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릴린 먼로
칼 롤리슨 지음 | 예담
1961년 겨울은 마릴린 먼로에게 더없이 쓸쓸한 계절이었다. 그녀는 최악의 상태였다. 자주 심각할 정도로 우울하거나 지나치게 예민했다. 친구들도 거의 만나지 않았으며, 점점 세상과 담을 쌓고 있었다. 증세가 더 심각해지자 신경정신과 전문의인 크리스 박사는 뉴욕에 있는 페인 휘트니 클리닉으로 데려갔다. 하지만 그녀는 그곳에서 극심한 공황 상태를 보였다.
죽기 전 1년 동안 먼로는 뉴욕과 할리우드를 계속 오가며 지냈다. 먼로는 정치인들과 만나는 데 관심을 보였고, 특히 예술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유명 인사들을 초대하기를 좋아했다. 그 즈음 먼로의 인터뷰에 따르면 먼로가 개인의 행복과 연관지어 공적인 문제에 얼마나 열중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특히 먼로는 케네디 대통령이 올바른 정책을 세울 것이고, 소외되고 상처받은 소수들에게도 동등한 기회를 제공하는 정당한 사회를 만들 것이라고 믿었다.
5월 18일 금요일, 먼로는 케네디 대통령 앞에서 생일축하 노래를 불렀다. 이 자리에서 먼로는 다시 한 번 섹시하고 도발적인 이미지로 자신을 포장하여 자신의 상품 가치를 높이고, 아이 같은 자기 과시욕을 드러냈다.
할리우드와 깊은 연관을 맺고 있는 케네디 가의 사람들과 가까운 곳에 살던 먼로는 그들과 친해졌고, 덕분에 사교 모임에서 케네디 형제와 마주치는 일도 잦았다. 그들은 먼로의 재치에 즐거운 반응을 보였고, 그녀와 염문설이 퍼지는 것에 대해 전혀 개의치 않는 눈치였다. 한편 먼로는 시민권과 정치의 자유와 같은 문제에 관심이 많은 로버트에게도 마음이 끌렸다.
5월 말, 먼로는 매우 날카롭고 예민해져 있었으며, 인내심을 잃고 자포자기하고 있었다. 이제 그녀 자신도 자기를 도울 수 없었고, 치료 과정에서 일말의 희망도 찾지 못했다. 다시 몸이 안 좋아진 먼로가 당시 찍고 있던 <섬싱즈 갓 투 기브(Something's Got to Give)> 촬영장에도 모습을 나타내지 않는 날이 계속되었다. 이제 나이뿐만 아니라 성숙한 외모와 재능에 걸맞은 연기를 해야 할 필요를 절실히 느낀 그녀는 액터스 스튜디오로 눈을 돌렸고, 거기서 한 단막극에 출연했다. 그리고 다시 한번 풍부한 감수성을 발휘해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덕분에 먼로는 다시 희망을 갖기 시작했지만 심한 정서 불안 증세 때문에 병원으로 실려가는 바람에 그 희망은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6월 말 경, 한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먼로는 "유명한 유부남 정치인"과의 염문설과 관련하여 자신은 케네디 대통령을 "또다른 링컨"으로 존경하고 있으며, 이에 대한 어떤 비난도 참기 힘들다고 말했다. 정치인 친구의 조언대로 이제 그녀는 수백만에 이르는 팬들에게 관심을 집중해야 했으므로 영화의 촬영을 완료하기 위해 폭스와 다시 협상을 시작했다. 그리고 6월 후반부터 8월 초반까지 먼로는 극심한 스트레스, 감정의 극단을 경험했다. 결국 8월 5일, 먼로는 시체로 발견되었다. 로스앤젤레스 검찰청이 시체를 부검한 결과 약물 과다 복용으로 인한 '자살'이라고 못박았는데도 그녀의 죽음을 둘러싸고 갖가지 추측이 난무했다.
