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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자의 진실 그리고 뒷모습

사마키 다케오 지음 | 글담
과학자의 진실 그리고 뒷모습

사마키 다케오 외 젊은 과학도 11명 지음/윤명현 옮김

글담/2001년 8월/231쪽/8,800원



제1장 진짜 발견자는 누구인가?

지동설의 진짜 주인공은 누구인가

옛날 사람들은 우주의 중심은 지구이고 그 주위를 태양과 달과 행성이 돌고 있다고 믿어 왔다. 그렇다면 코페르니쿠스에 의해 제기된 태양이 우주의 중심이라는 의문은 과연 처음으로 제기된 것일까? 그렇지 않다. 고대 그리스나 이집트에서도 이 같은 의문은 제기되어 왔으며, 한편으로는 ‘세계의 중심은 지구이고 태양은 그 주위를 돌고 있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이때, 이런 주장들에 이의를 제기하고 이를 합리적으로 증명하고자 노력한 사람이 바로 ‘고대의 코페르니쿠스’로 불리는 아리스타르코스였다. 그는 기원전 500년경에 발표된 피타고라스와 그 제자들의 견해, 즉 ‘지구는 태양의 중심을 돌고 있다.’, ‘화성과 금성은 태양 주위를 돌고 있다.’는 주장에 강한 영향을 받았다.

아리스타르코스 시대를 지나 약 1800년 후, 코페르니쿠스는 그때까지 프톨레마이오스와 기독교에 의해 강제되어 왔던 지구 중심의 세계관에 강한 의심을 품고 지금까지 부정되어 왔던 태양중심의 세계관을 부활시켜 보다 간결한 세계의 체계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코페르니쿠스가 스스로 천체를 관측하고 거기에서 얻어진 결과로 새로운 틀을 짜 나간 것은 아니었다. 그는 고대의 견해에 상당히 정통해서 서재에서 그것들을 부활시켰다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코페르니쿠스 바로 뒤에 등장한 사람이 덴마크의 천문학자인 티코 브라헤였다. 그는 당시 최고의 관측가였다. 망원경이 발명되기 전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상당히 정밀한 관측을 해냈다. 그의 관측결과는 그 후 케플러로 이어져 혹성의 궤도는 타원궤도라고 하는 케플러 법칙으로 이어졌다. 그 자신은 우수한 관측가였지만 그가 만든 우주체계는 여전히 지구중심이었다.

또, 티코 브라헤와 동시대인인 지오다노 브루노라는 사람이 있었다. 이탈리아의 사상가인 그의 우주체계는 완전한 지동설이었다. 그의 견해는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태양의 주위를 지구가 돌고 있을 뿐 아니라, 태양 자체가 운동하고 있다. 또한 다른 행성은 각각 태양계와 같은 계를 이루고 있으며 우주에 부동의 중심이라는 것은 없다. 우주는 무한하다.’ 현재의 우주론에 가까운 이 견해는 당시의 기독교 세계관과 모순된 것이었고 이런 이유로 브루노는 1600년에 화형당했다. 우주의 비밀을 밝히기 위한 이런 고난은 후에 나타난 케플러나 갈릴레이에게 길을 열어주는 역할을 하였다.

갈릴레이는 자신이 발명한 망원경을 통해 지구는 태양의 주위를 돌고 있는 한낱 행성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갈릴레이는 1610년 ‘별의 사자’에서 코페르니쿠스의 견해가 옳다고 천명하고, 1632년 코페르니쿠스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저서를 발간했다. 교회측은 즉시 갈릴레이를 이단으로 규정하고 모진 고문을 행했다. 갈릴레이는 고문에 못 이겨 자신의 주장을 철회했지만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그러나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돌고 있다는 직접적인 증거는 오랫동안 발견되지 않았으며 최종적으로 1838년 베셀에 의해 연주시차의 측정으로 확인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갈릴레이가 사망한 지 약 200년, 코페르니쿠스가 사망하고 약 300년이 지난 후의 일이다.

진화론은 과연 다윈의 작품인가?

