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생목록
재생목록이 비어 있습니다.
-
-
0:00 0:00
화면 너비 (여백)
좁게
보통
넓게
최대
배경 테마
글꼴
바탕/명조
돋움/고딕
글자 크기
작게
100%
크게
줄 간격
좁게
보통
넓게

행복한 마음

오동환 지음 | 세시
'버블 현상'이라는 경제 용어는 이제 흔한 말이 돼버렸다. 실체가 없는데도 부동산 따위의 가격이 상승하기 시작하면 많은 사람들의 투기 심리를 유발해 가격은 더 한층 상승일로를 치닫는다. 그러다가 갑자기 거품이 터져 꺼지는 것처럼 원래의 상태로 돌아가는 현상이 버블 현상이다.



거품 현상이 왜 무섭고도 기분 나쁘다는 것인가. 그 이유는 거품이 꺼진 뒤에는 어김없이 경기 침체와 공황 상태가 도래하기 때문이다. 1984-85년 겨울, 미국의 금리는 대폭 인하됐는데도 달러 시세는 급템포로 상승했던 사실이 그 대표적인 예에 속한다. 지금의 우리 경제가 바로 거품이 꺼져버린 상태이다.



그런데 경기나 주가 등 경제적인 요소에만 거품이 있는 것은 아니다. 인간에게도 거품현상이 있다. 예를 들어 맥주를 콸콸 따랐을 때 그 2/3는 거품으로 하얗게 채워지고 나머지 1/3 만이 맥주 컵 밑바닥에 액체로 깔려 있게 된다. 그런 맥주 컵 현상을 사람에 비유한다면 그게 다름 아닌 '버블 인간', '거품 인간'이라고 할 것이다.



하지만 불행이랄까, 다행이랄까 인간은 맥주 컵처럼 빤히 들여다보이는 투명체가 아니다. 그래서 2/3에 해당하는 속이 거품이며 실제 함량은 1/3밖에 되지 않는 것을 간파하기가 대단히 어렵다. 그러나 계산은 간단하다. 1/3의 거품 인간은 그 3배수가 돼야만 온전한 하나의 몫에 해당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흔히 인간은 현재의 직책이나 하고자 하는 일에 비해 자신의 거품 함량이 2/3인지 1/3인지에 여간 둔감하지가 않은 것이다. 또한 그런 사람을 조직체의 한 구성원으로 안고 있는 리더 역시 그런 간단할 수밖에 없는 산술에 몹시 둔감하다. 그렇다면 그런 조직체의 발전지수는 낮을 수밖에 없다.

조직체 구성원의 자기 혁신 내지 인간 개혁은 자신의 거품 함량부터 정확하게 자각하는 선에서 시작해야 할 것이다. 즉 자신의 성분에서 탄소와 같은 거품제가 전혀 없는 거품제로인 1백% 함량의 인간이 되는 길에 모두가 앞장서야 한다는 말이다.



어제의 자신보다는 오늘의 자신이 달라지고 오늘의 자기보다는 내일의 자기가 개선되고 개량되지 않고서는 아무 것도 기대할 수 없다. 그게 바로 자기 발전이며 자기 혁신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날마다 자신을 뜯어 고쳐야 하고 개량해야 한다. 물론 쉬운 일이 아니지만 그렇게 해야만 한다.



그러나 아무리 마음을 고쳐먹고 의식이 새로워져도 그 새로워진 의식에 따른 결심을 실천에 옮기지 못한다면 다 소용이 없는 일이 돼버린다. 개혁의 '혁'자는 고칠 혁, 가죽 혁자다. 따라서 '개혁'이란 '가죽을 바꾼다'는 뜻이다. 가죽을 바꾼다는 것은 목숨을 바꾼다는 뜻이나 마찬가지다. '즉 다시 태어남'을 의미한다. 그만큼 어려운 것이 개혁이다.



