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유와의 이별
하이데마리 슈베르머 지음 | 여성신문사
제1부
1. 방황 시절세 살이 되던 생일날 나는 기쁘게도 인형의 집을 선물 받았다. 그러나 인형의 집을 가지고 놀던 행복한 시간은 채 몇 달 가지 않았다. 1944년 여름, 어머니와 할머니는 짐을 꾸리기 시작했다. 거리에는 말과 마차를 탄 사람들로 가득 찼고, 우리도 그 행렬 속에 끼어들었다, 우리는 수 천 킬로미터를 달려 알러 강변의 베르덴에 도착했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우리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그곳 주민들은 우리를 꺼려했다. 전쟁을 피해 몰려온 빈털터리들에게 가진 것을 나누어주어야 했기에, 그들은 짜증이 났던 것이다.
우리 가족은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었다. 우리를 받아준 농부는 아주 좋은 사람이어서 몇 주 동안 풍성한 먹을거리를 나눠주었다. 대신 어머니와 할머니가 농부 부부를 도와 매일 들에서 일을 했다. 그것은 우호적인 분위기에서 주고받은 교환이었고 나눔이었다. 그러나 친척들을 찾아 슐레스비히 홀스타인으로 갔을 때는 사정이 전혀 달랐다. 우리를 받아준 농부 가족은 마지못해 작은 방 한 칸을 내주었지만 우리를 짐짝처럼 취급했다. 우리는 쓸모없는 인간이 된 듯한 비참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그리고 굶주렸다. 전쟁은 끝났지만 우리는 고향을 잃어버렸고 다시 돌아갈 곳이 없었다. 아버지가 전쟁터에서 돌아오면서 아주 서서히 '평범한' 일상도 되돌아왔다. 나는 혼자 있기를 좋아하고 생각이 많은 조용한 소녀가 되어 있었다.
나는 세상을 이해하고 싶었고, 대학에 가고 싶었고, 학교 선생님이 되고 싶었다. 처음 5년 동안은 남자 고등학교에 다니다가 낙제를 하기도 했는데 그때 부모님은 나를 렌츠부르크에 있는 기숙학교로 보내셨다. 여학생들과 어울리다보니 나는 숨은 기량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새침떼기 시절은 끝났고 우등생으로 돌변하였다. 그리고 기숙사 생활은 내게 공동체 의식을 심어주었다. 마음도 즐거웠고 몸도 건강해졌다. 그때 나는 장래의 내 학생들과 내 아이들에게 맘껏 자유를 누리게 해주겠다고 결심했다.
내가 입학한 킬의 교육대학은 내게 새로운 세상을 열어주었다. 나의 야심찬 고민들이 마침내 건실한 이론적 발판을 찾게 되었던 것이다. 특히, 나는 심리학을 좋아했다. 심리학은 인간의 유형과 그에 따른 행동 방식을 제시해주었다. 교육학 역시 아주 마음에 들었다. 교육학을 공부하다 보니 일생을 다른 사람의 행복을 위해 바친 많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학교를 마치자마자 나는 소규모 학교에서 선생님으로 일했지만 2년 후 휴직계를 내고 브라질의 리오로 갔다. 리오의 카니발을 직접 눈으로 보고 싶었다. 우연히 함께 하게 된 여자와 죽이 맞아 리오의 카니발을 즐겼다. 친척집에 오래 있지 않고 나와서 그 친구와 함께 산티아고로 갔다. 거기서 동갑내기인 화가 엔리케를 만나 결혼했다. 우리의 결혼은 모험이었지만 당시로서는 올바른 선택이었다. 하지만 남편이 그림을 그려 판 돈으로는 생활이 불가능했고, 나도 그곳에서의 내 임금에 불만이 많아 우리는 독일로 가기로 했다. 마침 휴직 기한도 끝나 나는 함부르크 근처의 학교에 배정 받았다.
