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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든 할 수 있는 자유, 아무것도 하지 않을 자유

홍신자 지음 | 명진출판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자유, 아무것도 하지 않을 자유

홍신자 지음

명진출판/2002년 5월/272쪽/9,900원



1. 영혼의 본래 자리는 상실의 숲

존재 - 나는 누구인가, 너는 누구인가

“당신은 누구십니까?” “나~는 박한결.” “그 이름 왕자님 같군요.” 어린아이들이 부르는 동요다. 예쁜 몸짓까지 곁들여서 부르면 보는 부모님들은 흐뭇해하며 자지러진다. 나는 이 노래를 가끔 이렇게 바꿔 흥얼거린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를 땐 말이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나~는 뜬구름.” “나~는 바~람.” “나~는 민들레.” 그렇게 나는 구름도 되고 바람도 되고 꽃도 된다.

한때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이 손쓸 수 없는 고통처럼 나를 들쑤셔대던 시절이 있었다. 내 나이 서른여섯 살 때였다. 그 답을 풀지 않고서는 세상 어디로든 한 발자국도 나서지 못할 것 같은 절실함이 밀려왔다. 춤이면 충분하지 않냐고 스스로를 달래기도 했다. 어렵게 미국으로 건너가 주위의 만류를 뒤로 하고 춤꾼으로서의 인생을 살아가기 위해 무용을 시작하던 스물일곱의 나는 충분히 행복했으니까.

그렇게 뒤늦게 다른 이의 표현을 빌리면 ‘미친 듯’ 시작한 무용만을 생각하며 한눈 팔지 않고 눈코 뜰 새 없이 꼭 십 년의 세월을 보내자 뉴욕 최고의 무용가로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서 공연 요청이 이어졌고 관객들은 늘 나의 몸짓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도 나에게 찾아온 삶의 갈증까지 해소시켜 주지는 못했다. 나는 누구인가, 내 영혼은 어디에 있는가…. 견고하다고 생각했던 나의 성은 이 물음 앞에 서자 위태롭게 서 있는 허술한 가건물에 불과했다.

인도로 가는 짐을 꾸렸다. 마치 한 생애를 끝내고 다른 생애를 시작하는 기분으로 뉴욕 생활을 하나둘 정리해 나갔다. 더 이상 사람들이 보내는 찬사나 명성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것들은 일생동안 나를 쫓아다닐 물음을, 내가 태어나 꼭 풀어야 할 것 같은 근원적인 숙제를 잠재울 힘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영혼의 갈증으로부터 춤을 시작했듯 새로운 물음이 다시 찾아온 것이었고, 열정을 다해 춤을 춘 것과 마찬가지로 이제 그 물음에 내 모든 것을 걸고 답하리라 다짐하며 나는 인도로 떠났다. 그리고 긴 길을 돌아 예순둘의 나이를 살고 있는 나는 아직도 가끔 찾아오는 그 물음에 이제 아파하지 않고 담담히 마주하게 되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나 불교에서 참선을 할 때 화두로 삼는 “이뭐꼬.”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깨달음에 대한 물음들이다. 누구든지 한번쯤 자신의 인생을 걸고 풀어야 할 물음, 존재에 대한 이런 물음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이 물음은 아주 오랫동안 곁에 머물며 한 시절을 온통 어지럽히기도 하고, 한때의 소나기나 늦은 밤 차가운 바람처럼 가슴 깊은 곳에 잠시 머물다 스쳐갈 수도 있다. 앞만 보고 열심히 달리다가 갑자기 막다른 골목에 들어선 듯 자신의 앞을 가로막고 서 있는 커다란 담 같은 이 물음에 맞닥뜨리면 사람들은 우왕좌왕하며 혼란에 빠진다. 물음 그 자체에 빠져 평생동안 길을 헤매거나 혹은 애써 무시하며 억지로 내부 깊숙이 쑤셔 넣는다. 어느 경우도 자신을 자유롭게 하지 못한다. 삶의 미궁에 빠지게 한다. 불교에서는 이 물음에 ‘제법무아(諸法無我)’라는 답을 던져 준다. 즉 이 세상 모든 존재의 ‘실체’는 없다고 말한다. ‘내가 누구인가’에서 ‘내가 없다(무아)’로까지 가는 길은 물론 쉽지 않다. 하지만 또한 어렵지 않다. 내면 속의 거울을 끄집어내기만 한다면 말이다. “내면 속의 거울이라고? 참내, 더 어렵네.” 툴툴거리지 말자. 삶은 그렇게 단순하고 간단한 것이 아니다. 어렵게 얻은 것일수록 놓치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하는 법이다.