사회제도나 사회적인 규범 등 그런 약속의 틀을 뜯어고치는 것도 어렵지만 인간 개혁이란 더더욱 어렵다. 나라의 개혁이 어렵고 조직 집단의 개혁이 어려운 것도 인간 구성원 개개인의 개혁이 그토록 어려운 까닭이다. 생각을 확 뜯어고치고 발상을 뒤집는 데서 인간의 개혁은 시작돼야 할 것이다. 또 그것을 실천하는 데서 인간 개혁의 중간 결산과 최종 결산은 정리되고 마무리돼야만 할 것이다.1백여 명의 단원으로 구성된 장려한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들을 때마다 나는 한 가지 절실한 생각을 가눌 길이 없어진다. 그것은 오케스트라의 화려하고도 오묘한 화음만을 들을 수 있는 귀가 아니라 그 분음까지도 철저하게 하나하나 쪼개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곧 조직'이라는 화음 속의 '개성'을 들을 수 있는 귀를 가리킨다. 전체가 중요하면 그 전체 속의 부분도 중요하다. 조직이 중요하면 그 조직 속의 개체도 중요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다름 아닌 하나하나 개체의 악기들이다. 그것이 바로 개성이라는 것이다. 바이올린이 비올라와 다르고 플롯이 오보에와 다른 개성 말이다.



공자님 말씀의 '화이부동'은 오케스트라 연주에도 고스란히 해당된다. 화음은 이루지만 그 개체음은 각각 달라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제대로 된 귀라면 그 전체의 화음은 물론 개체음 하나 하나까지도 동시에 분리해 들을 수 있어야 한다. 즉 전체를 들으면서도 그 개체음 하나 하나를 놓치지 않고 듣는 귀이며 그런 분음을 감당할 수 있는 귀를 가져야 한다.



따라서 조직 사회의 리더가 화음만을 중요시하고 개성이라는 개체를 무시한다면 그 조직은 윤곽만 남을 뿐 저력은 없어지고 만다. 다시 말해 조직을 이끄는 사람이 그 조직의 화음만을 듣고 분음까지는 듣지 못하거나 듣지 않으려고 할 때 그 직장이라는 조직 사회는 껍데기 윤곽의 화음만에 이끌려 알맹이인 개성의 개체음을 잃은 멍청한 집단으로 전락할 뿐이라는 것이다.



뭉툭한 개성, 악기로 치면 타악기군이 역사를 창조해 왔다고 한다면 문화 예술은 뾰족한 개성, 즉 현악기나 목관 또는 금관 악기군이 빚어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망치와 같은 개성의 악기가 송곳과 같은 개성의 악기를 못마땅하게 여겨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트럼본 상사가 플롯 부하를 보고 자기를 닮지 않는다고 악단에서 배제하여서는 안 되며, 바이올린 상사가 첼로 부하더러 자신의 음색과 같지 않다고 해서 첼로라는 악기 자체를 악단에서 없애버린다면 오케스트라의 화음은 크게 이가 빠져버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나의 조직 사회에서 비슷한 행동 패턴, 비슷한 사고 패턴에 의한 '평균적 성격'과 '평균적 실력'만이 존중된다면 차라리 1백 개의 타악기군만으로 또는 1백 개의 건반악기군만으로 오케스트라를 창단하는 편이 보다 좋고 보다 손쉬운 일일지도 모른다.



일본의 평론가 에사카 아키라가 말했듯이 개성이 빛을 잃는 시대야말로 불행한 시대가 될 것이다. 복잡한 기계 문명의 메커니즘이 인간의 개성을 삼각형에서 사각형 또는 원으로 만들고, 다시 또 인간 집단 조직 내에서 빚어지는 불꽃튀는 날카로운 메커니즘이 개성을 그렇게 만들어간다면 그 조직은 속속들이 병들어 힘을 잃고 말 것이고 장차 비상을 위한 날갯죽지는 힘없이 떨어져 나간 상태가 되고 말 것이다.



