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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가와 친구들

이덕희 지음 | 가람기획
1. 모차르트 - 교우관계에서도 중요한 관심사는 오직 음악



모차르트에겐 일생 동안 변함없이 충실한 친구가 없었다. 모차르트가 가장 곤란하고 비참했던 만년에 그의 가장 찬란했던 빈 시절을 공유했던 친구들은 모차르트에게 무관심했지만 하이든은 여전했다. 만년의 모차르트, 특히 그가 죽기 2년 전, 그의 사교 서클은 옛날과는 판이한 사람들 - 사회적 지위가 훨씬 열등한 사람들 - 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렇게 된 것은 그의 사회적 지위가 저급한 수준으로 떨어짐에 따라 옛 친구들과 소원해진 데도 원인이 있지만 그와 가까웠던 친구들이 한결같이 때이른 죽음을 당한 결과이기도 했다.

음악사적인 측면으로 볼 때 모차르트의 모든 교우 관계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은 하이든과의 우정이라 할 수 있다. 이 사람의 우정은 후세의 사가들이나 전기작가들에 의해 다분히 이상화된 신비의 베일에 덮여있기는 하지만, 두 사람의 인간 관계가 상대방에 대한 예술적 찬탄을 바탕으로 견고하게 구축되었다는 데엔 이론의 여지가 없다. 모차르트는 잘츠부르크에서 빈으로 옮겨온 1781년에 하이든과 처음 만났다. 두 사람이 만났을 때 하이든은 모차르트보다 거의 두 배나 더 되는 나이(49세)였지만, 두 사람 사이엔 날이 갈수록 견고한 우정이 싹텄다.

모든 점에서 서로 완전히 반대였던 두 사람은 아마도 그랬기 때문에 더욱 서로에게 강하게 이끌렸는지도 모른다. 음악가로서의 하이든은 믿을 수 없을 만큼 느리게 성숙했던 반면, 모차르트는 놀라울 정도로 급속한 개화를 달성했다. 모차르트는 타고난 드라마틱 작곡가요, 피아노와 바이올린의 눈부신 비르투오조(기교가 뛰어난 음악인을 이르는 말)로서, 일찍이 이 방면에서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하이든의 경우 무대를 위한 작곡가로서의 그의 재능은 한정적인 것이었다. 성격적인 면에서도 모차르트는 전형적인 예술가 기질로, 그의 변덕스런 기분은 경쾌한 흥겨움에서 깊은 우울로 급속히 변하는가 하면, 발작적인 노염의 폭발에서 거의 여성적인 상냥함으로 옮아가곤 헸다. 이에 비해 하이든은 더욱 열정적인 기질이었지만 대부분 평온하고 즐거운 기분이었으며 대단한 유머감각이 있었다.

모차르트의 삶에선 질서라든가 규칙성에 대한 감각은 거의 찾아볼 수 없으며, 돈의 가치를 그는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하이든의 전 생활은 일종의 자동적 정확성에 기초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만큼 정리와 규칙성은 그에겐 필수적인 것이었다. 또한 재정적인 문제에도 그는 상당한 수완이 있어 자신의 출판업자들을 능란하게 다루었으며, 사망시엔 상당한 유산을 남길 수 있었던 반면, 모차르트는 거의 거지나 다름없이 죽었다. 아마도 이와 같은 두 사람이 늘 함께 살았다면 서로의 존재가 각자에게 긴장의 원인이 됐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들은 아주 가끔 만났기 때문에 매번의 만남은 그 자체가 하나의 사건이 되었다.

