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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전명 트로이 목마

김선한 지음 | 세시
미국을 중심으로 한 다국적군이 쿠웨이트를 침공한 이라크군에 대해 지상반격전을 개시하기 불과 몇 시간을 앞둔 91년 2월 23일, 사우디의 라스알 미삽 항구는 바다를 비추는 서치라이트 불빛과 순찰병의 발걸음 소리만 없다면 고요하기 그지없는 평화로운 곳이었다. 그러나 그 시각에 항만관리소가 위치한 콘크리트 건물 앞에선 얼굴에 위장을 한, 잠수복 차림의 건장한 사내 6명이 벌써 몇 분째 도열해 있었다.



잠시 후 어둠을 뚫고 나타난 짚차에서 얼룩무늬 위장복을 입은 대령이 내렸다. "여러분의 어깨에 2만 5천여 명의 목숨이 달려 있다. 평소 훈련받던 대로 행동해 주기 바란다. 작전이 성공리에 완수됐을 때 '파멜라'를 타전하라. 무훈을 빈다." 대령이 일일이 악수를 하고 사라지자, 지휘관인 듯한 한 사내가 명령을 하달했다. "자, 이제 사담 후세인에게 안부를 전하러 가자. 분대! 보트로 이동!"

명령이 떨어지자 사내들은 200m 떨어진 방파제에 정박해 있던 파운틴-33 고속정에 승선했다. 시속 80km 이상을 낼 수 있는 이 고속정은 앞뒤로 50mm중기관총 2정과 발칸포 등의 화력을 갖추고 있는 최신형이었다. 일명 '마이크 특수부대'로 명명된 이 특공대는 미군 특수부대 가운데 최정예로 알려진 해군의 SEAL 소속이었다.



특공대가 맡은 임무는 간단했다. 미 해병대가 상륙작전을 감행하는 것처럼 적을 속여 해안 쪽으로 적군의 발목을 묶어두면, 이를 틈타 다국적군은 해안이 아닌 대륙 쪽으로 진격하는 일종의 양동 작전이었다. 해안 경비를 맡은 이라크군은 사담 후세인의 총애를 받고 있는 '공화국수비대' 소속 2개 사단의 정예병력이었다. 다국적군이 이들 병력과 격돌할 경우 엄청난 타격을 입을 거라는 것은 분명했다.

대원들은 각자 10kg짜리 C-4 폭탄이 든 배낭을 지고 부구(浮具)에 의지하여 해안으로 다가갔다. 배낭은 앞으로 2시간 뒤인 24일 새벽 1시에 폭발하도록 타이머가 장착돼 있었고, 작전에 의하면 다국적군은 새벽 4시에 쿠웨이트 국경을 돌파할 것이다. 해안가에 거의 도착하자 디츠대위의 수신호에 따라 10m 간격으로 흩어졌다. 그리고는 모래사장에 폭약을 설치하고 타이머를 작동시켰다.



대원들이 보트에 거의 도착할 무렵 이들을 태우고 왔던 고속정이 나타나 해안초소에 있는 이라크군을 깨우기 위해 약 30여 분간 중기관총 사격을 가했다. 정각 1시, 대원들이 설치해 놓은 폭약이 거대한 불꽃과 함께 작열했다. 특공대원들을 태운 고속정들이 전속력으로 해안을 빠져나가자 이라크군은 텅빈 바다를 향해 온갖 화력을 집중시켰다. 상륙작전이 시작된 것으로 오인한 이라크군은 상부에 이를 보고하고 증원병력의 급파를 요청했다.



고무보트 위에 올라탄 디츠 대위는 무전기로 본부를 호출한 뒤 '파멜라'를 타전했다. 마침내 특공대원들은 한 명의 희생자도 없이 임무를 완수한 것이다. 이라크의 '공화국수비대' 2개 사단이 곧장 해안 쪽으로 이동하였고 이날 새벽 4시를 기해 다국적군은 200km의 거리를 두고 동서로 나눠 쿠웨이트와 이라크 영내로 파죽지세로 진격하기 시작했다.암호명 파멜라육군특전사, 해군 UDT/SEAL, 해병대 특수수색대, 한국을 대표하는 특수부대의 이름표다. 이들은 전시나 이에 준하는 위급한 상황에서 적진에 잠입해 정보를 수집하거나 목표들에 대한 제한적인 타격 또는 적군 지휘관의 납치 및 암살 등의 임무를 수행한다. 또한 특전사는 적의 후방에 침입해 반체제 세력을 규합해 제2 또는 제3의 전선을 형성해 게릴라전을 수행하며 대테러전 수행능력도 갖추고 있다.

