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릴린 먼로
칼 롤리슨 지음 | 예담
1. 불우한 어린 시절노마 진은 1924년 할리우드의 필름 편집자 글래디스 펄 베이커의 사생아로 태어났다. 아이를 키울 여력이 없던 글래디스였기에 노마 진은 고아원과 양부모 집, 친척집을 전전했다. 하지만 일하지 않는 날 마지못해 오는 듯하던 글래디스는 손을 잡거나 무슨 말이라도 해주기를 애타게 기다리는 어린 딸에게 말 한마디 건네지 않았다. 글래디스는 어린 딸에게 늘 시끄럽게 굴지 말라고 강조했다.
할리우드에 갓 진출했을 때 마릴린 먼로는 과장된 면이 없지 않지만 어린 시절 자신이 여러 집을 전전한 일이며 고아원에서 힘들게 설거지한 일, 강간을 당하거나 할머니에게 괴롭힘을 받은 일, 그 밖에 디킨즈 소설에나 나올 만한 충격적인 사실들을 털어놓았다.
어머니 글래디스가 정신병원에 입원하면서 어디에도 마음 붙일 곳 없는 이 세상에 홀로 남겨진 노마 진은 어떻게 해서든 자신의 처지에서 헤어날 길을 찾아야 했다. '자주 외로움에 시달리고 죽고 싶은 충동도 느끼는' 이 아이는 곧 공상과 영화에 몰두했다. 공상은 그녀의 상상력을 키워주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어린 시절 먼로는 현실에서 당하는 굴욕을 잊고 마음의 위안을 얻기 위해 더욱 공상에 몰입했다. 자칫 과대망상에 빠질 우려도 있었지만 사춘기에 들어서면서 먼로의 육체는 아름답게 변하기 시작한 터라 사람들의 관심을 얻고 싶은 열망은 단순한 바람으로 그치지 않았다. 그녀의 외모가 뭇 남성들의 시선을 끌면서 그녀의 환상은 현실이 되고 있었다. 노마 진은 어쩌면 자신의 삶의 일부분일지도 모를 관능적인 육체로 다른 사람들과 가까워진 순간에는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를 더 이상 비관하고 슬퍼하지 않아도 되었다.
1942년 초봄, 열여섯 살의 노마 진은 스무한 살의 제임스 도허티와 결혼했다. 미국이 전쟁에 개입하자 도허티는 해병으로 입대했으며, 혼자 남게 된 노마 진은 남편의 관심을 더 이상 받을 수 없을 거라는 생각에 우울하거나 슬퍼하는 차원을 넘어 거의 통제력을 잃을 정도로 혼란한 상태에 빠졌다. 하지만 노마 진은 자신이 필요한 존재라는 것을 인정받고 싶어 군수 공장에 들어가 몸을 바쁘게 움직였다.
그 무렵 1945년 6월 26일, 젊은 여성 노동자들의 사진을 찍기 위해 공장을 방문한 사진 작가 데이비드 코노버 앞에서 너무도 자연스러운 포즈를 취한 덕분에 그의 눈에 들어 노마 진은 곧 모델과 영화배우의 길에 들어서게 되었다. 전쟁터에서 돌아온 도허티와 이혼한 후 그녀는 할리우드로 향했다. 그 시기에 그녀는 자아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그리고 열아홉 살이라는 나이에 혼자 힘으로 살아야 했고, 자신이 누구인지도 알아야 했다. 그러나 도허티는 노마 진이 자아 발견을 위해 시도하는 그 모든 것에 코웃음을 쳤다. 1945년에서 46년 사이, 노마 진은 카메라의 도움으로 이전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 다시 태어났다.
