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의 문을 열어주는 52가지 이야기
오동환 지음 | 세시
크는 소리와 늙는 소리고막이 터질 듯한 청진기가 있다고 치자. 의사가 진찰을 할 때 귀에 거는 청진기보다도 몇 배 몇 십 배 성능이 강한 청진기로 인체의 구석구석을 샅샅이 진찰한다고 상상해 보자. 그러면 인체는 얼마나 요란한 소리들로 가득 차 있을까. 방금 먹은 점심이 위장에서 소화되는 소리, 염통이 펌프질 하는 피보라 소리, 간장이 독소를 걸러 내는 여과 소리, 폐 잎사귀 틈새로 드나드는 공기 소리, 길고 긴 창자 속으로 뻗어 가는 영양분 전달 소리 등 온갖 소리들로 귀청이 찢어질 것이다.
그 청진기를 얼굴 쪽으로 돌리면 어떨까. 눈알 구르는 소리, 뇌파 퍼지는 파장 소리, 머리카락 자라는 소리, 콧물 흘러 괴는 소리까지 잡힐 것이 아닌가. 아니, 종합적인 소리들로는 아이들 크는 소리와 늙은이 늙는 소리까지 청진기에 잡힐지도 모른다. 늙은 뼈에 구멍 뚫리는 소리와 뇌세포 떨어지는 소리들도 잡힐 것이다.
인체는 시시각각 변한다. 시시로 끝나고 각각으로 시작한다. 순간순간 같은 상태로 머물지 않는다. 1초 전의 육체와 정신은 이미 1초 전의 육체와 정신이 아니다. 이 세상에 변하지 않고 정지된 상태의 사물이란 없다. 삼라만상이 시계의 초침에 이끌려 변하고 바뀐다. 10년에만 강산이 변하는 것은 아니다. 1분에도 변하고 1초에도 변한다. 그러나 이런 엄청난 변화를 시시각각 절실히 느끼며 사는 사람은 드물다.
우리는 시시각각의 변화를 느끼지 못하기 쉽다. 그래서 한군데 썩은 물처럼 마냥 괴어 있다고 생각하기 쉽고, 지루하고 답답하게 생각하기 쉽다. 진취가 없는 정체의 담을 쌓고 그 안에 썩은 물처럼 안주하기 쉽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사람은 다르다. 미국의 시인 에머슨은 "조그만 씨앗이 하늘을 찌르는 큰 나무가 되는 변화를 따라 가라."고 했다. 잘 자라는 속성수 나무에 고성능의 청진기를 갖다 대면 그 자라는 소리에 귀가 먹먹할 것이다.
그것은 나무가 시시각각 새 출발하는 소리다. 출발의 '출'자가 가지를 뻗으며 자라는 식물의 상형으로 만들어진 글자라는 것만 보아도 식물이 자라고 변하고 발전하는 모습은 눈이 부실 지경이 아닌가. 세월에 시간의 매듭을 정해 놓지 않았더라면 얼마나 답답할 것인가. 인간 생활에 새 출발이라는 시간적 매듭이 없다면 또 얼마나 지루하고 답답할 것인가.
빗물이 흘러들어 자연스레 웅덩이의 물갈이가 이뤄지듯 인간 집단이라는 웅덩이도 그런 신선한 물갈이와 변화가 필요한 것이다. 그게 바로 새 출발의 신선한 자극제가 되기 때문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변화와 새 출발 그 이후다. 연극배우가 첫 무대에 서면 긴장하고 실수하기 십상이다. 그러나 두 번 세 번 서다 보면 나태해지기 쉽다. 그러니까 매번 잘하고 매번 더더욱 잘하는 그런 변화가 중요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의 씨앗이 하늘을 찌르는 나무로 자라는 시시각각의 눈부신 변화다. 그러나 인간은 그런 외형적 변화보다는 내용의 변화가 중요하다. 질적인 변화가 중요한 것이다. 시시각각 달라지는 변화와 발전이야말로 중요하다. 고성능 청진기에 잡히는 자신의 육체가 변화하는 소리, 크고 자라고 늙는 그 소리라도 녹음해 두고 자주 들어보면 어떨까.
