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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마음

오동환 지음 | 세시
하늘은 마음의 거울이다



『장자』의 외편을 보면 발이 하나밖에 없는 괴수가 노래기라는 벌레를 부러워한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발이 하나뿐인 괴상한 짐승이 발이 많은 노래기를 부러워한다는 것이다. 2백 개나 되는 노래기의 다리가 아주 멋지고 근사해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발이 많은 노래기는 반대로 발이 하나도 없는 뱀을 부러워하고 있다는 것이다. 거추장스럽다고만 생각되는 발이 하나도 없는데도 뱀은 잘도 달리고 달아나기 때문이다. 또 뱀은 어떤가? 뱀은 바람을 부러워한다. 뱀은 몸뚱이를 일일이 땅바닥에 깔고 비비며 움직여야 갈 수 있고, 달릴 수 있지만 바람은 남의 눈에 띄도록 움직이지 않고도 멀리멀리 잘도 갈 수 있고 잘도 달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바람은 또 사람의 눈을 부러워한다. 사람의 눈은 그 자리에 멈춘 채 까딱하지 않고도 멀리 시야 끝까지 내다볼 수 있고 달려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사람의 눈이 부러워하는 것은 무엇일까? 다름 아닌 사람의 마음이다. 사람의 마음은 구태여 보려하지 않는데도 저절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마음에 도가 트이지 않은 사람은 자기 아닌 다른 사람이 가진 모든 것이 좋아 보이고 돋보이게 마련이고 부럽게만 여기기 십상이다. 남의 남편이 더욱 잘나 보이고, 남의 아내가 더욱 예뻐 보이는가 하면 남의 자식이 더 똑똑해 보이기 쉽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행복의 척도이며 무엇이 안락함을 재는 도량형기라는 것인가. 그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잔잔하고 깨끗한 마음 그것이다. 욕심으로 가득 찬 마음에서, 혼란과 갈등으로 부글부글 끓는 전장 같은 마음 터에서 결코 즐거움은 스며 나올 수 없다.

'곱게 화장을 한 얼굴을 비추어 주는 거울은 있어도 마음을 비추어 주는 거울은 없다.'고 읊은 시인이 있다. 그러나 필자의 생각으로는 '마음의 거울'이란 바로 우리 인간 모두가 머리에 이고 있는 거대한 하늘이 아닐까 생각한다.

'하늘'이라는 거울엔 늘 마음이 보인다. 구름 한 점 없이 쨍하게 갠 청자 빛 가을 하늘에서는 물론이다. 검은 구름장 끼고 소나기 비끼고 천둥이 우는 여름 하늘이나 마냥 무겁게만 느껴지는 칙칙한 회색빛 겨울 하늘도 마찬가지다. 그 '하늘 거울'엔 언제나 마음이 보이는 것이다.

'하늘 거울'에 비추어 보아 한 점 부끄럼 없는 그런 마음을 보전하고 지속하는 일이야말로 진정 값진 행복의 원천이 아닐까?

소중한 나날에 켜켜이 박힌 행복



대기업도 있고 중소기업도 있고 구멍가게와 같은 최소기업도 있다. 행복에도 대행복이 있는가 하면 중소 행복도 있고 최소 행복도 있다. 대기업을 소유하기란 어렵고 아무나 경영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중소기업 역시 아무나 할 수 있도록 쉬운 것은 아니다. 그러나 구멍가게와 같은 최소기업은 누구나 시도할 수 있고 가질 수도 있다.

대철학자를 '철학의 대가'라고 하고 대문학가를 '문학의 대가'라고 한다. 이때의 '대가'라는 말은 '큰 집'을 가리킨다. 오늘날의 큰 집이라면 사정없이 하늘을 찌르며 치솟은 빌딩부터 연상하게 된다. 그런 큰 빌딩, 곧 '대가'는 아무나 가질 수가 없다. 웬만한 빌딩이나 어지간한 큰 집에 해당하는 '중가'도 아무나 갖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소가'는 어떤가. 흥부네 집도, 춘양이네 집도 소가요 초가 삼간과 판잣집, 움막집도 소가다. 아무나 가질 수 있고 누릴 수 있는 것이 소가다. 마치 '학문의 대가'가 되기는 어렵고, '학문의 중가'가 되기도 쉽지 않은 일인데 비해 '학문의 소가'가 되기만은 쉬운 이치와도 똑같다.