흔히 검은 베레모로 일컬어지는 육군 공수특전사령부(특전사)는 58년 창설이래 영광과 통한의 길을 걸어 왔다. 5·16 군사쿠데타, 부마사태와 12·12사태, 그리고 5·18 광주민주화항쟁... 특전사는 한국 현대사의 격랑 한가운데 불명예스럽게 자리하고 있다. 하지만 울진, 삼척의 무장공비 사살 및 8·18 도끼만행에 대한 나무절단과 북괴군 초소를 박살낸 사건, 96년의 강릉 잠수정 침투사건은 특전사의 용맹성과 능력을 과시한 것이기도 하다.



북한은 김일성, 최현, 오진우, 최광 등 오늘날 북한 정권을 수립한 인물들이 이미 해방 전부터 동만주에서 항일유격전을 전개한 것과 이후 소련으로 건너가, 현대적인 특수전과정을 수료한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리고 그들은 정권수립과 함께 대남 공세를 강화하기 위해 특수부대의 발족을 서둘렀다. 미국의 조셉 비무데즈에 따르면 현재 북한의 특수부대의 규모는 12만여 명에 이른다.

최근 국방부에서 발행한 『국방백서』에 의하면, 북한은 총 참모부 산하에 경보대지도국을 발족, 산하에 22개 특수여단, 북한군 전체 병력의 16%를 지휘하고 있으며 유사시 20.000 여명의 특수부대원들을 해상과 공중을 통해 침투시킬 수 있는 능력을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남북한은 세계 어느 나라와 비교해도 상대가 되지 않을 정도의 거대한 특수부대 규모와 특수부대원의 질적 수준을 갖춘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없다미국특수전사에서 최악의 날은 1983년 10월 23일이었다. 카리브해에 위치한 그레나다 섬 40km 상공. 고요함을 뚫고 미 공군 특전사 소속 2대의 MC-130E 수송기가 모습을 드러냈다. 잠시 후 수송기로부터 꽃잎들이 하나씩 떨어졌다. 모두 18개의 낙하산이 바다 위로 강하하고 있었다. 낙하산에 매달린 사람들 가운데 12명은 SEAL 대원이었고, 나머지는 미 공군 특전사 소속 전투관제팀이었다. 특히 SEAL 대원들은 '제디'라는 별명을 가진 최정예 팀이었다.



미국은 그레나다 침공에 앞서 살리나스 공항을 장악하는 것이 급선무라 생각하고 SEAL 요원들을 특수정찰조로 현지에 잠입시킨 뒤 레인저 대원들의 강하를 지상에서 유도하는 것이 효과적일 것이라는 판단을 내렸다. 해상강하를 통한 잠입에는 SEAL 요원들이 제격이었다. 그러나 지상에서 낙하산 강하를 유도하는 데는 공군의 전투관제팀이 앞선다는 갑론을박 끝에 결국 이들도 포함시켰다.



잠입의 실행단계는 겉보기엔 간단했다. 살리나스 항구 북서쪽 40km에 투하된 특수정찰조는 먼저 투하된 조디악 고무보트에 탑승하여 목표한 해안까지 이동한다. 해안에 도착하면 공항에 접근해 적의 병력과 대공화기의 배치현황 등에 대한 정보를 수집한다. 한편 전투관제팀은 레인저 대원들의 강하를 유도하기 위한 레이더 비이컨을 설치하면 임무가 끝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계획이었을 뿐 실상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었다.



당초 특수정찰조는 야간이 아닌 낮 시간에 해상강하를 실시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기상악화로 강하시간은 황혼 무렵으로 지연됐다. 야간에 실시하는 해상강하는 정확한 낙하지점을 가늠하는 것이 어려워 웬만한 프로들도 꺼리는 위험한 일이었다. 자칫 잘못하면 익사할 가능성이 많은 데다, 대원 한 사람 당 70~80kg의 장비를 착용한 상태에서는 더욱 위험을 동반한 것이었다.



낙하산 또한 문제였는데 요원들이 평소에 사용하던 방향 조정이 가능한 고공강하용 낙하산이 준비되지 않아, 일반형 MC-1형이 지급됐다. 문제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강하한 뒤 위치를 확인해 주는 조명신호장치가 없어 한동안 칠흑 같은 바다를 마냥 떠다닐 수밖에 없었다. 결과는 끔찍했다. 바다와 낙하산 강하에는 세계 최고라 할 수 있는 제디 요원 4명이 익사한 것이다.



동료의 생사를 확인할 틈도 없이 보트에 승선하여 해안으로 가던 중 적의 초계정이 다가와 재빨리 시동을 끄고 납작 엎드렸다. 다행이 적에게 발견되지는 않았으나 초계정이 떠난 후에 엔진에 시동을 걸려고 하자 보트는 작동하지 않았으며 강력한 해류에 밀려 목표지에서 점차 벗어나기 시작했다. 이 바람에 요원들은 밤바다를 정처 없이 떠도는 처량한 신세가 되었고 몇 시간의 표류 끝에 구축함으로 귀환하여 다음날 다시 잠입을 시도하기로 했다.