시간은 재판관, 시간은 생명이다시간은 생명이며 재판관이다. 시간은 인생을 살피고 인간을 재판한다. 어김이 없고 추상과도 같이 엄격하다. 시간은 인간을 잠시도 그냥 두지 않을 뿐 아니라 인간한테서 잠시도 한눈을 팔지 않는다. 24시간 60분 60초를 1초도 놓치지 않고 인간에게 달라붙어 그들을 감시하는 무서운 감시꾼. 그게 바로 시간이라는 것이다.
달도 해도 바람도 구름도 인간의 24시간의 찰나와 찰나를 세세히 감시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시간만은 가능하다. 일할 때도 잠잘 때도 겨드랑이, 팬티 속까지 들어와 감시의 눈을 번뜩이는 존재가 다름 아닌 시간이라는 감시자다. 그렇게 감시한 결과를 놓고 시간은 추상 같은 판결을 내린다. 인간의 잘잘못을 어김없이 재판하고 선고하는 것이다. 중세 라틴 신화에 나오는 시간의 신이 내리는 명판결을 누가 감히 부인할 수 있다는 것인가.
시간 앞에 무릎을 꿇지 않고 시간 앞에 목숨을 내놓지 않는 존재는 하늘 아래 아무도 없다. 누구나 때가 되면 시간 앞에 목숨을 헌납하지 않는가. 그러니까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영겁에 비하면 찰나와도 같은 인생을 어떻게 보람 있고 가치 있게 살아야 할 것인가. 우선 '두서너 시간'이니 '너더댓 시간'따위 시간을 능멸하는 말투부터 뜯어고쳐야 할 것이다. '쇠털같이 많은 날'이라는 어리석고 한가한 소리부터 집어치워야 할 것이다.
다행히도 요즘 늘어나고 눈길을 끄는 것이 '초 관리'라든지 '시간 산업'이라는 말이다. 1초 1초를 아껴 관리하지 않고, 시(時)테크에 관심을 쏟지 않고서는 오늘날의 치열한 경쟁시대에서 개인이든 기업이든 살아 남을 길이 없다는 인식이다. 1초 1초를 아끼자는 것이다. 그래서 훗날 시간 재판관과 시간의 신 앞에 떳떳하게 서 보자는 것이다.
행복의 0순위행복의 0순위는 무엇인가. 그것은 사람이 처한 위치와 사정에 따라 모두가 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사람의 얼굴을 예로 들어본다면 눈은 아름다운 것을 볼 때 무엇보다도 행복하고, 귀는 아름다운 소리를 들을 때 무엇보다도 행복하다. 코와 입도 마찬가지 사정이다. 그럼 손은 어떨까. 물론 최고의 보드라운 촉감을 감지할 때가 아닐까.
행복을 느낄 줄 아는 행복 감지법이야말로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영국의 시인 오스카 와일드는 동화 『행복한 왕자』에서 영혼의 행복, 정신적인 행복을 강조했다. 그러나 그보다는 먼저 심장이 뛰고 허파로 숨을 쉬며 이제까지 살아왔고 살아 있다는 것부터가 더할 수 없는 행복임을 느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행복이란 아주 먼 곳에 있어 오랜 세월 애를 써야만 도달할 수 있는 것으로 착각하며 살아가기 쉽다. 독일의 시인 칼 부세의 시 <산너머 저 산너머>처럼 행복의 본적과 현주소는 아득한 저쪽 산너머에 있는 것이 아니라 늘 자신과 함께 있는 것이다. 다만 졸릴 때 잠을 자면 편안하지만 막상 잠을 자는 동안에는 그 편안함도 행복감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느끼지 못하고 살아갈 뿐이다.
성취감도 중요하다. 한 시간 단위의 작은 일이나 하루 단위의 비슷한 일과에서도 성취감을 가질 수 있어야 행복하다. 창조적인 성취감도 성취감이지만 소비성, 해결성 성취감도 성취감이다. 남이 잘 다니지 않는 10층 계단을 혼자 걸어서 올라갔을 때의 성취감으로 뿌듯해지게 마련이다. 참았던 생리현상을 시원스레 해결했을 때 역시 날아갈 듯 후련하고 행복하다.
