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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게서는 사람의 향기가 난다

노무현과 함께하는 사람들 지음 | 열음사
그에게서는 사람의 향기가 난다

노무현과 함께하는 사람들 엮음

열음사/2002년 4월/256쪽/7,500원



자장가를 부르는 아내의 얼굴에 떠오르는 햇살 - 글쓴이 : 수호인

나는 어느새 마흔다섯 해를 살아온 중늙은이입니다. 제 아내와는 한 살 터울이지요. 저는 부산에서 태어나 다른 지역을 기웃거려 본 적이 없는 경상도 사내, 아내는 전남 나주가 고향이지만 광주에서 자란 전라도 토박이입니다. 제가 아내를 만난 것은 17년 전이었습니다. 프로야구 롯데 자이언츠의 열렬한 팬인 저는 광주에서 벌어진 롯데와 해태의 야구 경기를 보러 갔다가 롯데가 참패하는 바람에 화가 나서 함께 야구경기를 보러 갔던 부산 사람들과 술에 취해 터미널 부근에서 꽤나 난동을 부렸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어이가 없는 행동이었지만 당시에는 꽤 화가 많이 나 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유달리 승부욕이 강한 저는 터미널 안에서 술에 취해 애꿎은 의자를 힘껏 걷어차 버렸습니다. 순간 ‘빠악’ 하는 소리와 함께 저는 비명을 지르며 나뒹굴고 말았습니다. 함께 있던 사람들이 부랴부랴 저를 병원으로 데리고 갔는데 엄지발가락은 부러졌고 발등에는 금이 가는 처참한 부상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결국 저는 부산에 오지도 못하고 아는 사람 하나 없는 광주의 한 정형외과에 입원하는 환자가 되어 버렸습니다.

하지만 신은 제게 축복을 내렸습니다. 제 아내가 될 그 여자가 바로 그 병원의 간호사였던 것입니다. 아픈 것은 신경쓰지 않고 병원에 있는 동안 그 여자를 꾀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은 것은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보름 동안 입원하고 퇴원한 뒤에도 저는 틈만 나면 광주로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1년이 지난 후 기어이 제 여자로 만드는 데 성공했지요. 만세! 마아안세! 만만세!

결혼을 하고 난 후 아내는 제 둘째 매형이 원장으로 있는 부산에서 꽤나 유명한 산부인과에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결혼을 한 후에도 제 아내는 해마다 5월이 되면 광주를 찾아가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남편인 저한테까지 뚜렷한 이유를 말하지 않았습니다. 이유를 모르는 제가 화가 나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제 처가 식구들은 우리가 결혼한 지 2년인가 지난 후에 캐나다로 이민을 갔으니 광주에는 친척도 없거든요. 몇 년이 지난 후에 참다못한 제가 광주를 남몰래 찾아가는 이유를 물었습니다. 아내의 말은 이랬습니다. “관현이 오빠를 보려구요.” "관현이 오빠?" 저는 눈이 홱 뒤집히고 말았습니다. 이 여자가 나 모르게 만나는 남자가 있었남? 하지만 아내의 뒷말을 들은 저는 이내 함께 울고 말았습니다.

박관현! 그가 살아 있었다면 저와 아주 가까운 처남이 되었으리라는 사실 때문이었습니다. 박관현은 전남대 학생회장으로 1980년 5월 광주 민주화항쟁에 참여해 결국 광주교도소에 수감되었습니다. 민주화를 요구하며 독재정권에 맞서는 항거의 뜻으로 교도소에서 단식투쟁에 돌입했고 40여 일을 투쟁하다가 끝내 차가운 독방에서 죽음을 맞이했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었습니다. 그리고 그 분의 묘가 지금 광주 망월동에 있다는 것도.

