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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이 만난 링컨

노무현 지음 | 학고재
링컨은 노예해방에 관해서는 언제나 온건하고 현실적인 입장을 취했다. 그러다 보니 남북전쟁 발발 이후 2년 동안 연합군이 패전하면서 링컨의 노예해방 정책이 우유부단하다고 비난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각지의 과격한 노예 해방론자들은 북부에 잔존하는 노예를 연방군에 즉각 입대시키고 도망간 흑인 노예에 대해서는 자유를 주는 포고령을 내릴 것을 강력히 요구했다. 링컨은 접경 주의 반발을 사지 않으면서 노예를 해방하는 방법을 깊이 모색했다. 그 결과 정부가 돈을 주고 노예를 사서 그들을 해방시키는 안을 생각했다. 링컨은 연방정부가 노예 소유주에게 보상금을 지불하고 난 후에 노예에게 자유를 주고 나아가 그들을 특정 지역으로 이주시킨다는 방안을 마련했다. 이 방안에 대해서는 강경 노예 해방론자들도 적극 찬성하였다.



그러나 보상방식의 노예해방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많은 난관을 극복해야만 했다. 먼저 즉각적인 노예해방을 주장하는 강경파의 도전에 직면했다. 특히 연방군 사령관 중에 이런 사람들이 많았다. 더 큰 문제는 노예 소유주들의 비협조였다. 그들은 링컨이 제안한 보상방식의 노예해방안을 일축했다. 링컨의 조리 있고 간곡한 요청도 기득권과 편견으로 굳어진 그들의 마음을 열지 못했다.



결국 링컨은 노예해방을 위한 다른 방안을 찾지 않을 수 없었다. 링컨은 좀더 단호한 방법을 모색했다. 링컨은 남부 지역의 노예를 전면적으로 해방하는 방안을 구체화하기로 했다. 대통령에게는 전쟁상황에서 군사상의 필요에 따라 적의 사유재산을 몰수할 수 있는 권한이 부여되어 있었다. 따라서 링컨은 노예해방을 위해 번거롭게 헌법을 개정하지 않고도 자신에게 부여된 권한을 이용해서 남부의 노예를 해방하고 이를 통해 접경지역의 노예 주를 압박하는 방안을 마련했다. 그리고는 1863년 1월 1일을 기해 인류사에 길이 남을 노예해방 선언이 드디어 공포되었다.1865년 3월 4일, 링컨은 다시 미국 대통령에 취임했다. 그 앞에는 전쟁을 종식시키는 일과 상처를 치료하는 일이 놓여 있었다. 그에게 있어 이것은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지난 4년 간 국민의 준엄한 요구에 따라 링컨은 그 일을 해 왔고, 노예도 주인도 없이, 남부도 북부도 없는 하나의 미국으로 통합하는 일을 생명을 다할 때까지 해 나갈 것이었다.



링컨은 50만 명을 징병한다는 포고령을 내렸다. 여당 반대파에서는 즉각 링컨의 방식이 잘못되었다는 비판이 제기되었고 민주당은 이를 무자비한 폭군의 행동이라고 몰아붙였다. 국민의 불만이 폭발했고 여론은 사나웠다. 그러나 링컨은 이를 강행했고, 이에 힘입은 그랜트 장군은 리치먼드를 9개월 동안이나 봉쇄할 수 있었으며 결국 리 장군에게 항복을 받아낼 수 있었다.



