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소유의 행복
이용범 지음 | 도서출판 초당
위나라에 사는 한 부부가 매일 신에게 기도를 드렸다. 아내가 먼저 신에게 소원을 빌었다. "우리에게 아무런 재난도 없게 하여주시고 비단 백 필만 내려 주십시오." 그 말을 듣고 있던 남편이 몹시 불만스런 표정으로 아내에게 물었다. "백 필은 너무 적지 않소? 이왕 하늘에 빌 바에야 만 필이면 더 좋지 않겠소?" 그러자 아내가 대답했다. "아닙니다. 그보다 더 많으면 당신은 필시 첩을 얻게 될 것입니다."
- 『한비자(韓非子)』, 「내저설 하편」
부를 축적한 사람일수록 자신이 모은 재산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주려는 사람은 적다. 가난한 사람을 돌보는 사람은 대개 가난한 사람들이다. 부를 나누어 갖기는 어렵다. 부자일수록 그것을 누리는데 더 많은 관심을 쏟기 때문이다. 당신이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다면 그가 졸부가 되는 것을 경계하라. 그가 졸부가 되는 순간 당신은 사랑을 잃을 수도 있다.1999년 겨울, 페터 선생이 출판사의 초청으로 한국을 방문했다. 마침 선생은 동양의 여러 나라들에 관심을 갖고 있을 대여서 초청에 흔쾌히 응했다. 그때 나는 원고를 검토해 주었다는 약간의 공로(?) 떼문에 선생의 국내 여행에 동행하게 되었다.
여행을 할 때는 늘 잠자리가 문제였다. 한겨울이었기 때문에 숙소에는 모두 불을 넣었고 사찰에서는 장작불을 때어 주었다. 하지만 그는 출가 이후로 따듯한 방에서 잠을 자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함께 여행을 떠난 사람들은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송광사에서 묵었을 때는 방이 너무 따뜻해서 선생 혼자 얼음장같은 마룻바닥에서 잠을 잔 적도 있었다.
그와 함께 여행을 다니면서 나는 많은 것을 배웠다. 그는 여행을 떠날 때부터 양말을 신지 않았다. 그래서였는지 그의 뒤꿈치는 얼어터지고 갈라져서 붉은 속살이 그대로 드러날 정도였다. 사람들이 동상에 걸릴까 걱정하자 그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3년 전부터 나는 양말을 신지 않네. 가진 것 중에서 하나를 더 버린 셈이지."
그는 한국을 떠나면서 형식화되어버린 한국의 종교에 대해 많은 충고를 했다. 그 중에서 내가 잊지 못하는 것은 선생이 들려준 라마 크리슈나의 한 마디였다. "출가란 수건 한 장을 들고 갠지스강으로 가서 끝내 돌아오지 않는 것이다."어떤 도시에 가난한 구두 수선공이 있었다. 그는 늘 나무망치를 들고 즐겁게 노래를 부르며 일했다. 그의 이웃에는 돈 많은 은행가가 살고 있었다. 그러나 은행가는 너무나 바빴다. 그는 새벽녘에야 잠자리에 들고 잠시 눈을 붙인 다음에는 부리나케 침대에서 일어나 일터로 나갔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늘 잠이 모자랐고 피곤했다. 더구나 새벽에 잠이 들면 구두 수선공의 커다란 노랫소리에 잠이 깨버렸다. 화가 난 은행가는 구두 수선공을 집으로 불렀다. 그러고는 아주 거만한 태도로 물었다.
"당신은 1년에 돈을 얼마나 버는가?" 구두 수선공이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입에 풀칠이나 할 정도지요. 그래서 돈을 모으거나 계산해본 일도 없습니다. 그날 벌어서 그날을 사니까요." "그럼 하루에 얼마나 버는가?" "많기도 하고 적기도 하죠. 하지만 버는 만큼 먹으니까 문제되진 않아요. 곤란한 건 노는 날이지요. 그런 날은 성당에 갑니다. 하지만 재미는 없어요. 배는 고픈데 사제의 설교는 길고 늘 성인들 이야기만 하거든요."
화를 내려던 은행가는 그의 솔직하고 선량한 마음씨가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은행가는 구두 수선공에게 말했다. "그럼, 내가 돈을 좀 주지. 앞으로 끼니를 걱정하는 일은 없을 거야. 하지만 새벽에 노래는 부르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네. 내가 잠을 자야 하거든."
구두 수선공은 돈을 받아들고 기쁜 마음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날 저녁부터 구두 수선공은 고민에 빠졌다. 은행가로부터 받은 돈을 어디다 두어야 할지 난감해진 것이다. 처음엔 벽에 구명을 뚫고 그 안에 숨겨 두었지만 도무지 안심할 수 없었다. 그날 이후 그의 입에서 노랫소리가 사라졌고 잠도 제대로 오지 않았다.
