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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가와 친구들

이덕희 지음 | 가람기획
슈베르트의 너무도 짧은 생애에서 친구들의 존재는 커다란 비중을 차지한다. 흔히 예술적 천재에게 부수되는 격정적인 로맨스나 다채로운 사랑의 에피소드 같은 것은 슈베르트의 삶에선 아예 찾아볼 수 없다. 대신 친구들에 관련해선 그것만으로도 전기의 분량에 맞먹을 정도의 방대한 책을 쓸 수 있을 만큼 풍부한 이야깃거리를 갖고 있다. 친구에 대한 그의 기호는 아주 단호했다. 그는 소위 유력 인사들의 비위를 맞추기 싫어했으며, 잘난 체하는 사람들이나 따분한 사람들을 참지 못했다. 슈베르트는 친구들 서클 속에 신참자가 소개될 때면 예외없이 이렇게 묻곤 했다. "칸 에어 바스?"(Kann er was?그는 무엇을 할 수 있지?) 따라서 슈베르트의 친구가 되기 위해선 적어도 어떤 종류의 재능이 있어야 했다. 슈베르트를 중심으로 모여든 친구들은 당시 빈에서 가장 총명하고 재기발랄한 젊은이들이었다.

슈베르트의 평생에 걸친 중요한 교우관계가 형성된 것은 바로 슈파운이 새로운 친구들을 그에게 인도한 이 시기였다. 슈파운은 17세의 천재 예술가에게 다른 재사들을 소개했고, 그들은 또 슈베르트를 당시 빈의 지적인 '아방가르드'의 중심으로 끌어들였다. '슈베르티아드(슈베르트의 밤)'는 오직 슈베르트의 음악만을 연주한다는 목적으로 개최되었는데, 여기서 친구들은 그의 신작을 작곡가 자신의 피아노 반주에 따라 함께 노래도 하고 춤도 추었다. '슈베르티아드'가 음악사에 끼친 공적은 막대한 것이다. 슈베르트의 거의 모든 작품은 먼저 '슈베르티아드'를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여기서 그의 음악을 접해본 사람들의 그에 대한 찬탄과 사랑에 의해 슈베르트는 계속 작곡을 할 수 있는 현실적 도움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슈베르트의 천재를 세상에 알리는 데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은 당대 빈 최고의 바리톤 가수 미하엘 포글과의 만남이었다. 슈베르트를 처음 만났을 때 이미 쉰 살이었던 포글은 스물한 살의 젊은 작곡가와 우정을 맺은 이후 많은 시간을 그와 함께 보내면서 슈베르트에게 인격적으로나 교양으로나 깊은 영향을 미쳤으며, 슈베르트의 예술을 세상에 알리는 데 지속적인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요한 마일호퍼와의 교제는 슈베르트의 작품에 철학적인 영향을 미쳤다. 슈베르트는 언제나 가곡의 텍스트가 될 수 있는 시를 찾고 있었으며, 그의 친구들은 그의 요구에 응해 항상 최근에 간행된 시집이나 번역시들을 그에게 소개해주곤 했다. 600여 곡 이상의 가곡 중에 60여 곡은 괴테, 47곡이 마일호퍼의 시에 의한 것이었다. 슈베르트보다 한 살 위였던 쇼버는 친구들이 '쇼베르트(Schobert)'라고 불렀을 만큼 슈베르트와 가장 가까웠는데, 슈베르트는 그의 속에서 '자매혼'을 느꼈을 정도로 그를 제일 사랑했지만, 후에 쇼버는 결과적으로 슈베르트의 삶을 파멸로 인도한 장본인이었다. 전기작가들은 대체로 1822년을 슈베르트의 생애에서 분수령이 되는 해로 보고 있는데, 슈베르트가 매독에 감염된 것이 바로 이때였다. 그리고 이 해의 대부분을 슈베르트는 쇼버와 함께 살았다. 슈베르트는 티푸스 열로 사망했지만 요행히 이 병에 걸리지 않았더라도, 이미 매독의 제2단계를 지나 서서히 붕괴되고 있던 그의 육신은 조만간에 끝장을 보았을 것이다.음악의 위대한 천재들 가운데는 일생 동안 끊임없이 정상과 광기의 경계선을 아슬아슬하게 넘나들며 거의 오싹할 정도의 기벽이나 언행 등으로 숱한 화제의 주인공이 된 대상이 많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베를리오즈의 경우는 단연 독보적이다. 그에겐 정상적인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어떤 의미로도 베를리오즈는 명상적이거나 내성적인 기질은 아니었다. 그에겐 모든 것이 공개적이고 거침이 없었으며, 그의 온갖 변덕스런 기분이나 종작없는 생각들을 조금도 감추려고 하지 않았다. 많은 지인들은 그의 너무도 솔직한 견해에 당황스러움을 금치 못했다. 들라크루아의 <일기> 속에는 그가 베를리오즈를 만난 다음이면 언제나 비슷한 심경을 토로한 구절이 나온다. "베를리오즈, 참을 수 없는 사람" "언제나와 같이 베를리오즈는 참을 수 없다." 요컨대 베를리오즈와 친구가 되려면 많은 참을성과 자기 양보의 정신을 지닌 사람이라야 했을 것이다.



