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지다 다나카
구로다 다쓰히코 지음 | 디자인하우스
2002년 10월 9일 오후 6시 15분, 스웨덴의 왕립 과학 아카데미 담당자는 일본에 국제전화를 걸어왔다. 그가 찾는 사람은 교토에 있는 시미즈 제작소 라이프 사이언스 연구소의 다나카 고이치였다.
“당신이 다나카 고이치입니까?”“네, 그렇습니다만….”
그날도 여느 때와 다름없이 일을 마치고 슬슬 퇴근하려던 다나카는 낯선 외국인으로부터 영어로 걸려온 전화에 잠시 당황했다. 뒤이어 ‘노벨상’이라는 단어가 귀에 들어왔고, ‘컨그래처레이션!’이 이어졌으나, 그때까지도 무슨 일인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잡음이 섞여 이야기를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설마 내가 노벨상을…? 스웨덴에 그와 비슷한 상이 있나보다’라고 반신반의하면서 간신히 감사하다고만 말하고는 일단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는 몇 분 뒤, 회사 안의 전화들이 일제히 울려 대기 시작했다. TV에 나온 뉴스 속보를 본 사람들이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전화를 걸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그제야 노벨상이 그 노벨상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최초의 낭보는 그렇게 해서 다나카에게 전해지게 되었다.
1장 어딘지 조금 남다른 아이1959년 8월 3일 다나카 고이치는 도야마 현 도야마 시에서 태어났다. 현청에서 그리 멀지 않은 시 중심부에 위치한 신가와라마치는 미야모토 무사시의 소설 『반딧불이 강』의 무대가 된 ‘족제비 강’이 흐르고 목가적인 정취를 지닌 옛날 집들이 주욱 늘어선 곳이다.
다나카의 본가는 목공구 판매와 수리를 가업으로 3대째 하고 있었다. 부친 미쓰토시는 술을 즐겼으며 옛날 장인의 기질을 고스란히 간직한 분이었으므로, 늘 부지런히 일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모친인 하루에도 가게의 경리 일을 맡고 있었는데, 월말이 되면 늦게까지 야근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다나카는 미쓰토시 내외의 친아들이 아니었다. 친어머니는 산후 회복이 좋지 않아 다나카를 낳은 후 26일 만에 세상을 떠났다.
다나카를 맞아들일 때 하루에는 자신의 세 자녀를 불러 앉혀 놓고는 다나카가 새로 집에 들어왔다고 해서 삼남매의 대우가 더 나빠졌다는 불평은 하지 말 것을 아이들에게 일렀다. 다행히 삼남매 모두 다나카가 그런 사실을 조금도 눈치채지 못할 만큼 허물없이 서로 어울려 지냈으며, 다나카는 극히 평범한 사남매의 막내로 성장해 갔다. 다나카가 유년기를 보낸 1960~70대는 전후 베이비 붐과 맞물려 입시 전쟁이라는 말이 생겨났을 만큼 아이들 사이의 경쟁이 치열하던 시대였지만, 미쓰토시 부부는 억지로 공부를 시키지는 않았다. 공부도 어느 정도만 하면 그것으로 족하다고 여겼고, 다나카가 스스로 알아서 잘하고 있는 한 참견은 거의 하지 않았다.
다나카는 여름방학이면 곧잘 근처의 산과 바다로 어머니와 둘이서 식물채집을 하러 가곤 했다. 그리고 “이건 이름이 뭐예요?”하고 어머니에게 물어본 뒤, 집에 돌아오면 반드시 도감을 보고 확인했다. 다나카는 밖에서 놀기를 좋아했는데 도야마에서는 마음껏 자연을 접할 수 있었다.톱날을 수리하는 기술을 가진 부친이 주로 한 일은 망가진 톱니들을 하나하나 줄로 갈아 다시 날을 세우는, 끈기를 필요로 하는 작업이었다. 다나카는 이런 아버지의 등을 바라보면서 성장했고, 장인으로서 자신을 일을 대하는 자세를 차츰 배워갔다.
