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다른 꿈을 향하여 나는 달린다
최종열 지음 | 청홍
1. 출 발'IMF 태풍'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큰 파장을 일으켰다. 기업 도산, 대량 실업자 양산은 물론이고 경제적인 무기력으로 가정이 파괴되는 집들이 속출하면서 부랑자가 늘어났다. 불황의 끝이 보이지 않자 삶을 포기하는 사람들이 도처에서 생겨났다. 국가적인 환란 가운데 탐험가로서 할 일이 무엇인가 곰곰이 생각해 봤다. 바로 이것, '나는 실크로드를 간다.'는 것이었다. 그린 실크로드 실현을 위한 탐험은 나의 신념이고, 고난을 극복하고 역경을 헤쳐 나가는 본보기를 세워서 기죽어 있는 국민에게 기운을 넣어주자! '국민에게 희망을 주는 일', 이것이 탐험가인 내가 할 수 있는 몫이라고 생각했다.
로마를 출발하여 오스트리아, 동구권의 초원지대, 동서양이 만나는 터키, 이란, 파키스탄을 거쳐 세계의 지붕인 카라코람 하이웨이를 넘어 실크로드의 시발점이며 종착점인 중국의 장안(현 서안)까지, 그리고 새천년을 맞이하면서 장안에서 다시 한반도까지 연결되는 실크로드를 개척하는 루트를 세워 '뉴밀레니엄 실크로드'로 명명하고 세계에 알리는데 그 의미를 찾고자 했다.
탐험대가 출발하기에 앞서 무엇보다도 힘들고 어려운 일은 막대한 탐험자금을 조성하는 일이다. 제천시와 충청북도가 탐험자금 중 1/3을 지원하기로 하고 나머지 2/3의 탐험자금을 조성하는 일만 남았다. 2년 전의 일이다. 어린이 도보 탐험대 대장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김종대 대장은 방학을 이용하여 어린이 도보탐험을 마치고 나에게 탐험에 관한 강연을 요청했다. 나는 북극과 사하라 사막의 자료를 가지고 도보탐험대를 대상으로 강연했다. 그들은 반짝반짝 빛나는 눈동자로 강연이 끝날 때까지 아주 진지한 모습이었다. 여러 강연을 다녀 봤지만 이런 진지한 청중 또한 처음이었다.
별 뜻 없이 안부전화를 걸은 내게 김종대 대장이 말했다. "나머지 자금은 제가 마련합니다. 언제 자금이 필요한지 미리 알려주십시오." 나는 무어라 말을 해야 할지 적당한 말을 찾지 못했다. "돈이 많아서 지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린이들에게 도전정신을 심어주어야 한다는 생각에 변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말을 마친 김종대 대장은 그제서야 명함을 내놓았다. 그 명함의 주인은 주식회사 티컴코리아(현 컴온미디어) 사장이었다. 목표를 세운지 꼭 4년만인 2000년 5월, 나는 실크로드를 자전거로 횡단할 수 있었다.
2. 김포공항탐험의 중요한 의미 가운데 하나는 자연에 도전하여 인간의 한계를 극복함으로써 사회나 국가에 희망을 비춰 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실크로드 자전거 횡단탐험에 관한 기사가 신문에 보도된 후 전국에서 탐험을 자청하는 전화와 팩스 그리고 편지 수십 통이 날아왔다. 편지는 국가대표 사이클 선수, 죽기 전에 실크로드를 꼭 가보고 싶다는 예순셋의 노인, 그리고 스물셋의 여대생 등등 많은 사람들이 보냈다. 수많은 신청자 가운데 심상현 대원과 이경완 대원을 선발했는데 이들은 탐험가적 소질을 갖추고 있었다.
