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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량노인이 되자

세키 간테이 지음 | 나무생각
1. 여든 한 살 불량 노인, 여전히 건재합니다



선생님, 어찌 그리도 기운이 넘치시는지?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여든 살이 되었구려. 친구들 중 많은 이들이 전쟁으로 죽고, 남은 사람들도 빗살이 빠지듯이 대부분 저 세상으로 떠나버렸습니다. 친구들 중에는 이제 '고려장'이라도 하는 게 낫겠다는 소리까지 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나 말입니까? 고려장이라니 천만의 말씀. 나는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인생은 지금부터라는 생각으로 삽니다. 지금도 50대 무렵과 다르지 않은 나날을 보내고 있지요. 오히려 '점점 기운 찬 영감님이 되어간다.'고 주위에서 어이없어 할 정도라오.

작가인 아라시야마 씨가 "간테이 영감은 기운만 넘치는 게 아니라 '색골'인 데다가 못 말리는 '불량노인네'라고 어딘가에 썼더군요. 연령으로 따지면 '영감'이라고 불리는 게 걸맞지요. 나는 이 한마디에서 아라시야마 씨다운 따스한 시선을 느낍니다만 단지 '색골'인 것도, '불량영감'인 것도 인정을 하겠는데 아직 '노친네'라고 불리는 것은 왠지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나는 '색기'도 지나칠 정도로 많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조각가입니다. 오랫동안 불교수행을 위해 방랑도 했습니다. 그리고 남자의 평균수명도 진작에 훌쩍 넘어갔습니다. 인격이 완성된 괜찮은 영감을 상상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지만 나에게는 역시 '불량노인네'가 더 어울립니다. 이런 말을 듣는 것이 내게는 '여전히 생명이 번득이고 있군요.' 하는 말을 듣는 것과 같으니까요. 색기라는 건 살아가는 데 위축되거나 지치거나 할 때는 발휘할 수 없는 것이므로.

내 안에서 이미 끝나버린 거라고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살아있는 한 어디서 무슨 일을 하든 현역으로 일하고 싶습니다. 나는 가정도 있고 손자도 있지만 여자친구들을 만나는 것을 감추지는 않습니다. 그럴 때도 싱글거리며 말할 뿐이지요.

모처럼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는데 외출하는 게 귀찮다고 술집 같은 데 가는 걸 꺼려하고, '여자들과 어울려 다니다니 그야말로 주책'이라는 식으로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나를 보고 "기운이 넘치는군요." 하고 말합니다. 생명은 원래가 기운이 넘치는 겁니다. 한껏 기운을 내지 않으면 그대로 사그라드는 게 생명인 거죠.

여성은 생명의 빛이 스러지지 않는 남성을 좋아하는 법입니다. 그 증거로 돈이 아무리 많아도 생명이 시들어가는 남자에게는 제대로 된 여성이라면 아무도 가까이 하려 하지 않습니다. 돈이 없어도 나날이 빛을 갈고 닦는 남자에게 연령차이라는 것은 이미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이건 내가 실감한 이치라오.

나는 '벗기는 것'이 특기입니다



나를 정말로 이상한 영감이라고 여기는 사람들도 많은 모양입니다. 며칠 전에도 아는 사람이 이런 식의 충고를 하더군요. "모 대학에서 조교수를 하고 있는 여성이 구나다치에 사는데, 간테이 씨에 대해 '그 사람은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색골에다가 불량스럽다는 소문이 있으니까.' 하고 말하던데요." 그야말로 걱정도 팔자라고 해야겠지만 그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건 사실이야."라고 말해주었습니다. 나는 그 조교수인지 뭔지 하는 여성을 언제 꼭 소개시켜 달라고 그 사람에게 말해 두었습니다. 나는 그 조교수를 만나면 친구로 만들 수 있습니다. 나를 싫어하는 사람일수록 좋습니다. 그런 사람이 난 더 좋습니다.

'아무개가 싫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경계심이라는 무거운 갑옷을 입고 있지요. 이처럼 갑옷을 입은 사람은 반드시 마음 깊은 곳에서는 갑옷을 벗어버리고 싶어합니다. 우리 집에도 옛날에 쓰던 갑옷이 있는데, 정말 무겁지요. 마음에 갑옷을 입고 있으면 첫째 답답해서 견딜 수가 없어요. 그래서 갑옷을 입으면서도 한편으로 빨리 벗고 싶어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이야기는 간단하지요. 하기야 난 벗기는 게 특기니까.