그러나 전쟁은 끝났지만 상처는 너무나 크고 심했다. 4년에 걸친 전쟁기간 동안 북군 사망자 36만 명, 부상자 200만 명, 그리고 남군 사망자 25만 명, 부상자 70만 명이라는 엄청난 인명이 희생되었고 국토는 황폐해졌다. 링컨은 이제 국가를 재건하고 국민을 통합하는 일에 본격적으로 착수해야 했다. 이에 링컨은 국가 재건계획과 대사면 계획을 발표했다. "나는 자비가 엄격한 정의보다 풍성한 결과를 낳는다고 믿는다." 링컨은 관용의 원칙과 국가 재건계획에 따라 점령지역을 연방에 편입시켜 나갔다. 링컨의 주도면밀한 계획 아래 루이지애나 주와 아칸소 주는 임시정부를 조직했고 테네시 주도 계획대로 재건되어 갔다. 반면 강경론자들은 반란 주들이 아무런 고통도 받지 않고 주권을 회복하고 연방에 재편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1865년 4월 14일, 링컨은 모처럼 전쟁 종식의 안도감에 연극을 관람하기 위해 아내와 함께 포드극장에 도착했다. 연극이 시작되자 링컨은 곧장 연극에 몰입됐다. 그때 발소리를 죽이고 귀빈실에 도착한 사나이가 있었다. 오래 전부터 치밀하게 계획했던 대로 그 사나이는 살며시 문을 열고 링컨에게 다가가 주머니에서 권총을 꺼내 링컨의 머리에 겨누고 방아쇠를 당겼다. 링컨의 고개가 뒤로 젖혀졌다.

링컨은 미국 역사상 최초로 암살 당한 대통령이었다. 하지만 링컨의 죽음은 남부인들에게 가책을 느끼게 했고, 북부인에게는 그의 관용 정신을 되살리는 계기가 됨으로써 남부와 북부의 대립 강도를 낮출 수 있었다. 강경파의 공격에도 불구하고 관용의 정신을 강조하였던 링컨은 남부 맹신자의 손에 피살됨으로써 남부인의 증오를 누그러뜨릴 수 있었다. 또한 링컨은 비운의 지도자였기에 그가 남긴 국민통합의 메시지는 북부인의 가슴 속에 관용의 정신을 깊이 새겨놓았다.연방 통합과 노예해방하나된 미국으로대통령에 취임하기 4개월 전인 1860년 12월, 드디어 사우스캐롤라이나 주 의회는 다른 주와 맺고 있었던 연방관계를 최초로 파기했다. 그 후 미시시피, 플로리다, 앨라배마, 조지아, 루이지애나 주가 연방을 탈퇴하고, 1861년 2월에 이들 6개 주가 남부연합을 결성하여 별개의 국가임을 선포하고 있었다. 링컨은 대통령 취임 후 제일 먼저 연방정부에서 이탈한 주들이 결성한 남부연합이 무효임을 선언했다. 그리고 다음날 링컨은 섬터 요새에 대한 지원을 요청받았다. 섬터 요새를 지원할 것인가 아니면 철수할 것인가? 첫 번째 기로에서 대통령의 결단이 필요했다. 거의 한 달 동안이나 심사숙고한 끝에 링컨이 내린 결론은 요새에 식량을 보내자는 것이었다.



