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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의 색깔 이야기

타카시나 슈지 지음 | 일빛
내 마음의 색깔 이야기

타카시나 슈지 외 지음/서혜영 옮김

일빛/2003년 1월/240쪽/8,000원



노랑 - 고독하지만 고고한

사람들은 종종 붉게 타오르는 태양, 칠흑 같은 밤, 은백의 세계와 같은 말을 쓴다. 빨강이나 검정, 하양을 강조하는 상투어들이다. 이러한 표현들은 이들 색깔이 지닌 농후함이나 빛깔의 이미지를 우리에게 선명하게 각인시켜 준다. 하지만 노란색에는 그와 같은 어구 표현이 없다.

이러한 사정과 관계가 있는 건지 빨강, 하양, 검정 색깔에서는 빨강과 하양, 빨강과 검정, 혹은 하양과 검정 등으로 짝을 이루었을 때 윤곽이 분명한 콘트라스트가 그려진다. 대립과 긴장이 급격히 고조되면서 세계를 둘로 나눈 공간이 불시에 드러난다. 그렇지만 거기에 노란색을 던져넣으면 대립과 긴장은 순식간에 가라앉으면서 일종의 융해 혹은 혼란이 생기는 것 같다. 요컨대 노란색은 다른 색깔과 짝이 되기 힘든 색깔인 듯하다. 그런 뜻에서 노란색은 고독한 색깔이다. 하지만 그 때문에 고고한 색깔이 되기도 한다.

밀교에서는 부처와 보살로 넘치는 우주 공간을 원소나 계절, 방위로 분할하여 독자적인 질서를 만드는데, 그 안에 오색 테마가 등장한다. 방위와 관련지어 말하면 동쪽은 파랑, 서쪽은 하양, 남쪽은 빨강, 북쪽은 검정이 되며 중앙에 노랑이 놓인다. 중앙은 우주의 중심을 의미하며, 거기에는 여러 부처의 왕인 대일여래(大日如來)가 정좌한다. 밀교의 만다라는 이 대일여래를 중심으로 하여 동심원으로 퍼져 나가는 무한 세계를 상징하는 것이다.

이것은 노랑이 고독한 색깔이면서 동시에 고고한 색깔이라고 할 수 있는 근거 중의 하나이다. 즉, 노란색은 파트너를 거부하고 콘트라스트를 기피하는 색깔이다. 노란색을 고고한 색깔이라고 하는 것은 노란색이 눈부시게 빛나는 황금에 가장 가까운 색깔이기 때문이다. 노랑에 강렬한 빛을 비추면 금색으로 빛난다. 금색이 지니는 호화롭고 눈부신 분위기가 조금 칙칙한 노란색 표면에서도 그 빛을 받아 빛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금색은 주로 궁전이나 불상 등에 쓰인다.



검정 - 절제된 유혹의 빛깔

어찌된 노릇인지, 나는 젊은 시절부터 검은색 옷을 즐겨 입었다. 그런 나에게 친구들이 ‘미망인’이란 별명을 붙여줬다. 가끔 그 때문에 나도 남몰래 어떤 이의 상(喪)을 지내고 있다는 감상에 젖기도 했다. 프랑스 영화에 나오는 여자들의 어른스런 모습을 동경했던 걸까. <몽빠르나스의 밤>에 늙은 창부역으로 나와 노래하던 다미아, <오르페>의 죽음의 여왕 마리아 카잘레스, <전원교향악>의 미셀 모르강의 검은 망토, <악마는 밤에 오다>의 여자 악마 아를레티 모두 검은 인상이었다. 모두 흑백영화였으므로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지만.