행복이라는 것도 마찬가지다. 큰 행복은 얻기 어렵고 갖기도 벅차다. 중간치 행복 또한 거의가 그렇다. 그러나 작은 행복은 그렇지 않다. 작은 행복이야말로 아무 품에나 선뜻 작게 안겨들 수 있는 것이고 누구나 얻을 수 있고 가질 수 있는 것, 바로 그런 것이다.

작은 행복이란 행복의 분자요 행복의 원자이다. 그보다 작게는 나눌 수 없는 행복의 입자요 아톰(atom)이다. 더 이상 깨지고 흐트러질 수 없는 행복의 작은 알갱이며 원형질의 최소 단위이기도 하다. 행복이 설령 눈에 보이지 않는 기체와 같은 것이라면 그 기체를 이루는 기체 속 분자, 즉 콜로이드(colloid)와도 같은 것이 작은 행복이다.

하루하루 일과 속의 작은 일을 멋지게 완벽하게 해냈을 때의 뿌듯한 보람과 성취감, 그것이야말로 소중한 나날에 켜켜이 박혀 있는 작은 행복의 값진 보석들과 같은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말짱한 다리와 멀쩡한 엉덩이로 '맛있는 집'의 멋있는 창가에 앉아서 맛있는 음식을 먹고 있을 때, 그때 마침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음악이라도 흘러 준다면 그 얼마나 멋있는 작은 행복이겠는가?

망가지지 않은 멀쩡한 시력으로 저토록 깊어만가는 가을의 눈부신 청자 빛 하늘을 쳐다보는 것만도 얼마나 가슴 벅찬 행복이며 북한산 골짜기를 온통 새빨갛게 아우성치는 새빨간 단풍 잎새를 만나는 것만도 얼마나 가슴 두근거리는 작은 행복이란 말인가?

이처럼 아무리 작은 행복일지라도 일과성으로 흘려보내지 말고 소가 여물을 반추하듯이 반추해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다시 말해 아무리 작은 행복감일지라도 달콤하고 고소하게 곱씹어 반추해 보는 것이 좋다는 것이다.

그리고 한가지 더, 아무리 작은 행복감일지라도 그 깜찍한 행복감이 훌쩍 허공으로 날아가지 못하도록 그 날개를 접고 고정시켜 그림책 갈피에 채집도 하고 작고 아담한 액자에 넣어 걸어 두고 찬찬히 오래오래 뜯어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완벽한 행복도 완벽한 불행도 없다



'하루 동안 행복하려면 이발을 하라. 1주일 동안 행복하고 싶거든 결혼을 하라. 한 달 동 안 행복하려면 새 말을 사고, 한 해를 행복하게 지내려면 새 집을 지어라. 그러나 평생 동안 행복하려거든 정직하여라' - 영국의 속담

영국의 누가 지어낸 말인지는 몰라도 요즘의 우리 코미디언한테 걸리면 대뜸 이런 항변을 듣기가 십상이다. "아니, 그럼 이발관 아저씨는 매일 매일 겁나도록 행복하겠네! 매일같이 거울 속에서 머리카락을 반들반들하게 밀어내 다듬어야 하는 스님들도 매일 매일 겁나도록 행복하겠네!"