마지막으로 중요한 것은 영어의 행복이라는 단어 'happiness'다. 이 말은 '옳은 일이 자신 속에 일어난다'는 뜻의 'happen'에서 온 것이다. 그러므로 행복이란 어디까지나 '올바른 일의 성과'에서 나타나고 찾아지는 것이다. 그릇된 일에 행복은 존재하지 않고 악질적인 사람과는 행복은 절대로 동거하지 않는다. 올바른 일과 착한 사람에게만 따라붙는 것이 참된 행복의 그림자일 것이다. 그러나 다만 그 따라붙는 행복의 그림자를 감지하지 못할 따름이다. 날씨 궂은 날에는 보이지 않는 그림자처럼.
완벽한 행복도 완벽한 불행도 없다우리 나라 역사상 가장 행복했던 사람은 누구였을까. 이 물음에 초등학교 5학년쯤 되는 학생이라면 대뜸 세종대왕이라고 할지도 모른다. 물론 그는 우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으로서 차나란히 빛나는 업적을 숱하게 쌓아 남겼다. 그는 만족과 행복의 극치에서 온 백성의 존경과 찬사의 시선을 아침 햇살처럼 받았고 창조하는 삶의 반짝이는 성취감 또한 하늘 끝까지 닿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육신은 숱한 병고 때문에 단 하루의 영일도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옥체가 매우 미령해 몹시 괴로운 고초와 고통의 나날을 살았다. 풍증으로 인해 얼굴 근육은 노상 실룩거렸고 소갈증으로 말미암아 연방 물을 홀짝거리며 마셔야만 했으며, 잦은 부종으로 몸이 온통 헌 데 투성이였고 관절염과 신경통까지 있었다. 그런 몸인데도 지나치게 독서에 열중한 나머지 눈병까지 생겨 왼쪽 눈은 거의 실명 단계에까지 이르렀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과연 한 나라의 왕이 아닌 한 인간으로서의 일신상의 행복을 어느 정도나 감지하고 있었던 것인가. 임금이고 국사고 다 집어치우고 남들처럼 건강한 몸의 평민으로 다시 태어나 푸른 하늘을 마음껏 호흡하며 짙푸른 들판을 맘껏 내달리고 싶지는 않았을까. 그는 건강한 사람이야말로 이 세상 행복의 최고치 눈금에 랭크돼 있는 사람으로 여겼을 것이며 또 가장 부러워했을 것이다.
독일의 위대한 종교개혁가 마르틴 루터도 쇠붙이 기술자의 아들로 태어나 중병만을 자그마치 24가지나 앓아 '걸어다니는 병원'이라고 불릴 정도로 평생 동안 온갖 병고에 시달렸다. 남들이 겉으로 봐주는 행복과 자신이 느끼는 행복은 전혀 다르다. 아무리 위대한 사람과 겉으로 보기에 행복해 보이는 사람도 뚜껑을 열어 그 속속들이 그의 일신상을 들여다본다면 불행한 구석은 반드시 있게 마련이다.
완벽한 불행이 없는 것처럼 완벽한 행복도 이 세상엔 없다. 창조주 하나님은 결코 인간이라는 작품을 '완벽한 행복의 조건'으로 설계하지 않았다. 어디가 행복하면 어디가 불행하고 무엇이 넘치면 무엇은 반드시 모자라게 마련이다. 절대적인 행복이란 아마 천당과 극락에만 존재할지도 모른다. 적어도 이 세상엔 그런 주소를 두고 있지 않은 것이다.