제 처와 처가 식구들은 제가 부산 토박이라서인지 그 사실을 말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말을 했더라면 저도 처음부터 아내와 함께 그의 묘소를 찾았을 텐데. 지금 생각해 보면 아마 그놈의 지역감정이라는 놈이 그런 기가 막힌 상황을 연출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사실 저한테는 지역감정도 없고 누구보다 아내를 사랑합니다. 다만 전라도 출신이라는 천형의 멍에가 제 처를 움켜쥐고 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후 시간이 날 때마다 저는 아내와 함께 망월동을 찾게 됐습니다.

민주당 경선이 시작되고 광주 경선이 있던 날. 아내는 퇴근 후 집에 돌아와 인터넷으로 광주의 경선 현장을 보면서 움직이질 않더군요. 저는 그 이유를 알고 있었습니다. 아내는 어느 누구보다 그 지역감정의 피해자였으니까요. 경선 현장을 보면서 아내가 기도하는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았습니다. 어깨를 들썩이면서 기도하는 아내. 제가 들은 한 마디는 이랬었습니다. “하나님! 이 민족을 사랑하신다면 노무현 후보를 선택해 주세요. 그 분만이 이 나라의 아픔을 치유할 수 있습니다.” 전라도 출신인 제 아내가 부산 출신인 노무현을 위해 어깨를 들썩이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노무현 씨가 이겼습니다. 저는 만세를 불렀습니다. 특별히 노무현 씨를 좋아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제 아내를 위해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그것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후에 나는 매형과 누나한테 박관현 씨에 대해 얘기했습니다. 누나는 모르는 것 같았지만 매형은 깜짝 놀라는 것이었습니다. 1980년 당시 서울의 종합병원에 있었던 매형은 동료들과 후배들을 통해 박관현 씨에 대해 들어 잘 알고 있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적당한 시기에 망월동에 한 번 다녀오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매형은 그 분을 존경한다고 했습니다. 저는 말했습니다. “매형! 매형은 한나라당 ○○○을 차기 대통령으로 지지하고 꼽던데 내 집사람한테 미안하지 않수?” 매형의 말이 걸작입니다. “처남! 모를 때는 그럴 수도 있지. 하지만 알고 난 후에도 그러면 바보지. 내가 더 이상 바보가 될 수는 없지. 그리고 내가 한나라당 ○○○을 전폭 지지했던 것은 아니라고. 대안이 없어서 할 수 없이….”

매형은 제 처가 말하지 않아도 노무현 씨가 가장 뛰어난 대통령감이라고 진작부터 여기고 있었다나요. 더구나 더욱 웃기고 걸작인 것은 제 누나의 궤변입니다. 병원장 사모님 티를 내느라고 온갖 폼을 잡고 다니는 누나는 부산 여성단체에서 간부 일을 보기도 하고 한나라당 지구당 일이라면 빠지지 않고 다니면서 가끔은 후원회비도 낸 것으로 아는데(사실은 한나라 당원도 아니면서 폼 잡느라고 그랬을 겁니다) 동생인 나한테까지도 안면을 싹 바꾸며 이렇게 말하더군요. “노무현 씨는 조직이 없고 자금도 없을 텐데 어떻게 선거전을 치를까? 부산에서 후원회 행사 같은 것은 안 하나? 니 매형 카드로 어느 정도는 결제할 수 있는데…. 나도 노무현 씨가 좋더라.”

이전에는 노무현의 ‘노’자도 꺼내지 않던 사람들이 하루 아침에 열렬한 지지자로 바뀌더군요.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사흘 전 제 아내가 핏덩이 사내아이를 우리 집으로 데려온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면서 그 아이를 우리 아이로 키우자는 것입니다. 병원에서 어느 미혼모가 편지를 써놓고 사라져 버려서 구청에 연락한 다음 홀트 복지재단에 맡기기로 했는데 도저히 못 보내겠다나요. 처음에는 미치겠더군요. 이 나이에 나더러 또 다시 핏덩이의 아빠가 돼라니요? 사실은 제 큰딸이 고 1, 작은딸이 중 1인 딸딸이 아빠라서 아들이 있었으면 하는 생각을 한 적도 있지만 막상 아이를 데려오니 정신이 없더라고요. 물론 딸들은 제 어미 편을 들며 환호성을 질렀죠. 저는 조금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했습니다. 경험해 본 분들은 아시겠지만 생전 처음 보는 아이를 받아들이는 것이 확실히 쉬운 문제가 아니더군요.

