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사이에 삶의 길이 있고
강혜원 지음 | 사계절
최현배(1894∼1970): 외솔이라는 호처럼 평생 꼿꼿한 자세로 한글 연구에 힘을 기울였다. 경남 울산에서 태어나 일본에서 공부했고, 연희대학 교수를 지냈다. 그는 철저한 한글 전 용을 주장하여 우리말에서 한자, 일본어를 추방하고, 우리말로 풀어 쓰는 운동을 전개하 였다. 비행기를 '날틀', 동사를 '움직씨', 학교를 '배움집' 등으로 하여 한자어를 우리말 로 풀어 쓰자는 주장은 사람들의 호응을 받기도 했지만 비현실적이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 다. 그러나 그의 우리말 사랑의 정신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그가 쓴 책으로 『우리 말 본』『나라 사랑의 길』『중등 말본』 등이 있다.권정생(1937∼ ): 1937년 먹고 살기 위해 도쿄 빈민가인 시부야 혼마치 동네로 이주했던 부모님 아래 태어나 어린 시절을 그 곳에서 보냈다. 해방 뒤 돌아와 가난과 질병에 시달 리며 살았다. 1969년 『강아지 똥』이 기독교 아동문학상에 당선되고, 1973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무명저고리와 엄마』가 당선되었다. 여러 편의 동화와 소설을 썼는데 『몽 실언니』『점득이네』『초가집이 있던 마을』『도노리 예배당 종지기 아저씨』 등의 책을 펴냈다. 그의 작품에는 6·25의 체험, 가난의 체험 등 자신의 체험이 짙게 배어 있다.1986년 겨울의 어느 날 저녁, 나는 이상한 예감에 잡혀 누워 있었다. 어쩌면 이대로 내가 영원히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안개처럼 몰려오고 있었다. 그 때 멀리서 아주 멀리서 바라 치는 소리가 들려 오고 있었다. 그 소리는 점점 더 가까이 와 어느덧 내 방 밑(나는 당시 네팔 카투만두의 어느 여인숙 2층 방에 있었다)을 막 지나가고 있었다. 나는 무엇에 끌려 일어나 창문을 열었다. 10여 명의 사내들이 횃불잡이를 선두로 무엇인가를 메고 바라를 치며 가고 있었다. 나는 대강 옷을 챙겨 입고 밖으로 나왔다. 바라 소리는 이미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리고 그 소리의 여운만이 막 골목 끝을 지나가고 있었다. 나는 바라 소리의 뒤를 따라 요술 나라의 미로 같은 카투만두의 골목길을 갔다.
바라의 행렬은 이윽고 강가에 이르러 조그만 장작더미를 만들고 있었다. 그들이 메고 온 것은 갓 죽은 남자의 시체였다. 시체는 곧 나지막한 장작더미 위에 얹혀 불에 타 들어가기 시작했다. 나는 오래 전부터 시체가 불에 타는 것을 한 번 보고 싶었다. 그러나 그걸 처음부터 지켜본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그런데 오늘 비로소 그 기회를 얻은 것이다. 시체에 불이 붙었을 때가 밤 11시경이었다. 불은 삽시간에 시체 전체에 번지고, 시체는 꼭 불고기처럼 지글거리며 타 들어가기 시작했다. 곧이어 두 팔이 떨어지고, 두 다리가 떨어져 나가면서 몸의 기름이 장작 밑으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여기 한 인간의 일생이, 그가 일생 동안 너무나 소중히 아끼던 것들이 지금 모두 불에 타 버리고 있는 것이다. 사방은 어둠으로 겹겹이 싸였고, 오직 시체의 주변만이 타는 불길로 하여 찬란하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이제 시체 전체는 모두 불에 타 버리고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장작도 다 타 버리고, 치솟던 불길도 시들어 버리고, 한 인간의 모든 흔적도 없어져 버려다. 너무나 허무하게 사라져 버린 한 인간의 모습 앞에서 나는 말할 수 없는 허탈감을 느끼며 서 있었다. 그 때가 새벽 1시쯤. 불 주위에 있던 몇 명의 남자들은 다리 건너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리고, 두 명의 노인만이 쭈그리고 앉아 시들어 가는 장작불을 헤치고 있었다. 노인이 헤치는 장작불 속에서 내 주먹만한 살덩이가 아직 타지 않고 나왔다. 노인은 이 살 덩어리를 가능하면 빨리 타도록 연방 들쑤셔 대고 있었다. 그러나 이 살 덩어리가 다 타는 데에는 그로부터 무려 두 시간이 더 소모되었다. 나는 너무 이상해서 노인에게 물어 보았다.
