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생목록
재생목록이 비어 있습니다.
-
-
0:00 0:00
화면 너비 (여백)
좁게
보통
넓게
최대
배경 테마
글꼴
바탕/명조
돋움/고딕
글자 크기
작게
100%
크게
줄 간격
좁게
보통
넓게

아름다운 원칙

이회창 지음 | 예지
아름다운 원칙

- 이회창의 삶과 사랑이야기 -

이회창 지음

예지/2002년 5월/263쪽/7,000원



1. 세상 속으로

첫 전학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다니는 동안 나는 전학을 많이 했다. 아버지의 근무지가 옮겨질 때마다 온 가족이 짐을 꾸려서 이사를 가야 했기 때문이다. 그 시절에는 그게 정말 싫었다. 새로운 땅으로 들어서서 가까스로 뿌리를 내리고 주변 환경에도 어울릴 만해지면 우리는 다시 뿌리를 거두어 미지의 땅으로 떠나야 했으니까. 짐을 꾸리면서 나는 늘 ‘또 낯선 동네로 가는구나, 이번에는 또 어떻게 친구들을 사귀고 놀림받지 않는 아이가 될까.’ 하는 고민으로 한숨을 내쉬곤 했다.

하지만 정작 이사지에 짐을 풀면 나는 한숨만 내쉬고 앉아 있지는 않았다. 나는 무척 바쁘게 여러 가지 일들을 찾아 나섰다. 새로운 환경 속에 내 자리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학급의 친구들과 함께 야구를 하면서 매일처럼 해가 질 때까지 놀기도 했고, 맘에 드는 친구는 눈여겨 봐두었다가 친구가 되자고 먼저 청하기도 했다. 텃세를 부리는 아이들과 싸움질을 벌인 적도 있었다. 그렇게 여러 가지 일들을 만들고 겪다 보면 어느 틈에 그곳에는 내 자리가 만들어져 있곤 했던 것이다.

내가 이런 적극적인 태도의 효용가치를 처음 깨달은 것은 첫 번째 전학이 있고 며칠이 지나지 않아서였다. 초등학교 1학년 때 우리 가족은 광주로 이사를 갔다. 전학이 무엇이고 삶의 연속성에 단절을 겪는다는 것은 또 무엇인지 따위를 까맣게 모를 시절이었다. 다만 나는 갑작스럽게 달라진 모든 환경에 낯가림 같은 어리둥절함을 느끼고 있었다. 학급의 학우들은 모두 나와는 너무 달라 보였고 선생님도 낯설게만 느껴졌다.

그런데 그날 작문 시간에 작은 사건이 발생했다. 선생님께서 작문 대신 독후감 발표 시간을 갖기로 하셨다. 아이들은 선뜻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이제 초등학교 1학년인 아이들에게 교실 앞자리의 높은 교단은 선생님이나 설 수 있는 대단한 자리로 여겨졌을 것이다. 그렇게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다음 내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내 발표는 아주 뛰어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그처럼 긴 이야기를 늘어 놓은 것은 그 때가 처음이었으니까. 그 발표가 끝난 후 나는 많은 일들이 달라졌음을 느낄 수 있었다. 냉담한 눈초리로 멀찌감치서 지켜보기만 하던 아이들이 내게 다가와 말을 건네기 시작했다. 그것도 다정하고 친절한 목소리로.

그때 내 가슴 속에는 이런 원칙이 생겼다.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 빠질수록 더 적극적이 되어라.’ 이후 학교를 옮길 때마다, 혹은 도시로 옮길 때마다 나는 더 적극적이 되도록 스스로를 독려했다. 그리고 매번 그 원리는 나를 배반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적극적으로 부딪히고 부대끼다 보면 아무리 어려운 상황이라도 다시 내게 유리한 쪽으로 방향이 돌아서곤 했던 것이다.

