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수 교수의 세계문화기행
이희수 지음 | 일빛
이희수 교수의 세계문화기행
이희수 지음
일빛/1999년 6월/319쪽/14,000원
1.지중해 문화
터키 - 동과 서를 잇는 다리
터키는 아시아와 유럽에 걸쳐 있으며, 고대에서 현대에 이르는 다양한 문명이 잘 조화된 동서 문화의 교차지라는 느낌이다. 메소포타미아와 오리엔트의 무수한 문명이 이곳에서 잉태되었고 그리스, 로마, 비잔틴, 이슬람을 비롯한 수많은 문명들이 이곳에서 명멸해 갔다. 특히 아시아를 가로질러 온 실크로드의 여정이 터키에서 마무리되면서 동․서양의 진귀한 예술품과 교역품들이 몰려들었다.
끊임없는 외세의 간섭과 정치․경제적 불안으로 인해 오늘날 터키인들의 위치는 크게 주목받지 못하고, 동서 문화의 교차로에 자리하여 동양의 정신에 유럽의 옷을 걸친 어정쩡한 모습이다. 그러나 그들의 심성과 문화적 바탕은 우리의 모습과 많이 닮아 있다. 원래 터키족은 우리와 같은 알타이 문화권에 속한다. 그래서 그들의 역사는 중앙아시아를 무대로 아시아를 석권했던 흉노로부터 시작한다. 그들은 실크로드를 장악하여 끊임없이 중국을 위협하면서 서방의 새로운 문화와 진귀한 교역품을 전해 주었다. 흉노의 역사를 이어 받은 터키족은 돌궐족이었고 이를 다시 위구르가 이어 그들의 일파는 서쪽으로 진출하여 11세기 경 셀주크 투르크 제국을 일으키게 된다. 오늘날 터키 땅을 관통하는 대상로와 아나톨리아 전역에 산재해 있는 대상 숙소인 카라반사라이는 1071년경 비잔틴 제국을 몰아 내고 정착한 투르크족 시대의 문화유산이다.
현재 터키는 사계절이 있고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75만㎢의 비옥한 토지에 6,500만 명의 인구가 살고 있다. 그들은 대단한 역사적 긍지와 찬란한 문화유산을 가지고 있으며, 이슬람교를 바탕으로 건강한 정신생활과 풍요로운 삶을 구가하고 있다. 터키 국민의 98%는 이슬람교를 믿는다. 그들은 일찍이 10세기 중앙아시아에서 이슬람으로 개종한 뒤 유목민적인 신사도와 동양적인 정신으로 독특한 문화․ 전통을 만들어 냈다. 하루 다섯 번 드리는 예배를 통해 철저한 도덕성의 틀을 갖추고, 한 달 동안의 단식을 통해 가난한 자의 배고픔과 약자의 설움을 체험으로 공유하여 진정한 공동체의 결속을 다진다. 일정한 수입을 종교세로 바치고, 평생에 한 번은 이슬람교의 성지인 메카를 순례하여 진정한 회개를 통해 하느님께 다가간다. 세속화와 근대화의 물결이 드세지면서 종교적 가르침의 끈이 느슨해진 것은 사실이지만 아직도 그들은 문화와 전통의 핵으로서 이슬람을 고집하고 있다.
터키탕으로 잘 알려진 ‘하맘’의 풍습은 우리 나라에 알려진 것처럼 날씬한 몸매의 미녀 안마사가 나오거나 왜소한 동양인의 알몸이 털복숭이들 앞에서 동물원 원숭이 취급을 당하는 모습으로 상상했다면 큰 잘못이다. 남탕과 여탕이 구분되어 있고, 탕 안에서 동성의 친구나 부자 간에도 반드시 타월로 치부를 가린다. 터키탕은 우선 바닥과 벽면 전체가 대리석으로 되어 있고, 은은한 장작 열기로 서서히 땀을 내게 되어 있다. 터키에는 특히 온천을 이용한 ‘하맘’이 많아 류머티즈와 피부병에 탁월한 효과가 있다고 한다. 남자들 사이에도 치부를 가릴 정도로 예의를 지키고, 여러 사람이 함께 몸을 담그는 불결한 공중탕 대신 넓은 대리석 열판 위에 누워 온갖 주제로 담소를 나누는 터키탕은 공동체 친교의 장소요, 정보교류와 여론형성의 산실이다.
