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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와 딸

아일린 굿지 지음 | 들녘
엄마와 딸

아일린 굿지 외 지음/최정미 옮김

들녘 미디어/2000년 2월/312쪽/7,500원



편집자의 말

갓 태어난 딸 리사가 내 품에 안겨 있을 때, 나는 이 조그맣고 순진한 아이에게도 오랫동안 이어온 우리 가문의 피가 흐르고 있음을 느꼈다. 지금도 나는 스물 네 살이 된 리사가 이러한 유전적 특성을 간직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는 놀랄 때가 있다. 우리 집안에서 어머니로부터 딸에게 전해진 유전적 특성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지독한 고집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나의 어머니 자넷은 레스토랑에서 함께 식사를 할 때마다 결코 내게 돈을 지불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어머니께 특별한 저녁 대접을 하고 싶을 때는 그런 점이 나를 화나게 하곤 했다. 내 딸은 어린 시절부터 엄마와 할머니가 경쟁이라도 하듯 계산서에 손을 뻗던 모습을 지켜보았고, 할머니가 계산서를 먼저 손에 넣으려고 몰래 손을 쓰는 것도 보아왔다. 지금은 레스토랑에 가면 리사와 내가 계산서를 가지고 씨름한다. “너 도대체 왜 이러는 거니?” 나는 그 애가 나보다 빨리 계산서를 손에 넣을 때마다 매번 화를 내며 말한다. “엄마한테 배웠을 뿐이예요. 엄마가 할머니에게 그랬던 것처럼 말이에요.” 나는 그 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밖에도 수천 가지나 되는 유전적 특성들이 어머니로부터 내게 전해졌고, 다시 내 딸에게 건네졌다. 하지만 대부분의 딸들은 그러한 유사점들을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딸들은 “나는 우리 엄마와 달라!”라고 말한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 그들은 어머니로부터 이어받은 특질을 인정하고, 결국엔 그것들을 사랑하게 된다. 딸은 어머니의 거울이다. 우리가 운이 좋은 딸이라면 어머니로부터 그런 유산을 더 많이 물려받았을 것이다. 내가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소중한 유산은 바로 담대함이다. 어머니는 암으로 사형선고를 받았을 때도 그 담대함을 지니고 계셨다. 어머니께서 보여주신 강인함과 불굴의 정신력, 그 옹골진 정신력은 내가 난관에 부닥쳤을 때 희망과 용기로 대처할 수 있는 힘이 되었다.

내 딸한테서도 나는 어머니의 정직함과 용기, 완고함, 그리고 가족들에 대한 헌신을 본다. 그러한 면에서 딸은 내 어머니를 닮았으며, 그것은 어머니로부터 내가 물려받은 것이기도 하다. 내 딸의 두 눈에서, 그리고 그 아이의 사려 깊은 행동에서 나는 다시 한 번 내 어머니를 본다. 때로는 내 자신의 모습이 딸아이의 눈 속에 있음을 발견하고 깜짝 놀라곤 한다.

가끔 나는 어린 시절의 추억을 떠올린다. 어머니와 나는 시장에서 산 물건들을 들고 먼길을 걷고 있다. 길을 걸으면서 나는 어머니께서 가르쳐주신 옛날 노래를 부르고 있다. 그 노래는 어머니가 어렸을 때 배운 것이다. 어머니는 지금도 그때의 기억을 나와 공유하고, 먼 훗날 나는 내 딸과 공유하는 것이다. 그 옛 노래는 아직도 내게 감미로운 회상으로 남아 있다. 그 회상 속에서 나는 따뜻했던 어머니의 품과 아름다운 목소리를 떠올린다. 바로 이러한 기억들 중에서 최상의 유산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 단편의 맛을 살리기 위해 12가지 이야기들 중에서 한 가지를 택해 전문을 싣고자 합니다.