그로부터 며칠 후 구두 수선공은 바짝 마른 몸으로 은행가를 찾아갔다. 그리고는 감추어두고 있던 돈을 은행가에게 돌려주었다. 은행가가 화들짝 놀라 이유를 물었다. "아니, 내가 준 돈이 적은가?" "아닙니다. 저에게는 돈보다 노래와 잠이 더 소중합니다. 돈 때문에 그걸 포기할 수 없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즐겁게 노래 부르며 집으로 돌아갔다.
- 라퐁텐, 『우화집』
우리는 약간의 이익 때문에 너무 많은 것을 잃어버렸다. 달콤한 늦잠, 느리게 걷는 걸음걸이, 어머니가 차려주던 따뜻한 밥상, 변기 위에서의 허황한 몽상과 조간신문에 실린 한 남자의 부음, 이웃집에서 들려오는 아기 울음소리, 술 취한 사내의 콧노래와 따스하게 오줌 누는 소리, 밤하늘의 별, 내 아이가 새로 산 공책, 날카로운 손톱깎이에 너무 깊숙이 잘려나간 아내의 발톱...
행복한 삶이란 나 이외의 것들에게 따스한 눈길을 보내는 것이다. 우리가 바라보는 밤하늘의 별은 식어버린 불꽃이나 어둠 속에 응고된 돌멩이가 아니다. 별을 별로 바라볼 수 있을 때, 발에 채인 돌멩이의 아픔을 어루만져 줄 수 있을 때, 자신이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 깨달았을 때, 비로소 행복은 시작된다. 사소한 행복이 우리의 삶을 아름답게 만든다. 몇 푼의 돈때문에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작은 행복들을 버리는 것은 불행을 향해 달려가는 것과 같다. 하루 한 시간의 행복과 바꿀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에 아무 것도 없다.후한시대의 송홍(宋弘)은 장안 출신의 학자였다. 그는 후한의 첫 황제인 광무제(光武帝, B.C 6-A.D 57)가 즉위하자 대사공의 벼슬에까지 오를 만큼 인품과 덕망이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때 광무제에게는 호양공주라는 누이가 있었는데 일찍 혼인을 했다가 남편을 여의어 과부가 되어 있었다. 광무제는 홀로 살아가는 누이를 안타깝게 여겨 좋은 신랑감을 찾아 재혼을 시켜주고자 했다. 마침 황제는 송홍의 인품을 흠모하여 과부가 된 누이를 그의 후처로 들여보내고 싶었다. 하지만 송홍에게 본처가 있다는 것이 늘 마음에 걸렸다. 그리하여 황제는 은근히 누이의 은근히 떠보았다. "대사공 송홍을 어떻게 생각하시오?" 황제의 마음을 눈치챈 호양공주가 얼굴을 붉히며 대답했다. "그의 얼굴은 위엄이 있고 덕까지 갖추고 있어 감히 그를 능가할 신하가 없습니다."
누이의 속마음을 알아차린 황제는 그날 밤 궁궐 안으로 송홍을 불러들였다. 그런 다음 병풍 뒤에 공주를 숨겨 놓고 송홍의 인품을 시험했다. "사람들은 신분이 귀해지면 친구를 바꾸고 집안이 부유해지면 아내를 바꾼다고 하오. 이는 사람의 본성이 다 그렇기 때문이 아니오?" 그러자 송홍이 대답했다. "신이 듣기로는 가난하고 천할 때의 친구일수록 잊어서는 안 되며, 술지게미와 쌀겨를 함께 먹으며 고생한 아내는 쫓아내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 말을 들은 황제는 송홍이 후처를 들일 생각이 전혀 없음을 알았다. 송홍을 보낸 후 황제는 공주를 돌아보며 말했다. "일이 순조롭지 않겠소." 여기에서 조강지처(糟糠之妻)라는 고사가 생겨났다.
- 이한, 『몽구(蒙求)』
술지게미란 술을 빚은 뒤에 남는 곡식의 찌꺼기다.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더러 술지게미를 먹은 적이 있다. 마을에 잔치가 있을 때는 며칠 전부터 술을 빚고 거르는데 잔칫집에 일손을 거들러 갔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어머니의 손에는 어김없이 술지게미 한 그릇이 들려 있었다. 여섯 남매가 술지게미 한 그릇을 앞에 놓고 다투다보면 한 숟갈의 찌꺼기마저 아쉬울 지경이었다.