어떻게 그런 테크닉을 배웠느냐고요? 이런 말을 하면 제가 지금도 여전히 불교수행을 하고 있는 사람 같겠지만, 결국 그것은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갑옷을 벗으면 상대의 갑옷도 벗겨진다는 것을 알았던 겁니다. 불교란 한마디로 말하자면 '벗기는 재주' 같은 것입니다. 자아, 집착, 욕심 등 인간의 마음속에는 늘 그런 것들이 진을 치고 있습니다. 그것을 지키려고 다른 사람과 충돌하기도 하고 결국에는 녹초가 되어 버리지요.

마음을 비우는(그런 게 가능하지도 않지만 그래도 비우려고 애를 쓰면 누구든 안될 것도 없지요.) 일은 자아를 죽이고 집착을 버리고 욕심에서 멀어지려는 행위입니다. 바로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인 미야자와 겐지처럼 무심하게 어린애처럼 웃을 수 있는 경지일 것입니다.

불교에 관심을 가진 것은 내가 10대였을 때 조숙하게도 '인간이란 무엇인가?', '나는 무언가?' 하는 등의 고민이 생길 무렵부터였지요. 오랜 세월을 지나서 간신히 얻은 그 해답이라는 것은, 뭔가를 얻는 일이 아니라 버리는 것 속에 있음을 알았습니다. 결국 나만 소중하게 여기고 몸에 달라붙어 있던 집착과 욕망(지금 젊은 사람들의 말로 하자면 자기중심)을 버리는 것임을 깨달았던 거지요. 활기찬 나날을 보내고 싶으면 갑옷을 벗듯이 여러 가지 군더더기를 벗어버리면 되는 겁니다.

나 자신은 갑옷을 겹겹이 입고 상대더러 '벗어던지라'고 해봐야 아무런 설득력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먼저 벗어던지는 겁니다. 그러면 마음은 더할 수 없이 가벼워지지요. 그러고 나면 다른 사람들의 답답한 갑옷이 그대로 보입니다. 그래서 '벗어던지라'고 말합니다. 이런 기술을 터득하면 사람 사귀는 일은 조금도 어렵지 않습니다. 오히려 즐겁기만 합니다.

2. 불량이란 '시들지 않는' 삶을 말합니다



수행을 거쳐 '불량'에 도달했습니다




나는 거칠 것 없이 표표히 살아가고 있습니다. 불량 노인은 바람과 같습니다. 아무 것도 제약하는 것이 없습니다. 매너는 그걸 지키는 게 재미있기 때문에 지킵니다. 나는 서른 살이 다 지나갈 때까지 독신으로 불교수행에 힘쓰고 있었습니다. 좌선을 하고 여러 서적을 탐독하고 훌륭한 스님이 있다는 말을 들으면 전국 어디고 걸어가서 가르침을 구했습니다. 그러다 결국 살아가면서 얻어지는 깨달음은 산 속 깊은 곳이 아니라 거리에, 그것도 사람들이 모이는 그런 곳에 있다는 생각에 이르렀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자기 안에 부처님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욕심대로 살거나 더러움에 싸여 살아갈지라도 동시에 자기 안에는 불성이 있다고 믿어야 합니다. 어쩌면 모두들 불성을 갖고 있기는 하지만 미처 버리지 못하는 욕심도 있는 것이라고 생각해야겠지요. 누구나 불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 불성이 서로 감응하면 비로소 마음과 마음이 통하는 교류가 생깁니다.

깨달음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 안에 있다는 것을 문득 깨달았던 것은, 가르침을 얻고 싶어 산에서 산으로 72일간을 걸어 신슈라는 곳까지 갔을 때였습니다. 그때 나는 도쿄 나카노에 있던 보선사의 노스님을 만나러 갔던 것입니다. 그러나 보선사는 전쟁으로 불타버렸고 노스님은 신슈의 절로 피신해 있었습니다.

가까스로 노스님을 만나 진리를 묻자 "그런 어려운 건 나도 잘 모르네."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때의 경위에 대해서 여기에 자세히 쓰지는 않겠지만, 실망해서 일어서는 나에게 노스님이 한마디를 더 하셨습니다. 돌아가는 도중에 지역 사람들이 처녀 죽이는 연못이라고 부르는 연못이 하나 있네. 마음이 내키면 거기서 하룻밤을 지새워 보게." 하룻밤 연못가에서 좌선을 하고 돌아오자 노스님에게서 엽서가 와 있었는데 그 엽서에는 단 두 줄의 글이 쓰여 있었습니다.

