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량노인이 되자
세키 간테이 지음 | 나무생각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여든 살이 되었구려. 친구들 중 많은 이들이 전쟁으로 죽고, 남은 사람들도 빗살이 빠지듯이 대부분 저 세상으로 떠나버렸습니다. 친구들 중에는 이제 '고려장'이라도 하는 게 낫겠다는 소리까지 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나 말입니까? 고려장이라니 천만의 말씀. 나는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인생은 지금부터라는 생각으로 삽니다. 지금도 50대 무렵과 다르지 않은 나날을 보내고 있지요. 오히려 '점점 기운 찬 영감님이 되어간다.'고 주위에서 어이없어 할 정도라오.
작가인 아라시야마 씨가 "간테이 영감은 기운만 넘치는 게 아니라 '색골'인 데다가 못 말리는 '불량노인네'라고 어딘가에 썼더군요. 연령으로 따지면 '영감'이라고 불리는 게 걸맞지요. 나는 이 한마디에서 아라시야마 씨다운 따스한 시선을 느낍니다만 단지 '색골'인 것도, '불량영감'인 것도 인정을 하겠는데 아직 '노친네'라고 불리는 것은 왠지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나는 '색기'도 지나칠 정도로 많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조각가입니다. 오랫동안 불교수행을 위해 방랑도 했습니다. 그리고 남자의 평균수명도 진작에 훌쩍 넘어갔습니다. 인격이 완성된 괜찮은 영감을 상상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지만 나에게는 역시 '불량노인네'가 더 어울립니다. 이런 말을 듣는 것이 내게는 '여전히 생명이 번득이고 있군요.' 하는 말을 듣는 것과 같으니까요. 색기라는 건 살아가는 데 위축되거나 지치거나 할 때는 발휘할 수 없는 것이므로.
내 안에서 이미 끝나버린 거라고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살아있는 한 어디서 무슨 일을 하든 현역으로 일하고 싶습니다. 나는 가정도 있고 손자도 있지만 여자친구들을 만나는 것을 감추지는 않습니다. 그럴 때도 싱글거리며 말할 뿐이지요.
모처럼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는데 외출하는 게 귀찮다고 술집 같은 데 가는 걸 꺼려하고, '여자들과 어울려 다니다니 그야말로 주책'이라는 식으로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나를 보고 "기운이 넘치는군요." 하고 말합니다. 생명은 원래가 기운이 넘치는 겁니다. 한껏 기운을 내지 않으면 그대로 사그라드는 게 생명인 거죠.
여성은 생명의 빛이 스러지지 않는 남성을 좋아하는 법입니다. 그 증거로 돈이 아무리 많아도 생명이 시들어가는 남자에게는 제대로 된 여성이라면 아무도 가까이 하려 하지 않습니다. 돈이 없어도 나날이 빛을 갈고 닦는 남자에게 연령차이라는 것은 이미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이건 내가 실감한 이치라오.나는 '벗기는 것'이 특기입니다남성의 착각 가운데 '마누라 하나만'이라는 게 있습니다. "선생님은 기력도 좋으십니다."라며 가볍게 야유를 해 오는 남자들이 대충 그렇습니다. 마누라 하나뿐이라는 게 왜 착각인가 하면 그것은 자칫하면 마누라에게는 '익숙해졌다'고 하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볼 게 없다는 뜻이겠지요.
그런데 남자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마누라의 마음을 알고 있기나 한 걸까요? 단지 익숙해졌을 뿐 마누라의 전체 마음 중에서 눈에 보이는 부분밖에 보지 못하는 건지도 모릅니다. 마누라는 만족하고 있을 거라고 믿고 있지요. 참고 있을 뿐일지도 모르는데 말입니다. 더 심한 여자는 어쩔 수 없어서 살아준다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아내와도 적당한 긴장이 있는 게 좋습니다. 그 또한 살아 있다는 의미이므로.
여성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상대가 "선생님, 저 좋아하세요?" 하고 묻지요. 아내가 옆에 있어도 나는 이럴 때 "그럼, 좋아하지." 하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쩔 수 없습니다. 사실이기 때문에 거짓말을 할 수는 없지요. 그러면 아내와의 사이에 긴장이 생깁니다. 한번은 한 여성이 우리 집에 놀러와서 그대로 묵게 되었습니다. 여름이라서 모기가 많았지요. 그래서 그 여성이 잠자는 2층 방에 모기향을 갖다 주려고 했더니 아내가 흘겨보더니 "뭔가 수상하네요." 하더군요.색기는 색기로 감응하게 마련입니다. 색기 없는 인생은 재미없지 않습니까. 나는 지금도 사람을 만나면 마음이 설레입니다. 특히 아름다운 사람이나 의기투합이 되는 사람을 만나는 경우에는 촛불이 흔들리듯이 스스로 마음의 살랑거림을 느낄 수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아름다운 사람이란 그 사람이 자아내는 분위기 같은 것이 아름답다는 의미입니다. 어딘가 모르게 아련하게 드러나는 초연함 같은 것 말입니다.
