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다른 꿈을 향하여 나는 달린다
최종열 지음 | 청홍
사방이 칠흑 같은 어둠으로 변한지 꽤 됐다. 비릿한 바다 냄새로 보아 항구가 가까워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다 왔다, 다 왔어!, 다 왔~어!" 길고도 먼 탐험 끝에 천진항이 눈앞에 펼쳐지자 꿈만 같았다. 포구에 이르러 우리는 서로 껴안았다. 한참을 껴안고 있었다. 130일간 달려온 날들이 찰나처럼 느껴졌다. 탐험을 시작한 지 141일 째인 2000년 10월 9일 오후2시 북위 37도 47부, 동경 126도 59부인 인천항에 도착하였고, 실크로드 자전거 탐험대는 '자전거 사랑 전국 연합회' 회원들이 동참한 가운데 서울 남산까지 40km를 힘께 이동했다. 우리는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겼다. 탐험대는 생사와 고락을 같이하며 달려왔다. 폭염과 모래 폭풍 등 자연에 맞서 하나씩 이겨낼 때마다 대원들은 새롭게 태어났고, '나'라는 울타리를 무너뜨렸다. 결국 우리는 이긴 것이다!!빈에 도착하자 오스트리아 관광성 피터 부장이 마중을 나왔다. 피터의 환영식은 독특했다. 빈의 구시가지를 둘러싼 링을 한 바퀴 도는 것이 그의 환영식이었다. 이 도로를 따라서 돌면 빈의 명소들이 늘어서 있다. 국립 오페라극장과 합스부르크가의 저택, 호프부르크궁전, 1365년에 설립된 빈대학과 박물관, 도서관, 미술관들이 이어져 있다. "400년쯤 된 가게입니다." '볼프'라는 간판을 단 호이리게로 들어가면서 피터가 일러줬다. 햇포도주 시음을 마치고 사진을 찍었다. 느닷없는 사진촬영은 가게 한 벽면을 차지한 방명록 때문이었다. 수없이 많은 사진들 가운데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얼굴은 중국 국가주석 강택민이었다. 그 밖에도 미테랑 프랑스 대통령, 헐리우드 배우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잠시 후 가게 주인이 사진을 들고 나와서 "영원히, 건배. 실크로드 탐험대장 최종열"이라고 쓴 내 사인을 유심히 본 후 말했다. "훌륭한 분이니 대통령 옆에 걸어놓겠습니다."극한 상황이 닥쳤을 때 이를 극복하는 것은 정신력인데 그 정신력의 발로는 자발적인 의지이다. 타인의 강요에 의한 의지는 쉽게 무너진다. 강요에 의한 의지는 포기하고 싶은 순간적인 유혹은 뿌리칠 수 있겠지만 탐험하는 동안 연이어 따라오는 극한 상황을 극복하기에는 역부족이다. 사람의 정신력이란 피동적일 때보다 능동적일 때 더 강하다. 탐험할 때는 무엇보다 '포기의 유혹'이 쉴 사이 없이 괴롭힌다. 이를 뿌리치기 위해서는 강한 정신력으로 무장해야 한다.