다윈의 진화론 발표가 생물학의 대혁명이었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일이다. 그리고 일반사회에도 큰 충격을 주었다. 그러나 이 진화론이 과연 다윈의 독창적인 작품이었을까? 그렇지 않다. 다윈은 진화론 발표에 대해 상당히 신중했다. 그러던 어느 날, 이미 박물학자로 유명했던 다윈에게 월리스라는 젊은 학자가 편지를 보냈다. 동봉한 논문을 읽어주기 바라며 만약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을 발표하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거기에 동봉된 논문을 읽고 다윈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논문엔 그가 20년이나 연구해 온 진화론과 거의 같은 내용이 수록되어 있었다. 오래 전부터 연구를 계속해 오긴 했지만, 논문이라는 형태로 정리한 월리스 쪽에 발표의 우선권이 있었다. 고민하던 다윈은 결국 서둘러 논문을 써서 윌리스의 논문과 함께 발표했다. 보기에 따라서는 다윈이 월리스의 우선권을 침해한 것처럼 생각될 수도 있는 일이다. 이듬해인 1859년, 다윈은 그때까지의 연구를 집대성한 『종의 기원』이라는 책을 출판했다. 이것은 당시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결과적으로 다윈은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그러나 월리스의 이름은 이제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다윈이 태어난 1809년, 프랑스의 라마르크라는 학자는 『동물 철학』이라는 책을 세상에 내놓았다. 여기에서 라마르크는 생물학 전문가로는 처음으로 생물이 진화한다는 것을 확실하게 썼다. 또한 라마르크의 상사인 뷔퐁도 생물의 진화에 대해서 짐작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프랑스 왕립 식물원의 관장으로 명망 있는 귀족인 그는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공표하지 않았다. 거기에는 당시 프랑스의 사회정세와 깊은 관련이 있었다. 그리고 찰스 다윈보다 11살 정도 젊은 사회학자인 스펜서는 『종의 기원』보다 일찍 생물의 진화에 대해 발표했다. 또한 다윈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진화에 대한 생각은 이미 싹트고 있었다. 다윈의 집안은 대대로 의사 집안이었는데 그 중에서도 그의 할아버지인 에라스무스 다윈은 뷔퐁의 영향을 받아 생물의 진화를 테마로 한 시를 남겼다. 다윈의 진화론은 실은 할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것인지도 모른다.



제2장 어디서, 어떻게 잘못된 것일까?

티코 브라헤가 지동설의 증거를 찾지 못한 이유

당시에는 혜성이 천체에는 존재하지 않는 일종의 대기현상이라고 여겨졌다. 천체에는 어떤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 상식이었기 때문이었다. 이 상식을 뒤집은 사람이 티코이다. 1577년에 큰 혜성이 나타났다. 이때 그는 제자 한 명을 약 500Km 떨어진 곳으로 보내 동시에 혜성의 움직임을 관측하게 했다. 그 결과 500Km 떨어져 있어도 혜성이 보이는 위치에는 차이가 없다(시차가 제로)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사실은 혜성이 천체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당시의 일반적인 생각과 달리 혜성이 지구대기의 현상이 아니라 천체임을 입증한 것이다. 또, 그는 코펜하겐 앞 바다의 벤 섬에 당시로서는 세계 최대의 천문대를 세웠다. 그 곳이 ‘우라니보르크(하늘의 성)’이다. 물론 관측기기도 최고의 것들로 갖추었다. 논문 등을 인쇄하는 인쇄소까지 만들었다. 수많은 천문학자들과 직원들이 그곳에 머무르며 천체를 관측했고 가끔 왕족들도 찾아와 머물다 돌아갔다.

티코는 우라니보르크에서 수준 높은 관측을 통해 지동설의 증거 찾기에 돌입했다. 단서는 큰 혜성이 나타났을 때에도 성공을 거둔 ‘시차’였다. 만약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돌고 있다면 반년 후에 같은 별을 보더라도 시차가 있을 것이다. 그는 그것을 측정하려고 했다. 그러나 시차는 제로였다. 몇 번을 측정해도 시차는 제로였다. 무엇보다 데이터를 중시하던 티코는 지동설의 단서를 찾는 데 실패했다. 그러나 이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는 우주의 크기를 지나치게 작게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항성은 너무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반년의 위치 변화로는 시차가 검출되지 않았던 것이다. 당시의 기술로는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른다.

그는 덴마크 왕으로부터 자금원조를 받고 있었는데 1588년 프레데리크 2세가 세상을 떠나자 원조금이 줄어들기 시작해 96년에는 마침내 모든 원조가 끊기고 말았다. 그 후 3년 간 원조자를 찾던 티코가 간신히 정착하게 된 곳은 체코의 프라하였다. 신성로마 황제 루돌프 3세가 원조의 손길을 내밀어 주었다. 그는 동시에 우라니보르크에서 가져 온 자료를 정리할 조수를 찾고 있었는데 1600년 그 조수를 만나게 되었다. 그가 바로 케플러였다. 티코가 세상을 떠난 후 그의 엄청난 관측 데이터는 제자인 케플러에게 넘겨졌다. 그리고 그 유명한 케플러의 법칙이 탄생했다.

