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보트 비밀일기
제프리 브룩스 지음 | 들녘
U-보트 비밀일기
제프리 브룩스 지음/문근식 옮김
들녘/2003년 2월/396쪽/12,000원
바다에서의 첫 경험
1935년, 열아홉 살이 된 나는 기술 훈련이 주가 되는 독일 해군의 통신 직별에 지원하여, 베를린 템펠호프에서 6일 동안 정밀한 이해력 및 심리 테스트를 거친 후 통신과정에 합격했다. 1936년 초 슈트랄순트에서 3개월 동안 기초 군사교육을 수료한 다음, 한동안 무선통신 감청반에서 복무하다가 처음으로 소해정 R-15와 M-102에서 함상 근무를 시작했고, 1938년 10월에는 통신 중사로 진급을 했다. 나는 진급 후에 구형 어뢰정 T-139에서 통신장 임무를 맡았다. T-139는 24전단에 배속되었고, 우리는 최신형 음파 탐지기와 통신장비를 갖추었다는 이유로 항상 특수임무를 부여받았다.
나는 T-139에서 유일한 현역 해군이었다. 어뢰정에 근무하는 부사관들과 수병들 대부분은 옛날에 독일 황제를 위해 바다에서 싸웠던 사람들이었다. 어뢰정 T-139는 내게 최고의 해상 근무지였고, 전쟁이 끝날 때까지 발트 해에서 이 어뢰정과 함께 보내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일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14일 간의 휴가를 마치고 돌아와 보니 경순양함 칼스루헤로 나를 전출시킨다는 전문이 와 있었다. 나는 떠나고 싶지 않았다. 나는 당시 키일에서 보조 약사로 일하는 일로나와 사랑에 빠져 있었는데 그 것도 내가 칼스루헤로 떠나고 싶어하지 않은 이유 가운데 하나였다. 그러나 다행히도 훈련소 시절 같이 훈련받았던 동기들이 발령 취소를 요청하였으므로 나의 전출은 취소되었다.
사람의 운명이란 얼마나 가느다란 실에 매달려 있는 것일까? 아니면 인간의 운명이라는 것은 이미 결정되어 있는 것일까? 그때까지는 몰랐지만 이 사건은 내 인생에서 새로운 전환점이 되었다. 만약 내가 그 배에 탔더라면 더 일찍 죽음의 길로 들어섰을지도 모른다. 나는 어머니로부터 칼스루헤가 침몰하였고 실종자 명단에 내 이름이 있다는 편지를 받았는데,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내 이름은 정말 순양함 칼스루헤의 승조원 명단에 포함되어 있었다.
며칠 후 나는 잠수함 부대에 근무하도록 명령서를 받았다. 나중에 함부르크에서 동료들을 만났을 때 그들은 목숨을 보장받을 수 없는 부대, U-보트로 내가 전출된 것에 대해 많은 걱정과 동정심을 보여주었다. 나는 U-보트 통신학교에 입교하여 4개월 간 통신교육을 받은 후 키일에 있는 1전단에 배속되었다. 그 해 10월, 나는 브레멘에 있는 데쉬막 조선소에서 건조가 완료되는 Type-9B형인 U-109 잠수함에 탑승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U-109 : 출동 준비
Type-9B형 잠수함인 U-109함은 1940년 12월 5일, 데쉬막 조선소 부두에서 취역식을 가졌다. 취역식은 함교 마스트에 독일 전투 깃발을 게양함으로써 간단하게 끝났다. 다음날 우리는 키일 운하 동쪽으로 이동한 다음 잠수함 부대에 들어가 연료 보급을 받은 후 키일을 떠나 단치히 만으로 향했다. 우리는 긴급잠항 연습을 했고, 부서별로 긴급 상황 훈련을 했으며, 어뢰 발사 훈련도 받았다.