이런 내가 나이가 들어 남들처럼 결혼을 하고, 진짜 미망인은 아니지만 ‘청상과부’가 되었으며, 그리고는 서른 즈음에 시집을 내보자는 생각에 이르렀다. 그렇게 해서 처음으로 정리한 책이 검은 상자(글자는 하양)에 들어간 ‘하얀 책’과 하얀 상자(글자는 검정)에 들어간 ‘검은 책’ 이렇게 짝을 이룬 두 권이다. 이 흑백 취향이라니, 집착은 계속됐다. 내가 책의 장정에까지 ‘검정과 하양’을 대비시키려고 했던 것은 극과 극에서 서로 비치는 ‘색깔 이전의 색깔’과 ‘색깔 이후의 색깔’이라는 나름의 생각을 표현하고 싶어서였다. 극과 극이라고 하지만 순수함과 탁함의 대조가 아니다. 오히려 두 색깔 사이의 공통점은 일종의 순수성이다. 하양은 다른 색깔을 거절함으로써, 검정은 그것들을 삼켜 호흡함으로써 유지되는 각각의 순수!

그러다가 언제부턴가 나는 나의 작품을 ‘검정이냐, 하양이냐’로 그처럼 단순하게 분류하는 것이 바보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이후 내 시집은 회색 계통, 검정과 하양을 섞은 색깔로 정착되었다. 그렇게 마음의 여유를 갖게 된 7년 전, 번역 일이 하나 들어왔는데 『나체로 살고 싶어 - 소냐 리키에르의 패션 철학』이란 책이었다. 그 속에서 나는 예전의 나와 같이 검정에 집착하며 정열적으로 검정을 얘기하는 빨간 머리 디자이너 소냐를 만났다.

“검정이란 색깔은 음란한 색깔이다. … 만약 그것을 제대로 입기만 한다면.”

“마음의 평안을 헝클어놓는 강렬한 감정. … 절대적인 검정. 인상적이고, 독특하고, 화려하고, 충격적이며, 그것은 마치 두 개의 눈동자밖에 보이지 않는 검은 고양이처럼 사람의 시선을 붙든다. 뺨을 불처럼 물들이는 ‘검정 와인’, 다른 색깔들을 향해 ‘NO'라고 말하며 홀로 작열하는 ’반역의 검정‘.”“모험에 미친, 금단을 사랑하는, 축제를 좋아하는 검정, 술책에 능란하고, 아름답고, 음험하고, 비윤리적이고….”

그랬구나. 과연, 상복을 입은 여자의 모습이 섹시하다는 말을 많이 들었지만 소냐가 말하듯이 검은색은 ‘비윤리적’이고 ‘음란한’ 요소를 숨기고 있는지도 모른다. 기독교의 수녀나 불교의 여승의 모습, 아니면 여학생이 교복을 입은 모습도 그 금욕적인 이미지가 오히려 사람의(남성의) 눈을 끄는지 모른다. 나는 소냐의 책을 번역하면서 내가 검정에 끌리는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 나도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까지 명쾌하게 알게 되는 기분을 자주 맛보았다.

내가 검정을 선호하는 동기와 소냐의 동기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소녀의 머리털은 타오르는 빨간색이라는데 그녀가 검정을 선호하게 된 사실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걸까? 그녀는 “빨강도 파랑도 노랑도, 자기가 검정을 ‘붙여’주면 그때서야 비로소 존재할 수 있다.”라고 썼다. 그녀는 다른 강렬한 색깔과의 조화라는 측면에서 검정을 발견한 것이다. 그녀가 검정에 끌린 것은 검정이 끌어안고 있는 그 온갖 종류의 색깔들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나에게 있어 검정은 오히려 무색투명한, 몸을 숨기는 도롱이와 같은 어둠의 색이다.



은색 - 소녀의 방문을 여는 열쇠

언제부턴가 ‘작고 멋진 은 숟가락’을 사야지 하고 생각하면서도 어찌 된 까닭인지 아직 손에 넣지 못했다. 어쩌면 앞으로도 영영 사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우선 그것을 사용하려는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것을 장식용으로 사려는 것은 아니다. 그저 그것을 ‘가지고 있다’면 기분이 좋겠다는 생각뿐이다. 나는 ‘작고 멋진 은 숟가락’을 갖고 있는 고풍스런 이야기의 소녀가 된 듯한 기분, 그저 그 정도만으로도 행복한 기분이 된다.