찰리의 무덤

메모는 간단했다. ‘네 아버지가 그 아이를 묻었다. 집으로 오너라.’ 어머니의 필체가 아니었다. 아마 모건스턴 신부님이 대신 써주었을 거라고 로라는 생각했다. 어머니에겐 필체란 게 없었다. 로라는 다음 사흘 동안의 약속을 모두 취소하고 비서에게 비행기와 렌트카 예약을 부탁했다. 마침내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녀는 마음이 아팠다. 아버지를 보지 않으리라고, 아니 그렇게 가장하고 지냈던 오랜 세월이 가슴아팠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부모님을 다시 만나게 될 거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결코 바라지 않던 일이었다. 지금도 여전히 그렇지만, 이번 일은 그냥 넘어갈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어머니가 자신을 필요로 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아니, 그녀 스스로 필요 없는 존재인 것처럼 어머니에게 담을 쌓고 지냈는지도 모른다.

그 동안 로라는 꽉 짜여진 일정 속에서 바쁜 나날을 보냈다. 많이 배우지도 못하고 가난하게 살아가는 부모님을 생각하면 로라는 부끄러워 견딜 수 없었다. 힘겹게 얻은 경제적 독립과 자유를 빼앗기고 싶지 않았다. 크리스마스가 되면 로라는 백 달러짜리 지폐 두 장을 카드에 넣어 부모님께 보냈다. 그렇지만 고맙다는 인사는 한 번도 없었다. 20년 전쯤 로라가 장학금을 받고 대학에 가기 위해 집을 나온 이후로 그들 사이엔 연락이 없었다.

책은 그녀의 인생이었다. 그녀는 대학 전학년 동안 A학점만 받아왔다. 보조금이나 대출금, 그리고 장학금으로 연명하며 오로지 공부에만 열중했다. 여러 실험실에서 아르바이트하면서 그녀는 소중한 경험을 했고, 주변으로부터 신뢰도 얻었다. 대학원을 다니면서 기초 생물학을 강의하기도 했고, 한때는 대형 제약회사의 보조연구원으로 일한 적도 있었으며, 마침내 박사학위도 받았다. 미멧연구소에서도 가장 많은 연구지원금을 받는 연구원이었다. 그녀에게 부모는 누구에게도 발각되고 싶지 않은 치부였다. 그러나 부모의 생활태도를 지독히 혐오했음에도 불구하고 어느새 그것은 로라의 삶 속에 면면이 스며들어와 있었다.

초기에는 바빠서 집에 갈 수 없었다. 학교와 직장이 그녀를 붙잡아매고 있어 꼼짝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당시 그녀는 도도하고 자존심 강한 여대생이었다. 좋은 옷을 입고 책을 읽고 글을 쓸 수도 있었다. 수학과 화학 과목은 특히 뛰어났다. 연구소에서도 그녀의 능력을 인정해주었다. 미멧연구소는 그녀의 미래를 보장했다. 그녀는 주주총회뿐 아니라 이사회 때도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다. 그들은 보수적이긴 했지만 돈 많은 부자였고, 세련된 생활방식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과 같은 부류의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했다. 로라는 그들의 생활방식에 적응하려고 열심히 노력했다.

찰리가 죽었다. 아버지 역시 비슷한 지경에 처해 있었다. 그래서 엄마는 지금 그녀를 필요로 하고 있는 것이다. “다 옛날 일이야.” 그녀는 스스로에게 말했다. “넌 이제 마흔이 되잖아. 화해할 시간이 온 거야.” 언젠가는 부모님들도 돌아가실 거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하지만 하필이면 왜 찰리가? 찰 리가 죽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비행기에 탑승하면서 로라는 자신의 삶을 가만히 되짚어보았다. 일에서는 성공한 편이지만 인간적인 삶에서는 불행했다. 그녀에겐 애인이 없었고 데이트 한 번 해보지 못했다. 여자친구가 두 명 있었지만 그들과도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야 했다. 친구와의 사이에는 거짓으로 꾸며진 다리가 놓여 있었다. 자신이 중류층에서 자랐다는 이야기를 꺼낸 이후부터 로라는 자꾸만 거짓말을 덧붙여야 했다.