자살을 시도하는 많은 사람들이 그러하듯 먼로의 모든 움직임은 심한 고립감으로 에워싸 있었다. 그 고립감은 과거의 아픈 상처를 극복하고 예술적 재능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받고 미래를 낙관적으로 바라볼 여지가 있을 때 비로소 해소될 수 있었다. 그러나 먼로는 미래를 더없이 절망적으로 느꼈고, 자기도취와 자기학대 사이를 불안하게 오갔으며, 한없이 진지해 보이다가도 한없이 경박해 보였다.
고통을 덜기 위해 약에 지나치게 의존하면서 먼로는 점점 더 자신을 학대하고 심한 고립감을 느꼈으며, 일에 대한 의욕도 버렸다. 이제 약에 의존하지 않고는 일 때문에 생기는 좌절감과 패배감을 극복할 수 없었다. 의지는 마비되어 갔고 에너지는 고갈되었으며, 가야할 길을 몰라 갈팡질팡했다. 그러나 마릴린 먼로의 힘, 그녀의 신화적 힘은 여전히 건재하다. 그녀가 전화, 약물, 자살, 타살과 같은 온갖 의혹을 남기고 죽었을 뿐 아니라 불행한 출생만큼 죽음 또한 불행했기 때문이다.
먼로가 리처드 메리먼과 인터뷰를 한 녹음을 들으면 그녀의 목소리는 강인하고 원숙하고 의욕적이다. 또 인터뷰 중간중간에 그녀의 웃음소리가 울려 퍼지는데 그녀의 웃음소리를 들으면 기운이 솟아날 것 같다. 그 웃음소리는 스크린 속에서나 밖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보다 더 많은 것을 하고자 했던 먼로의 욕구를 보여준다. 결국 그녀는 지쳐 쓰러졌지만 여전히 관객에게 간청한다. "날 찾으세요, 날 찾으세요. 완전한 나를 찾아주세요."3. 스크린의 여왕4. 신화의 절정5. 자아를 찾아서6. 영화에 열정을 바치다노마 진은 1924년 할리우드의 필름 편집자 글래디스 펄 베이커의 사생아로 태어났다. 아이를 키울 여력이 없던 글래디스였기에 노마 진은 고아원과 양부모 집, 친척집을 전전했다. 하지만 일하지 않는 날 마지못해 오는 듯하던 글래디스는 손을 잡거나 무슨 말이라도 해주기를 애타게 기다리는 어린 딸에게 말 한마디 건네지 않았다. 글래디스는 어린 딸에게 늘 시끄럽게 굴지 말라고 강조했다.
할리우드에 갓 진출했을 때 마릴린 먼로는 과장된 면이 없지 않지만 어린 시절 자신이 여러 집을 전전한 일이며 고아원에서 힘들게 설거지한 일, 강간을 당하거나 할머니에게 괴롭힘을 받은 일, 그 밖에 디킨즈 소설에나 나올 만한 충격적인 사실들을 털어놓았다.
어머니 글래디스가 정신병원에 입원하면서 어디에도 마음 붙일 곳 없는 이 세상에 홀로 남겨진 노마 진은 어떻게 해서든 자신의 처지에서 헤어날 길을 찾아야 했다. '자주 외로움에 시달리고 죽고 싶은 충동도 느끼는' 이 아이는 곧 공상과 영화에 몰두했다. 공상은 그녀의 상상력을 키워주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어린 시절 먼로는 현실에서 당하는 굴욕을 잊고 마음의 위안을 얻기 위해 더욱 공상에 몰입했다. 자칫 과대망상에 빠질 우려도 있었지만 사춘기에 들어서면서 먼로의 육체는 아름답게 변하기 시작한 터라 사람들의 관심을 얻고 싶은 열망은 단순한 바람으로 그치지 않았다. 그녀의 외모가 뭇 남성들의 시선을 끌면서 그녀의 환상은 현실이 되고 있었다. 노마 진은 어쩌면 자신의 삶의 일부분일지도 모를 관능적인 육체로 다른 사람들과 가까워진 순간에는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를 더 이상 비관하고 슬퍼하지 않아도 되었다.