U-109는 제27 전술훈련 전단과 상봉하기 위하여 기니아로 향했다. 우리의 새로운 지원함은 최근에 건조된 빌헬름바우어 함이었다. 훈련은 끝없이 계속되는 선단 공격의 반복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U-보트 훈련 함정들의 임무는 100마일의 방대한 정찰대형을 이루고 호위함정 2척과 빌헬름바우어 함으로 구성된 모의 호송선단을 탐색하는 것이었다.
U-보트 훈련 전대는 단치히 만 밖으로 나가서 진형을 형성했다. 어뢰정이 접근하고 잠수함은 100피트 심도로 잠항했다. 잠시 후 피셔 함장은 폭뢰 공격에 대한 시범이 진행되고 있다고 방송했다. 어뢰정은 U-109와 같은 침로로 항해하며 100야드 거리에서 60피트 심도로 두 발의 폭뢰를 투하했다. 마치 거인이 주먹으로 선체를 내려치는 듯한 충격이 느껴졌다. 해머로 선체를 때리는 듯한 소리가 계속되었는데 그것은 바다를 삼켜버릴 듯이 으르렁거리는 천둥소리 같기도 했다. 정말로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순간적으로 중앙 통로를 바라보았는데 함장을 비롯한 여러 사람 얼굴에는 겁에 질린 듯한 표정이 역력했다. 나는 이전 어디에서도 이런 굉음은 들어본 적이 없었다.
훈련전대는 그로부터 2주를 더 바다에서 보냈다. 통신사들은 정말 쉴 틈이 없었다. 전문은 끊임없이 쏟아져 들어왔고, 모두가 전문 정리, 해독, 일지 기록 및 보고서 준비 등으로 바빴다. 그리고 함장의 회신 전문을 암호로 조립한 후 모르스 부호로 다시 보내야 했다. 또한 각 함정으로부터 들어오는 통신암호를 탐지하여 그 방향을 찾아야 했고, 이런 정보들은 전투정보실에 있는 해도에 기점 되도록 보내졌다. 항공기를 발견하면 우리는 즉시 잠항해야 했다. 그 순간은 잠시나마 쉴 수 있는 시간이었지만, 우리는 우리가 놓친 장파 방송망을 찾아서 통신신호를 계속 수신해야 했다. 마침내 1941년 3월 16일 모든 훈련이 종료되었다.
1941년 5월 2일, 우리는 대서양 작전임무를 준비하기 위해 보급품과 연료를 적재하러 키일로 향했다. 적재 후에 우리는 2전단에 배속되어 비스케이 해변에 있는 로렝에 정박하기로 되어 있었다. 함장 피셔 중령은 5월 6일 출항하도록 명령을 받았다. 구름 한 점 없는 청명한 날씨였다. 오후 1시 30분, 우리는 함미갑판에서 출항 행사를 가졌다. 군악대가 ‘우리는 영국으로 간다’라는 군가를 연주했다. 긴 강철로 만들어진 선체는 고등어와 유사하게 흑색과 녹색 페인트로 잘 위장되어 있었다. 엔진은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냈고 티피츠 방파제를 돌면서 우리는 왕년의 여객선 세인트루이스, 바이첼, 힌덴부르크함 갑판에서 우리를 바라보는 구경꾼들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최초 임무 : 파란만장한 실패
U-109는 쉐트란트 베르겐 해협을 향해 북쪽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U-보트는 항공 강습의 위험이 있으니 주간에는 잠행하여 이동하라는 작전 지시에 따라 독일 해안과 노르웨이 스타뱅거 사이에서 북쪽으로 항해하고 있었다. 함장의 첫 번째 중대한 실수는 이 지침을 무시한 판단 착오였다. 30분 후 피셔 함장이 부상하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조타장은 세차게 머리를 흔들었고 슈바르츠코프 대위도 강하게 반대했다. 그러나 함장은 우리 배가 계속 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함장은 9일 만에 대서양에 도착하면 되는데도 특별한 이유도 없이 전 승조원의 목숨을 담보로 7일 만에 도착하려는 것 같았다. 그런 열성적인 행동은 함장이 기사십자 훈장을 노리고 있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통신사 험펠이 통신을 받아 해독을 시작했다. 나는 U-보트 사령부로부터 수신된 전문임을 알고는 긴장했다. “영국 전투 순양함 후드(Hood)가 오늘 아침 덴마크 해협에서 독일 전함 비스마르크에 의해 격침되었음. 적 중순양함들은 비스마르크와 프린츠 오이겐을 미행하고 있음. 비스마르크는 미행 세력을 서부 잠수함 세력인 ‘베스트 보트’ 정찰선 쪽으로 유인을 시도하고 있음” 함장은 혼자 흥분하면서 함내 방송으로 승조원들에게 승리를 방송했다. 그 유명한 영국 전함 후드를 침몰시키는 것은 모든 잠수함 승조원들의 꿈이었던 것이다.