2. 금발 미인의 탄생전문적인 사진 모델로 일을 시작한 지 약 1년 후인 1946년 8월 26일, 노마 진 도허티는 이름을 마릴린 먼로로 바꾸고 20세기 폭스 사와 첫 계약을 맺었다. 스튜디오와의 계약을 시작으로 그저 그런 영화에 얼굴만 잠깐 비추면서 어느새 1년을 보냈고 첫 계약이 만료된 1947년, 스튜디오는 가차없이 그녀를 해고했다. 그러나 먼로는 계속 연기 수업을 받았고, 연극 무대에도 섰지만 여전히 깊은 인상을 남기지 못했다. 그런 상황에 그녀를 홍보하고 연기 지도를 해줄 만한 사람이 딱히 없는 것도 문제였다.
1948년 컬럼비아와 계약이 만료되면서 그녀는 또 다른 일을 찾아야 했는데 스튜디오에 소속된 게 아니어서 영화에서 아주 작은 역만이 주어질 뿐이었다. 그러나 막스 브라더스와 함께 출연한 <러브 해피>에서는 비록 단역이긴 했지만 몸에 착 달라붙고 목선이 깊게 파인 옷을 입고 나와 눈길을 끌었다. 비록 비중은 작았지만 그녀가 보여주는 순진하고 육감적인 금발 미인의 이미지는 매우 색다른 매력을 발산했다.
그리고 <러브 해피>가 개봉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1950년 3월, 할리우드에서 영향력이 막강한 에이전트, 하이드는 그녀를 밀어주기로 마음먹는다. 그는 처음으로 먼로의 스타성을 확신한 할리우드의 유력 인사였다. 배우로서의 자질이 부족하다는 점을 무자비하게 지적하거나, 훌륭한 배우가 되려면 어떻게 연기해야 하는지 엄격하게 지도한 이전의 조력자들과는 확실히 달랐다. 대신 그는 타고난 감각을 믿고 먼로의 내면을 들여다보려 했다. 그가 있었기에 그녀는 다른 사람의 평가에 개의치 않고 자기 자신을 바로 볼 수 있었고, 자신의 재능을 신뢰할 수 있었다.
하이드는 존 휴스턴에게 <아스팔트 정글>의 안젤라 역을 위해 먼로를 테스트해 보라고 설득했고, 테스트를 거쳐 먼로는 안젤라 역을 따냈다. 비록 대사 몇 줄에 나오는 장면도 두 군데 밖에 없지만 그 캐릭터는 영화의 주제와 줄거리 상 없어서는 안 되는 꽤 비중 있는 역이었다. 그리고 <아스팔트 정글>에서 먼로는 처음으로 연기다운 연기를 했을 뿐 아니라 무한한 가능성도 보여주었다. 그 전까지는 끊임없이 노력했지만 여배우로서의 능력을 인정받지 못한 게 사실이었다.
<아스팔트 정글>에서의 호연에 힘입어 먼로는 <이브의 모든 것>에 미스 캐스웰로 캐스팅됐다. 그녀의 연기는 칭찬할 만 했지만 캐릭터를 깊이 있게 연구하거나 상상력을 가미하여 연기한 것은 아니라는 평가를 받았다. 먼로는 이브가 묘사한 것처럼 관객의 사랑을 얻기 위해 관객의 감성에 호소하는 매력적인 이미지를 창조할 수 있었다.
사람들에게 얼굴이 알려지기 시작한 1950년대 무렵은 먼로에게는 불안한 시기였고, 그만큼 사람들과 어울리기보다 혼자만의 세계에 빠지는 시간이 더 많았다. 먼로는 오직 한 사람, 조니 하이드만을 믿고 의지했는데 그는 끝까지 스크린 테스트를 받도록 주선했고, 결국 12월 10일, 먼로는 스튜디오와 7년간의 계약을 하기에 이른다. 주변 사람들이 보기에 먼로가 느끼는 자부심과 자신감의 원천은 바로 하이드였다. 그러나 하이드는 수 년간 앓던 심장병이 악화되어 사망했고, 그로 인한 충격으로 먼로는 약물을 과다 복용하여 자살할 결심까지 할 정도였다.