헝가리에서의 첫 밤은 꼬르나의 캠프장에서 보냈다. 어제 한낮의 기온이 섭씨 40도를 육박했다. 날씨는 갈수록 더욱 더워지기 때문에 각자에게 인내를 필요로 하는 시간이다. 하루에 12시간씩 자전거에 앉아 있으면 살은 짓무르고 터져 나중엔 진물이 난다. 움직이다보면 눈에서는 번갯불이 번쩍인다. 케치케메트에 한화그룹이 세운 라면 공장인 한화식품에 연락이 닿아 회사 담당자는 탐험대를 공장으로 초청했다. 탐험대를 초청한 한화그룹의 김과장은 공장 근로자를 모아놓고 유창한 헝가리어로 우리를 소개했다. 공장 근로자들은 자신이 일하는 회사의 나라에서 온 탐험대라는 점에 큰 관심을 보였다. "최대장님, 저희가 라면을 준비했습니다. 가지고 갈 수 있을 만큼 가져가십시오." 넉살스런 웃음을 지으며 김과장이 말했다. "정말 자랑스럽고, 정말 반갑고, 정말 대단하십니다." 한국인 직원들과의 짧은 만남과 헤어짐이 아쉬웠다.19. 종 점20. 뉴밀레니엄 실크로드승용차 한 대가 먼지를 일으키면서 달려왔다. 운전석 옆자리의 젊은이가 무어라 말을 하는데 도통 알 수가 없다. 산등성이를 돌아 그늘진 곳에 이르자 앞서 지나간 차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를 따라 차로 가보니 수박을 잔뜩 잘라놓고 먹으라 권한다. "인샬라(신의 뜻에 따라)." "이이, 인샬라. 고맙소." 얼마나 게걸스럽게 먹었는지 민망할 정도였다. "저팬?" "노, 코리아." 어디로 가는지 묻는 것 같았다. 세계 지도를 펴놓고 설명해 주었다. "스타트, 로마, 오스트리아, 헝가리, 루마니아, 불가리아, 터키, 이란, 파키스탄, 차이나, 코렐리." "촉 규젤(대단합니다)." 운전석에 앉아 있던 터키인이 자전거를 가리킨다. "올 사이클." 그러자 웃으면서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다. 인종도 다른 이국인에게 따뜻하게 대해 주어 너무 감사하다고 몇 번씩 인사를 한 후 자전거를 탔다. 그러자 이들은 어디서 가져왔는지 빵을 잔뜩 안겨 주며 우리가 떠날 때까지 바라보고 있었다.
오후 2시를 넘기자 기온이 최고로 올라 섭씨 49도를 가리켰다. 이경완 대원이 날달걀을 아스팔트위에 던졌다. "흰자는 반숙이고, 노른자는 바로 완숙입니다." 들이마시는 공기는 폐부를 익게 할만큼 뜨거웠고 아스팔트의 열기는 온몸을 덮었다. 마치 헤어드라이어를 입에 물고 달궈진 프라이팬 위를 가는 느낌이었다. 자전거를 탄 일본인 여행자를 만났다. 이름은 유즈르라 했다. 점심은 국수를 말아서 유즈르와 함께 먹었다. 기념으로 하얀 티셔츠를 하나 주니 오랜 여행으로 옷도 궁색해졌다며 너무나 좋아한다.이란의 국경 도시 바자르간에서는 야영할 만한 마땅한 장소를 구하지 못해 호텔에 투숙했다. 시설은 그야말로 형편 없었다. 해가 지고 어두워지자 우리 나라 모기보다 커 보이는 모기가 극성을 부렸다. 세상에 나서 이렇게 많은 모기는 처음이다. 몸을 움직이지 않으면 새까맣게 달라붙어 피를 빨아먹는다. 얼마나 빨아먹었는지 제 몸도 못 가눌 정도다. 합하면 마흔 군데 이상 물려 가려워서 미칠 지경이지만 손이 부족해서 다 긁지도 못한다. 오후 2시쯤 본격적인 사막길로 들어섰다. 노란색의 모래바람, 그 위에 우박을 동반한 검은색의 비구름이 몰려오자 지옥으로 들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그 후 새끼 손톱만큼한 우박이 내리치자 몹시 아팠다. "이게 우리 탐험대를 위한 이란식의 환영인가?" 추워서 덜덜 떨리는 입으로 심상현 대원이 말한다.이란 여성의 차도르 착용은 어떤 것보다도 엄격하다. 