적함으로부터 함수 쪽에 일격을 당하고 28노트로 감속하여 항해 중인 비스마르크는 몇 척의 적함으로부터 추적을 받으며 대서양 브레스트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영국은 비스마르크를 차단하기 위해 캐나다, 영국, 지브롤터에서 전함들을 출항시켰다. U-보트는 비스마르크로부터 100마일 남서부에 위치하고 있었다. 잠시 후 잠수함 사령관으로부터 어뢰를 보유하고 있는 모든 U-보트는 비스마르크를 보호하라는 명령이 하달되었다.
피셔 함장은 기관장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전속을 내어 비스마르크를 향해 북쪽으로 변침하라고 명령했다. 디젤 엔진은 둔탁한 망치 소리를 내기 시작했고, 계속되는 파도가 함정을 강타했고 함교탑 부근도 심한 충격을 받았다. 항해 도중 전함 비스마르크로부터 모든 U-보트에 전문이 전파되었다. “우리는 최후까지 싸우겠다! 총통각하 만세! 독일 만세!” 독일 최대의 전함에 타고 있던 2,400명이 사형선고를 받았다는 생각에 소름이 끼쳤다. 그들 중 꽤 많은 사람들이 키일 시절 인사참모부에 있을 때의 친구들이었다. 전함 비스마르크를 모항으로 끌고 들어오기 위해 아침 일찍 10인치의 굵은 밧줄을 가지고 자이레를 출항했던 10,000톤급 해군 유조선 엠란트의 항해가 취소되었다. U-109는 종일 탐색했지만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오직 높은 파도만이 시야를 가리고 있을 뿐이었다. 밤이 되어서야 피셔 함장은 탐색을 마치고 로렝을 향해 전속력을 내었다.
U-109는 케너벨과 포트루이스 사이 해협을 저속으로 통과하여 신속하게 계류했다. 우리는 전단장, 장교들 그리고 육상 근무자들로부터 환영을 받았다. 이것으로서 U-109의 첫 전투 초계임무는 종료되었다. 5월 30일, 태양이 눈부신 날이었다. 되니츠 제독이 몇몇 보좌관들과 함께 나타났다. 피셔 함장이 그의 첫 임무 종료 후 안전 귀환을 보고했다. 되니츠는 그의 재킷 주머니에서 ‘철십자 2급 훈장’을 꺼내 함장의 손에 쥐어주었다. 오토 페터스가 내게 속삭였다. “함장은 저것 때문에 다음 출동 때에는 더욱 미친 짓을 할 거야.”