우리 나라 역사상 가장 행복했던 사람은 누구였을까? 이 물음에 초등학교 5학년쯤 되는 학생이라면 대뜸 "세종대왕이요!" 할 지도 모른다. 물론 세종대왕은 우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으로서 빛나고 빛나는 업적을 숱하게도 남겼다. 만족과 행복의 극치에서 온 백성의 존경과 찬사의 시선을 아침 햇살처럼 받았고 창조하는 삶의 반짝이는 성취감 또한 푸른 하늘 끝까지 닿을 정도로 벅차게 부풀어올랐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의 육신은 숱한 병고에 휘감겨 단 하루의 영일도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야말로 옥처럼 귀한 '옥체'가 비단결처럼 편안해야 할 터인데도 괴롭고 괴로운 고초와 고통의 나날을 살았다. 풍증으로 인해 얼굴 근육은 노상 실룩거렸고 소갈증으로 말미암아 연방 물을 홀짝거리며 마셔야만 했다. 그뿐이 아니었다. 잦은 부종으로 말만 '옥체'일 뿐이지 온통 헌 데 투성이였고 관절염과 신경통까지도 세종대왕의 옥체를 놓치지 않고 괴롭혔다.

그렇다면 그는 과연 한 나라의 왕이 아닌 한 인간으로서의 일신상의 행복을 어느 정도나 감지하고 있었을까. 임금이고 국사고 다 집어치우고 남들처럼 건강한 몸의 평민으로 다시 태어나 푸른 하늘을 마음껏 호흡하며 짙푸른 들판을 맘껏 내달리고 싶지는 않았을까. 분명 그랬을 것이다. 건강한 사람이야말로 이 세상 행복의 최고치 눈금에 랭크되어 있는 사람으로 여겼을 것이고 세종대왕 자신이 가장 부러워한 사람이었을 것이 분명하다.

독일의 위대한 종교 개혁가 마틴 루터도 쇠붙이 기술자의 아들로 태어나 중병을 자그마치 스물 네 가지나 앓아 '걸어 다니는 병원'이라고 불릴 정도로 평생 동안 온갖 병고에 시달렸다. 평생 가난한데다가 간질병과 정신이상, 시베리아 유형에 사형선고까지 받았던 도스토예프스키는 행복했을까. 권총 자살을 기도해 총알이 폐부를 관통했으나 기적적으로 살아난 막심 고리키는 행복했을까.

남들이 겉으로 봐주는 행복과 자신이 느끼는 행복은 전혀 다르다. 아무리 위대한 사람과 겉으로 보기에 행복해 보이는 사람도 뚜껑을 열어 그 속속들이 들여다보면 불행한 구석은 반드시 있게 마련이다. 아니 역사상의 위대한 천재 치고 그의 일신상 또는 가족 관계로 인해 불행하지 않았던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얼마나 역설적인 일이란 말인가.

완벽한 불행이 없는 것처럼 완벽한 행복도 이 세상엔 없다. 창조주 하나님은 결코 인간이라는 작품을 '완벽한 행복의 조건'으로 설계하지 않았다. 어디가 행복하면 어디가 불행하고 무엇이 넘치면 무엇은 반드시 모자라게 마련이다.

삶에서 책을 빼면 무엇이 남는가



책이 사람을 만든다는 말은 확실히 맞는 말이고 어김없는 말이다. 그러나 책이 사람의 물감들인 머리카락이나 색칠한 손톱, 발톱까지 만드는 것은 분명 아니다. 인간의 그런 신체 부위야 신의 감독 코치 아래 부모가 빚어내는 작품이지 책이 끙끙대며 만들어내는 작품은 아닌 것이다.

책이 사람을 만든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사람의 지식이요, 두뇌요, 생각이요, 마음이다. '아는 것이 힘'이라는 그 '아는 힘'이고,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그 '생각의 힘'이다.

그렇다면 사람에게서 지식과 두뇌를 빼거나, 사람에게서 생각과 마음을 빼내면 무엇이 남는가? 다시 말해 사람한테서, 그 사람의 삶에서 책을 빼면 무엇이 남는가? 그 답은 뻔하고도 확실하다. 원시인이 남고 미개인이 남는 것이 아닌가. 태초의 사람과 같은 사람이 남게되며 꽉 닫혀 열리지 않는 미개인이 남는 것이다.

