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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사마 빈 라덴

요제프 보단스키 지음 | 명상
이슬람주의의 자금 집결지는 옛 소련의 중앙아시아 지역과 독일, 그리고 동유럽을 포함하는 지역이다. 아무런 관련도 없어 보이는 이 지역들이 한데 묶인 것은 빈 라덴과 러시아 마피아와의 관계 때문에 가능했다. 1990년대 중반, 우크라이나에서 구입한 무기들을 카타르로 이동시키면서 시작된 이들의 관계는 이후에 보다 포괄적인 관계로 발전했다. 러시아 마피아는 카타르나 아랍에미리트에서의 마약, 매춘, 그리고 밀주 판매 등에 관여하고 있었지만, 사업 파트너로서 크게 문제될 것은 없었다. 그들은 현재 빈 라덴의 자금을 중앙아시아와 동유럽에 퍼져 있는 이슬람주의자들의 활동지역에 유입시키는 일을 하고 있다. 아프간의 마약시장이 확대되면서 빈 라덴과 러시아 마파아와의 관계도 점점 더 밀접해졌다. 이와 더불어 빈 라덴은 정치적인 사업에도 관심을 보였는데 수단, 예멘, 그리고 아프간에 대한 경제적 지원이 바로 그것이다. 이를 위해 그는 지역의 주요 은행에 상당한 금액을 예치하였으며, 제휴나 간접투자 등을 통해 지역사업체를 지원했다.



최근 전자금융 및 국제거래가 증가하면서 금융거래가 노출되는 것을 염려한 빈 라덴은 새로운 금융시스템을 구축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유럽의 은행시스템에 기반한 이 새로운 시스템도 역시 아프리카와 남미에 걸쳐 있는 네트워크를 이용해 돈을 세탁하고 있다. 빈 라덴의 돈은 전세계에 퍼져 있는 기업체들의 네트워크를 거치는 사이에 꼬리를 감추고 만다. '글로벌 네트워크'라고 명명한 이 새로운 시스템의 특징은 빈 라덴의 자금이 전세계를 거치면서 이동하지만 정작 빈 라덴 본인의 이름은 전면에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자금들이 최종적으로 들어가는 곳은 역시 트라이앵글 지역에 있는 회사들이다. 마약 유통으로 벌어들인 자금이 늘어나자, 러시아 마피아와 빈 라덴은 문어발식 네트워크라는 새로운 돈세탁 시스템을 마련했다. 이를 통해 조성된 자금은 탈레반이나 이슬람주의 테러리스트 활동을 지원하는 데 쓰이는데, 빈 라덴 자신은 거기서 얻은 이윤을 러시아와 아프간이 아닌 지역에 사용하고 있다.1998년 8월 20일, 클린턴은 케냐와 탄자니아의 미대사관 폭탄테러에 대한 응징으로 아프간과 수단의 테러리스트 근거지에 크루즈 미사일을 발사했다고 발표했다. 그리고 오사마 빈 라덴의 제거를 선언했다.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이 테러지도자를 한 명을 지목하여 적으로 선언한 적은 한번도 없었다. 빈 라덴은 미국에 성전을 선포한 유일한 테러지도자이다. 그것도 1996년 이후 계속 새로운 포고령을 내리면서 수도 없이 미국에 선전포고했다. 이 선전포고는 공허한 것이 아니다. 빈 라덴은 서구화와 근대화의 중심인 미국이 이슬람 세계의 모든 위기의 근원이라고 규탄한다. 그러나 미국에 대한 정면공격은 불가능하므로, 미국에 테러공격을 함으로써 이슬람권에서 내몰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슬람의 급진적, 전투적인 모습은 이슬람권이 서구화와 근대화를 겪는 과정에서 탄생했다. 이슬람 문명과 서구 문명은 수백 년 동안 적대적이었다. 11세기에 이슬람 세계는 일련의 패배를 겪었다. 십자군이 레반트 지방과 기독교 성지를 탈환하고 기독교 국가를 건설했으며, 이베리아반도에서는 기독교 세력이 스페인과 포르투칼에서 이슬람교도를 축출하기 시작했다. 반면에 이슬람권에서는 내전과 위기가 끊이지 않았고 기존의 이슬람 정권들은 분열되고 약해졌다. 이에 대한 반동으로 무자비한 장군들이 나타나 신앙이 깊은 자들로 군부대를 조직해 기독교 세력에 빼앗긴 땅을 되찾으려 했다. 이들이 일부 지역에서 기독교 세력을 물리치고 권좌에 오르자 찬란했던 이슬람 문명도 무너졌다. 자신들의 신앙을 증명하기 위해 종교적 극단주의를 부활시켰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슬람 세계는 '반지성운동'이라 이름 붙인 파도에 휩쓸렸다. 이렇듯 12세기에 종교적 극단주의가 유행하면서 이슬람세계는 침체의 길로 접어들었다.