결국 역사적인 1861년 4월 12일, 남부연합은 사우스캐롤라이나 주 찰스턴 항에 있는 섬터 요새를 공격했고 섬터 요새가 함락된 다음날 링컨은 7만 5천 명의 의용군을 소집하는 성명서를 공포했다. 링컨은 성명서를 공표하기 전날 민주당 대통령 후보였던 스티븐 더글러스를 만나 초당적 협력을 약속받았다. 링컨은 더글러스를 정중하게 맞아 자신이 짊어진 미국의 미래와 연방의 이상에 대해 말했다. 또 그것을 추구하는 데 따르는 불가피한 희생으로서 전쟁을 치러야 하는 괴로운 심정을 토로했다. 링컨의 모병계획에 동의한 더글러스는 이후 모병을 돕기 위해 분주하게 돌아다녔다. 그는 대중집회에서 이렇게 외쳤다."심각한 문제는 미국이 작은 연방으로 자꾸 분열되는 것입니다. 먼저 둘로 갈라졌습니다. 그 다음 선거에서 정당이 지면 또 갈라서고, 그 다음에 또 갈라지면서 분열할 것입니다. 나는 모든 정치적 견해에서 현정부에 반대해 왔지만 지금은 대통령을 지원하고자 합니다. 대통령은 지금 헌법이 부여한 모든 권한을 최대한 발휘하여 합중국을 보존하고 정부를 유 지하며 연방의 수도를 방어하려고 합니다."어느 날, 군의관이 거의 죽기 직전에 있는 한 젊은 병사에게 링컨을 안내했다. 링컨은 병 사에게 물었다. "내가 당신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뭐 없겠소?" 그 병사는 대통령을 알 아보지 못한 채, 어머니께 편지 한 통만 써달라고 부탁했고, 링컨은 받아 적기 시작했다. "보고 싶은 어머니, 저는 제 의무를 다하던 중에 심한 부상을 당했고, 아무래도 회복이 어려울 것 같습니다. 제가 먼저 떠나더라도 슬퍼하지 마세요. 하느님께서 축복해주시길 빌겠습니다." 병사는 기력이 없어서 더 이상 구술할 수 없었다. 링컨은 젊은 병사의 편지 말미에 이렇게 덧붙였다. "당신의 아들을 위해 에이브러햄 링컨이 대필했습니다."



병사는 편지를 자기에게 보여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편지를 대신 써준 사람이 누구인가 를 알고는 깜짝 놀랐다. "당신이 정말로 대통령인가요?" 링컨이 조용히 대답했다. "그렇 소 내가 대통령이요. 내가 당신을 위해 해줄 수 있는 다른 일이 없겠소?" 병사가 말했다. "제 손을 잡아주시겠습니까? 그러면 편안히 떠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모두가 숨을 죽 인 조용한 병실에서 그렇게 젊은 병사는 숨을 거두었다. 링컨의 눈에는 무어라 표현할 수 없는 안타까움과 비통함의 눈물이 고여 있었다.본격적인 전쟁에 앞서 초당적 협력을 얻는 데 성공한 링컨은 정부 내부를 일사불란하게 만드는 정지작업에 착수했다. 하지만 링컨은 당내에 확고한 기반이 없는 소수파 대통령이었다. 그리하여 링컨은 공화당 내의 실력자 수어드, 체이스, 캐머런을 각각 국무장관, 재무장관, 국방장관에 임명할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이들이 링컨을 위협하는 복병이 될 수도 있었기 때문에 전쟁 중 이들이 전적으로 대통령의 지휘에 따르게 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장관을 마음대로 해임하지 못하는 만큼 그들을 통솔하기 위해서는 단순한 임명권 이상의 것이 필요했다. 우리의 경험상 이는 곧바로 공작정치를 연상하겠지만 링컨은 오히려 그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자신을 불신하는 장관들을 현명하게 이끌어 갔다. 그들끼리 상호경쟁과 견제를 유도하는, 일종의 세력 균형전략과 탁월한 지도력으로 장관들을 휘어잡았던 것이다.



국무장관 수어드는 대통령을 '촌뜨기 애송이'로 보았고 실제 정치는 자신을 중심으로 장관들이 해 나갈 것으로 예상했었다. 그러나 취임 두 달이 지나기 전에 수어드는 자기 아내에게 보낸 편지에서 "실천력과 용기는 매우 귀한 덕목인데, 우리 대통령은 이를 갖춘 제일 가는 인물이라오."라고 실토했다. 노련한 정치인 수어드를 자신의 열렬한 추종자로 만든 것은 다름 아닌 링컨의 지도력이었다.



링컨은 처음에 연방군 총사령관으로 로버트 리 장군을 선택했다. 그런데 리 장군은 버지니아 사람이었으며, 버지니아는 지원병 모집 성명서 발표 이틀 후에 연방 탈퇴를 결의하고 남부연합에 합류했다. 그러자 로버트 리는 "나는 내 친척과 내 아이들, 그리고 내 가족에 맞서 싸우는 적을 이끌 수 없다. 나는 그 사람들과 고통을 함께 나눠야 한다." 리 장군은 링컨의 제안을 거절하고 버지니아로 가서 남부연합군의 총사령관으로 나섰고 전쟁을 장기화한 중요한 요인이 됐다.



