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하지 않기에 더 느낄 수 있습니다
유진규 지음 | 중앙M&B
벙어리인 한 어머니가 있다. 어머니는 하나뿐인 아들을 키우기 위해 매일 일을 하느라 간
단한 수화조차 배울 시간이 없었다. 그 모습이 늘 안타깝고 애틋했던 아들은 다 장성하여 어머니에게 자신이 무엇을 해드릴 수 있을까 고민했다. 며칠을 고민하던 아들은 어머니에 게 수화를 가르쳐드리기로 마음먹었다. 두 팔을 벌려 하늘의 새를 설명하고, 어머니가 제 일 좋아하시는 사과를, 또 어느 추운 겨울 어머니가 손수 떠주신 따뜻한 털모자를 설명했 다. 어머니는 아들의 정성 때문이었는지 늦은 나이에도 아주 열심히 수화를 배우고 익혔 다. 늦은 밤까지 스탠드 불을 켜놓고 앉아 그날 배운 것들을 연습하고 또 연습하기를 얼 마나 했을까.
어느 날 문득 아들은 어머니에게 '사랑'이라는 단어를 가르쳐드리고 싶어졌다. 그러나 '사랑'이라는 단어는 새나 사과처럼 몸짓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아들은 너 무나 막막한 심정이 되었다. 어머니 눈을 바라보며 온갖 몸짓을 다했지만 결코 사랑을 설 명할 수는 없었고 답답한 나머지 아들은 그만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 모습을 본 어 머니가 가만히 아들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들이 안타깝게 흘리는 눈물을 보며 자신에게 가르쳐주려던 말이 사랑이라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작년 9월 세계는 세기에 남을 한 경악스러운 사건을 경험했다. 21세기 자본주의의 상징인 뉴욕의 무역센터 쌍둥이 빌딩이 단 몇 초 사이 테러범들에 의해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수천 명의 무고한 생명이 희생된 것에 분개한 미국은 곧바로 대응 보복에 들어갔다. 보복 대상은 탈레반 정권이 자리하고 있는 아프가니스탄의 수도 카불. 또 다시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아프가니스탄 현장에 파견된 특별취재반은 수도 카불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난민촌을 찾아갔다. 이미 수많은 전쟁을 치러온 그곳 사람들은 헐벗고 굶주린 채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아가고 있었다. 기자가 물었다. "지금 미국과 전쟁 중인 것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 질문에 대한 그들의 대답. "또 무슨 전쟁이 났나요?"
며칠 뒤 우연히 갖게 된 술자리에서 나온 테러 이야기. "영화 한 장면이 생생한 현실로 재현되었다." "대의를 위해서 일부 작은 희생은 어쩔 수 없다." "이 전쟁이 우리 경제에 끼칠 반응은?" 보고 듣고 느낀 것에 대한 표현이 아닌 현상에 대한 나열, 그 냉정함…. 말 그대로 하나의 사건일 뿐 그 이상의 의미는 없었다. 뭐 조금 점수를 더 주자면 지루한 일상을 강타하고 스쳐가는 소나기 같다고 할까. 그러나 그것도 우산 밑에서 물 한 방울 튀지 않고 안전하게 몸 사릴 수 있는 그런 짧은 소나기일 뿐이다.
부끄럽지만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인류의 문명이 한순간에 무너지는 경악의 순간을 보면서 나와 세계와 인간들에 대해 분노와 좌절을 느꼈다. 그리고 뒤이어 전개된 '테러와의 전쟁'을 보는 무력감…. 그러나 얼마 지나면서 나는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나만의 일상으로 다시 돌아왔다.
언제부터인가 우리에게는 더 이상 놀랄 일이 없다. '무관심'이라는 장벽 안에서 안전하게 살아간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그 무시무시한 실체를 드러내는 데도 그 실체 앞에 무너지는 자가 바로 나 자신이 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감정 없는 시선으로 바라볼 따름이다. 아니, 좀더 솔직히 말해 그런 것에 신경을 쓰기에는 오늘 하루가 너무 피곤하다. 당장 처리해야 할 서류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고 통장잔액을 신경 쓰며 세금을 계산해야 하고, 그 와중에 가족과 주변 친구들도 생각해야 한다. 도태되지 않기 위해 세상 돌아가는 정보를 끊임없이 체크해야 하는 것도 피곤하지만 해야 할 일이다.
완벽한 삶을 위해 매일 빠르게 달리는 우리다. 그렇다. 무관심과 냉철한 이성으로 무장하지 않고서는 이 세상을 바로 살아갈 수 없다. 매일 마주해야 하는 현실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으므로.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무관심'이라는 방패로 세상과 마주하고 있는 우리는 정작 아주 사소한 것으로 인해 무너진다. 그리고 알게 모르게 조금식 자아가 파괴되어 간다.