1970년대 중반 오일달러를 뒤집어쓴 중동 이슬람권은 서구유학, 여행, 위성방송 등을 통해 전례 없이 서구문명과 접촉했다. 문화적 충격은 엄청났다. 그러나 미국에서 대학원 교육을 받은 이슬람주의자 지식인들은 서양의 개인적 자유와 물질주의가 전통 이슬람 사회에 대한 도덕적인 위협이라고 결론지었다. 이들의 미국문화 비판은 통렬하다. 미국에서 교육받은 이란 중공업부 장관 베흐자드 나바비는 "서방 세계 사람들은 돈을 벌기 위해서라면 자신의 어머니도 시장에 내놓을 것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이슬람주의자들은 기독교 세계를 '파탄시킨' 병폐들이 이슬람 세계로 침투하지 못하도록 진력하고 있다. 이를 위해 폭력행위와 테러를 포함한 모든 수단의 사용이 정당화되고 있다. 오사마 빈 라덴을 포함한 테러리스트들이 서양인이 보기에는 용인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증오를 가진 헌신적 광신자들로 보일 수도 있지만, 사실 그들도 이슬람 세계를 그들 나름의 올바른 길로 인도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1989년 빈 라덴은 영웅이 되어 사우디로 돌아왔다. 그는 더 현명해지고 강해졌다. 그러나 정치, 사회관은 더욱 급진적이 되었다. 그가 아프간에서 도와준 아랍 출신 '아프간인'들과 토착 아프간인들 대부분은 그를 지도자로 우러러보았다. 사우디 정부는 빈 라덴을 이상적인 아프간 성전의 모델로 여겼다. 사람들의 칭찬과 매스컴 덕분에 빈 라덴은 유명해졌다. 그리고 그는 수많은 이슬람 사원과 집회에 나가 연설했다. 라덴은 이슬람교의 가르침을 올바로 실천한다면, 그 무엇도 이슬람교 국가를 이길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아프간 성전이 이교도 초강대국들에 대한 이슬람의 위대한 승리라고 말했다. 이슬람교의 두 성지(메카와 메디나) 수호자로서의 역할을 통해 권력의 정통성을 내세우는 사우디 왕가는 빈 라덴의 말을 마음에 들어했다. 한편, 빈 라덴은 10년 간의 아프간 성전을 끝내고 고국에 정착하려 했다. 그래서 아버지의 건설회사 제다 지점에서 다시 일하기 시작했다. 가족들도 검소한 아파트로 이사시켰다. 그리고 자신이 주장해온 이슬람적인 생활방식을 실천하려고 애썼다.