"그 살덩이는 무엇인가요?" 노인은 말했다. "심장이랍니다." 심장? 나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몇 천 도의 불 속에서 뼈마저 다 녹아 버렸는데 한갓 조그만 살 덩어리에 불과한 심장이 어떻게 타지 않는단 말인가? 나는 다시 물었다. "모든 사람들의 심장이 다 저렇게 늦게까지 타나요?" "그렇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비로소 내가 무엇을 찾아 이토록 방황하고 있는가를 알게 되었다. 그렇다! 나는 심장을 찾기 위하여 이토록 헤매었던 것이다.
우리는 철이 들면서부터 머리만을 강요당해 왔다. 학교의 교육이라는 게 머리의 장난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가슴은 위험하다.", "심장은 위험하다.", "그대 일생을 이 위험한 불장난에 던지지 말라." 우리는 이렇게 배워 왔고, 또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나는 이제 알았다. 육체가, 머리가 흔적도 없이 다 타 없어지고 난 다음에도 두 시간이나 더 심장은, 가슴은 타지 않는가 하는 것을. 그렇다. 가슴으로의 길이 설령 파멸의 길이라 해도 그것은 진정한 삶의 길이다. 그 파멸은 누구의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이 선택한 것이기 때문이다.1937년 9월에 나는 일본 도쿄 혼마치의 헌 옷 장수 집 뒷방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그런데 함께 동무했던 아이들과 학교에 들어가지 못해 얼마나 실망을 했는지 모른다. 그래서 늘 외톨이로 골목길에서 지내야 했다. 삯바느질을 하시던 어머니는 저녁때면 5전짜리 동전을 주면서 심부름을 시켰다. 이 때 나는 따뜻한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키도 작고 손도 조그만 히데코 누나는 항상 말이 없고 외로워 보였다. 함께 극장에 가면 고구마 튀김을 수건에다 겹겹이 싸서 식지 않도록 품 속에 넣어 뒀다가 영화가 중간쯤 진행될 때 꺼내어 내 손을 더듬어 쥐어 주던 그 따뜻한 촉감은 평생을 잊을 수 없다.
아무렇게나 흘러들어와 모여 사는 빈민가 사람들의 가족 구성도 정상적이지 않았다. 골목길 끄트머리 노리코네 아버지는 조선 사람, 어머니는 일본 여자, 노리코는 고아원에서 데려온 딸이었다. 건너편 집의 미치코는 주워다 키운 아이고, 동생 기미코는 조선 아버지와 일본 어머니 사이에 태어난 혼혈아였고, 우리 앞집 일본인 부부도 양딸을 데리고 살고 있었다. 한 집 건너 경순이는 관동지진 때 부모를 잃고 거기서 식모살이처럼 얹혀 살고 있었다. 경순이는 가끔 얻어맞아 퉁퉁 부어 오른 얼굴로 우리 집으로 쫓겨 왔다. 어머니는 어루만져 달래주고, 밥을 먹이고, 재워줬다. 소설 『몽실언니』는 혼마치에 살았던 히데코 누나이기도 하고, 경순이 누나이기도 하고, 그 외의 가엾은 아이들의 모습이다.
1946년 해방 이듬해, 우리는 조선으로 돌아왔다. 1946년 4월은 보릿고개가 심했다. 거듭된 흉년으로 웬만한 집 모두가 쑥과 송피로 죽을 끓여 먹고 있었다. 그것도 하루 세끼 먹는 집은 드물었다. 당장 거처할 집이 없는 우리 식구는 뿔뿔이 흩어졌다. 어머니와 동생과 나는 외가가 있는 청성으로 갔고 아버지와 누나는 안동으로 갔다. 함께 모인 것은 1947년 12월이었다.
나는 초등학교를 네 군데 다녔다. 도쿄의 혼마치에서 8개월, 군마켄에서 8개월, 조선에 와서 청송에서 5개월, 그리고 나머지는 안동에서 졸업했다. 그것도 잇따라 다닌 것이 아니라 몇 달씩 몇 년씩 쉬었다가 다니는 바람에 1953년 3월에야 겨우 졸업을 했다. 아버지가 하시는 소작 농사만으로는 월사금을 못 내어 어머니가 행상을 하셨다. 한 달에 여섯 번식 가시는데 장날 갔다가 다음 장날 돌아왔다. 그러니 자연히 밥 짓는 일은 내가 맡아야 했다. 아침밥을 지어 먹고 설거지하고 학교 가자면 바쁘게 달려가야 했다. 그 때 열 살 때부터 밥을 짓는 것을 배웠으니 훗날 혼자서 살아가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처음 시작한 것이 나무 장수였고, 다음이 고구마 장수, 담배 장수, 그리고 점원 노릇.
