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수
로라 블루멘벨트 지음 | 하서출판사
신혼여행을 떠나기까지는 7시간이 더 남았다. 나는 엄마 집에서 예루살렘에 있는 신혼집으로 이사를 하기 위해 짐을 싸고 있다. 부모님 역시 외국에서 신혼을 보냈었다. 아버지는 예루살렘에 있는 헤브라이 대학에서 비교종교학을 연구했다. 난생처음으로 많은 것을 경험했었다고 엄마는 말하곤 했다. 하지만 지금 그들은 헤어졌다. 나는 짐을 정리하다말고 12년 전에 쓴 시를 생각해냈다. 그 시는 아랍 장터를 걸어가던 아버지에 관한 내용이었다. 엄마는 서재에서 「나는 그의 딸이다(I am his Daughter)」라는 제목의 시를 찾아냈다. 1986년 3월에 씌어진 것이었다. 나는 그 당시 하버드대학에서 노벨상 수상자인 아일랜드 시인 시머스 히니가 강의하는 시작 세미나를 수강했다. 히니의 과제물은 그 주에 일어났던 사건에 대해 쓰라는 것이었다. 엄마는 내가 전에도 아버지를 쏜 그 남자에 대해 말하는 것을 들었지만 심각하게 생각하지는 않았었다. 자기 딸이 그렇게 엄청난 분노를 억누르고 있었다는 것을 상상하지 못했다. 맨해튼에 도착한 나는 배낭에 스포츠 양말을 채워 넣고 있는 바룩을 보았다. 바룩은 연방검사이자 고지식한 법률가였다. 아버지와 그의 아내 프랜이 우리를 공항까지 바래다주려고 차를 몰고 왔다. 아버지는 한 유태교 단체 실무위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어떤 의미에서 이 여행은 전적으로 아버지에 관한 것이었다. 나는 아버지에게 내가 그 테러범을 찾으려고 할지도 모르겠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우리가 신혼여행을 가는 건가?" 나는 비행기에 탑승한 뒤 바룩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그에게 물었다. 지난 세월 동안 나는 그 테러범과 대면하는 상상을 했다. 그는 상상 속의 악이었다. 이제 그가 현실로 떠오를 것이다. 나는 취재차 예루살렘에 출장을 가면 이따금 아버지가 총에 맞았던 장소인 아랍 장터에 잠시 발길을 멈추고 비난의 눈길을 던졌다.
최근 예루살렘 취재 여행 중에 나는 우연히 보았다. 아치 모양의 길 위에 검은색 페인트로 '복수'라는 단어가 씌어 있었다. 그것은 내가 시를 통해 했던 약속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나는 7년간 「워싱턴 포스트」에서 그것에 관한 몇 가지 극적인 실례에 대해 글을 쓴 적이 있다. 국회에서의 특정 당파에 대한 복수심, 북아일랜드 유혈 보복 사태, 폴란드 유태인 대학살 기념제 등 그것을 분석해서 연구하고 싶었다. 저널리스트라는 내 존재는 이것을 발견의 기회로 보았다. 나는 개인의 존엄성을 존중하라고 배웠지만, 테러범은 내 신념에 구멍이 뚫리게 만들었다. 나는 테러 행위가 사람을 죽이는 것이라기보다는 인간다움을 파괴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테러범의 사고방식에 도전할 방법을 찾아야 했고, 그와의 만남은 불가피했다. 내가 원하는 복수는 폭력 행위로 되갚는 것이 아니라, 그 테러의 가장 깊은 중심으로 들어가보는 것이다. 나는 테러범의 잘못을 뉘우치게 하고 싶었던 것이다.
