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나를 성공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김태연 지음 | 밀알
1. 아, 꿈에도 그리던 고국"짝사랑! 그랬다. 그건 짝사랑이었다. 23살에 미국으로 건너온 이래 고국을 생각하면 사 랑과 미움의 감정이 뒤엉켜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지면서도 늘 목을 빼고 그리워해 온 곳이 고향이고 고국이었다."
얼마나 그리워하고 가고 싶었던 고향인가? 낯설고 두렵기만 했던 이국 땅에서 고향생각을 하며 얼마나 많은 세월을 눈물로 지내왔던가? 나에게 고통과 서러움만을 기억나게 하는 한 맺힌 고향 땅을 떠나온 지 30년, 두 번 다시 돌아보지 않겠다고 눈물을 훔치며 떠난 고향 땅. 방송사들의 출연 요청과 때마침 한국에서 열린 세계 컴퓨터 쇼가 있어서 아들, 며느리, 딸, 회사 식구들 등 모두 50여 명 정도를 데리고 고향행을 시도하기로 했다. 한국을 방문하는 날, 나의 가슴은 마치 시집가는 처녀의 가슴처럼 두근거렸고 얼굴은 발갛게 상기된 채 줄곧 흥분되어 있었다. 김포공항에 도착한다는 기내 방송이 나오자 얼마나 긴장했는지 다리에 쥐가 날 정도였다.
가족들과 김천 고향으로 내려가는 길. 고속도로 휴게소에 머물면서 맛본 뜨끈한 우동 국물 맛, 돌 위에 구워놓은 오징어, 호도과자, 꼬치 오뎅 등 모든 것이 내겐 새롭고도 잊을 수 없는 것들이었다. 가족들 모두 즐거워하는 모습이었다. 김천 시내로 들어가는 길의 풍경은, 그렇게 오랜만에 찾는 고향인데도 마냥 친근감을 느끼게 하였다. 환영 현수막을 비롯하여 가는 곳마다 열렬히 환영해 주었고, 김천 직지사를 방문해서 주지스님의 친절한 대접을 받기도 했다.
환영식장에 도착하여 꽃다발 세례를 받고 기자회견을 하는 도중 나는 그만 울고 말았다. 무엇보다도 나의 가슴이 찢어지도록 아팠던 것은 비운에 죽은 남동생 옥생이 때문이었다. 옥생이의 초라한 무덤 앞에서 나는 거의 실신할 정도로 무덤을 껴안고 몸서리를 치면서 통곡하였다. 아버지의 폭력과 주정으로 식구들 누구 하나 온몸에 피멍 안든 사람이 없을 정도였던 그 시절 보다 못한 옥생이가 아버지의 멱살을 잡고 큰소리로 울부짖으며 주먹다짐을 한 것이다. 옥생이는 그날 저녁 "누나, 난 안 되겠어. 난 패륜아야. ... 누나, 꼭 내 몫까지 살아 줘. 그리고 꼭 성공해 줘."라고 말했다. 그때 나는 아버지를 폭행했다는 죄의식 때문에 하는 단순한 하소연인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이튿날 옥생이는 약을 먹고 눈을 감았다. 살아 있으면 지금 53살이 되는 내 동생 옥생이는 그렇게 세상을 떠나갔다.
2. 눈물 많던 그 시절, 내 고향"새해 첫날에 태어났으니 나처럼 좋은 팔자도 없으련만... 고추 없이 태어난 탓에 나는 태어날 때부터 구박받고 살 운명이었다.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말이 '양잿물'이었고, 자장가 대신 어머니의 신세타령을 들어야 했다. 그러나 어린 시절 동무들과 뛰놀던 고향, 생각만 해도 가슴이 떨려온다."