3. 스크린의 여왕1951년 마릴린 먼로는 생애 처음으로 「라이프」지의 표지 모델이 되었다. 그후 2년 동안 그녀의 인기는 꾸준히 올라갔지만 <이브의 모든 것>에서 미스 캐스웰 역을 하면서 생겨난 '멍청한 금발 미인'이라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기는 힘들었다. 하지만 먼로는 별 볼일 없는 여러 영화에서 혼신의 힘을 다해 열정적으로 즐겁게 연기했다. 1951년과 52년 무렵에는 중요한 역을 연기하는 배우처럼 영화에 지극한 정성을 쏟은 결과 관객의 관심을 끄는 데 성공했다. 이렇게 영화야말로 그녀의 중요한 인생 목표였다. 하지만 계속 보잘것없는 역에 창조적인 에너지를 낭비하면서 먼로는 어느새 좌절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1951년 가을, 먼로는 본격적으로 연기를 공부하기 위해 친구로부터 안톤 체홉의 후손이자 당시 뛰어난 연기 지도자로 알려져 있는 미하엘 체호프를 소개받았다. 체호프는 배우란 캐릭터의 단순한 모방자가 아닌 고도의 훈련을 거친 연출자가 되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먼로는 완고한 스튜디오 시스템에 불만을 품는 한편, 자유로운 감정 표현과 풍부한 내면 연기를 하기 위해 체호프가 고안한 훈련법에 따라 연기를 배웠다.
체호프에게 연기 수업을 받은 후 먼로는 다섯 편의 영화에 출연했고, 1952년 여름, 점점 많은 인기를 모으고 다양한 매력을 선보이던 먼로를 주목한 사람들은 그녀에게서 크게 성장할 수 있는 잠재력을 발견한다. 그리고 때맞춰 터진 누드 사진 촬영, 고아 시절에 대한 왜곡과 관련한 스캔들에 대해 그녀가 감상적이고 사람들의 동정심을 불러일으키는 태도를 취함에 따라 이 사건들은 그녀가 유명한 배우로 부상하는 중요한 계기로 작용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녀의 영화들은 그다지 진지한 평가를 받지 못했고, 그녀의 재능도 대다수 평론가들의 눈길을 끄는 데 실패했다.
이 시기에 찍었던 <오 헨리의 풀 하우스>, <몽키 비즈니스> 등의 영화들에서 먼로가 맡은 역은 대부분 성격이나 심리보다 외모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녀는 어느 순간 갑자기 나타나서 매력을 한껏 과시하고 사라진다. 하지만 <몽키 비즈니스>가 상영될 때 먼로는 이미 스타가 되어 있었다. 사실 영화의 힘이라기 보다는 대중의 의식에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그녀의 이미지 덕분일 것이다.
죽기 전 마지막 인터뷰에서 먼로는 또 자신이 대중의 사랑을 받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과연 그 많은 사랑을 감당할 수 있을지, 또 실제보다 더 부풀려진 이미지에 자기 자신마저 속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이 들었다고 한다.
4. 신화의 절정안정된 삶을 줄 수 있는 로버트 슬레처, 자신감과 명성까지 높일 수 있는 가능성을 주는 디마지오 사이에서 갈등하던 먼로는 <나이아가라>라는 영화에 출연하게 되는데 이 영화에서 자신의 진면목을 유감없이 발휘하며 섹스 심벌로 우뚝 서게 된다. 그리고 카메라에서 멀어지면서 엉덩이를 흔들며 걷는 독특한 걸음은 그후 그녀의 상징이 되었다.
1953년 봄, 먼로는 연기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로테 고슬라의 턴어바우트 시어터에서 마임 수업을 받기로 결심한다. 고슬라는 먼로의 진지하고 겸손한 태도와 뛰어난 재능을 높이 평가했는데 특히 유년기에서 노년기에 이르는 한 인간의 성장 과정을 몸으로 표현하는 수업 시간에 그녀의 재능은 빛을 발했다.