말하자면 ‘은 숟가락’은 내 마음 깊은 곳에 있는 소녀의 방문을 여는 열쇠다. 특별한 이유는 없지만 그 열쇠는 ‘금색’이어서는 안 될 것 같다. 금색이면 그 찬란한 빛 때문에 지나치게 ‘현실’처럼 느껴질 것이다. 소녀의 방은 ‘과거’에 있다. 그렇다고 과거가 만약 ‘회색’이라면 ‘은색’과 닮긴 했지만, 너무 쓸쓸하게 느껴질 것이다. 소녀 시절은 지금은 먼 과거가 되었지만, 아직도 가슴속에서 온화하게 빛을 내며 뭔가를 전해주고 있는 만큼 ‘은색’이 딱 어울린다.

‘금색’과 ‘빨강’이 만날 때 세계는 축제로 뜨거워진다. 그 기쁨은 우리들의 ‘봄’이 가져다줄 빛나는 밝음이다. 그에 비해, ‘은색’과 ‘빨강’이 만날 때는 누군가 나를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사랑해줄 때의 따뜻함이 번져 나온다. 세계가 모두 말라버린 ‘겨울’이라 해도 그 누군가의 ‘사랑’만 있으면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은 행복감을 준다. 하지만 같은 ‘은색’이라도 다음과 같은 때에는 그 빛이 증오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다.

12년 전 가을,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홀로 유럽 여행을 갔다. 로마에서 나는 친구와 한 아저씨를 만나게 되었는데 그 아저씨는 누군가의 권유로 이탈리아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부잣집에서 일하게 되었다. 그 아저씨는 제2의 인생을 개척하려는 의욕과 희망에 불타서 이탈리아로 왔다. 나중에 안정이 되면 가족도 부를 작정이었다. 아저씨는 자신을 인정해준 새 주인에게 보통이 넘는 충성을 다했다.

아저씨에게 주어진 임무는 저택의 ‘은 식기’를 닦는 일이었는데 1개월이 지나고 2개월이 지나도 새로운 일은 주어지지 않았다. 닦아야 할 ‘은 식기’는 끊임없이 나왔다. 더구나 그러는 사이 저택의 주인이자 돈이 썩을 지경으로 한가한 노인이 아저씨의 은 식기 ‘닦기’를 체크하기 시작했다. “조금만 희뿌옇게 보이면 닦지 않았다고 야단치고 번쩍번쩍하면 너무 많이 닦아서 은이 닳는다고 야단을 쳐요.” 아저씨는 처음 만난 우리에게 불평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그 부자는 오로지 ‘은 식기를 닦는 하인’으로 고용하려고 아저씨를 저 멀리 바다 건너에서 데려온 것이었다. 그러한 사정을 알게 되면서 아저씨는 의욕도 희망도 다 잃었다. 그 뒤로는 ‘은’이란 말만 들으면 어쩔 수 없이 그 아저씨의 눈물나는 이탈리아 생활이 떠오른다.



회색 - 인생의 메타포

“어떤 사진을 찍습니까?”

“여러 가지.”

“어떻게, 여러 가지?”

“흰색에서 출발해서 검은색에 골인할 때까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색.”

“그 사이에 회색도 있을까?”

“그럼, 회색도 지나가지.”



소설 『방문자의 시간』중 한 구절이다. 나는 이 소설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흰색과 검은색을 염두에 두면서 그 사이에 있는 회색의 상을 그려보려고 했다. 흰색이 탄생, 검은색이 죽음의 메타포인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배내옷은 하얗고 상복은 검다. 그렇다면 흰색에서 검은색으로 차츰차츰 농도를 더해가는 회색은 인생의 메타포가 아닐까? 탄생한 순간부터 시간이 흐르면서 회색은 점점 짙어져간다. 화살처럼 검은색을 향하여. 그 흰색과 검은색 사이의 동요가 인생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방문자의 시간』이다.