김천 지방에는 서산 김씨인 우리 집안처럼 큰 문중을 이루고 사는 집성촌이 많았다. 마을에는 인정이 넘쳤고 물맛 좋고 가뭄에도 마르지 않기로 이름난 샘터도 있었다. 우리 집안은 대대로 터를 잡고 살아온 종갓집이었다. 할아버지는 문중의 큰 어른으로 위엄이 대단했고 사람들의 신망을 한몸에 받고 있었으며, 소작농도 여럿 부리는 천석꾼 집안이라 남에게 덕을 베푸는 품 또한 넉넉했다.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초등학교 교사가 된 아버지는 해방이 되던 해 스물 다섯의 나이에 네 살 어린 어머니와 혼인하여 이듬해 나를 낳았다.
1946년 음력 정월 초하루, 우리 집은 설 준비에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설날이 시작되는 12시를 갓 넘길 즈음 어머니가 산기를 시작했다. 제사상 준비를 하던 어른들은 잠시 손을 놓은 채 소식을 기다렸다. 어른들은 설날에 태어나는 사람은 귀인이 되고 고관대작감이라는 기대감을 안은 채 의당 고추를 달고 장군감이 나오는 걸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기대 속에 태어난 나는 고추가 없었다. 집안은 완전히 초상집 분위기로 바뀌었다.
할머니는 산후에 어머니 준다고 끓인 미역국을 솥째 들고 나와 마당에 팽개치며, "이년아, 차라리 죽어버려라. 가시나를 낳다니 이년아, 네가 김씨 집안에 들어와서 집안을 다 망하게 했구나." 하며 어머니에게 욕을 해댔다고 한다. 어른들은 노기를 감추지 못하고 할아버지는 망연자실하여 통곡을 했다. 내가 새해 첫날 자시에 세상에 태어나지만 않았어도, 모진 천덕꾸러기 신세가 아니었을지 모른다. 어머니를 옭아맨 원죄는 조상께 제사 지내는 설날 자시에 고추가 달린 옥동자가 아니라 계집애를 낳았다는 데 있었다.
학창 시절에는 자기 주머니를 털어 찐빵도 사주고 시간 날 때마다 피아노를 가르쳐주는 선배 언니 때문에 그런 대로 즐거웠지만 아픈 기억도 많다. 학교에서 나의 성격은 계곡 물과 같아서 조용하다가도 어느 순간 열정적으로 변했다. 그러나 선생님들은 날 주목하지 않았다. 그들이 이해하지 못했던 것은 아버지가 교직에 있는데도 제때 공납금을 내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바람기와 주벽으로 가족 돌보는 일은 안중에도 없는 아버지의 실체. 겨우겨우 공납금이 손에 쥐어지면 다시 슬그머니 학교에 나가는 일이 몇 번씩 반복되었다. 집안이 화평하지 못해 우리들은 보따리를 든 어머니를 따라 외갓집 나들이를 자주 해야 했다. 중학교 시절에, 노발대발해서 외갓집으로 들이닥친 아버지에게 머리채를 잡혀서 발길질, 주먹질을 받으며 집에 간 기억도 있다.
일곱 살 때 외갓집에서 외삼촌들이 무술을 닦는 광경을 처음 본 순간부터 나는 무술에 관심이 많았다. 어느 날 새벽 창호지 문을 통해 지켜본 무술이 내게는 아름다운 춤으로 느껴졌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저걸 꼭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다는 사실이다. 며칠 동안 외삼촌들의 눈치를 보다가 외삼촌들이 모두 모여 있을 때 용기를 내서 가르쳐 달라고 졸랐더니,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어린 마음에도 귀에 거슬렸던 '여자니까'라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며칠이 지난 후에도 물러서지 않고 계속 떼를 쓰며 매달리자, 막내 외삼촌이 따로 불러내 부모님께는 비밀로 하고 가르쳐주겠다는 약속을 했다.