세상은 빠르게 돌아간다. 빠르게 돌아가는 만큼 우리가 매일 대해야 하는 대상들도 늘어간다. 그것들은 우리 일상 속에 아주 익숙하게 자리하고 있지만 그 수가 너무 많아 그걸 상대하는 우리는 매일 허덕여야 한다. 우리가 속한 세상은 아주 달콤한 목소리로 속삭인다. "모두들 아무렇지도 않는 듯 그렇게 살고 있어. 그렇게 하지 않으면 너 혼자 도태되고 말 거야."라고.
대상의 쇄도. 이것으로 인해 우리는 매일 정신없이 피곤한 하루하루를 살게 되고 그 하루가 모여 정신없는 십 년, 정신없는 오십 년, 정신없는 한 평생이 된다. 이것은 사는 것이 아니다. 살아지는 것이다. 사는 것이 아닌 살아지는 삶은 결국 그 모든 것으로부터 우리를 무관심하고 싸늘하게 만든다. 웬만한 것에는 놀라지도 않고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도 않는다. 점점 더 자극적인 것, 분명한 것, 노골적인 것들에 시선을 빼앗기지만 그도 잠시, 그 어떤 것도 우리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없다. 그러면서 말한다. "생각할 것이 너무 많아, 신경 쓸 게 너무 많아, 정말 피곤해 죽겠어." 결국 그렇게 해서 파괴되는 건 자기 자신뿐인 것을.
옷장을 가득 채운 수많은 옷가지들 중에서 옷을 꺼내 입고, 수많은 계단들 사이를 뛰어, 수많은 버스들 중 하나를 골라 타고, 수많은 건물들 틈을 지나, 수많은 음식들 중 하나의 메뉴를 고른다. 그밖에 수많은 지폐와 넘쳐나는 문건, 수많은 텔레비전 프로그램, 수많은 가십거리, 수많은 사건 사고, 그리고 수많은 말들….
이것이 바로 매일 버겁게 살아가는 우리들의 자화상이다.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진, 깨진 거울처럼 다면화되어 분열적으로 비치는, 그래서 원래의 모습을 알아볼 수 없는 자화상. 고개를 들어 바라보라. 원하든 원치 않든 하루 스물네 시간을 퍼즐 조각 맞추듯 살아가는 자신을. 쇄도한 존재들로부터 잘근잘근 씹혀 가는 자신을 말이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물어보라. 나의 자화상이 정녕 그렇게밖에 그려질 수 없는지, 그것이 진정 내가 원하는 모습인지를.여기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눈앞에 있다. 그 사랑을 표현할 수 있는 기회는 지금 이 순간뿐이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당신에게 주어진 기회. 그렇다면 당신은 어떻게 그 사랑을 표현하겠는가. "사랑한다."고 무조건 소리부터 지를까, 아니면 온 마음을 담은 편지를 건넬까. 그도 아니면 아무 말없이 달려가 안아 버릴까. 보다 확실한 전달법으로 손을 덥석 부여잡고 넷째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주는 건 어떨까. 아마도 그 중엔 그 어떤 말이나 행동도 취하지 못한 채 그저 벅찬 마음에 바라보고만 있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렇듯 상대에게 내 마음을 전달하는 방식은 너무나 많다. 누구나 한번쯤은 귀에 들리는 말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경험해 보지 않았을까. 특히나 사랑을 해 본 사람이라면….초등학교 4학년 때였다. 학기가 시작되고 얼마 안 돼서 환경미화심사가 있었다. 미화부장이었던 나는 청소를 마친 뒤 텅 빈 교실에서 혼자 남아 심사를 해 줄 선생님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조금 있으려니 선생님 세 분이 들어오셨다. 교실 이곳저곳을 둘러보시던 선생님 중 한 분이 갑자기 뒷칠판에 결려 있던 그림들 중 한 장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저 아이의 그림 좀 봐요. 다른 아이들의 그림은 비슷비슷한데 저 아이의 그림은 무언가 다르지요? 그림이란 저렇게 그려야 해요. 똑같으면 안 돼요."
가슴이 쿵쾅쿵쾅 뛰기 시작했다. 무슨 커다란 비밀을 몰래 들은 것 같았다. 똑같으면 안 된다, 남과 다른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 그 말은 그때부터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고 풀어야 할 숙제로 남았다. 세상을 이루는 수많은 존재들 가운데서 나만이 갖는 그 무언가를 찾아야 한다. 결국은 그것은 '나답다', '유진규답다'라는 말일 텐데 그게 과연 무엇일까. 그 의문은 학창시절 내내 나를 괴롭혔다. 그런 채로 대학에 입학했다.