그 후 5년 동안 나는 너무나 불행했다. 계속되는 부담이 힘에 겨웠고 마음 붙일 곳이 없었다. 남편은 나를 괴롭혔고 결국 우리는 이혼했다. 결혼 생활을 통해 나는 많이 변하였다. 기숙사와 대학 시절의 기쁨은 오래 전에 잊혀졌다. 이혼을 하자 직장의 스트레스를 견디며 아이들을 키워야 하는 이중의 부담이 나를 괴롭혔다. 그리고 다시 질병이 찾아왔다. 하지만 그렇게 쉽게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다. 시간이 흐르면서 나의 온갖 아픈 경험들이 나를 성숙한 인간으로 만들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웬만큼 생활이 자리를 잡아가자 예전에 세상을 바꾸는 데 일조하겠다던 약속이 떠올랐다. 나는 우선 내 주변 사람들을 대상으로 시작해보고 싶었다. 내 집을 창작활동을 하는 예술가들이 마음 편히 만날 수 있는 장소로 만들었다. 그러다 어느 신문기자의 도움으로 게스트하흐트에 있는 예술의 집을 알게 되어서 그곳으로 이사했다. 게스트하흐트에서 나와 아이들은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시절을 보냈다. 예술의 집은 성공한 실험으로 인정받았다.
중학교에 들어간 후 아들이 학교 생활에 적응을 못하자 아이와 나는 놀이치료를 받게 되었다. 치료를 받으면서 나는 대학시절에 배웠던 심리학 이론을 마침내 현실에 적용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학교에서는 나의 이상을 실현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내가 진정으로 가르치고 싶었던 바람직한 사회성은 교사의 할 일이 아니었다. 나는 사표를 냈다. 그리고 예술의 집에 살고 있던 예술가 몇 사람이 명상을 배우기 시작해서 나도 같이 배우기 시작했다.
어느 날 아침 나는 뤼네부르크로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뤼네부르크로 가서 심리치료사 교육을 받았다. 뤼네부르크 시민학교에서 교사 자리가 하나 났는데 글을 모르는 어른들을 가르치는 문맹자 코스였다. 나는 시민학교에서 2년 동안 가르치면서 예전보다 사람들에게 훨씬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다. 운동심리치료 교육을 받기 위해 뤼네부르크를 떠나 도르트문트로 이사했는데 우리 사회의 변두리로 밀려난 사람들이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이들을 도울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를 고민했다. 심리치료사 공부를 했기에 이론적으로는 인간의 상호 공존을 도와줄 수 있는 조건을 갖추었다고 할 수 있지만 현실적으로는 딜레마에 빠져있기도 했다. 그러나 치료사가 나의 최종 목표는 아니었다. 나는 우연히 한 여성을 만나서 영적인 세계를 알게 되었다. 나는 2년 동안 시간이 날 때마다 명상을 했고 의미 있는 삶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2. '주고 받기 센터'어느 날 아침 라디오를 듣다 캐나다의 한 마을에서 지역 품앗이 운동이 일어나고 있다는 뉴스를 듣게 되었다. 서비스를 제공받으면 그에 해당하는 '빚'을 돈으로 갚지 않고 자신의 능력을 다른 사람에게 제공하는 방식이었다. 돈이 없어도 생활에 필요한 여러 가지 일을 처리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이웃과의 화목도 꾀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나는 이것이 바로 가난과 고독을 이겨낼 수 있는 현실적인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당장 지역 품앗이 운동을 실행에 옮기기로 결심했다. 우선 내 계획을 널리 알리는 일이 급선무여서 나는 한 언론사에 편지를 보냈고 다음날 내 계획을 다룬 기사가 신문에 실렸다. 나는 '자동차 나눠 타기 센터'를 떠올렸다. 나누고, 인간관계를 형성하고, 자원을 절약하는, 이런 운동의 취지 역시 내 생각과 다르지 않았다. 나는 우리의 '주고 받기 센터' 역시 널리 보급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나에 관한 신문 기사가 나간 후 많은 사람들이 참여 의사를 밝혔고 나는 참가자 전원의 개인 카드를 만들었다. 일을 시작할 때 내가 우려했던 건 모두들 주기보다는 받기를 더 많이 원하면 어떻게 하냐는 것이었다. 