다나카는 싸움 한 번 하지 않아 울면서 집에 돌아온 적도 없고, 공부도 어쨌거나 그렇게 싫어하지 않는 듯 했다. 부모 입장에서 보면 다나카는 그야말로 손 갈 일이 없는 아이였다.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 수업이 끝나면 남자 아이들은 대부분 한데 모여 야구를 했지만 그는 거기에 끼지 않았다. 아이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그는 주위에 휩쓸리지 않는 언제나 싱글벙글 잘 웃는 아이였다. 다나카는 모험을 좋아하는 아이였지만, 한번은 누나 야스코와 함께 영화를 보고 오다가 지름길로 가려는 누나에게 “학교에서 정해 준 안전한 길로만 다녀야 한단 말이야.”하고 고집을 피우는 상당히 고지식하고 얼마쯤은 융통성 없는 면도 있었던 것 같다.
다나카는 학교에서 쉬는 시간이면 책을 읽었고, 집에서는 종이를 가지고 배나 비행기 모형을 만들었으며, 밖에 나가면 전차의 맨 앞자리에 앉아 멍하니 바깥 풍경을 바라보곤 했는데, 어쨌든 혼자서 무언가에 몰두하기를 좋아했다.
초등학교 4학년부터 6학년까지 다나카의 담임을 맡았던 분은 대학에서 화학을 전공한 선생님이었다. 다나카가 화학의 세계에 눈을 뜬 것은 고학년이 된 후의 일이다. 과학 수업 시간의 일이었다. “눈이 내리는 것 같아요!” 비커 안에 정신이 팔려 있던 고짱(고이치의 어릴적 애칭)은 그렇게 중얼거렸다. 붕산을 물에 녹인 뒤 식혔다가 다시 추출하는 실험을 하던 중에 수용액 속에 반짝 반짝 빛을 내는 흰 결정체가 떠오르는 모습을 본 것이다. 그로부터 3개월 뒤 수증기에 시험관을 드리워 물방울을 만드는 실험을 하던 중에 다나카는 또다시 작게 중얼거렸다. “어? 붕산과 똑같네.” 이전 실험과 결부시켜 고체, 액체, 기체라는 물질의 형태 변화를 직감적인 이미지로 이해한 것이다. 이러한 사고가 가능한 아이는 그리 흔치 않다. 놀라움을 감추지 않았던 담임 선생님은 그 자리에서 붕산 실험을 다시 해보이며, 다나카가 알아차린 것을 학급의 다른 아이들에게도 이해시키려고 했다.
6학년이 된 다나카는 양초가 타는 모습을 보면서 연소방식의 원리를 배운 것도 아닌데 ‘한순간 불꽃이 작아진다.’는 작은 발견을 한 적이 있고, 물을 넣은 샬레에 막대 자석을 담그고 바늘을 꽂은 부유물을 띄워 자석의 힘을 관찰하기 위한 수업 도구 제작에 고심하던 선생님에게 물보다 기름의 점성이 강하니까 바늘이 움직이는 것을 천천히 관찰할 수 있다는 의견을 내기도 했다. 당시 담임 선생님은 흥미롭게 공부할 수 있는 사이언스 매직으로 아이들의 잠들어 있던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려 했다. 그리고 이런 풍부한 발상 사례들을 한데 정리하여 더욱더 수업을 활기 있게 만들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다나카는 그 후에도 담임 선생님의 영향을 받아 과학 과목에 커다란 흥미를 느끼게 되었다.
