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조선의 옻칠쟁이다
전용복 지음 | 한림미디어
제1장 고향
창백한 내 영혼의 뿌리부산시 동래구 복천동에서 우리 집이 있던 동네는 야트막한 산줄기의 허리쯤에 자리잡고 있었다. 내가 태어난 해는 전쟁이 막바지에 다다를 무렵이었고 당시 부산은 각지에서 피난 온 사람들과 대대손손 뿌리를 내리고 살아 온 사람들이 한 동네에서 복작거리며 남루한 삶을 꾸려가던 시절이었다.
나는 하루도 편안히 잠을 잘 수가 없었다. 형과 나는 술 취한 아버지의 이유 없는 매질과 벽력 같은 고함소리를 고스란히 견뎌야했다. 아버지가 일당으로 받은 돈은 대개 투전판에서 날려버리고 빈 손으로 집에 돌아올 때가 많았다. 그런 일상이 이어지는 동안 가난은 헤어날래야 헤어날 수 없는 굴레였다.
공부도 잘 하고 훤칠한 청년의 모습이던 형은 내가 초등학교 5학년 때 결핵성 뇌막염으로 부모님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고 했던가. 생때 같은 맏아들을 잃은 부모님의 참담해 하는 모습이란 차마 말로 옮길 수 없을 지경이었다. 특히 어머니에게 그 참절의 시간은 너무 가혹했다. 육신에서 혼이 빠져나간 듯 이따금 정신이 오락가락하기도 했다.
갑작스런 형의 죽음으로 집안에 드리워진 그림자는 생각보다 무겁고 어두웠다. 형의 부재는 형이 감당해야 할 모든 것이 고스란히 내게로 전해졌다는 것을 의미했다. 어머니가 병석에 눕게 되자 부모님은 살아계셨지만 현실적으로 나는 가장 아닌 가장이 되어야 했다. 우선 어머니의 약값을 벌어야 했고 아버지가 드실 술과 동생들의 학비까지도 내 몫이었다. 과일 장사, 조그만 구멍가게를 하면서 간신히 하루하루를 이어가던 나는 등록금을 받지 않고 밤에 공부를 하는 학교를 알게 되었다. 여전히 어머니 약값은 필요했고 동생들도 커가고 있었으므로 학교 앞에서 좌판을 벌이기도 했다.
낯선 경험들군대 제대 후 우연히 '한국목재주식회사'라는 회사에 취직하게 되었다. 전국에 합판을 배급하는 중간 유통업체였다. 6개월간 합판을 옮기는 일을 한 후 합판 주문을 맡아오는 영업일을 하게 되었다. 온 부산시내를 자전거 페달을 힘껏 밟으며 누비다가 건설회사가 눈에 띄면 일을 도왔다. 그들이 뜨악한 눈으로 누구냐고 물어보면 말없이 명함을 건네주고 돌아오곤 했다. 이러한 나의 영업방식은 서서히 효과를 발휘해 나를 통해 합판을 주문하는 물량이 눈에 띄게 늘어나고 있었다.
머지않아 주임이 되었고 곧 과장이라는 직함을 맡게 되었다. 어느 날 중역회의에서 회사로서는 합판의 유통과 2차 가공만으로는 장래가 불투명하다고 판단하고 있었고 뭔가 다른 고부가가치업종을 구상하던 중이었다. 여러 가지 구체적인 논의들이 오고간 끝에 최종적으로 결정된 것은 가구업계 진출이었다. 가구회사 설립이 추진되면서 회사는 안성합판주식회사로 이름이 바뀌고, 내가 첫 기획실장이 되었다. 기획실장은 영업과 디자인을 총괄하는 책임자였다. 특히 디자인 부분은 그 동안 억눌러 왔던 내 끼를 마음껏 분출시키는 출구가 되었다. 독창적이고 파격적인 내 디자인은 금세 인정받기 시작했고 물건은 날개돋친 듯 팔렸다.
