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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조선의 옻칠쟁이다

전용복 지음 | 한림미디어
고백하건대 나는 한국에서 진짜 옻칠을 해 본 적이 없었다. 유일하게 내가 제대로 된 옻칠을 경험한 것은 바로 메구로가조엔의 오젠을 수리할 때밖에 없었다. 그러나 밥상과 건물 전체는 규모와 기술면에서 하늘과 땅 차이였다. 나는 대형 작품을 건조시킬 기술조차 없었다. 하나하나 스스로 터득하면서 작업에 임하는 수밖에 달리 요령이 없었다.



내가 제일 먼저 찾아간 곳은 이와데현에 있는 공업기술연구센터였다. 그곳에는 디자인과 옻칠을 연구하는 파트가 있었다. 나는 꾸준히 그곳을 오가며 그들로부터 많은 자료를 얻고 정통 옻칠 기법을 조금씩 배워나갔다. 그러던 중 점점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들이 가르치는 칠 정제법이나 건조 방법 등의 칠 기법들이 사실은 모두 우리 조상들이 했던 방법이었던 것이다. 한일합병으로 국내에서 사라져갔던 것들을 그들은 체계 있게 정리해서 사용하고 있었다.



서서히 최고의 고급 기술이 몸에 배이기 시작했다. 전통으로 전해 오는 칠 기법을 익히기 위한 노력은 오히려 밤에 더 분주했다. 연구소 직원들이 잠들고 나면 나는 수십 종의 칠을 놓고 저마다의 특성을 연구하며 밤을 지새웠다. 메구로가조엔 복원작업에 필요한 기술은 6개월 여 만에 얻을 수 있었다.

옻칠은 습기가 있어야 마른다는 사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건조실에 물을 뿌리고 있다. 그러나 99% 농도의 순수한 옻칠은 물을 뿌리면 급히 마르면서 탄화작용을 일으키게 된다. 그래서 여러 가지 색깔의 채색칠을 하고 급히 건조시키면 색상이 흉하게 변해버린다. 가령 붉은색이 어두운 벽돌색으로 변하는 것이다.



따라서 옻칠을 하기 전에 일단 건조실의 습기를 무조건 제거한 뒤 천천히 말려야 한다. 그러나 너무 오랫동안 습기를 주지 않으면 몇 달이 가도 마르지 않는 것이 옻칠이기도 하다. 가장 정확한 순간에 조금씩 습도를 높여 3일 정도 말려야 한다. 두껍게 바르고 급히 말리면 표면만 건조될 뿐 바닥의 칠은 마르지 않아 쭈글쭈글해지며 위로 드러난다.한번 옻칠을 잘못하면 1년이 걸렸든 2년이 걸렸든 다시 긁어내고 처음부터 다시 발라야 한다. 나는 오랜 세월 연구 끝에 어느 시점에서 습기를 넣어야 한다는 내 나름의 비법을 터득했다. 칠을 발라놓은 유리판에 입김도 불어보고 손으로 찍어도 보고 뚫어지게 쳐다보기도 하면서 몸으로 때워 얻은 결론이었다. 이 연구를 위해서 수많은 밤들을 지새웠다. 철두철미한 실험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결과였다.



메구로가조엔의 많은 작품들 중 송학도(松鶴圖)는 조선 장인의 냄새가 가장 강렬하게 남아 있어 특히 애를 많이 썼다. 맨처음 연구소로 송학도가 옮겨져 왔을 때 나는 실로 암담한 심정이었다. 메구로가조엔에서 조사하고 분석했던 때보다 훨씬 훼손상태가 심했기 때문이었다. 뒷부분은 완전히 썩어 있었고 소나무 합판도 습기를 먹어 썩어 문드러지기 직전이었다. 나는 이 작품을 손댈 엄두도 내지 못하고 며칠 동안 잠 못 이루고 고민했다. 하지만 한순간 나약해졌던 자신을 질책하며 결의를 다졌고 손을 봐야 할 부분들은 수고를 마다하지 않고 일일이 심혈을 기울여 옻칠을 하거나 보수도구들을 박아넣었다.