다나카는 중학생이 되어서도 성적이 좋은 편이었지만, 그렇다고 1등은 아니고, 반에서 5, 6등 하는 천재형이 아닌 순수한 노력형이었다. 다나카가 고교 2학년이던, 어느 화학 시험 시간 때의 일이다. 시험이 끝나기 10분 전에 다나카는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나 교실을 나가려고 했다. 담임이 시간이 남았으니 그냥 있으라고 하며 책상을 내려다보니, 답안은 정확하게 작성되어 있었다. 이것은 다나카가 자기 길을 가는 타입임을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다. 그리고 얼마 후 대학의 진로에 대해 상담하는 시기를 맞아 다나카는 도호쿠 대학 공학부로 진학 의사를 밝혔다. 선생님은 처음에는 무리라고 이야기를 했다. 그것은 그를 더 분발시키려는 의도였다. 그러나 다나카는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유니크한 교수님들이 계시고, 자유로운 연구를 할 수 있는 학풍이 마음에 든다. 그리고 더 큰 도시는 수선스러워서 나한테는 맞지 않는다.”고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도호쿠 대학 합격을 목표로 공부에 박차를 가했다. 문제집에 실린 해답이 잘못되었다고 지적할 정도로, 이과 계열의 과목은 자신감이 붙어 있었다. 충분한 준비를 갖추어 대학 시험에 임했고, 마침내 단번에 합격할 수 있었다.
1978년 3월, 다나카가 도호쿠 대학에 다니기 위해 센다이 지방에서 하숙을 시작하려 할 때의 일이다. 갓난아기인 다나카를 데려와 길러 준 양어머니 하루에는 이제 다나카에게 출생의 비밀을 알려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대학에 입학하기 위한 서류 절차에서 친아들이 아니라는 것이 알려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진실을 알게 된 다나카는 “몰랐어요.”하고만 말하고는 2층 자기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다나카는 그로부터 사흘 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그리고 얼마쯤 지나자, 예전의 그로 다시 돌아왔다.
드디어 다나카가 처음으로 집을 떠나 혼자서 꾸려 가는 하숙 생활이 시작됐다. 하지만 그의 마음 한 곁에는 친어머니에 대한 생각이 무겁게 걸려 있었다. 한편 길러준 부모님께 은혜를 갚고 싶기도 했다. 어찌할 바를 모른 채로, 다나카는 마음을 돌려 스스로 무언가 한 가지 일에 파고들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리고 전기공학을 전공하여 엔지니어의 길을 모색해 보기로 최종 결정했다.
대학 시절의 다나카는 이제까지와 마찬가지로 조용히 자기 주장을 굽히지 않으며, 모든 사람과 행동을 같이하기보다는 자기만의 페이스로 혼자서 어떤 일인가에 몰두하는 편이었다. 성실했지만 두각을 나타내는 성적은 아니었으며, 과에서도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 존재였다. 그렇다고 해서 특별히 고독한 청년은 아니었으며 평범한 다른 대학생들처럼 스키 캠프에 참가하여 익살스런 표정으로 사진을 찍기도 했다.
다나카는 자신의 가설이나 실험이 옳다는 확신이 생기면 끝까지 그것을 구명해 내려는 자세를 갖고 있었다.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으며, 좋은 의미로 아주 고집스러운 데가 있는 학생이었다. 다나카가 전기공학의 세계에 흥미를 갖고 본격적으로 몰입하게 된 계기는 ‘논리정연하게 결론까지 이어지는 아름다움’에 이끌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4학년이 되자 앞날에 대해 구체적으로 생각해야 하는 시기가 찾아왔다. 연구자로 대학에 남기 위해 대학원에 진학할 생각은 별로 없었다. 그는 회사에 취직하여 자신이 만든 무엇인가가 실제로 유용하게 쓰일 수 있는 일을 하루빨리 시작하고 싶었다.