악기끼리 서로 존중하고 개성끼리 서로 존중하며 화음도 분음도 존중하고 망치 같은 개성도 송곳 같은 개성도 서로 중요시하는 조직 사회일수록 그 오케스트라는 더욱 장려하고 더욱 현란하며 그리고 청중의 가슴을 더욱 뒤흔들게 될 것이 분명하다.망치와 송곳영국의 누가 지어낸 말인지는 몰라도 요즘의 우리 코미디언한테 걸리면 대뜸 이런 항변을 듣기가 십상이다. "아니, 그럼 이발관 아저씨는 매일 매일 겁나도록 행복하겠네! 매일같이 거울 속에서 머리카락을 반들반들하게 밀어내 다듬어야 하는 스님들도 매일 매일 겁나도록 행복하겠네!"



우리 나라 역사상 가장 행복했던 사람은 누구였을까? 이 물음에 초등학교 5학년쯤 되는 학생이라면 대뜸 "세종대왕이요!" 할 지도 모른다. 물론 세종대왕은 우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으로서 빛나고 빛나는 업적을 숱하게도 남겼다. 만족과 행복의 극치에서 온 백성의 존경과 찬사의 시선을 아침 햇살처럼 받았고 창조하는 삶의 반짝이는 성취감 또한 푸른 하늘 끝까지 닿을 정도로 벅차게 부풀어올랐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의 육신은 숱한 병고에 휘감겨 단 하루의 영일도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야말로 옥처럼 귀한 '옥체'가 비단결처럼 편안해야 할 터인데도 괴롭고 괴로운 고초와 고통의 나날을 살았다. 풍증으로 인해 얼굴 근육은 노상 실룩거렸고 소갈증으로 말미암아 연방 물을 홀짝거리며 마셔야만 했다. 그뿐이 아니었다. 잦은 부종으로 말만 '옥체'일 뿐이지 온통 헌 데 투성이였고 관절염과 신경통까지도 세종대왕의 옥체를 놓치지 않고 괴롭혔다.



그렇다면 그는 과연 한 나라의 왕이 아닌 한 인간으로서의 일신상의 행복을 어느 정도나 감지하고 있었을까. 임금이고 국사고 다 집어치우고 남들처럼 건강한 몸의 평민으로 다시 태어나 푸른 하늘을 마음껏 호흡하며 짙푸른 들판을 맘껏 내달리고 싶지는 않았을까. 분명 그랬을 것이다. 건강한 사람이야말로 이 세상 행복의 최고치 눈금에 랭크되어 있는 사람으로 여겼을 것이고 세종대왕 자신이 가장 부러워한 사람이었을 것이 분명하다.



독일의 위대한 종교 개혁가 마틴 루터도 쇠붙이 기술자의 아들로 태어나 중병을 자그마치 스물 네 가지나 앓아 '걸어 다니는 병원'이라고 불릴 정도로 평생 동안 온갖 병고에 시달렸다. 평생 가난한데다가 간질병과 정신이상, 시베리아 유형에 사형선고까지 받았던 도스토예프스키는 행복했을까. 권총 자살을 기도해 총알이 폐부를 관통했으나 기적적으로 살아난 막심 고리키는 행복했을까.



남들이 겉으로 봐주는 행복과 자신이 느끼는 행복은 전혀 다르다. 아무리 위대한 사람과 겉으로 보기에 행복해 보이는 사람도 뚜껑을 열어 그 속속들이 들여다보면 불행한 구석은 반드시 있게 마련이다. 아니 역사상의 위대한 천재 치고 그의 일신상 또는 가족 관계로 인해 불행하지 않았던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얼마나 역설적인 일이란 말인가.