차도르를 착용하지 않은 여성에게는 74대의 태형이 가해진다고 한다. 테헤란 북서쪽 양잠 농가를 찾았다. 버디쉬 할아버지는 집안으로 들어가 직접 생산한 '실크 실뭉치'를 가지고 나와 내 목에 걸어 주면서 말했다. "땀날 때 닦아. 그리고 탐험에 성공해." 고마움을 표시한 나는 실크 실뭉치를 만져봤다. 이 비단이 만들어낸 길이 지금 우리가 가고 있는 길인 것처럼 느껴졌다.한낮의 사막 더위는 지옥불과 같다. 살아서 지옥불을 체험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사막으로 초대한다. 황무지인 모래땅에 저절로 솟아오른 듯한 하지야바드에는 진흙으로 만든 집들이 있었다. 집집마다 사방이 뚫린 큰 굴뚝이 있었는데 이것을 바람을 잡는 '버드기르'라 한다. 실내로 들어가자 방안은 환했다. 뚫린 천장으로 빛이 들어오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바람도 불어와 시원하게 느껴진다. 게다가 조그마한 냇물이 방을 가로질러 흐르고 있었다. "이 물은 어디서 흐르는 겁니까?" "지하수를 통해 모든 집으로 흘러들어 가지." 모래 사막 한복판에 우뚝 솟아있는 오아시스 마을. 이런 마을이 없었다면 실크로드도 생겨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탐험대는 북위 29도 11부, 동경 58도 35부의 밤(BAM)에서 경찰의 호위를 받으며 파키스탄 국경으로 향했다. 국경 도시 밀저베의 호텔방은 천장과 화장실에 수없이 많은 바퀴벌레가 기어다녔다. 엄지손가락 두 개를 합쳐놓은 것만큼의 크기에다 통통하게 살이 쪘다. 저녁으로 라면을 끓여먹고 누우니 찜질하는 듯 한데 모기가 하도 많아 모포를 덮어도 그 위로 또 문다.'IMF 태풍'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큰 파장을 일으켰다. 기업 도산, 대량 실업자 양산은 물론이고 경제적인 무기력으로 가정이 파괴되는 집들이 속출하면서 부랑자가 늘어났다. 불황의 끝이 보이지 않자 삶을 포기하는 사람들이 도처에서 생겨났다. 국가적인 환란 가운데 탐험가로서 할 일이 무엇인가 곰곰이 생각해 봤다. 바로 이것, '나는 실크로드를 간다.'는 것이었다. 그린 실크로드 실현을 위한 탐험은 나의 신념이고, 고난을 극복하고 역경을 헤쳐 나가는 본보기를 세워서 기죽어 있는 국민에게 기운을 넣어주자! '국민에게 희망을 주는 일', 이것이 탐험가인 내가 할 수 있는 몫이라고 생각했다.
로마를 출발하여 오스트리아, 동구권의 초원지대, 동서양이 만나는 터키, 이란, 파키스탄을 거쳐 세계의 지붕인 카라코람 하이웨이를 넘어 실크로드의 시발점이며 종착점인 중국의 장안(현 서안)까지, 그리고 새천년을 맞이하면서 장안에서 다시 한반도까지 연결되는 실크로드를 개척하는 루트를 세워 '뉴밀레니엄 실크로드'로 명명하고 세계에 알리는데 그 의미를 찾고자 했다.
탐험대가 출발하기에 앞서 무엇보다도 힘들고 어려운 일은 막대한 탐험자금을 조성하는 일이다. 제천시와 충청북도가 탐험자금 중 1/3을 지원하기로 하고 나머지 2/3의 탐험자금을 조성하는 일만 남았다. 2년 전의 일이다. 어린이 도보 탐험대 대장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김종대 대장은 방학을 이용하여 어린이 도보탐험을 마치고 나에게 탐험에 관한 강연을 요청했다. 나는 북극과 사하라 사막의 자료를 가지고 도보탐험대를 대상으로 강연했다. 그들은 반짝반짝 빛나는 눈동자로 강연이 끝날 때까지 아주 진지한 모습이었다. 여러 강연을 다녀 봤지만 이런 진지한 청중 또한 처음이었다.