그가 가장 먼저 지원했던 회사는 소니였다. 하지만 면접에서 긴장을 한 나머지 기본 공식이 생각나지 않아 최종 단계에서 낙방하고 말았다. 낙방한 후에 연구실을 드나들며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았지만 다음 취직 자리를 결정하지 못한 채 얼마쯤은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 그를 조용히 지켜본 사람은 다나카가 1983년에 졸업하기 전에 1년 동안 지도를 맡아 주었던 연구실의 아다치 사부로(현재 도호쿠 대학의 명예교수)였다. 다나카는 어느 날 혼자서 아다치 교수의 방을 찾아간 적이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친어머니에 대해 가만가만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다치 교수는 자신도 숙부인 양아버지의 손에서 성장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며, 콤플렉스를 느끼지 말라고 충고해줬다. 이 일을 계기로 아다치 교수와 다나카 사이에는 보통의 사제지간에서 느낄 수 없는 특별한 유대가 맺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얼마 후, 아다치 교수는 다나카에게 시마즈 제작소를 추천했다. “교토에 좀 독특한 회사가 있는데, 자네 생각은 어떤가?” 다나카로서는 처음 들어보는 회사였지만, 의료 분야에 적지 않은 관심을 갖고 있던 그로서는 X선 장치나 CT 장치를 제작하는 시마즈 제작소가 당연히 눈에 번쩍 뜨일 수밖에 없었다. 지난날 대학에 갓 입학했을 때 간절했던, 돌아가신 생모에 대한 생각이 선명하게 되살아났다. ‘의사가 아니더라도 어쩌면 의료 현장의 뒤에서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입사 전에 다나카는 견학을 위해 시마즈 제작소를 방문했고, 거기서 처음으로 당시 개방 중이던 질량 분석계를 접했다. 그리고 그것이 장차 질병의 원인이나 생명의 구조를 연구하는 데 유용하게 쓰일 장치라는 것을 알았다. 다나카는 자신이 오랫동안 찾아 헤매던 구체적인 목표를 마침내 발견했다.
2장 '실패한 덕분에'의 철학1984년 4월 다나카는 시마즈 제작소에 입사했다. ‘인류에 유용하게 쓰일 수 있는 것을 어느 날 예기치 않게 만들어 낸다’는 연구자만이 누릴 수 있는 기쁨을 예감하고 있던 다나카는 본인의 희망대로 직장 내에서 열심히 일하며 연구 활동에 매진했다. 연구에 집중해 있을 때의 다나카는 예전과 다름없이 옷차림이나 머리 모양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자신이 맡고 있는 일에 골몰해 혼잣말을 중얼거리면서 복도를 걸어가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1984년 10월부터는 단백질 분석 장치 개발에 나서게 되었다. 매트릭스(완충제) 지원 레이저 이온화법 연구가 시작된 것이다. 다나카가 속한 연구 팀이 도전한 분야는 레이저 광선을 쐬어 단백질을 분석하는 기술이었다. 그 기술은 당시 학계에서는 불가능하다는 쪽으로 이야기가 진행되고 있었다. 단백질이 열에 약하기 때문에 레이저 광선을 쐬면 산산조각나기 쉬웠기 때문이다. 문제는 레이저 광선의 충격을 흡수하는 완충제를 발견하는 일이었다.
다나카는 아침부터 밤까지 실험 장치 앞에 앉아 모든 것을 하나하나 측정했다. 연구를 막 시작한 무렵에는 리포트에 이런 글이 적혀 있었다. “단백질 등을 분석해 내는 작업은 현 단계에서는 ‘꿈같은 이야기’에 해당된다.” 그러나 다나카는 포기하지 않았다.
연구를 시작한지 2년 가량 지난 1985년 2월, 평소와 다름없이 여러 가지 완충제를 실험하고 있을 때였다. 다나카는 용기를 착각하여 본래 혼합할 생각이 없었던 완충제, 글리세린과 코발트를 우연히 섞게 되었다. 코발트 미세 분말은 매우 값이 비쌌으므로, 다나카는 잘못 혼합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아깝다는 생각에 버리지 못하고 그것을 사용해봤다. 그러자 미세 분말인 코발트가 레이저를 흡수하여 글리세린의 양과 코발트 분말의 양이 가장 최적의 상태가 된 지점에서 커다란 단백질이 이온화하여 분리되는 게 아닌가. 계측기에 이제까지 본 적이 없는 신호가 나타난 것이다. 세기의 대발견은 이렇게 이루어졌다.
단백질 분석 결과는 물결 모양으로 표시되는데, 그 파형에는 노이즈라 불리는 불필요한 정보들이 많았으므로 필요한 정보를 가려내는 정확한 눈이 무엇보다 요구되었다. 그러한 노이즈와 의미 있는 정보의 미세한 차이를 입사 2년차인 다나카가 가려낸 것이다. 그것은 동일한 데이터를 베테랑 연구자가 지켜보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노이즈로 잘못 판단할 수 있을 정도의 지극히 미세한 차였다. ‘이상하다, 왜 그럴까?’라고 생각한 것이 발단이었다. 다나카는 혹시 장치가 잘못된 것은 아닌지 여러 가지 요인을 다시 생각해보았다. 일주일 뒤에는 확신을 가졌고, 틀림없는 수치가 분명하게 얻어진다는 신념을 갖게 되었다.