어떤 거래

“회창아, 창평에 좀 다녀오겠니?” 우리 가족이 순천으로 이사하여 살고 있을 때인 초등학교 4학년 무렵 어머니는 내게 가끔 외가댁으로 쌀을 얻어오는 심부름을 보내셨다. 아주 가끔, 정말 다른 길이 안 보일 때면 어머니는 내게 그런 심부름을 시키셨다. 우리 식구는 고지식한 공무원이었던 아버지의 봉급만으로 생활했기 때문에 형편이 어려웠고 창평의 외가댁은 만석꾼이라는 소리를 들을 만큼 대단한 부자였다.

당시에는 목탄차라는 희안한 운송수단이 있었다. 휘발유가 부족해 목탄 내연기관을 이용해 숯불을 피워 나오는 가스로 기관을 움직였는데 무척 힘이 약했다. 잦은 고장에 언덕길을 올라갈 적이면 승객들이 모두 내려 밀어야 했다. 창평으로 다녀오는 길에 나는 그 목탄차를 이용해야 했다. 그런데 오는 도중 목탄차가 고장을 일으켜 서 버린 것이었다. 날은 벌써 까맣게 저물고 있었고, 운전기사는 어쩔 수 없어 다음 날 아침에 출발하겠다고 했다. 사람들은 모두 제각기 흩어졌다.

그때 내 옆자리에는 어느 초등학교 선생님이 앉아 계셨다. 젊은 분이었는데 이야기를 하도 재미있게 하셔서 목탄차가 출발한 이후로 줄곧 이런저런 얘기를 나눠온 터였다. 그분은 내게 자기와 함께 갈 것을 권했다. 마침 가까운 친구 한 분이 그 마을의 학교에서 교사일을 보고 있으니 그곳에서 잠자리를 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친구분은 학교 바로 근처에 방을 얻어 자취를 하고 계셨다. 그 방으로 들어선 나는 두 눈이 휘둥그레지고 말았다. 크지 않은 방이었지만 『엄마 찾아 삼만리』에서 『백치』, 『죄와 벌』까지 고전명작들로 책들이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저녁식사를 하러 가게 되었을 때 나는 갖고 있던 쌀 두 되중 한 되를 내놓아 셋이서 흰쌀밥 세 그릇을 배불리 먹을 수 있었다. 그날 저녁 나는 책더미 속에 파묻혔고, 책을 읽느라 꼬박 밤을 새웠다.

다음 날 집에 도착하니 집에서는 난리가 벌어져 있었다. 쌀을 얻으러 간 초등학생이 밤새 소식이 없었으니…. 나는 우시는 어머니에게 지난 밤의 이야기를 해드렸다. 이야기가 쌀 부분에 이르자 어머니의 안색이 달라졌다. 고작 밥 세 그릇과 쌀 한 되를 바꾼다는 게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때로서는 나는 그것을 잘 이해할 수 없었다. 잠자리를 제공받았고 또 밤새 책까지 얻어 읽었으니 쌀 한 되는 그리 밑지는 거래가 아니라고 생각되었던 것이다.

가출

“회창이는 역시 문과를 가야겠군.” 청주에서 중학교를 다닐 때였다. 수학 선생님은 내가 수학문제 푸는 것을 보시면서 종종 그런 말씀을 하셨다. 학기말 시험에서 나는 수학의 명예회복을 다짐했다. 그러나 60점 만점에 나는 20점을 받았다. 나는 그만 모든 자신감을 잃어 버리고 말았다. 자신감을 잃어버린다는 것은 우리 집에서는 모든 죄악들 중에서도 으뜸가는 죄악이었다. 할아버지가 아버지에게 물려 주신 가훈은 바로 “정신일도 하사불성”이라고 했다. 그런데 나는 그 소중한 가훈인 자신감을 잃어버리고 만 것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내 발걸음은 무겁기만 했다.