드디어 국민의 정부를 수호하기 위한 전쟁, 위대한 교훈을 역사 속에 심어줄 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비록 대의명분상 옳고 현실적으로 불가피한 전쟁이긴 했으나 전투에서 승리한 기쁨을 누리기보다는 전투에서 희생된 병사들을 생각하며 가슴 아파할 때가 많았다. 남북전쟁 기간 내내 링컨은 부상당한 병사들이 입원해 있는 병원을 방문했다."더글러스는 흑인이 인간이라는 것을 명확하게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합중국 헌법에는 모든 인민은 평등하게 창조되었다고 씌어 있다. 노예제는 어떠한 도덕적 정당성도 가지고 있지 않다. 우리는 정치적으로 위선자라는 사실을 만천하에 드러내 보이고 있다. 인간을 노예로 만드는 제도를 옹호하면서 동시에 인간의 자유를 사랑한다고 자찬하고 있다."링컨의 연설은 청중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다. 특히 노예제 폐지론자들의 심금을 울렸다. 링컨은 여세를 몰아 계속하여 지역을 순회하면서 캔자스-네브래스카 법안에 반대하는 연설을 강행했다. 연설하는 동안 링컨의 수수한 옷차림과 꾸밈없는 태도는 청중에게 '정직한 에이브'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했고 논리정연하면서도 확신에 찬 어조로 인해 힘있는 연설가라는 인상을 청중의 머리 속에 새겼다.링컨이 태어난 곳은 켄터키 주 하딘 카운티의 외진 시골이었다. 아버지 토머스 링컨은 거대한 서부개척의 대열에 포함되어 있었던 이름 없는 개척농부였다. 그는 하딘 카운티의 엘리자베스타운에서 11킬로미터 떨어진 토지를 개간하면서 그곳에 야생 능금나무로 둘러싸인 아늑한 통나무집을 지었는데, 그곳에서 링컨이 태어났다.



성장기 링컨에게 온 첫 번째 충격은 어머니를 여윈 일이었다. 당시 아홉 살이던 에이브러햄과 열 한 살짜리 딸 새러를 남겨둔 채 낸시 행크스는 '우유병(milk sick)'이라는 괴질로 세상을 떴다. 어린 에이브러햄 링컨에게 어머니의 죽음이 어떻게 다가왔는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한 사실은 슬픔을 느낄 여유가 없었다는 것이다. 링컨과 새러는 추위와 두려움에 떨면서 서로 꼭 껴안고 겨울을 버텨냈으며 배고픔과 질병을 이겨냈다. 또 아내를 잃은 아버지의 슬픈 얼굴과 광기를 참아냈다. 그 고통을 참아낸 어린 링컨은 세상을 그럭저럭 살아갈 수 없었다. 링컨을 만든 첫 번째 스승은 그에게서 너무나 일찍 어머니를 앗아간 운명이라는 이름이었다.



링컨의 어머니 낸시 행크스가 세상을 떠난 후 1년이 지나자 아버지, 토머스 링컨은 재혼하기로 결정하였다. 어느 날 아침 네 마리의 말이 끄는 짐마차가 집 앞에 도착했고 아버지 토머스가 새어머니가 될 새러 부시와 세 아이를 데리고 내렸다. "얘들아, 이분이 너희들의 새어머니가 될 분이다." 새러는 링컨에게 사랑을 가르쳤다. 그녀는 어머니를 여윈 어린 남매를 친자식처럼 돌보았고, 아이들이 다섯이나 되었지만 어느 누구도 사랑에 굶주리지 않도록 정성을 쏟았다. 또 안정적인 삶과 정신적 풍요로움을 제공했다. 링컨은 뒷날 대통령이 된 후, 그때를 감회 어린 목소리로 회상했다. "새어머니는 이 세상에서 나의 가장 좋은 친구가 되었다."