점점 초조해지는 가운데 내 눈에 띈 것은 바로 연극이었다. 처음엔 별뜻 없이 시작했지만 생각 외로 무척 재미있고 매력적인 작업이었다. 내 몸짓을 통해 무언가를 표현하고, 내뱉고, 지르는 그 기쁨이 나를 살게 했다. 그래서 나는 주위의 강력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수의학과를 미련 없이 중퇴, 극단 '에저또'에 입단했다.
그런데 극단 에저또는 그때 실험적인 시도들을 참 많이 했다. 그 중의 하나가 마임이었다. 그 당시 한국은 마임에 있어 불모지나 다름없었다. 방태수 선생 밑에서 마임의 기초를 배웠지만 본격적인 마임을 가르쳐줄 사람이 없었다. 나는 김성구 등의 친구와 함께 프랑스문화원이나 도서관에 있는 마임자료와 비디오들을 보며 마임을 습득해 나갔다. 참 신기한 건 누가 나에게 배우라고 강요하지도 않았고, 해야 한다고 말하지도 않았는데 그 시간들이 힘들기는커녕 더 알고, 더 배우고 싶다는 마음에 시간 가는 줄 몰랐다. 하지만 그렇게 마임의 마력에 빠져들면서 나는 어느 순간 선택의 기로에 서야만 했다. 연극과 마임 중 어느 것을 할 것이냐?
이런저런 고민 속에 술을 먹고 집에 들어가던 어느 밤이었다. 문득 어슴푸레 한 소년의 얼굴이 떠올랐다. 어두컴컴한 좌석들 사이로 난 계단에 앉아 있는 한 소년. 숨을 죽이고 무대를 바라보며 그 속에 그냥 빠져들어갔던 그 소년은 다름 아닌 고3 때 세계적인 마임배우 롤프 샤레의 공연을 보던 나의 모습이었다. 하얀 조명 아래 검은 타이즈를 입은 한 배우가 말없이 몸을 비틀고, 꺾고, 흔들었다. 그리고 몸뚱어리 하나로 집을 짓고, 잠을 자고, 울고, 웃었다. 놀랍고 경이롭고 신비로웠다. 마치 딴 세상에 온 듯한 기분이었다.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던 그때 일이 불현듯 떠오르면서 초등학교 4학년 때 느꼈던 것처럼 다시금 가슴이 쿵쾅거렸다. '나답다', '유진규답다'라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을 알기 위해 보내온 세월들이 떠오르며 그 해답이 롤프 샤레의 공연을 숨죽여보던 그 소년에게 있을 것 같았다. 마치 희미하던 빛이 밝아지면서 그 실체가 뚜렷하게 드러나는 느낌. 나는 미련 없이 연극을 포기하고 마임을 택했다. 그리고 1976년, 내 손으로 직접 만든 최초의 마임 <육체표현>을 무대에 올렸다.
지금도 나는 계속해서 나답게 살기를 바라며 그 해답을 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어쩌면 유럽식의 마임에서 벗어나 지금 내가 '몸짓'이라고 부르는 한국적 마임 세계를 추구하게 된 것도 그 고민의 연속선상에 있는 것인지 모른다. 남의 것은 남의 것일 뿐이니까. 이제 진정 '내것'을 향해 딴데로 시선 안 돌리고 들어가야 할 때라고 느끼니까.
당신도 어떤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면 한번 당신 자신에게 물어보라. "이 길에 마음이 담겨 있느냐?" 마음이 담겨 있다면 그 길은 좋은 길이고, 그렇지 않으면 그 길을 가봐야 소용없는 길이다. 어떠한 길도 다만 하나의 길에 불과한 것이므로 당신의 마음이 원치 않는다면 그 길을 버리는 것은 당신 자신에게나 다른 이에게나 전혀 무례한 일이 아니다.2. 내 친구, 침묵 이야기
사랑을 꼭 말로 해야 아나요1. 마임이 내게 가르쳐준 것들
내가 마임을 선택한 이유죽음은 언제 어떤 형태로 다가올지 알 수 없기에 삶에서 가장 두려운 존재다. 두려운 만큼 사람들은 죽음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길 꺼린다. 누구나 살면서 겪게 되는 아주 당연한 통과의례임에도 불구하고. 잘 사는 것만큼이나 잘 죽는 것 역시 중요하다. 생의 마지막 순간 스스로 잘 죽는다고 자위할 수만 있다면 살아온 삶에 대해서도 잘 살았다고 감히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내가 생각하는 '잘 죽음'은 아무런 흔적 없이 깨끗이 사라지는 것이다. 육체적인 깨끗함이 아니다. 마지막 숨이 넘어가는 순간 떠나는 자와 남는 자 모두 울지도, 웃지도, 욕하지도 않는, 그저 떠나고 그걸로 모든 것이 족한 그런 죽임이다. 눈물이 날 정도의 애틋함이든, 비웃을 정도의 싸늘함이든, 욕할 정도의 분노든 그 어떤 흔적도 있어선 안 된다. 그것은 철저히 홀로 되는 것을 의미한다. 홀로 된다는 것은 가지고 있는 것을 다 버렸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런데 나이가 오십줄에 들어서면서부터 그것이 생각만큼 쉽지 않다는 걸 새삼 깨닫게 된다. 언젠가 내가 맞이할 죽음이 '깨끗한' 사라짐이었으면 하지만 산다는 건 그 반대로 나 자신을 자꾸만 더럽히는 일이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수록 세상살이로 인한 온갖 종류의 감정과 미련, 삶의 집착들이 거머리처럼 들러붙는다. 세월이 갈수록 두껍고 견고해져 종국엔 살갗의 일부인 양 느껴진다. 그러면 살아온 시간만큼이나 앞으로 살아야 할 시간이 많다는 게 끔찍해진다.