1942년 초봄, 열여섯 살의 노마 진은 스무한 살의 제임스 도허티와 결혼했다. 미국이 전쟁에 개입하자 도허티는 해병으로 입대했으며, 혼자 남게 된 노마 진은 남편의 관심을 더 이상 받을 수 없을 거라는 생각에 우울하거나 슬퍼하는 차원을 넘어 거의 통제력을 잃을 정도로 혼란한 상태에 빠졌다. 하지만 노마 진은 자신이 필요한 존재라는 것을 인정받고 싶어 군수 공장에 들어가 몸을 바쁘게 움직였다.
그 무렵 1945년 6월 26일, 젊은 여성 노동자들의 사진을 찍기 위해 공장을 방문한 사진 작가 데이비드 코노버 앞에서 너무도 자연스러운 포즈를 취한 덕분에 그의 눈에 들어 노마 진은 곧 모델과 영화배우의 길에 들어서게 되었다. 전쟁터에서 돌아온 도허티와 이혼한 후 그녀는 할리우드로 향했다. 그 시기에 그녀는 자아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그리고 열아홉 살이라는 나이에 혼자 힘으로 살아야 했고, 자신이 누구인지도 알아야 했다. 그러나 도허티는 노마 진이 자아 발견을 위해 시도하는 그 모든 것에 코웃음을 쳤다. 1945년에서 46년 사이, 노마 진은 카메라의 도움으로 이전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 다시 태어났다.전문적인 사진 모델로 일을 시작한 지 약 1년 후인 1946년 8월 26일, 노마 진 도허티는 이름을 마릴린 먼로로 바꾸고 20세기 폭스 사와 첫 계약을 맺었다. 스튜디오와의 계약을 시작으로 그저 그런 영화에 얼굴만 잠깐 비추면서 어느새 1년을 보냈고 첫 계약이 만료된 1947년, 스튜디오는 가차없이 그녀를 해고했다. 그러나 먼로는 계속 연기 수업을 받았고, 연극 무대에도 섰지만 여전히 깊은 인상을 남기지 못했다. 그런 상황에 그녀를 홍보하고 연기 지도를 해줄 만한 사람이 딱히 없는 것도 문제였다.
1948년 컬럼비아와 계약이 만료되면서 그녀는 또 다른 일을 찾아야 했는데 스튜디오에 소속된 게 아니어서 영화에서 아주 작은 역만이 주어질 뿐이었다. 그러나 막스 브라더스와 함께 출연한 <러브 해피>에서는 비록 단역이긴 했지만 몸에 착 달라붙고 목선이 깊게 파인 옷을 입고 나와 눈길을 끌었다. 비록 비중은 작았지만 그녀가 보여주는 순진하고 육감적인 금발 미인의 이미지는 매우 색다른 매력을 발산했다.
그리고 <러브 해피>가 개봉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1950년 3월, 할리우드에서 영향력이 막강한 에이전트, 하이드는 그녀를 밀어주기로 마음먹는다. 그는 처음으로 먼로의 스타성을 확신한 할리우드의 유력 인사였다. 배우로서의 자질이 부족하다는 점을 무자비하게 지적하거나, 훌륭한 배우가 되려면 어떻게 연기해야 하는지 엄격하게 지도한 이전의 조력자들과는 확실히 달랐다. 대신 그는 타고난 감각을 믿고 먼로의 내면을 들여다보려 했다. 그가 있었기에 그녀는 다른 사람의 평가에 개의치 않고 자기 자신을 바로 볼 수 있었고, 자신의 재능을 신뢰할 수 있었다.