완벽한 불행이 없는 것처럼 완벽한 행복도 이 세상엔 없다. 창조주 하나님은 결코 인간이라는 작품을 '완벽한 행복의 조건'으로 설계하지 않았다. 어디가 행복하면 어디가 불행하고 무엇이 넘치면 무엇은 반드시 모자라게 마련이다.책이 사람을 만든다는 말은 확실히 맞는 말이고 어김없는 말이다. 그러나 책이 사람의 물감들인 머리카락이나 색칠한 손톱, 발톱까지 만드는 것은 분명 아니다. 인간의 그런 신체 부위야 신의 감독 코치 아래 부모가 빚어내는 작품이지 책이 끙끙대며 만들어내는 작품은 아닌 것이다.



책이 사람을 만든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사람의 지식이요, 두뇌요, 생각이요, 마음이다. '아는 것이 힘'이라는 그 '아는 힘'이고,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그 '생각의 힘'이다.

그렇다면 사람에게서 지식과 두뇌를 빼거나, 사람에게서 생각과 마음을 빼내면 무엇이 남는가? 다시 말해 사람한테서, 그 사람의 삶에서 책을 빼면 무엇이 남는가? 그 답은 뻔하고도 확실하다. 원시인이 남고 미개인이 남는 것이 아닌가. 태초의 사람과 같은 사람이 남게되며 꽉 닫혀 열리지 않는 미개인이 남는 것이다.



2만2천7백69종에 1억3천6백75만여 권. 작년 한 해에 쏟아져 나온 우리 나라 신간의 책 숫자이다. 우후죽순이 아니라 우박처럼 쏟아지고 있는 것이 바로 책들이다. 그런데 그 많은 신간들 중에는 좋은 책도 많지만, 그렇지 못한 책들 또한 부지기수다. 그러므로 말할 것도 없이 많은 어중이떠중이 책들을 다 읽을 수도 없고 읽을 필요도 없다. 잘 가려 읽어야 하고 현명하게 골라 읽어야 함은 물론이다.

공자가 『주역』이라는 책을 하도 여러 번 읽어 그 책을 꿰맸던 가죽끈이 세 번이나 끊어졌다고 하지 않던가. 그렇게 읽으면야 아무리 차돌머리라 하더라도 그 글의 뜻이 머리를 뚫고 기억층을 통과해 흡수되게 마련인 것이다. 닭조차도 주인의 글 읽는 소리를 하도 많이 들으면 그 글의 뜻을 이해한다는 중국 송나라 때의 계창 일화는 너무나 유명하다.



그런데 요즘은 독서를 기피하는 풍조가 짙다. 미국에서는 '책을 잃어버린 세대'니 '무지의 세대'라는 말이 지식인의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한 지 이미 오래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미국이라는 나라의 앞날은 시계 제로의 암울함 그것일 수밖에 없다.



일본의 국력이 어디서 솟는가. 땅에서 솟는가 경제력에서 솟는가. 그건 아니다. 일본의 국력이란 바로 일상 습관화한 독서의 힘으로부터 치솟는 것이다. 일확천금이라는 말 대신에 '일독천금'이라는 말을 만들어 애지중지 쓰고 있는 사람들이 바로 일본인들이다. 책 한 권을 잘 만나 잘 읽으면 천금을 얻는 것보다도 낫다는 데서 지어낸 말이 일독천금이라는 것이다.



'작은 대국'으로 일컬어지는 대만의 독서 열기는 어떤가. 대만은 지난 90년부터 전국의 호텔 여관 등 숙박업소 객실에 『논어』를 비치한 국민이며 민족이다. 야한 비디오 따위나 들여다보고 앉아 있을 것이 아니라 비록 호텔, 여관방이라 할지라도 중국 인민의 사상을 대표하는 논어를 읽어야 한다는 권유며 부탁인 것이다.