나는 심리학자인 올케언니 미셸에게 사람들이 무엇 때문에 복수를 하게 되는지 물어본 적이 있었다. "사람들은 수치심을 느낄 때, 반드시 되갚아 주리라 결심해요." 자긍심이 손상되면 사람들은 복수를 통해 그것을 되찾으려 한다. 공공연하게 당한 굴욕에 대해서는 공개적인 보복은 수치심을 없애준다. 복수는 명예를 높이고 쌍방의 존엄성의 균형을 되찾아준다. 수치심은 내가 복수에 대해 깨달은 첫 교훈이었다. 탈무드에 등장하는 한 현자는 이렇게 말했다. "이웃에게 공개적으로 모욕을 가한 자는 피를 흘리게 한 것과 마찬가지다." 이스라엘에서 신혼을 보내자는 것은 바록의 생각이었고, 복수의 기회로 이용하려는 것은 나의 생각이었다.나는 아버지와 함께 옛 성의 통곡의 벽에 가서 그 테러 사건에 대한 자세한 기억을 더듬어보도록 할 계획이었다. 나는 테러범을 찾기에 앞서 그 범죄에 대해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1986년의 그 일은 정말 기억이 아련하구나. 우리는 이스라엘의 대학살 박물관을 방문했지." 아버지는 총격이 있던 그 당시에 뉴욕 홀로코스트기념관 건립추진위원회의 실행위원으로 일하고 있으면서 세계무역센터 근처에 뉴욕 시 기념관을 계획하고 있었다. 아버지의 혹독한 시련이 「뉴욕 포스트」 4면에 2단 기사로 실렸다. '뉴욕 수석 랍비, 이스라엘에서 테러범에 의해 총격 - 기적적으로 생존.' "테러범이 누구인지, 궁금하지 않으세요?" "그것에 대해서 한번도 생각하지 않았거든." 아버지는 내가 한 질문과는 무관한 듯한 대답을 했다. 그는 수치스러워하지도 않았으며 정신적 충격을 받지도 않았다. 테러범은 그에게보다 나에게 더 중요한 인물 같았다. 만일 수치심이 복수에 불을 붙이는 것이라면, 기억은 그 불길을 계속 타오르게 한다. '기억'. 이것이 복수에 대한 내 두 번째 연구 과제였다. 이런 속담이 있다. '용서하고 잊어라.' 기억이 용서와 이렇게 관련이 있다면, 기억이 복수를 충동질하는 게 아닐까?
나는 1991년 걸프전 때 수상을 지냈던 이스라엘의 강경파 지도자 중 한 사람인 이츠하크 샤미르를 텔아비브에 있는 그의 집무실에서 만났다. "우리에겐 불문율이 있었소. 모든 죽음에 대해 복수를 한다!" 비종교적인 유태인인 그는 성서에 맞춰 생활하는 것이 아니라 성서 속에서 살았다. 샤미르는 수상으로서 아랍인과의 타협이란 있을 수 없다고 밝혀왔다. 성서에 나오는 보복의 장면이 샤미르의 집무실 벽을 장식하고 있었다. 로브를 걸친 모세가 야곱의 자손들 중 가장 약자를 공격한 아말렉 족속에게 복수하는 장면이었다. 이곳 중동에서는 역사 속의 전설적인 인물들이 시간의 지층에서 튀어나와 마치 악마처럼 사람들 마음속에 도사리고 있다. 아버지가 이스라엘을 방문하는 동안, 이라크의 후세인은 고대의 원대한 망상에 사로잡혀 무기 사찰을 허용하라는 유엔의 요구에 도전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폴란드 이민자의 막내아들이었다. 그리고 뉴저지 주 뉴어크에서 성장했다. 아버지는 부자도 아니고 정치적으로 중요한 인물도 아닌 그저 평범한 남자였을 뿐이다. 그러니 테러범들이 그를 암살할 만한 타당한 이유는 전혀 없는 셈이었다.
잊는다는 것은 앞을 보는 것이다. 나는 이런 유형의 사람들을 많이 보았다. 경제학자인 친구 레이첼의 설명을 따르자면, 복수를 하는 대신에 기대효용 극대화(maximization of expected utility) 원리를 따른다는 것이다. "과거에 일어난 것은 매몰비용이야. 문제는 미래를 최적화하는 건데. 남은 현재의 가치를 가지고 미래에 얼마나 많은 수익을 내느냐 하는 거 말야." 목표는 손실을 줄이는 것이고 기억은 그것을 가로막고 있다. 나는 오빠 할이 나처럼 강박관념을 갖지 않은 이유가 이런 것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모세 율법에 따르면 복수에 대한 법적 의무는 장자인 그에게 있다. 그렇지만 할은 예일 의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현미경으로 뇌 세포를 들여다보며 하루를 보낸다. 그의 박사 논문은 기억을 관할하는 세포 구조에 관한 것이었다. 할은 모든 것을 잊어버렸다. 3월 7일, 나는 예루살렘에서 혼자 깨어 일어났다. 12년 전 아버지를 겨낭한 총격 사건이 일어난 날이었다. 1986년 3월 어느 금요일 저녁에 일어났던 한 미국인 관광객이 총상을 입었던 사건 말이다.내가 도착한 복수의 도시는 명백한 룰과 제한이 있어서, 사실 책자도 있을 정도였다. 『규범(canon)』은 15세기 알바니아 귀족이었던 레케 듀카지니가 편찬했다. '법적 규준'을 뜻하는 『규범』에서 복수는 선택이 아니라 신성한 의무다. 룰을 따르기만 한다면 보복의 충동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은 허용될 뿐 아니라 장려된다. 알바니아는 유럽에서+ 가장 가난하고, 가장 혼란스러운 나라이다. 중앙정부가 국가 질서 수립에 실패했으니 당연하게도 알바니아 사람들은 『규범』의 비공인된 법에 이끌렸다.