터키 음식은 다양성과 독특한 맛, 분위기를 자랑으로 삼는다. 터키 음식의 기본은 양젖과 양고기다. 터키를 중심으로 한 이슬람 문화권에서 조리되는 양고기 음식은 조사된 것만 해도 약 120여 종이다. 이 중 가장 대중적이고 보편적인 것이 회전구이인 ‘됴네르 케밥’이다. 양 한 마리를 잡아 우선 껍질과 내장을 정리하고 뼈를 추린다. 그런 다음 모든 부위를 얇고 널따랗게 썰어 마늘, 양파즙, 박하, 각종 향료로 된 양념을 뿌려 하루 저녁 동안 재운다. 다음 날 회전판 가운데 일자로 세워진 쇠꼬챙이에 차곡차곡 고기를 끼워 둥글게 원통형으로 쌓아 올린다. 중간중간 기름덩어리와 야채를 끼우고 소금과 후추를 적당히 뿌린다. 그런 다음 세로로 세워진 세 칸짜리 숯불 화덕 앞에서 서서히 돌리면서 굽는다. 표면이 익을 때마다 가늘고 긴 칼로 위에서 아래로 베어 빵에 싸서 먹는다.
석양이 에게해 수평선에 걸리면 수만 개의 사원에서 일제히 ‘아잔’이라는 은은한 코란 소리가 터키 전역에 울려 퍼진다. 하루는 마치는 의식인 동시에 이 소리는 화려한 밤의 세계가 열리는 신호이기도 하다. 가정을 소중히 여기는 터키인들은 일찌감치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고, 풍류를 아는 이방인들은 무희들의 요염한 밸리 댄스에 토착 위스키인 ‘라크’를 즐기며 저마다 술탄이 된다. 이처럼 터키는 유럽과 아시아, 과거와 현재, 낮과 밤이 이어져 하나가 되는 인류 역사의 살아 있는 희망으로 남아 있다.
이스탄불 - 인류 문명의 옥외 박물관
역사학자 토인비는 터키의 역사 도시 이스탄불을 일컬어 '인류 문명의 살아 있는 거대한 옥외 박물관‘이라고 했다. 이스탄불에는 역사 지구에 있는 베야지트 광장을 중심으로 반경 1㎞ 내에 인류가 이룩한 5000년 역사의 문화유산들이 그대로 살아 숨쉬고 있다. 히타이트, 아시리아 같은 고대 오리엔트 문명에서부터 그리스․로마 문화, 초기 기독교 문화, 비잔틴 문화, 그리고 이슬람 문화의 진수들이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또는 한 점에서 서로 만나고 있다.
기원전 7세기 그리스의 지도자 비자스는 오랜 기도 끝에 ‘눈먼 땅에 새 도시를 건설하라.’는 델피 신전의 신탁을 받았다. 이에 따라 천혜의 요새인 보스포러스 맞은편 언덕에 새 식민 도시인 비잔티움을 건설했다. 풍요로운 영화를 누리던 비잔티움은 그 뒤 196년 로마제국에 함락되고 326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이곳을 로마의 새 수도로 정하면서 화려한 콘스탄티노플로 태어나게 된다. 그리고 1453년 5월 오스만 투르크 제국에게 함락된 콘스탄티노플은 이스탄불로 다시 태어나면서 동서양의 조화로움이 가득 넘치는 독특한 문화를 일구어 갔다.
1500년의 역사를 증언하는 성 소피아 성당은 이스탄불을 상징하는 건물로 그리스 정교의 총본산이라는 정신적 의미뿐만 아니라 비잔틴 건축의 압권이다. 중앙 돔에 수많은 보조 돔을 사용한 소피아 성당의 비잔틴 양식은 후일 모스크를 비롯한 이슬람 건축술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이교도 치하에서 500년간이나 이슬람 사원으로 사용되는 비운을 겪은 뒤 지금은 박물과이 되어 그리스 정교와 이슬람이 공존하는 생생한 역사현장으로 남아 있다.