나는 현장을 직접 뛰어다니면서 가구제작의 실상을 눈으로 확인했다. 그들은 옛날부터 내려오는 도안에 아무 변화도 주지 않은 채 그대로 답습하고 있었다. 디자인은 천편일률적이었고 그걸 만회라도 하려는 듯 전면을 온통 나전으로 도배하고 있었다. 변화라고 해봐야 윤곽선을 약간씩 달리 하는 정도일 뿐 새로운 디자인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나는 구태의연한 가구제작 방식이 몹시 답답했다. 뭔가 새로운 디자인을 선보이고 싶다는 생각이 꿈틀거렸다. 나만의 숨소리,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의 움직임을 가구 위에 표현해 보고 싶었다. 비로소 그림을 그리고 싶었던 열망이 시나브로 고개를 들었다. 회사에서는 이러한 나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므로 고민 끝에 독립해서 내 손으로 직접 가구를 만들어 보기로 했다.
아버지가 돼지우리로 쓰시던 움막을 개조해 조그만 작업실을 꾸며놓고 간단한 재료를 사서 구상했던 것들을 혼자 만들어 보았다. 나는 구상해 온 작품들을 거침없이 가구 위에 펼쳐나갔다. 기존의 가구들과는 발상과 표현에 있어서 완전히 궤를 달리하는 것들이었다. 이당 김은호 화백 등 유명 화가의 산수화나 그림들을 밑그림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그러나 단순한 베끼기나 모사가 아니라 나만의 감각으로 여과시켜 새로운 작품으로 탄생시켰다.
그러나 부산이라는 지역의 한계는 엄연히 존재했다. 물론 내 작품의 가치를 인정해 주는 사람들도 꽤 있었지만 기대한 만큼은 아니었다. 나는 좀더 넓은 무대로 진출하고 싶어졌다. 서울 이곳저곳을 물색하다 경기도 마석이라는 곳에 둥지를 틀었다. 서울 지역의 고급 가구상들은 그 동안 전혀 본적이 없는 내 작품들에 열광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역시 매번 새로운 작품을 만든다는 것은 경쟁력의 한계가 있었다. 작품들이 호평받으면서 서서히 내 이름은 전국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고향생각이 간절해졌고 다시 부산에 내려가 큼직한 공방을 차렸다.
옻칠의 신비에 빠져들게 한 와태칠부산에서의 가구공방 운영은 점점 힘에 부쳤다. 수요는 줄어들었고 내 영역도 서서히 좁아졌다. 다른 활로를 모색해야 했다. 나는 틈만 나면 박물관이나 도서관에 들러 여러 가지 문헌을 뒤적이며 자료를 수집했다. 그러던 어느 날 무심코 넘기던 자료집 속에서 희한한 색깔을 가진 도자기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도자기 위에는 화려한 색상의 문양이 그려져 있었고, 토기 위에 옻칠을 올린 와태칠 기법이 라는 설명이 붙어 있었다. 무려 1천 2백여 년 전 낙랑시대 때 만들어진 그 작품은 오랜 세월의 두께가 내려앉아 있었지만 빛깔은 여전히 영롱했다.
나는 당장 와태칠을 직접 해 보고 싶은 열망에 사로잡혔다. 그러나 나에게 와태칠을 가르쳐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로지 문헌에만 의존해 스스로 깨쳐나가야 했다. 나는 와태칠을 하면서 옻칠의 매력에 깊숙이 빠져들었다. 와태를 완성하기 위해 비로소 순수한 옻칠을 처음 접해 본 것이었다. 무수한 실패를 경험한 끝에 고온에서 말리는 것이 와태칠의 비결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100% 순수한 옻칠만을 사용하지는 않았다. 가구에서 해 오던 대로 옻칠에다 석유를 탄, 말하자면 흉내만 낸 옻칠이었다.
당시 와태칠 작품은 일반인들에게는 생소한 장르였다. 몇 번의 개인전시회는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서서히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나는 점차 가구에서 멀어지면서 나중에는 아예 손을 떼게 되었고, 어느덧 창작에만 전념하는 작가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운명적으로 나를 찾아온 조그만 밥상부산의 공방에서 나는 나만의 세계를 표현하는 데 몰두하고 있었다. 와태칠과 패널작업은 늘 나를 들뜨게 했다. 그런 중에도 내 머리 속 한 구석에는 온통 일본으로 진출할 궁리로 꽉 차 있었다.