결핵을 앓은 것은 열아홉 살 때부터였다. 처음엔 숨이 차고 몹시 피곤했지만 그런 대로 두 해를 더 버티다가 결국 1957년, 고향으로 돌아와 버렸다. 마을에는 객지에 갔다가 결핵으로 돌아온 아이들이 나말고도 10여 명이나 되었다. 식모살이 갔던 성애와 철도 기관사 조수로 일하던 태호, 산판에서 일하던 청수, 기덕이, 옥이, 성란이. 우리는 이따금 나오는 항생제를 배급받기 위해 읍내 보건소를 찾아갔다. 그러나 허탕치고 돌아오는 날이 많았다. 하나 둘씩 차례로 죽어갔다. 다 죽고 마지막 나 혼자만 남았다. 나는 늑막염과 폐결핵에서 신장 결핵, 방광 결핵으로 온몸이 망가져 갔다. 어머니는 내가 아니었으면 좀더 오래 사셨을 텐데 자식 병구완하시느라 일찍 돌아가셨다.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자 나는 세상이 싫어졌다. 그래서 이 무렵 나는 동생을 결혼시켜야 하니 어디 좀 나갔다 오라는 아버지의 제안을 선뜻 받아들여 무작정 집을 나왔다. 1965년 4월에 나갔다가 8월에 돌아왔다. 나는 대구에서 김천으로, 상주로, 점촌, 문경, 예촌으로 3개월을 떠돌아 다녔다. 인생의 가장 밑바닥 생활인 걸식을 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병 한 가지만 더 얻었다. 그 때부터 앓기 시작한 부고환 결핵으로 온몸이 불덩어리처럼 열이 올랐다. 산길에 쓰러져 누워 있다보면 누군가가 지나다 보고 간첩으로 오해를 하기도 했다. 그 사이 아버지도 돌아가셨다.
이 곳 교회 문간방에 들어가 살게 된 것은 1967년이었다. 전에 살던 집은 소작하던 농막이어서 비워 주어야 했기 때문이다. 서향으로 지어진 예배당 부속 건물의 토담집은 겨울엔 춥고 여름엔 더웠다. 외풍이 심해 겨울엔 귀에 동상이 걸렸다가 봄이 되면 낫곤 했다. 그래도 그 조그만 방은 글을 쓸 수 있고 아이들과 자주 만날 수 있는 장소였다. 여름에 소나기가 쏟아지면 창호지 문에 빗발이 쳐서 구멍이 뚫리고 개구리들이 그 구멍으로 뛰어들어와 꽥꽥 울었다. 겨울이면 아랫목에 생쥐들이 와서 이불 속에 들어와 잤다. 자다보면 발가락을 깨물기도 하고 옷 속으로 비집고 겨드랑이까지 파고 들어오기도 했다. 처음 몇 번은 놀라기도 하고 귀찮기도 했지만 지내다 보니 그것들과 정이 들어 버려 아예 발치에다 먹을 것을 놓아 두고 기다렸다. 개구리든 생쥐든 메뚜기든 굼벵이든 같은 햇빛 아래 같은 공기와 물을 마시며 고통도 슬픔도 겪으면서 살다 죽는 게 아닌가? 나는 그래서 황금덩이보다 강아지 똥이 더 귀한 것을 알았고 외롭지 않게 되었다.
예배당 문간방에서 16년 살다가 지금은 이 곳 산 밑에 그 문간방과 비슷한 흙담집에서 산다. 사는 거야 어디서 살건 그것이 문제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사는가가 더 중요한 것이 아닐까? 식민지와 분단과 전쟁과 굶주림, 그 속에서도 과연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을까? 앞서 간다는 선진국은 한층 더하다. 그들은 침략과 약탈과 파괴와 살인을 한 대가로 얻은 풍요를 누리는, 천사처럼 보이는 악마일 따름이다. 우리 인간이 인간다워지기 위해서는 선진과 후진이 없어야 한다. 물론 우리 나라의 경우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분단도 하루 속히 무너뜨려야 한다. 경제적 후진만으로 부끄러워할 이유가 없다.
기름진 고깃국을 먹은 뱃속과 보리밥 먹은 뱃속의 차이로 인간의 위아래가 구분지어지는 것 자체가 부끄러운 것이다. 약탈과 살인으로 살찐 육체보다 성실하게 거둔 곡식으로 깨끗하게 살아가는 정신이야말로 참다운 인간의 길이 아닐까? 누가 이렇게 물었다. "장가는 못 가 봤는가요?" "예, 못 가 봤습니다." "그럼, 연애도 못 해 봤나요?" "연애는 수없이 했지요. 할아버지, 할머니하고도, 아이들하고도, 강아지하고도, 생쥐하고도, 개구리하고도, 개똥하고도…."어느새 불어오는 바람에도 노랗게 물든 은행잎과 붉은 물감 든 아이들 손바닥 같은 단풍잎이 생각나는 9월이다. 그 동안도 별일 없이 잘 지냈겠지? 개학을 하고도 벌써 몇 주 지났는데 어떨지 모르겠다. 지금쯤은 방학 동안의 풀어진 마음에서 다시 팍팍한 학교의 일상으로 되돌아오게 되었니, 아니면 여전히 방학 동안의 여유 있는 마음을 지니고 있는지? 하긴 아무리 개학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너무 갑작스럽게 꽉 짜인 일상으로 돌아오게 되면 심리적인 충격이 그대로 남아 있을 게다. 차근차근 적응할 수밖에 없겠지.