나는 이 불가사의한 민간 법규 중에서 906조의 계율을 발견했다. '만일 누군가 총을 발사해서 머리를 가볍게 스쳐 지나가게 했을 경우' 보복하라고 규정되어 있었다. 마침내 아버지의 원한을 갚기 위한 룰을 찾았다. 나는 그 계율을 설명해줄 권위자가 필요했기에 북부 알바니아로 향했다. 마크 파슈코 말로타즈는 그 지방의 집안 간 불화중재위원회 위원이었다. 그 위원회는 복수와 관련된 문제에 대해 조언을 했다. 나는 마크에게 물었다. "여자가, 가령 딸이 복수할 수도 있나요?" 마크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이 경우에 아버지가 총에 맞았으니 그 딸이 복수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엔 어느 누구도 그녀를 살해할 수 없습니다." 『규범』에 따르자면 여자들은 씨족의 한 사람으로 간주되지 않기 때문에 "여자는 피의 원한을 사지 않는다." 하지만 상해를 입은 쪽이 손해배상금을 받아들일 것인지, 아니면 판사가 보는 앞에서 피고에게 신체적인 벌을 가할 것인지 선택할 수 있는 형벌제도를 갖춘 나라도 있다.
나는 이스라엘 도장이 찍히지 않은 깨끗한 미국 여권을 재발급했다. 추측컨대 이란은 세계 곳곳을 다니며 복수에 관한 자료를 찾는, 예루살렘에서 온 미국계 유태인 여자를 너그러이 봐주진 않을 것이다. 요르단 암만 공항 탑승대에도 '이란은 신권 정치를 채택하고 있다'는 표지가 있었다. 이란을 여행하던 2주 동안 나는 히자브라는 이름의 검은색 로브와 스카프를 착용했다. 1979년 이슬람혁명 이래 이란은 이슬람의 예언자 마호메트의 교리에 의해 통치되었다. 이슬람 정부는 코란과 일치하지 않는 법전의 모든 조항을 철폐했다. 호메이니의 이슬람혁명 민병대가 이란 정부군을 패배시킨 곳은 콤이었다. 콤의 거리는 신학생들로 붐볐다. 골파이가니 신학교의 이슬람학문센터 내 이슬람법률센터 소장, 아야톨라 알리 코라니는 51세였다.
"당신네 나라의 지폐에는 하나님에 관한 슬로건이 있다고 들었는데요." 그가 말했다. 나는 5달러짜리 지폐 뒷면에 '하나님 안에서 우리는 믿는다'라고 인쇄된 초록색 문자를 보여주었다. 그때 기도 시간을 알리는 정오 종소리가 퍼졌고, 확성기에서는 "신은 위대하시다."라는 말이 이어졌다. 그는 코란에서는 보복을 해도 좋다고 하지만 용서에 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고 말했다. "예수는 누군가 너의 뺨을 때린다면 다른 뺨도 내밀라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말하죠. 그가 널 때린 것처럼 너도 그를 때려라."
나는 알바니아에서 중단되었던 집안 간 불화중재위원회와 나누었던 보상금과 복수에 관한 주제부터 질문하기로 했다. 회교도가 비회교도에게 주는 배상금은 법제상의 교파에 따라 달라진다고 한다. 유태인이나 기독교인의 경우 1/3이고 조로아스터교인의 경우 1/5이나, 일반적으로는 1/2의 비율이 된다. "만일 비회교도인이 보상금 대신 보복을 원한다면, 받은 것 절반 정도의 부상밖엔 입힐 수 없나요?" 나는 자꾸만 내 목적을 향한 질문으로 옮겨갔다. "비회교도는 배상금을 받을 뿐이죠. 그들에게 보복은 허용되지 않습니다." 추론 결과 우리 가족은 낙타 1/9마리를 보상으로 받을 수 있다. 그러나 팔레스타인 민족주의자가 무엇을 보상할 수 있을 것인가?