본성 - 모두는 본래 자유로운 존재였다

나미코가 처음 한국을 방문한 것은 1995년 제2회 죽산국제예술제 때였다. 이제껏 나미코의 누드처럼 나를 감동시킨 몸은 없었다. 가와무라 나미코. 그녀는 일본의 전위무용가다. 그해 예순여섯 살이었던 나미코는 20년 전부터 시작해 최근까지 누드로 무대에 오른다. 아니 오른다는 표현은 옳지 않겠다. 그녀에게 있어 무대는 인공적인 조명으로 장식된 딱딱한 시멘트 벽 속의 공간이 아니라 산이나 들과 같은 자연이다. 자연 속에서 나미코는 오로지 걷는다. 자연 속으로 스며들어 자연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녀에게 춤이란 걷는 행위다. 나무나 들이나 숲 사이에서 혹은 설원의 대지에서, 산등성이에서 그녀는 천천히 걸을 뿐이다. 어떠한 안무도 없다. 몸 전체로 아주 느리고 천천히 걷는다. 그것이 그녀의 춤이다. 그저 걷는 것이 전부인 그녀의 춤을 보기 위해 사람들은 들과 강으로, 눈이 쌓인 설원으로 모인다. 그렇게 모인 사람들을 곁에 두고 나미코는 한 시간 동안 눈 위를 걷기도 하고, 강을 건너기도 한다. 정말이지 나미코의 몸은 마치 영령이 깃든 신목처럼 경건하게 느껴진다.

나미코의 춤을 처음 접했을 때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표현할 수 없는 긴장감이, 졸고 있는 내 영혼을 깨우는 긴장감이 온몸을 휩쌌다. 정신과 몸이 모두 팽팽히 일어서는 순간이었다. 나미코를 만나기 위해 일부러 일본으로 건너간 이후 나는 그녀의 아주 열렬한 팬이 되었다.

<자연과 인간, 예술>을 주제로 했던 죽산예술제를 준비하며 제일 먼저 나미코를 떠올린 것은 너무나도 당연했다. 그녀 역시 반갑게 죽산을 찾았다. 석양이 물드는 산기슭에서 초여름의 미풍처럼 나미코는 벌거벗은 몸으로 다가왔고 웅성거리던 분위기는 이내 숙연해졌다. 자연과 인간이 하나라는 물아일체의 감동을 받았다는 관객이 그녀에게 물었다. “어째서 누드로 공연하지요?” “내게는 옷을 입거나 장식한다는 행위가 매우 거북스러워요. 그저 있는 그대로 만나기를 원합니다.”

물론 그녀는 자신의 몸을, 춤을 보여주기 위해 식사를 거르거나 몸매를 다듬는 일 따위는 하지 않는다. 그녀는 매일매일 명상과 검도를 하고, 자신의 마음이 단 한순간이라도 흩어지지 않도록 ‘각성’의 순간을 유지한다고 했다. 나미코는 마음과 몸의 중심이 하나가 되었을 때 표현할 수 있는 최고의 감동을 보여 주었던 것이다. 사람들이 그녀에게서 본 것은 60대 여성의 몸이 아니라 육체로 표현되는 자유로운 영혼이었다. 그것이 사람들을 기쁘게 하는 것이다.