어느 날 말쑥하게 차려 입은 중년 신사가 공방으로 찾아왔다. 의아하게 자신을 맞는 내 앞에 그는 조심스럽게 보자기에 싸온 조그마한 밥상 하나를 풀어놓았다. 밥상은 정확하게 두 동강 나 있었다. 첫눈에 보기에도 밥상은 결코 짧지 않은 세월의 흔적을 담고 있었다.
그는 아서원측에서 밥상을 수리할 사람을 찾던 중 동경예술대학에서 내 얘기를 듣고 찾아왔노라고 덧붙였다. 그 말을 들으니 짚이는 데가 있었다. 일본에 견학갔을 때 동경예술대학을 방문한 적이 있었고 그때 내 명함을 놓고 온 것이었다.
밥상을 자세히 보니 고운 때깔의 나전으로 두 마리의 학이 아름다운 자태로 입혀져 있었다. 하늘로 비상하는 학의 모습을 표현한 자개의 주름질 기법이 완벽한 한국식이었다. 더구나 학의 날개 부분은 자개의 무늬를 살려 운동감을 주고 있었다.
며칠 지나지 않아 손상된 부분만 깔끔하게 수리하여 그의 앞에 내밀었지만 그는 난감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래서 나는 아예 새 밥상을 만들었다. 낡은 자개들을 떼어내고 귀 부분만 손보면 간단하게 해결될 일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은이 입혀진 부분이었다. 그때까지 나는 은 입히는 작업을해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그에게 제안했다. "은을 입히면 머지않아 녹이 슬고 음식점에서 사용하기에는 실용적이지 못합니다. 내 생각에는 이 부분을 우리 자개로 대치하면 훨씬 견고하고 아름다울 것같습니다." 그는 "일반 견본을 하나 만들어 보시죠."라며 자리를 떴다.
새로 만든 밥상을 보낸 지 며칠 지나지 않아 일본에서 무척 만족한다는 전화가 걸려왔다. 그러나 곧이어 들려오는 소리에 내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난 번과 똑같이 수리해야 할 밥상이 무려 천 개나 있다는 것이었다. 동네 중국집으로 여겼던 아서원이라는 곳이 일본에서는 그토록 유명한 메구로가조엔이었다는 사실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때였다. 이렇게 가조엔과의 인연은 난데없이 찾아왔다.
제2장 기다림
꿈의 연회장 메구로가조엔가조엔을 창립한 호소카와 리키조는 소화 3년이던 1928년 봄, 도쿄 시바우라에 있던 자신의 웅장한 저택을 개조하여 독특한 순일본식 요정을 건립했다. 그러다 1931년 가을, 현재의 메쿠로 지역에 방대한 부지를 매입하여 메구로가조엔 공사를 착수했다고 한다. 그후 꾸준히 부지를 넓혀나간 끝에 연건평 8천여 평, 객실 2백여 호에 바닥길이만도 2㎞에 이르는 대규모 호화판 연회장으로 꾸몄다.호소카와 리키조는 메구로가조엔이 완공되자 우선 요정사업 외에도 결혼식을 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대중들의 발길을 끌어들였다. 또 피로연 행사를 도입한 것도 그의 아이디어였다. 결혼식이 끝나고 같은 자리에서 성대한 피로연을 갖는 풍습이 이때부터 비롯되었다고 한다. 하객들은 다른 결혼식장에서는 볼 수 없는 미술품을 감상하는 기회를 덤으로 얻었고 그때 받은 강렬한 인상은 입에서 입으로 퍼져갔다.
격조 있는 명목을 사용한 건물의 설계와 공사에는 당시 일본 건축계 최고의 기술진을 투입했다. 그 결과 메구로가조엔은 화려한 실내 디자인, 정교한 옻칠 가공, 나전과 목재의 섬세한 세공 등 일본의 독특한 기술이 모두 발휘된 우아한 예술품으로 탄생되었다.