그나마 우리 집은 제때에 세 끼 밥을 찾아먹을 수 있었다. 하지만 몇몇 친구들은 잔칫집에서 얻어온 술지게미로 한 기를 때우기도 했다. 술지게미의 맛이 달콤하고 새콤해서 배가 곯은 아이들에게는 훌륭한 간식거리였다. 더러는 곡식의 낱알에 남아 있던 술기운에 취해 비틀거리는 아이도 있었고, 아침에 술지게미를 먹고 등교했다가 교실에서 막걸리 냄새를 풍기는 아이도 있었다. 지금은 즐거운 추억으로 남아 있지만 예전에는 술지게미를 먹는 것이 가난의 상징처럼 여겨졌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난날의 가난을 잊고 산다. 알량한 재산을 모으고, 모은 재산을 자식에게 물려줄 궁리만 하는 사람들에게 가난한 날의 행복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조금 부유해졌다고 해서 옛 친구를 잊고 조강지처를 버리는 사람은 마음이 가난한 자이다. 지금 가지고 있는 부를 행복하게 누릴 수 있는 방법은 주어진 것에 늘 감사하며 사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가 있다.1999년 봄, 출판사를 운영하는 한 선배로부터 두꺼운 원고 뭉치를 받았다. 그 원고에는 『거지 성자』라는 제목이 붙어 있었는데 원고를 건네주는 선배의 뜻을 나는 금세 짐작했다. 내가 소설을 쓰고 있으니 원고를 검토해주었으면 좋겠다는 요청이었던 것이다.
페터 노이야르 선생과의 인연은 그렇게 맺어졌다. 원고를 쓴 사람은 팔리어를 전공하고 있는 학자였다. 그는 정치적 상황이 암울했던 시절에 학생운동의 중심에서 활동하다가 도망치듯 독일로 유학을 떠났다. 그는 7년동안 독일에 머물면서 고독한 세월을 보냈는데 그때 알게 된 페터 노이야르 선생과의 인연을 한 권의 책으로 엮은 것이다. 원고를 읽으면서 나는 크나큰 감동을 받았다. 지금까지 알고 있는 위대한 성자들을 제외하면 페터 선생만큼 무소유로 일관한 사람의 생애를 접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페터 선생은 20여 년 전에 출가했지만 소속된 단체도, 소속된 종교도 갖고 있지 않았다. 젊은 시절에 그는 세계의 여러 종교와 성자들의 삶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불교 경전을 읽다가 송곡처럼 가슴을 찌르는 글귀 하나를 발견했다. "아란야 가타바, 룩카 물레 가타바, 순냐 가라가타바." 그 글귀의 뜻은 "숲으로 가라, 나무 밑으로 가라, 빈집으로 가라."였다. 그 글귀를 읽은 페터 선생은 미련 없이 모든 것을 버리고 숲으로 향했다. 이후 그는 20여 년 이상은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돈 없이, 집 없이, 여자 없이' 살았다.
그가 터를 잡은 곳은 쾰른대학 근처의 호숫가였다. 그곳에서 그는 나무와 새들을 벗삼아 살기 시작했다. 잠자리는 나무 밑이었고, 이불은 주워온 헌 옷가지로 꿰매어 만든 외투 한 벌이었다. 먹을 것은 시내의 무공해 식품가게에서 유통기한이 지난 빵과 채소를 얻어서 해결했다. 그것조차 여의치 않을 때는 숲을 돌아다니며 나물을 캤다.
영하 30도가 오르내리는 겨울에도 그는 나무 밑을 떠나지 않았다. 비가 올 때면 그는 쾰른대학 도서관의 낭하 밑으로 잠자리를 옮겼다. 사람들은 그를 부랑자로 취급했지만 그의 삶은 너무나 행복했다. 낮에는 대학 도서관에서 경전을 읽었고 대로는 소외당하고 있는 불법 이민자들의 친구가 되어 그들을 도와주거나 상담을 해주기도 했다.
새벽에 일어나면 명상과 수행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그는 남방불교의 위빠사나를 수행하며 추위와 배고픔을 이기는 방법을 터득했다. 대개는 하루 한 끼로 해결했고 그마저도 완전한 채식이었다.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오후에는 물 이외에는 어떤 것도 입에 대지 않았다.
돈은 거의 필요 없었다. 돈이 필요할 때라곤 편지를 부치거나 연필을 살 때뿐이었는데 그런 것들을 살 때는 빈 병을 모아두었다가 팔아서 해결했다. 그가 가진 것이라곤 누더기 외투 한 벌, 바늘과 실, 한 권 정도의 책, 신발 한 짝, 연필과 메모지, 그리고 빈 병을 모을 대 사용할 작은 손수레뿐이었다.