하이드는 존 휴스턴에게 <아스팔트 정글>의 안젤라 역을 위해 먼로를 테스트해 보라고 설득했고, 테스트를 거쳐 먼로는 안젤라 역을 따냈다. 비록 대사 몇 줄에 나오는 장면도 두 군데 밖에 없지만 그 캐릭터는 영화의 주제와 줄거리 상 없어서는 안 되는 꽤 비중 있는 역이었다. 그리고 <아스팔트 정글>에서 먼로는 처음으로 연기다운 연기를 했을 뿐 아니라 무한한 가능성도 보여주었다. 그 전까지는 끊임없이 노력했지만 여배우로서의 능력을 인정받지 못한 게 사실이었다.
<아스팔트 정글>에서의 호연에 힘입어 먼로는 <이브의 모든 것>에 미스 캐스웰로 캐스팅됐다. 그녀의 연기는 칭찬할 만 했지만 캐릭터를 깊이 있게 연구하거나 상상력을 가미하여 연기한 것은 아니라는 평가를 받았다. 먼로는 이브가 묘사한 것처럼 관객의 사랑을 얻기 위해 관객의 감성에 호소하는 매력적인 이미지를 창조할 수 있었다.
사람들에게 얼굴이 알려지기 시작한 1950년대 무렵은 먼로에게는 불안한 시기였고, 그만큼 사람들과 어울리기보다 혼자만의 세계에 빠지는 시간이 더 많았다. 먼로는 오직 한 사람, 조니 하이드만을 믿고 의지했는데 그는 끝까지 스크린 테스트를 받도록 주선했고, 결국 12월 10일, 먼로는 스튜디오와 7년간의 계약을 하기에 이른다. 주변 사람들이 보기에 먼로가 느끼는 자부심과 자신감의 원천은 바로 하이드였다. 그러나 하이드는 수 년간 앓던 심장병이 악화되어 사망했고, 그로 인한 충격으로 먼로는 약물을 과다 복용하여 자살할 결심까지 할 정도였다.1951년 마릴린 먼로는 생애 처음으로 「라이프」지의 표지 모델이 되었다. 그후 2년 동안 그녀의 인기는 꾸준히 올라갔지만 <이브의 모든 것>에서 미스 캐스웰 역을 하면서 생겨난 '멍청한 금발 미인'이라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기는 힘들었다. 하지만 먼로는 별 볼일 없는 여러 영화에서 혼신의 힘을 다해 열정적으로 즐겁게 연기했다. 1951년과 52년 무렵에는 중요한 역을 연기하는 배우처럼 영화에 지극한 정성을 쏟은 결과 관객의 관심을 끄는 데 성공했다. 이렇게 영화야말로 그녀의 중요한 인생 목표였다. 하지만 계속 보잘것없는 역에 창조적인 에너지를 낭비하면서 먼로는 어느새 좌절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1951년 가을, 먼로는 본격적으로 연기를 공부하기 위해 친구로부터 안톤 체홉의 후손이자 당시 뛰어난 연기 지도자로 알려져 있는 미하엘 체호프를 소개받았다. 체호프는 배우란 캐릭터의 단순한 모방자가 아닌 고도의 훈련을 거친 연출자가 되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먼로는 완고한 스튜디오 시스템에 불만을 품는 한편, 자유로운 감정 표현과 풍부한 내면 연기를 하기 위해 체호프가 고안한 훈련법에 따라 연기를 배웠다.
체호프에게 연기 수업을 받은 후 먼로는 다섯 편의 영화에 출연했고, 1952년 여름, 점점 많은 인기를 모으고 다양한 매력을 선보이던 먼로를 주목한 사람들은 그녀에게서 크게 성장할 수 있는 잠재력을 발견한다. 그리고 때맞춰 터진 누드 사진 촬영, 고아 시절에 대한 왜곡과 관련한 스캔들에 대해 그녀가 감상적이고 사람들의 동정심을 불러일으키는 태도를 취함에 따라 이 사건들은 그녀가 유명한 배우로 부상하는 중요한 계기로 작용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녀의 영화들은 그다지 진지한 평가를 받지 못했고, 그녀의 재능도 대다수 평론가들의 눈길을 끄는 데 실패했다.