나 자신도 ‘원색은 이제 어울리지 않는’ 나이가 되었다. 요 몇 년 사이 여러 건물에 회색 공간이 늘었다. 다락방 같은 카페나 갤러리, 그러한 장소가 인기 있는 것은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세상이 지나치게 물질로 꽉 차 있다. 사람도 정보도 흘러넘쳐 도리어 거추장스럽게 느껴지기 시작한다. 그것과 균형을 맞추려면 내 주변만이라도 조금 모자라게 만들어 놓아야 한다. 유화보다는 모노 톤의 석판화를, 바그너보다는 에릭 사티를 즐기는 것은 그 때문이리라.

회색은 소리 높여 주장하지 않는 색깔이다. 그러나 색깔인 이상 주장이 없을 리 없다. 금욕적이고 절제된 형태로 ‘주장하지 않음’을 주장한다. 실제로는 주장하는 것이 오히려 쉽다. 조심스럽게 있기 위해서는 음(陰)의 에너지가 요구된다. 공기처럼 거기 있으면서도 없는 듯한 것이다. 그러한 인간을 나는 ‘환경 인간(백그라운드 맨)’이라고 부르는데, 내 환경 비디오도 그것을 시각화한 것이었다. 따분하지만 만족스러운, 사람의 냄새가 나지 않는 조심성이 느껴지는 편안함, 회색은 현대인이 잠재적으로 추구하고 있는 치유의 색깔이다.



피부색 - 모든 피부색은 아름답다

역사를 되돌아보면 햇볕에 탄 피부가 존중받기 시작한 것은 반세기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그 이전에는, 물론 피부가 하얀 혹은 그에 가까운 색깔의 인종에 한정되는 얘기지만, 하얀 피부가 존중받았다. 동양에서는 ‘하얀 피부는 일곱 가지 결점을 감춘다’고 하여 피부가 하얀 것이 미인의 조건이었다. 또 유럽에서는 오랫동안 지배 계급의 색, 즉 밖에서 노동하지 않는 자의 색깔이었다. 산업 혁명 뒤에 노동하는 장소가 야외에서 실내로 옮겨지자 노동자의 피부색은 하얗게 변해갔다. 그 결과 흰색이 지닌 우위성은 무너지고 유한 계급 사이에서는 햇볕에 탄 색깔이 유행하게 되었다. 햇볕에 피부가 탔다는 것은 피부를 태우러 갈 정도로 충분한 휴가를 즐길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미적으로 아름답게 여겨지는 색과 나의 피부색이 극단으로 다를 때나 혹은 이상형으로 여기는 피부색이 나의 피부색과는 다른 문화 속에 들어가면 종종 차별이나 갈등을 경험하게 된다. 1960년대에 들어와서 ‘블랙 이즈 뷰티풀’이란 말이 유행하면서 ‘검은 피부도 아름답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게 되자 흑인들은 자신들에 대해 다시 인식하기 시작했다. 이처럼 서로 다른 문화가 공존하는 곳에서 피부색은 사회적 차별뿐만 아니라 정치 문제와도 결부될 수 있는 것이다.

최근 노동 시장 등이 외국에 개방된 결과 우리 나라에서도 일상적으로 여러 가지 피부색의 사람들을 접할 수 있게 되었다. 앞으로는 매력적인 피부색을 생각할 때 그들의 존재 역시 무시할 수 없게 될 것이다. 국제화와 정보화의 물결 속에 사회가 급변하면서 피부색에 대한 미의식도 흔들리고 있다.



카키색 - 자연스러운, 너무나 자연스러운

“카키색이라니 무슨 색이야?”

“그렇게 새삼 물어보니까….”

“초록이랄까, 갈색이랄까, 둘 중에 어느 쪽도 아니고.”

“그래, 맞아, 의외로 탁한 색.”

“동냥주머니?”

“그럴까? 꽤 도회적이랄까, 멋쟁이 색깔이잖아.”

“그런 셈이지.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군복 아냐?”

“미군 방출품 색깔. 하지만 그거 금발이 입으면 어울리는데, 검은머리한텐 잘 안 맞는 것 같아.”“어머, 중국 병사들도 입었어. 모자라든가 옷깃에 빨간색이 들어간 것 말야.”



