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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반의 성공

후지이 가오루 지음 | 글담
절반의 성공

후지이 가오루 지음/윤선미 옮김

글담/2000년 7월/250쪽/7,000원



1. 욕심이 지나쳐 몰락하다

스탈린 - 대숙청으로 악명 높았던 소련의 최고 권력자, 지나친 독재로 고독하게 죽어가다

서기장이 된 스탈린은 레닌이 염려했던 대로 포악한 정치를 했다. 그의 잔혹함이 알려지면서 스탈린이 레닌을 독살했을 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세상에 퍼질 정도였다. 실제로 스탈린이 레닌을 독살했는지 안 했는지는 모르지만 그가 소비에트연방에 독약을 처방한 것은 사실이다. 로트츠키, 지노비에프, 카메네푸 등 정적(政敵)들을 차례로 숙청하고 당과 정부를 완전히 장악했다. 게다가 스탈린은 1인 독재가 지나쳐 ‘개인숭배’라고 하는 극단으로 치달았다. 스탈린이 악명을 높인 것은 그가 자행한 ‘대숙청’ 때문이다.

우선 스탈린 파의 주요인물이었던 키로프가 암살된 후 그의 암살을 도모했다는 이유로 반스탈린 파의 정적들이 차례로 총살되었다. 이러한 대숙청의 회오리는 특히 1936년부터 38년까지 심했다. 이 기간 동안 사실 무근의 스파이 혐의나 쿠데타 혐의를 뒤집어쓰고 처형된 군 수뇌부만 해도 55명이나 되었다. 이로써 소비에트연방은 공포의 나라로 변했다. 그는 반 스탈린 세력을 이 잡듯이 뒤져서 그 뿌리까지 찾아내어 고문과 암살을 일삼았고 그나마 운이 좋은 사람들은 강제수용소에 갇혔다. 마침내 그는 정적들을 모두 쓰러뜨리고 자신만의 왕국을 건설했다.

그러나 시간은 그를 고독한 노인으로 만들었다. 스탈린은 가족의 사랑도 잃어버렸다. 그의 두 번째 부인은 남편의 잔악한 숙청에 충격을 받고 오래 전에 자살했고 장남은 독일군의 포로가 되어 사망했다. 또 알코올중독자였던 차남은 방탕한 생활을 보냈고 딸과는 거의 만나는 일조차 없었다. 아무도 믿을 수 없었고 결코 마음을 허락하지 않았던 스탈린, 그는 뇌출혈로 쓰러져 불행한 삶을 마감했다. 혁명의 공로자도 공포의 대상이었던 숙청의 악마도 죽음에는 왕도가 없고 죽음의 길을 피해갈 수 없었다.

나폴레옹 - 프랑스를 사랑한 ‘카리스마 황제’, 자만심에 빠져 몰락하다

코르시카섬 출신의 일개 사관에 불과했던 나폴레옹! 프랑스혁명에서 포병사령관으로 두각을 나타낸 그는 정치적 혼란을 틈타 실권을 장악하고 군 최고사령관, ‘브룸웰 18일의 쿠데타’로 제1집정에 취임하고 1804년에는 황제가 되었다. 그리고 나폴레옹 전쟁이라고 불리는 유럽정복전쟁에서 대대적인 승리를 거두고 전 유럽을 정복했다. 내정에 있어서도 ‘나폴레옹 법전’을 제정하고 교육제도의 재건을 실천하는 등 뛰어난 통치능력을 보였다. 프랑스 국민들 사이에서 그의 인기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젊었을 때의 모습을 그린 나폴레옹의 초상화를 보면 작은 체구지만 그 몸에는 에너지가 꽉 들어찬 인상을 준다. 그러나 황제가 되자 그는 몰라보게 변해갔다. 가늘고 단단했던 몸은 둥글둥글 살이 쪘고 성격도 많이 변해 왠지 권태로우며 화를 잘 내고, 우유부단하며 집중력이 떨어졌다. 얼마 동안은 황제로서의 위엄과 영광을 유지했지만 어느 순간부터 부하들조차 더 이상 그에게서 영웅의 모습을 느끼지 못하게 되었다. 나폴레옹의 몰락은 1812년 판단을 잘못하여 한파를 만나 결국엔 추위와 식량으로 무참히 패배했던 러시아원정에서 현저히 나타났다. 1814년 4월 13일 나폴레옹은 아편을 마시고 음독자살을 시도했지만 죽지 않았다. 그 후 그는 영국 함대에 실려 유형지인 엘바섬으로 추방되었다.