각각의 방들은 창의적인 디자인으로 개성을 뚜렷하게 살렸지만 전체적으로는 공통된 미의식이 흐르도록 고려했다. 무엇보다 건물 전체를 옻칠로 발라 그 신비한 기운을 가득 서리게 한 점이 독특하다. 메구로가조엔의 작품들은 옻칠과 나전, 일본 회화를 총망라한 것들로 특히 일본화에까지 엄청난 양의 나전이 사용된 것은 대단히 드문 일이다. 그러나 이것은 호소카와 리키조의 출생지와 그 환경을 생각하면 쉽게 이해할 만하다.
호소카와 리키조가 태어난 곳은 아시가와현 와지마 근처로 이곳은 옻칠 생산지로 유명한 고장이다. 그가 나고 자란 마을과 가까운 곳에는 전체가 옻칠로 되어 있는 절이 하나 있었고 그 지역은 조선의 장인들이 활발하게 드나들었던 곳으로 1920년대에는 한국의 장인들이 와서 나전을 가르쳤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어린 시절 조선 장인들의 현란한 손놀림을 보며 자란 호소카와 리키조가 옻칠의 매력에 깊숙이 빠진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첫 일본 전시회천 개나 되는 오젠의 수리를 마친 후부터 나는 일본에서 작품활동을 할 수 있는 방법을 구체적으로 모색하기 시작했다. 한국에서는 작품세계를 제대로 평가받기 힘들었을뿐더러 정통 옻칠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공부하고 싶기도 했다. 가장 확실한 방법은 전시회를 통해 내 작품을 먼저 알리는 길이었다. 그러나 전시할 만한 장소를 누구에게 어떻게 알아봐야 할지 막막했다.
일본의 여러 곳에다 수소문을 해본 끝에 도쿄의 한국문화원에 전시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먼저 작품사진을 우편으로 보내달라는 주문에 나는 상감기법을 구사한 와태칠 한 작품을 싸서 보냈다. 당시 한국문화원 윤택 관장은 내 작품을 보는 즉시 전시를 결정했다고 한다.
일본에서의 첫 전시회치고는 기대 이상으로 멋지고 화려한 전시회였다. 메구로가조엔의 호소카와 도시로 상무도 전시회를 찾았다. 그는 부산에서의 첫만남을 떠올리는 듯 활짝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백만 엔짜리 작품을 한 점 구입한 그는 헤어지면서 한 마디를 남겼다. "저희 회장님께서 전 선생님을메구로가조엔으로 꼭 모시고 싶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전시회가 끝날 무렵, 메구로가조엔에 정식으로 초대를 받았다. 입구에 도착하는 순간 우선 상상했던모습보다 훨씬 더 웅장한 규모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3만 평이나 되는 정원에 고래등 같은 기와집들이 한 촌락을 이루고 있었다. 나는 현관에 걸린 천마도, 모든 벽과 천장 전체가 옻칠로 이루어진 현관, 한쪽 벽면 전체를 장식한 송학도를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런데 송학도 한쪽에죽파라는 일본 이름이 큼지막하게 적혀 있었고 그 밑에 깨알 같은 글씨로 광신이라는 이름이 새겨져있었다. 광신이라는 이름은 죽파라는 일본 화가가 도안한 그림에 자개를 새겨넣은 조선의 무명 장인임에 틀림없었다.
한일합병 이후 일본은 조선의 옻을 모두 일본으로 수탈해갔고, 칠 장인들은 대거 일본으로 끌려가 조선의 칠 공방은 쇠락의 길을 걸었다. 낯선 곳에서 솜씨를 펼친 선배 장인들의 숨결로 내 몸은 금새 뜨거워졌다. 이윽고 나라 잃은 설움과 울분을 삭이며 한톨한톨 자개를 새겨넣었을 조선 장인의 노역이 떠올라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나는 선배 장인의 혼이 담긴 작품들을 반드시 되살려내리라 다짐했다.