또한 모든 행복은 상대적인 것이다. 다리가 불편한 사람에겐 성한 다리야말로 가장 행복한 조건이고 귀가 어두운 사람에겐 멀쩡한 청력으로 쿵쾅쿵쾅 뛰고 있는 자신의 심장 소리, 그 다이내믹한 생명의 음악 소리를 듣는 날이야말로 가장 행복한 날이 될 것이다. 또 캄캄했던 두 눈이 활짝 열려 짙푸른 신록과 새빨간 단풍잎, 그리고 두둥실 흘러가는 흰 구름을 감상할 수 있는 그 날이야말로 시각장애자에겐 가장 행복한 날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행복이란 스스로 눈을 크게 뜨고 찾아 누리는 것이고 스스로 노력해 창조하는 성과이며 보람이지 밖으로부터 대문을 두드리며 찾아오는 운명의 힘에 의해서만 결정되는 것은 결코 아니며, 먼 데서만 구하고 찾아지는 것도 결단코 아닌 것이다. 우리는 지금의 나 스스로가 행복의 화신이며 행복의 현신임이 분명히 깨달아야 할 것이다.
내일이 '태양의 휴일'일지라도오늘이 마지막 날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보라. 오늘이 자신의 생애 마지막 날이라는데 어떻게 짜증을 내고, 싸우고, 악다구니할 시간이 있고, 그럴 마음의 여유가 생기겠는가. 도무지 빈둥거릴 시간도 없고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룰 수도 없을 것이다. 오늘 다소 정직하지 못한 짓을 했더라도 내일부터는 정직하게 살겠노라고 미루는 버릇도 있을 수가 없고, 오늘까지는 임시의 삶이고 내일부터야말로 본격적인 근사한 삶이 전개되리라는 막연하고 안이한 생각도 가질 수가 없을 것이다.
내일의 완벽한 2악장, 3악장 연주를 위해 어찌 오늘의 1악장 연주를 실수와 나태로 마칠 수 있겠는가. 만약에 오늘이 마지막 날이라고 한다면 어떨까. 그 누구나 겸허하면서도 경건하고 엄숙한 마음이 되어 회개도 하고 참회도 할 것이고 그의 생애에 남은 모든 정성과 성실과 진실을 모두 동원해 용서도 빌고, 화해도 하고, 빚고 갚고, 못 다한 효도도 하지 않을까.
오늘 최선을 다하고 성실과 정성과 열성을 다하는 삶, 그래서 오늘에 만족하고 오늘의 성취감을 만끽할 수 있는 삶이야말로 값진 것이 아닐까. 인생이 죽는 날까지 불안과 우수의 신으로부터 헤어날 수 없으니까 더욱 더 그렇고, 미친 코끼리가 허연 이빨을 드러낸 채 울부짖는 황야를 홀로 걷는 것과 같은 인생이니까 더더욱 그러하다. 『25시』의 작가 게오르규는 "존재하는 것 자체가 곧 선을 의미한다."고 했다. 하루하루를 벅차도록 알차게 사는 삶이야말로 지고지순의 삶이 될 것이다.
오렌지족아프리카 남부를 헤집고 청색 구렁이처럼 꿈틀꿈틀 흐르고 있는 강으로 오렌지강이라는 것이 있다. 지리학적으로 말하면 드라켄즈버그 산맥에서 발원해 남아공화국 안쪽을 서류(西流)해 대서양으로 들어가는 강이 오렌지강이다. 그래서인가 필자는 오렌지족이라면 혹시 구릿빛 피부에다가 두 허벅지 사이만을 천 조각 또는 가죽 조각으로 살짝 가린 채 카누를 타고 그 아프리카 오렌지강 줄기를 오르내리는 남아프리카 흑인의 무리가 연상된다.
오렌지강과 그 지류인 발(Vaal)강에 싸인 목축지대는 오렌지 자유주라는 곳인데, 그곳은 세계적인 다이아몬드 산지로도 유명하다. 그러니까 오렌지족 하면 그곳 오렌지 자유주에서 눈알에 불을 달고 다이아몬드 캐기 쟁탈전을 벌이고 있는 난폭한 족속들이거나 보석 중 보석인 다이아몬드를 미끼로 처녀와 과부들을 유혹하는 음흉하고 징그러운 사나이들이 연상된다.