3. 물위를 달리는 버스2000년 5월 26일 오전 10시, 북위 41도 89부, 동경 12도 49부에 위치한 실크로드의 종착지이면서 세계 문명의 통로인 로마의 콜로세움 경기장 앞에서 탐험대는 서울을 향해 출발했다. 라벤나에서 자전거로 10시간을 달려 베네치아에 도착했다. 저녁 7시, 게모나에 도착해 캠프장을 휙 둘러보고 돌아오니 대원들은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고 있으면서도 말없이 서로에게 미루고 있음이 분명해 보였다. 혼자서 조용히 궁리를 했다. '슬기를 갖자.' 그래서 행동으로 대원들을 감동시킬 수 있는 방법을 선택하기로 했다. 저녁을 먹은 후 탐험수칙을 정하였다.
4. 조국은 언제나 조국오스트리아 국경으로 가는 길은 알프스산맥의 장엄한 산들이 끝없이 이어져 있고, 이탈리아에서 오스트리아로 넘어가는 경계에는 팻말 하나 없다. 오후 1시 50분 케른텐의 린드 지역에 도착한 후 방송촬영을 위하여 잘츠부르크로 이동했다. 탐험대 숙소로 정한 통나무 산장에 도착하자 관광청의 한스 국장 부부와 볼프강 자치 산악구조대의 피터 대장과 그 대원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실크로드 자전거 탐험대는 로마에서 실크로드를 따라 16,600km를 자전거로 횡단 중이라는 비즈니스 코디네이터 정양순 씨의 설명에 산악구조대 피터 대장이 휘파람을 불면서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운다.
2000년 6월 6일 화요일(현충일), 자유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 수많은 젊은 영혼들. '그분들이 아니었으면 오늘의 내가 있을 수 있을까?' 생각해 본다. 우리의 후예들이 꿈을 잃지 않고 내일을 향해 꿈을 펼칠 수 있도록 탐험가로서 내 생의 모든 것을 걸겠다는 다짐을 갖는다. 오후 2시 산악구조대의 연습 훈련 중 볼프강 시의 시장을 소개받았다. 혼자 자전거를 타고 온 그를 우리 중 누구도 시장이라 생각지 못했다. 시장은 손을 내밀며 말했다. "위대한 분을 만나서 영광입니다." "별 말씀을…, 정말 아름다운 곳입니다." 특별한 행사를 제외하고는 주로 자전거를 타고 다닌다는 솔선수범하는 시장과 한스 국장이 지니고 있는 진정으로 자연과 자신의 고장을 사랑하는 태도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5. 세계 수반과 나란히빈에 도착하자 오스트리아 관광성 피터 부장이 마중을 나왔다. 피터의 환영식은 독특했다. 빈의 구시가지를 둘러싼 링을 한 바퀴 도는 것이 그의 환영식이었다. 이 도로를 따라서 돌면 빈의 명소들이 늘어서 있다. 국립 오페라극장과 합스부르크가의 저택, 호프부르크궁전, 1365년에 설립된 빈대학과 박물관, 도서관, 미술관들이 이어져 있다. "400년쯤 된 가게입니다." '볼프'라는 간판을 단 호이리게로 들어가면서 피터가 일러줬다. 햇포도주 시음을 마치고 사진을 찍었다. 느닷없는 사진촬영은 가게 한 벽면을 차지한 방명록 때문이었다. 수없이 많은 사진들 가운데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얼굴은 중국 국가주석 강택민이었다. 그 밖에도 미테랑 프랑스 대통령, 헐리우드 배우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잠시 후 가게 주인이 사진을 들고 나와서 "영원히, 건배. 실크로드 탐험대장 최종열"이라고 쓴 내 사인을 유심히 본 후 말했다. "훌륭한 분이니 대통령 옆에 걸어놓겠습니다."
6. 순백의 기도극한 상황이 닥쳤을 때 이를 극복하는 것은 정신력인데 그 정신력의 발로는 자발적인 의지이다. 타인의 강요에 의한 의지는 쉽게 무너진다. 강요에 의한 의지는 포기하고 싶은 순간적인 유혹은 뿌리칠 수 있겠지만 탐험하는 동안 연이어 따라오는 극한 상황을 극복하기에는 역부족이다. 사람의 정신력이란 피동적일 때보다 능동적일 때 더 강하다. 탐험할 때는 무엇보다 '포기의 유혹'이 쉴 사이 없이 괴롭힌다. 이를 뿌리치기 위해서는 강한 정신력으로 무장해야 한다.