이런 와중에 1990년 8월 2일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공했다. 이라크는 사우디 침공 의사가 없음을 밝혔지만 방어력이 약한 사우디는 이라크의 맹공에 그대로 노출되었고 쿠웨이트 왕족이 이끄는 피난민들이 물밀듯이 들어왔기 때문에 분개했다. 위기상황에서 빈 라덴은 나라를 걱정하는 매우 충성스러운 사우디 국민이었다. 그는 비이슬람국 군대를 받아들이면 사우디의 오랜 이슬람 정통성이 상처를 입을 것을 경고하면서 사우디군을 자신이 동원할 수 있는 '아프간'인들로 보강할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공포에 사로잡힌 국왕과 측근들은 빈 라덴의 말을 듣지 않았다. 더욱이 미 국방장관 딕 체니도 "상황이 종료되면 단 1분도 더 사우디에 머물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라덴은 미군의 사우디 영토 진입에 대해 비판했고, 라덴의 대중적 인기로 인해 그 비판의 무게는 사우디에게 큰 부담이었다. 회유와 협박도 라덴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걸프전이 끝나자 사우디는 약속과 달리 외국 군대가 영토 내에 영원히 주둔하는 것을 허용했다. 이라크 침공 때부터 빈 라덴은 사우디 정부가 단기적인 '안전'이냐, 장기적인 이슬람의 정통성이냐의 양자택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경고했었다. 사우디 왕가는 결국 전자를 선택했다. 이제 사우디와 빈 라덴은 철저히 적대관계가 되었다. 신변이 위태로워지자 빈 라덴은 가족을 이끌고 새로운 이슬람교의 신앙부흥운동이 한창인 수단으로 망명했다.



1991년 국제상업대부은행(BCCI)의 폐쇄는 수단에 망명한 빈 라덴에게 절호의 기회였다. BCCI는 이슬람 조직들의 비밀 자금의 돈세탁에 유용한 기관이었는데, 이를 통해 테러리스트들에게 자금을 안전하게 지원하던 수단은 BCCI에 투입된 자금을 급히 회수하는 한편, 조직들에게 자금을 전달할 새로운 금융시스템이 필요해졌다. 빈 라덴은 그 적임자였다. 그곳에서 빈 라덴은 아무도 모르는 비밀 금융 시스템을 완성하고, 가장 친한 친구 자와히리가 유럽에서 조직한 고급 테러조직의 지원에 나섰다. 자금지원은 동포애그룹(BG)으로 알려진 독립단체를 통해 이루어졌다. 그 단체의 핵심은 페르시아만 국가 출신의 엄청난 부를 소유한 134명의 아랍인들로 구성된 그룹이었다. 이 금융시스템의 목적은 서방의 정보기관들이 테러조직과 지원국들을 결부시키지 못하도록 돈의 이동 흔적을 감추는 데 있었다. BG의 핵심 멤버는 서방에도 알려진 금융계의 인물들로 미국 내에 큰 회사와 사업체를 갖고 있었다. 빈 라덴이 만든 금융시스템은 매우 효과적이고 능률적으로 운영되었다. 그 덕에 비용이 많이 드는 도시에서 뚜렷한 수입 수단 없이도 이슬람 조직들은 잘 버텨나갔다.



빈 라덴은 수단에게 소중한 존재였다. 라덴은 수단 정부의 재정 지원과 자신의 경력을 바탕으로 돈세탁 말고도 수단의 전략적 하부구조, 즉 도로, 교통, 비행장, 군사시설을 만들어줬다. 건설이 진행되는 동안 아프간에서 자신이 훈련시키고 함께 싸운 수많은 아프간인들을 채용했다. 1993년 5월 모든 관리직과 감독직을 맡기기 위해 파키스탄으로부터 3백-4백80명 정도의 동지들을 수단으로 불렀다. 이러한 숙련공들의 유입은 수단의 전략개발 프로그램을 수행하는 빈 라덴의 능력을 높여주었다. 1994년 초 빈 라덴은 북부 수단에 대규모 테러리스트 훈련캠프를 건설하고 운영하는 책임을 맡았다. 1996년까지 계속 수단에 머물던 빈 라덴은 23개의 무자히딘 훈련 캠프를 건설했다.이제 막 40대 중반의 나이가 된 한 명민한 공학도, 컴퓨터 공학 기술과 경영학을 전공한 최고 명문대학 졸업생 오사마 빈 라덴은 4명의 아내와 15명이나 되는 아이들을 데리고 동부 아프간에 있는 한 작은 동굴에서 살고 있다. 그곳에는 흐르는 물도 없고, 오직 한 겨울의 혹독한 추위를 막기 위한 원시적인 난방설비만 갖추어져 있을 뿐이다. 만약 아버지가 정해주었던 길을 그대로 따랐다면, 현재 그는 사우디의 존경받는 건설업자로서 억만장자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자진해서 그 모든 풍요로운 삶을 버린 채 황량하고 거칠고 힘든 상황에서 성전을 수행하는 길로 뛰어들었다.