그런데 어제 저녁, 아직 이름도 짓지 않은 핏덩이를 목욕시키면서 아내가 하는 말, “이제 이 땅에도 노무현이라는 희망이 생겼으니 이 아이의 이름을 희망이로 하는 게 좋겠어요. 당신의 성씨가 노씨가 아니라서 노희망은 아닐테고. 어머? 이제 보니 노희망이라는 이름이라면 이상하겠네? 희망이 없다는 뜻이잖아요. 역시 내가 당신한테 시집오길 잘 했네요. 차희망! 희망이 가득 찼다는 말이잖아요. 멋지지요?” 그러면서 자장가를 부르는 제 아내의 얼굴에 정말 희망이 흐릅디다. 이제 정말 좋은 세상이 올거라나요. 결국 저도 승낙하고 말았습니다. 아내가 좋으면 저도 좋으니까요. 제 딸들도 그렇고. 어쨌든 노무현 씨 때문에 저는 핏덩이의 아빠가 되고 말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중늙은이인 제게 아들을 주시다니요.



역사교사가 학교에서 느낀 노무현 돌풍 - 글쓴이 : 개혁

저는 고등학교에서 역사를 가르치는 교사입니다. 요즘 노무현 돌풍이 불고 있는 건 사실인 것 같습니다. 교무실에서도 노무현 씨 이야기가 화제에 오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전반적인 얘기는 “진짜 노무현 대통령이 나오는 것 아니냐.”, “노무현이 대통령 되면 사회가 확 바뀌는 건 확실하다. 난 대통령 후보로만 나오면 찍겠다.” 등의 얘기들입니다. 그리고 지난 주 수업시간엔 어느 학생이 이런 질문을 하였습니다. “선생님, 노무현에 대해서 좀 말씀해 주세요.”

요즘 아이들은 정치나 사회 같은 데는 관심이 별로 없는 편입니다. 개인주의 경향이 강해서 그런지 자신과 직접 관련된 문제에는 적극적이지만 관련이 없다고 느껴지는 정치 같은 건 무관심한 편이죠. 지금까지 교사생활을 하면서 수업시간에 특정 정치인에 대한 질문을 받은 건 처음 있는 일이었습니다. 전 사실 조금 충격을 받았었습니다. 잠시 후 제가 아는 한도에서 객관적 사실만을 대답해 주기로 마음을 먹고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내가 노무현이라는 정치인을 처음 본 건 TV로 중계된 <5공 비리 청문회>였다. 내가 너희들만할 때였지. 어린 나이의 내가 보기에도 속시원하게 증인들을 심문하는 모습에 기분이 좋았었다. 그때 이른바 ‘청문회 스타’라고 불렸었지. 그리고 곧 김영삼, 김종필, 노태우 씨가 힘을 합친 3당 합당이 있었는데 그때 김영삼 씨를 따라가지 않은 몇 안 되는 사람 중에 노무현이 있었다. 그때 난 김영삼 씨를 가장 존경했었는데 군사정권에 항복하는 모습을 보고 실망과 배신감을 느꼈지. 그래서 합당에 반대하며 악을 쓰며 싸우던 노무현 씨의 모습에서 대리만족을 느꼈었다. 이후 노무현은 부산에서 출마한 국회의원, 부산시장 선거 등에서 계속 떨어졌다. 지금 대통령 후보가 될지도 모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자신이 국회의원이 되고, 시장이 되는 현실적 이익보다는 지역감정을 극복하고 승리하는 것이 옳다는 신념이 국민들로부터 인정받고 있는 건 아닐까….”