로라는 자신의 생활을 빈틈없이 관리했다. 친구를 사귀거나 파티에 갈 때, 혹은 바하마에서 달콤한 휴가를 보낼 때도 그녀는 끊임없이 가식을 만들어냈다. 최신 유행의 헤어스타일과 옷을 사고, 또는 침실을 묘하게 꾸미면서 친구들과의 단단한 끈이 한꺼번에 끊어지지는 않을까 두려워했다.

값비싼 청바지가 여행가방에 들어 있었다. 운동화와 얇은 셔츠도 몇 장 샀다. 아버지의 장례식에 대비해 검은 드레스 한 벌도 넣었다. 어머니만 만나고 나면 자신의 고층 아파트로 돌아갈 것이다. 그녀는 어린 시절 함께 학교에 다녔던 아이들을 그려보았다. 그들은 자신의 부모들이 그랬듯이 티들리 카페에서 서빙을 하고 있을 것이다. 또 주렁주렁 딸린 자식들을 키우면서, 낡은 트레일러와 녹슨 자동차를 보물처럼 여기며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생각만 해도 로라는 가벼운 경련이 느껴질 정도였다.

에니드는 딸 로라가 마을에 있는 도니의 집에 3일 동안 숙박을 예약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자기 아들이 쓰던 낡은 방을 무슨 모텔이나 되는 것처럼 돈을 받고 빌려주다니. 에니드는 상상할 수 없었다. 분명 도니가 제의했으리라 짐작했다. 도니의 낡은 집은 중심가의 우체국 바로 옆에 있었다. 그녀 역시 로라가 자기 집에서 머물지 않으리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로라가 도착하기로 한 날 아침, 에니드는 주위를 둘러보며 안절부절못했다. 무엇을 준비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집은 깨끗하게 치웠다. 남편은 식사를 마치자마자 소파에 누워 곤히 잠들어 있었다. 닭 스튜가 끓고 있었다. 지난밤에는 딸을 위해 케이크도 구워놓았다.

요즘은 아무도 닭을 돌보지 않는다. 찰리가 죽자 에니드는 말 두 마리와 어린 송아지 네 마리를 경매로 팔아버렸다. 이후 축사는 텅 비었고 에니드의 일상은 더욱 단순하고 공허해졌다. 집안 정리는 모두 끝났다. 이제 남은 일이라곤 기다리는 일뿐이었다. 그녀는 부엌을 서성거리다 남편의 잠든 모습을 들여다보았다. 잠이 들면 그는 정상인으로 보인다. 그러나 깨어 있을 때는 늘 왼쪽 얼굴이 돌아가버린다. 남편 역시 예전의 생활을 되찾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지만 지금은 그것마저도 포기해버렸다. 이제 반송장이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죽어가는 배우자의 모습을 지켜보는 것만큼 슬픈 일은 없다. 항상 자신이 먼저 죽기를 그녀는 기도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녀는 더 강인해졌다. 남편의 마지막 여생을 관조하며, 그가 먼저 죽기를 바랄 수 있을 만큼.