빈 라덴은 1957년, 사우디의 리야드시에서 태어났다. 당시 그의 아버지 무하마드 빈 라덴은 일자리를 찾기 위해 예멘에서 이주해 온 소규모 건축업자이자 도급업자였다. 오사마는 무하마드가 거느리고 있던 수많은 자식들 중 한 명이었다. 5-6명의 아내들로부터 50여 명의 자식들을 얻은 무하마드는 인생에서 교육과 계발의 중요성을 깊이 인식하고, 자식들에게 제대로 된 교육환경을 제공하기 위해 노력했다. 1970년대에 일어난 오일 붐은 무하마드의 운명을 완전히 바꾸어놓았다. 당시 거주하던 히자즈의 개발 붐 덕분에 사우디의 엘리트들과 직접적인 접촉을 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얼마 후 그는 유력한 건설업자이자 '대의'를 위해 사용될 자금의 돈세탁과 같은 신중한 사업의 대리인이 되었다. 또한 고위층과의 접촉으로 무하마드는 자신의 사업체를 중동 전체에서 가장 거대한 건설회사(빈 라덴 건설회사)로 성장시킬 수 있었다. 오사마의 운명은 아버지의 전철을 따라 살아가도록 예정되어 있었다. 그는 제다의 고등학교에 입학했으며, 사우디에서 가장 좋은 학교들 중 하나인 제다의 압둘 하지즈 대학에서 경영학과 경제학을 공부했다. 당시 제다는 세계 전역에서 추방당한 진보적인 이슬람 지식인들을 위한 피난처였다. 빈 라덴이 다닌 압둘 아지즈 대학은 이러한 지식인들이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는 중심지였다.



1975년 미국과 서유럽을 종종 드나들어 의식이 서구화된 파이잘 이븐 무사이드 왕자가 존경받는 파이잘 왕을 암살하고 왕위에 오른 사건은 사우디의 기득권 세력과 양심적인 엘리트들 모두에게 사악하고 위험한 서방세계에 대한 이슬람주의자들의 경고를 증명하는 뚜렷한 증거로서 받아들여졌다. 결과적으로 이 사건은 풀뿌리들의 저항을 불러일으키고 빈 라덴을 포함한 수많은 젊은이들을 이슬람주의의 장으로 되돌려 보냈다. 1970년대 이집트에서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도 사우디의 엘리트들에게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미국으로부터 정치적, 경제적인 도움을 받기 위해 이스라엘과 일련의 잠재적인 협상을 체결한 이집트 대통령 사다트 사건, 1979년 2월 이란에 귀국한 호메이니가 이란의 왕을 몰아내고 세운 이슬람 공화국 사건, 1979년 11월 메카에서 벌어진 반란사건 등은 이슬람인들에게 하던 일을 멈추고 그들이 살고 있는 사회와 이슬람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하게 만들었다.



본격적인 도화선은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1979년이 저물 무렵, 소련이 대규모 무장병력을 동원해 아프간을 공격한 사건이었다. 당시에 빈 라덴을 비롯한 전세계 대부분의 이슬람교도들은 몹시 동요할 수밖에 없었다. 그 당시 아프간은 소련이 후원하는 공산주의정부가 지배하고 있었다. 그런데 아프간 정부는 파키스탄이 후원하는 이슬람 반란군의 도전을 받게 되었다. 공산주의 정권이 점점 더 위기를 맞이하자 무장한 소련 군대는 아프간을 향해 진격한 것이다. 소식이 전해지자, 이슬람 세계 전역에서 분노의 불길이 타올랐다.