2만2천7백69종에 1억3천6백75만여 권. 작년 한 해에 쏟아져 나온 우리 나라 신간의 책 숫자이다. 우후죽순이 아니라 우박처럼 쏟아지고 있는 것이 바로 책들이다. 그런데 그 많은 신간들 중에는 좋은 책도 많지만, 그렇지 못한 책들 또한 부지기수다. 그러므로 말할 것도 없이 많은 어중이떠중이 책들을 다 읽을 수도 없고 읽을 필요도 없다. 잘 가려 읽어야 하고 현명하게 골라 읽어야 함은 물론이다.

공자가 『주역』이라는 책을 하도 여러 번 읽어 그 책을 꿰맸던 가죽끈이 세 번이나 끊어졌다고 하지 않던가. 그렇게 읽으면야 아무리 차돌머리라 하더라도 그 글의 뜻이 머리를 뚫고 기억층을 통과해 흡수되게 마련인 것이다. 닭조차도 주인의 글 읽는 소리를 하도 많이 들으면 그 글의 뜻을 이해한다는 중국 송나라 때의 계창 일화는 너무나 유명하다.

그런데 요즘은 독서를 기피하는 풍조가 짙다. 미국에서는 '책을 잃어버린 세대'니 '무지의 세대'라는 말이 지식인의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한 지 이미 오래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미국이라는 나라의 앞날은 시계 제로의 암울함 그것일 수밖에 없다.

일본의 국력이 어디서 솟는가. 땅에서 솟는가 경제력에서 솟는가. 그건 아니다. 일본의 국력이란 바로 일상 습관화한 독서의 힘으로부터 치솟는 것이다. 일확천금이라는 말 대신에 '일독천금'이라는 말을 만들어 애지중지 쓰고 있는 사람들이 바로 일본인들이다. 책 한 권을 잘 만나 잘 읽으면 천금을 얻는 것보다도 낫다는 데서 지어낸 말이 일독천금이라는 것이다.

'작은 대국'으로 일컬어지는 대만의 독서 열기는 어떤가. 대만은 지난 90년부터 전국의 호텔 여관 등 숙박업소 객실에 『논어』를 비치한 국민이며 민족이다. 야한 비디오 따위나 들여다보고 앉아 있을 것이 아니라 비록 호텔, 여관방이라 할지라도 중국 인민의 사상을 대표하는 논어를 읽어야 한다는 권유며 부탁인 것이다.

책은 사람을 만든다. 지식과 두뇌를 만들고 생각과 마음을 넓혀 준다. 책은 문화를 창조하고 국력을 길러낸다. 찬란한 미래까지도 책이 열어 준다. 따라서 책을 읽지 않으면 역사도 더 이상 이어지지 않으며 한 마디로 망하고 만다. 모든 것이 끝나버리고 마는 것이다.

정신 만능의 길



나는 단 한 번도 골프장이라는 데를 가 본 적이 없다. 내가 골프를 치지 않는 이유는 매우 단순하다. 한 마디로 말해서 '사치일 뿐'이라는 생각이 평생 변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골프가 사치요, 신선 놀음이라는 이유보다도 더욱 절실하고 피부적인 이유는 골프 치는 비용이다. 거기에 한 가지 이유를 더 포개 얹는다면 골프라는 것이 엄청난 시간 낭비라는 바로 그 점이다.

비싼 양주가 아니면 어울리지 않는다는 룸살롱이라는 곳도 내가 자청해서 또는 앞장서서 으쓱대며 가 본 적은 한 번도 없다. 단 한 번 당구장에 들른 적도 없고 고스톱도 칠 줄 모른다. 장기와 바둑까지도 둘 줄 모른다. 78년도에 산 싸구려 손목시계를 20년째 차고 있고, 그해 구입한 소형 라디오를 지금까지 듣고 있다.