블라이크로트 지휘권을 인수하다
다음 날인 1941년 5월 31일, U-556이 부두에 계류했으므로 나는 그 함의 통신장인 훈련소 동기 슈럽트를 만날 수 있었다. 나는 그로부터 10일 전 그린란드 해협에서 유조선을 공격한 것은 바로 U-556이었고, 유조선이 우리 배 주위에서 폭발하여 구축함들이 U-109를 공격하지 않아 결국 우리가 살아남을 수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당시 함장은 적 항공모함이나 전함을 격파시키기 위해서는 잠수함의 희생을 감수할 수도 있다고 말했었다. 하지만 1941년 5월 21일에 일어났던 비상상황에서 함을 완전히 지휘․통솔하지 못했다는 것이 사령부의 의견이었다. 따라서 사령부는 함장을 무능하다고 판단했고 현 함장직에서 사직토록 명령했다.
U-보트 부대에서 ‘해결사(Ajax)’로 알려진 신임 함장 블라이크로트는 부임할 때, 그들이 배에 있으면 배가 가라앉지 않는다는, U-보트 경험이 아주 많은 갑판사 베르트홀트 자이델을 포함해 전에 탔던 U-67에서 승조원 몇 명을 데리고 부임했다. 6월 28일, 우리는 개인 물건을 함내 사물함에 챙겼다. 그리고 유언장을 작성해서 전단 행정 사무실에 제출했다. 함장은 신속히 인원 파악을 했으며 수행원 몇 명을 인솔하고 도착한 전단장에게 U-109는 출항 준비가 완료됐다고 보고했다. 전단장은 답례했고 대열은 해산했다. “우리는 영국으로 간다.”는 구호와 함께 추진모터를 작동하여 바다로 항진해 나갔다. 우리의 임무는 4개월간의 남아프리카 해안 초계였다.
7월 6일 무풍지대를 빠져나와 마데이라 서부 300마일 위치에 도착했을 때 함교에서 견시가 “마스트 보임!”이라고 보고했다. 우리는 그 함정이 남쪽으로 항해하는 단독함정이라는 것을 확인한 후 곧바로 추적에 들어갔다. 이른 오후가 되어 우리는 상선의 함수 최적 공격위치에 도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잠수함이 발사 위치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또 한 시간이 필요했다.
함장은 계획을 바꾸어 부상해서 그날 밤 수상 공격을 감행하겠다고 말했다. 우리가 희미한 항적을 추적하여 어둠 속에서 상선을 향해 속력을 올리고 있을 때 은빛 달을 배경으로 상선의 실루엣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세 번의 어뢰 공격이 실패하고 네 번째 어뢰가 정지한 화물선을 향해 발사되었다. 그러나 발사하자마자 상선은 함수 좌, 우현에 커다란 거품 모양의 물결을 만들며 전진했다. 함장은 상선이 청음기를 가지고 있을 것이며, 게다가 매번 어뢰를 피하고, 어뢰 공격을 받고 있다는 것을 한 번도 통신하지 않은 것으로 미루어 그 선박에는 다른 무엇인가가 있다고 단정했다. 장교들은 아무 말도 못하고 이 신비스러운 배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함장은 그 배가 Q-Ship(독일 U-보트를 공격하기 위해 영국에서 운용하던 상선을 위장한 군함)이라고 판단하고 함포로 격침시키기로 결정했다. 배는 전속력으로 전진했고 드디어 상선이 사정거리에 들어왔을 때 10.5cm 함포가 사격을 개시했다. 계속되는 사격으로 적함은 침몰하기 시작했다. 검고 두꺼운 연막 속에서 불꽃이 몇 번 튀었고, 연막이 상선을 완전히 가려버렸다. 잠시 후 상선이 연기 속에서 빠져나오는 것이 보였다. 함장은 상선이 우리를 충돌, 공격하리라는 것을 미리 예상하고는 전속을 지시했다. 마치 적함에 추적 당하는 것처럼 엔진은 미친 듯이 쿵쾅거리며 증속되었다. 갑자기 상선 현측에서 섬광이 분출되고 포탄이 연속적으로 우리의 머리 위를 지나갔다. 저것이 바로 Q-Ship이라고 함장이 소리쳤다.