오늘 로라가 집으로 온다. 남편은 죽기 전에 로라를 만나야 했다. 로라 또한 아버지를 만나야 했다. 로라는 늘 기운이 철철 넘치는 소녀였다. 학창 시절에는 부모들보다 훨씬 더 영리했다. 그녀는 로라와 대화하려고 애썼지만 로라의 말을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럴 때마다 남편은 자신의 무지를 감추기 위해 미친 듯이 냅킨을 던져버리곤 했다. 하지만 에니드는 알고 있었다. 그것이 딸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에니드는 딸이 자랑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로 공부를 많이 하는 것이 인생에 유익하지만은 않을 거라는 생각도 했다. 지식은 영혼을 잠시도 쉬지 못하게 만드는 법이다. 그녀는 그렇게 믿고 있었다. 사실 그녀는 아는 것이 없었다. 그녀가 알고 있는 것은 단지 로라가 결혼한 후 여러 명의 자식을 낳아봐야 인생의 참맛을 알 것이라는 사실뿐이었다. 그러나 로라가 결혼을 하지 않을 것이며 자식 또한 낳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남편은 일곱 내지 여덟 명의 자식을 두고 싶어했다. 하지만 두 사람 사이에 태어난 아이는 단 한 명뿐이었다. 가엾은 로라! 혼자서 감내하기 힘든 고통을 그 애가 고스란히 물려받았던 것이다. 로라가 오늘 온다.

닭들을 쫓으며 로라는 대문으로 들어섰다. 너무나 똑같았다. 대문에서 현관으로 들어서는 길과 헛간, 모든 것이 거의 그대로였다. 믿을 수 없었다. 그때 백발의 키 작은 여인이 부엌문을 열고 나왔다. 로라는 어머니를 거의 알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소리나지 않게 문을 닫으려고 현관문을 열고 있는 모습이 낯익은 옛 기억을 상기시켜주었다. 어머니의 손가락이 너덜너덜해진 앞치마를 잡아당겼다. 20년 전쯤 벌써 쓰레기가 되고도 남았어야 할 앞치마. 로라는 기억을 더듬었다.

그녀는 차에서 내려 고요한 시골 풍경에 잠시 넋을 잃었다. 의식적으로 숨을 들이켰다. 이 고요함과 적막함이 너무나 친근하게 느껴졌다. “안녕, 엄마.” 그녀는 간단히 인사를 한 다음, 차에서 내려 어머니를 껴안았다. 어머니의 냄새도 그대로였다. 아이보리 비누 냄새와 베이비 파우더 냄새. “네가 집에 오니 너무 좋구나. 아버지도 너를 보면 무척 반가워하실 거야.” 어머니가 말했다. “아빠가요?”

로라는 예전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한 현관으로 발길을 옮겼다. 갈라진 현관 계단에 올라서자 낡은 커튼이 달린 문과 부엌이 보였다. 변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오히려 싱크대에 앉아 있던 얼룩은 더욱 커졌고, 커튼은 자주 빨아서인지 조금 얇아졌다. 벽지의 무늬도 더 희미해져 있었다. “여보?” 에니드는 남편을 부르며 거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어머니가 TV 끄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그곳에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그래야만 했다. 그래야 한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누가 당신을 만나러 왔는지 맞혀보세요. 일어나 앉을 수 있겠어요?” 어머니가 아버지를 일으키며 낮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신음소리와 함께 들려왔다. “들어오너라.” 로라는 모퉁이를 돌아 유년 시절의 기억이 묻어 있는 거실로 들어갔다. 거실 또한 그대로였다. 낡은 흑백 텔레비전까지도. 그러나 아버지는 달랐다. 많이 야윈 데다 몇 가닥 남지 않은 머리카락은 모두 백발이었다. 아버지는 소파의 한쪽 끝에 베개로 둘러싸인 채 앉아 있었다. 연필처럼 가느다란 다리는 담요에 덮여 있었고, 상처투성이인 손은 허공에 대고 피아노를 연주하듯 떨리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아버지.” 로라가 말을 꺼내자 그의 눈이 빛났다. 그러나 입은 여전히 다물고 있었다. 그녀는 아버지의 곁에 앉았다. 눈물 한 방울이 검버섯 가득한 아버지의 주름진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비... 비... 빌어먹을!”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다정하게 웃어주셨지만, 로라는 그 광경을 지켜보며 약간 당황했다. “아직도 말을 못해. 하지만 욕은 여전하시단다.”