엘바섬에서 탈출한 나폴레옹은 다시 한번 세력을 얻어 파리에 무혈(無血)입성하여 권좌를 되찾았으나 그의 부활은 오래가지 않았다. 1815년 6월18일 워털루에서의 패배로 황제의 ‘백일천하’는 종말을 고했다. 영국 정부는 황제를 세인트헬레나섬으로 귀양 보냈다. 이곳에서의 황제의 마지막 모습은 너무나도 비참했다. 잇몸질환과 충치, 기관지염, 양다리의 부종, 우측 상 복부의 둔통, 우측견갑골의 통증, 치질, 불면증과 심장의 두근거림, 호흡곤란과 실신발작 증상... 황제의 전신은 병마로 뒤덮였고 살아 있다기보다는 단지 숨쉬고 있는 존재에 불과했다. 1821년 5월 5일, 그는 51세로 숨을 거두었다.

나폴레옹은 황제가 되고 난 후 긴장을 늦춤으로써 멸망했다.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이기고 나서도 투구의 끈을 죄어라!’ 또는 ‘얕은 냇물도 깊게 건너라!’는 말처럼 강직하고 성실한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네로 - 로마제국의 황금시대를 연 ‘예술가 황제’, 부도덕한 행위로 자멸하다

‘황제’에서 ‘로마의 적’으로 몰린 그를 체포하기 위해 병사들의 말발굽 소리를 들은 네로는 호메로스의 서사시 ‘일리어드’의 한 구절을 중얼거리며 자신의 목에 날카로운 단검을 찔렀다. “급히 달리는 말발굽의 울림, 나의 귀를 울리는구나!” 폭군 네로의 최후는 그렇게 끝났다. 네로는 훌륭한 황제는 결코 아니었다. 그러나 적어도 그가 16세에 즉위한 후 처음 5년 간은 로마제국의 황금시대였다.

그는 당시 유명한 철학자였던 세네카와 친위대장인 역전의 용사 부르스를 요직에 두었다. 또한 원로원 위원들의 의견을 정중히 채용하는 등 온건한 정치를 펴고 있었다. 그가 펼친 처음 5년 간의 위대한 정치를 끝나게 했던 것은 그의 어머니 아그립피나 살해사건 때문이다. 그는 애인 폽파에나와의 결혼이 조강지처와의 이혼을 극구 반대하는 어머니로 인해 난관에 부딪히자 자신의 어머니를 국가반역죄로 몰아 죽였다.

문제는 그 후 황제 자신이 밤마다 어머니의 망령에 시달리면서 시작되었다. 그는 성밖으로 몰래 나가 거리의 술집에 출입하고 사람들을 협박하고 정숙한 부녀자를 덮치고 도둑질을 일삼았다. 또한 두 사람의 동성과 ‘결혼’하기도 했다. 계속된 비정상적인 행동으로 로마의 재정은 기울기 시작했고 민심도 차츰 그에게서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민심이 떠나게 된 결정적인 사건은 64년 7월에 일어난 ‘로마 대화재’였고 이것이 네로의 몰락으로 이어졌다. 화재 복구를 위해 국고는 적자상태가 되었고 화재의 책임을 묻기 위해 반역죄의 재판이 계속 이어졌다. 그 판결이 유형, 사형, 자살형이 되면 죄인의 재산을 몰수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일부러 죄를 뒤집어씌우기도 했다.