식물이 행복한지 아닌지를 측정하는 과학장비가 있다고 한다. 식물이 나타내는 고유의 파동을 측정하면 그 식물이 어떤 상태인지를 알 수 있는 것이다. 벌목꾼이나 목수들이 숲에 들어서면 모든 나무들의 파동이 일제히 불안정해지고 공포와 두려움에 휩싸인다. 심지어 한 그루의 나무라도 잘려질라치면 그 주변의 나무들까지 일제히 비명을 지르는 것과 같은 격렬한 반응을 보인다고 한다. 나무들에게 사람들의 생김새와 차림을 볼 수 있는 눈이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각각의 생명체가 나타내고 있는 에너지의 상태, 동양식으로 말하면 기를 통해 주변 사물에 대한 직감적인 판단력이 생겼을 것이다.

나는 사람들도 식물들과 마찬가지의 감각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겉으로 보이는 화려한 옷차림이나 외모 외에 상대방에 대한 정보를 알 수 있는 감각이 있다고 확신한다. 앞서 말한 나미코의 경우에도 사람들이 감동한 것은 그녀의 몸이 아니라 그녀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인한 영혼의 에너지였을 것이다. 겉차림이나 외양만으로 그 사람의 됨됨이를 판단하는 것은 몸을 영혼과 분리된 물질로 봤을 때 생기는 착오다.

우리 모두는, 모든 존재는 본래 자유로운 존재였다. 자유로운 존재는 자유롭게 살 때 가장 행복하다. 일시적이고, 제한적이고, 위선적인 이유로 가리고, 삼가고, 꾸미고, 집어넣고 할 때 자유로움은 사라지고 허상에 집착하는 ‘거짓 나’가 진짜 행세를 하며 설쳐대는 것이다. 다 벗어버리자. 본성을 흐리게 하고 우리의 마음을, 눈을 어둡게 하고 결국 자유 대신 구속을 가져오는 모든 관념과 가치와 인식을 모두 벗어버리자. 조금이라도 날아오르자.

몰입 - 하지 않을 자유, 할 수 있는 자유

‘언젠가 이렇게 나는 들었다. 스승은 슈라바스티에 머물고 있었다. 아침 일찍 스승은 옷을 입고 그 위에 가사를 걸친 다음 밥그릇을 들고 먹을 것을 얻기 위해 슈라바스티 큰 성 안으로 들어갔다. 성 안의 집들을 차례로 돌며 먹을 것을 얻은 다음 스승은 돌아와 식사를 끝내고 자신의 밥그릇과 가사를 치우고, 그러고 나서 발을 씻고, 마련된 자리에 두 다리를 가부좌하고, 몸을 꼿꼿이 세워 앞쪽으로 주의를 집중하고 앉았다.’

『금강경』의 첫 대목이다. 붓다의 하루 일과를 고스란히 적고 있다. 사람들은 이 대목이 무엇을 뜻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서양의 번역자들은 단순한 일과의 반복을 나타낼 뿐이라고 여겨 아예 이 대목을 빼기도 한다고 들었다. 그러나 이 대목은 붓다의 깨달음을 그대로 알려 준다. 깨달음은 일상 속에 있다. 세수를 할 때는 세수만 하고, 밥을 먹을 때는 밥만 먹는다. 치아를 닦는 일이 세수를 하는 일보다 덜 중요하지 않고, 밥을 먹는 일이 설거지를 하는 일보다 더 중요하지 않다. 이를 닦으면서 어떻게 밥을 먹을까 고민할 필요도 없고, 밥을 먹으며 무슨 옷을 입어야 하는지에 관심을 둘 필요도 없다. 밥을 먹는 일은 책상에 앉아 있는 일보다 사소하지 않다. 비즈니스만큼 잠자는 일도 중요하다. 정성을 다해 하는 일은 무엇이든 성스럽고, 천박한 마음을 가지고 대하면 어떠한 성스러운 일도 하찮은 것이 된다.