나는 열심히 가르침에 따랐고 습득하는 과정을 넘어 적극적으로 더 배우고 싶어 안달을 부렸다. 막내 삼촌은 내가 남자도 힘든 기마자세에 힘이 실려 있고, 형(形)의 연속동작도 척척 해내며, 피멍이 드는 훈련을 견뎌내자 무척 놀란 모양이었다. 열 네살 때 드디어 나는 검은 띠를 두르게 됐다. 이후 나는 더 심오한 무술의 세계를 맛보기 위해 다른 스승을 찾아 나섰다. 그러나 그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무술은 금녀의 영역이었으므로. 새 스승에 대한 나의 노력이 좌절되던 즈음, 가족과 집안 어른들이 내가 태권도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버지는 몇 마디 꾸중에서 그치지 않고, 매질을 하고 내 머리카락을 죄다 자른 다음 며칠 동안 광에 가두었다. 그러니 핍박이 거세어질수록 내 가슴속의 열정은 더욱더 타오를 뿐이었다.
드디어 나에게 기회가 왔다. 그것 역시 신비로운 체험이었다. 오래 전부터 교분이 있었던 스님이 우리 집에 왔다가 나를 유심히 보더니 내 어깨에 다정하게 손을 얹으면서 부모님에게 말했다. "이 아이의 상이 범상치 않군요. ... 내 제자로 거두어 가르치고 싶은데 시주님들 생각은 어떠신지...?" 그렇게 해서 난 산사에서 온 그분을 스승으로 모시고 무술뿐만 아니라 기의 세계를 깨달아 가기 시작했다. 그분의 가르침은 10여 년 넘게, 내가 성인이 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외삼촌이 초보단계를 가르쳐 준 사부였다면, 그 스님은 내가 오늘날 그랜드마스터의 경지에까지 이를 수 있도록 전통 무술의 오묘한 깊이는 물론이고 범상한 사람들은 이해하기조차 어려운 기의 세계를 가르쳐준 위대한 스승이었다.
3. 버몬트로 날아간 호랑나비"모든 애벌레 몸 속에 한 마리의 나비가 살고 있듯 모든 사람들 가슴에도 자유의 나비가 살고 있다. 나비가 허물을 벗듯 나의 사랑과 일과 성공은 이국 멀리 버몬트로 날아가는 날개돋이로 시작되었다."
1968년, 우리 가족은 미국 이민길에 올랐다. 도망치듯 떠나는 이민길이라 짐도 많지 않았다. 우리가 도착한 동부의 보스턴 공항은 김천 장터처럼 붐볐다. 우리만 빼고 하나같이 코쟁이라는 사실이 신기하기만 했다. 우리는 뉴잉글랜드의 버몬트에 정착했는데 그곳은 인종차별이 유독 심했던 곳이다. 우리 가족들은 생계를 위해 모두 일터로 나가야 했다. 나는 주유소에서 가스 넣는 일을 마치고 레스토랑으로 달려가 식기 닦기, 쓰레기 치우기 등 온갖 허드렛일을 하면서 3년 가까이 돈을 벌었다. 힘들었지만 결코 고생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어린 시절 스승님의 가르침 속에서 깨달은 나비의 비상, 그 비상을 위해서는 홀로서기의 고통이 따라야 한다는 교훈을 한시도 잊지 않았다.
버몬트에 처음 왔을 때 나는 흰 도화지에 검은색 매직으로 '제 이름은 김태연입니다. 여러분의 친구가 되고 싶어요.'라고 쓴 피켓을 들고 무작정 집집을 돌았다. 내 꿈을 펼쳐나가기 위해선 하루 빨리 미국생활에 적응하고 마을 사람들과 친구가 되는 일이 가장 급한 일이라고 생각한 데서 비롯된 외로운 순례였다. 집을 나서 백 군데를 채우기까지 발이 부르트도록 돌아가며 초인종을 눌렀다. 그들의 현관 문턱은 높았지만 백 군데를 돌면 그래도 한두 집에서 "웰컴 투 히어(Welcome to Here)."라는 반응이 왔다. 그 정도의 환대에도 난 기뻐서 어쩔 줄 몰랐다. 하루도 거르지 않는 까만 머리 동양여자의 엉뚱한 행동에 그들도 감복했는지 시간이 지나면서 오다가다 마주치면 반갑게 인사를 건네는 이웃이 늘었다. 그들의 생활에 파고들겠다는 계획 1단계를 성공시킨 나는 다음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봄이 온 새 학기에 나는 무작정 하이스쿨의 교장을 찾아갔다. 미국의 비즈니스 매너는 반드시 전화로 약속을 해야 하는데 난 그걸 몰랐다. 안중에도 없는 비서의 태도에도 불구하고 돈키호테식 방문을 한 달쯤 했을 때, 교장실 문이 빠끔히 열리면서 누군가 손짓을 했다. 교장이었다. 그의 얼굴에 편안한 웃음이 번지는 것을 보고 나는 찰거머리처럼 달라붙었다. "나는 한국의 고유 무술인 태권도 유단자입니다. 여기 학생들을 가르치고 싶습니다." 내가 태권도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하는 것을 교장선생님은 진지하게 듣더니 결국 기회를 보자며 고개를 끄덕였다. 며칠 뒤 학교에서 연락이 왔다. "미스 킴, 잘해 보세요." 나를 실현시키는 참된 생활이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축복의 소리였다.