꿈에서 깨어나 첫 소리를 듣다 눈더미 속에서 스스로를 깨닫는 차고 부드러운 바람 한줄기



이 말의 뜻은, 차갑다든가 부드럽다든가 하는 것도 자신이 직접 체감해 보아야 알 수가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후에 다른 노스님 슬하에서 진지하게 수행을 닦고 밀교의 전법(傳法)을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보통 전법은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어 수행을 쌓고 나서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속세에 살고 있으면서 이것을 받았습니다.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지만 불교의 세계는 그렇게 너그러운 면이 있습니다. 그 이후로 나는 속세의 때에 파묻혀 살면서도 그것들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진리도 구원도 사람의 마음속에 있고 사람이 있는 곳에 진리가 있습니다. 진리가 하늘이나 고승의 독점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살아 있는 사람을 위해 종교가 있다고 믿는다면 '이 세상이 바로 연화국'이라는 생각이 쉽게 이해가 갈 것입니다.

기개를 가지면 마음은 자유롭습니다



진리를 깨닫고자 자신을 괴롭혔던 것은 '난행고행'이고 그것이 '거짓수행'임을 알고 나니 마음이 편안해졌습니다. 나는 작품을 만들 때도 밥을 먹을 때도 사람을 만날 때도 자신의 본질만을 응시하려고 합니다. '한 인간'으로서의 기개를 지니면 마음이 자유롭습니다. 한마디로 하면 기운이 넘치게 되었습니다. 무슨 일을 해도 즐겁습니다. 즐거운 일을 하는데 거리낌이나 두려움이 있을 리 없습니다.

자신의 본질을 찾으려면 허구로부터 계속 본류를 따라 거슬러 올라가 처음으로 시작되는 최초의 물 한 방울을 찾아내야 합니다. 내 경우 그 한 방울이 '내 안에 불성이 있음'을 깨달았던 것이고 '한 인간'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음을 알았던 것입니다. "이봐, 기운 내라구." 하는 격려를 받고 "알았어." 하며 고개를 끄덕여 나오는 기운은 줄줄 흐르는 가느다란 지류에 해당하는 물줄기일 뿐 진정한 힘은 되지 못합니다.

'아무 할 일이 없어도 살아가는 재주는 있다.'고 합니다. 그 재주라는 것이 사회와의 접점과 인간관계의 실을 뚝 끊어버리고 고물은 퇴장해야 된다느니 유유자적이라느니 하는 생각을 만듭니다. 살아가는 건 재주가 아닙니다. 어떻게 해서 자신의 생명을 눈부시게 만드느냐가 중요합니다. 나이가 몇이든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적극적으로 관여하지 않더라도 포기할 일은 아닙니다. 인간의 생명은 어느 먼 곳에서 환한 빛이 반딧불처럼 명멸하는 듯한 느낌이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만약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다면 생명이란 분명 그런 모습일 것입니다. 그것이 동요를 일으킵니다. 마음의 설레임, 즉 동요는 분명 확 밝아지거나 어두워지거나 하는 그런 것입니다. 그 흔들리는 아름다움 같은 것을 언제까지고 계속해서 지켜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처럼 깊은 내면의 동요를 젊었을 때는 몰랐습니다. 나도 오랜 동안 이치를 따져 세상을 보았기 때문이지요. 책도 어지간히 읽었습니다. 공부가 되긴 했지만 하지 않았던 것보다는 낫다는 정도입니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이치로는 알 수 없는 것이 많음을 안 뒤에야 생명의 빛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보이자 지금까지 시야에 없었던 '여성'이라는 존재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여성은 이치로는 알 수가 없습니다. 이치로 알려고 하면 영원히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치를 떠나면 금새 알 수가 있습니다. 안다는 말은 조금 다를지도 모릅니다. 여성을 통해 사람들 각자의 내면이 일으키는 '생명의 동요'가 더 잘 보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나는 '저잣거리에 나가봐야지.' 하는 생각으로 저녁이면 집을 나서는 것입니다.



3. 남자들이여, 죽을 때까지 색기를 갈고 닦아라



우정도 연애도 색기가 있는 곳에서 탄생합니다




색기는 색기로 감응하게 마련입니다. 색기 없는 인생은 재미없지 않습니까. 나는 지금도 사람을 만나면 마음이 설레입니다. 특히 아름다운 사람이나 의기투합이 되는 사람을 만나는 경우에는 촛불이 흔들리듯이 스스로 마음의 살랑거림을 느낄 수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아름다운 사람이란 그 사람이 자아내는 분위기 같은 것이 아름답다는 의미입니다. 어딘가 모르게 아련하게 드러나는 초연함 같은 것 말입니다.

술기운을 빌려 "하루를 유쾌하게 보내고 싶으면 여자와 산책을 하라, 1년을 즐겁게 지내고 싶거든 사랑을 하라, 평생 즐거우려면 여자친구를 만들어라.' 따위의 이야기를 하곤 했는데 친구로 사귀고 싶은 여자는 그런 분위기가 겸비된 여성을 말합니다.