성 소피아 성당의 맞은편 히포드롬에는 이슬람 건축의 대표격인 술탄 아흐마드 사원이 1000년의 시차를 두고 서 있다. 6개의 아름다운 첨탑에서 울려 퍼지는 코란 낭송으로 이스탄불의 소유주가 터키임을 새삼 느끼게 해 준다. 이슬람 문화의 알맹이들은 히포드롬에 있는 이슬람 문명 박물관에 잘 전시되어 있지만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위용을 느끼기 위해서는 토프카피 왕궁 박물관을 빼 놓을 수 없다. 특히 세계 최대의 에메랄드와 84캐럿짜리 다이아몬드로 유명한 보석관뿐만 아니라 귀중한 학습장이 되고 있는 복식관, 이슬람의 성물을 전시한 종교관, 주방과 화실 등이 당시 궁정에서 실제로 사용한 장소에 따라 배치되어 있다. 금남 구역이었던 왕실 안뜰의 하렘은 세계 3대 컬렉션의 하나로 1만 1,000점의 각종 도자기를 소장하고 있다.
2. 이집트 고대 문화
룩소르와 아스완 - 이집트 대중의 시대가 열렸던 곳
태양신과 동일시되던 이집트의 왕 파라오는 침략자에게 무릎을 꿇으면서 신성불가침의 권위가 손상되었다. 귀족과 사제들의 세력이 성장하면서 대중들의 의식에도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다. 파라오만이 부활하고 영생불멸한다는 믿음에 회의가 생기면서 귀족과 대중도 내세의 주인공이 되고자 했다. 그들도 미라를 만들고 피라미드를 만들어 사후의 거주공간을 준비했다. 이제 이집트 신화는 너무나 인간적인 모습으로 대중의 삶을 대변해 주게 되었다. 파라오 중심의 역사에서 이집트 대중의 시대가 열렸던 곳이 바로 테베, 오늘날의 룩소르 일대다.
테베의 주신은 아몬이었다. 이곳의 수많은 신전은 아몬신을 위한 것이다. ‘정선(精選)된 성스러운 땅’ 카르나크의 40만 평의 대지 이에 지어졌다가 폐허가 된 신전의 숫자는 아무도 모른다. 완벽한 예술성과 거대한 규모로 이방인을 압도하는 것은 역사상 가장 장대한 신전인 카르나크의 아몬 대신전이었다. 카르나크의 신전과 열주 양식은 그리스 파르테논 신전을 닮았다. 오히려 파르테논보다 1000년이나 앞서 세워졌던 카르나크 신전의 규모와 정교함이 돋보인다. 이집트와 그리스․로마 문명 사이에 단순한 형태나 양식의 영향만 나타나는 것은 물론 아니다. 미라와 파라오의 부활 사상은 그리스의 디오니소스 신앙으로 연결되어 기독교의 부활 개념의 근원이 되었다.
룩소르의 신전들은 떠오르는 태양을 위해 나일강의 동편에 있다. 그리고 태양이 지는 나일 강의 서편에는 예외 없이 이집트인들의 묘지가 있다. ‘네크로폴리스’라 일컬어지는 서쪽 강변에 있는 거대한 ‘죽음의 도시’에는 파라오의 무덤군으로 유명한 왕들과 왕비들의 계곡, 장제전(葬祭殿)들이 자리잡고 있다. 신왕국 시대에 이르러 귀족과 사제 세력이 점차 성장하여 파라오의 권위에 도전하게 되자 테베의 지방신이었던 아몬도 태양신 라와 결합하여 최고신 ‘아몬 라’로 승격했다. 사후에 부뢀하여 불멸한다는 사상은 파라오뿐만 아니라 귀족과 일반 대중에게 파급되었고, 규모가 작은 수많은 피라미드가 룩소르의 네크로폴리스를 뒤덮었다. 그 피라미드가 대부분 쉽게 손상되거나 도굴되자 파라오들은 깊은 계곡에 암벽을 뚫고 아무도 모르는 암굴 무덤 속에서 내세를 추구했다. 황금 마스크와 부장품이 발견되어 20세기 최대의 발굴로 잘 알려진 투탕카멘의 무덤이 발견된 것이 바로 이곳이다.