그런데 집에서는 내 기분과는 전혀 다른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형님과 내가 그날 시험을 마쳤으니 수고를 치하할 겸 모처럼 떡을 만들기로 했다는 것이었다. 밥 해 먹을 쌀도 모자라서 매 끼니 끙끙거리던 시절이었으니 그것은 대단한 일이었다. 형님은 나를 보자 더 즐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야, 난 오늘 시험 아주 잘 봤어. 넌 어땠니?” 나는 추락하는 기분이었다. 나는 더 이상 그곳에 머물러 있을 수가 없었다. 그곳은 걱정거리라곤 하나도 없는 행복한 사람들이 사는 천국이었다.나는 가출을 결심해 버렸다. 교복도 갈아입지 않은 채 어머니께는 이웃집에 잠깐 다녀오겠다고 말씀드리고 집을 나섰다. 그리고는 터벅터벅 조치원역을 향해서 걷기 시작했다. 어쨌든 그때 나는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제 나는 정상적인 학교생활을 계속할 수 없다. 내 능력으로는 부모님의 기대를 따라갈 수도 없다. 이제 남은 것을 한 가지뿐이다. 화물칸을 타고라도 서울로 올라가는 것이다. 혼자서 돈을 벌어 고학이라도 하면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보는 것이다. 성공해서 새 삶을 찾게 된다면 다시 부모님을 찾아뵐 것이다.'

한 겨울길을 삼십 리나 걸어서 조치원역에 도착했을 때는 해가 완전히 떨어지고 어둠이 깔려 있었다. 밤이 되니까 한결 더 추워졌고 배도 고파졌다. 조치원역에서 기차시간을 확인해 보니 기차는 다음 날 아침에나 있었다. 나는 그 역사에서 밤을 세워야 했다. 배고픔을 잊기 위해서 나는 엿을 샀다. 나는 엿을 아주 조금만 오래도록 빨아서 먹었다. 앞으로 당분간은 그 엿이 유일한 식량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대합실은 너무나 추워서 나는 가마니 따위가 있을까 찾아보았지만 헛수고였다. 그러다가 나는 역무원실 안의 빨갛게 달궈진 조개탄 난로를 보았다. 한참을 망설이다가 난로 곁에 쪼그리고 앉자 나를 발견한 역무원이 호통을 치고 쫓아 냈다. 다시 대합실에 나와 차가운 의자에 떨고 있자 헌병 두 사람이 왜 그곳에 있는지 물었다. 여차여차한 구실을 붙여 대답했더니 헌병들은 역무원에게 말해 나를 난롯가에 앉게 했다. 나는 눈물이 나려했다. 밤 11시가 넘은 시각, 역무원실의 전화벨이 울렸다.

“예, 여기 있습니다.” 전화를 끊은 후부터 그의 태도는 백팔십도 달려졌다. 내가 사라진 동안 청주의 집에서는 난리가 난 모양이다. 아버지는 당시 청주에 단 두 대 뿐이었던 대절택시를 타고 달려오셨다. 아버지는 자상하기보다는 단호하고 엄격한 편이셨기에 이제부터 어떤 일이 벌어질지 짐작할 수 없었다. 그런데 역무실에 들어선 아버지는 단번에 나를 들어올려 가슴에 안으셨다. 그리고 아무 말씀도 안 하셨다. 그 날 처음 난 깨달았다. 160센티미터가 못 되는 작은 체구의 아버지셨지만 아들을 안은 가슴만큼은 누구보다도 넓고 크고 단단하다는 것을. 나중에야 아버지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어때? 나와 보니까 세상이 얼마나 매정한지 알겠지?”

세상 속으로

“왜 법관의 길을 택하셨습니까?” 대법관이 된 이후 인터뷰 때마다 들은 질문이다. 아버지의 영향이냐, 아니면 당시의 어지러운 사회상을 지켜보면서 사회정의나 법을 수호해야 할 역사적 사명이라도 느낀 것이냐.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 이유는 나도 딱 부러지게 말할 수가 없다. 시작부터 선명한 이유가 있었다면 좋겠지만 살아가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다음 단계를 찾아 나가곤 했던 게 아닌가 싶다.