링컨이 그나마 정규교육을 받을 수 있었던 것도 새어머니 새러의 덕이었다. 과거 한국의 농촌이 그러했듯이 미국 개척시대의 서부 농장에서도 아이들은 자기 몫의 일을 해야 했다. 물론 링컨에게도 자기 몫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보다 배움을 더 중요시할 수 있었던 것은 새어머니의 자상한 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새어머니 새러는 비록 문맹자였지만 교육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링컨을 학교에 보냈다. 새러는 배움에 열심인 링컨을 각별히 보살폈다. 흔히 사랑을 받아본 사람만이 사랑할 줄 안다고 한다. 링컨이 타인에 대한 믿음과 동정과 연민의 감정을 지닌 따뜻한 인간성의 소유자가 된 것은 바로 새어머니의 감화와 훈육 덕분이었다.링컨은 장성하여 오펏이라는 사람이 차린 가게에서 점원으로 일하면서 뉴세일럼에 홀로 정착했다. 그곳에서 1837년 주 의원으로 당선되어 스프링필드로 이사할 때까지 살았다. 아버지를 따라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던 시골소년 링컨은 이제 가족의 품을 떠나서 스물 두 살의 어엿한 청년으로 삶을 개척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링컨은 이야기하는 데 소질이 있었다. 사람들이 모여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는 자리에서 재담꾼의 '끼'를 발휘했다. 그는 논쟁이 있는 자리에서도 논리적으로 자신의 주장을 펴는 데 훌륭한 능력을 보여주었다. 링컨의 적극적인 성격도 뉴세일럼 사회에 빨리 적응할 수 있게 해 주었다. 링컨은 마을일에 적극 참여하였고 마을에서 열리는 순회 재판에도 참석했다. 법정이 열리면 빠짐없이 구경하는 링컨에 대해 치안판사인 볼링 그린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링컨이 살던 당시에 주 의원이 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학력이나 워싱턴 정치인들과의 친분이 아니라 주나 마을의 현안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었다. 1832년, 스물 세 살의 점원 링컨에게 주 의원에 입후보하라는 제의가 들어왔다. 순회법원 치안판사인 볼링 그린과 토론클럽 운영자인 제임스 러틀리지가 적극적으로 권유했다. 링컨은 제의를 받아들여 주 의원 선거에 입후보하였다. 링컨이 선택한 정당은 휘그당이었으며, '이웃에게 진정한 존경을 받고, 그 존경에 걸맞은 헌신을 하겠다.'는 야망을 가지고 열심히 뛰었다. 그러나 선거결과는 낙선이었다. 하지만 선거결과가 완전히 실망스러운 것은 아니었다. 적어도 뉴세일럼 유권자 300명 가운데 277명이 링컨에게 표를 던졌기 때문이다.

1834년에 치러진 주 의원 선거에 링컨이 다시 입후보했을 때 뜻하지 않는 제의가 들어왔다. 민주당이 링컨을 지원하겠다고 제의한 것이다. 휘그당 후보 가운데에 변호사 존 스튜어트가 압도적인 1위로 당선되는 것을 견제하기 위해 민주당이 링컨을 지원하기로 한 것이다. 정치적 야망을 이루기 위해 이번 선거에 꼭 당선되기를 바라고 있던 링컨으로서는 쉽게 거절할 수 없는 제의였다. 하지만 제의를 받아들일 경우 휘그당을 배신하고 상대 정당과 손을 잡았다는 도의적인 비난을 면하기 어렵게 된다. 처음으로 자신의 정치적인 역량을 시험하게 된 상황에서 링컨은 동료를 배신하지 않으면서도 자신에게 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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