<신사는 금발을 좋아한다>에서 감독 하워드 혹스와 시나리오 작가는 기존의 먼로 이미지를 영화 속 캐릭터에 적극적으로 도입했다. 바로 자기 자신에게 몰입하는 여성으로 말이다. 그 당시 먼로는 오로지 현재만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캐릭터를 주로 연기했다. 여기에 혹스는 물질과 욕망에 집착하는 속물적이고 이기적인 이미지를 더해 새로운 캐릭터를 창조했다. 이후 <7년 만의 외출>에서 빌리 와일더 감독은 그녀의 캐릭터를 패러디하거나 멀찌감치 떨어져 관객과 즐기는 듯한 면을 적극적으로 부각시켰다. <다이아몬드는 여자의 제일 좋은 친구죠>에서는 먼로를 섹스 심벌로 희화화하는가 하면 그 격을 끌어올리기도 한다. 한편 <신사는 금발을 좋아한다> 이후 영화들은 마릴린 먼로의 인격적인 면과 상징적인 면을 적절히 이용하기 시작했다. 먼로는 소심하고 수줍은 성격에도 불구하고 자아 발전을 위해서라면 적극적이었고, 감독들은 먼로의 이러한 특성을 알아채기 시작했다.
<7년 만의 외출>은 먼로의 대표작이 되었을 정도로 큰 성공을 거두었는데 이 영화에서 선보인 천진하고 섹시한 페르소나가 이 영화에 이르러 완성된 셈이다. 그리고 치마가 바람에 휘날리는 그 유명한 장면에서 먼로는 유아적인 즐거움과 성적 환희를 동시에 보여준다. 지하철 통풍구 위에 두 발을 벌린 채 서 있는 먼로의 치마가 지하철이 일으키는 바람에 부풀오르는 사진은 전 세계 잡지와 신문의 지면을 화려하게 장식했다. 그야말로 찌는 듯한 더위 속에서 느끼는 쾌감을 효과적으로 포착했다고 볼 수 있다.
이 영화에서 먼로의 캐릭터는 매우 입체적이며, 주관이 뚜렷하다. 게다가 자기가 원하는 것을 조금도 수줍어하지 않고 떳떳이 밝히는 모습이 무척 매력적이며, 성숙하고 똑똑해 보인다. 이 영화가 이렇게 유명해진 까닭은 비단 먼로의 연기력 때문만은 아니다. 사람들은 치마가 바람에 날리는 장면을 보고 먼로가 이 영화에서 전보다 더 많은 것을 보여줄 거라고 기대하는 것 같았다.
이후 오랜 불화 끝에 먼로는 디마지오와 이혼했다. 먼로는 이 시련도 대중의 인기를 위한 기회로 이용했다. 그리고 몇 달 후 먼로는 20세기 폭스를 떠나면서 거처도 뉴욕으로 옮겼다. 먼로는 <7년 만의 외출>을 찍고 디마지오와 이혼하는 동안 사생활이 공공연히 드러났던 것 같은 일 따위는 만들지 않을 생각이었다. 먼로는 오히려 비틀스보다 먼저 그녀 자신과 그녀가 대중 앞에서 창조한 페르소나에 대해 반란을 꾀했다. 먼로는 비틀스처럼 오랜 무명생활을 겪으면서 스타를 갈망하는 여느 배우들보다 더 열심히 일했다. 게다가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을 사건으로 연출하는 비틀스의 재능과 같은 능력도 가지고 있었다.
무대에서나 스크린 안팎에서 먼로는 그야말로 볼거리 많은 극장이었고, 애드리브의 달인이었으며, 기자 회견장에서도 두고두고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하는 해프닝을 연출하는 배우였다. 비틀스가 음악과 영화로 자신들의 개성을 창조했듯이 먼로는 영화를 통해 자신만의 독특한 매력을 창조하면서 점점 더 세련되고 정교한 연기를 보여주었다. 마침내 먼로도 그들처럼 신화적인 존재로 부상하기에 이른다. 대중에게서 한 발짝 그러나 대중의 찬사보다 예술을 추구하는 데 관심을 두었을 때조차도 먼로의 신화성은 사라지지 않았다.