그런가 하면 1689∼1702년 재위한 윌리엄 3세 영국 왕이 다름 아닌 또 오렌지공(公)이었다. '오렌지맨'이라고 해서 18세기 에이레 신교도가 조직한 비밀결사도 있다. 그들 오렌지맨의 기장이 오렌지색 리본이었다. 그러니까 필자는 또 그 오렌지공을 흠모하고 존경하던 망령들이 오늘날 이 땅 대한민국에 환생했거나 오렌지 리본을 단 비밀결사인 오렌지당 패거리라도 살아온 줄 알았다.
한데 그런 게 아니라고 했다. 1980년대 중반부터 생겨난 서울 압구정동의 오렌지족은 무슨 사안을 끄집어내 곰곰 생각해 계산하고 그 답에 의미를 부여해 지은 이름이 아니라고 했다. 다만 어울리는 끼리끼리 서로 오렌지를 신표로 주고받음으로써 호화판 부유층 2세의 올빼미족 계급이라는 신분을 확인할 뿐이라는 것이다. 즉 오전 내내 늘어지게 자고 오후 느지막이 일어나 환락가를 순례하고 새벽까지 주지육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18∼25세 족속이 오렌지족이라고 했다. 그들 오렌지족의 왕초가 누구인지는 몰라도 이왕이면 '네이블 오렌지(Navel Orange)족'이라고 이름 붙였더라면 좋았을 뻔했다. 달고 맛 좋고 씨도 없는데다가 윗부분 한가운데가 배꼽처럼 툭 튀어나온 남미 브라질산 변종 오렌지가 바로 '네이블 오렌지'니까.
삶에서 책을 빼면 무엇이 남는가책이 사람을 만든다는 말은 확실히 맞는 말이다. 책이 사람을 만든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사람의 지식이요, 두뇌며, 생각이요, 마음이다. '아는 것이 힘'이라는 그 '아는 힘'이고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그 '생각의 힘'이다. 그런데 요즘은 독서를 기피하는 풍조가 짙다. 그래서인가 미국에서는 '책을 잃어버린 세대'니 '무지의 세대'라는 말이 지식인의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한 지 이미 오래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미국이라는 나라의 앞날부터가 시계 제로의 암울함 그것일 수밖에 없다.
일본의 국력이 어디서 솟는가. 땅에서 솟는가 경제력에서 솟는가. 아니다. 일본의 국력이란 바로 일상 습관화한 독서의 힘으로부터 치솟는 것이다. 일본의 힘이 솟는 샘이 바로 책이며 독서다. 일확천금이라는 말 대신 '일독천금'이라는 말을 만들어 애지중지 쓰고 있는 사람들이 바로 일본인 그들이다. 책 한 권을 잘 만나 잘 읽으면 천금을 얻는 것보다도 낫다는 데서 지어낸 말이 일독천금이다.
근세조선 왕조 때만 해도 집현전을 위시하여 독서 열기는 대단했다. 세종대왕부터가 안질에 걸려 실명 단계에 이르도록 지나친 독서를 했기에 그 엄청난 문화를 창조해 후세에 물려 줄 수가 있었던 것이 아닌가. 성종의 독서열은 어떠했고 정조의 독서 열기는 또 어떠했던가. 그분들이 창조해낸 찬란한 문화의 원동력은 전적으로 그분들의 독서의 힘 그것이었고, 그런 '책샘'이야말로 문화창조의 원천이었던 것이다.
책은 사람을 만든다. 지식과 두뇌를 만들고 생각과 마음을 넓혀 준다. 책은 인간이 존재하는 힘을 만들어 주고 존재할 이유를 만들어 준다. 미개인이 문명인으로 될 수 있는 열쇠를 만들어 주고 난관과 미로를 헤쳐나갈 지도와 약도와 화살표시를 만들어 주는 것이 책이다. 책은 문화를 창조하고 국력도 길러낸다. 찬란한 미래까지도 책은 열어 준다. 책을 읽지 않으면 그들의 역사도 이어지지 않는다. 한 마디로 망한다는 얘기다. 모든 것이 끝나고 만다는 말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