헝가리에서의 첫 밤은 꼬르나의 캠프장에서 보냈다. 어제 한낮의 기온이 섭씨 40도를 육박했다. 날씨는 갈수록 더욱 더워지기 때문에 각자에게 인내를 필요로 하는 시간이다. 하루에 12시간씩 자전거에 앉아 있으면 살은 짓무르고 터져 나중엔 진물이 난다. 움직이다보면 눈에서는 번갯불이 번쩍인다. 케치케메트에 한화그룹이 세운 라면 공장인 한화식품에 연락이 닿아 회사 담당자는 탐험대를 공장으로 초청했다. 탐험대를 초청한 한화그룹의 김과장은 공장 근로자를 모아놓고 유창한 헝가리어로 우리를 소개했다. 공장 근로자들은 자신이 일하는 회사의 나라에서 온 탐험대라는 점에 큰 관심을 보였다. "최대장님, 저희가 라면을 준비했습니다. 가지고 갈 수 있을 만큼 가져가십시오." 넉살스런 웃음을 지으며 김과장이 말했다. "정말 자랑스럽고, 정말 반갑고, 정말 대단하십니다." 한국인 직원들과의 짧은 만남과 헤어짐이 아쉬웠다.
7. 웃음 파는 집시루마니아의 초원지대에 형성된 농촌 마을은 우리 나라 1960~1970년대 수준이었다. 실크로드가 찾아간 집시촌은 한국인 선교사의 활동지역으로 마차를 이용한 원통형 이동식 주택에서 생활하는 전통적인 유랑집시들이 살고 있는 곳이었다. 모두 다 웃는 얼굴로 한없이 밝아 보였다. 무엇이 그들을 웃게 만드는 것일까. 아마도 욕심이나 무엇에도 매이지 않고 살아가는 자유가 그들을 웃게 만드는 것 같았다. 집시촌을 떠난 선교사는 빈민촌의 할머니에게로 우리를 안내했다. 나는 속이 메스껍고 구토가 날 것 같은 상태를 억지로 견디는 반면, 선교사는 태연하게 할머니의 두 손을 꼭 잡고 기도했다. 그 모습이 마더 테레사를 연상케 했다. 성스러웠다. 자랑스러웠다. 한국인이 이 곳까지 와 지쳐 쓰러져 가는 사람들에게 희망의 등불이 되고 있었다.
8. 오르막은 길고 내리막은 짧다루마니아와 불가리아의 국경선인 다뉴브강을 건너 미하일로프그라드를 지나자 콤산이 가로막아 선다. 그 옆으로 이어지는 발칸산맥은 보는 것만으로도 주눅이 든다. 이제까지 지나온 길과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오르막에서 힘을 너무 주다보니 허리가 끊어질 듯 했고 다리에서는 자꾸 쥐가 났다. 숨은 목까지 차오르는 상태로 오르막만 1시간 30분 이상을 달려왔는데도 정상은 아직도 보이지 않는다. 구불구불한 오르막과 내리막의 반복은 소피아까지 이어졌다. 소피아에 도착하여 대사관에 전화를 한 오세견 지원 대원이 헐레벌떡 달려왔다. "윤 PD가 차를 도난당했답니다."
참사관이 나를 안심시키려 했지만 불안한 마음은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기다림은 지루하다기보다 고통이었다. 한 순간 "이것이 아니다."라는 생각과 함께 마음을 굳혔다. 탐험은 시련의 연속이다. 목숨이 붙어있는 한 탐험 중단은 있을 수 없었다. 차를 찾든 못 찾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목표는 탐험이다! 생각을 정리한 다음 탐험에 필요한 장비와 식량을 재정비하고 출발 준비를 다시 철저히 점검하도록 지시했다. 탐험 32일 째인 6월 21일 오전 7시 소피아에 SBS의 윤 PD만 남겨놓고 탐험대는 터키를 향해 떠났다. 그 와중에서 불가리아 경찰청에서 도난 당한 차를 찾았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러나 차에 실려있던 방송 테이프와 촬영장비 일부는 찾지 못하고 포기해야 했다.