“착각하여 잘못 섞었다.”, “아깝다고 생각해서 그냥 써 보았다.”, “그것을 꾸준히 지켜보고 있었다.”는 이 세 가지 우연의 조합이 있었기에 가능한 발견이라고 다나카는 술회한다. 그러나 아무리 우연이라고 해도, 결코 단순한 우연은 아니었다. 다나카는 이 우연을 찾아내기까지 수많은 완충제를 조사했다. 여러 다양한 조건을 바꾸어 가면서 반년 가까이 반복에 반복을 거듭하며 실험을 계속했던 것이다. 이제까지 단백질의 분자량은 천 몇백 정도만 측정할 수 있었지만 다나카가 속한 팀의 프로젝트가 끝난 1986년 3월에는 질량 수치 3만 5,000의 세계 최고치를 달성했다.
다나카는 이 대발견을 이룬 직후에도 이것을 다른 데 응용할 수 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다고 한다. 회사도 이 기술을 이용한 제품화에 주저하다가, 다나카의 상사가 ‘제품화하는 것이 좋겠다!’고 용단을 내려야 할 정도였다. 다나카가 이를 대외적으로 발표한 것은 1987년 5월 교토 공예섬유 대학에서 열린 일본 질량 분석 학회에서였다. 그때는 모두들 ‘색다른 걸 해 냈군.’ 정도의 반향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4개월 뒤 열린 중·일 연합 질량 분석 토론회에서 다나카의 운명을 바꾸어 놓을 만남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9월 16일, 레이저 이온화 질량 분석계의 권위자인 미국 존스 홉킨스 대학의 로버트 코터 교수가 초대되었는데 그는 강연에서 분자량이 높은 물질을 결코 검출하지 못할 것이라고 강연했다. 그 강연을 듣고 있던 다나카는 교수가 단상에서 내려오자 질량수가 10만 정도까지 나타난 데이터를 내보였다. 놀란 코터 교수는 다나카의 데이터 사본을 받아 미국으로 가져갔고, 생체 고분자 연구에 몰두하던 메릴랜드 대학의 캐서린 펜슬로 교수에게 그 데이터를 보여 주었다. 새로운 발견을 깨달은 두 사람은 미국이나 유럽의 연구자들에게 다나카의 성과를 소개하기에 이르렀고, 결국 다나카의 이름이 전 세계로 널리 퍼져 나가게 되었던 것이다.
1987년의 그 학회에 참가했던 사람 중에는 다나카의 놀라운 연구 성과를 알아차린 또 한 사람의 연구자가 있었다. 오사카 대학의 고 마쓰오 다케키요 교수이다. 그는 다나카에게 하루 빨리 영문 학회지에 투고할 것을 권유했다. 왜냐하면 최초의 벽을 넘어선 다나카 팀은 제품화에 난항을 겪고 있었으나, 연구 발표 직후 실용화에서 먼저 돌파구를 찾은 독일 팀이 사람들의 주목을 받기에 이르렀기 때문이었다. 다나카는 곧 영어 논문을 투고했고, 한편 경쟁 관계에 있던 독일 뮌스터 대학의 미하엘 카라스 교수와 프란츠 힐렌캄프 교수도 공동 명의로 논문을 투고했다. 힐렌캄프보다 한 달 정도 늦은 다나타의 논문이 통과된 것은 힐렌 캄프 교수의 논문 안에 1987년 다나카가 학회에서 발표했던 내용이 기재되어 있었고, 특허도 1985년에 인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독일 팀은 자신들의 연구가 다나카의 발견에 기초하고 있다는 점을 공정하게 기록하였던 것이다. 독일 팀은 연구자 윤리를 준수한 것이었고, 이것이 역전 수상의 결정적 단서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