60년대 말에서 70년대 초, 물질적 풍요를 구가하면서도 가족제도 및 도덕의 붕괴로 순수함을 잃어 가고 있는 미국 아이들에게 나의 가르침과 태권도는 하나 하나가 신비로울 수밖에 없었다. 예상외로 높은 학생들의 호응에 원래 한 학기로 예정되었던 강의는 다음 학기에도 계속 이어졌다. 교장선생님의 부탁도 부탁이었지만, 무엇보다 자기 자식들이 방황을 끝내고 올곧게 자라는 걸 확인한 부모들의 성화가 더 대단했다. 물론 몇몇 학부모들은 내가 동양인이라는 이유로 학교로 몰려와 수업 중에 들이닥쳐 자기 아이들을 데려가면서 욕설까지 해대는 경우도 있었다. 그들의 난동에 가까운 멸시와 횡포가 심해질수록 난 입과 귀를 틀어먹고 열심히 수업에만 전념했다. 그리고 집에 와서는 샤워기를 틀어놓고 한참 울다 보면 새로운 용기가 솟아났다. '그래, 이것도 시험이야. ... 난 더 단단해지는 거야.'
어린 시절에는 남녀차별을 받았던 내가 미국에서는 인종차별을 받으며 갖은 고생을 해야 했다. 마켓에서 물건을 사 가지고 나오다가 좀도둑 취급을 받은 일, 생명을 중히 여기는 병원에서조차 백인 환자 위주로 진료를 하던 일, 버스를 타도 백인이 없는 뒷자리에 앉아야만 했던 일, 처음 체육관을 세울 때 시에서 시키는 대로 모든 준비를 갖추어도 매번 불합격을 받았던 일, 누군가 밤마다 와서 체육관을 부수고 가던 일, 신고를 했는데도 불구하고 경찰의 성의 없는 태도, 뼈빠지게 잠도 안자고 틈틈이 벌어 세운 체육관에 차마 입에 담기 어려운 수백 가지 욕들이 낙서되어 있던 일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그때부터 나는 이 미국 땅의 훌륭한 지도자가 되겠다고 마음속으로 다짐을 하였다. 그래서 잘못 알고 있는 이들을 깨우쳐 올바른 길로 안내하겠다고...
그 사이 나는 부모님들의 성화로 미국인과 결혼을 했다. 그러나 내가 동양인이라는 이유로 시집 식구들로부터 비인간적인 취급을 받았다. 결국 두 번의 유산 끝에 이혼했다. 이후 무술에 전념하자, 무술과 기 수련의 경지도 날로 높아져 갔다. 이런 와중에 첫 아들이 될 스캇을 만났다.