도(道)를 구하는 행위는 특별한 것이 아니다. 일상 곳곳에는 우리가 깨달음에 이를 수 있는 장치들이 있다. 밥을 먹거나, 길을 걸어가거나 혹은 잠을 자는 것 전체가 각성을 요하는 수행이다. 꽃과 나무를 있는 그대로 보고, 지금 하고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그 한가운데에 몸이 있다. 내 몸의 모든 동작에 신성(神性)이 깃들어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는 순간 몸과 마음은 자유를 얻는다. 사람들은 흔히 내게 묻는다. 그 자유로움의 에너지가 어디서 나오느냐고. 그 비밀은 아주 단순하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은 하고, 하기 싫은 일은 하지 않기 때문이에요. 쉬고 싶을 때는 쉬고, 춤을 추고 싶을 때는 춤춥니다. 그것이 전부예요.”

너무 바쁘게 살아온 그간의 일상을 재설계할 필요가 있다. 목표를 향해 열심히 살았다고 생각했지만 어느 순간 곁에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느껴질지 모른다. 너무 목표를 멀고도 험하게 잡았기 때문이다. 그 목표를 단순화하라. 밥을 잘 먹는 것, 옷을 잘 입는 것, 잠을 잘 자는 것, 행복한 섹스를 하는 것. 순간에 집중하고 일상을 즐기는 일들이 바로 인생을 자유롭게 사는 최선의 선택이다.

여기서 다시 우리는 ‘너 자신을 알라.’와 ‘이뭐꼬.’를 떠올려야 한다. 그것이 깨달음의 화두이다. 이미 만들어져 있는 개념이 ‘참 나’를 보는 것을 방해하고 영혼을 씻어 내는 것을 방해한다. 생각과 판단 이전의 마음, 비어 있는 맑은 마음을 유지하라. 그리하여 아무도 없고 나도 없는 무심과 무아의 상태로 자연과 일치하라.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두 수도승이 대화를 나누고 있다. 한 수도승이 말했다. “우리 스승은 정말 도통한 것이 틀림없어. 강 한쪽의 둑에 앉아 맞은편의 모래사장에 이름을 쓰실 수 있다고. 정말 대단한 스승이야.” 옆에 있던 수도승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렇군. 하지만 그건 아무것도 아니야. 나의 스승은 시장하면 잡수시고, 피곤하면 주무셔. 나는 그처럼 깨달은 분을 뵌 적이 없어.” 먼저 말한 수도승은 그 말에 무릎을 꿇었다.

아주 작은 일에서부터 깨달음은 시작된다. 그것은 삶 전체를 평화롭게 하고 시끄러운 마음을 고요에 젖어들게 한다. 유별나게 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자신을 관조하고 자신이 원하는 바를 몸을 통해 이루는 것이다.

예순을 넘긴 이제서야 비로소 몸에 대해 알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그것은 새로운 희망이었다. 오랫동안 몸을 끌고 오면서 몸의 건강을 지키는 일이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 알지 못했다. 이전까지 건강을 지킨다는 것은 무언가 다른 일을 좀더 열심히 하기 위한 동기였다. 그러나 이제 일부러 건강을 지킬 필요가 없어졌다. 건강은 따로 지켜야 할 것이 아니라 몸 그 자체가 ‘건강을 원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몸의 소리를 제대로 듣고 그 부름에 따라 사는 순간 삶 전체가 우주적 질서에 의해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 질서는 내 영혼을 기쁘게 하는 좀더 긍정적인 삶의 방식을 꿈꾸게 한다. 몸을 돌보고 몸의 소리에 귀기울이는 것이 얼마나 큰 즐거움인지 경험해 보지 않겠는가. 지금 바로 손을 뻗어라. 그것은 아주 작은 일상에서부터 시작된다.