1828~1835년에 걸쳐 파리에서 산 힐러는 1829년 초에 베를리오즈와 처음 알게 되었다. 당시 26세였던 베를리오즈보다 그는 여덟 살이나 어렸지만 둘은 곧 가까운 친구가 되었다. 이 당시 베를리오즈는 부친이 권하는 의학 공부를 중단하고 음악가의 길로 나가려 했기 때문에 부친의 송금이 끊어져 매우 고생하고 있었다. 7월 혁명 바로 뒤인 1830년 12월 파리에서 그의 작품《환상교향곡》이 공연된 이후 그는 갑자기 유명해졌다. 이와 같은 급작스런 변화는 이 선량한 독일 친구 힐러를 놀라게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힐러가 충격을 받은 것은 베를리오즈의 '자유사상'이었다. "그는 신도 믿지 않고 바흐도 믿지 않았다"라고 힐러는 쓰고 있다. 둘은 피아니스트인 카미유 모크를 두고 삼각관계에 빠지기도 하는데 힐러는 베를리오즈를 이해해 주었다. 이 일로 인해 두 사람의 우정이 훼손되지는 않았다.

'모크 사건' 이후 얼마 되지 않아 베를리오즈는 로마대상을 받고 파리를 떠나야 했는데 출발하기 전에 기획한 연주회에서 프란츠 리스트를 만나게 된다. 리스트는 베를리오즈보다 일곱 살이나 어렸지만 이미 10대에 그는 피아노의 눈부신 비르투오조로 파리를 정복했다. 리스트가 후년에 연주자의 이력을 포기하고 완전히 작곡에만 몰두하게 되었을 때, 특히 바이마르에서 〈교향시〉들을 작곡하고 있을 당시 베를리오즈 작품의 영향을 받았다. 베를리오즈 쪽에서 볼 때 리스트는 당시만 해도 제대로 진가를 인정받지 못했던 그의 작품들을 대중화시키는 데 큰 몫을 했다. 이처럼 '보다 높은 목표를 향하여' 순수한 예술적 열광과 깊은 공감을 바탕으로 생성된 우정은 항상 친구 속에 내재한 잠재력을 자극해서 가장 바람직한 결실을 맺게 하는 원동력이 되는 것이다. 이런 뜻에서 리스트와 베를리오즈의 우정은 뜻깊다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베를리오즈의 평생에 걸쳐 가장 오래되고 충실한 친구로 알려진 사람은 음악가나 예술가가 아니라 1830년대 당시에 파리의 정치계에서 널리 알려졌던 윙베르 페랑이었다. 베를리오즈는 이 친구를 파리 음악원 시절에 사귀게 되었다. 문학 취향의 법학도였던 페랑은 베를리오즈를 위해 오페라《프랑 판관들》의 대본과 그리스의 혁명을 소재로 한 오페라의 가사를 써주기도 하였으나 유감스럽게도 오페라로는 빛을 보지 못했다. 후에 그는 주저하는 베를리오즈를 강권해서 비평의 길로 들어서게 한 장본인이었다. 베를리오즈가 경제적으로 궁핍했을 때 재정적인 도움을 준 것도 페랑이었다. 만년엔 그도 몰락해서 시골에 은퇴해 있었는데, 그가 입적시킨 양자로 인해 비극적 종말을 맺게 된다. 아내와 사별하고 아들마저 잃은 데다 뇌출혈로 인해 두 번이나 쓰러진 후 거의 반송장이 다 된 베를리오즈에게 평생에 걸쳐 충실했던 이 다정한 벗의 죽음은 마지막 타격이었다. 페랑이 타계한 후 그는 몇 달밖에 더 살지 못했다.8. 브람스 - 가장 친한 친구와도 지나친 밀착 꺼려9. 드뷔시 - 교우관계 저해한 냉소적 이기주의멘델스존(Felix Mendelssohn)은 우정에 대한 타고난 재능이 있었다. "펠릭스에게 사랑을 받는다는 것은 근사한 일이었다." 