로라는 아버지의 뺨에 입맞춤을 했다. 신선한 농장 냄새. 그녀는 들려 있는 아버지의 손을 잡고 무릎에 올려놓았다. 자신의 감정을 무어라 표현할 길이 없었다. “레모네이드 줄까?” 어머니가 물었다. “비... 비... 빌어먹을!” 아버지의 얼굴에 또 다시 한 줄기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로라는 가슴이 찢어질 것만 같았다. 어머니가 레모네이드 세 잔을 들고 거실로 왔다. 그리고 저무는 석양을 보기 위해 커튼을 열어젖혔다.

“멋진 자동차더구나.” 어머니가 말했다. “빌린 거예요.” “내가 빨간색 차를 좋아했잖니?” 어머니는 아버지를 안고 레모네이드 몇 모금을 마시게 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한 모금도 제대로 마시지 못했다. 레모네이드 액체가 아버지의 턱으로 흘러내렸다. “결혼은 했니?” 어머니가 물었다. “아뇨. 내가 자식들을 낳을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죠?” “잘 모르겠구나. 하지만 그렇게 바라긴 했지. 너무 늦은 감은 있지만, 지금도.”

자신을 낳아준 여자, 그러나 지금은 타인처럼 느껴지는 그 여인을 테이블 너머로 바라보며 로라는 아련한 슬픔을 느꼈다. 대화의 주제는 지극히 개인적이었다. 여전히 그랬다. 하지만 여전히 이 사람은 자신의 어머니였다. 로라는 가슴을 비집고 들어오는 정체 모를 친밀감에 몸을 떨었다. 이 집으로 들어오면서 다시 어린아이가 된 것이다. 아니, 그녀는 이제 더 이상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그녀는 생각했다. ‘편하게, 아주 편안하게 며칠만 참아내자.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그러고 나서 다시 내 아파트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하고 그녀는 중얼거렸다. 아버지는 로라에게서 손을 빼내고는 굳어버린 혀와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 입을 애써 움직이고 있었다. “네가 얼마나 머물 건지 궁금하신가 봐.” 어머니가 능숙하게 통역을 했다. “목요일에 돌아갈 거예요. 12시쯤 여기서 떠나야 해요.”

로라가 말을 하자 아버지가 어머니를 쳐다보았다. “오늘요? 오늘은 화요일이에요.” 고개를 끄덕이던 아버지는 다시 울부짖는 듯한 소리를 냈다. “아니에요, 여보. 이 애는 도니 씨 집에서 묵을 거예요.” 고통스런 죄의식이 로라를 움켜잡았다. “저... 여기서 잘 거예요.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아서 그랬던 것뿐이에요.” “폐라니, 무슨... 네가 편한 곳에 있으렴.” 아버지는 다시 한 번 손을 빼내어 손가락으로 소파를 쿡쿡 찔러댔다. 더 이상의 통역은 필요 없었다. “알았어요, 아버지. 집에서 잘게요.” 그는 다시 고개를 끄덕이고는 아내를 바라보았다. “배가 고프신 모양이야. 로라, 나 좀 도와주련?”

맛있는 냄새를 풍기며 냄비가 끓고 있었다. 로라는 어머니가 시키는 대로 식탁에는 2인분을, 커피 테이블에는 1인분을 차렸다. 어머니는 푸딩 반죽을 섞었다. 침묵은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눈을 감자 로라는 다시 한 번 어린아이가 된다. 아버지는 들판에서 저녁을 먹으러 집으로 온다. 찰리는 거실에서 만화영화를 보고, 로라는 마지못해 밥상을 차리고 있다. 그녀는 아주 멀리 멀리 떠나가고 싶었다. 이곳은 여전히 지긋지긋하고 초라하고 냄새가 난다. 변한 것이 없었다. “자, 여기.” 어머니는 닭고기와 푸딩이 담긴 접시를 로라에게 내밀었다. “내가 케이크를 식힐 동안 아버지 좀 도와드리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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