룩소르를 빠져 나와 남쪽의 아스완으로 방향을 돌렸다. 5시간을 달려 아스완의 남쪽 나세르 호숫가에 있는 아부심벨 신전에 도착하자 신전 앞은 세계 각국의 관광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람세르 2세가 태양신 아몬 라와 창조신 프타, 그리고 자신을 위해 건립한 거대한 신전 앞에는 20m 높이로 우뚝 서 있는 4개의 람세스 2세의 거상이 보인다. 신전 내부에는 오시리스신의 모습으로 형상화된 람세스 2세의 입상 8개가 서 있고, 카데시에서 있었던 히타이트와의 대규모 전투가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무엇보다 아부심벨 신전에 더욱 애착이 가는 것은 물 속에 잠겨 있어야 할 위대한 인류의 축조물이 지상에 남아 있다는 사실 때문일 것이다. 이집트 정부가 관개수로를 통한 농업혁명을 내세우며 아스완 댐을 건설할 때 아부심벨도 나일 강가에 있는 무수한 신전과 함께 수몰될 운명에 처했다.그러나 유네스코를 중심으로 이 문화유산을 살려야 한다는 목소리를 높였고 결국 막대한 돈을 투자하여 원래 위치보다 60m나 높은 현재의 위치에 원형을 옮겨 놓는 데 성공했다.
3. 오리엔트․중동 문화
제다 - 메카로 향하는 관문
제다는 사우디아라비아 최대의 도시이자 홍해에 연한 역사적인 교역 도시다. 사우디아라비아 여행은 일반인들이 좀처럼 생각할 수 없는 어려움이 따른다. 우선 관광이나 상용비자라는 것이 없고, 단지 현지 스폰서의 보증 아래 사우디아라비아 외무성이 서울에 있는 대사관에 비자를 보내면 그것을 근거로 입국비자를 발급해 주는데 그것도 한 달 이상 걸리는 지루함을 견뎌야 한다. 따로 종교비자가 있어 성지순례나 메카 방문이 가능하지만 이것도 이슬람 교도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다. 메카에는 이슬람 교도만 들어갈 수 있는 신성불가침의 영역이고 금단의 지역이다. 메카를 보고 싶어하는 미국 대통령의 간청이 정중하게 거절되었던 일화는 유명하다. 따라서 일반인들은 그 곳에서 200만 명의 신자들에 의해 질서정연하게 치러지는 장엄한 종교의식을 참관할 수 없다.
고급 승용차와 고층 빌딩의 숲으로 상징되는 한낮의 제다 시내에서 그 옛날 대상들이 쉬어 가는 교역 도시의 이미지를 연상하기는 어렵다. 황량한 사막 위에는 현대적인 도시가 들어섰고, 낙타 행렬 대신 캐딜락이 줄지어 넓은 도로를 메우고 있다. 집집마다 바닷물을 정수한 맑은 물이 뜨거운 사막의 파이프 라인을 통해 자연온수로 공급되고, 냉각시설을 통해 찬물을 마시게 되었다. 이제 담수로 바뀐 바닷물은 관개수로를 따라 사막으로 공급되어 나무가 자라고 알곡을 거둘 수 있게 되었다. 일정한 물 공급과 풍부한 일사량으로 과일 맛은 세계 최고를 자랑하고, 제다 근교를 뒤덮은 밀밭은 사우디아라비아 국내의 밀 수요량을 충족하고도 남는 수확량을 자랑한다.