이것은 멘델스존의 가장 가까운 친구 가운데 하나였던 에드워드 데브리엔트의 고백이지만, 펠릭스와 친구가 된 많은 사람들의 공통된 의견이기도 했다. 멘델스존은 1835년(26세)에 한 살 아래인 슈만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일생을 통해 쇼팽과 멘델스존을 전투적으로 옹호했던 슈만은 그 자신의 천재에도 불구하고 멘델스존을 '오늘날의 음악가 가운데 제1인자'라 불렀다. 이같은 예술적 존경은 근본적으로 서로 너무나 다른 예술가 사이에서만 가능할 것이다. 만약에 이들의 재능이 같은 노선을 달렸다면 서로 이같은 견해를 지닐 수 없었을 것이다. 슈만의 재능과 목표는 멘델스존의 것과 너무나 달랐기 때문에 슈만에게 있어 멘델스존은 일종의 순수한 경이라 할 만 했다. 그는 멘델스존 음악의 진정한 특질을 세상이 알도록 하는 것이 자신의 임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당대의 가장 탁월한 음악평론가였던 그는 이러한 임무를 완성하기 위해 노력했다. 덕택에 멘델스존의 작품에 대한 그의 방대한 비평은 오늘날에도 음악 비평의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멘델스존은 지극히 유화적인 성품에도 불구하고 음악의 본질적인 문제에 관한 한 어떤 경우에도 양보나 타협을 거부했다. 다른 사람을 상처입히고 싶지 않다는 그의 따스한 마음도 음악의 감식력에 대한 자기 확신을 눌러버릴 수는 없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그의 성향 때문에 그는 결국 젊은 시절부터의 오랜 친구인 아돌프 B. 마르크스와의 불화를 초래한 대단히 불행한 사건을 경험하게 된다. 멘델스존보다 열네 살 위였던 마르크스는 원래 멘델스존의 스승이었다가 그의 친구가 되었다. 또 그는 「베를리너 무지크 자이퉁」지를 발행하면서 이 잡지에다 베토벤과 멘델스존의 천재를 알리는 글을 써서 사실상 멘델스존을 세상에 알리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1830년엔 이에 감사한 멘델스존의 추천에 의해 베를린 대학의 음악 교수가 되었다. 그런데 뮌헨의 음악축전에 마르크스는 모세를 주제로 한 오라토리오를 작곡하는 문제로 멘델스존과 다투게 된다. 마르크스는 이 다툼을 멘델스존의 질투 때문이라 확신했고 둘은 이후 다시는 만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 불화사건을 빼고는 멘델스존의 생애에서 친구와 싸웠거나 절교를 했다는 기록은 아무 데도 없다. 그리고 한결 행운이었던 것은 멘델스존이 우정을 베풀었던 만큼 그 역시 친구들에게서 우정의 보답을 받았다는 사실이다. 카를 클린제만은 소년시절부터 멘델스존과 특별한 우정을 나누었다. 여러 모로 멘델스존과 유사한 점이 많았던 이 둘의 관계에서 가장 매력적인 것은 두 사람이 어른이 된 후에도 소년시절의 발랄하고 순진한 우정의 생기를 잃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 같은 특징은 두 사람이 함께 한 스코틀랜드 여행에서 한결 생생하게 드러나는데, 이 즐거운 여행에서 결국 멘델스존의 교향곡 3번 《스코틀랜드》가 탄생한다.