술기운을 빌려 "하루를 유쾌하게 보내고 싶으면 여자와 산책을 하라, 1년을 즐겁게 지내고 싶거든 사랑을 하라, 평생 즐거우려면 여자친구를 만들어라.' 따위의 이야기를 하곤 했는데 친구로 사귀고 싶은 여자는 그런 분위기가 겸비된 여성을 말합니다.
물론 성인군자처럼 언제까지고 계속 여자친구인 상태로 있어야 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나는 무엇보다도 여성을 만지고 싶습니다. '만지고 싶다.'는 것은 정확한 표현이 아닙니다. 여성의 부드러운 살갗을 만지고 싶습니다. 남자는 누구나 그런 생각을 하지 않던가요? 스무 살짜리나 80을 넘긴 남자나 그 점은 다르지 않습니다.
"절대 건드리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남자가 있었습니다. "어째서?"라고 물었더니 "전에 그러다 채였거든." 하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건드리고 싶지가 않은 게 아니라 겁이 나서 손을 대지 못하고 있을 뿐이죠. 대부분 그렇지 않은가요? 여자로 하여금 거부감을 느끼도록 손을 대니까 말이 나는 겁니다. 미숙한 거지요. 나는 여성이 만져주었으면 하고 바라도록 처신하지요. 친한 사람이 다가와 어깨를 톡 하고 치면 기뻐하지 않던가요. 그런 느낌입니다.
색기라는 것은 페로몬이라고 하는데, 그런 내분비액만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 법입니다. 마음이 움직이지 않으면 색기는 나오지 않습니다. 살아가는 일이 위축되어 있거나 '어차피 이 세상이라는 건...' 따위로 삐딱하게 살아서는 그런 게 나오지 않습니다. 좀더 순수해져야 합니다. 남의 말만 듣고 즉흥적으로 행동하는 성미로는 아직 거칠고 성가시기만 합니다. 초보 페로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이가 몇 살이든 상관없이 색기를 풍기는 남자가 있고 전혀 풍기지 못하는 남자도 있습니다.
그리고 우정도 사랑도 색기가 있는 곳에서 탄생합니다. 색기도 연애도 마음이 설레지 않으면 일어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자의 색기와 남자의 색기가 감응하는 곳에서 사랑이 탄생하고 남자의 색기와 남자의 색기가 있는 곳에 우정이 탄생한다는 건 만고의 진리입니다. '사랑은 옛날 이야기'라든가 '여자는 이제 졸업했어.' 따위로 말하는 중년남자는 마음이 설레지 않는다는 사실을 자백하고 있을 뿐입니다. 나는 80이 지나도 마음이 설레기 때문에 사랑을 하고 싶고 남자의 색기를 매우 소중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색기가 있는 사람은 남녀를 불문하고 누구든 좋아하지요.나는 그림을 그리기 위한 여행도 많이 했습니다. 나더러 미(美)가 뭐냐고 묻는다면, 흔들리며 움직이는 것이고, 풍경의 미는 깊숙이 펼쳐지는 것이라고 대답하겠습니다. 자연 속에는 무수한 생명이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산천초목실유불성(山川草木悉有佛性)'이라고 합니다. 이 세상에 있는 것, 살아 있는 것은 모두 불성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산과 강, 풀과 나무에도 불성이 있습니다. 살아 있다는 의미입니다. 생명은 흔들림 그 자체입니다.
나는 그걸 확인하기 위해 풍경을 그립니다. '수묵화를 그리는 사람은 천 리를 걸어라.'고 합니다. 이것은 그만큼 걸으면 그림이 잘 된다는 의미입니다. 그 정도로 걸어야 비로소 풍경의 동요를 깨닫는다는 의미입니다. 전에 스케치 여행을 할 때, 안개에 덮여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모두 이상하게 생각했지만 나는 '저 사람은 천 리를 걸었군.' 하고 생각했습니다. 풍경은 심안으로 보는 겁니다.