사우디아라비아는 남자들의 나라다. 길에 여자라고는 거의 찾아보기가 힘들다. 가끔씩 얼굴까지 검은 천으로 가린 여자들을 보지만 처녀인지, 늙은이인지, 학생인지, 주부인지 도무지 짐착조차 할 수 없다. 사진을 찍을 수도 없고, 말 붙이는 것은 고사하고 똑바로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낭패를 당하기 일쑤다. 이슬람교에서는 아내를 넷까지 둘 수 있는 일부다처를 허용하고 있다. 물론 일부다처제는 이슬람 이전에도 서아시아 유목사회의 전형적인 결혼제도였다. 남자 중심의 척박한 유목생활에서 불임이나 여아의 생산은 이혼 대신 두 번째 아내를 얻는 자연스러운 이유가 되었던 것이다.
석유가 고갈되면 아랍의 영화와 부유함도 사막의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릴 것인가. 석유 이후의 대체 에너지는 원자력과 태양 에너지의 위험이 따르는 원자력보다 태양열이 훨씬 안전한 미래의 에너지이므로 일 년 내내 뜨거운 태양열이 내리쬐는 사막은 또 다른 에너지의 보고로 위력을 발휘하게 될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무궁무진한 사막의 모래는 지구촌에 건설이란 단어가 남아 있는 한 훌륭한 자원으로 쓰이게 될 것이다.
테헤란 - 라 샤르키야, 라 가르비아, 이슬라미아 이슬라미아!
1979년 2월 1일 테헤란 공항에서 호메이니의 귀국을 환영하기 위해 테헤란 시민은 물론 이란 전역에서 몰려든 수백만의 군중들은 공항과 베헤슈티 자흐라의 순교자 공원을 메우고 있었다. 이란 국민들이 지난 15년 동안 팔레비 왕정의 압제와 극심한 탄압을 견텨낼 수 있었던 것은 오직 하나, 신에 대한 믿음과 이맘 호메이니에 대한 확고한 신뢰 때문이었다.
그 날 발포는 없었지만 정부는 즉각 군을 동원하여 24시간 통행금지를 실시하고 호메이니와 지지자들을 급습하고자 했다. 이를 눈치챈 시민들은 거리로 나와 탱크 앞을 가로막으며 호메이니의 집을 겹겹으로 에워쌌다. 호메이니는 그들의 마지막 희망이었다.
발포가 시작되면서 6만 명의 희생자들이 생겨 났다. 5년 동안 이란을 폭정과 방탕으로 목아 넣었던 레자 팔레비는 자신의 아내와 함께 이란을 빠져 나갔다. 군부는 드디어 발포를 중지하며 호메이니에 대한 충성을 다짐했다. 이렇게 하여 1979년 2월 11일, 이란에서 시민혁명은 성공했다. 이슬람 정신을 국가의 근본으로 하고 외세를 배격하는 자주성과 국민경제의 자립을 표방하는 새로운 이란이 탄생한 것이다.
이란은 찬란한 페르시아 문화의 본바탕이고 그 계승이다. 다리우스 대왕 때 전성기를 누린 고대 페르시아는 기원전 5세기경 오리엔트와 그리스, 인도와 동양의 문화를 고루 받아들여 찬란한 문명을 꽃피웠다. 이란 남쪽의 쉬라지 근교에 위치한 장대한 페르세폴리스의 궁전은 당시 페르시아 제국의 영화를 상상해 보기에 충분하다. 기원전 331년 알렉산더에게 멸망한 페르시아 제국은 다시 사산 왕조 페르시아로 되살아났다가 7세기 이후에 이슬람교를 받아들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란을 지나다니다 보면 눈만 내놓고 검은 옷으로 전신을 가린 여성들이 많이 눈에 띈다. 이란 혁명과 8년에 걸친 이란․이라크 전쟁으로 수십만 명의 건장한 전사들이 목숨을 잃었다. 내가 만난 이란의 한 교수는 이란 혁명은 위대한 여성의 승리였다고 강조한다. 자식이나 남편을 기꺼이 조국에 바친 어머니와 아내가 없었다면 오늘날의 이란은 없었을 것이라는 설명이다. 베헤슈티 자하라의 순교자 묘지에서 남편이나 자식들의 사진을 들고 오열하는 그들의 절규를 들으며, 혁명의 화려함 뒤에 숨은 말할 수 없는 고뇌와 아픔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