하이든은 모차르트를 가장 위대한 작곡가라고 말했다. 모차르트는 이같은 찬사를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자신이 현악사중주들을 어떻게 작곡하는가를 배운 것은 하이든으로부터 였다고 주장했다. 그는 음악계에 이것을 공표하기 위해서 1785년 그의 '사랑하는 친구 하이든'에게 헌정하는 여섯 곡의 현악사중주를 출판했다. 이에 그치지 않고 그는 누구든지 자신의 면전에서 하이든을 깎아내리는 것을 결코 용납하지 않았다. 이는 하이든도 마찬가지였으며 이들의 작품 자체가 그들 우정의 증거가 되고 있다. 1772년에 하이든이 '태양 사중주곡'을 작곡했을 때 모차르트는 이에 영감을 받아 같은 영역의 작품을 창작하겠다는 생각을 품었고, 하이든의 모델을 따른 작품이 탄생되었다. 하이든에게 미친 모차르트의 영향은 주로 하이든의 후기 작품에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친구들은 자주 내게 천재가 있다고들 아첨하는 말을 하지만, 모차르트는 나를 훨씬 능가한다"고 말했던 하이든은 자기가 그렇게 사랑했던 위대한 천재, 모차르트가 끝내 인정받지 못한 채 세상의 냉대 속에 요절했을 때 "앞으로 백 년 동안 세계는 이와 같은 천재를 갖지 못할 것이다."라며 안타까워했다.

2. 귓병이 강요한 위대한 고독



베토벤을 생각할 때면 누구나 그의 위대한 고독을 연상할 것이다. 베토벤의 삶에서 고독은 그의 변치 않는 반려요, 라이트모티프(Leitmotiv)였다. 그러나 이러한 고독은 그가 스스로 원했다기보다 어느 정도는 차라리 강요된 고독이었다. 사실 베토벤은 사람들과 사귀기를 좋아하고, 작곡을 할 때를 제외하고는, 가정적인 분위기 속에서 친구들과 함께 담소할 때 가장 큰 기쁨을 맛보았다. 이러한 기질을 타고난 그가 사람들을 피해 자기만의 고독 속에 파묻히게 된 것은 그의 귓병 때문이었다. 베토벤의 귓병이 처음 증세를 나타낸 것은 1796년경이었다. 처음엔 자신의 병이 탄로날까봐 그는 사람들을 피했다. 그러다 그는 가까운 두 친구, 즉 본 시절부터 막역한 벗인 의사 베겔러와 빈에서 사귄 바이올린 주자이며 목사인 카를 아멘다에게 절망적인 심정을 토로하게 된다.

베토벤은 1780년대 후반에 본의 가장 탁월한 정신을 대변하고 있던 폰 브로이닝 가(家)와 친교를 맺게 되었는데, 폰 브로이닝 가의 아들 슈테판은 베토벤의 친구인 베겔러의 친구였다. 본에서 폰 브로이닝 가문이 베토벤의 정서에 미친 영향은 막대한 것이었다. 부유하고 교양있는 미망인이었던 폰 브로이닝 부인의 자애로운 보살핌 속에서 베토벤은 이 댁의 아이들과 똑같은 대우를 받았다. 이것은 그에게 '제2의 가정'을 느끼게 해주었다. 이 시기에 베토벤은 폰 브로이닝 가의 세 아들과 낭만적인 우정을 맺었으며, 특히 슈테판과는 평생을 지속한 깊은 우정으로까지 발전하게 된다. 대체로 베토벤은 본에선 브로이닝 형제들과 베겔러 등과 더불어 형제애 같은 우정을 나누었는데, 빈 시절엔 한층 과장된 낭만적인 우정을 체험하게 된다. 베토벤보다 한 살 아래였던 아멘다는 신학을 전공하는 바이올리니스트였다. 로브코비츠 공의 아이들의 가정교사로서 베토벤을 알게 된 아멘다는 당장에 '베토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둘은 뗄 수 없는 단짝이었다. 그들이 만나지 못하고 있을 때에도 그들의 우정은 편지를 통해 계속되었다. 아멘다의 항구적인 성실성이 베토벤으로 하여금 그를 가장 이상적인 친구의 반열에까지 올려놓게 했을 것이다.