옛날 사람들은 모두 풍경 속에서 움직임을 느끼고, 불성을 느꼈을 것입니다. 지금 사람들은 그런 점에서는 한없이 둔감해져 있습니다. 느끼지 못한다는 것은 이 땅 위에 있는 공기의 두께를 알지 못한다는 것과 같습니다. 무수하게 많은 불성을 깨닫지 못하는 거죠. 예를 들어 50대 정도의 남성과 이야기를 하면 어김없이 '노후가 불안하다'고 합니다. "갚아야 할 대출도 있고, 저축해 놓은 것도 얼마 안 되고, 묘지 준비도 안 되어 있고, 묘지가 대충 얼마나 합니까? 아마 꽤 비싸겠죠?"
이래 가지고는 마음의 불안이 언제까지고 가시지 않습니다. 온갖 존재에 불성을 느끼는 것은 자연에 감응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죽음'이라는 것도 평소에 생각했던 것과는 다르게 보입니다. 그걸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죽음을 고구마 꼬랑지처럼 서서히 가늘어지다가 마지막에는 가뭇없이 사라져 버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죽음이 스르르 없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건 그때까지의 생명, 즉 고구마의 가장 굵은 부분이 흔들리는 일입니다.
여행을 나서는 것은, 대출금 갚을 생각에서부터 묘비명을 뭘로 할지까지 걱정하는 답답한 일상에서 일단 벗어나는 일입니다. 나는 이따금 풍경을 그리면서 그걸 느끼곤 합니다. 그림도 어차피 동요를 느끼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습니다. 아무리 그려본들 결국 진짜에는 미치지 못할 테니까.5. 인생, 타성이 생기면 끝장입니다
'탈선인생'을 좋아합니다다리는 걷기 위해 있는 것입니다. 몸과 마음을 옮겨가기 위해서 있는 겁니다. 걸으면서 다양한 사건이나 사람을 만나고 경험을 축적하여 인생에 대해 조금씩 깨닫게 됩니다. 인생의 시작은 걷는 데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입니다.
요즘 사람들은 '오늘은 기운이 없어서 걸을 수가 없다.'고 합니다. 이거야말로 완전히 잘못된 생각이지요. 걷다 보면 저절로 기운이 생기는 겁니다. 기운은 '기' 문제만이 아닙니다. 몸과 기가 하나가 되어 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저 책상 앞에 앉아 있으면 기운이 날 까닭이 없습니다. 각자의 다리로 걸어야 하는 겁니다. 두뇌만 명석하면 건강한 거라고 잘못 생각하는 사람도 많은데 그 머리를 지탱하는 게 바로 두 다리입니다. 다리가 약해지면 기운도 약해집니다.
옛날, 무예를 닦은 사람들은 참으로 보기 좋은 걸음걸이를 갖고 있었습니다. 무사라는 사람들은 잔뜩 거드름을 피우며 몸을 뒤로 젖히고 걸을 거라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미야모토 무사시를 다룬 소설에서도 볼 수 있듯이 무사들은 당당하면서도 무릎에 리듬을 갖고 약간 앞으로 구부려 걸었습니다. 소설에서는 마치 내가 눈으로 보기라도 한 듯이 묘사하고 있는데 사실 많은 무사 집안 사람들을 직접 보아도 그런 걸음걸이를 합니다. 이 걸음걸이가 가장 합리적이죠. 유사시에는 즉각 대응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결국 중심을 제대로 갖추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산을 그릴 때도 대개는 중심이 위로 가거나 아래로 가거나 해서 그 흔적을 선으로 그리면 삐죽삐죽한 산과 계곡이 점점 오른쪽 어깨 쪽으로 흐르는 듯한 느낌이 됩니다. 이러면 금방 지칩니다. 문방구에서 볼펜을 살 때 시험삼아 동그라미를 몇 개 무심하게 그려보듯이, 그런 요령으로 그리는 게 좋습니다. 중심을 부드럽게 옮기면서 매끄러운 원을 그리듯이 그리는 겁니다. 거리를 걸을 때는 중심을 옆으로 스르르 이동하듯이 걷습니다.
중심을 잡으면서 동시에 호흡을 정리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나는 그렇게 걷기 때문에 아무리 많이 걸어도 힘이 들지 않습니다. 수도승들은 산 속에서 안개에 갇혀버리면 소라고둥으로 나팔 소리를 냅니다. '부우웅-' 하고 말이죠. 호흡법을 제대로 터득하고 있는 수도승이 소라고둥을 불면 주변의 안개가 스르르 걷힙니다. 금방 다시 몰려들기 때문에 또 붑니다. 그렇게 하여 증폭되어 더욱 멀리까지 안개가 걷힌다고 합니다. 이것을 '안개 물리기'라는 기술이라고 합니다.