오늘은 개학하고 처음 너희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날이다. 그래서 나는 지난 일주일 동안 무슨 얘기를 들려줄까 내내 고민을 했단다. 그러다가 우연히 책장 구석에 처박아 두었던 지난 신문을 들춰 보게 되었다. 오래된 것이니까 신문이 아니라 구문이겠지만. 그 기사 중에 이런 제목이 눈에 띄더구나. '주부 가사 노동 가치 월 88만 8천 원.' 그 기사를 보다가 나는 문득 지난 주 영호가 내게 무심코 내던졌던 말 한 마디가 생각났다. 음식 만들기보다 먹은 음식 치우기가 훨씬 귀찮은 일이지만 더러운 것을 치운다는 의미에서도 설거지는 요리만큼 귀한 일이라는 얘기를 하자, 영호는 "에이, 그런 건 여자들이나 하는 거지 뭐."하고 시큰둥했다.
그래서 오늘은 남성의 여성 차별에 대하여 얘기해 보려고 한다. 우선 영호의 말대로 과연 밥하고 설거지하고 빨래하는 일은 여성들만이 해야 하는 일일까? 만약 그렇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는 그야말로 남자와 여자를 차별하는 가장 일반적인 차별성에 길들여져 있다고 할 수 있다. 사실 우리 사회는 뿌리 깊은 남아 선호사상에 의하여(굳이 사상축에 들기도 힘들겠지만) 어려서부터 사내아이는 자기 우월성으로 무장되도록 길들여져 왔단다. 남학생들을 보면 때때로 그런 것이 무의식 속에 얼마나 깊게 자리잡고 있는지 느낄 때가 많다. 지난 번 영호가 그렇게 말한 것도 무의식 속에 집안일은 여자들이나 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이런 남녀차별을 알게 모르게 교육받게 된다. 아마 너희들도 그런 얘기를 들어 본 적이 있을 거야. 여동생이나 다른 집 여자애들한테 "아이구, 그놈, 고추라도 하나 달고 나왔으면 얼마나 좋을꼬."하는, 또 남자애들한테는 "그놈 참 장군감이다."하는 얘기도 자주 들었을 거다. 이런 말 속에 담겨 있는 의미를 분석해 보면 이렇다. 여자는 여자로 태어난 것 자체가 주위에 실망을 주는 것이며, 남자는 남자로 태어난 것이 곧 자랑스러움의 상징이 된다는.한번 곰곰이 생각해 보렴. 너희들 주위에 얼마나 많은 남녀차별이 존재하고 있는지를. 교과서를 들춰 봐도 이러한 성 차별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사회생활을 하는 몫은 거의가 남자들 차지로 규정되고 있으며, 집안일, 남편과 가족들을 위해 뜨개질을 하거나 시장 보는 일은 여자들의 몫으로 남겨져 있다. 이런 교육 속에서 자라 온 너희들은 "그런 일은 여자나 하는 거지요."하는 말을 하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하다는 생각이 든다.
어느 여학교 학생들에게 장래희망을 조사해 본 결과가 있는데 정말 놀라운 것은 그 중 상당수의 아이들이 현모양처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글쎄, 어진 어머니와 좋은 아내가 나쁠거야 없겠지만 현모양처라는 말 자체가 가지는 남성 중심의 사고에 여성 자신들까지 길들여진 것이라는 느낌을 떨쳐 버릴 수가 없다. 삼종지도(三從之道)라는 여성을 남성에게 종속시키는 말까지 교과서에 버젓이 나와 있을 정도니 여학생들이 현모양처를 장래희망으로 삼는 것도 무리는 아니겠지.
어려서는 곱고 깜찍하고 상냥하고 새침하고 다소곳하다는 말로 길들여진 여성이 점점 자라면서 삼종지도와 현모양처를 주입당하고 사회에 나가서는 고분고분한 여자, 사랑받는 아내라는 말에 취해 스스로를 잊어버린 채 결국은 남성에게 종속이 되어 버린다면 어떨까? 또 어려서는 씩씩하고 용감하고 당당하고 패기에 찬 소년으로 대접받으며 자라서 직장에 나가서는 성공과 출세의 비결을 가르쳐 주는 책을 열심히 읽으며 살아가는 남자들이 이 사회에 가득하다면 그 결과는 어떻게 될까?
겉으로 보기에는 남성들의 천국이 될 것 같지. 그렇지만 결코 남성들의 천국이 될 수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