썩은 합판에서 떼어낸 작품을 새 패널에 붙이는 일은 작품이 새 패널에 한치의 구부러짐도 없이 붙게하는 것이 중요했다. 이를 위해서는 최소한 1톤 정도의 무게로 오랫동안 눌러줄 것이 필요했는데 이것은 운동장 한 켠에 쌓여있던 기왓장들을 이용했다. 옻칠과 아교를 섞어 만든 풀을 새로 만든 패널과 작품의 한 쪽면에 발라 붙였다. 그리고는 깨끗한 창호지를 깐 뒤 전 직원을 불러 기왓장을 그 위에 올리도록 했다. 잘 마르도록 온풍기를 켜놓고 옆에서 밤을 꼬박 지샜다. 날이 훤하게 밝을 때쯤떨리는 마음으로 기왓장을 들어내자 작품은 평평하게 딱 달라붙어 있었다. 직원들의 함성소리가 신새벽의 고요한 정적을 깨웠다. 서툰 목공일까지 직접 했던 터라 그 기쁨은 더 컸는지도 몰랐다.

한창 일손이 딸릴 때는 나는 직원들의 비자 문제로 늘 노심초사해야 했다. 비자 심사는 까다롭기도하거니와 어떨 때는 이해하기 힘들 정도로 들쭉날쭉이었다. 똑같은 조건인데도 어떨 때는 순조롭게취업비자가 나오는가 하면 어떨 때는 연수비자조차 받기 힘들었다. 처절한 노력으로 준비한 끝에 대역사를 맡게 되었지만 끝을 맺기까지는 너무나 험난한 과정이었다. 때로운 울분도 감춰가면서 그들의 문화에 익숙해지기 위해 죽도록 고생했지만 비자가 해결되지 않으면 당장 보따리를 쌀 수밖에 없는 현실에 비애감을 느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1991년 1월 31일, 그 동안 연구소에서 피땀 흘려 만든 작품들이 메구로가조엔으로 떠나는 첫 출고일이었다. 삶을 마감한 듯 했던 작품들이 우리 장인들의 세심한 손길을 거쳐 말끔한 옻칠을 입고 새 생명을 얻어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날이었다.



도쿄의 메구로가조엔은 건물의 골조가 완성되고 본격적인 내부 단장을 시작하고 있었다. 이제 그간의 작업량과는 비교도 안 되는 태산 같은 일이 남아 있었지만 어쨌든 기쁜 마음은 감출 수 없었다. 그러나 첫 출고가 있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생각지도 않은 문제가 발생했다. 막바지 작업현장에 투입할 인원들이 공항에서 발이 묶인 것이다.



눈앞이 캄캄해졌다. 메구로가조엔의 오픈날짜를 맞추려면 마지막 6개월간 많은 일손이 필요할 터였다. 어림잡아 계산해 보니 적어도 100명 이상이 전력투구해야 겨우 끝을 볼 수 있는 상태였다. 그래서 급히 조달한 인원이었는데 작업인원들이 공항도 빠져나오지 못한 채 고스란히 한국으로 돌아간 것이다.



나는 메구로가조엔에 전화를 걸어 이유를 알아봤다. 메구로가조엔에서는 가조엔 관광호텔 건물을 소유하고 있었는데 57년 전부터 다른 사람에게 임대해 주고 있었다. 메구로가조엔에서는 관광호텔 건물까지 보수할 계획이었으나 임대인이 건물을 비워주지 않아 소송을 진행하던 중이었다. 가조엔 관광호텔이 부도가 나고 복잡한 사건에 얽히자 법무성에서는 메구로가조엔의 취업비자를 받은 우리 직원들에게 '타국민 보호'라는 명분을 내세워 입국을 허용하지 않은 것이었다. 결국 가조엔 관공호텔을 메구로가조엔과 똑같은 회사로 착각하고 내린 결정이었다. 졸지에 생각지도 않은 불똥이 튄 것이었다.