물론 성인군자처럼 언제까지고 계속 여자친구인 상태로 있어야 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나는 무엇보다도 여성을 만지고 싶습니다. '만지고 싶다.'는 것은 정확한 표현이 아닙니다. 여성의 부드러운 살갗을 만지고 싶습니다. 남자는 누구나 그런 생각을 하지 않던가요? 스무 살짜리나 80을 넘긴 남자나 그 점은 다르지 않습니다.

"절대 건드리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남자가 있었습니다. "어째서?"라고 물었더니 "전에 그러다 채였거든." 하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건드리고 싶지가 않은 게 아니라 겁이 나서 손을 대지 못하고 있을 뿐이죠. 대부분 그렇지 않은가요? 여자로 하여금 거부감을 느끼도록 손을 대니까 말이 나는 겁니다. 미숙한 거지요. 나는 여성이 만져주었으면 하고 바라도록 처신하지요. 친한 사람이 다가와 어깨를 톡 하고 치면 기뻐하지 않던가요. 그런 느낌입니다.

색기라는 것은 페로몬이라고 하는데, 그런 내분비액만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 법입니다. 마음이 움직이지 않으면 색기는 나오지 않습니다. 살아가는 일이 위축되어 있거나 '어차피 이 세상이라는 건...' 따위로 삐딱하게 살아서는 그런 게 나오지 않습니다. 좀더 순수해져야 합니다. 남의 말만 듣고 즉흥적으로 행동하는 성미로는 아직 거칠고 성가시기만 합니다. 초보 페로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이가 몇 살이든 상관없이 색기를 풍기는 남자가 있고 전혀 풍기지 못하는 남자도 있습니다.

그리고 우정도 사랑도 색기가 있는 곳에서 탄생합니다. 색기도 연애도 마음이 설레지 않으면 일어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자의 색기와 남자의 색기가 감응하는 곳에서 사랑이 탄생하고 남자의 색기와 남자의 색기가 있는 곳에 우정이 탄생한다는 건 만고의 진리입니다. '사랑은 옛날 이야기'라든가 '여자는 이제 졸업했어.' 따위로 말하는 중년남자는 마음이 설레지 않는다는 사실을 자백하고 있을 뿐입니다. 나는 80이 지나도 마음이 설레기 때문에 사랑을 하고 싶고 남자의 색기를 매우 소중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색기가 있는 사람은 남녀를 불문하고 누구든 좋아하지요.

마누라와도 타성에 젖어서는 안됩니다



남성의 착각 가운데 '마누라 하나만'이라는 게 있습니다. "선생님은 기력도 좋으십니다."라며 가볍게 야유를 해 오는 남자들이 대충 그렇습니다. 마누라 하나뿐이라는 게 왜 착각인가 하면 그것은 자칫하면 마누라에게는 '익숙해졌다'고 하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볼 게 없다는 뜻이겠지요.

그런데 남자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마누라의 마음을 알고 있기나 한 걸까요? 단지 익숙해졌을 뿐 마누라의 전체 마음 중에서 눈에 보이는 부분밖에 보지 못하는 건지도 모릅니다. 마누라는 만족하고 있을 거라고 믿고 있지요. 참고 있을 뿐일지도 모르는데 말입니다. 더 심한 여자는 어쩔 수 없어서 살아준다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아내와도 적당한 긴장이 있는 게 좋습니다. 그 또한 살아 있다는 의미이므로.

여성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상대가 "선생님, 저 좋아하세요?" 하고 묻지요. 아내가 옆에 있어도 나는 이럴 때 "그럼, 좋아하지." 하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쩔 수 없습니다. 사실이기 때문에 거짓말을 할 수는 없지요. 그러면 아내와의 사이에 긴장이 생깁니다. 한번은 한 여성이 우리 집에 놀러와서 그대로 묵게 되었습니다. 여름이라서 모기가 많았지요. 그래서 그 여성이 잠자는 2층 방에 모기향을 갖다 주려고 했더니 아내가 흘겨보더니 "뭔가 수상하네요." 하더군요.

4. '여행'으로 인생의 때를 털어내고



여행은 자신을 만나기 위해




나는 그림을 그리기 위한 여행도 많이 했습니다. 나더러 미(美)가 뭐냐고 묻는다면, 흔들리며 움직이는 것이고, 풍경의 미는 깊숙이 펼쳐지는 것이라고 대답하겠습니다. 자연 속에는 무수한 생명이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산천초목실유불성(山川草木悉有佛性)'이라고 합니다. 이 세상에 있는 것, 살아 있는 것은 모두 불성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산과 강, 풀과 나무에도 불성이 있습니다. 살아 있다는 의미입니다. 생명은 흔들림 그 자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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