멘델스존은 어렸을 때부터 전인적 교육을 받았으므로 다방면에 재주가 있었고, 그의 타고난 성품에다 유복한 환경, 완벽한 교육 덕택에 그는 다방면의 탁월한 인물들과 교제할 수 있었다. 당대의 가장 탁월한 고대 사학자였던 요한 구스타프 드로이센, 피아니스트 아돌프 헨젤트 역시 펠릭스와의 우정에다 최고의 가치를 부여했다. 멘델스존은 음악 활동이 정점에 달했던 1843년 라이프치히에서 음악원을 창설하게 된다. 독일 안에서 이 음악원의 수준에 비견될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음악원 교수진을 구성하는 데 있어 멘델스존은 특정한 분야의 전문가들을 계약할 수 있었는데, 그 중의 상당수는 당연히 그가 가장 좋아하는 음악가들로 채워졌다. 슈만, 율리우스 리에츠, 페르디난트 다비드 등의 개성있는 음악가들의 조화로운 활동은 멘델스존을 중심으로 결집된 서로에 대한 충심의 우정에서 비롯된 것이었다.프란츠 리스트는 거의 75세까지 장수했다. 만년에도 그는 죽기 얼마 전까지 유럽 순회 연주를 했을 만큼 완벽한 건강을 유지했다. 바이로이트 축제에서 바그너의 오페라《파르지팔》과《트리스탄과 이졸데》를 본 일주일 후 그는 폐렴으로 타계했는데, 임종 때 그가 한 말은 '트리스탄'이란 한 마디였다고 한다.



리스트의 인품에 대해 당대 사람들이 남기고 있는 기록으로 알 수 있듯이 리스트는 모순의 덩어리였다. 그는 지극히 유니크하면서도 복잡한 인간이었다. 천재와 허영심과 관대함, 호색, 종교성, 속물근성, 서민기질, 그리고 문학적 갈망과 환상이 이상하게 혼합된 다양한 면모를 꿰뚫고 오직 일관되게 드러나는 한 가지 특징은 '성실성'이었다. 또 하나 그에겐 대부분의 예술가들에게 가장 큰 약점이 되는 시기심이란 것이 전혀 없었다. 이에 비해 바그너는 철두철미하게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이었다. 리스트는 어떤 관점에서도 그에게 득이 되는 존재였다. 리스트는 바그너의 음악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선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했다. 바그너의 인간적인 결함을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눈멀지 않았던 그였지만, 언제 어디서든 리스트가 바그너에 대해 비판의 소리를 했다는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이런 리스크였으니만큼 극단적인 이기주의자 바그너마저 그의 인품에 진심으로 감동했던 것도 무리는 아니다.