그러나 다음날은 전투관제팀이 탄 보트가 높은 파도에 휘말리면서 휴대한 장비조차 바다에 빠트리는 어처구니없는 사태가 발생하고 말았다. 결국 작전지휘부는 더 이상 이를 강행할 필요가 없다는 데 동의하고 작전을 취소했다.



이 작전은 몇 가지 중요한 교훈을 남겼다. 첫째 최악의 상황에 대비한 준비를 소홀히 했다는 것이다. 낙하산을 통해 투하된 보트는 충격에 대비해 예비용 모터를 갖춰야 하는데 대원들은 이런 원칙을 무시했다. 둘째, 특수전의 경우는 평소 호흡을 같이한 동료들을 중심으로 팀이 짜여져야 하는데 해군과 공군이 서로 전공을 세우기 위해 다투다가 혼성팀을 만드는 바람에 팀웍을 망쳐버린 것이다.1945년 4월 30일 사이공발 AP통신은 한 시대의 종말을 알리는 기사를 타진했는데 바로 월남의 패망을 알리는 것이었다. 수천 억 달러의 막대한 전비를 투입하고 5만여 명의 젊은 목숨을 허무하게 희생시키고도 패배한 미국은 충격이 컸다. 이후 77년 대통령에 취임한 카터는 여론을 무마시키기 위해 희생양을 찾기 시작했다. 예상했던 대로 희생양은 먼 곳에 있지 않았다. 비밀작전을 통해 온갖 악역을 도맡은 CIA와 군, 특히 그린베레에게 화살이 돌아갔다.



그 결과 비밀작전, 특수전과 관련된 대부분의 CIA 요원들이 자리를 잃었으며 그린베레는 인원의 대폭 삭감과 예산과 지원의 축소로 명목만 유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도덕과 인권을 강조한 카터 행정부의 외교정책은 곳곳에서 부작용을 일으켰다. 그의 정책은 현실과는 동떨어진 탁상공론 내지는 유토피아적 발상이라는 것이 이내 밝혀졌다. 중동국가 중 가장 미국에 우호적이던 이란에서, 또한 미국의 뒤뜰 정도로 인식되던 중남미에서 불똥이 튀기 시작했다.



80년 4월 15일, 여느 때와 같이 아침식사를 하던 미국 국민들은 텔레비전에서 흘러나오는 지미 카터 대통령의 긴급담화에 망연자실해졌다. "국민여러분, 이란에 억류된 53명의 미국인 인질을 구출하기 위해 감행된 특공작전이 실패로 끝났음을 알려 드립니다. 작전에 참가했던 수송기와 헬리콥터들이 급유 도중 충돌해 모두 8명의 미군들이 사망했습니다. 불행히도 시체를 회수하지 못하고... 이 작전을 지시한 사람은 저였으며... 모든 책임은 저에게 있습니다..." 이 방송을 본 미국인들은 엄청난 충격에 당혹감을 금치 못했다.



CNN, ABC, 뉴욕 타임즈, 뉴스위크 등 미국의 유수 언론들이 앞다투어 이 사실을 보도했고 재선 고지를 눈앞에 둔 지미 카터는 치명적인 실수를 인정하고 레이건에게 정권을 인계할 수밖에 없었다.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표류하다 침몰한 카터호를 대신한 로널드 레이건호의 취항 일정은 바로 강력한 미국의 재건이었다. 강력한 국가 재건의 전제조건은 군비 증강이었다. '악마의 제국'이라고 혹평한 소련에 대항하기 위해서 레이건은 재래전, 핵전, 특수전 등 모든 분야의 전력강화를 강조했다.



특수부대에 대한 레이건 행정부의 관심은 흔히 '저강도전쟁'이라고 불리는 새로운 전략 개념의 도입으로 시작됐다. 저강도전쟁이란 핵전쟁의 위험성과 대규모 정규 병력의 투입을 최대한 억제하고 대신 소규모 정예병력이나 비군사적 수단으로 목적을 달성한다는 것이다. 저강도전쟁의 가장 가시적인 효과는 바로 특수부대의 증강으로 표출됐다.