나는 그렇게 더렵혀지지 않기 위해 매순간 끝없는 나와의 싸움을 벌여왔다. 내 발목을 잡고 처음부터 내 몸이었던 양 떨어져 나가지 않는 그것들을 앞에 두고 벗는 훈련을 계속 해 온 것이다. 그러나 벗는 것이 살갗을 도려내는 것처럼 아프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부둥켜 안고만 싶을 때도 있다. 결국 그것들이 오늘의 내 발걸음을 무겁게 하고 지금 이 순간을 더럽힌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면서도 말이다.
하지만 그것은 분명 내 인생의 독이다. 또한 그로 인해 내 생의 마지막 날 깨끗한 죽음, 깨끗한 사라짐을 맞이할 수 없다는 걸 잘 안다. 그래서 나는 매일 아침 눈을 뜰 때마다 이렇게 말한다. "내 인생은 지금부터다." 하루의 시작이 곧 인생의 시작인 거다. 나는 매일 새로 태어나고 매일 죽는다. 아침에 태어나 밤에 죽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어제 내 몸에 붙어 있던 온갖 종류의 집착과 소유의 끈들이 어제가 끝남과 동시에 먼지처럼 사라져 버린다. 그러므로 하루가 끝나고 찾아 드는 어둠은 내게 있어 작은 죽음이다. 어제의 삶으로부터 깨끗이 사라져 버리는 그런 죽음.
그렇게 밤새 죽어 있다가 새벽 먼동이 틀 때면 나는 다시 탄생한다. 새로 태어났기에 나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이다. 내 몸에 들러붙어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어제의 나를 잊어버리고, 과거의 흔적을 남김 없이 지워 버리고, 완전히 새로운 인생을 맞는 것이다. 새 인생이 시작됨과 동시에 나를 이루는 모든 것, 내 주변의 모든 것 또한 새롭게 다시 시작한다. 업고 갈 과거가 없으니 모든 것이 홀가분하다.
아침에 태어나 저녁에 죽는 삶. 이런 하루들이 모여 앞으로 남은 내 인생을 이룰 수만 있다면 결국 나는 생의 마지막 순간에서 울지도, 웃지도, 욕하지도 않는, 아무 집착 없이 그저 홀가분하게 떠날 수 있는 '깨끗한 사라짐'을 맞을 수 있을 것 같다. 결국 오늘 나의 하루는 생의 마지막 날이기도 하다. 내일 아침이면 오늘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인생이 시작된다. 내게 주어진 삶은 오늘 하루뿐인 거다. 그래서 내겐 오늘 하루가 '내 생애 가장 특별한 하루'다.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내 인생의 가장 특별한 날, 오늘.서울의 도심 한복판에서 할아버지 한 분이 식당을 경영한다. 보통 식당이라면 그 날 장사를 셔터 올리는 것으로 시작하겠지만 할아버지는 좀 다르다. 하루 장사를 그냥 문 여는 것이 아니라 간판을 거는 것으로 시작한다.
처음 우연히 할아버지가 간판을 다는 걸 보며 '새로 생긴 식당이구나.' 생각했다. 그런데 일을 마치고 돌아가는데 낮에 봤던 간판이 보이질 않았다. 분명 이 건물이 맞는데 도대체 식당은 어디로 사라진 걸까. 며칠 뒤 그곳을 다시 지나는데 전에 봤던 그 간판이 눈에 띄었다. 간판을 고치려고 잠깐 떼어냈었나? 그러나 몇 시간 뒤 어김없이 사라진 간판. 이쯤 되면 내 머리를 의심할 밖에. 알고 싶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