이렇게 시작된 공포정치를 견디지 못해 65년 피소라고 하는 인물에 의해 네로 암살계획이 세워졌다. 이 사건이 사전에 발각되어 그는 목숨을 건질 수 있었지만 황제 암살 가담자 중 네로 자신과 절친했던 세네카까지 포함되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은 황제는 그를 자살형에 처하고 더욱 공포정치를 가혹히 펼쳐나갔다. 68년, 로마의 속주인 갈아에서 윈데스크의 반란이 일어났다. 지금의 프랑스 리용을 공격한 사건이었는데, 여기에 카라코넨시스(스페인)의 속주 총독 ‘갈바’도 반란에 참여하여 결국 그가 네로 다음으로 황제가 되었다.

높은 지위에 있을수록 자신관리에 충실해야 한다. 만일 네로가 자신에게 주어진 특권을 적절히 사용할 줄 아는 절제력을 가졌었다면 세계 역사는 그를 위대한 황제로 기억했을 것이다.



2. 재능이 오히려 화근이 되다

헤밍웨이 - 퓰리처상과 노벨상을 탄 대문호, 우울증에 시달리다 자살하다

헤밍웨이의 소설에는 ‘남자다움’이라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무모한 모험에 목숨을 거는 남자들이 자주 등장한다. 그것은 다름 아닌 헤밍웨이 자신의 모습이기도 했다. 그의 소설에는 폭력과 죽음이 항상 따라다닌다. 여기에 걸맞게 그의 인생은 젊은 시절부터 전쟁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그는 1917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적십자 구호반으로 이탈리아전선에서 활약하였다. 이때 부상을 당하여 전신에 박힌 2백 개 이상의 포탄파편을 제거하는 대수술을 받았다. 나중에 이탈리아군에 입대한 헤밍웨이는 무공을 세워 이탈리아 정부로부터 훈장을 받았다. 그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모험가였다.

1920년대에 들어와서 그는 연속적으로 명작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헤밍웨이는 제2차 세계대전을 경계로 하여 약 10여 년 간 공백기간을 갖는다. 그러나 사실 이 시기에 그는 무모하리만큼 정력적으로 군복무에 몰두하였다. 1952년 그는 『노인과 바다』로 문단에 컴백한다. 늙은 어부와 상어간의 사투를 그린 이 작품으로 퓰리처상과 1954년 노벨 문학상 수상이라는 영예를 안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영광은 더 이상 길게 지속되지 않았다.

1954년 아프리카를 방문했을 때 그는 연속해서 두 번이나 비행기 추락 사고를 당했다. 타박상, 화상, 오른팔과 왼팔 탈구, 척추부상, 그리고 일시적인 왼쪽 눈의 실명... 그는 그때부터 급격히 바뀌어 갔다. 지병인 고혈압과 연소성 동맥경화, 여기에 그가 죽었다는 잘못된 부고가 전해질 정도로 큰 사고까지 당함으로써 헤밍웨이의 모습은 무서울 정도로 변해갔고 대단히 높은 고혈압과 점점 치솟는 콜레스테롤 수치만큼, 애주가인 그의 간장은 계속해서 나빠져 갔다. 그러나 더욱 심각한 문제는 그가 정신적 공황에 빠진 것이다. 이제 60세가 된 대문호는 현실세계로부터 일탈하기 시작했다.