“선생님, 노무현은 고졸이라던데요.” 그러자 다른 아이들이 “와, 대학도 안 나왔어?" ”그래, 노무현은 상고를 졸업하고 군대 갔다온 뒤 고시공부를 하여 사법고시에 합격하고 판사가 되었다가 변호사가 된 사람이다.“ ”와, 진짜 짱이네요. 대학 안 나와도 성공한 사람이네요.“ ”지금 대통령이 되겠다고 하는 모든 사람들이 명문고, 명문대를 나온 사람들이지. 나는 공부를 잘 해야 좋은 사람이 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 나라에서 공부를 잘 해야 대우를 받는 이유는 우리 사회가 학벌사회이기 때문이다. 좋은 대학을 나와야 대접을 받으니까. 학벌은 또 다른 카스트 제도에 불과한 것이지.“

“선생님, 누가 대통령이 될 것 같아요?” "글쎄, 우리 민족의 가장 큰 역사적 당면 과제는 분열의 극복이다. 남북의 분열을 통일로 극복해야 하고, 동서의 지역분열을 지역화합으로 극복해야 한다. 통일과 지역감정 해소에 가장 적합한 후보가 대통령이 되었으면 좋겠구나. 반민족적이고, 강대국에 사대적이며, 기득권층을 옹호하는 후보가 대통령이 된다면 우리 역사는 퇴보하게 될 테니까. 이상이다. 자, 이제 교과서로 돌아가자.“

수업을 마치고 교실을 나오면서 기분이 좋았습니다. 아이들이 현재의 살아있는 생생한 역사에 관심을 갖고 있음을 확인하고, 나도 모처럼 살아 있는 역사수업을 했다는 뿌듯한 마음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1988년, 제도권 정치에 결코 물들지 않겠다고 약속했던 노무현 - 글쓴이 : 부산에서

나와 노무현 후보와의 만남! 지난 1987년 6월 민주화항쟁 때, 국민운동 부산본부의 6월 항쟁지도부의 상임 집행위원장과 집행위원으로서의 만남이었다. 노무현 후보는 당시 청년, 학생들보다는 신분적으로 안정된 변호사였음에도 불구하고 항상 자신을 내세우기보다 함께 토론하고 의견을 수렴하며 진지하게 항쟁의 방향을 정했다. 늦은 밤까지 거리에서 최루탄을 마시고도 새벽까지 청년들과 함께 내일의 항쟁에 대하여 의논하기도 하였으며, 청년들이 변변한 식사도 못하는 것을 보고는 몇 푼 남지 않은 호주머니의 돈까지 꺼내어 먹을 것을 챙겨 주었다.

그렇게 1987년 대통령 선거까지 청년들과 함께 하다가 후보 단일화 실패로 부산의 민주화운동 세력의 대부분은 김대중 씨에 대한 비판적 지지를 선언하였고, 결국 노태우 씨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러나 노무현 후보는 결코 좌절하지 않았고, 우리 청년들도 그와 함께 새로운 각오로 다시 시작하고자 했다. 여러 모색 중의 하나가 정치세력화였으며, 제도 정치권에의 참여였다. 그때 김영삼 씨의 통일민주당에서 제안한 것이 부산의 민주세력 두 명에게 공천을 주겠으니 민주운동 세력이 전체적으로 통일민주당에 결합해 달라는 제안이었다. 당시는 이미 1987년 대통령 선거를 통해 양분된 김대중 씨의 평화민주당과 김영삼 씨의 통일민주당의 시대였다. 우리는 오히려 김대중 씨의 평화민주당과 함께 하고 싶었지만 평화민주당으로 부산에서 정치를 한다는 것은 어렵다고 판단했다.

우리는 정치를 바꾸고 싶었다. 이를 위해 누군가는 제도 정치권에도 들어가야 했다. 통일민주당에서는 노무현과 김광일을 민주세력의 지분으로 제안했다. 그러나 우리는 노무현 후보와 김재규 선배를 제안했다. 결국 통일민주당에서는 김재규 선배는 너무 진보적이라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하였기에 쌍방의 제안은 없었던 일로 하였다.