북위 40도 77부, 동경 29도 91부에 위치한 이즈미트의 야영지를 출발하여 터키 605번 국도를 따라 흑해 쪽으로 향했다. 이번엔 더위가 속을 썩였고 반복되는 고갯길은 우리를 더욱 지치게 했다. 오후 1시가 지나 대형 트럭이 지나갈 때면 태양에 녹아 있던 아스팔트가 여기저기로 튀어 올라 자전거 바퀴에 들러붙는 바람에 페달을 밟는 데 무척 힘이 든다. "상현아, 아스팔트가 튀는데 도대체 몇 도나 되니?" "47도요." 군대는 기온이 45도만 넘으면 쉬지만 탐험은 자연과의 싸움이므로 50도든 100도든 가야 했다.
터키의 전통풍습에는 결혼식 직전 신랑 목욕시키기가 있다. 온천의 야외탕으로 가자 빨간 티셔츠를 입은 한 청년을 신랑의 친구들이 들어서 그대로 탕 속에 넣어 버렸다. 온천탕에 빠진 신랑이 허우적거리며 탕 밖으로 나오려 할 때 내가 손을 내미는 순간 누군가 뒤에서 나를 탕 속으로 떠밀었다. 이번에는 신랑 친구들끼리 밀고 당기면서 하나 둘씩 탕 속으로 빠졌다. 결혼식을 예식장에서 할 때도 있지만 대개는 '목욕시키기' 의식을 끝낸 후 신랑은 예복을 갖춰 입고 악사들을 앞세운 채 온 동네를 돌아다니면서 춤을 추기도 한다고 했다.
9. 동료 불화내일의 출발을 위해 일찍 일정을 마무리하고 잠자리에 들도록 지시한 후 일기를 정리했다. 30분쯤 흘렀을까, 밖이 소란스러웠다. 오세견 대원과 이상훈 AD가 씩씩거리면서 서로의 멱살을 잡았고 다른 대원들은 두 사람을 말리고 있었다. 오대원과 이상훈은는 동갑내기 졸업반으로 오대원은 사진을 전공했고, 이상훈은 방송국 AD다. 두 사람의 말을 다 듣고 난 나는 한참 침묵을 지키다 극단의 처방을 내렸다. "오세견과 이상훈을 내일 한국으로 귀환조치 시켜. 지금까지 찍은 필름과 테이프 회수하고…, 아니, 불살라 버려." 얼마나 속이 상했는지 목소리가 다 떨렸다.
두 사람 중 누가 옳고 그른지는 중요하지 않다. 탐험을 하면서 자신의 밥그릇만 챙기는 이기적인 행위는 결국 탐험대 전체를 무너뜨리게 된다. 위급한 상황이 닥치면 동료를 버려 둔 채 가고도 남을 사람들이 아닌가. 서로가 상처를 받고 곪아터져도 참고 이겨내고야 말겠다는 마음자세가 없으면 최악의 상황이 도래할 때 양심마저 던져버릴 게 자명하다. 풀리지 않는 화 때문에 잠도 오지 않았다. 시계를 보니 새벽 5시가 넘었다.
"대장님" 오대원의 목소리였다. "잘못했습니다." 이상훈 AD였다. 이번에는 두 사람이 동시에 나를 불렀다. "…" 한동안 침묵이 흐른 다음 나는 텐트의 지퍼를 열었다. 두 사람이 텐트 앞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아직까지도 화가 가라앉지 앉아 텐트 문을 닫아버렸다. 30분이 넘었을 때 회의를 준비시켰다. "그럼 저만 귀환조치 시키십시오." 오대원이 나섰다. "아닙니다. 저도 같이 가겠습니다." 이상훈의 체념한 듯한 목소리였다. "이제 됐다. 그만 똑바로 앉아라." 회의 내내 두 사람은 무릎을 꿇고 있었고, "지금의 그 생각들이 깨지는 날이 바로 탐험대가 해체되는 날이다. 명심해라."는 나의 말에 대원들은 "예"란 대답을 함께 했다.