그들은 메구로가조엔 전체를 둘러보고 온 나를 그곳 최고의 방으로 안내했다. 나에게 호소카오 도시로 상무가 넌지시 귀띔을 했다. "3년쯤 후에는 이곳을 철거해야 합니다. 전통식으로 복원할지 현대식 오피스타운으로 지을지는 아직 결정나지 않았습니다. 만약 복원으로 결정난다면 전 선생도 한번 참여할 준비를 해 보시지요."
메구로가조엔 옆으로는 폭 3m 남짓한 하천이 흐르고 있는데 수시로 범람해 도쿄도로부터 확장공사가 불가피하다는 통보를 받았다는 설명이었다. 현대식 건물에 메구로가조엔의 미술품들을 고스란히 이전하는 일은 새로 짓는 것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메구로가조엔측에서는 복원공사로 결정날 때를 대비해서 어떤 양식의 건물로 복원할 것인지, 어떤 형식으로 영업할 것인지에 대한 계획을 세우기 위해 면밀한 조사가 진행 중이었다.
나는 흥분할 수밖에 없었다. 내 손으로 오젠을 복원한 경험도 있는데다 또 이곳에는 오젠과 같은 기법의 작품이 많아서 내가 참여할 여지가 많다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일본을 다녀온 뒤 기필코 조상들의 작품을 내 손으로 복원해 내리라는 열망이 부풀어올랐다. 그 순간이 닥치기 전에 내 나름대로의 치밀한 준비가 필요할 것으로 생각되어 우선 완벽한 일본어를 구사하기 위해 학력고사를 치르고 대학에 진학하였다. 대학과 공방을 오가는 생활이 이어지는 동안 좀처럼 작품에는 손을 대지 못했다. 마음이 딴 곳으로 가 있으니 작품이 될 리 없었다. 당연히 생활이 말이 아니었다. 오로지 일본어에만 매달리던 시절이었다.
방학이 되면 나는 곧장 일본으로 날아가 혼자 일본의 옻칠 산지를 두루 찾아다니며 여러 옻칠 기법들을 눈여겨 보았다. 혹시 그들에게서 메구로가조엔에 관한 정보를 들을 수 있을까 싶어서 항상 귀를 쫑긋 세웠다. 갈 때마다 매번 메구로가조엔을 찾아 구석구석 훑고 다닌 것은 물론이었다. 간혹 아주 낡아 너덜너덜한 옻칠 작품 조각을 몰래 떼어내 가지고 돌아와 일일이 스크랩하여 내 나름대로 분석하면서 실험을 거듭했다. 또 우리 조상들이 남긴 기법과 하나하나 연결시켜 보기도 했다. 그래도 해답을 구할 수 없을 때는 일본으로 날아가 발달된 옻칠 기법을 배우기 위한 본격적인 순례에 들어갔다. 순례의 여정은 야마나까, 와지마, 다까오까 등 일본 전역에 걸쳐 있는 옻칠 산지들이었다.
야마나까에 있는 기타지마 선생을 찾아가니 선생은 나를 그 지역 최고의 장인 집으로 데리고 다니며 소개시켜 주었다. 나는 그들에게 메구로가조엔의 작품들 중에서 분석하기 어려웠던 소재와 기법들에 대해 자세히 질문했다. 물론 그들에게 메구로가조엔의 작품이라는 것은 입 밖에 내지 않았다. 나는 늘 그들에게 내가 가진 상감 옻칠과 현란한 나전기법들을 먼저 펼쳐보이곤 했다. 그리고는 상대방의 반응을 넌지시 기다렸다. 그러면 그들은 대개 자신있어 하는 그들의 기법을 선보였다. 격의 없는 이야기가 오고가는 와중에 혹시라도 필요한 대목이 있을 때는 항상 가지고 다니던 소형 녹음기를 작동시켰다. 그들은 내가 풀기 어려웠던 숙제를 자상한 선생님처럼 소상히 설명해 주었다. 그들의 설명을 녹음기에 담아 부산으로 돌아올 때는 몹시 흥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