2. 자유의 유일한 조건은 바로 지금 여기다

우리는 그 동안 너무 심각하게 살아왔다

멍청한 듯 가만히 앉아있을 때가 있다. 간혹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고 있느냐고 묻지만 실은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다. 그냥 앉은 채로 몸의 에너지가 흐르는 그 진동을 느끼고 있을 뿐이다. 조용히 나를 내 몸에 맡기는 순간 몸은 점점 무거워지고 단전을 중심으로 온몸에 열이 차기 시작한다. 맥박과 심장이 뛰는 것이 느껴진다. 귀로 듣는 것이 아니라 몸 전체가 느끼는 소리다. 차가웠던 손발이 따스해지고 숨소리도 규칙적이며 고르다. 시간은 흐르나 멈추어 있고, 이전까지 잡아끌던 그 모든 세상 속 이야기들이 허공에서 맴도는 바로 그 순간 몸과 나는 하나다. 몸은 나의 노예가 아니고 나 역시 이 몸의 주인이 아니다. 몸은 마음과 의지를 이끌어 주는 든든한 동반자인 것이다.

그렇게 앉아 아주 기쁜 마음으로 나는 몸의 느낌 하나하나에 집중한다. 나의 감성을 이끄는 좌뇌와 세상을 이해하기 위한 논리력을 주는 우뇌, 나의 뜨거운 예술혼을 안아드는 심장과 대기의 조화로움을 고르게 호흡하는 폐, 삶의 에너지를 충전시켜 주는 위와 장, 그리고 손가락 마디마디에서 발끝까지 나는 그들을 의식하고 고르게 쓰다듬는다.

“피곤해.”라고 말하면 두 손이 기지개를 펴고 일어나 양손을 마찰시킨다. 그리고 출혈된 두 눈을 가볍게 비벼준다. 손의 따스한 온기가 눈에 전해지며 피로가 햇살에 이슬이 녹듯 풀린다. 어깨가 결린다고 느끼는 순간 목은 서서히 원을 그리며 팽팽했던 근육을 이완시킨다. 그러면 머리와 목, 어깨를 감싸던 부분이 조금씩 부드러워지는 것을 느낀다. 속이 더부룩하다고 느끼면 어느새 복부 깊숙이 큰 숨이 새어나오고 큰 북을 치듯 나의 두 손이 아랫배를 두드리기 시작한다. 곧 자연스럽게 트림이 나온다. 그 모든 행위에 나의 의지는 없다. 그저 몸의 자연스러운 움직임일 뿐. 내가 나의 몸을 치유하자고 작정하면 몸은 그 방법들을 하나씩 알려준다. 몸의 지혜인 것이다. 나는 언제나 몸 앞에서 한껏 어린애가 된다. 몸과 나 사이에 내일을 향한 생각도, 그 어떤 욕심도 없다. 몸과 하나가 된 나는 몸과 뒹굴면서 터치하면서 논다. 때리기도 하고 두드리기도 하면서. 이렇게 몸과 실컷 놀다보면 나를 억누르고 있었던 근심이나 걱정들은 매우 시시한 일들로 사라지고 만다.

깨어 있는 사람에게는 삶 전체가 놀이다. 놀이를 하는데 짜증이 나고 하기 싫고 두렵지는 않을 것이다. 삶을 즐기듯이 사는 이에게 살아 있는 동안의 시간은 아름다움 그 자체다. 우리는 그 동안 너무 심각하게 살아왔다. 이 세상을 ‘소풍’이라고 표현한 시인의 시구에는 깨달은 자의 현답이 있다. 인생은 즐겨야 할 놀이다.

한평생 잘 놀다간 사람의 몸은 아름답고 매우 청결하다. 자연주의로, 학자로, 정직한 노동으로 한평생을 살아왔던 스코트의 삶은 그래서 나에게 큰 의미를 준다. 미국 버몬트의 숲에서 ‘땅에 뿌리박은 삶’을 살았던 그가 백 살이 되었을 때 마을 사람들은 ‘스코트 니어링이 백 년 동안 살아서 이 세상이 더 좋은 곳이 되었다.’라는 글을 새긴 깃발을 들고 그를 찾았다. 그리고 그는 이 생에서의 삶을 마감해야 할 때임을 느끼고 스스로 몸을 비우면서 죽음을 기다렸다. 우선 딱딱한 음식부터 거절했고 주스만 마시다 나중엔 물만 마셨다. 그는 단식으로 자기 몸을 스스로 벗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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