우리가 추적을 당한지 약 한 시간 정도가 흘렀다. 함장은 상선이 해군 지휘 하에 행동하고 있다고 결론을 내렸다. 함장은 완전히 어두워지면 우현으로 변침하여 상선이 통과할 때 맞힐 것이라고 작전을 설명했다. 그러자 Q-Ship을 가라앉히기 위해 세운 함장의 교활한 기동 계획에 함내 총원은 흥분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하지만 상선은 나타나지 않았고 통신도 없었다. 청음기를 이용해서는 도저히 추진기 소음을 찾을 수도 없었다. 한 시간 정도 완전한 침묵이 흐른 뒤 함장은 전투 배치 해제를 지시했고 한숨을 쉬며 침대로 가버렸다. 정오에 함장은 결국 상선을 포기했다. 함장은 상선이 도망간 것에 대해 상당히 고민했는데, 사실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괴로워하는 듯했다.
성공적인 특수임무
1941년 10월 5일 U-109는 저녁 7시 아무런 공식 행사도 없이 출항했다. U-109의 세 번째 초계는 13일 늦게 시작하여 서쪽으로 향했다. 11월 2일 정오에 사령관은 블라이크로트 함장에게 특수 임무를 수행하라는 전문을 보냈다. 버뮤다 동쪽으로 가서 노르웨이 함정인 실바플라나와 상봉하라는 내용이었다. 이 함정은 독일 함정 아틀란티스에 의해 나포되었던 함정이었고, 2천 톤에 달하는 천연고무, 5천 톤에 달하는 녹말, 그리고 나포 책임 승조원들이 타고 있었고 나머지는 전원 노르웨이 승조원이었다.
다음 날 오전 우리는 잠망경 심도로 그 배를 확인했다. 블라이크로트 함장이 만약 적함의 공격을 받는다면 U-109는 즉시 잠항을 할 예정이므로 상선은 U-109의 잠항 침로를 가로질러 적함을 따라서 항해를 하고, 실바플라나가 적함의 후미 0.5마일에 위치할 때 우리가 동북동쪽 10노트로 항해할 예정이라고 실바플라나 나포 함장에게 설명해 주었다. 정오에 모든 준비가 완료되었다.
4일 동안 우리는 안톤 코리도어를 따라 스페인 북부 쪽으로 갔다. 함장은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곳은 그 누구도 어뢰를 쏘아본 적이 없는 곳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음 날 이른 아침, 여명을 보기 위해 내가 함교에 올랐을 때 항공기가 접근한다는 당직자들의 고함소리가 들렸다. 그 비행기는 호위 항공기인 하인켈 115기였다. 갑자기 비상벨이 울렸고 우리 배는 즉각 잠항했다. 우리가 120피트에 도달하기도 전에 함미 쪽에서 귀를 찢는 듯한 세 발의 폭발음이 들렸다. 함장은 상호 식별신호탄을 발사했고 항공기는 우리가 알 수 없는 세 발의 불꽃 신호탄을 발사하면서 마치 독수리처럼 우리 앞쪽으로 하강했다.
한 시간 후 우리가 다시 부상했을 때 항공기는 가버렸고 우리는 실바프라나를 전속으로 추적했다. 그들은 약간 먼 거리에서 우리에게 어떤 도움이 필요한지 불빛 신호로 물었다. 그러나 함장은 그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도 스페인 해역에 남아 있어야 된다는 신호를 보냈다. 사령관이 전문을 보내왔다. ‘블라이크로트 함장, 만약 우리 폭격기에 의해 손상을 받으면 모든 것을 포함하여 보고할 것’ 그들은 우리가 아군 폭격기에 공격을 받은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저녁 11시에 우리는 산텐더에 도착했다. 매우 따뜻했지만 칠흑같이 어두운 밤이었다. 실바플라나도 항해등을 켰다. 네 척의 소해정이 어둠 속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램프 불빛을 이용하여 함장은 나포 선박을 그들에게 넘겼고, 호송선단은 비아리츠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