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빵 속에 담긴 작은 행복 이야기
박경희 지음 | 평단문화사
1장 마음 깊은 곳에서 들려오는 "도와줘야 한다"는 목소리
굶주린 북한 아이들, 무조건 도웁시다98년 8월 18일에서 22일까지 북한을 다녀온 이야기를 할게요. 남편 사십구제 마치고 갔지요. 허탈감이 가슴 한 켠에 남아 있던 때였습니다. 그 때 마침 내 나라 내 동포에게 빵을 건네기 위해 북한에 가게 되었으니 다행이었어요. 그 어느 때보다 사명감도 느껴지고 가슴이 설레기도 하더군요.
북한 땅을 직접 밟게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감격스러웠어요. 우리 일행이 머문 곳은 북한에서 가장 고급스럽다는 고려호텔이었어요. 호텔에 여장을 풀고 창 밖으로 평양 거리를 내려다보았어요. 거리는 깨끗했고 사람들의 발걸음은 반듯했습니다. 평온했지만 제복을 입은 교통관들과 여성들의 단정한 옷차림 등을 보면서, 현재 내가 어디 서 있는가를 실감하겠더군요.
다음날부터 업무가 시작되었지요. 아주 한적한 시골 마을에 있는 유치원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평양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가 온몸을 조여오는 것 같았습니다. 가기 전에 이미 들었던 먹을 것이 없어 풀뿌리를 캐 먹는 아이들, 소나무 송진을 빨아먹는 주민들, 목숨 걸고 압록강을 건너가는 북한 동포들…. 이 말들이 사실일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너무 배고파서 누워 있는 것조차 힘겨워하는 아이 곁으로 갔습니다. 그 아이 손을 잡는 순간, 내 가슴에 불덩이 한 뭉치가 떨어지는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우리는 그 동안 좀 잘 살게 되었다고 얼마나 흥청망청 먹을 것을 버리며 살아왔나. 아프리카 난민 아이들과는 또 다른 가엾은 아이들, 이들이 누구인가? 이념 따위가 무엇이란 말인가. 당장 배고파 눈조차 뜰 수 없는 저 아이들을 외면한다는 것 자체가 죄악 아닌가. 도와줘야 한다. 도와야 한다는 데는 어떤 조건이 붙을 수 없다'
지금도 월드비전에서 세워준 국수공장은 잘 돌아가고 있습니다. 전쟁 식량으로 쓰일 것을 막기 위해 젖은 국수만을 뽑아내고 있지요. 당장 아이들에게 먹을 것만 생산하는 것도 바쁜 처지라고 하니 우리가 도와주는 물자가 엉뚱한 데 쓰이는 건 아닌가 걱정 안 하셔도 될 것입니다. 세계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굶주린 아이들을 만나 보았지만, 북한 아이들만큼 가슴 아팠던 적은 없습니다. 저들은 내 민족, 내 아이들이니까요.
50불에 평생 노예가 된 아이작년에 케냐와 우간다, 인도에 갔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케냐는 심한 가뭄 때문에 그들은 월드비전에서 제공하는 구호물자에만 의존하며 살고 있었습니다. 우간다는 수단과 국경문제 때문에 아이들이 희생물로 바쳐지는 나라였어요. 우간다 반군들은 소년소녀들을 납치해 가고 있었습니다. 소년들에게는 총싸움을 시키고, 소녀들은 성적 노리개로 삼는다고 하더군요.
인도에 가서 본 모습들은 다시 생각조차 하기 싫을 정도입니다. 인도는 첫째 아이는 여자든 남자든 키운다고 해요. 그런데 둘째부터는 여자아이가 태어나면 사흘을 그대로 방치해 둡니다. 그런 후에 독초로 수프를 만들어서 먹입니다. 5분에서 10분이 지나면 여자아이는 죽고 맙니다. 인도는 여자들이 결혼하려면 지참금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흘만에 죽이는 이유는 정들면 죽이기 힘들기 때문이라니 끔찍합니다. 모두가 가난 때문입니다. 월드비전에서 할 일은 여자아이를 낳은 집을 찾아가 염소 한 마리를 사주는 것이었지요. 일년이 지나면 송아지 한 마리를 또 사줄 것이라고 약속하면서 말입니다. 저도 12명의 여자아이 몫의 염소를 사주었습니다.
인도에서 만난 한 여자아이를 지금도 잊을 수 없습니다. 그 아이는 부모가 지은 빚 50불을 갚기 위해 평생 노예가 되었습니다. 밧줄 공장에서 새끼줄 꼬는 일과 잎담배를 나르는 일을 하루에 10시간 이상을 합니다. 그 아이를 도와주지 않고는 도저히 발이 떨어지지 않더군요. 그 자리에서 50불을 갚아주었더니 그 어머니가 내 무릎에 머리를 대고 흐느껴 울었습니다.