우리가 베토벤의 중요한 친구라고 이름 붙일 수 있는 사람 가운데 카를 리히노프스키 공은 베토벤의 우정의 판도에서 약간 특수한 자리를 차지한다. 당시만 해도 음악은 부유한 예술애호가인 귀족들의 후원으로 육성되고 있던 시대여서 베토벤에게도 많은 후원자가 있었다. 카를 체르니에 의하면, 리히노프스키는 베토벤을 친구이자, 형제처럼 대우했고 빈의 전 귀족이 그를 후원하도록 이끈 장본인이었다. 리히노프스키 가문은 수세대에 걸쳐 빈의 음악생활을 영도해온 중심지 역할을 했던 만큼 그의 절대적 지지와 사랑을 받게 된 것은 베토벤에겐 일대 역사적 사건이었다. 모차르트의 제자이며 후원자이기도 했던 리히노프스키 왕자와 크리스티아네 공주 부처는 베토벤을 아들처럼 사랑했으며 베토벤도 그들에게 깊은 애정과 감사의 정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내면적으로는 언제나 이들과의 관계에서 오는 정서적 갈등을 겪고 있었다. 베토벤의 타고난 유난스런 자주성과 극성스런 독립정신은 그들의 지나친 사랑의 발로와 보호벽이 때론 질식할 것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그러나 생애 끝까지 베토벤은 그에 대한 감사와 신뢰의 정이 변치 않았다. 베토벤은 그의 '작품 1'인 《트리오》를 비롯해서《비창 소나타》(작품 13),'작품 26'의《피아노 소나타》,그리고《제2교향곡》등의 많은 작품을 리히노프스키에게 헌정함으로써 그를 불멸화시켰다.

3. 슈베르트 - 충실한 우정의 온기 없인 한시도 못 견뎌



슈베르트의 너무도 짧은 생애에서 친구들의 존재는 커다란 비중을 차지한다. 흔히 예술적 천재에게 부수되는 격정적인 로맨스나 다채로운 사랑의 에피소드 같은 것은 슈베르트의 삶에선 아예 찾아볼 수 없다. 대신 친구들에 관련해선 그것만으로도 전기의 분량에 맞먹을 정도의 방대한 책을 쓸 수 있을 만큼 풍부한 이야깃거리를 갖고 있다. 친구에 대한 그의 기호는 아주 단호했다. 그는 소위 유력 인사들의 비위를 맞추기 싫어했으며, 잘난 체하는 사람들이나 따분한 사람들을 참지 못했다. 슈베르트는 친구들 서클 속에 신참자가 소개될 때면 예외없이 이렇게 묻곤 했다. "칸 에어 바스?"(Kann er was?그는 무엇을 할 수 있지?) 따라서 슈베르트의 친구가 되기 위해선 적어도 어떤 종류의 재능이 있어야 했다. 슈베르트를 중심으로 모여든 친구들은 당시 빈에서 가장 총명하고 재기발랄한 젊은이들이었다.