그는 심각한 우울증에 빠지는 등 정신에 이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60년 자살소동이 일어났다. 그가 이런 정신상태로 제대로 된 문장을 쓸 리가 없었다. 1960년 케네디 대통령의 취임식을 위해 요청 받은 2, 3행의 헌사(獻辭)를 하루종일이 걸려서도 쓰지 못했다. “참으로 무엇 하나 떠오르지 않아.” 그는 이렇게 울며 그대로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자살미수를 거듭하던 헤밍웨이는 병원으로 가게 되었다. 그는 한시도 눈을 뗄 수 없는 자살지원자였다. 그는 결국 병세가 회복되지 않은 채 6월 30일 자택으로 되돌아왔다. 1961년 7월 2일 아침, 헤밍웨이는 자신의 두개골을 총으로 쏘아 자살하였다. 천정에는 핏자국이 선명했고 머리가 부서진 시체는 아무말 없이 현관에 쓰러져 있었다. 주변에는 피가 흥건히 고여 있었다. 그의 부인은 이 죽음을 단순한 사고사라고 발표했지만 아무도 믿지 않았다. 사냥의 명수가 총을 잘못 다루는 일이 있을 수 있을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모험가였던 헤밍웨이, 그러나 그의 말년은 끝없는 자살미수로 얼룩질 만큼 비참했다. 무엇이 그를 두렵게 한 것일까.

마릴린 먼로 - 진정한 배우가 되고 싶었던 ‘섹스 심벌’, 불안과 고독으로 자살하다

어느 날 오후 4시 반 경 프로이드의 제자인 정신분석학자 그린슨 박사는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마릴린 먼로였다. 심한 우울 상태로 많은 양의 약물을 복용한 듯했다. 그녀는 친구이자 광고담당자인 팟트에게 몹시 화가 나 있었다. 아마도 법무장관인 로버트 케네디와의 삼각관계가 문제였던 것 같았다. “세계 제일의 미녀인 내가 토요일 오후에 누구와도 만날 약속 없이 이렇게 혼자 있다는 것이 믿어지세요? 너무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녀는 화를 내며 박사에게 불평했다.

다음 날 아침 박사는 가정부로부터 다급한 전화를 받고 마릴린 먼로의 집으로 달려갔다. 문이 잠겨 있어서 할 수 없이 창문을 깨고 그녀의 방으로 들어갔다. ‘세기의 스타’는 침대에 가만히 엎드려 있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양어깨까지 옷을 벗은 채 얼굴을 누르듯이 하고 누워서 오른손에는 수화기를 꽉 쥐고 있었다는 것이다. 검시 결과 수면제 과다복용으로 인한 사고, 또는 자살로 결론지어졌다. 그러나 그녀의 죽음은 여전히 수수께끼로 남아 있는데 케네디 형제와의 관계나 CIA에 의한 암살설이 조심스럽게 제기되고 있다.

그녀는 열심히 노력했다. 스타가 된 후에도 연기를 전문적으로 공부했다. 실제로 ‘버스정류장’에서는 훌륭한 연기력을 보여주었고 ‘왕자와 무희’에서는 세계의 명배우 로렌스 올리비에와 공연하기도 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마릴린의 육감적인 매력밖에는 보려고 하지 않았다. 섹스어필이야말로 그녀를 일약 유명스타로 만들어 준 것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진정한 배우가 되고 싶었다. “나는 육체적 매력만이 아니라 진정한 아티스트가 되고 싶다. 은막의 성욕촉진제로만 알려지는 것은 싫다.” 그녀는 은막에서의 화려한 생활과 자신을 둘러싼 수많은 정사에 관한 소문 속에서 정신적인 고통을 겪었다.

그녀가 처음으로 정신과 의사를 찾은 것은 1954년이라고 한다. 그녀를 진찰한 프로이드의 딸 안나는 이렇게 진단했다. “현실에 대한 불안, 극심한 정신불안, 극도의 자살공포가 있다.” 무엇이 그렇게도 그녀를 불안하게 했던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진정한 여배우가 되고 싶다는 소망과 현실과의 거리감 사이에서 어쩔 수 없이 느끼는 불안이었을 것이다. 그녀는 항상 ‘연기가 제대로 잘 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걱정에 사로잡혀 있었고, 극도의 불안감 때문에 시간이 되어도 촬영장에 갈 수 없었던 적도 여러 번 있었다고 한다. 또 어머니 쪽의 가족 중에 정신병력의 피가 흐르고 있는 것도 그녀의 노이로제에 영향을 주었다. 자신도 그런 운명으로 떨어질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중절 수술을 거듭한 결과 배란관의 유착, 자궁 이상출혈 등이 있었고 담낭염, 결장궤양으로 입원하기도 했다. 의사는 결장궤양의 원인이 불안감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죽기 직전 그녀의 사회성은 거의 붕괴되어 있었다. 그녀는 낡은 목욕 가운만 걸치고 방안을 돌아다니며 계속 술과 약물을 마셔댔다. 주위는 온통 어지럽혀 있고 머리도 빗지 않았으며 몸에서는 악취가 풍기기까지 했다. 그녀가 집착한 것은 단 한 가지, 사람들에게 전화를 거는 것이었다. 전화수화기를 항상 베개 옆에 두고 지냈을 정도였다. 죽기 며칠 전에도 그녀는 평상시보다 더욱 많은 사람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렇게 함으로서 그녀는 어둠에서 구원을 얻고자 했는지도 모른다. 누군가 자신이 깊은 수렁에 빠진 것을 알아차리고 도와줄 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이다.