나는 아야톨라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며, 그랜드 아야톨라 압둘 카림 무사비 아르데빌리를 만나기로 했다. 그는 호메이니 정권 초기 8년간 이슬람 법무부를 이끌었는데 종교법을 재검토해서 다시 제정했다. 이제 그는 콤에서 학교를 운영하고 있었다. 나의 질문은 뒤죽박죽으로 튀어나왔다. "팔레스타인 사람이 유태인을 쏜 경우에는요?" 그는 단호하게 말했다. "어떤 팔레스타인 사람도 배상금을 주거나 보복을 당할 이유가 없소. 그들은 유태인들과 전쟁을 하고 있기 때문이오." "그가 관광객이라면요? 그 유태인 관광객이 보복을 해서 그 팔레스타인 사람에게 총을 쏴서 부상을 입힐 수 있나요?" "그가 그냥 관광객이라면, 누군가를 해치거나 그곳 땅을 차지하거나 누군가를 공격하려고 온 것이 아니라면, 총을 쏴서 복수를 할 수 있소." 그랜드 아야톨라는 하급 아야톨라의 의견을 뒤집었다. 나의 아버지, 나의 가족의 보복은 보장되었다. 그는 "반드시 1mm라도 더 큰 상처를 내지 않아야 한다."고 했다. 이것이 복수에 관한 문제점 중 하나였다. 나는 그랜드 아야톨라를 만나서 얻은 성공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기껏해야 말뿐인 승리였다. 나는 사람들의 복수담에 귀를 기울이면 기울일수록 그것이 너무도 현재의 질서에 부합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 테러범을 찾고 있었던 그해 여름 내내 나는 그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나는 세상을 약탈자와 희생자로 나누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과 유태인들 역시 똑같이 갈등과 추방의 역사를 가진 희생자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양측 다 상대방을 위협적인 존재로 보고 그에 대한 반격을 정당화한다. 아버지의 테러 사건은 1987년에 있었던 팔레스타인 폭동, 인티파다(intifada:이스라엘 이 요르단 강 서안지구와 가자 기구를 계속 통치하는 데 저항한 팔레스타인 민중 봉기)가 일어나기 전의 일이었다. 그 당시 팔레스타인해방기구의 아부 무사 분파는 예루살렘에 있는 외국인들과 이스라엘인들을 사살하기로 결정했다. 그들의 테러는 아버지를 총격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세계는 두 가지 선택과 씨름하고 있었다. 다른 뺨도 갖다댈 것인가, 아니면 맞받아 때릴 것인가? 이 둘 사이의 긴장은 시대를 막론하고 영원하다. 내 책상에 앉아 있으면 오른쪽 창을 통해 최후의 만찬 장소였던 시온산이 내다보였다. 예수가 그의 사도들에게 "내가 너희들에게 새로운 계율을 명하노니 서로 사랑하라."라고 말씀하셨던 바로 그 장소였다. 왼쪽 창을 통해 다비드 타워가 솟아 있는 것이 보였다. 빌라도가 법정에서 예수에게 유죄 선고를 내렸던 그곳이다. 오른쪽은 용서요, 왼쪽은 유죄 선고라. 과연 나는 어느 쪽을 쳐다보아야 할까?나는 인류학자 조셉 지나트의 베두인족에 관한 연구 자료를 찾아냈다. 『혈족에 의한 복수(Blood Revenge)』라는 책에서는 복수가 집단적 정체성의 궁극적 수단이라고 설명했다. 다시 말해서, 내가 블루멘펠트 집안을 자극하면 아버지를 위해 복수를 할 뿐만 아니라 우리를 다시 하나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라는 것은 누굴까? 한 사람이 복수의 책임감을 느끼는 경계는 어디까지일까? 이스라엘 수상 벤야민 네타냐후는 복수의 경계에 관한 내 가정이 잘못된 것이라고 가르쳐주었다. 허즐산에 있는 군 묘지에 네타냐후의 형 요니가 묻혀 있었다. 1976년 요니는 우간다의 엔테베 공항에서 아랍인 공중납치범들에 의해 인질이 된 105명의 유태인들의 구출작전을 지휘하고 있었다. 네타냐후의 평판을 생각해 볼 때 그가 테러범들의 가족들에게 복수를 하지 않았을까 판단했다. "그렇다고 죽은 형님이 되돌아오는 것은 아닐 테니까요. 개인적인 복수에 대해 생각해본 적은 전혀 없습니다." 네타냐후에게 개인적 정체성과 집단적 정체성은 하나였다. 그의 나라가 그의 가족이었다. 개인의 독자성을 크게 선전하는 미국과는 달리, 중동은 집단적 존재를 장려한다. 네타냐후의 형제들은 요니에게 총을 쏜 자가 아랍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들은 전체 민족을 방어하고 또 민족 전체를 위해 복수할 것이다.
나는 테러범을 찾아 다시 라말라로 출발했다. 그 해 여름은 40년 만에 최대의 폭염이 퍼부었다. 여러 채의 작은 집들이 모여 하나의 커다란 집을 이루고 있었다. 나는 여러 문들 중 하나를 두드렸다. "오마르 카티브를 찾고 있어요." 그는 교도소에 있었다. 나는 집을 제대로 찾아온 것이다. 테러범의 형 이마드는 내가 피해자의 가족들이 복수할 것이라는 생각을 해보았냐고 물었을 때 대답했다. "그것은 언론에다 우리에게 관심을 가져달라고 말한 것과 다름없는 일이오." 나는 그들 집에 머물러 있는 동안 그 테러범 가족을 상대로 한 집단 보복에 대한 생각에 붙들렸지만, 지금은 아랍인이라면 누구라도 증오스럽게 느껴졌다.
나는 집단 보복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 키부츠를 찾아가기로 했다. 키부츠에 사는 사람들은 평화주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