리스트는 1842년, 31세 때에 파리에서 바그너를 처음 알게 되었는데, 사실 리스트에 대한 바그너의 감정은 매우 좋지 않았다. 바그너는 리스트보다 불과 두 살 아래였으나 리스트는 이미 10대에 피아노의 비르투오조로서 명성의 절정에 있었던 반면, 바그너는 그의 거창한 예술적 야심이 좌절을 맛보고 있을 때였다. 이후 리스트는 순회 연주를 가는 곳이면 어디서나 바그너의 음악이 자신에게 준 기쁨에 대해 자주 역설해서 사람들은 바그너에 대해 편향된 호의를 보이게 되었다. 리스트는 1847년에 직업적 연주생활을 그만두고 작곡에 전념하게 되는데, 그는 바이마르 음악의 지도자로 있으면서 바그너와 베를리오즈를 포함한 숱한 '새로운 음악'들을 일반에 알리는 데 막대한 공헌을 했다. 바이마르의 오케스트라는 순전히 리스트에 의해 최초의 현대적 오케스트라의 수준에 도달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바그너의 음악은 구제를 받았다고 말할 수 있다.



혁명에 연루되었던 바그너는 신변이 위험하게 되어 독일을 떠나게 된 이후 리스트와는 만나지 못하고 있다가 1853년 취리히에서 다시 만났다. 그리고 이후 그들이 교환한 편지로 둘의 우정이 다져졌다. 라스트는 1865년 신품성사를 받고 로마가톨릭의 수사가 되지만, 그 후에도 바그너와의 우정은 변하지 않았다. 게다가 리스트의 둘째딸 코지마가 아버지의 제자였던 남편 한스 폰 뷜로(둘은 1857년 결혼했다)를 버리고 1867년 바그너와 함께 도망가 그의 처가 되었으므로 결국 바그너는 리스트의 사위가 되었으니, 이제 그는 리스트에겐 친구요, 동료이며, 한가족이기도 했다. 그러나 리스트보다 연하였던 바그너는 장인보다 먼저 타계했다. 1883년 2월 부다페스트에 있을 때 리스트는 베니스에서 바그너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처음엔 그걸 믿지 않았다. 그러나 그게 사실임을 알게 되자 낮은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진다. "오늘은 그, 내일은 내 차례일 테지." 그래도 그는 이후 3년을 더 살았다.쇼팽이 친구 타이투스에게 남긴 편지들을 근거로 많은 아마추어 정신분석학자들이 쇼팽의 동성애적 성향을 추론했다. 그러나 쇼팽이 살고 있던 19세기는 낭만주의의 전성기로서, 예술에서도 실생할에서도 정열을 지고의 가치로 숭상하며, 사랑과 우정에 있어서도 극단적이고 과장된 감정표현이 유행인 시대였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타이투스 보이치예호프스키는 쇼팽보다 약간 연상이며 쇼팽의 아버지가 경영하는 기숙사의 생도였는데, 부유한 지주의 아들이었던 그는 훌륭한 음악도이기도 했다. 이 기숙사의 명문가 자제들은 자연히 쇼팽과 친구가 되었는데 얀 마투친스키, 얀 비알로블로키, 율리안 폰타나, 보드진스키 형제 등을 들 수 있다. 그러나 비알로블로키나 마투친스키는 젊은 나이에 병으로 사망했다. 율리안 폰타나는 쇼팽과 동갑으로 에르스너 교수 밑에서 함께 음악수업을 받았다. 그는 쇼팽 작품의 교정이나 사보는 말할 것도 없고 하인과 아파트를 구하는 일이며 쇼핑까지 쇼팽이 부탁하는 일은 무엇이나 열성적으로 해주었다. 1841년에 그는 자신의 길을 찾아 미국으로 이민 갔지만 쇼팽 사후 다시 파리로 돌아와 쇼팽의 유작을 편집하는 일을 했다.



쇼팽이 가장 사랑한 친구 타이투스 보이치예호프스키는 농경학을 전공한 후에 우크라이나 국경 근처에 있는 포르투진의 지주가 된, 건장하고 점잖은 신사였으며 대단히 훌륭한 피아니스트이기도 했다. 굉장한 미남으로, 쇼팽의 천재를 진지하게 찬미하고 있던 그는 사실 감정을 숨기지 않는 쇼팽의 과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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