1962년 8월 4일 그녀는 자신의 방 침대 위에서 홀로 죽어 있었다. 그녀의 죽음은 아직까지 의문에 싸여 있다. 과연 진실은 무엇일까? 아직까지 그 누구의 눈에도 진상이 보여지지 않았지만 적어도 이렇게 말하는 것은 가능할 것이다. 불안과 고독이 그녀의 목숨을 단축한 것이라고. 그녀는 진정한 여배우로 인정받지 못한 것을 평생 괴로워했다.

‘사람들이 뭐라고 해도 나는 나의 길을 간다.’라고 생각하고 마음을 비울 수 있는 강인함이 있었다면 그녀의 인생은 훨씬 달라지지 않았을까?

와이즈뮐러 - 금치산자로 양로원에서 숨진 ‘타잔’

헐리우드에서 또 한사람의 슈퍼스타 탄생을 예고한 연기자가 있었다. 그는 정글의 타잔 역에 그야말로 ‘적격’이었던 인물이었지만 그 연기로 결국 불행한 말로를 걸었다. 타잔 역을 했던 연기자는 많이 있었지만 ‘사상 최고의 타잔 배우’라고 불리는 사람은 바로 6번째의 타잔, 조니 와이즈뮐러였다. 그 유명한 ‘아아아~~ 아아아~~’ 하는 타잔의 우렁찬 외침도 그가 생각해낸 것이라고 한다. 원래 그는 유명한 수영선수였다. 파리와 암스테르담에서 개최된 두 번의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5개나 획득하였고 현역으로 활동하며 세계기록을 67개나 수립했다. 국내대회에서는 52전 무패의 경이로운 기록을 달성한 슈퍼스타 수영선수였다. 그 후 배우가 된 그는 타잔 역할을 맡아 자신의 이미지를 만들어 왔는데 세월이 흐르고 육체의 노화가 찾아오자 더 이상 밀림의 왕자 역을 해낼 수 없게 되었다. 자연히 프로그램은 종료되었다.

관객들은 더 이상 그에게 주목하지 않았다. 그는 병이 들어 병원에 입원과 퇴원을 반복했다. 은퇴 후 벌인 사업도 모두 실패하고, 여기에 여섯 번의 결혼과 이혼을 반복하며 쌓인 위자료 등으로 거의 무일푼이 되었다. 급기야는 도둑으로 체포된 일까지 있었다. 말년에는 결국 치매증상을 일으켰다. 그는 75세 때 금치산자로 판정 받아 정신병원에 보내지게 되었다. 그곳에서 그는 한밤중에 ‘타잔의 우렁찬 외침’을 자주 질러 병원 전체를 뒤흔들어 놓아 강제퇴원 당한 적도 있었다. 1984년 그는 79세로 아카플코의 양로복지 병원에서 사망했다. 한때나마 세상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는 것은 연기자로서 참으로 행복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그 재능을 다른 역할에서도 펼칠 수 있었다면 더욱 좋았겠지만...



3. 자기관리에 실패해 정상에서 추락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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