슈베르트의 평생에 걸친 중요한 교우관계가 형성된 것은 바로 슈파운이 새로운 친구들을 그에게 인도한 이 시기였다. 슈파운은 17세의 천재 예술가에게 다른 재사들을 소개했고, 그들은 또 슈베르트를 당시 빈의 지적인 '아방가르드'의 중심으로 끌어들였다. '슈베르티아드(슈베르트의 밤)'는 오직 슈베르트의 음악만을 연주한다는 목적으로 개최되었는데, 여기서 친구들은 그의 신작을 작곡가 자신의 피아노 반주에 따라 함께 노래도 하고 춤도 추었다. '슈베르티아드'가 음악사에 끼친 공적은 막대한 것이다. 슈베르트의 거의 모든 작품은 먼저 '슈베르티아드'를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여기서 그의 음악을 접해본 사람들의 그에 대한 찬탄과 사랑에 의해 슈베르트는 계속 작곡을 할 수 있는 현실적 도움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슈베르트의 천재를 세상에 알리는 데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은 당대 빈 최고의 바리톤 가수 미하엘 포글과의 만남이었다. 슈베르트를 처음 만났을 때 이미 쉰 살이었던 포글은 스물한 살의 젊은 작곡가와 우정을 맺은 이후 많은 시간을 그와 함께 보내면서 슈베르트에게 인격적으로나 교양으로나 깊은 영향을 미쳤으며, 슈베르트의 예술을 세상에 알리는 데 지속적인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요한 마일호퍼와의 교제는 슈베르트의 작품에 철학적인 영향을 미쳤다. 슈베르트는 언제나 가곡의 텍스트가 될 수 있는 시를 찾고 있었으며, 그의 친구들은 그의 요구에 응해 항상 최근에 간행된 시집이나 번역시들을 그에게 소개해주곤 했다. 600여 곡 이상의 가곡 중에 60여 곡은 괴테, 47곡이 마일호퍼의 시에 의한 것이었다. 슈베르트보다 한 살 위였던 쇼버는 친구들이 '쇼베르트(Schobert)'라고 불렀을 만큼 슈베르트와 가장 가까웠는데, 슈베르트는 그의 속에서 '자매혼'을 느꼈을 정도로 그를 제일 사랑했지만, 후에 쇼버는 결과적으로 슈베르트의 삶을 파멸로 인도한 장본인이었다. 전기작가들은 대체로 1822년을 슈베르트의 생애에서 분수령이 되는 해로 보고 있는데, 슈베르트가 매독에 감염된 것이 바로 이때였다. 그리고 이 해의 대부분을 슈베르트는 쇼버와 함께 살았다. 슈베르트는 티푸스 열로 사망했지만 요행히 이 병에 걸리지 않았더라도, 이미 매독의 제2단계를 지나 서서히 붕괴되고 있던 그의 육신은 조만간에 끝장을 보았을 것이다.

4. 베를리오즈 - "그와 사귀면서 마음 편한 사람 없었다"



음악의 위대한 천재들 가운데는 일생 동안 끊임없이 정상과 광기의 경계선을 아슬아슬하게 넘나들며 거의 오싹할 정도의 기벽이나 언행 등으로 숱한 화제의 주인공이 된 대상이 많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베를리오즈의 경우는 단연 독보적이다. 그에겐 정상적인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어떤 의미로도 베를리오즈는 명상적이거나 내성적인 기질은 아니었다. 그에겐 모든 것이 공개적이고 거침이 없었으며, 그의 온갖 변덕스런 기분이나 종작없는 생각들을 조금도 감추려고 하지 않았다. 많은 지인들은 그의 너무도 솔직한 견해에 당황스러움을 금치 못했다. 들라크루아의 <일기> 속에는 그가 베를리오즈를 만난 다음이면 언제나 비슷한 심경을 토로한 구절이 나온다. "베를리오즈, 참을 수 없는 사람" "언제나와 같이 베를리오즈는 참을 수 없다." 요컨대 베를리오즈와 친구가 되려면 많은 참을성과 자기 양보의 정신을 지닌 사람이라야 했을 것이다.

1828~1835년에 걸쳐 파리에서 산 힐러는 1829년 초에 베를리오즈와 처음 알게 되었다. 당시 26세였던 베를리오즈보다 그는 여덟 살이나 어렸지만 둘은 곧 가까운 친구가 되었다. 이 당시 베를리오즈는 부친이 권하는 의학 공부를 중단하고 음악가의 길로 나가려 했기 때문에 부친의 송금이 끊어져 매우 고생하고 있었다. 7월 혁명 바로 뒤인 1830년 12월 파리에서 그의 작품《환상교향곡》이 공연된 이후 그는 갑자기 유명해졌다. 이와 같은 급작스런 변화는 이 선량한 독일 친구 힐러를 놀라게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힐러가 충격을 받은 것은 베를리오즈의 '자유사상'이었다. "그는 신도 믿지 않고 바흐도 믿지 않았다"라고 힐러는 쓰고 있다. 둘은 피아니스트인 카미유 모크를 두고 삼각관계에 빠지기도 하는데 힐러는 베를리오즈를 이해해 주었다. 이 일로 인해 두 사람의 우정이 훼손되지는 않았다.