별 뜻 없이 안부전화를 걸은 내게 김종대 대장이 말했다. "나머지 자금은 제가 마련합니다. 언제 자금이 필요한지 미리 알려주십시오." 나는 무어라 말을 해야 할지 적당한 말을 찾지 못했다. "돈이 많아서 지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린이들에게 도전정신을 심어주어야 한다는 생각에 변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말을 마친 김종대 대장은 그제서야 명함을 내놓았다. 그 명함의 주인은 주식회사 티컴코리아(현 컴온미디어) 사장이었다. 목표를 세운지 꼭 4년만인 2000년 5월, 나는 실크로드를 자전거로 횡단할 수 있었다.탐험의 중요한 의미 가운데 하나는 자연에 도전하여 인간의 한계를 극복함으로써 사회나 국가에 희망을 비춰 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실크로드 자전거 횡단탐험에 관한 기사가 신문에 보도된 후 전국에서 탐험을 자청하는 전화와 팩스 그리고 편지 수십 통이 날아왔다. 편지는 국가대표 사이클 선수, 죽기 전에 실크로드를 꼭 가보고 싶다는 예순셋의 노인, 그리고 스물셋의 여대생 등등 많은 사람들이 보냈다. 수많은 신청자 가운데 심상현 대원과 이경완 대원을 선발했는데 이들은 탐험가적 소질을 갖추고 있었다.루마니아의 초원지대에 형성된 농촌 마을은 우리 나라 1960~1970년대 수준이었다. 실크로드가 찾아간 집시촌은 한국인 선교사의 활동지역으로 마차를 이용한 원통형 이동식 주택에서 생활하는 전통적인 유랑집시들이 살고 있는 곳이었다. 모두 다 웃는 얼굴로 한없이 밝아 보였다. 무엇이 그들을 웃게 만드는 것일까. 아마도 욕심이나 무엇에도 매이지 않고 살아가는 자유가 그들을 웃게 만드는 것 같았다. 집시촌을 떠난 선교사는 빈민촌의 할머니에게로 우리를 안내했다. 나는 속이 메스껍고 구토가 날 것 같은 상태를 억지로 견디는 반면, 선교사는 태연하게 할머니의 두 손을 꼭 잡고 기도했다. 그 모습이 마더 테레사를 연상케 했다. 성스러웠다. 자랑스러웠다. 한국인이 이 곳까지 와 지쳐 쓰러져 가는 사람들에게 희망의 등불이 되고 있었다.14. 사막의 망망대해 신기루15. 하늘을 향한 카라코람 하이웨이21. 또 다른 꿈을 향하여 나는 달린다이슬라마바드에 도착하자 파키스탄의 국영 방송인 P-TV에서 실크로드 자전거 탐험대를 취재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실크로드 자전거 탐험대가 자연보호와 그린 실크로드 실현을 위해 자전거로 이동하며, 실크로드로 이어지는 길목마다 모과나무를 심는 데에 초점을 맞추어 촬영이 이루어졌다. 파키스탄 국회의사당에서 한국대사관까지 이동하자 대사관 앞에서 교민과 파키스탄 전통 악극단이 환영 팡파르를 울려주었다. 다음 날 히말라야 K2봉 원정대와 조우했다. 탐험이나 등반을 하는 사람은 진심으로 서로를 잘 알고 이해한다. '20세기 최후의 불가사의'라는 카라코람 하이웨이가 시작되는 길이 끝없이 이어지는 산과 절벽으로 연결되고 있었다.험준한 산 중턱으로 연결된 길은 신비롭기만 하다. 계곡 사이로 흐르는 인더스 강은 깊이를 알 수 없을 정도이고, 깎아지른 절벽은 볼 때마다 아찔하다. "탕!" 짧은 총성과 함께 총을 든 대여섯 명의 청년들이 앞을 가로막았다. 영문도 모른 채 그들을 따라 건물 앞에 다다랐다. 가운데 앉은 족장이 보좌관으로 보이는 사람을 통해 물었다. "당신들이 이곳에 온 목적이 무엇인가?" 직결재판 같은 분위기였다. 나는 실크로드 자전거 탐험에 대한 간략한 설명과 함께 지도가 그려진 탐험대의 리플릿을 건넸다. 이윽고 족장이 주위 사람들에게 말했다. "여기 손님에게 우리 음식을 대접하라." 명령이 떨어지자 족장을 소개했다. "알라마 이크발 족장님이십니다."