그런데 현실은 전혀 달랐다. 교회에서는 받기보다 주기가 더 복된 일이라고 말하고 있고 일상 용어에서도 '받는다'라는 말은 남의 것을 대가없이 가져가거나 빼앗는다는 의미에 가깝게 사용되고 있다. 하지만 나는 주고 받기가 동일한 가치를 지닌 개념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야만 품앗이 운동이 정상적으로 운영될 수 있었다. 품앗이 운동에 동참하고 싶은 사람은 모두가 무엇을 주고 그 대가로 무엇을 받을지 결정해야 했다. 그런데 품앗이가 시작되려면 참가자들이 서로를 알아야 했기에 나는 참가자들을 소개해 주기 시작했는데 생각만큼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품앗이 회원들이 인사를 나눌 수 있는 만남의 시간이 시급히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 달 후 내 계획은 실현되었다. 나는 이웃에 있는 건물 하나를 무료로 빌려 수리했고, 언제라도 우리가 원할 때 건물을 사용할 수 있다는 허락을 받아 냈다. 그리고 매월 첫째 주 화요일 밤 8시에서 10시까지를 품앗이 회원의 정기모임 시간으로 정했다. 첫 만남에서 밝혀진 대로 참가자들은 각양각색의 사람들이었다. 사회 계층도, 직업이나 연령층도 다양했다. 하지만 나는 다양한 사람들이 한 자리에 모여 함께 활동하다 보면 복잡한 인간관계를 배울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주고 받기 센터'를 만들 당시 나의 주 관심은 돈이었다. '주고 받기 센터'에서는 품앗이가, 일반적인 의미의 대가 없이도 가능하기 때문에 전혀 새로운 생존의 기반을 닦을 수 있을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우리 센터에선 절대 돈을 거래해선 안 된다고 못을 박았다. 그러나 전화비와 그 외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각 회원들에게 가입비 명목으로 20마르크씩을 받았다. 나는 작은 노트에 수입과 지출 내역을 기록하였다. 그러나 동전까지 철저하게 기록하지는 않았다. 나는 깐깐하게 살고 싶지 않았다. 돈을 다룰 때도 그때그때의 상황에 따라 탄력적인 자세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것이 문제가 되어 1회 연차총회 때는 큰 문제가 되기도 했다.
6개월쯤 지나서 어떤 젊은 여성이 우리를 찾아 왔다. 그녀를 통해 품앗이 운동이 10년 전부터 활성화되어 온 영국의 경험담을 들을 수 있었다. 주고 받기 운동이 순수 이웃돕기 차원을 벗어나 정치적인 의미를 확보하려면 정확한 계산법이 필요하다는 것이 그녀의 생각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사무국에서 인공화폐를 모아 체크를 한다든지 하는 통제는 원치 않았다. 논의 끝에 우리는 각자가 품앗이 한 내용을 거래내역 신고서에 기록하고 품앗이 한 시간마다 2점이 붙고 이것을 도츠라고 부르기로 했다. 이 안이 내겐 획기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이것을 통해 주고 받기의 균형을 조절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성과의 차이를 어떻게 계산해야 할까? 시간에 따른 계산법이 정당한 걸까? 많은 회원들이 이런 문제 때문에 탈퇴를 했다. 전혀 다른 기준에 따라 생활해 온 그들로서는 시간에 따른 계산법이 부당하다고 느꼈을 것이다. 우리는 전혀 새로운 모델을 찾고 있었고 아직 확실한 규칙이 없었다. '주고 받기 센터'의 일을 하면서 나는 한계에 부딪쳤다. 나는 회원 상호간의 불신을 완전히 없애지 못했으며 자주 비난 받았다. 나는 상호간의 신뢰를 쌓고 더불어 살 수 있는 공동체를 만들고 싶었다. 그냥 물건이나 서비스를 교환하는 차원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우리 회원들은 적극적인 사고가 부족했다. 그래서 나는 파티를 통해 분위기를 쇄신해보자는 아이디어를 내게 되었다. 파티는 성공적이었고 회원도 계속 늘어났다. 품앗이 운동을 활성화시키려면 언제라도 모일 수 있는 장소가 필요했다. 우리는 시내 중심지에 있는 건물의 복도를 우리 센터의 거처로 정했다. 그곳에서 대학생들과 옆 단체와 공동으로 인터넷 카페를 열면서 우리 그룹은 다시 한번 큰 변화를 겪었다. 퇴직한 할머니 할아버지와 주부, 편모들이 주를 이루던 센터에 많은 수의 대학생들이 합류했던 것이다.