'모크 사건' 이후 얼마 되지 않아 베를리오즈는 로마대상을 받고 파리를 떠나야 했는데 출발하기 전에 기획한 연주회에서 프란츠 리스트를 만나게 된다. 리스트는 베를리오즈보다 일곱 살이나 어렸지만 이미 10대에 그는 피아노의 눈부신 비르투오조로 파리를 정복했다. 리스트가 후년에 연주자의 이력을 포기하고 완전히 작곡에만 몰두하게 되었을 때, 특히 바이마르에서 〈교향시〉들을 작곡하고 있을 당시 베를리오즈 작품의 영향을 받았다. 베를리오즈 쪽에서 볼 때 리스트는 당시만 해도 제대로 진가를 인정받지 못했던 그의 작품들을 대중화시키는 데 큰 몫을 했다. 이처럼 '보다 높은 목표를 향하여' 순수한 예술적 열광과 깊은 공감을 바탕으로 생성된 우정은 항상 친구 속에 내재한 잠재력을 자극해서 가장 바람직한 결실을 맺게 하는 원동력이 되는 것이다. 이런 뜻에서 리스트와 베를리오즈의 우정은 뜻깊다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베를리오즈의 평생에 걸쳐 가장 오래되고 충실한 친구로 알려진 사람은 음악가나 예술가가 아니라 1830년대 당시에 파리의 정치계에서 널리 알려졌던 윙베르 페랑이었다. 베를리오즈는 이 친구를 파리 음악원 시절에 사귀게 되었다. 문학 취향의 법학도였던 페랑은 베를리오즈를 위해 오페라《프랑 판관들》의 대본과 그리스의 혁명을 소재로 한 오페라의 가사를 써주기도 하였으나 유감스럽게도 오페라로는 빛을 보지 못했다. 후에 그는 주저하는 베를리오즈를 강권해서 비평의 길로 들어서게 한 장본인이었다. 베를리오즈가 경제적으로 궁핍했을 때 재정적인 도움을 준 것도 페랑이었다. 만년엔 그도 몰락해서 시골에 은퇴해 있었는데, 그가 입적시킨 양자로 인해 비극적 종말을 맺게 된다. 아내와 사별하고 아들마저 잃은 데다 뇌출혈로 인해 두 번이나 쓰러진 후 거의 반송장이 다 된 베를리오즈에게 평생에 걸쳐 충실했던 이 다정한 벗의 죽음은 마지막 타격이었다. 페랑이 타계한 후 그는 몇 달밖에 더 살지 못했다.

5. 멘델스존 - 친구에게 기쁨 줄 줄 아는 우정의 천재



멘델스존(Felix Mendelssohn)은 우정에 대한 타고난 재능이 있었다. "펠릭스에게 사랑을 받는다는 것은 근사한 일이었다." 이것은 멘델스존의 가장 가까운 친구 가운데 하나였던 에드워드 데브리엔트의 고백이지만, 펠릭스와 친구가 된 많은 사람들의 공통된 의견이기도 했다. 멘델스존은 1835년(26세)에 한 살 아래인 슈만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일생을 통해 쇼팽과 멘델스존을 전투적으로 옹호했던 슈만은 그 자신의 천재에도 불구하고 멘델스존을 '오늘날의 음악가 가운데 제1인자'라 불렀다. 이같은 예술적 존경은 근본적으로 서로 너무나 다른 예술가 사이에서만 가능할 것이다. 만약에 이들의 재능이 같은 노선을 달렸다면 서로 이같은 견해를 지닐 수 없었을 것이다. 슈만의 재능과 목표는 멘델스존의 것과 너무나 달랐기 때문에 슈만에게 있어 멘델스존은 일종의 순수한 경이라 할 만 했다. 그는 멘델스존 음악의 진정한 특질을 세상이 알도록 하는 것이 자신의 임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당대의 가장 탁월한 음악평론가였던 그는 이러한 임무를 완성하기 위해 노력했다. 덕택에 멘델스존의 작품에 대한 그의 방대한 비평은 오늘날에도 음악 비평의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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