빈 라덴은 소련의 침공 이후 아프간을 찾아갔던 첫 번째 아랍인들 중 하나였다. 라덴에게 있어서 소련의 아프간 침공은 그의 인생의 전환점이었다. 나는 '20세기 초강대국에 의해 포위당했던 한 사회에서 이슬람교도들이 곤경당하는 것을 보고 영감을 얻었다. ... 그는 아프간에서 보냈던 하루는 다른 나라의 평화로운 이슬람 사원에서 드리는 천일기도와 같았다.'고 말한다.



빈 라덴은 사재를 털어 병사를 모집하고 무기를 구입했다. 그와 함께 전쟁터를 누비면서 싸웠던 이슬람 전사들은 그를 '용감무쌍하고 두려움을 모르는 사람'으로 묘사했다. 그러나 거의 10년 동안이나 투쟁하면서도 끈질기게 버티던 아프간 저항군들은 거의 전멸 당하는 처지가 되었다. 그러나 라덴이 거두었던 성과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 즉 아랍 출신의 지원병들을 훈련하는 군사캠프를 세웠다는 사실은 이후 자신들만의 무자히딘(이슬람 전사) 군대를 조직하고 양성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놓았다.1996년 6월 25일 밤, 다란 부근 알 호바르 군사지역 내의 미군 구역을 빙 둘러싼 사우디 시설 안으로 2명의 남자가 유조차 트럭을 몰고 들어갔다. 이보다 앞서 그 트럭은 미군 병 사들이 거주하는 외국인 구역 안으로 들어가려 했으나 시간이 너무 늦었다는 이유로 출입 을 제지당했다. 두 남자는 31번 빌딩에서 80-100피트 떨어진 외부 담벼락에 트럭을 바짝 붙여 주차하였다. 그런 다음 트럭에서 내려 대기시켜 놓았던 흰색 시보레 카프리스 승용 차로 옮겨 탔다. 이 차는 사우디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것이었다. 그로부터 3-4분 뒤 트 럭은 폭발했다. 엄청난 폭발이었다. 미군 19명을 포함해 40명 가까운 사람이 목숨을 잃었 으며 수백 명이 다쳤다. 부상자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심한 화상을 입거나 실명했다. 인 근 고층건물은 전면이 내려앉았다.1998년 8월 7일, 2개의 폭탄이 두 곳의 미대사관에서 동시에 폭발했다. 폭탄이 터진 장소는 케냐의 나이로비와 탄자니아의 다르에스살람에 있는 미대사관 건물이었다. 이 폭발로 나이로비 미대사관 반경 4분의 1마일 이내에 있던 건물들의 창문이 모두 깨지거나 금이 갔다. 미대사관의 모든 문이 부서졌으며, 사람들이 건물 밖으로 퉁겨 나갔다. 다르에스살람 미대사관도 건물 한쪽 면이 완전히 붕괴되었다. 두 곳에서 폭탄테러로 모두 2백 50명이 사망하고 5천 5백 명이 넘는 사람들이 부상을 입었다. 그들 대부분은 아프리카인들이었다.



이것은 국가적인 차원의 지원을 받은 히즈볼라 국제조직이 저질렀던 폭파사건이었다. 수단과 파키스탄 정부도 이 사건에 가담했다. 최근 들어서 다시 규합되었던 히즈볼라 국제조직을 배후에서 조종했던 것은 바로 이란이었다. 이러한 미대사관 폭파사건은 정치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는 반면 폭파작전 자체에 대해 테러리스트들이 부담해야 할 위협은 아주 적었다. 그들은 현지 조직을 적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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