3. 실험은 계속된다'낯선 사람에게 다가가 그들과 무언가를 나누고 교환하면서 즐거움을 느끼고 결국에는 친구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어떻게 설득할 수 있을까? 인간은 이념을 몸소 실천에 옮겨야 한다고, 이념을 머리에서 꺼내 현실 속으로 들여보내야 한다고 주장하던 그 교육자의 성공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만약 나의 이상을 100퍼센트 실천에 옮겨 완전히 돈을 포기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런 선례를 남긴다면 몇 사람에게 용기를 불어넣을 수 있을까? 말도 안 돼! 어떻게 돈 한 품 없이 살 수 있단 말인가? 화장실을 갈 때도 돈을 내야 하는 세상에서, 말도 안 되는 헛소리야.'
그러던 어느 날 한 친구가 휴가를 간다고 자기 집을 봐달라는 부탁을 하자 그 생각이 다시 떠올랐다. 그 직후 '주고 받기 센터'의 한 여성 회원이 며칠 간 자기 집을 봐달라는 부탁을 했다. 내가 남의 집에서 자면 편하지가 않다고 했더니 그녀가 샐비어 막대를 이용한 허브 청소법을 가르쳐주었다. 그녀의 권유대로 실헙해 봤더니 정말 효과가 있었다. 하이데마리 슈베르머가 언제라도 빈집을 지켜주겠다고 나섰다는 소문이 '주고 받기 센터'에 파다하게 퍼졌다. 나는 집이 없어도 잘 살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한 회원이 두 달 동안 미국을 가게 되었다고 집을 봐달라고 부탁하였다. 나는 우선 일년 동안만 무일푼으로 살아보기로 했다. 집을 팔고 가구와 소지품을 이웃에 다 나눠주었다. 하나 남은 옷장은 친구가 맡아주기로 했다. 나는 의료보험도 해지했고 다른 사람들의 집을 봐주면서 살았다.
무일푼으로 살겠다고 결심한 후 처음 세 달 동안은 생필품 공급에 큰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처음으로 빈집이 나서지 않아서 그럴 때를 대비해 마련해 놓은 임시 거처로 들어가게 되었을 때, 당연히 그곳엔 먹을 것이 없었고, 가슴이 답답했다. 실험을 시작하면서 나는 절대 남에게 부탁을 하지 않기로 작정했었다. 하지만 나는 먹어야 한다. 창의력을 발휘해야 할 때였다. 나는 '주고 받기 센터'의 회원들과 함께 빵을 만들자는 아이디어를 냈다. 각자가 조금씩 재료를 가져오고 대신 돈이 없는 나는 그 재료로 빵을 만들면 될 것 같았다. 그 아이디어를 실천에 올리기 전에 전화가 울렸다. '주고 받기 센터'의 한 회원이었다. 제과점에 매일 재고가 쌓여 걱정이라고 했다. 그는 센터에 빵이 필요한 사람이 없느냐고 물었다. 나는 빵을 받아와서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눠주었다. 그 일을 계기로 나는 다른 생필품의 재고도 그런 식으로 처리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길모퉁이의 유기농 가게 주인은 나의 이러한 의견에 동의했다. 그 대가로 우리는 그의 농장을 찾아 김매기나 청소를 해주고, 때로는 '주고 받기 센터' 관련 기사를 통해 약간의 광고를 해주기도 했다. 이미 오래 전부터 나는 품앗이 내역거래서를 이용하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를 주고 얼마를 받았는지 생각하지 않았다. 세상에는 그런 단순한 계산을 초월하는 균형이라는 것이 있는 법이다.