81년에서 90년까지 미군 특수부대는 최고의 르네상스를 맞이하게 된다. 83년 제1특수전 사령부의 발족을 시작으로 그린베레, 레인저연대, 시스프레이, 정보지원처, BST(일명: 노란파일)등 극비작전을 수행하는 부대가 창설 또는 부활되었으며 델타포스, SEAL에 대한 지원이 강화되었다. 86년 11월에 레바논의 수도 베이루트에서 미국인 관광객 15명을 태운 관광버스 납치사건은 전광석화와 같은 구출작전을 수행한 델타포스의 활약을 전세계에 알렸으며 미국인들에게 자부심을 갖게 했음은 물론이다.걸프전이 발발하자 다국적군의 최대 고민거리는 이라크군의 이동식 스커드미사일이었다. 이라크군은 지하에 광케이블로 연결된 최첨단 장비를 이용해 다국적군의 항공기와 전함에 위협을 가해오고 있었는데 워낙 이동성이 뛰어나고 주위에는 대공포화가 밀접해 있어서 여러 번에 걸친 공군기의 작전이 실패로 돌아가자 군사령부에서는 특수부대를 투입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이 작전은 포틀랜드의 숨은 영웅인 영국의 SBS가 맡기로 했다.



SBS 특별임무조는 모두 28명으로 구성되었다. 헬기를 이용해 목적지에 잠입 후 탈출하는 데 5시간 이상이 소요되므로 결국 작전시간 총 7시간 중 현지에서 2시간 내에 광케이블을 폭파해야 한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드디어 1월 23일 D데이가 찾아왔다. 대원들은 두 대의 시누크 헬기에 올라 지그재그로 적의 레이더망과 대공포대를 피해 지상에서 불과 높이 15km의 저공으로 비행했다.



적지에 도착한 대원들은 부여받은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헬기에서 내려 경계를 하고 폭파전문 요원과 일부 요원들은 광케이블을 찾기 시작했다. 30분쯤 지나 대원중 한 명이 케이블을 발견했다. 잠시 후 그것은 일반 케이블임이 판명됐고, 다시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에 또 하나를 발견했으나 그것 역시 일반 케이블이었다. 조장은 반사적으로 시계를 쳐다봤다. 남은 시간은 45분, 얼마간의 시간이 또 흘러갔다. 이제 대원들이 초조해하며 얼굴에 실망의 그림자가 드리워지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어쩔 수 없이 마지막으로 발견된 케이블에 조장은 화약을 설치하라고 지시하고는 철수를 명령했다.



헬기가 이륙하자마자 대원들은 엄청난 폭발음을 들었다. 조장을 포함한 대원들의 마음은 무거웠고, 귀대하는 동안 누구 하나 입을 열지 않았다. 헬기가 착륙하자 SBS작전장교가 얼굴이 상기되어 대원들에게 달려왔다. 조장은 눈앞이 아찔해지는 것을 느꼈다. 작전이 실패로 끝나서 그런 것이 아닐까 하는 마음이었다. 그러나 그런 우려는 곧 기우로 판명됐다. "조장, 대성공이야. 이라크 총사령부를 감청한 결과 광케이블이 절단됐다고 온통 야단법석이야. 축하하네."76년 6월 27일, 이스라엘의 벤구리온 공항을 새벽에 출발한 뒤 아테네를 거쳐 파리로 향하는 에어 프랑스 항공 소속 A-130기의 탑승객 중엔 독일인 변호사와 그의 애인으로 보이는 두 명이 일등석에 있었지만 아무도 그들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러나 아테네 공항을 이륙한 지 채 30분도 못 되어 단잠을 자고 있던 승객들은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 그만 경악하고 말았다.



자신을 변호사라고 소개했던 남자는 자동소총을 손에 들고 있었고 그의 옆에 있던 여자는 양손에 수류탄을 든 채 수상한 행동을 하면 당장이라도 안전핀을 뽑을 태세였다. 일등석에서 이런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사이 일반석에서도 똑같은 악몽이 재연되고 있었다. 한쪽에서 조용히 앉아 있던 아랍인 2명이 총과 수류탄을 내보이며 승객들에게 고개를 숙이라고 소리쳤다.



범인들은 기장에게 리비아의 뱅가지로 기수를 돌릴 것을 명령했다. 그러자 기장은 범인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납치를 알리는 버튼을 눌렀고 순식간에 납치사실이 전세계에 알려졌다. 사건이 발생한 당일 이스라엘의 라빈 총리는 일상적인 업무를 국무회의에서 중재하고 있다가 승무원을 포함해 모두 258명의 인원이 팔레스타인 해방인민전선에 의해 공중납치 당했다는 충격적인 보고를 받았다.



우간다의 수도 캄펠라의 엔테베 공항에 도착한 범인들은 노약자와 어린이 등 비유태계 승객 47명을 석방했다. 석방된 승객들을 통해 우간다의 이디 아민이 그들과 협력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납치범들은 전세계에 수감된 자신의 동료들 54명을 즉시 석방할 것을 요구했으며 일방적으로 72시간의 답변시한을 통고했다.



비상대책위원회는 이디 아민이 아프리카 단결기구(OAU)에 참석하는 7월 4일에 구출작전을 실행하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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