대학 초기에는 나도 유학을 계획했다. 좀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는 곳에서 본격적으로 학문에 몰입해 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때는 법학이 아니라 철학 같은 인문과학 쪽으로 승부하리라 마음먹었다. 영어공부도 열심히 했고, 다른 준비들도 나름대로 차근차근 진행했다. 그래서 미국 몇 개 대학으로부터는 입학허가까지 받아둘 수 있었다. 그러나 경제적인 이유에서 결국 유학을 포기해야 했다.

사법고시 준비를 한 것은 3학년 중간쯤부터였다. 그리고 3학년 말에 시험을 치렀다. 1957년 사법고시 8회 때였다. 그러나 공부는 열심히 했지만 시험을 치른 후에는 자신감이 없었다. 어떻게 된 셈인지 나는 항상 시험이 끝난 후면 잘 쳤다는 자신감이 없었다. 발표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결과가 뻔하다고 생각했고, 일년 더 열심히 공부하리라고 마음을 잡고 있었다. 다행히 합격통보를 받았을 때 정말 기뻤다. 그리고 혼자 이렇게 생각했다.

‘혹시 이번에 되지 않으면 내가 다시 마음이라도 바꿀까 봐 서둘러 합격시켜 준 것인가. 그런 일은 없었을 텐데. 이미 법관이 되기로 마음을 정한 이상 두 번 세 번을 도전해서라도 법관이 되었을 텐데. 어쨌든 이제부터 좋은 법관의 길을 걷도록 노력해야지.’



2. 눈물과 자존심

개끗한 가난, 깨끗한 재물

중학교 시절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와 보니 마루에 자그마한 분재 화분이 놓여 있었다. 어떤 사람이 아버지 앞으로 보낸 것이라 했다. 나는 당장 화분을 들고 나가 그 사람을 찾아가 도로 돌려 주었다. 아버지가 돌아와 그 분재를 보신다면 보나마나 불호령이 떨어질 게 뻔했다. 경성법전을 졸업한 후 검찰청의 서기로 근무하다가 광복과 함께 검사로 임관된 아버지는 그 후 61세로 정년을 맞으실 때까지 줄곧 검사로서의 외길 인생을 걸으셨다.

공직생활 내내 아버지가 첫 번째로 강조했던 덕목은 청렴이었다. 공직에 있는 사람은 물질과 부를 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런 까닭에 아버지는 철저히 검소하고 청백한 생활을 지키셨다.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검사를 포함한 모든 공직자들의 봉급은 항상 최저생계비 수준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이다. 일제시대에도 그랬고, 그 후에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온실 속에서 어려움 모르고 자랐다.’는 것이 세간에서 나에 대해 하는 말인데 나는 과연 내가 정말 그렇게 자랐는지를 알지 못한다. 아버지의 ‘대쪽’ 성품은 경제적인 문제뿐 아니라 여러 가지 사건들을 통해서 우리 가족을 힘겨운 시험에 들게 했기 때문이다. 우리 집에 들어올 수 있었던 유일한 선물은 외가댁으로부터의 쌀자루였다. 이따금 큰외삼촌이 자전거 뒤에 약간의 쌀을 싣고 와서 내려놓고 가셨던 기억이 난다.

서울로 올라와 경기중학교를 다니던 시절에도 우리 집은 여전히 어려웠다. 경기중학교에서는 어려움이 유난히도 돋보였다. 그 학교에는 부잣집 아이들이 많이 있었다. 그렇게 유별나지는 않는다 해도 대체로 일정 수준은 되는 옷차림들이었다. 내가 입고 다닌 옷은 광목을 물들인 교복이었고, 운동화는 제일 값이 싼 것이었다. 그나마 교복은 늘 형님으로부터 물려받아 입었다. 나는 내 옷을 사서 입어 본 적이 거의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살면서도 나는 단 한번도 스스로가 가난하다거나 초라하다는 느낌을 가져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방식을 존경한다고 해서 청빈만을 존중하고 모든 종류의 부를 배척하자는 얘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다. 청부(淸富)도 역시 존중해야 한다. 청빈을 중시하여서 청부까지도 부라는 이유로 배척한다면 균형잡힌 민주주의 사회는 만들어질 수 없을 것이다. 문민정부가 들어서고 재산공개라는 새 물결이 파란을 일으킨 적이 있다. 그러나 재산이 많은 사람을 무조건 탐관오리로 몰아간 부작용이 있었다. 나쁜 짓을 하면서 무절제한 생활로 가난해질 수도 있는 일이고, 정직하게 맡은 일에 충실하면서 정상적인 방법으로 부를 축적할 수도 있는 일이다. 성숙한 민주주의 사회를 이룩하기 위해서는 청빈과 함께 청부도 존중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 사회가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더러운 부’다.한 여름 밤의 꿈

