수 있는 소형 분석계를 개발하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다. 가능한 한 간편하게 조작할 수 있고 데스크톱 PC 정도의 크기를 지닌 분석계를 만들어 약국이나 병원에 놓아둘 수 있다면 훨씬 많은 사람이 사용할 것이다. 이렇게 해서 의약의 질을 높이는 한편 의료비도 절감할 수 있다면 얼마나 멋진 일인가. 혈액 검사만으로도 “당신은 이런 병의 징후가 있으니, 이런 약을 드시면 됩니다.”하고 진단할 수 있는 시대가 가까운 장래에 도래할 것이다. 다나카는 이처럼 “사람의 생명을 구한다.”는 자신의 처음 뜻을 구현해 나가고 있는 것이다.



올해 마흔세 살의 다나카 고이치, 앞으로도 그는 지금까지 해 온 것처럼 “자신의 머리로 생각하고 자신의 발로 걸어다니고, 자신의 손으로 만들어 내고 싶다.”는 바람을 계속해서 간직해 갈 천생 엔지니어인 것이다.1959년 8월 3일 다나카 고이치는 도야마 현 도야마 시에서 태어났다. 현청에서 그리 멀지 않은 시 중심부에 위치한 신가와라마치는 미야모토 무사시의 소설 『반딧불이 강』의 무대가 된 ‘족제비 강’이 흐르고 목가적인 정취를 지닌 옛날 집들이 주욱 늘어선 곳이다.



다나카의 본가는 목공구 판매와 수리를 가업으로 3대째 하고 있었다. 부친 미쓰토시는 술을 즐겼으며 옛날 장인의 기질을 고스란히 간직한 분이었으므로, 늘 부지런히 일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모친인 하루에도 가게의 경리 일을 맡고 있었는데, 월말이 되면 늦게까지 야근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다나카는 미쓰토시 내외의 친아들이 아니었다. 친어머니는 산후 회복이 좋지 않아 다나카를 낳은 후 26일 만에 세상을 떠났다.



다나카를 맞아들일 때 하루에는 자신의 세 자녀를 불러 앉혀 놓고는 다나카가 새로 집에 들어왔다고 해서 삼남매의 대우가 더 나빠졌다는 불평은 하지 말 것을 아이들에게 일렀다. 다행히 삼남매 모두 다나카가 그런 사실을 조금도 눈치채지 못할 만큼 허물없이 서로 어울려 지냈으며, 다나카는 극히 평범한 사남매의 막내로 성장해 갔다. 다나카가 유년기를 보낸 1960~70대는 전후 베이비 붐과 맞물려 입시 전쟁이라는 말이 생겨났을 만큼 아이들 사이의 경쟁이 치열하던 시대였지만, 미쓰토시 부부는 억지로 공부를 시키지는 않았다. 공부도 어느 정도만 하면 그것으로 족하다고 여겼고, 다나카가 스스로 알아서 잘하고 있는 한 참견은 거의 하지 않았다.



다나카는 여름방학이면 곧잘 근처의 산과 바다로 어머니와 둘이서 식물채집을 하러 가곤 했다. 그리고 “이건 이름이 뭐예요?”하고 어머니에게 물어본 뒤, 집에 돌아오면 반드시 도감을 보고 확인했다. 다나카는 밖에서 놀기를 좋아했는데 도야마에서는 마음껏 자연을 접할 수 있었다.

톱날을 수리하는 기술을 가진 부친이 주로 한 일은 망가진 톱니들을 하나하나 줄로 갈아 다시 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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