어쩌면 우리에게 50불은 아이들 간식비 정도밖에 안 되는 돈일지도 모릅니다. 그 돈 때문에 한 어린 영혼이 평생 노예처럼 살 것을 생각하니 견딜 수 없었습니다. 이 아이들과는 하루 빨리 결연을 맺어서 노예 생활로부터 해방시켜 주는 것이 급선무였습니다. 내 주머니에 있는 돈이 모두 2천 불이었는데 몽땅 내놓았습니다. 그 돈이면 40명의 아이들을 풀어줄 수 있었으니까요. 그럴 수 있었던 건 나만의 힘은 아니었습니다. 내 마음 깊은 곳에서 조용히 들려오던 "도와줘야 한다."는 명령에 따랐을 뿐이지요. 고통당하는 아이들의 눈망울을 어찌 외면할 수 있나요.
2장 작은 사랑의 실천으로 이웃을 행복하게…
쪽방냄새 풍기며 한 끼의 식사를 얻기 위해 줄 서 있는 사람들, 여기저기 널브러져 잠을 자고 있는 모습, 술에 취해 고래고래 소리지르는 노숙자, 대학로는 노숙자들의 집결소 같습니다. 저들도 한 때는 어엿한 직장인이며 가장이었을 것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릿해집니다. 쪽방이라는 말을 들어 보셨는지요? 한 사람 발뻗고 누우면 꼼짝도 할 수 없는 방, 그 방마저도 다달이 내야 하는 월세가 없어 대학로에서 노숙을 할 수밖에 없는 이들이 많습니다.
어느 날, 노숙자들과 쪽방 사람들을 돌보는 일을 하는 한 자선사업가가 장례식에 참석했습니다. 죽은 사람은 쪽방에 살았던 일용 근로자였습니다. 그를 추모하기 위해 몇몇 동료들이 공동묘지에 같이 갔는데 그들의 시선은 장례 절차에 쓰이는 화환에 가 있었습니다. 사업가는 돌아오는 길에 그 이유를 물었는데, 도리어 한 노숙자가 "선생님, 우리가 죽어도 저런 화환을 꽂아 주실 건가요?"라고 묻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동료의 관 위에 놓였던 화환이 너무도 부러웠던 것입니다. 이 세상 사는 동안 한 번도 인간 대접을 못 받아 본 사람들은, 당연히 죽어서도 그 누구에게 관심을 받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던 거죠. 그들에게 화환은 색다른 세계였을 것입니다. "물론이지요. 제가 목숨 다하는 날까지 여러분에게 화환을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자선사업가가 말했더니 그들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졌습니다.
또 한 번은 그들에게 특별 행사를 행했습니다. 뷔페 식 음식을 차린 후, 위로 잔치를 열었던 거죠.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음식이 많이 남아, 맛이 없어 안 먹냐고 물었지요. "지금까지 이렇게 많은 음식을 먹어 본 적이 없어, 위에서 받아들이질 않네요. 마음은 여기 있는 음식 모두 먹을 것 같은데…. 느끼해요. 죄송해요." 그 날 자선사업가는 남은 음식을 골고루 나누어주며 나중에 먹으라고 싸 주었지만, 가슴이 아팠습니다. 실컷 먹고 싶었던 음식 앞에서도 맘대로 먹을 수 없을 만큼 배를 굶주려 온 사람들…. 지금도 쪽방이라도 맘놓고 살 수 있으면 더 큰 소원이 없겠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세상이 바뀌었으니 그들의 삶도 바뀌길 희망합니다.
노년의 사랑얼마 전에 병원 앞에서 노부부가 같이 걷는 것을 보았습니다. 할머니는 몸이 아주 불편한 것 같았는데도 할아버지의 극진한 사랑 때문인지 얼굴이 평화로워 보였어요. 그 모습을 보는 순간 왜 그리 콧등이 찡해 오던지 '부부가 늦게까지 함께한다는 건 바로 저런 거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랜 세월 버려진 고아들을 친자식처럼 키우던 할머니가 있습니다. 그분은 소학교만 졸업하고 결혼했는데, 부산에서 고아원을 운영하던 친정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그 일을 맡게 되었습니다. 봉사하느라 세월 가는 줄도 잊고 살았는데, 어느덧 예순이 되었습니다. 얼마 전에 나라에서 고아원을 운영하게 되면서부터 어느 정도 여유도 생겼고 그분은 다시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검정고시 학원에 등록을 하게 되었습니다. 다음 주면 학원에 가게 되었는데 그 사실을 안 할아버지가 한 가지 결심을 하게 됩니다.