당시 도장에 유단자가 생기면서 학생회 같은 조직을 구성해 수업 프로그램을 짜게 하고 사소한 일은 자기들끼리 토론으로 결정하게 했는데 그게 화근이었다. 매일 만나서 도장 운영에 관한 토의를 하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날 내쫓고 자기들이 도장을 차지할 궁리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진상을 파악한 나는 갓 들어온 흰 띠 몇 명만을 남겨 두고는 모두 제명시켜 버렸다. 다시는 도장에 얼씬도 못하도록 꾸짖고는 아예 며칠 동안 도장 문을 닫아버렸다. 그런데 유일하게 찾아와 무릎을 꿇으며 제자로 받아 달라고 간청한 아이가 있었다. 자기는 그런 음모가 있는 줄도 모르고 엉거주춤 따르다 보니 그렇게 휩쓸렸다는 얘기였다.
나는 한 달 뒤에 다시 오라면서 돌려보냈고 스캇은 정말 한달 뒤 나를 찾아왔다. 그렇게 해서 스캇과 열 명도 안 되는 초보자들만으로 다시 도장을 열었다. 그때 나는 한 가지 중요한 체험을 했다. 사람을 움직이고 조직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인간적인 교감만으로는 안 되며 복종과 충성심도 가르쳐야 한다는 걸...
우여곡절을 거치고 도장이 안정되자, 나는 다른 계획을 잡아 나갔다. 무언가 새로운 사업으로 재정적인 기반을 마련하여, 도장을 천 배, 만 배 성장시켜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새로 손을 댈 만한 사업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순간적으로 영감이 떠올랐다. '컴퓨터! 그렇다. 컴퓨터다. 이 분야에선 내가 일인자가 될 수도 있다.' 그때 컴퓨터 업계는 바야흐로 PC 시대를 열고 있었다. 1981년의 일이었다.
컴퓨터 사업에 대한 영감을 얻은 후 난 서서히 버몬트를 떠날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그 무렵 스캇에 이어 마이클과 토마스가 한 식구가 되었다. 양자로 들이는 법적 절차를 끝낸 것이 80년이었다. 스캇은 코네티컷 대학에서 컴퓨터 디자인을 전공했고, 마이클과 토마스에게도 복수 전공으로 컴퓨터를 배우라고 일러뒀다. 인력은 충분했다. 문제는 시기와 자본이었다. 온갖 난상토론을 거친 후 우리는 소프트웨어 개발이라는 미지의 세계에 뛰어들기로 결정했다. 1985년 드디어 떠날 때가 되었다. "가자, 얘들아. 캘리포니아로!"
4. 꿈의 땅, 캘리포니아로 가다처음 산호세에 왔을 때 우리는 사막 한가운데 떨어진 물고기였다. 그 뜨거운 모래벌판에 서 물 한 모금 마실 수 없는 물고기... 그러나 우린 주저앉을 수 없었다. 끼니마다 수제 비와 고구마로 배를 채우면서 우리는 '산호세의 신화'를 만들어갔다."
캘리포니아의 기후는 좋았지만 물가가 엄청나게 비싸서 준비해간 돈으로는 조그만 아파트 한 채 구하기 힘들었다. 결국 방 두 개짜리 아파트를 구해서 '화장실 1분 20초'라는 규칙을 가지고 잠자리와 화장실 문제를 해결했다. 먹는 것은 수제비와 고구마로 해결했다. 밀가루는 미국 땅에 지천으로 깔려 있고 캘리포니아 고구마는 큼직해서 몇 개만 쪄도 한 솥 가득했다. 아파트는 네 식구의 보금자리이자 컴퓨터 회사 사무실이었다. 회사 이름은 라이트하우스, 글자 그대로 등대였다.
아들들이 밤낮 없이 컴퓨터에 매달리고 있을 때 난 나대로 바삐 움직였다. 태권도 도장을 열기 위해서였다. 아파트 한 채 구하는 것도 벅찬 판에 도장을 낸다는 건 무리였다. 먼저 캘리포니아 시장을 찾아갔다. 그리고 새로 온 시민인데 인사를 드리고 시민으로서 도울 일이 있으면 말씀해 달라는 이야기를 꺼냈다. 밥 시장은 새로 이사 온 동양인 여자가 수잔 앤소니 상 수상자라는 것과 동부지역에서 알아주는 대단한 전통무술의 달인이라는 것에 더 큰 흥미를 나타냈다.