10. 살인 더위승용차 한 대가 먼지를 일으키면서 달려왔다. 운전석 옆자리의 젊은이가 무어라 말을 하는데 도통 알 수가 없다. 산등성이를 돌아 그늘진 곳에 이르자 앞서 지나간 차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를 따라 차로 가보니 수박을 잔뜩 잘라놓고 먹으라 권한다. "인샬라(신의 뜻에 따라)." "이이, 인샬라. 고맙소." 얼마나 게걸스럽게 먹었는지 민망할 정도였다. "저팬?" "노, 코리아." 어디로 가는지 묻는 것 같았다. 세계 지도를 펴놓고 설명해 주었다. "스타트, 로마, 오스트리아, 헝가리, 루마니아, 불가리아, 터키, 이란, 파키스탄, 차이나, 코렐리." "촉 규젤(대단합니다)." 운전석에 앉아 있던 터키인이 자전거를 가리킨다. "올 사이클." 그러자 웃으면서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다. 인종도 다른 이국인에게 따뜻하게 대해 주어 너무 감사하다고 몇 번씩 인사를 한 후 자전거를 탔다. 그러자 이들은 어디서 가져왔는지 빵을 잔뜩 안겨 주며 우리가 떠날 때까지 바라보고 있었다.
오후 2시를 넘기자 기온이 최고로 올라 섭씨 49도를 가리켰다. 이경완 대원이 날달걀을 아스팔트위에 던졌다. "흰자는 반숙이고, 노른자는 바로 완숙입니다." 들이마시는 공기는 폐부를 익게 할만큼 뜨거웠고 아스팔트의 열기는 온몸을 덮었다. 마치 헤어드라이어를 입에 물고 달궈진 프라이팬 위를 가는 느낌이었다. 자전거를 탄 일본인 여행자를 만났다. 이름은 유즈르라 했다. 점심은 국수를 말아서 유즈르와 함께 먹었다. 기념으로 하얀 티셔츠를 하나 주니 오랜 여행으로 옷도 궁색해졌다며 너무나 좋아한다.
11. 아주 특별한 환영식이란의 국경 도시 바자르간에서는 야영할 만한 마땅한 장소를 구하지 못해 호텔에 투숙했다. 시설은 그야말로 형편 없었다. 해가 지고 어두워지자 우리 나라 모기보다 커 보이는 모기가 극성을 부렸다. 세상에 나서 이렇게 많은 모기는 처음이다. 몸을 움직이지 않으면 새까맣게 달라붙어 피를 빨아먹는다. 얼마나 빨아먹었는지 제 몸도 못 가눌 정도다. 합하면 마흔 군데 이상 물려 가려워서 미칠 지경이지만 손이 부족해서 다 긁지도 못한다. 오후 2시쯤 본격적인 사막길로 들어섰다. 노란색의 모래바람, 그 위에 우박을 동반한 검은색의 비구름이 몰려오자 지옥으로 들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그 후 새끼 손톱만큼한 우박이 내리치자 몹시 아팠다. "이게 우리 탐험대를 위한 이란식의 환영인가?" 추워서 덜덜 떨리는 입으로 심상현 대원이 말한다.
12. 차도르는 언제쯤 벗을까이란 여성의 차도르 착용은 어떤 것보다도 엄격하다. 차도르를 착용하지 않은 여성에게는 74대의 태형이 가해진다고 한다. 테헤란 북서쪽 양잠 농가를 찾았다. 버디쉬 할아버지는 집안으로 들어가 직접 생산한 '실크 실뭉치'를 가지고 나와 내 목에 걸어 주면서 말했다. "땀날 때 닦아. 그리고 탐험에 성공해." 고마움을 표시한 나는 실크 실뭉치를 만져봤다. 이 비단이 만들어낸 길이 지금 우리가 가고 있는 길인 것처럼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