평생 버려진 아이들 엄마 노릇 하느라 외출 한 번 맘대로 못해 본 사람, 늘 가슴속에 못다 한 공부에 대한 한이 남아있던 아내, 그 아내를 위해 자신이 무엇을 해줄 수 있는가를 생각하던 중 염색을 해주기로 한 것입니다. 할아버지는 할머니가 잠든 사이 못 쓰는 칫솔에 염색약을 묻혀서 한 올 한 올 염색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다음 날 아침, 10년은 더 젊어져 있을 할머니의 얼굴을 기대하며 잠에서 깬 할아버지는 깜짝 놀라고 맙니다. 할머니의 얼굴에는 열꽃이 피어 있었지요. 염색약이 피부에 안 맞는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현상을 생각지 못했던 것입니다. "당신한테 말하면 관두라고 할까봐. 잠잘 때 멋있게 해주려고 했는데…." 정말 멋진 할아버지죠?
하품소리만 듣고도 졸려서 하는 것인지, 속이 안 좋아서 하는 건지 오래 살면 알 수 있다지만 관심과 사랑 없이는 죽어도 알 수 없는 것입니다. 황혼이 아름다울 수 있으려면 저축이 필요합니다. 그 저축이란 돈이 아니라 서로에 대한 신뢰와 사랑을 쌓아 온 세월을 말하는 것이지요.
3장 고향에 왔으나 고향은 그 자리에 없었다
만물상가끔 인사동에 갑니다. 그곳에 가면 추억을 만날 수 있으니까요. 그곳에 가면 볼거리가 많습니다. 만물상이 따로 없지요. 군고구마를 구워 먹던 놋화로, 김치 묻어두던 항아리, 비지찌개 끓이던 누런 냄비 등 다 열거할 수 없죠. 양은 도시락이 눈에 띈 순간 저절로 유년의 교실로 돌아가고 맙니다.
어떤 찻집에 들어갔더니 따끈한 구들방이 있었어요. 할머니가 만든 솜이불 펴놓은 아랫목 생각이 절로 났지요. 할머니의 삶은 어찌 보면 지루할 것 같은데, 그 얼굴에는 늘 잔잔한 평화가 넘쳤습니다. 세 끼 배불리 먹을 양식이 많은 것도 아니요, 걸칠 옷이 넉넉한 것도 아닌데 한 번도 험한 소리를 내지 않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배는 고팠지만, 가난해서 불행하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지도 모릅니다. 아이들은 그 사랑을 먹고 자란 셈이지요. 지금은 풍족한 시대에 살지만 쉽게 정들고 빨리 식어버리는 보일러식 사랑보다는 구들장처럼 오래도록 온기를 느낄 수 있는 사람이 그립다는 생각을 하며 찻집을 나섰습니다.
인도풍 옷을 파는 가게에 들렸습니다. 원피스를 보는 순간 마음은 이미 인도에 가 있게 되더군요. 그 곳에 가면 자연인이 되는 것 같아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꼭 인도에 가야만 마음의 평화를 누리는 것은 아니지만 그곳에서만 느낄 수 있는 독특한 매력이 있지요. 세수를 안 하고 하루종일 있어도 이상하지 않으며, 만날 때마다 손을 내미는 아이들이 밉지 않습니다. 아이들의 눈망울 때문에 이 곳에 온 건 아닐까? 싶을 때가 있지요. 그 아이들이 입던 앙증스런 원피스를 만져보다 가게를 나옵니다. 이제 어디로 갈까.
새로 지은 건물들이 왠지 발길을 멈추게 하더군요. 그래서 입구에서 망설이다 그냥 돌아오고 말았습니다. 역시 인사동은 좀 구질구질해도 옛 모습 그대로가 좋습니다. 마음에 바람이 일면 인사동 골목길을 걸어 보세요. 어느새 마음의 풍랑이 잔잔해질 것입니다.
빨간 내복불과 30년 전만 해도 내복을 안 입은 사람들이 드물었지요. 시골의 겨울밤,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비롯한 남자들은 사랑방에서 마실 온 동네 사람들과 새끼를 꼬든지 내기 장기를 두었습니다. 할머니와 어머니, 그리고 아이들은 화롯가에 빙 둘러앉았습니다. 하루를 마감하기 전에 꼭 해야하는 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이를 잡는 일입니다.