마냥 허탈해 할 일이 아니었으므로 비장한 결심을 한 뒤에 직원들을 한 자리에 불러모았다. 이제 와서 모자라는 인원을 일본인들로 채울 것인지를 결정하고 우리의 힘만으로 한다면 우리는 끝날 때까지 잠을 자지 않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 말을 들은 직원들은 모두 한 번 해보자고 했고, 그때부터 직원들과 나는 24시간 비상근무체제에 들어가 목숨을 건 처절한 사투를 벌이기 시작했다.나는 연구소의 진척 상황도 체크해야 했기 때문에 무수히 가와이무라를 오갔다. 가와이무라에서도 메구로가조엔과 비슷한 강행군을 하고 있었다. 직원들은 내가 없는 동안에도 자발적으로 엄격한 자기통제의 룰을 만들어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개관을 앞둔 메구로가조엔은 흡사 전장을 방불케 했다. 직원들은 퀭한 얼굴에 눈빛은 광채를 내뿜으며 자신과 처절하게 싸우고 있었다. 그때는 이미 고용된직원으로서가 아니라 광기에 휩싸인 예술가들이었다. 그 모습은 아름답기까지 했다.



우리는 오픈하기 하루 전날, 아니 정확히 그날 새벽 3시까지 마무리 작업을 했다. 정신은 혼미했고걸음이 헛놓였다. 우리는 서로 마주보며 손을 꼭 잡았다. 우리는 숙소로 조용히 올라가 죽음보다 깊은 잠을 청했다. 무려 6개월 만에 다리를 쭉 뻗었다.



1991년 11월 13일. 오픈식은 오전 10시로 예정되어 있었다. 다들 머리를 간신히 깎고 돌아와 미리 준비해 둔 감색 양복을 꺼내 입었다. 하늘은 푸르렀고 바람도 적당하게 불었다. 메구로가조엔 입구 국기 게양대에 태극기가 휘날리는 것을 본 우리들은 두 팔을 쳐들고 목이 터져라 만세를 외쳤다. 참았던 눈물이 하염없이 솟아나고 있었다. 망망대해를 표류하는 것 같은 두려움에 눈물조차 흘릴 수 없었던 시간들이었다. 지나간 순간들이 빠른 속도로 눈앞을 스쳤다. 환희에 찬 순간도 있었고 눈물겨운 시련의 날도 많았다. 그러나 결국은 해 냈다. 내가 아니라 우리들이 해 낸 것이다.



개관식은 2층 대연회장에서 총 2부에 걸쳐 성대하게 치러졌다. 참석한 사람들은 60년 만에 새로 태어난 메구로가조엔의 환상적인 세계에 넋을 잃었다. 활화산처럼 뿜어져 나오는 옻칠의 기운을 만끽하며 긴 회랑을 따라 벽에 붙은 작품을 감상하는 행렬이 장사진을 이뤘다.고향이나 그리움을 주제로 한 내 일련의 작품들은 전통과 생명를 상징하는 소재들로 가득 차 있다. 가령 갈대는 화면 전체에 은근하면서도 생의 상징인 것처럼 싱싱한 생명력으로 펼쳐져 있다. 또 창살에 달빛이 교교하게 얹혀 있는 가운데 멀리서 들리는 발자국 소리나 뒤뜰 대나무의 바스락거리는 소리 등 내 작품들 속의 풍경들은 바로 우리이기 때문에 표현할 수 있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이러한 우리 것에 대한 풍경들이 아름다운 우리말로 녹아 있는 어떤 문학작품을 대하고 감동으로 전율했던 순간이 있다.



KBS 방송국의 <일요스페셜>이라는 프로그램 제작팀에서 메구로가조엔의 복원과정을 상세하게 취재해 갔다. 그것을 가능케 한 것은 몇 년 전 NHK방송국 초청으로 동경에 머무르고 있었던 방송작가 이금림 선생과의 인연 때문이었다. 어느 날 그녀에게서 소설가 최명희 선생의 얘기를 들었다. 어렸을 적부터 둘도 없는 친구 사이였던 두 분은 끊임없이 격려와 자극을 주고받는 문학적인 도반이기도 했다. 지금은 고인이 된 최명희 선생은 무려 17년 동안이나 혼신의 힘을 다해 매달린 끝에 필생의 역작인 대하소설 『혼불』을 막 탈고한 직후였다.