20년 동안 한 번도 이를 닦은 적이 없지만 그의 치아는 누렇게 변색되었을 분 아무런 이상도 없었다. 완전한 채식 덕분이었다. 오랜 명상과 수행 덕분에 20년 동안 병을 앓아본 적도 거의 없었고, 몸에는 늘 벼룩이 머물고 있지만 한 번도 그것을 잡아본 적이 없었다. 꼭 필요한 일이 아니면 버스나 전철도 타지 않았다. 그는 손수레 하나를 끌며 하루에 수십 킬로미터씩을 걸어다녔다.일본 가마쿠라 막부의 5대 집권자였던 도키요리가 어느 날 어머니가 살고 있는 시골집을 방문하기로 했다. 아들이 온다는 말을 들은 어머니는 이번 기회에 낡은 미닫이문을 고치기로 마음먹었다. 그리하여 그녀는 문에 구멍이 난 부분만 작은 칼로 도려내고 그 위에 창호지를 발랐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그녀의 오빠가 말했다. "이런 일은 하인에게 시키지 않고... 이제 우리 가문도 대단한 가문이 되지 않았는가?" 그러자 그녀가 말했다. "하인의 솜씨가 나보다야 낫지 않겠지요." 그러면서 그녀는 하나씩 종이를 오려가며 방문에 붙였다. 오빠가 다시 한 번 나섰다. "종이를 모두 뜯어내고 한꺼번에 바르면 편할 것을... 구멍난 곳만 종이를 덕지덕지 붙이니 보기에도 흉하지 않은가?" 그녀는 가만히 미소를 지으며 오빠에게 대답했다. "어떤 물건이든 손상된 곳만 고쳐 사용해야 한다는 것을 내 아들에게 가르치기 위함이지요."
도키요키는 30세에 권력의 자리에서 물러나 출가했다. 그가 출가하여 유명한 스님이 되었는데 그를 보좌하던 다이라노 노부토키도 뒤를 쫓아 출가했다. 어느 날 도리요키는 자신의 신하였던 다이라노 노부토키 스님을 절로 초대했다. 초대를 받은 다이라노 노부토키는 마침 준비된 외출복이 없어 구겨진 옷을 입고 스님을 찾아뵈었다. 그러자 도리요키는 술병과 술잔을 들고 옛 신하를 맞으며 말했다. "이 술을 혼자 마시려니 마음이 내키지 않아 불렀네. 그런데 하인들이 모두 잠이 들었으니 부엌에 가서 안주거리 좀 찾아보게나." 다이라노 노부토키는 등불을 켜들고 부엌으로 가서 찬장을 뒤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마땅한 안주거리는 없고 다만 접시에 된장이 조금 남아 있는 것이 보였다. 그는 된장이 든 접시를 들고 쑥스러운 표정으로 도리요키에게 말했다. "이것밖에 없습니다." 그러자 도리요키가 대꾸했다.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 요시다 겐코, 『도연초(徒然草)』
몸소 보여주는 것만큼 확실한 가르침은 없다. 큰 부자에게는 자녀가 없다. 오직 상속자만 있을 뿐이다. 따라서 자식에게 물려주어야 할 것은 돈이 아니라 검소한 삶이다. 집안을 일으킬 자식은 똥도 황금처럼 여기지만 집안을 망칠 자식은 황금도 똥처럼 써버리는 법이다. 도리요키는 권력을 확립한 30세에 기꺼이 자리에서 물러났다. 물러설 때를 알고 뒤돌아서는 사람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권력을 가진 자는 외롭다. 또한 권력을 가진 자는 최초로 소유를 만들어낸 자이기도 하다. 루소의 말을 빌면 이렇다. "땅에 울타리를 치고 '이것은 내 것이다'라고 최초로 말한 자, 그리고 그 말을 믿을 만큼 단순한 사람들을 찾아낸 자, 그가 바로 국가의 창시자였다."오래 전에 법정 스님의 『무소유』를 읽은 적이 있다. 대부분 산사생활에 대한 단상들을 엮은 것이지만 그 중에서 나를 사로잡았던 것은 「무소유」라는 제목의 짧은 글이었다. 아직 읽지 않은 사람들을 위해 그 글의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다.
어떤 스님이 법정 스님에게 난초 두 분을 보내주었다. 그리하여 법정 스님은 나름대로 난초에 대한 서적을 구해 읽고, 어렵게 비료를 얻어 화분에 뿌려주고, 겨울이면 실내온도를 맞추어 주며 정성을 다해 길렀다. 그런데 어느 해 외출을 하고 보니 그때서야 뜰에 내놓고 온 난초 생각이 났다. 순간 모처럼 보인 햇볕이 원망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뜨거운 햇볕에 축 늘어져 있을 난초 잎이 눈에 아른거렸던 것이다. 그 길로 돌아와 보니 잎은 바짝 말라서 늘어져 있었다. 샘물을 길어다 뿌려준 뒤에야 난초 잎은 간신히 고개를 들어올렸다.
그때 그는 절실하게 느끼게 되었다. 집착이 괴로움인 것을. 법정 스님은 난초에 집착한 것이다. 밖에 볼일이 있어 잠시 방을 비울 때도 환기가 되도록 들창을 열어놓고, 화분을 밖에 내놓은 채 나가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