제일 따뜻한 아랫목에는 어른들이 앉고, 찬바람이 솔솔 들어오는 윗목에는 아이들이 앉습니다. 자리 배치가 적당히 되고 나면,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내복을 훌러덩 벗지요. 기어가는 이를 잡아 화로 안으로 집어넣습니다. 눈에 보이는 이를 잡은 다음, 내복 솔기마다 들러붙는 서캐 잡느라 정신 없었지요. 그때는 대부분 빨간 내복을 입었어요. 지금처럼 얇은 것이 아니라 모포자루 같이 두꺼운 걸로 말입니다. 내복을 입으면 연료비가 10%는 절약된다고 하더군요. 수치로는 얼마 안 되는 것 같지만,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정년퇴임을 앞둔 생물학자가 이런 말을 하더군요. "밤마다 화롯가에서 이를 잡던 시대가 더 행복했습니다. 지금 우리 몸은 너무 독한 세제를 쓰고, 농약이며 방부제 등을 먹어서 이도 생기지 않습니다. 이건 억지 주장이 아닙니다. 과학의 발달은 인간에게 편리함은 주었지만, 진짜 소중한 것들은 다 빼앗아 갔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빨간 내복을 입은 당시를 생각하면, 모든 게 자연 그대로였습니다. 덧칠한 게 아무것도 없었던 거지요. 겉모양만이 아니었습니다. 사람들 마음도 순박했지요. 빨간 내복을 입고 다시 화롯가에 앉고 싶은 마음 간절하네요.
4장 남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진홍가슴새 이야기들
생각의 절제사람은 누구나 자유롭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살 수 없기에 자유를 더 갈망하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절제 속에서 누리는 자유의 기쁨이 더 큰 것이지, 무한한 자유는 이미 의미가 없습니다. 절제는 하고 싶은 것을 억지로 참는 것이 아니라, 좀더 차원 높은 자유를 누리기 위해 참는 것이기 때문에 더 소중한 것입니다.
'생각'을 절제해야 한다는 말을 들어보셨는지요. 생각까지 절제해야 한다는 건 미처 자각하지 못했던 부분입니다. 생각의 주머니는 무한대라 생각해야 할 것만 생각하는 것도 훈련이 필요합니다. 음란한 것, 증오심, 미움, 도망치고 싶은 마음, 남의 것을 탐하는 마음, 일하지 말고 실컷 놀러 다니고 싶다는 욕망, 쉽게 돈 벌고 싶은 마음…. 이런 생각들은 아예 애초부터 생각을 안 하는 버릇을 갖는 것, 바로 이것이 '생각의 절제'겠지요.
요즘 청소년 범죄를 일으킨 아이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세요. "그냥 심심해서 그랬어요. 내 마음이 가는 대로 별 생각 없이 때렸어요." "전 생각 같은 것 골치 아파서 안 해요. 그냥 사는 거죠." 생각을 안 한다는 건 생각을 절제하는 것과는 또 다른 뜻이지요. 정작 생각하며 살아야 할 때 생각을 저버리고 마음대로 행동하는가 하면, 너무 많은 생각 때문에 피곤한 삶을 사는 사람도 많습니다. 올바른 생각 속에서 참된 행복이 잉태됩니다.
상대방에 대하여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은 얼굴만 보아도 압니다. 보이지 않고 냄새도 나지 않지만, 생각처럼 우리 인생을 좌우하는 것은 없습니다. 머릿속에 어떤 생각으로 가득 차 있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인생의 길은 달라질 것입니다.
무료 '염' 봉사무덥고 후텁지근한 한여름에 노인 한 분이 죽었습니다. 죽은 지 엿새가 지나도록 아무도 찾는 이 없는 무의탁 노인이었지요. 삼한 악취와 구더기 때문에 동네 장의사도 왔다가 그냥 가 버렸지요. 우연히 이 광경을 목격하게 된 환경미화원 황씨는 손에 장갑을 끼고 시신을 만지기 시작했습니다. 형체도 알아볼 수 없는 노인을 간신히 씻기고 수의를 입힌 뒤, 눈으로만 보아왔던 '염'을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그를 저 세상으로 보낸 것이 시초가 되어 황씨는 16년 간 지금까지 무료 '염' 봉사를 해오고 있습니다. 살아있을 때 돈 없어 겪는 서러움은 견뎌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식 없이 죽음을 맞이했을 때의 비참함은 이루 말로 할 수 없습니다.
요즘은 대부분 병원 영안실에서 장례절차를 모두 맡아 해주기 때문에 '염'을 따로 하는 경우는 드뭅니다. 그러나 무의탁 노인이나 노숙자 등 가난한 사람이 죽었을 경우, '염'을 하고 '수의'를 입히는 경우는 별로 없습니다. 황씨가 이 일에서 손을 놓지 못한 것도 이런 사정을 뻔히 알기 때문이지요.
오해도 있고 경제적인 어려움도 있었지만 진실은 언젠가는 밝혀지게 마련입니다. 사람들이 조금씩이나마 그를 돕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이런 일을 하기까지 아내의 내조 없이는 힘들었을 것입니다. 박봉을 가지고도 알뜰히 살림해줄 뿐만 아니라 장사난 곳은 어디든 같이 가서 설거지도 해주는 등 아내 역시 이 일에 큰 몫을 한 셈이지요. 6년 간 1,200명을 무료로 염을 해주었다는 건 대단한 일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