이금림 선생은 내가 추구하는 세계와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많을 것이라며 내게 『혼불』을 꼭 읽어보길 권했다. 한편 최명희 선생도 우연히 KBS <일요스페셜>을 보고는 신선한 충격을 받았던 모양이다. 나는 『혼불』을 내처 세 번이나 읽고 책장을 덮으면서 감동을 주체할 수 없어 최명희 선생에게 곧바로 전화를 걸었다. 우리는 오랜 시간 우리 문화의 소중함과 서로의 작품세계에 대해 많은 얘기를나누었다.



어느 순간, 『혼불』의 감동을 옻칠작품으로 표현하고 싶은 마음이 솟구쳐 올랐다. 나는 소설에서 받은 영감들을 고스란히 불러모아 패널 위에 펼쳐 놓았다. 모두 다섯 편의 작품을 만들었는데 4m가 넘는 대작도 한 편 있었다. 대작에는 창살문을 배경으로 바스락거리며 움직일 것 같은 느낌의 대나무를그려 『혼불』의 전체적인 이미지를 표현했다. 또 작품 속에는 강인하면서도 소박한 민족정신, 한국여인의 절개, 그리움, 이룰 수 없는 사랑의 안타까움 등을 표현했다. 나는 이 작품들을 1997년 늦가을, 서울 예술의 전당에서 작품전시회를 할 때 함께 발표했다.



그때 최명희 선생에게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병마가 찾아온 후였지만 다른 이들에게 불편을 끼치고 싶지 않다는 꼿꼿함과 스스로 이겨내겠다는 신념으로 주위에 자신의 병을 알리지 않았다. 결국 최명희 선생은 1998년 다른 세계로 '혼불'이 되어 떠났다. 그분에 대한 애정과 존경, 그리고 떠난 후의 내 그리움은 평생 가시지 않을 것이다. 지금도 최명희 선생은 나약해지거나 게을러질 때마다 나를 질타하는 준엄한 죽비로 살아 있다. 그분이 큰 배로 우리 민족문화를 실어 날랐다면 나는 작은 나룻배에라도 부지런히 담아야 할 일이다.서양의 유화물감은 그 빛깔을 50년도 유지하기 어려운 소재임을 누구나 알고 있다. 특히 요즘의 유화물감은 오히려 옛날보다 더 빨리 퇴색되거나 금이 가는 현상이 두드러지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 선조들이 남겨준 옻칠은 어떠한가?



수없이 많이 출토된 옻칠작품이나 옻칠을 한 도구들은 지금도 당당하게 빛을 발하면서 그 시대의 문화를 극명하게 밝혀 주고 있다. 박물관에 있는 삼국시대의 생활도구들은 지금까지 그 현란한 색상과 원형을 보존하고 있다. 옻칠 문화가 이미 오래 전부터 완벽한 예술로 승화되어 있었다는 증거가 아닐 수 없다.



작가라면 누구나 자신의 작품이 가능한 오래도록 보존되기를 염원할 것이다. 나는 대학에서 목공예를 전공하는 학생이나 목조각을 하는 작가들에게 주저하지 말고 옻칠을 배우라고 권유하고 싶다. 오랜 시간 공들여 만든 작품에 라커나 카슈를 칠해버리면 나무의 호흡을 막는 셈이다. 숨을 쉬지 못하는 나무는 금새 뒤틀려버린다. 옻칠은 나무의 결을 고스란히 살려 주는 동시에 장구한 세월을 견디는 생명력을 부여한다.