어느 날 노무현 후보에게서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당시 각 분야의 실무책임을 맡고 있었던 여섯 명 정도의 청년들이 함께 했다. 그 자리에서 노무현 후보는 혼자만이라도 제도권 정치에 들어가고 싶다고 하였다. 이미 서울을 비롯한 각 지역에서 민주세력이 공천을 받고 있었던 시기였다. 우리는 물었다. “왜 국회에 들어가야 합니까? 통일민주당에 들어갈 바에야 차라리 계속 재야에서 민주세력의 지평을 넓혀 갑시다.” 노무현 후보가 대답했다. “대선의 실패는 결국 우리의 세력이 없어서였다. 6월 항쟁과 직선제 쟁취는 국민이 이루어 냈지만 진실로 국민을 위한 정치인은 드물다. 그러기에 결국 국민의 지지 속에서 정치인이 나오지 못하는 것이다. 재야에서 싸우는 사람도 있어야 하지만 제도권에 들어가서 정치의 방향을 바꾸고, 국민을 대변하는 정치를 하여 대선에서 실패한 국민들에게 희망을 주어야 한다. 정치의 주인은 국민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물었다. “제도권에 들어가면 물들지 않을 자신이 있습니까?” 노무현 후보가 말했다. “결코 물들지 않겠다. 만일 내가 물든다면 언제라도 나오겠다. 희생당한 수많은 민주동지들의 뜻을 결코 져버리지 않겠다. 지켜봐 달라.” “어느 지역구에 출마하겠느냐?” “5공의 핵심인 허삼수 씨가 있는 동구에 출마하겠다.” “가장 어려운 지역이 동구인데?” “그렇기에 더욱 이겨야 한다.”

우리 모두는 그 자리에서 노무현 후보의 뜻에 찬동하였다. 그리고 통일민주당 후보로서가 아닌 개인 노무현 후보를 국회의원에 당선시키기 위하여 6공의 대표인 허삼수 씨가 있는 동구에서 청년, 대학생들이 함께 밤낮으로 뛰었다. 아침밥도 챙겨 먹지 못하고 집에서 나와 점심은 각자 호주머니 털어서 라면이나 국수로, 저녁은 밤늦게 막걸리 한 사발로 때우기를 한 달 동안 계속하였다. 지금으로서는 생각도 못할 일이다. 그것이 지금의 노사모의 전신일 것이다. 선거 전날에는 밤을 새며 동구의 곳곳을 누볐다. 선거일과 개표시간에도 청년, 학생들이 감시의 눈이 되었다. 그리고 자정이 넘어 노무현의 당선이 확정되었을 때 우리는 개표장에서 환호성을 질렀다. 그 날 역시 수백 명의 청년들이 빵으로 때우며 맞이한 밤이었다.

그리고 지금 노무현은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가 되었다. 1987년 6월의 노무현과 2002년 3월의 노무현은 정말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조금도 제도권에 물들지 않았다. 세월이 흘렀건만 어찌 그렇게 변하지 않았는지…. 그때나 지금이나 융통성을 갖더라도 원칙과 신념에 어긋나지 않는 선에서 타협해 나가는, 독선적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항상 대화를 통하여 상대방의 의견을 존중하며 끝없이 방향을 찾아가는 불굴의 삶. 노무현은 바로 이런 사람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1988년 4월의 기쁨을 2002년 4월에 다시 맛볼 것이다. 그리고 12월 국민정치의 승리를 볼 것이다. 그것은 노무현의 승리가 아니라 국민정치의 승리이다. 항상 국민을 섬겨 온 사람, 노무현. 그는 개인의 이익은 조금도 계산하지 않았다. 노무현과 함께 국민정치의 시대를 활짝 열어 나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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