소라고둥을 불어 안개나 구름을 헤치고 걷는 것, 이건 사실입니다. 나도 소라고둥으로 나팔은 불지만 병나발을 부는 허풍을 부리지는 않습니다.나는 '불량노인' 혹은 '불량영감' 심하게 말하면 '뻔뻔한 영감'이라는 호칭을 갖고 있다고 했는데, 탈선을 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그렇게 불린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으로부터 탈선하고 있다는 걸까요? 누구나 생각하기 쉬운 상식적인 '노인다운 생활'로부터 탈선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 생활로부터 분명 탈선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직 완성되어 있지 않은, 성장중인 사람입니다."라고 말하는 겁니다.
고목이든 어린 나무든 봄이 되면 새 잎이 나옵니다. 두 나무의 이파리를 봅시다. 봄에 나온 새싹에 젊고 늙음이 있던가요? 아니지요. 이파리는, 수령 7백 년이 된 고목이나 작년에 심은 어린 나무나 모두 똑같습니다. 7백 년이 지났기 때문에 위대한 것도 아니고 어린 나무의 잎이 더 싱싱한 것도 아닙니다. 어린 나무가 성장중이고 수령 7백 년 된 나무가 성장을 멈추고 있는 건 아닙니다. 생명은 똑같습니다.
내 행동을 보고 '나이에 비해' 어쩌구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 모양인데 생명에 나이가 무슨 상관입니까. 생명은 기운으로 정해지는 것입니다. 노인은 기운이 없는 게 당연하다고 치부하는 게 싫습니다. 분명 체력은 좀 떨어지고 몸의 기능은 저하되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체력이 떨어지는 것은 생명의 힘이 쇠잔해지는 것과 다릅니다. 이건 나무와 같은 이치입니다. 고목의 표피가 거칠어졌어도 잎을 틔우는 능력이 쇠잔해진 것은 아닙니다.
좋아하는 일을 열심히 하다 보면 생명은 늘 기운이 넘치게 됩니다. 나는 손에 늘 끌을 쥐고 작품을 하는 탓인지 제법 근육질입니다. 소식을 하고 있지만 눈앞에 차려진 음식은 뭐든 먹어치우고 술도 매일 밤 먹고 다닙니다. 매일 나가서 돌아다니고 그림도 매일 그립니다. 장기여행도 자주 하고 젊은 사람을 보고 "나이를 생각해서 무리하지 않는 게 좋을 거네." 하고 놀려주기도 하고 여성에 대한 관심도 남 못지 않습니다.
"여든 한 살 노인답게 굴어라." 이 말은 내가 듣기에 "생명을 좀더 고갈시켜라."라는 협박처럼 들립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고목이나 어린 나무나 생명을 불태운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입니다. 협박에 굴복할 수가 없다 이 말입니다.
대체적으로 나이 든 사람에게 "젊으시네요."라고 하면 좋아할 줄로 알지만 천만에, 착각입니다. 나는 절대 젊지가 않습니다. 같은 연배의 사람들은 종종 '나이를 먹어도 마음만은 젊다.'든가 '생각은 아직도 젊군.'이라는 말을 하는데 그것도 별로 반갑지 않습니다.
고목 옆에 어린 나무가 뿌리를 내렸다고 해서 어린 나무가 고목을 향해 "나이에 비해 젊군요." 하는 말을 하지는 않습니다. 살아 있는 한 생명은 모두 똑같습니다. 올해도 그 고목은 어린 나무와 똑같은 잎을 틔우고 있습니다. 이것은 비유로 말하는 게 아닙니다. 나무도 인간도 생물임에는 진배없습니다. 봄이 되면 울창한 숲으로 가서 나무에 귀를 대고 들어보십시오. 살아 있는 나무의 소리가 들립니다. 나무의 안쪽에서 들려오는, 물을 빨아올리는 소리와 내 몸 속을 흐르는 피의 소리가 공명하는 일도 있습니다.2. 불량이란 '시들지 않는' 삶을 말합니다
수행을 거쳐 '불량'에 도달했습니다1. 여든 한 살 불량 노인, 여전히 건재합니다
선생님, 어찌 그리도 기운이 넘치시는지?꿈에서 깨어나 첫 소리를 듣다
눈더미 속에서 스스로를 깨닫는 차고 부드러운 바람 한줄기기개를 가지면 마음은 자유롭습니다3. 남자들이여, 죽을 때까지 색기를 갈고 닦아라
우정도 연애도 색기가 있는 곳에서 탄생합니다마누라와도 타성에 젖어서는 안됩니다4. '여행'으로 인생의 때를 털어내고
여행은 자신을 만나기 위해'나팔'은 불지만 '나발'은 불지 않습니다나를 정말로 이상한 영감이라고 여기는 사람들도 많은 모양입니다. 며칠 전에도 아는 사람이 이런 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