그리고 옻칠에서는 인체를 보호하는 원적외선이 뿜어져나온다. 이미 산업자원부에서는 옻칠에 함유된 항암효과 등의 약리작용을 발표한 바 있고, 지금도 여러 기관에서 옻칠과 건강에 대한 연구를 활발하게 진행 중이다. 옻칠에서 몸에 유익한 바이오성 물질이 나온다는 것은 간단한 '오링테스트'로도 증명할 수 있다. 옻칠한 물건을 한쪽 손바닥에 댄 뒤 다른 손의 엄지와 검지를 동그랗게 말면 떼려고 해도 알 수 없는 기운에 의해 잘 떨어지지 않는다. 옻칠이 된 그릇이나 가구가 있는 곳에서는 음식이 잘 부패하지 않고 또 음식의 나쁜 기를 제거해 준다. 조상의 묘에서 발굴된 2천 년 동안 썩지 않은 밤톨이 이를 잘 말해 주지 않는가.



사람들이 옻칠에 대해서 잘못 알고 있는 또 하나의 중요한 사실을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다. 그것은 바로 흑칠과 주칠이 옻칠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의의로 많다는 것이다. 처음 채취한 생칠의 색상은 백갈색을 띠고 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투명한 밤색에 하얀색이 섞인 것 같은 색깔이다. 조상들은 채취한 생칠을 원형의 나무통에 넣어 밝은 태양 아래에서 나무 주걱으로 천천히 저어주었다. 이 과정에서는 암갈색 혹은 백갈색의 생칠을 반나절 정도 정성스럽게 저으면 점차 투명하게 변한다. 물론 유리처럼 투명해진다는 것은 아니고, 쉽게 표현해서 갈색 맥주병의 색상보다 좀더 밝은 투명에 이른다는 말이다.



생칠에는 수분함유량이 약 20∼25% 정도 된다. 조상들은 생칠에 함유되어 있는 수분을 약 20% 정도 날려 보내고 수분이 3∼5% 정도 남았을 때 투명에 가까워진다는 현상을 터득하게 된 것이다. 이처럼 투명한 옻칠을 만드는 과정을 정제라고 한다. 정체된 옻칠에 암채라고 하는 색상이 있는 돌가루 등을 섞으면 그 어떤 색상도 가능하게 되었다. 그 색상의 다양함은 유화물감에 비할 바가 아니다. 작가의 혼과 호흡이 담긴 어떤 작품도 옻칠로 표현해 낼 수 있다는 것이다.



옻칠의 영구성과 색상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설명하자만 실로 책 한 권으로도 부족할 것이다. 나는 내 조국에 아니 전 세계에 우리가 공헌할 수 있는 확실한 기법을 정리해놓고 있다. 나는 평생토록 목숨을 걸고 부딪혀 얻어낸 경험을 반드시 옻칠 교과서로 발간할 것이다. 그것은 옻칠과 함께 한 내 삶의 최종목표이다.제1장 고향



창백한 내 영혼의 뿌리낯선 경험들마지막으로 닥친 고비도쿄 하늘에 태극기가 휘날리다제4장 혼불

우리 문화의 '혼불'을 만나다옻칠의 영구성, 자연친화성, 아름다움부산에서의 가구공방 운영은 점점 힘에 부쳤다. 수요는 줄어들었고 내 영역도 서서히 좁아졌다. 다른 활로를 모색해야 했다. 나는 틈만 나면 박물관이나 도서관에 들러 여러 가지 문헌을 뒤적이며 자료를 수집했다. 그러던 어느 날 무심코 넘기던 자료집 속에서 희한한 색깔을 가진 도자기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도자기 위에는 화려한 색상의 문양이 그려져 있었고, 토기 위에 옻칠을 올린 와태칠 기법이 라는 설명이 붙어 있었다. 무려 1천 2백여 년 전 낙랑시대 때 만들어진 그 작품은 오랜 세월의 두께가 내려앉아 있었지만 빛깔은 여전히 영롱했다.



나는 당장 와태칠을 직접 해 보고 싶은 열망에 사로잡혔다. 그러나 나에게 와태칠을 가르쳐 줄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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