책은 사람을 만든다. 지식과 두뇌를 만들고 생각과 마음을 넓혀 준다. 책은 문화를 창조하고 국력을 길러낸다. 찬란한 미래까지도 책이 열어 준다. 따라서 책을 읽지 않으면 역사도 더 이상 이어지지 않으며 한 마디로 망하고 만다. 모든 것이 끝나버리고 마는 것이다.나는 단 한 번도 골프장이라는 데를 가 본 적이 없다. 내가 골프를 치지 않는 이유는 매우 단순하다. 한 마디로 말해서 '사치일 뿐'이라는 생각이 평생 변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골프가 사치요, 신선 놀음이라는 이유보다도 더욱 절실하고 피부적인 이유는 골프 치는 비용이다. 거기에 한 가지 이유를 더 포개 얹는다면 골프라는 것이 엄청난 시간 낭비라는 바로 그 점이다.



비싼 양주가 아니면 어울리지 않는다는 룸살롱이라는 곳도 내가 자청해서 또는 앞장서서 으쓱대며 가 본 적은 한 번도 없다. 단 한 번 당구장에 들른 적도 없고 고스톱도 칠 줄 모른다. 장기와 바둑까지도 둘 줄 모른다. 78년도에 산 싸구려 손목시계를 20년째 차고 있고, 그해 구입한 소형 라디오를 지금까지 듣고 있다.



그렇다고 내가 17세기 영국 청교도가 환생한 몸도 아니고 지리산이나 계룡산에서 오랜 세월 도를 닦다 내려온 사람도 아니다. 수도승 또한 아니다. 내가 나의 무엇을 자랑하기 위해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인간이란 별로 큰 차이 없이 고만고만한 육신을 이끌고 어찌어찌 한평생을 살아가야 할 것이며 각자 육신에 담긴 영혼을 어떻게 하면 말라비틀어지거나 썩어 문드러져 악취 풍기지 않게 관리하고 지켜가며 값지고 위대하게 승화시켜갈 것인가를 잠시 생각해 보았을 따름이다.



몸무게가 70kg인 어른의 육체를 화학적 물질로 분류해서 분석하면 수분이 약 70%이고 나머지의 성분은 다음과 같다고 한다.



- 작은 새장 하나를 잿물로 겨우 씻을 만한 양의 석회

- 개구쟁이들이 장난감 대포를 한 번 쏠 정도의 포타슘(칼륨)

- 병원 조제실창구에서 나오는 약봉지 한 봉 정도의 마그네슘

- 성냥개비 3천 개 분량의 인

- 작은 못 한 개를 만들 만한 철분

- 보통 중간 컵으로 한 컵 정도의 설탕

- 세숫비누 다섯 개 정도를 빚어낼 만한 지방분

- 그밖에 몇 가지 작은 물질 등...



놀라운 것은 이런 인체 성분의 물질적 원가를 셈하면 겨우 몇천 원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설혹 일본 씨름 선수와 같은 2백kg짜리 거구라고 해도 그 육신의 화학적인 성분 값은 단돈 1만원을 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정신력은 어떠한가. 무게 1.3-1.4kg에 불과한 두뇌가 발휘하고 창조하는 힘의 차이는 그야말로 하늘과 땅 차이며 지구 전체와 모래알 한 개 정도의 차이에 비유할 만큼 엄청난 것이 아닌가.



사치도 허영도 모두가 육신의 몫이며 육신을 위한 것이다. 화학적 성분의 값, 단돈 몇천 원에 불과한 인간의 육신이 한 병에 2백만 원, 한 잔에 14만원이나 하는 루이 13세 코냑을 마신들 무엇하겠는가. 몇천만 원짜리 털 코트로 앞가슴을 가린들 무엇하며, 50만 원짜리 팬티로 밑을 싸매야만 고상한 걸음걸이가 더욱 부드러워진다고 하는 말이 다 무엇인가. 인간이 갈 길은 오직 '정신 만능의 길'이지 물질 만능의 길은 결코 아니다. 인간은 결코 육신만으로 사는 것이 아니다. 한평생을 사는 육신이야 잠

전문 열람 제한

미가입 상태이므로 요약본의 일부만 제공됩니다.
더 깊이 있는 내일의 통찰력과 지식 에너지를
프리미엄 무제한 이용권으로 충전해 보세요!

멤버십 가입 / 결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