'새 삶'을 시작하기 전부터 나는 소비습관을 바꾸기 위해 노력했다. 쓸데없는 물건들을 없애버리고 나면 꼭 필요한 물건들을 더 집중적으로 사용하게 된다. 그리고 꼭 필요한 물건을 가졌을 때 그 전에는 느껴보지 못한 감사의 마음이 샘솟게 된다. 물건을 바라보는 관점도 바뀐다. 당연히 거기 있는 물건이 어떻게든 내 손으로 마련해야 하는 일용품으로 변한다. '오늘은 뭘 입을까?'라는 고민이 갑자기 너무나 실존적인 차원을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가끔씩 친구들이 이것저것 입을 거리를 마련해 주었지만, 장기적인 해결책은 될 수 없었다. 차라리 우리 센터의 특별 벼룩시장이 더 많은 도움이 되었다. 나머지는 기호의 문제였다. 나는 내게 맞지 않는 옷을 입어 봤는데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새 삶을 시작하면서 나는 나 자신을 너무 등한시하였다. 그래서 내게 어울리건 그렇지 않건 무조건 다 받아들였다. 그러느라 균형이 깨진 것이었다. 그 날 이후 나는 최대한 내 스타일을 고수하려고 노력한다. 나는 내 옷에 대해 필요한 만큼의 관심을 쏟기 시작했다. 옷을 몸에 걸치고서 불편한 심기로 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편지광이다. 거기다 전화를 한번 붙들면 놓을 줄을 모른다. 그래서 이 두 가지는 절대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돈이 없는데 어떻게 전화를 할 것이며 편지를 쓴단 말인가. 그러던 중에 인터넷을 알게 되었다. 전자 메일을 통해 많은 사람들을 알게 되었고 얼마 안 있어 전과 똑같이 많은 양의 편지를 주고 받게 되었다. 물론 예전에 내가 편지를 주고 받던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부류의 사람들이었다. 내 친구들은 대부분 아직까지도 온라인 상태가 아니다. 인터넷 사용료는 카페 이용자들이 부담했다. 나는 그럴 수가 있는 입장이 못 되었다. 그래서 나는 설거지를 해주었다. 일년 간 도르트문트를 떠나 있던 동안에는 인터넷도, 전화도, 편지도 없이 생활하였다. 요즘 나는 핸드폰도 있고 전화도 있고 이메일 주소도 있다. 물론 모두 물물교환을 통해 마련한 것들이고, 거기에 대해 전혀 마음이 불편하지 않다. 뭔가 꺼림칙한 타협은 절대 하지 않는다는 것이 내 원칙이다.
원래 일 년만 무일푼으로 살겠다던 계획이 이 년째로 접어들었다. 그동안 인간관계 뿐 아니라 내 실험을 바라보는 시선도 많이 변했다. 나는 언제 어디서나 독립적인 생활을 할 수 있다. 과거와 달리 돈을 벌어야 할 필요도 없었다. 그래서 다시는 과거의 삶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나는 일상생활에 필요한 온갖 물건을 원활하게 공급받았기에 충분히 만족할 만한 상황이었다. 무엇하러 내 공간 너머 큰 세상을 바라보려 애쓸 것인가? 그 세상을 변화시켜야 할 이유가 있을까? 그래도 나는 과거의 그 약속을 잊지 못했다. '주고 받기 센터'는 내가 없어도 아무 문제가 없을 만큼 잘 운영되고 있었다. 다시 떠날 시간이 돌아왔다. 첫 목적지는 렌츠부르크였다. 렌츠부르크에서는 별로 부족한 것도 없고 거의 모든 것이 완벽했다. 그럼에도 나는 '주고 받기 센터'에 있을 때처럼 내가 진정으로 원했던 것은 이런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저 특이한 기인쯤으로 취급당하고 싶지 않았다. 어딜 가나 쇄도하는 똑같은 질문과 똑같은 의심도 지긋지긋했다. "그렇게 살아서 어쩌자는 거에요? 일을 해야지요." 늘 똑같은 말이었다. 경멸하지 않으면 지나치게 떠받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