족장은 민족의 미래를 위해서, 그리고 '문맹퇴치'를 위해서 교육의 중요성을 실천하고 있었다. 개교한지 2년 된 학교에는 학생들이 한창 수업 중이었다. 가난하나 초롱초롱한 눈빛의 학생들을 보자 그냥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탐험자금이 부족할 지도 모르는 상황이지만 우리는 약간의 성금을 내놓았다. "얼마 되지 않습니다. 어려운 학생들에게 연필과 노트를 사 주십시오. 그리고 이것은 우리 탐험대의 티셔츠인데 학생들에게 나눠 주도록 하십시오." 뜻밖의 선물을 받은 칸 교장은 약간 당황한 듯 했지만 이내 "모든 학생들이 더 먼 세상을 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5분 후쯤 나타난 칸 교장은 백지 한 장을 내밀었다. "우리는 당신들을 영원히 기억할 겁니다." 이름하여 감사장이었다. 빛나는 감사패며 국가가 주는 훈장을 받아보기도 했지만 이처럼 따뜻한 체온이 묻어나는 감사장은 처음이었다.카라코람산맥은 동쪽으로 히말라야산맥과 서쪽으로 힌두쿠시산맥이 이어지는 지구상 최대의 산맥군을 형성하고 있다. 카라코람 하이웨이의 위는 빙하로 덮인 깎아지른 산봉우리, 아래는 잿빛 인더스강이 흐르고 있는 아찔한 낭떠러지로 오른편을 보니 히말라야 고봉들이 구름 사이로 봉우리를 내밀다 사라지곤 한다. 8,125m인 낭가파르바트산의 만년설이 또렷하다. 고도를 높이는 부분에서 심각하게 봉착하는 문제는 고산병이다. 고산병은 강행과 후퇴의 기로에 서게 한다. 여기에서 탐험에 성공하느냐, 돌아오지 못할 길로 가느냐의 여부가 나뉘어지게 된다. 이 고산병을 자칫 잘못 판단하게 되면 대원들을 잃을 수도 있다.
호텔에서 의사를 불렀다. 이상훈 AD를 진찰한 의사는 고소증이 없는 것은 아니나 걱정할 것은 없다며 주사와 약을 처방해 주었다. 밤이 되자 심해진 환자의 증세를 살폈다. 호흡곤란 장애는 없었다. 대원들을 비상대기시키고 철수를 일단 유보했다. 이튿날 이상훈 AD는 이렇게 적었다. '양손 근육이 뭉치면서 마비된 것처럼 돌아갈 때 나보다 더 놀라며 걱정하는 우리 형제들. 내가 잘 믿지도 않는 하나님께 내 손을 꼭 잡고 기도드리며 눈물을 흘리던 대장님. 영원히 잊지 못할거다.'
탐험 94일 째, 쿤자랍패스로 향했다. 까마득한 오르막길에서 있는 힘을 다해 페달을 밟아 보지만 기것해야 뒤로 밀려나지 않을 뿐이다. 그래도 올라가려면 페달 밟기를 멈출 수가 없다. 중요한 것은 해발고도가 높은 곳을 화생방지역처럼 신속하게 통과해야만 하는 것이다. 1시간을 가도 도착하지 못했다. 대원들의 얼굴 표정은 사찰을 지키는 사천왕만큼 일그러져 있다. 마침내 오후 3시 30분, 실크로드 자전거 탐험대는 쿤자랍패스의 정상에 다다랐다. 그 곳에는 'GOOD BYE', 'ZERO POINT'라고 쓴 팻말이 서 있었다. 국경을 넘어 2km 정도에 이르자 빨간 중국 국기가 눈에 들어온다. 이제 그 옛날 캐러밴이 해골을 이정표 삼아 지나갔다는 타클라마칸사막으로 간다.살아돌아올 수 없다는 광활한 사막은 준비하지 않은 자에게 죽음이 찾아올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도가도 오아시스를 볼 수 없었다. 천산산맥의 천지로 들어섰을 때 흐리던 날씨가 드디어 눈발을 흩날렸다. 그 곳에서 말을 탄 청년을 만났는데 이름은 하단이고, 카자흐족이라 하였다. 하단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