그렇다고 내가 17세기 영국 청교도가 환생한 몸도 아니고 지리산이나 계룡산에서 오랜 세월 도를 닦다 내려온 사람도 아니다. 수도승 또한 아니다. 내가 나의 무엇을 자랑하기 위해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인간이란 별로 큰 차이 없이 고만고만한 육신을 이끌고 어찌어찌 한평생을 살아가야 할 것이며 각자 육신에 담긴 영혼을 어떻게 하면 말라비틀어지거나 썩어 문드러져 악취 풍기지 않게 관리하고 지켜가며 값지고 위대하게 승화시켜갈 것인가를 잠시 생각해 보았을 따름이다.

몸무게가 70kg인 어른의 육체를 화학적 물질로 분류해서 분석하면 수분이 약 70%이고 나머지의 성분은 다음과 같다고 한다.

- 작은 새장 하나를 잿물로 겨우 씻을 만한 양의 석회 - 개구쟁이들이 장난감 대포를 한 번 쏠 정도의 포타슘(칼륨) - 병원 조제실창구에서 나오는 약봉지 한 봉 정도의 마그네슘 - 성냥개비 3천 개 분량의 인 - 작은 못 한 개를 만들 만한 철분 - 보통 중간 컵으로 한 컵 정도의 설탕 - 세숫비누 다섯 개 정도를 빚어낼 만한 지방분 - 그밖에 몇 가지 작은 물질 등...

놀라운 것은 이런 인체 성분의 물질적 원가를 셈하면 겨우 몇천 원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설혹 일본 씨름 선수와 같은 2백kg짜리 거구라고 해도 그 육신의 화학적인 성분 값은 단돈 1만원을 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정신력은 어떠한가. 무게 1.3-1.4kg에 불과한 두뇌가 발휘하고 창조하는 힘의 차이는 그야말로 하늘과 땅 차이며 지구 전체와 모래알 한 개 정도의 차이에 비유할 만큼 엄청난 것이 아닌가.

사치도 허영도 모두가 육신의 몫이며 육신을 위한 것이다. 화학적 성분의 값, 단돈 몇천 원에 불과한 인간의 육신이 한 병에 2백만 원, 한 잔에 14만원이나 하는 루이 13세 코냑을 마신들 무엇하겠는가. 몇천만 원짜리 털 코트로 앞가슴을 가린들 무엇하며, 50만 원짜리 팬티로 밑을 싸매야만 고상한 걸음걸이가 더욱 부드러워진다고 하는 말이 다 무엇인가. 인간이 갈 길은 오직 '정신 만능의 길'이지 물질 만능의 길은 결코 아니다. 인간은 결코 육신만으로 사는 것이 아니다. 한평생을 사는 육신이야 잠시지만 그 정신의 소산은 영원하기 때문이다.

실천하지 못하는 의식은 쓰레기통에 던져라



'버블 현상'이라는 경제 용어는 이제 흔한 말이 돼버렸다. 실체가 없는데도 부동산 따위의 가격이 상승하기 시작하면 많은 사람들의 투기 심리를 유발해 가격은 더 한층 상승일로를 치닫는다. 그러다가 갑자기 거품이 터져 꺼지는 것처럼 원래의 상태로 돌아가는 현상이 버블 현상이다.

거품 현상이 왜 무섭고도 기분 나쁘다는 것인가. 그 이유는 거품이 꺼진 뒤에는 어김없이 경기 침체와 공황 상태가 도래하기 때문이다. 1984-85년 겨울, 미국의 금리는 대폭 인하됐는데도 달러 시세는 급템포로 상승했던 사실이 그 대표적인 예에 속한다. 지금의 우리 경제가 바로 거품이 꺼져버린 상태이다.

그런데 경기나 주가 등 경제적인 요소에만 거품이 있는 것은 아니다. 인간에게도 거품현상이 있다. 예를 들어 맥주를 콸콸 따랐을 때 그 2/3는 거품으로 하얗게 채워지고 나머지 1/3 만이 맥주 컵 밑바닥에 액체로 깔려 있게 된다. 그런 맥주 컵 현상을 사람에 비유한다면 그게 다름 아닌 '버블 인간', '거품 인간'이라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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