이 시기에 찍었던 <오 헨리의 풀 하우스>, <몽키 비즈니스> 등의 영화들에서 먼로가 맡은 역은 대부분 성격이나 심리보다 외모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녀는 어느 순간 갑자기 나타나서 매력을 한껏 과시하고 사라진다. 하지만 <몽키 비즈니스>가 상영될 때 먼로는 이미 스타가 되어 있었다. 사실 영화의 힘이라기 보다는 대중의 의식에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그녀의 이미지 덕분일 것이다.
죽기 전 마지막 인터뷰에서 먼로는 또 자신이 대중의 사랑을 받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과연 그 많은 사랑을 감당할 수 있을지, 또 실제보다 더 부풀려진 이미지에 자기 자신마저 속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이 들었다고 한다.안정된 삶을 줄 수 있는 로버트 슬레처, 자신감과 명성까지 높일 수 있는 가능성을 주는 디마지오 사이에서 갈등하던 먼로는 <나이아가라>라는 영화에 출연하게 되는데 이 영화에서 자신의 진면목을 유감없이 발휘하며 섹스 심벌로 우뚝 서게 된다. 그리고 카메라에서 멀어지면서 엉덩이를 흔들며 걷는 독특한 걸음은 그후 그녀의 상징이 되었다.
1953년 봄, 먼로는 연기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로테 고슬라의 턴어바우트 시어터에서 마임 수업을 받기로 결심한다. 고슬라는 먼로의 진지하고 겸손한 태도와 뛰어난 재능을 높이 평가했는데 특히 유년기에서 노년기에 이르는 한 인간의 성장 과정을 몸으로 표현하는 수업 시간에 그녀의 재능은 빛을 발했다.
<신사는 금발을 좋아한다>에서 감독 하워드 혹스와 시나리오 작가는 기존의 먼로 이미지를 영화 속 캐릭터에 적극적으로 도입했다. 바로 자기 자신에게 몰입하는 여성으로 말이다. 그 당시 먼로는 오로지 현재만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캐릭터를 주로 연기했다. 여기에 혹스는 물질과 욕망에 집착하는 속물적이고 이기적인 이미지를 더해 새로운 캐릭터를 창조했다. 이후 <7년 만의 외출>에서 빌리 와일더 감독은 그녀의 캐릭터를 패러디하거나 멀찌감치 떨어져 관객과 즐기는 듯한 면을 적극적으로 부각시켰다. <다이아몬드는 여자의 제일 좋은 친구죠>에서는 먼로를 섹스 심벌로 희화화하는가 하면 그 격을 끌어올리기도 한다. 한편 <신사는 금발을 좋아한다> 이후 영화들은 마릴린 먼로의 인격적인 면과 상징적인 면을 적절히 이용하기 시작했다. 먼로는 소심하고 수줍은 성격에도 불구하고 자아 발전을 위해서라면 적극적이었고, 감독들은 먼로의 이러한 특성을 알아채기 시작했다.
<7년 만의 외출>은 먼로의 대표작이 되었을 정도로 큰 성공을 거두었는데 이 영화에서 선보인 천진하고 섹시한 페르소나가 이 영화에 이르러 완성된 셈이다. 그리고 치마가 바람에 휘날리는 그 유명한 장면에서 먼로는 유아적인 즐거움과 성적 환희를 동시에 보여준다. 지하철 통풍구 위에 두 발을 벌린 채 서 있는 먼로의 치마가 지하철이 일으키는 바람에 부풀오르는 사진은 전 세계 잡지와 신문의 지면을 화려하게 장식했다. 그야말로 찌는 듯한 더위 속에서 느끼는 쾌감을 효과적으로 포착했다고 볼 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