너무 앞선 학설, 생물학계로부터 버림받다 - 올프

배엽(胚葉)이라는 말이 만들어진 것은 18세기 독일에서이다. 그 당시에는 생명현상 전반에 기계론적인 견해가 도입되어 있었다. 예를 들면, 무에서 유는 생길 수 없는 것이므로 정자와 난자 속에는 이미 작은 태아의 구조가 있고 그것이 커서 볼 수 있게 된 것이 ‘발생’이라는 견해였다. 이렇게 당시의 생명에 대한 기계적인 내용은 지나치게 단순한 경향이 있어 반발도 있었다. 특히 독일에서는 낭만주의적인 자연철학의 전통이 있어 생명을 신비하게 보는 경향이 있었다. 따라서 생명에 대한 기계론적인 견해에 대한 반발이 특히 컸다. 그런 생각을 생물학 연구에서 언급한 사람이 독일의 올프이다.

캐스퍼 브리드리히 올프는 베를린 의학교의 졸업 논문 테마로 ‘발생’을 선택했다. 그리고 그 재료로 예로부터 사용되어 오던 달걀뿐 아니라 식물의 생장점도 관찰했다. 그는, 수정란 속은 아무런 구조도 없고 생명에만 있는 신비한 힘에 의해 그 생물의 몸이 형성되어 가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1759년, 「발생의 이론」이라는 혁명적인 박사논문을 출판했다. 이것은 당시의 학회에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따라서 기대하던 교수의 지위도 얻지 못했다. 결국 그는 러시아에서 교수직을 얻어 나머지 반생을 보냈다.

1768년 그는 러시아 학사원을 통해 「장의 발생에 대하여」라는 논문을 출판했다. 여기에서는 닭, 특히 장의 형성과정에 주목한 연구를 발표했다. 발생 과정에서 1층의 평평한 세포층(배엽)이 통로로 만들어지고 다시 관 모양으로 닫혀서 장이 되어 간다는 것이다. 즉, 달걀 속에 관상의 장이 이미 만들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달걀 속에 태아이 형태를 만들게 하는 ‘본질적인 힘’이 있다고 상정했다. 이것은 무생물에게는 없는 신비로운 것이다. 이 때문에 기계론적인 사고가 주류를 이루던 당시의 생물학으로부터 무시당했다.

그의 사망 후 50년이 지나서야 그의 관찰이 옳았다는 것이 인정되었고 논문은 다시 주목을 끌었다. 게다가 배엽에 대한 견해는 많은 다세포 동물의 ‘발생’에도 적용할 수 있게 되었다. 발생이라는 현상을 단순한 기계론적 방법으로는 다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발생학에서 신비적 요소가 완전히 제거된 것은 20세기 이후의 일이다. 그러나 신비한 생명관으로 시작된 올프의 연구로부터 정확한 발견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은 참으로 신기한 과학의 아이러니이다.

제3장 과학자도 인간이다

철학자가 데리고 다닌 자동인형 - 데카르트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긴 17세기의 철학자 데카르트. 근대 철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며 추앙 받던 그에게는 언제나 이상한 소문 하나가 따라 다녔다. 그가 정교한 미소녀 인형을 여행할 때도 트렁크에 넣어 가지고 다닐 만큼 애지중지 아낀다는 것이다. 그 인형은 너무나 사람과 똑같았기 때문에 항해 여행 중 선장이 기분 나쁘다는 이유로 바다에 버렸다고 하는 이야기까지 떠돌았다. 조사를 해 본 결과 흥미로운 사실이 발견됐다. 그는 평생 결혼은 하지 않았지만 네덜란드에 있었을 때 하녀와의 사이에서 프란시느라는 딸을 얻었다. 그는 그 딸을 끔찍이 사랑했는데 5살 때 성홍열을 앓다가 죽었다. 그때 그는 너무 슬퍼했다고 한다. 즉 소문의 인형은 죽은 딸을 그리워하며 만든 것이리라. 또 이 프란시느 인형은 기계장치가 되어 있다는 설도 있었다.

데카르트 전기에도 위의 이야기에 대한 언급이 있다. 이 인형에 관한 이야기는 모두 단순한 소문이라는 것이다. 왜 이런 소문이 도는 것인가? 그가 살던 시대는 과학혁명기였다. 갈릴레이 등이 천체의 움직임을 기계적인 메커니즘으로 설명했고, 하비라는 영국 의사는 동물의 혈액순환에도 이를 적용하여 심장이 펌프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을 밝혀내고, 그것을 더욱 발전시켜서 동물의 생명활동 전체를 기계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동물기계론’을 발표했다. 이것은 사회에 별 저항 없이 받아들여졌다. 그것은 시계나 펌프 등 자동기계가 보급되기 시작하면서 사람들의 인식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물을 포함한 우리들이 육체가 기계장치로 되어 있다는 생각은 논리적으로는 이해가 되어도 감정적으로는 저항을 느끼는 부분이 있었다. 이러한 모순은 사람들의 마음에서 ‘동물기계론’을 불길한 것으로 느끼게 했으리라. 그리고 그 말을 꺼낸 데카르트라는 인물도... 그런 기분 나쁜 이미지가 이윽고 ‘딸 프린시느의 자동인형’이라는 기묘한 소문으로 나타난 것이다. 그리고 약 100년 후인 18세기 프랑스의 라 메트리라는 의사는 인간의 마음까지도 기계론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인간 기계론』이라는 책을 출판했다. 이후 생물학에서의 기계론적인 연구가 더욱 진행되면서 19세기에서 20세기에 크게 꽃을 피우게 된다.