여자친구들이 모인 자리에서 카키색에 대해 물어봤더니 이야기가 그치질 않는다. 학생운동이 한창이던 시절, 젊은이들은 장발에 청바지처럼 돈이 들지 않는 멋 부리기에 열심이었는데, 미군 방출품 셔츠와 레인코트, 크고 질긴 천 가방과 숄더백이 젊은이들의 필수 아이템이었다. 그 싸구려 패션은 어디로 가버린 걸까? 요즘 젊은이들을 보면 그들의 아버지나 어머니가 입고 있는 것보다도 더 비쌀 것 같은 일류 브랜드 상품을 걸치고 다닌다.

겨우 20년의 세월 동안 완전히 부자가 된 사람들은 더 이상 미군 방출품 같은 것에 손을 내밀지 않는다. 그러면 카키색은 거리에서 그 모습을 감추고 말았을까?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살아 있었다. 그것도 최첨단의 유행을 이끄는 색으로.

카키색, 인도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이 색깔은 다른 이름으로 마른 풀색이라고도 한다. 가을 입구의 들판이나 산의 색깔이리라. 소위 어스 컬러(earth color)의 왕자로도 일컬어진다.

몇 년 사이에 환경 문제가 국제적으로 크게 대두되었는데 환경 문제를 해결하려면 개개의 라이프 스타일에 대한 재검토에서 시작하여 어떤 삶의 방식이 인류에게 적합한 것인지 따져보는 커다란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도시의 거리에 카키색이 돌아왔다. 그러나 흙의 냄새, 풀의 냄새가 나는 색깔을 몸에 두르고는 빽빽한 시멘트 빌딩에 배기 가스와 소음으로 가득 찬 거리를 걸어야 한다는 것이 어딘지 모르게 안타깝다. 그것은 모습을 감추어버린 들판과 푸른 산들의 환영이 길을 걷는 것처럼 보인다. 열대 우림이나 남극의 빙산만이 아니라 도시도 지구의 일부다. 그렇게 생각하니까 카키색은 정말로 지금 이 시대를 상징하고 있는 것 같다.



장미색 - 가능성으로서의 모든 색깔

보통 사전에는 장미색을 연한 다홍색이라고 하는데 내가 생각하는 장미색과는 좀 다른 것 같다. 장미색을 ‘연한 다홍색’으로 한정할 수 없다. 소년 시절에 처음 읽고 그 후로도 항상 좋아한 프랑스의 문인 구르몽이 쓴 책에서 본 다채로운 색깔들이 머리에 남아 있다. 장미색이 얼마나 다채로운가는 각각의 색깔을 열거한 글의 서두만을 보는 것으로도 잘 알 수 있다. 인용부호 없이 열거해 보자.

구리 색깔의 장미꽃, 창녀처럼 화장한 장미꽃, 티없이 귀여운 뺨 같은 장미꽃, 눈이 까만 장미꽃, 순금 색깔의 장미꽃, 은색의 장미꽃, 여자끼리 하는 사랑을 생각하게 하는 눈빛의 장미꽃, 꼭두서니 빛 이마의 장미꽃, 노란 빛이 도는 상아 이마의 장미꽃, 핏빛 바다 색깔 입술의 장미꽃, 유황 색깔의 장미꽃, 복숭아 열매 색깔의 장미꽃, 고기 색깔의 장미꽃, 포도색 같은 장미꽃, 제비꽃 색깔의 장미꽃, 연분홍 장미꽃, 종이로 만든 장미꽃, 새벽 빛의 장미꽃, 수국 색깔의 장미꽃, 아마 색깔의 장미꽃, 향굴나무 색깔의 장미꽃, 살구 색깔의 장미꽃, 새하얀 장미꽃, 지푸라기 색깔의 장미꽃, 보리 색깔의 장미꽃, 연보라색 장미꽃, 진홍색 장미꽃, 대리석 색깔의 장미꽃, 청동 색깔의 장미꽃, 불꽃 색깔의 장미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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