1970년대 중반, 고등법원 부장판사로의 승진을 얼마 남겨 두지 않은 때의 일이다. 그 무렵 내게는 이런저런 걱정들이 참 많았다. 대부분이 경제적인 문제들이었다. 공무원의 봉급으로는 다섯 식구의 생활을 꾸려 나가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아이들은 또 이제 만만찮은 사교육비를 요구할 시점에 이르고 있었다. 그런데 우리 집 가계 형편으로는 학원비나 과외비 등을 제대로 감당할 도리가 없었다. 밀린 일거리를 집으로 가져와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나는 문득문득 뒷머리에 와닿는 아내의 시선을 느끼곤 했다. 아내는 결국 아무 말 못하고 한숨만 내쉬다가 자리를 뜨곤 했다.

“과연 이렇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일까. 법관이라는 허울 좋은 이름에 매달려 혼자서만 고고하게 살고 아내와 아이들은 결핍감 속에 내팽겨 두는 것이 잘 사는 것일까.‘ 나를 더 힘들게 하는 것은 내가 하는 일에 대한 소명감이 차츰 불투명해지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당시의 사회 정황은 법관에게 쉽사리 믿음을 주지 않았다.

그때 내가 생각해 낸 것이 법복을 벗고 변호사 일을 시작하자는 것이었다. 나는 가까운 두 친구들인 박우동, 오성환 두 법관들에게 의논해 보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들 역시 그 무렵 한창 그런 고민들에 빠져 있었고 우리는 의기투합해 합동변호사 개업을 결정하였다.

변호사 개업 소식을 들은 아버지는 불같이 진노하셨다. 아버지는 호통을 치고도 모자라 두 친구를 직접 만나보겠노라고 하셨다. 직접 야단도 치고 설득하여 법관의 길을 계속 걷도록 하시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두 친구를 만나 그들의 마음을 되돌리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우여곡절 끝에 모두 다시 마음을 돌려 법관의 길을 계속 걷기로 결정했다. 남편들의 박봉에 시달리다 이제 좀 기를 펴고 사나보다 기대하였는데 아내들의 기대가 ‘한여름 밤의 꿈’으로 끝나 버린 것이었다. 그나마 다행스런 점은 그 남편들이 훗날 모두 법관의 최고 명예인 대법관 자리에까지 오를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애국과 몸무게

나는 대학졸업 후 공군에 입대하여 군법무관으로서 군복무를 마쳤다. 군복무는 ‘나라사랑’과 ‘나라 지키기’를 현실적으로 실천하는 길이다. 그런데 내 아들들은 둘 다 체중미달로 병역면제 처분을 받았다. 아들의 병역문제가 나올 때마다 움츠러드는 기분이 드는 것은 사실이다. 나도 젊었을 때는 말라서 체중이 안 나가는 체질이었지만 두 아이는 어찌나 말랐던지 집안에서는 ‘비아푸라의 고아’ 같다고 놀리기도 했다. 두 아이가 모두 한참 공부한다고 마른 몸이 더 말랐을 즈음에 한해 사이로 입대 통지를 받았다.

전문 열람 제한

미가입 상태이므로 요약본의 일부만 제공됩니다.
더 깊이 있는 내일의 통찰력과 지식 에너지를
프리미엄 무제한 이용권으로 충전해 보세요!

멤버십 가입 / 결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