제일 형편없는 과목은 생물 - 멘델

그는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학교에서의 성적은 끈기 있는 노력 덕분에 우수했다. 그러나 아버지의 사고로 경제가 어려워져 한때는 공부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의 누이동생이 결혼자금을 학비로 제공해 줌으로써 김나지움(우리 나라의 고등학교에 해당하는 독일의 중등학교) 철학과 2학년 과정을 수료할 수 있었다. 그는 이 과정에서 종교학, 철학, 순수수학, 물리학, 라틴어 등을 필수과목으로 선택했다. 그는 물리학에 흥미를 보였지만 자유선택과목인 박물학(생물학의 전신)은 배우지 않았다. 신학교 2학년, 그는 사제가 되었다. 성실하고 노력하는 타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멘델은 ‘사제’라는 직업에는 어울리지 않았다.

사제가 되면 사람들의 괴로운 모습을 접해야 했다. 그가 너무 고통스러워하므로 원장은 멘델을 새로 생긴 김나지움의 임시교사로 파견했다. 결국 그는 교원채용시험을 치르게 되는데 대학에서 배운 적도 없고 필요한 지식의 대부분을 독학으로 익혔으므로 당연히 낙방을 했지만 당시 물리학 시험관은 그의 자연과학에 대한 재능을 인정하여 원장에게 대학에서 교육을 받도록 추천해 주었다. 이렇게 해서 그는 빈 대학에 청강생으로 2년 간 수학하게 되었다. 이렇게 공부를 한 그는 다시 교원채용시험에 도전하였으나 불합격했다.멘델은 박물학에 대한 지식이 없었다. 그러나 지식이 없었기 때문에 오히려 그때까지의 상식에 얽매이는 일 없이 자유롭게 생각할 수 있었다. 그는 학력이 처졌기 때문에 창의적 사고로 새로운 방법을 시도해 큰 발견을 이루어 낸 것이다. 그는 8년에 걸친 완두콩 교배실험을 통해 유명한 멘델의 법칙을 발견했다. 그러나 당시에는 아무도 그의 연구결과를 인정해 주지 않았다. 그의 논문이 당시의 생물학적 상식으로 볼 때 함량 미달이었기 때문이었다. 당시의 생물학은 얻어진 결과를 전부 열거하여 많은 분량을 기술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나 멘델은 얻어진 데이터를 통계학적으로 처리, 간결하게 정리하여 명확한 결론을 내었다. 흔히 말하면 멘델은 너무 앞서 갔던 것이다. 시대가 그를 이해하는 데는 그 후로도 35년이라는 세월이 필요했다.



제4장 진실까지의 먼 여정

대륙이 움직인다, 지구의 비밀을 밝히기 위한 먼 여정 - 알프레드 베게너

세계지도를 보다가 바다를 사이에 둔 대륙의 해안선의 형태가 아주 비슷하다는 것을 깨달은 적이 없는가. 어쩌면 이것은 서로 연결되어 있었는지 모른다. 정확한 세계지도가 만들어지게 된 뒤부터 이런 사실을 느낀 사람은 적지 않았다. 그러나 이것을 제대로 설명하지는 못했다. 예를 들면, 영국의 철학자 프란시스 베이컨은 1620년에 이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러나 설명은커녕 가설도 세우지 못했다. 그리고 그 뒤를 이은 사람들은 전설의 아틀란티스 대륙이 가라앉아 바다가 되었다든지 노아의 대홍수로 대지가 바다가 되었다는 등의 설로 설명하려 했다. 이런 혼란스런 상황 속에서 과학의 눈을 가지고 이 문제에 뛰어든 과학자가 있었는데 그가 바로 이단아 알프레드 베게너이다.

알프레드 베게너는 1880년 11월 1일 베를린에서 태어났다. 원래는 천문학에 흥미가 있어 베를린 대학에서 천문학을 전공했다. 그러나 이후에 기상학에 눈을 돌려 졸업한 후 항공연구소에서 근무했다. 그는 이곳에서 기구(氣球)를 사용하여 고층기상을 연구하고 있었는데 덴마크의 탐험가가 그린란드를 탐사한다는 뉴스를 듣고는 탐사대에 동행했다. 11년이라는 장기간에 걸친 탐사에서 그는 연이나 기구를 날려 상층대기를 관측했다. 귀환 후 그 공적이 인정되어 마르부르크 대학의 강사가 되었고 주위로부터 재능을 인정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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