5. 자아를 찾아서제작자라기보다는 사진작가로 유명한 밀턴 그린이 찍은 마릴린 먼로의 사진에서는 그녀의 또 다른 성적 매력을 느낄 수 있다. 단순히 육체를 통해서가 아니라 눈과 미소에 번진 슬픔에서 비롯된 묘한 매력이 그것이다. 이전의 다른 사진에서는 결코 느낄 수 없었던 복잡 미묘한 생각과 모순된 감정들이 그 사진에 표현되어 있다. 배우이기보다 인간 먼로의 이미지가 더 강하게 풍기는 묘한 포즈의 사진은 여느 사진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하다. 물론 먼로가 어떤 포즈를 위해 착상을 떠올리지는 못했지만 사진작가의 주문에 따라 특색 있는 표정을 짓고 몸짓을 더하는 능력은 남달랐다. 그린도 강조하듯 먼로의 적극적인 협조와 사진에 대한 이해력이 없었다면 결코 멋진 사진들이 세상의 빛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사랑합시다>를 촬영할 때부터 먼로가 정신적으로 많이 기댄 정신과 의사 랄프 그린슨 박사의 보고에 따르면 점차 그녀는 몸과 마음을 짓누르는 고통과 불면증에서 벗어나기 위해 진통제와 진정제에 의존하기 시작했다. 그녀가 점점 더 약에 의존하면서 일과 생활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언론이 떠들어댄 것처럼 몸을 가누지 못하거나 약물에 전적으로 의지하는 정도는 아니었다. 먼로가 복용한 약들은 먼로의 연기 인생에 어느 정도 지장을 주긴 했어도 한편으로는 버팀목뿐만 아니라 활력의 원천이 되기도 했다. 이 시기에 먼로는 창의적인 욕구를 불태우기 위해 강하게 엄습하는 두려움과 고통을 이겨내야 했고, 이것을 이겨내기 위해 약에 손을 댔다.
먼로가 미국의 유명한 연기 학교인 액터스 스튜디오에 들어간 것은 새로운 연기법을 배운다기보다 여배우로서 그녀 자신을 의식적으로 통제하는 법과 절제력이나 집중력을 키우기 위해서였던 것으로 보인다. 거기서 연기를 가르치던 스트래스버그의 훈련법은 직설적이었고, 먼로의 재능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있었다. 이곳에서 그녀는 예전 체호프로부터 받았던 메소드 연기법(자신의 경험을 떠올리며 연기하면서 배역에 몰입해 자기와 일치시키는 연기법)에 몰두했다. 배우의 기억과 경험에 의존하는 메소드 연기법은 먼로에게 연기에 대한 진실성을 되찾도록 도와주었다.
액터스 스튜디오에서 유진 오닐의 <안나 크리스티>와 테네시 윌리엄스의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에서의 어려운 배역들을 성공적으로 연기한 먼로는 새로운 자신감으로 충만하여 <버스 정류장>에 출연하기로 결정한다. 먼로는 자신의 배역은 체리를 단순히 자기에게 주어진 캐릭터라고 여겼던 것이 아니라 스스로 체리가 되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드디어 먼로는 영화의 주변에만 머물지 않고 영화와 유기적인 관계를 맺으며 연기하기 시작했다. 그 동안 캐릭터에 대해 연구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캐릭터에 완전히 몰입하기는 <버스 정류장>이 처음이었다. 심지어 제임스 딘 같은 메소드 배우들처럼 촬영이 끝난 후에도 캐릭터의 말투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정도였다.
체리는 그 동안 연기한 멍청한 금발 미인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는 유형이었다. 그녀가 출연했던 이전 작품에서의 현실감 없는 캐릭터들에 비해 인간적이고, 적극적이며, 남자들에게 자신의 인생을 걸지도 않는다. 또한 먼로는 <버스 정류장>의 감독인 로건의 말대로 절정에 달한 창의적 에너지를 이 작품에 모두 쏟았다. 촬영장은 마치 체계적이고 혁신적인 액터스 스튜디오의 또다른 실습장과도 같았고, 로건은 먼로가 스트래스버그의 가르침을 실천하도록 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